삼상 19:18-24 (신이 임하는 장소)
삼상 19:18-24 (신이 임하는 장소)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사무엘상 19장18-24절
제목 : 신이 임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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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5-24 15:09
신이 임하는 장소
2009년 5월 24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19:18-24
(삼상 19:18, 개역)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삼상 19:19, 개역)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삼상 19:20, 개역)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삼상 19:21, 개역)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고로 사울이 세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삼상 19:22, 개역)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삼상 19:23, 개역)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삼상 19:24, 개역)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친 그 장소에는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무엘과 함께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선지자 무리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무엘 집단에 다윗이 합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이질적인 무리가 그 곳에 당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윗을 잡으려 온 사울의 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해야 국가적으로 엄정하고도 신속하게 처리할 행정적 법 집행이 있었습니다. 사울왕을 명령대로 집행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국가란 종교보다 더 높은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라가 있고 종교가 있는 겁니다. 나라가 없으면 종교도 없습니다. 그들 눈에 종교 노름 따위는 그저 오락일 뿐이었습니다. 시간보내기 주관적인 자아도취 행사에 불과하다고 간주될 뿐입니다.
객관적인 법집행을 가로 막을 그 어떤 영적 기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다윗을 잡으려 온 것입니다. 그들 눈에는 다윗이란 그저 지명 수배자일 뿐입니다. 우주의 비밀과도 연관없이 보이고 더구나 자신의 존재와도 연관없어 보입니다. 종교라고 해서 법 집행에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칼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관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로서 법 집행은 허구에 해당되는 일임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사자들은 가상과 허상을 거꾸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실과 비현실을 거꾸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과 함께 있던 선지자 무리들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궁극적 힘이 쏟아지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구상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주도권이 바로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예언의 말씀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사자들이 하나님의 신을 받아 예언자의 무리에 합세되므로서 그들의 사울의 종이 아니라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의 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현실이요 실제 세계입니다. 세상에서는 신의 영역마저 인간들의 지성 속으로 포함시켜 붙잡아 버리려고 시도합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최종적으로 군림자로 행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시도나 행동이 바로 인간 나라의 절대성에 있습니다. 이는 곧 자아를 신격화 시키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면 창세기 2장에서의 인간은 벌거벗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었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문제 삼지를 않았습니다. 도리어 옷 입고 나타난 창세지 3장의 경우가 이미 인간이 비정상적 상태로 있음으로 정착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사울왕이 벌거벗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지난 간 과거를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지속적으로 과거 미래를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분명히 거기에는 옆에 강도 두 명만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성령 안에 있으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박혀 있는 현실을 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이런 세계는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에 의해서 통제받게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들은 그들이 믿고 싶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다윗 때문입니다. 다윗을 따라오다 보니까 이런 낯선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품고 있을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이 겨냥하는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즉 사울의 신하들은 다윗을 통해서 이 세상의 중심점에 접촉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의미가 쏟아지는 그 진앙지에 그들이 들어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세계에서 모든 인간은 무장해제 당합니다. 벌거벗게 됩니다. 곧 신 앞에서는 자신의 본질이 드러내게 됩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지금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골로서 지금의 자신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는 그것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죄는 죄대로 어두움은 어두움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3:20-21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꾸려고 나가는 인생이란 것은 하나님의 신 앞에서는 다 소용없는 몸부림에 해당됩니다. 그냥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드러날 뿐이요, 빛에 속한 사람은 빛에 속한 사실이 드러날 뿐입니다. 마태복음 26:52에 보면, 베드로가 칼을 쓰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당부하십니다. “칼을 도로 집어넣어라. 칼로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느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죄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광야의 시절로 돌아가면 거기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 하에 움직였던 때였습니다. 인간의 수단이 소용없는 세계, 자기 계획을 인정받지도 못하는 영역, 그 영역을 지금 하나님께서는 예언대로 다윗을 통해서 실시하시려고 한 겁니다.
민수기 11:28-29에 보면,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처음 인간이 어떤 자리였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다윗처럼 지속적으로 악마로부터 밀어붙임을 당해봐야 합니다. 인간들이 법을 내세우지만 그 배후에는 자신의 자존심과 절대오기가 버티고 있습니다. 자기가 구상한 세계가 허무하게 될까봐 겁내고 있는 겁니다. 사울이 위대한 선지자라고 언급되는 것은 실은 사울을 놀리고 모독하기 위한 백성들의 우스개 소리입니다.
누구보다도 영적 세계에 대해 반대편에 서 있다고 자처한 사울, 아니 결국 정반대 쪽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사울이 막상 신의 영역에 들어서보니 ‘정반대’라는 그 가치마저 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다윗이나 사울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세상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체면을 위한 인생을 살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늘 벌거벗은 채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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