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강의 2006년 12월 08일(고린도후서 1강) 2/3
안산강의 2006년 12월 08일(고린도후서 1강) 2/3
이름 : 조현창(IP:221.151.109.169)
아 이거 너무 조용하니까 이상하다^^, 조용하니까 내가 뭘 잘 못 했나 ^^ 넓은 길 좁은 길에서 이미 선택은 규정되었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했죠. 산상설교 이렇게 한 것이 요한복음에서 뭐라 되어있죠? 요한복음에서 ‘끝가지 사랑’ 하죠. 그러면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좁은 길/넓은 길을 제시한 예수님이 자기 뜻을 이루시는데, 우리는 못 이루니까, 사랑으로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로 가도록 인도해 주는데, 그것이 뭐냐? 사랑이란 말이죠.
이 사랑의 내용을 우리가 채우는 것이 아니고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해 주심,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봐요. 없잖아요. 이제 성경이 뚧힙니까? 성경 강의할 때마다 뚧힙니까? 강의 한 두 번 하는게 아닌데. 이제 성경 전체가 이게 두뇌를 통과하듯이 뭔가 뚧히죠. 아~ ‘주님의 뜻, 주님의 사랑’ 하는 게 우리가 만든 사랑, 우리가 만든 소망 믿음이 아니구나. 일방적으로 뜻을 제시해 놓고, 그 뜻만 이루어 나가는 그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주님을 믿을 수도 없고, 주님을 바라지도 않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 주의 뜻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안 사랑하는데 주님이 날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구원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세상에 그런 믿음이 어떻게 그런 믿음이 생겨 날 수 있겠어요. 참 이게 축복이 아니면 그런 믿음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정말 그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렇게 했어요. ‘믿음이란, 나를 믿지 않는 것을 믿음이다.’ 라고 했어요.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힘든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은 힘들지 않아요, 예수 믿는 나를 안 믿어야 한다는 것이 힘들어요. 너무 빨리 했나요? 적어 봅시다. 신앙생활이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나를 ale지 않는 것, 이것이 제일 힘들어요.
예수 믿는 나를 안 믿어야 예수 믿는 것이 되요. 예수 믿는 나를 믿으면 내가 믿음의 대상이 되요. 그래서 누가 나보고 ‘예수 믿습니까? ’ 할 때 나는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하실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주께서 아시나이다.’ 누가 얘기했어요? 베드로가 얘기했지요. 주께서 아시나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아시나이다.
자 한 번 외워봅시다.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온다고요? 첫 번째는 밀려오고, 두 번째는 우리가 대처할 수 없고, 대처할 수 없으니까 세 번째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게 되고 네 번째를 보텐다면 이로서 우리는 나의 사람이 아니고 누구의 사람? 주님이 가지고 노시는 주님께서 뜻을 이루시는 도구의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해요. 새로운 피조물이 못 된 사람은 자기를 믿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쳐들어 온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사람이, 주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번지 점프 해봤습니까? 번지점프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체험입니다.
좀 더 이야기해 보면, 밀려오고, 대처할 수 없고, 수용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했을 때, 그러면 5번째로 밀려온 하나님의 뜻이 기적들인데 이 기적들 중에서 최고의 기적이 뭘까요? 요나의 기적입니다. 요나의 기적이 뭡니까? 요나가 물고기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는 거지요. 그러면 최고의 기적이 뭡니까?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최고의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죠. 그러면 무슨 기적입니까? 십자가죠. 그 죠?
자 십자가를 여기 5번째에 넣어봅시다. 첫 번째 밀려온다, 대처할 수 없다,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주의 사람이다. 이제 주의 사람이기 때문에 내 안에 무엇을 집어넣는다? 아까 이야기한 주님의 뜻, 뭡니까? 십자가. 십자가를 우리에게 집어넣어버립니다.
십자가를 집어넣어 버렸다는 것은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누구를 죽이는 십자가입니까? 나를 죽이는 십자가죠. 그것이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봅시다.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넘치죠. 여러분 댐이 있는데 댐이 원래 잘 안 넘칩니다. 넘치면 밑에 주민들 위험하니까, 그런데 댐에 물이 넘쳐보세요. 야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죠. 댐을 왜 세웁니까? 댐 믿고 물이 안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 세우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왜 믿어요? 모든 환란과 모든 고생은 예수님이 댐처럼 다 지켜주고 우리는 평안하게 살고 싶어 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댐에 물이 넘쳐버리면 이 댐을 쌓아 놓은 의의와 취지가 없죠. 댐은 물이 안 넘치도록 쌓아 놓은 거니까. 그런데, 이것은 우리 생각이고,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고난이 넘치도록, 물=예수님의 고난이죠. 예수님의 고난은 세자로 이야기 하면 뭐죠? 십자가죠.
십자가가 넘쳐서 이제 누구의 십자가? 나의 십자가로 쳐들어 오는 겁니다. 왜? 이 네 번째에 의해서. 다시합니다. 밀려온다, 대처할 수 없다,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에 네 번째 뭡니까? 주의 사람. 우리가 주의 사람이니까 내 속에 내 것은 빠지고 내 속에 무엇이 들어 옵니까? 주의 것이 들어오는데, 무엇이 들어오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는데 십자가 고난이 환란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린다 이 말이죠.
그러니 댐 밑에 있던 주민들은 ‘왜 우리는 날 벼락이냐, 우리는 예수 믿다가 파멸했다’ 할 때에, 자 한 번 보세요. 댐이 이렇게 안 넘어 올 때에는 ‘참 예수님 고마워 역시 예수님덕분에 이런 큰 축복이 있었구나’하고 평온하게 살죠. 돈도 되고 건강되고 인물되고 자식 새근새근 잠도 잘 자고 아무 문제없이 괜찮았거든요. 이럴 때 우리에게 위로가 뭡니까? 주님 덕분에 이 세상에서 내가 편안히 사는구나 하는 위로죠.
그 위로가 무슨 위로냐 하면 주님의 위로가 아니고 세상 것이 안 빼앗겼다는 것,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세상적인 안도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댐 밑에 고난이 우리에게 넘쳐버리면 이것이(세상것이) 다 깨지니까 이 때의 위로는 뭡니까? 5절 다시보면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의 위로도 누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핑계대면서 사실은 세상적인 돈 가지고 위로받던 그 시절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제는 뭐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받는 ‘그래 세상 끝내자 그래도 주님 계시니까,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이 날아오는구나 그래 맞자, 여기 맞고 저기 맞고 다 얻어 맞고 죽자’ 그래도 위로 받는 것은 무엇 때문에 있다?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스데반 집사야 올라 오너라 하신 그리스도의 위로 때문에, ‘죽는다’는 그런 고난도 위로로서 거뜬히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는 어떤 경우에만 생기느냐 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환란이 있어야만 비로소 발생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이 없으면 절대로 발생될 수 없는 위로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입니다.
지금 목사님 아이들이 3명이잖아요. 애 셋이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하나는 의사, 하나는 변호사, 하나는 행정고시 합격해서 고급 공무원... 셋이 다 (잘?) 되었을 때, 그 목사님 부부가 통곡하면서 ‘주여, 어서 여기를 떠나야 할 텐데. 애들이 저렇게 판사, 의사, 행정고시 패스가 되었을 때, 참 저들이 믿음이 생기겠느냐?’ 이렇게 통곡하는 부부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
그 거 인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큰 애 사고쳐서 교도소 벌써 3개월째, 둘째 애 귀엽다고 또 낳았더니 문제 생겨, 셋째 왕따 당해서 얻어 맞고 가출한 지 벌써 나흘 째 되었다, 이럴 때 뭡니까? 이럴 때.... 뭘 바라보겠어요. 주를 바라보지요. 이 이야기하니까 벌써 사모님 인상이 확 펴지네요.^^ 좁은 길이라니까요. 강의했잖아요. 좁은 길. 좁은 길.
사람들이 교회 왜 옵니까. 든든한 댐 믿고 오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댐은 무엇을 위한 댐이다? 지금까지 내가 원하던 욕망, 그 욕망을 주께서 지켜달라고 오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십자가...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해놓고 십자가는 이제 그만 끝이길 원해요. 예수 믿기 전까지만 십자가이고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다 십자가 건너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 때부터는 이제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거예요. 착하게 살면 산 만큼 복 받고, 나쁘게 살면 복을 덜 받고.
이것을 원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방종교, 악마들이 그렇게 하죠. 한국교회 전체가 그러니까. 교회 예배당에다 서울대 명문대 들어갔다고 붙여 놓는 거예요. 주님이 댐이 되어서 벌써 사법고시 몇 명이 합격되었다고.
그런데 사도바울을 보세요.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했죠. 사도바울은 마귀도 인정한 사람이라고 했죠.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으니까. 그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기를, 주님의 십자가가 넘쳐서 내게 임한 것은 이 사도바울 일행으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게 하려 함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이지 않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있죠.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소망을 소망으로 삼으신다면, 그 소망으로 인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싫어하게 되고 미워하게 됩니다. ‘왜 나의 이 소박한 소망마저 주께서 시비거십니까?’ ‘그러시려면 가세요. 난 이제 예수하고 안 논다’ ‘이런 욕심 없는 요정도 소망도 허락 안 해? 아~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티격태격 싸우게 되어 있어요.
자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환란이 이렇게 들어와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받은 이런 경우를 우리가 요청한다고 올까요? 안 옵니다. 이것은 요청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요청하든 안하든 간에 여기에서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2.5초. 24시간 중에서 2.5초. 이렇게 오게되어 있어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위로는 이렇게 짧아요. 어떤 사람은 한 달에 2.5초라는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이고 이 더러운 세상 떠나면 그만이지’ 이렇게 그게... 체념이 아니라 기쁨으로... 아~ 주님 계시는데 내가 왜 걱정해. 이것이 그냥 체념이요 허무주의가 아니라 정말 기다려 질 정도로 이렇게 반짝 떠 오를 때는 이것은 내 능력 말고 다른 능력이 나를 지금 완전히 주무르고 계시다는 뜻으로 보면 되요. 내가 나올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나를 지금 완전히 덮치고 있구나.
이번에 아시안 게임에서 승마하던 사람, 기수가 말을 타는 데, 그 장면을 내가 봤거든요, 기수가 먼저 떨어지고 그 위에 엄청난 무게의 말이 떨어져 덮쳐서 기수가 죽어버렸죠. 그것처럼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완전히 매일 박살나 버립니다. 찌그러진다고요, 아주 무거운 걸로.
그 걸 느끼는 순간이 잠시지만, ‘아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모든 것을 장악하고 계시구나.’ 내가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주님을 심하게 욕할지라도 욕한다고 해서 나를 놔주는게 아니고, 욕을 하든 뭐하든 간에 온 갖 욕 다해도 주께서는 나를 안 놔주는 거예요. 그 걸 느낄 때가 있어요. 그 것은 불신자 지옥 갈 사람에게는 절대로 못 느낍니다.
불신자를 반대입니다. 그저 자기에게 완벽, 철저해야 되고,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와 징벌이 들어오기 때문에 자기만 손해이기 때문에 저주와 징벌이 안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요.
그냥 펑퍼짐하게 살지 않습니다. 예민하게 살아요. 이것은 죄야, 죄 아니야, 이것은 죄야, 죄 아니야. ... 이렇게 하는데... 그것은 신자들도 평생 그렇게 살아요. 하지만 그런 것 하고 진짜 하나님하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불과 몇 초 사이에 ‘아~ 상관없구나. 사랑이구나. 내가 사랑을 놓치고 그 대신 다른 것, 행함으로 다가 섰구나. 이게 바로 죄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이 성도에게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이제 곧 이해 되었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 된 나 바울은 어떻게 한다고요? 댐이 넘쳐서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넘쳐서 나에게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어떻게 한다고요? 왜 이랬습니까? 가 아니라 ‘환란 가운데 그리스도의 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는 그런 생활을 저희들은 하고 있습니다’, 라고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본토 아비집에서 떠나게 하시듯이 지금 이 고린도후서에서는 누구를 작용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 일행을 지금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8절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그 다음에 무슨 소망까지 했습니까?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참, 이 살 소망까지 끊어버리신 분이 누구라고요? 바로 밀려오는 하나님의 뜻이다 말이죠.
사람이 여러분들이 버스 탓는데 의자도 없고 붙들 것도 없는 버스를 상상해 보세요. 그런데 비포장 산길을 덜컹덜컹 달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서 있지를 못하고 일어섰다하면 자빠지고 일어섰다하면 엎어지고 아예 누워있는 것이 최고 좋겠지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광야입니다.
광야의 특징은 잡을 게 없어요. 뭔가 잡을 게 없다고. 이 말처럼 살 소망이 없는 겁니다. 아까 처음 강의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몰아넣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죠. 그래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뭘 생각하라? 뒤에 광야를 생각하라. 처음 강의할 때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우리 조상님들이 생각한 조물주로 생각하지 말고 전능하신, 자비로우신...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구약의 역사를 실제로 이끄신 그 하나님이 동일한 뜻으로 우리에게 밀려오고 있다.
그러면 광야를 생각한다면 광야는 잡을 것이 없는 버스 속. 돌 밭에 덜컹이면 이리 자빠지고 저리 업어지고...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광야라는 것은 도무지 붙잡는 족족 다 삭제해 버려요. 물이다 하면 물 없고, 양식이다 하면 양식 안주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는데 그 인도하는 족족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고,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하고. 이것은 애굽에서 살던 가락을 가지고는 도저히 버티지 못하는 거죠.
그걸 가지고 여기 고린도후서 1장 8절에서는 표현을 어떻게 했다고요?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누가 끊어지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끊게 했습니다. 왜 끊게 했습니까? 댐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뭡니까? 예수님은 번지 점프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아버지 뜻에 자기 목숨을 그냥 던져 버리죠. 창공을 향하여 날은거죠. 번지 점프야 뒤에 밧줄이 있죠. 주님은 밧줄도 없어요.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붕 날라버린 거죠. 붕 날라보니까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잖아요.
이게 붕 나는 걸 믿음이라 합니다. 우리 믿음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가졌던 그 믿음을 우리에게 새로 공급받아야 우리는 그 믿음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은요 나를 믿는 믿음이기 때문에 이것은 천국가는데 부도 수표라, 쫙쫙 찢어버립니다. 믿음 있습니다. 뮏쑵니다!. 에이 찢어버려라.
예수님이 주신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관계, 예수님께서 지상에 살면서 아버지를 믿었던 그 믿음이 오게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밧줄없이 창공에 날아간 것처럼 주의 뜻에 목숨걸고 바친 것처럼, 지금 사도바울에게도 살 소망을 끊어버렸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빅딜(big deal)이죠 ^^. 큰 거래입니다. 거래. 큰 거래, 엄청난 거래예요. 이것은 도박 중에도 이런 도박이 없습니다. 타짜도 이렇게 못합니다. 세상에 어디 자기 목숨 걸고 도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마누라 걸고는 하지만 자기 목숨 걸고 안한다. 마누라 걸고야 요즘 남자들 다 하죠. 안그래도 마누라 버리고 싶었는데. 잘 됐다^^ 마누라 걸고 자기 목숨까지 걸라고 하면 안 걸잖아요.
목숨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어느 누구도 자기 목숨 걸고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한다? 밀려온다 - 주의 사랑으로 하여금 요한1서 주의 사랑을 안다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다.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된다는 말은 우리 힘으로 안되면 어떻게 됩니까 묻지 마세요. 우리 힘으로 안되면 안되는 게지. 우리 힘으로 안되는데 어떻게 할까요 묻지 마세요.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하실 거예요.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어쨌든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나중에 되거든 주께서 하셨다고 해야지 내 힘으로 했다고 하지 마세요. ‘주께서 하십니다‘를 알았기 때문에 했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사기입니다. 주께서 하심을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주께서 알아서 하셔요.
아, 이거는 어려운 말인데 쉽게 예를 들면, 교회에 갈 시간인데 농땡이 부려서 집에서 자고 있었다. 아니면 TV 연속극 보고 있었다. 재방송을 봤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재방송 보는 것도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십니다. 그렇잖아요. 교회에 가는 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고 교회안가고 집에서 연속극 보는 것은 내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요. 그것도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러면 뭐가 믿음이냐. 그러면 교회 가지 말고 연속극 보면 되겠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뭘 못하느냐, 연속극 보는 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는 믿음은 이것은 아무나 믿는 게 아니예요. 아, 말을 너무 꼬아가지고 무슨 말인지... ^^
그런 믿음이 24시간 생기는 것이 아니고 진짜로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니까요. 진짜로. 이론상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그러니까 교회 안가고 집에 있다고 해서 벌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주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 주께서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구나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교회 가고 싶은 때가 있어요. 교회 가고 싶어서 교회 가는 것, 자기 뜻입니다.^^ 주의 뜻이 아니예요. 그래서 교회 가보니까 자기는 자기가 가고 싶어서 교회 온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주께서 오게해서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렇게 믿어진다는 거. 그게 놀라운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