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강의 2006년 12월 08일(고린도후서 1강) 1/3
안산강의 2006년 12월 08일(고린도후서 1강) 1/3
이름 : 조현창(IP:221.151.109.169)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을 다 했고, 이 시간부터는 고린도후서에 대해서 해 봅시다.
고린도후서 1장 1절에 보면,
(고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라고 되어있거든요. 이것부터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고 일단 하면, 항상 뒤에 무엇을 염두해 두어야 해요. 뭘 염두해 두냐하면 ‘창조 하신 분’. 세상을 창조하신 분, 물론 나도 포함해서 여러분도 포함해서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라 할 때는 ‘창조하신 분’을 생각하면서 이 구약 전체, 구약 창세기 1장부터 구약 전체를 염두해 둔 ‘하나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보통 한국 사람들이 ‘하나님’ 하면, 구약성경을 생각 안하고 옛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그 하나님 있잖아요, 성황당 짓고 고목에 빌고 그냥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신적인 것, 그것을 바로 연결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로 그러시면 안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라 할 때는 구약성경 전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해요. 그 하나님 말고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지금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공부할 때), 성경이 있는데 그 도중에 고린도후서를 취급하기 때문에, (원래는) 창세기 1장부터 해서 이렇게 수평으로 고린도후서로 접근해 나아가야 할 텐데, 우리는 창세기를 다 안다 생각하니까 고린도후서로 바로 직접 뛰어들기 때문에... 여기 하나님이란 개념은 항상 창세기 전체,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다 끌고 가셔서 (결국 하나님이란) 뜻이 무슨 뜻이냐 이렇게 만나야 됩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엎어질 때 ‘어이쿠,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할 때,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본적인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구약성경을 가지고 이끄시고 실제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내리시고 그 약속한 대로 이루시는 자기의 뜻, 그 뜻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중간에 취소가 없어요.
취소라든지, 일을 그만 안 하신다든지, 실패라든지, 중간에 휴식이라든지 이런 것도 없이, 창세전에서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으로 계속 뜻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지고 있는 겁니다. 화초에 물을 주는데, 물을 주었다가 안 주었다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물을 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물론 우리는 그 뜻에 대해 관심도 없어요.
그냥 애나 키우고 하지, 하나님이 줄줄줄 물 새듯이 주시는 그 뜻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직장생활하고 차 몰고 다니고, 우리의 생업에 종사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더라도 하나님의 이 뜻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관심 없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똑같이 그 뜻이 한번도 취소하거나 실패하거나 중지하거나 포기하시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이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계속 주어지는데... 저는 그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약간 좋아지는데, 어떤 경우냐 하면 여러분, 좁은 길과 넒은 길 비유 아시죠?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수님께서 좁은 길과 넓은 길을 이야기했다는 말은 무엇이냐 하면, 좁은 길도 아니고 넓은 길도 아닌 제3의 길이 있을까요?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모호한 것이 아니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그러면, 아~휴 모호하다고, 하나님의 뜻이 너무 많아서 어느 것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아예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안 두기로 했다고 하거든요. 하나님의 뜻이 너무 크고 범위가 넓으니까 너무 많다는 이유 때문에 그만 하나님 생각을 하는 것 조차 버거워서 하나님 생각을 안 하고 싶은 거죠. 하나님 생각 안하면 뭐하냐. 그냥 내 생각만 하면서...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한달 내내, 내 생각만 하는 거예요. 내 생각 만.
왜? 하나님의 뜻이 너무 잡히지가 않으니까... 너무 허망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배운 것은 있어서 ‘만사가 하나님 뜻이다’ 그 정도는 아는데, ‘만사가 하나님 뜻이다’라는게 너무 흐리멍텅 하잖아요 이게. 손에 안 잡히잖아요. 만사가 하나님 뜻이다 말이죠. 그러면 내가 이 물건을 내가 살까 말까 이것도 (하나님) 뜻이겠네, 안 사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사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그러면 내가 맘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 되잖아요. 뭘 해도 하나님 뜻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나는 내 맘대로 살고... 하나님은 하나님 맘대로 하고... 그러면 잘 됐다, 둘 다 자기 맘대로 살면 그만이겠네.
그래놓고, 내 맘대로 살아 놓고 하나님 뜻대로 살았다 하기도 뭐하고,,, 양심에 좀 그르치고요. 뭔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흐릿해 보이는 데, 그것이 하나의 구체적으로 구현한다. (구현이라는 어려운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뜻이 이 지상에 한 초점으로 좀 모아지는, 모아져서 이렇게 딱 ‘비타골드500’이 손에 쥐어지듯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손에 잡히면 참 좋겠어요.
여기 저기 너무 허황되게 벌려 놓지 말고. 요것이 하나님 뜻이다. 애가 아픈데 병원에 갈까 아니면 약국에 약이나 사 먹을까... 주여 하나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맨 날 내가 당황스러울 때는 묻잖아요. 그런데, 이거다! 하고 손에 잡혀버리면, 그런 고민도 안 해도 된다 말이죠.
예수님께서, 말씀 중에서... 제가 지금 좁은 길, 넓은 길 하는 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하나님 뜻을) 너무 모호해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 좁은길 넓은길 뿐만 아니라 모든 주의 뜻이 모호하지를 않아요. 모호하지를 않은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혼자 괜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너무 넓기 때문에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것이 편하다, 이렇게 자기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이천수가 골 넣고 기도하고, 송종국이 골 넣고 기도하고 축구선수 박주영이 골 넣고 기도할 때, 교회다니는 청년들은 그것에 호응을 해요. 아~ 주께서 한 골 또 넣어 주셨구나. 그런데 박주영이가 누가봐도 쉽게 차 넣을 수 있는 공을 골대를 맞춘다는지 못 찼을 때, 그 때 박주영이는 죄인되어 버리죠. 왜? 아까 골 넣을 때 기도했잖아요. 골 넣는 것이 뜻인데, 골 쉽게 넣을 수 있는 것을 못 넣었으니까 박주영이는 하나님의 뜻을 위배한 사람이 되죠.
맞지요? 그런데 평소에 박주영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지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라 하면 기도하기 싫고... 교회가라면 교회가기 싫으면서... 교회 안 가면 죄인되는데, 라는 생각은 또 갖고 있는 거예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거예요.
분명히 하라 하면, 하나님의 뜻인 줄은 알겠는데 맘대로 안 되네,,, 이러거든요. 하나님의 뜻은...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부터 잘 못 되었어요. 내 마음대로 되는 뜻은 내 뜻이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안 해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알아서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괜히 내가 뜻대로 이룬다고 설치지 마세요.
일도 안되는 것을 괜히 협조한다고 달려들지 말자는 겁니다. 저런 아이가 설거지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줄 모르면서 엄마가 설거지 한다면 자기도 설거지 한다고 달려드는 거예요. 일도 설거지도 못하고 그릇이나 깨 놓고 그거 치운다고 바쁘고. 특히 여자 애들 5,6살 되면 요리한다고 해놓고 소금 듬뿍 넣어가지고 비싼 재료해가지고 먹지도 못하고 음식 쓰레기 통에 넣고. 일 하지도 못하면서... 그런데 아이 입장에서는 내가 엄마 일을 안 도와주면 내가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도와줘야 한다는 거예요.
꼭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그 모습이 그 모습이예요. 본인보고 하나님 뜻대로 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못한다고 하고, 그러면서 하나님 뜻대로 협조한다고 하면 엉망진창으로 다 만들어 놓고.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건데.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긴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믿기만 해도, 세상에 그 것보다 더 큰 협조가 없어요. 세살 네 살 먹은 아이가 설거지 하려고 덤벼들지 말고, ‘엄마, 설거지는 엄마가 제일 잘해’ 이렇게 가만히 협조해 주는 것이 엄마를 도와주는 겁니다. 집사님 그렇지 않습니까? 애들이 있지만 애들이 도와준다면서 일 저지를 때가 많지요? 그저 엄마가 잘 해요, 그렇게 믿어주는 것을 뭐라고요? 그게 믿음 아닙니까! (제가 벌써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뭔데요 믿음이. 내가 하나님 뜻대로 안 한다고 미안해하는 것이 믿음입니까? 그건 아니예요. 그것은 건방짐이지 그게 무슨 믿음이예요. 믿음은 내가 나설 입장이 못 된단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것도 천당가는 것도 내가 나설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왜 자꾸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요, 왜 자꾸. 그릇이나 다 깨놓고 저질로 놓고, 또 자기 힘대로 안되니까 또 안 된다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다시 이야기할께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을 누구에게 맡긴 적이 없어요. 뻔히 우리 실력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딴 짓하고 관심도 없고 우리가 하로 종일 24시간 내 생각만 할 때도 하나님의 뜻은 꾸준하게 하늘에서 물 뿌리듯이 계속 뿌려 주는 거예요.
어제 여기 비 왔었습니까? 조금 왔죠. 비 조금 올 때 누가 오라했습니까? 아니잖아죠. 강원도에 태풍 올 때, 사람들이 강원도 공무원에게 비난할 수는 있어요. ‘왜 제방을 안 쌓았나?’ 할 수 있지만, ‘왜 우리 동네에 태풍이 오게 했습니까? 면장님’. 이런 소리는 못하잖아요. 그죠? 사람에게 들이닥치는 사건은 주의 뜻대로 들이 닥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잘 못 한 것이 있어서 이렇게 온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믿음이예요. 그게. 그동안 하나님하고 농담, 장난친 거지요. 그것이 하나님 뜻이 될 수가 없어요.
다시 할께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오라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물뿌리듯이 머리와 어깨 위에 그냥 쏟아집니다. 강원도에 태풍 오듯이. 누가 태풍오라고 했어요? 데모했습니까? 그냥 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밀려 옵니다. 저 끝에서 먹구름 몰려오듯이 몰려 와요. 밀려오고 우리는 그것에 대처할 수도 없어요. 밀려오고 대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두 자로 뭐라고요? 이것이 믿음이잖아요.
대처할 수 없으면 어떻게 돼요. 수용하면 되지. 아니 뭐가 어려워요. 밀려옵니다. 대처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영접합니다. 주의 뜻을 내 가정위에 내 인생에 주의 뜻을 영접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신앙생활 아닙니까. 뭐가 어려워요. 전혀 어려운 것 없잖아요.
아브라함이 자기가 자기 고향집을 떠나리라 했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강의 다시 해볼께요. 여기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이죠. 창세기보니까 아브라함 나오고, 이삭 나오고, 야곱 나오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과 아브라함, 하나님과 이삭,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오고 갔는가, 그것을 파악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죠.
간단하잖아요.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집을 떠나려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자기는 떠날 맘이 없었어요. 그런데 찾아오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집안 다 버리고 가족 몇 명만 달랑데리고 그곳을 떠나야 했죠.
이것을 적어보면, 1)밀려오다 2)대처할 수 없다 3)수용하자, 수용하면 그 다음부터 내 인생은 누구 인생 되죠?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안되죠. 주님의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런데 불신자는 밀려오는 것도 모르고, 대처할 수도 있다는 것도 모르고, 수용 할 줄도 모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데, 뜻은 모르니까 지옥가는 것이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지옥가고 있다 말이죠.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 집에 그냥 있으려 해도 있을 수 없어요. 밀어 내 버립니다. .밀리는 거죠. 바닷가에 있는데 아무리 헤엄치고 싶어도 파도가 크게 오면 물결의 힘에 밀릴 수 밖에 없어요. 여러분들이 여러분 가정에 태어날 때 내가 이렇게 태어날 거라고 부모한테 견적 낸 적 있습니까? 부모님 내 눈에 쌍커플 해 주시고, 키 몇 센티 해 주시고, 내가 IQ 얼마되게 해주시고... 그렇게 견적낸 적 있습니까? 그렇게 협의해서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아니라 이 말이죠.
그냥 튀어나와 보니까 요 모양 요런 식으로 태어난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는 얼마나 가난한지 가난에 대해서는 남에게 안 지는 분.(^^) 돈 많기로 남에게 안 지는 분이 아니고 가난하기로 남에게 절대 지지 않는 분. 또 하나, 성격은 좋은가? 성격 하나는 또 남한테 안 지는 분. 술은 어떤가요? 술고래. 놀음 여러 가지. 이게 우리가 견적 냈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그 아버지에게 순종하잖아요. 단지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있다는 것 때문에 순종 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사야서에 보면, 나귀도 제 주인을 알고 소도 자기 외양간을 알건만 ,어떻게 이 놈의 백성들은 제 애비 모르느냐. 이렇게 말하거든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애비를 알라는 뜻이 아니고 지금 알든지 모르든지 일은 벌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일은. 아브라함을 봐라 이삭을 봐라 이미 일은 개시가 된 겁니다. 우리가 거부하고 싶고, 눈 감고 안되요 난 안 봤다, 아무리 손으로 가려도 내 밖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내가 잊으려 잊으려해도 십자가는 이미 벌어진 사건이예요. 그 곳에서 피 흘린 것은 이미 피 흘린 것이고, 피 흘린 분이 사흘만에 부활 한 것은 내가 부인하고 싶더라도 부인될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예요. 마치 이순신 장군이 죽었듯이 예수님이 부활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냥 지식으로 알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그 분께서 지금도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지금도 지속적으로 지금 나를 떠밀고 있다는 거예요. 내 가슴팍을 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집을 떠났다, 에이구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가 지금 주님에게 떠밀리고 있어요. 본토 아비집을 떠났다는 말은 우리도 지금 고향이 안산인데 저 광주로 갔다, 그런 뜻이 아니고, 사람을(하나님의 백성을) 자기가 있고 싶은데 못 있게 한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못 가게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내가 원하는 인생은 놀랍게도 좁은 길, 넓은 길 중에서 어느 쪽 길이겠어요? 넓은 길이기 때문에, 내가 멸망의 길로 가도록 우리 아버지께서 방치를 안 해요. 방치하면 그것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방치 안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예요. 우리가 넓은 길로 가도록 방치 안하시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날마다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거예요. 뭐, 한달에 한 번이지만.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넓은 길을 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인간치고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느 인간치고 친구가 하나 둘 떠나는 것을 누가 좋아합니까? 어떤 여자치고 결혼해놓고 신앙 때문에 남편과 이혼 갈라서고... 이런 것은 원래 의도하지도 않고 그러기도 싫죠. 차라리 남편이 갑자기 은혜 받아가지고 신앙생활 잘하고 협조해 주는 것을 원하지 교회가지 말라고 핍박하는 그런 남편을 누가 원하겠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 한 것을 간단히 하면, 나는 넓은 길로 가고 싶은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밀어내는 데 어떤 식이냐? 넓은 길에서 좁은 길로, 좁은 길로... 좁은 길로 자꾸 밀어 내는데 그걸 내가 대처할 수 없고, 그럼 그걸 수용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 걸 두자로 뭐라 한다고요?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내가 이만큼 훌륭했습니다”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못났는데 하~ 그 분이 자꾸 나를 밀어 내내. 아~유 나를 못 살게 굴어, 나를. 나는 하나님께 삐지기도 잘하고 , 하나님께 두 번 다시 안 본다고 외면하기를 한두 번도 아니고, 하나님 욕한 것도 한두 번도 아닌데도, (베드로보세요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그분께서 아~주 끈질기시네. 그 분이 끈질겨. 그 분이 나를 떠나지 않네. 그 분이 나를 놓칠 않네. 그냥 놔두질 않네.
하여튼 그 분 때문에 못 살겠어, 그만. 그러한 실감. 하나님이 나를 놓지 않는다는 그러한 실감성.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 개념으로 표현이 안됩니다. 그걸 한 마디로 뭐냐? 믿음, 소망, 사랑이예요.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합니다. 그냥 사랑이죠. 사랑.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구나. 어떻게? 끝까지.
자 오랜만에 성경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여러분들이 요한복음을 했다고 해서 제가 요한복음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 요한복음 했어도 다시 되풀이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세상에 자기 사람들이 있어요. 따로 있는데,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한다고 되어 있죠? 제가 강의 처음에 무어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모호하다고요? 허황되다고요? 너무 많다고요?
간단하잖아요. 무엇입니까? 이렇게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어떻게 사랑한다? 끝까지 사랑한다. 심지어 우리가 버리고 도망칠지라도 끝까지 따라온다. 심지어 우리가 천리만리 (도망)가더라도 끝까지 따라온다. 그러니까 사랑해도, 사랑을 외면해도 끝까지 사랑하신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조차 내가 안 믿으려 해도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잖아요.
이것이 뜻 아닙니까. 어려워요? 우리는 하나님을 포기했는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 사랑, 너한테 있느냐? 이레 묻지요. 그 사랑이 너에게 있느냐.
여기서는 고차원적인 신학적 용어도 없고 신학적 철학적 개념도 필요없고 그냥 느낀대로 마음에 필(feel) 닿는대로... 사랑이예요 사랑. “아~ 정말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는군요. 이쯤하면 저 같은 인간은 아예 포기하시죠. 저는 당체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하나님의 말씀 이거 영 취미에 안 맞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인간은 일찌감치 포기하세요.” 라고 했던 그 순간에도 “너는 포기해도 나는 포기 못한다”. “왜 그러십니까?”. “그게 내 뜻이다. 왜”.
그러면 “당신을 버리겠다는 내 뜻은?” “니 뜻은 아예 생각해 본적도 없다” 아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각하실 때 우리가 주님을 버린다 그 뜻도 하나님은 들은 척도 안 해요. “주님이여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것도 역시 안들어요. “주여 제가 이제부터는 십일조를 내고 전도를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그 것도 안들어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주님께서 얼마나 감사한지, 주께서 기도한 대로 응답안해 주시고 기도 한한 것만 응답하셔서 인도하시는 그 고마움. 사람이 자기가 아무리 챙겨도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다 챙겨서 기도해요.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서 진짜 중요한 것을 다 빠뜨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우리가 빠뜨린 것만 응답해가지고 그리고 응답받아 놓은 것을 보고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만약에 내가 응답될 것을 내가 사전에 기도해서 응답받았다면 그 응답은 은혜가 아니고 뭡니까? 내가 협조한 것이 되죠.
‘역시 역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내 기도 하나는 먹어준단말야‘ 하고 협조한 게 되지, ’이게 왠 은혜입니까!‘ 라는 말은 안나오게 되죠. 그죠. 역시 내가 잘 알아서 챙겼겼더니만 역시 주시는구먼. 그러니까 내가 요런 식으로 기도하면 또 응답하겠지... 이것은 은혜가 아니고, 100% 은혜가 아니고, 한 95%은혜고 5%는 자기가 협조한 것이 되잖아요.
주께서는 우리가 기도한 것 절대로 안 들어주고, 기도 안 한 것만 다 해가지고 응답하세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100% 은혜로 은혜로만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이 기도를 하는 것도 이렇게 가만히 분석해보면, 분석하기 위해서도 우리 목사님들 같은 경우 많이 공부해야 되는데, 분석해보면 어떤 기도를 해도 그 기도의 마지막 끝은 뭐냐 ‘그러니까 넓은 길로 한 번 가 보고 싶습니다’라는 것이 은연중에 욕망으로 그게 들어있어요.
어떤 기도든지 기도할 때 ‘좁을 길로 사서 가겠습니다’ 라는 기도는 안해요. 이제 머리는 이레 굴리죠. ‘주여, 좁은 길이 생명의 길이니 좁은 길로 가겠습니다’ 라고 말을 끄집어내지만, 설마 나를 고생시키겠나. ^^ 그런 되지도 않는 통밥을 굴리는데, 그거 안듣습니다. 안 듣고 어떻게해서든지 주님은 우리를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로,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할 때, 좁은 길/넓은 길, 이 두가지로 정했다는 말은 인간이 뜻을(자 중요한 겁니다), 인간이 뜻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진 뜻에 의해서 우리의 운명이 ‘내가 이런 운명에 속하는구나’라는 것을 결과적으로 파악케, 확인케 하는 방법입니다.
이 말이 좀 어려운데, 제가 말을 좀 어렵게 했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제가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것은 일체 안 들은 것으로 하시고, 하나님께서 먼저 뜻을 주시고 그 다음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가 아니고 ‘너는 이 쪽 편을 선택하도록 선택받은 자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좁은 길, 넓은 길... 제3의 길은 없습니다. 좁은 길, 넓은 길 두 가지 길밖에 없죠. 이것을 누가 제시했습니까? 제가 제시했습니까? 여러분이 제시했습니까? 누가 제시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제시한 거예요.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고. 예를들어 우리 같으면 좁은 길, 넓은 길 등등 몇 가지 길을 만들 겁니다. 만약 제가 토정비결 보는 사람이라면 좁은 길, 넓은 길 이렇게 2개 뿐만아니라 3개 4개 정하겠단 말이죠. 예를들면 (3번째) 좁은 길 말고 처음에 좁은 길에서 나중에 넓은 길이라든지, 4번째 처음에 넓은 길이고 나중에 좁은 길이라든지, 5번째 10년간 좁은 길 10년간 넓은 길이라든지, 이런 식으로해서 선택의 폭을 넓게 할 거란 말이죠. ‘골라 보라, 너의 선택에 의해 너의 운명이 결정된다’, 고 하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융통성은 일체 인정하지 않으시고 뭐라 하시냐면 좁은 길, 넓은 길이라고 딱 정해 놓고, 이렇게 정한 것도 우리에게 묻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정해 놓고, 그 다음에 ‘멸망의 길은 넓은 길이고 영생의 길은 좁은 길이다’. 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지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제시해요. 그러면 우리는 주심께서 선택하라 했는데, 주님께서 선택하라고 한 항목에 우리가 선택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개고기 못 먹고 오리고기도 못 먹는 거예요. 곱창도 못 먹고 순대도 못 먹어요. 자 그런데 회식을 했습니다. 회장이 말합니다. ‘자 (먹을 것을) 골라보세요 4가지 중에 한가지입니다. 순대, 곱창, 오리고기, 개고기... 뭐 먹으렵니까?’ ‘나, 집에 갈랍니다.’ 4가지 다 해당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난 해당되는 게 없는데...’ 하면, 회장이 ‘주는 대로 먹어라’ 이러거든요. 그러면 진작부터 주는 대로 먹어라 하든지...
기껏 한다는 말이, 뭘 선택했습니까? 해 놓고는 주인장이 ‘자 개고기로 통일!’. 지 마음대로 개고기로 통일해 버렸어요. 선택하라 해 놓고 개고기로 통일해 버렸어요. 이것은 처음부터 우리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옳은 길을 제시해도, 그 옳은 길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선택해 나갈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옳은 길 뿐만 아니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능력까지 우리에게 이렇게 마구잡이로 밀려오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