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울산 08년 3월 7일 강의 창세기 30장, 31장강의창세기

울산 08년 3월 7일 강의 창세기 30장, 31장

이름 : 관리자(IP:219.249.86.34)

080307 창세기 30장, 31장

관리자(IP:219.♡.86.34)

09-05-19 08:24

관리자(IP:219.♡.86.34)

09-05-19 08:25

울산080307a창세기30장
20080307a 울산강의-창세기 30장 이름 : 한윤범 2008-03-15 14:10:49

20080307a 울산강의-창세기 30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창세기 30장, 31장에 나오는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분가하는 그 대목에 대해서 30장 후반부터 31장까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하고 삼촌하고 붙여줬다고 떨어지게 하죠. 애초부터 떨어질 사람 같으면 처음부터 붙이질 말아야 될 텐데 하나님께서 붙여줬다가 떨어지게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이 창조주가 아니잖아요.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에 창조주 마음대로 사람을 활용하고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께서 우리 사람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의 자기가 갖고 있던 복안, 또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뜻 이런 것을 그런 붙였다가 떨어지는 그 과정 속에서 그걸 보여주려고 하는 거예요.

말로 하는 것보다 어려우니까 쉽게 생각하면, 호세아 6장 2절 찾아봅시다. 호세아가 어디 쯤 되느냐 하면, 호세아가 구약의 작은 선지서 들어가면 숲 풀 같아서 찾기 힘든데, 1261페이지. 6장 1절부터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래 돼있지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낫게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찢지를 말든지, 처음부터 싸매어 줄 것 같으면 아예 치질 마시든지 해야 될 텐데 치고 싸매어 주시고, 찢어버리고 낫게 하시고. 꼭 그렇게 하셔요.

예수님을 부활시킬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체포도 되지 않고 십자가도 안 죽도록 해야 될 텐데 십자가 죽게 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시키시고. 그것이 6장 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그 이틀, 삼일이라는 텀 있잖아요. 이틀에 죽이시고 삼 일째 살려주신다는 것,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 되잖아요. 왜 사흘이라는 텀이 있느냐, 왜 간격이 있느냐?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가 창조자가 아니다 이 말이죠. 이게 좀 어려운데 우리 인간은 창조주가 아닌데 어떤 원리가 있느냐 하면, 자꾸 연속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제 ‘나’하고 오늘의 ‘나’하고 연속됐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연속될 것 같으면 우리가 어제 하나님 믿으면 오늘 믿을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어제 믿은 것 계속 이어가면 될 테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만나를 며칠 줍니까? 하루치죠. 하루치 밖에 주질 않는다고. 그리고 마태복음에 산상설교에 보면 뭡니까? 오늘 염려는 오늘 할 것이요, 내일 염려는 미리 당겨서 하지 마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내일에 대해서 네가 관여할 그런 입장이 못 된다. 네가 그럴 처지가 못 된다 말이죠. 내일 되면 내일을 하나님께서 관리할 문제가 네가 오늘에 살면서 오늘도 하나님 덕분에 살면서 내일까지 앞당겨서 미리 계산하는 것은 그거는 피조물답지 않다 말이죠. 내일 되면 내일치의 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서 어떤 사건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해볼게요. 하나님은 창조주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하나님만이 연속성을 갖고 있어요. 영속성, 연속성 같은 말인데 영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기가 연속성을 가질 수가 없어요. 그래 이건 뭐냐? 항상 이건 단절돼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지 아니하면 살 수 없게 돼있어요.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창조주도 아니면서 창조주 행세를 하게 되죠. 창조주 행세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 없이도 우리끼리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끼리 살 수 있으니까 자체적으로 뭘 해야 하냐 하면, 자체적으로 연속성을 인간은 자기가 가져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떼버리니까.

하나님 당신의 도움 필요 없습니다. 우리끼리 살렵니다. 하고 나왔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연속성을 갖게 되니까 어제 나를 더 키워서 오늘까지 이끌어줘야 계속해서삶이 유지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이것은 이래되면 여기는 하나님의 속성이 담길 수가 없고 인간의 속성만 계속 여기서 나오지요.

그래서 창세기 30장, 31장하면서 뭘 염두에 두느냐 하면, 라반과 야곱의 차이가 뭐냐? 라반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기 때문에 그냥 자기 나름대로 자기 가진 것 기지고 사는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의 사람이기 때문에, 선택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이 야곱에게는 주어집니다. 근데 라반은 하나님의 속성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 둘이 이렇게 합친 겁니다. 합쳐 놓고 이젠 분가해서 갈라진 대목에 우리가 남아있습니다.

30장 후반과 31장 전체에 깁니다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처음에 삼촌이 야곱보고 네가 일하는데 품삯이 없어선 안 되지. 연봉 얼마 쳐주면 되겠어? 물으니까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그래? 그런 것 필요 없고,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저는 성과급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좋다. 그렇게 해라. 어떤 걸 성과급으로 원하느냐?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그런 것 저한테 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삼촌은 좋다 했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돌연변이기 때문에 숫자가 얼마 되지도 않고, 허한, 아롱지고 점 있는 것은 요새 말로 불량품이죠. 비실비실한 그러한 양들만 있단 말이죠. 좋다. 그렇게 하자. 좋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진짜 주인의 양은 완전히 숫자가 얼마 안 되고, 모조리 다 나온 것이 변태들만 아롱진 것 이런 것들만 나오니까 종들 사이에 어떤 소문이 들리느냐 하면, 야곱이 삼촌 재산을 몽땅 다 차지한다는 다 빼앗아 버린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그래서 나가라 해서 나가게 된 겁니다.

물론 삼촌이 나가라고 한 건 아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자기가 나가겠다 해서 나가죠. 나가니까 그게 31장에 들어가면, 나가는 건 좋은데 나한테 인사도 안하고 나가느냐, 왜 몰래 나가느냐? 네가 그런 게 있기 때문에 몰래 나갔지. 하고 따라 오지요. 그러니까 야반도주를 한 겁니다. 요새 중국 기업의 야반도주하듯이. 야반도주를 한 거예요. 재산 몽땅해서. 그래서 니네 죽었다 하고 내 재산 가져가니까 다 빼앗아야겠다하고 계약 위반하고 삼촌이 추격하고 도망하기 바빴습니다.

했는데 삼촌이 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동안 자기가 삼촌이 얘를 이십 년 동안이나 큰 딸 핑계대고 칠 년, 둘째 딸 핑계대고 칠 년, 거기다 육 년 더 일하고 이십 년 동안 한 푼도 안 주고 부려먹었다는 자기 과오가 드러나고, 그게 부끄러워서 그 다음부터 그렇다면 네 운명하고 내 운명하고 다르구나. 팔자가 다른 팔자구나. 그러니까 야곱이 하는 말이 우리는 완전히 다른 팔짭니다. 인생이 다릅니다. 라는 것을 확정지을 수 있는 그러한 계약을 맺읍시다.

해서 그 계약 맺는 내용이 마지막에 31장 47절에 보면, “라반이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니” 이렇게 해서 이게 뭐냐? ‘증거의 무더기’ 이제는 각기 우리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확정짓는 그러한 판가름을 확정지을 수 있는 무더기, 증거물을 세우는 이 대목이 31장의 전체 내용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내용을 들으면 30장부터 31장은 후딱 지나갈 수 있는 문젠데 이게 여기서 무지무지하게 깊이 있는 내용이 담겨있어요. 이 짧은 글에서 방금 이야기한 줄거리에서 뭐가 나올 게 있느냐 하지만 대단히 중요하고, 안 중요한 게 없습니다만 무지무지하게 중요하고 아주 깊이 있는 내용이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그 힌트는 제가 아까 했지요. 왜 헤어질 것을 처음부터 헤어지면 처음부터 안 만나야 할 것을 만나게 했느냐?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뭐냐 하면, 율법 가지고 하나님이 전체 인간을 죄인으로 하기 이전부터 법 이전에 하나님의 조치가 뭐였냐 하는 문젭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율법이 주어진 것은 뭡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막고, 죄인 되게 하셔서 어떤 인간도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하늘에서 주어진 하나님 하신 그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외부에서 거저주신 그 하나님의 액션, 하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그것 때문에 법이 주어집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해서 구원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구원될 자격도 없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그 하나님의 하신 일을 그냥 의지하니까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되게 하는 그것이 로마서 3장, 4장, 5장 쭉 나오잖아요.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런 법이 있어서 모든 인간이 율법으로 죄인이라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일을 안 했습니까? 분명히 율법이 주어진 일 말고 그전에 일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 일은 무슨 취지로 일을 벌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슨 취지로. 그게 상당히 난해하지요. 우리는 이미 결론 부분을, 해답부분을 미리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거룩한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잘난 체 하더라.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주니까, 아하 십계명 주니까 우리는 어느 하나도 못 지켰다.

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해서 그리스도를 오게 한 몽학선생으로써 그리스도 아니면 구원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왔다. 간단한 마지막 정답을 우린 갖고 있습니다. 세밀하게 따져서 그러면 율법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건 무슨 취지에서 그런 일을 하셨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는 법이 있고 죄인 됐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 이것만 달랑 챙겨서 하하, 이것만 우리한테 좋은 거네. 하고 나머지는 다 갖다 버리고, 알갱이만 취해서 됐습니다. 이걸로 구원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법 이전에 뭔가 주신 사건들 있잖아요. 그건 왜 주셨느냐 말이죠. 그거는 우리가 몰라도 되느냐 하는 문젭니다. 그걸 모르면 안 되지요.

시나리오를 짤 때 에덴동산 쫓겨났다. 쫓겨나자마자 법 줬다. 죄인이구나. 예수 믿자. 구원.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에덴동산 쫓겨나고 난 한참 뒤에 하나님께선 모세를 통해서 직접 자기가 쓰신 십계명을 줬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십계명 오기 그 전까지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로써 일을 벌이셨느냐 하는 겁니다. 그거 누가 아는 사람 있어요?

모세 율법은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율법은 모세로부터 온 것으로 돼있어요. 요한복음 1장 나옵니다. 1장 15절에 나오지요.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고, 은혜는 누구한테 왔다? 독생자로부터 온다. 그래 돼있어요. 세례요한 이야기하면서 요한복음 1장에서 그 대목 볼까요? 봅시다.

강의하면서 오늘도 피곤하실까봐 하면서 지금. 요한복음 1장 17절. 그것도 하나님께 맡겨야지 뭐. 피곤한 것도. 여기 1장 17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돼있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뭡니까?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모세로부터 구원받지 못하고, 모세율법은 구원용이 아니라 이 말이거든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으로 왔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지 모세율법 믿어서 구원 못 받는다,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면 여기서 모세율법 오기 전에는 어떻게 했느냐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에 이렇게 나오는데 모세율법 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느냐 하는 겁니다. 그때 율법도 없었는데. 그게 뭐냐? 모세율법 오기 전에 법 오기 전에 법 같은 역할이 있었어요. 법의 역할을 한 법이 있었다 말이죠. 규칙 같은 것. 그게 뭐냐? 제가 크게 쓰겠습니다. 그게 ‘선택’입니다. 선택한 겁니다.

선택하고 법주고 법으로 구원 못 받고 예수님 오셔서 구원한다 이 말 아닙니까? 이 짧은 문장에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이걸 짧게 해놨어요. 창세전부터 너는 예정 돼있고, 그 예정된 너희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에베소서 1장에 순서가 그렇게 돼있습니다. 창세전에 선택부터 먼저 돼요.

구원될 자가 따로 정해지고 난 뒤에 율법 준 겁니다. 그렇다면 선택했다는 이 사실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야곱에게는 선택이라는 이 속성이 야곱에게는 담겨야 되고, 누구한테는 없어야 된다? 라반한테는 없어야 돼요. 라반과 야곱 둘이 만나 놓고 찢어버려요. 둘이 헤어지게 만들죠. 라반은 만날 때 저 야곱을 조카를 이용해먹으려고 한 거예요. 그리고 야곱도 마찬가지로 라반한테 간 것도 자기 몸 하나 살리기 위해서 역시 야곱도 삼촌을 이용해먹으려고 둘 다 붙은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같아요.

같은데 그 인간적인 생각에 누가 간섭합니다.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람, 선택된 사람은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도록 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하나님의 사건을 일으키면서 그 사건에 의해서 한 쪽은 선택돼야 되는 사람이고, 한 쪽은 그냥 버려둠을 당해야 될 사람인 것을 그 사건을 통해서 둘이 붙였다가 갈라지는 걸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속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어디서 그런 근거가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 다시 돌아가 봅시다. 창세기 31장 봅시다. 오늘 강의가 좀 어려워요. 왜냐하면 어떻게 선택이 법이 되느냐 하는 걸 좀더 추적해봐야 되니까. 선택이 법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여기에 31장 10절에 봅시다. 31장 8절에 보겠습니다.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 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야곱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요.

제가 여러분 아시다시피 30장 끝에 보면, 외삼촌이 와서 내 품삯을 조사할 때 하는데 어떻게 야곱이 했느냐 하면 30장 37절에 보면,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막 흔들어요. 양떼가 교배한다 싶으면 그거 가지고 세워놓고, “물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흔들든지 하여튼 조작을 해서 얼룩덜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게 유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적인 어떤 생리술을 이용한 것이 아니고, 31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서 야곱아, 이런 식으로 하면 양 다 네 것 된다. 하나님께서 시킨 대로 한 거예요. 제가 여러분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왜 이걸 하필이면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서 현몽하여서 이런 수법을 야곱한테만 이야기를 하셨는가 하는 문젭니다.

그래서 나가라 한 것도 하나님께서 시킨 대로 나간 거예요. 어떤 사람이 야곱이 오랫동안 양을 키우다 보니까 노하우가 생겨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데 그게 아니고, 31장 11절에 보면,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너는 눈을 들어서 양떼를 보라. 얼룩무늬가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 다 네 것이다. 라반이 너한테 사기 친 것 다 아니까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니까 이제는 네 분깃을 받아서 다시 나 있는데 와야 된다. 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지시 따라 움직였다는 겁니다.

너는 왜 도망치느냐? 도망 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만 살아라. 이젠 헤어질 때 되었다.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얼룩무늬 있는 것 전부다 챙겨서 엄청나게 많은 숫자를 가지고 이제는 삼촌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시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법입니까, 십계명이에요? 야곱아, 십계명 지켜라. 이겁니까? 제 질문에 답변해 보세요. 야곱아, 너는 법을 지켜라. 법의 문젭니까? 아니지요. 그러니까 기독교는 율법의 종교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법 안에 가두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받은 사람은 법에 가둬진 세상에 살면서도 절대로 법에 안 가둬지는 사람을 점박이처럼 남겨둔 사람이 바로 야곱 같은 하나님의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입니다. 법에 갇히지 않는 사람.

물론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모든 생각이 법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 지난달에 여기서 강의했는지 안했는지 하도 강의가 많아서 이해 안 되는데. 해보면 여러분들이 아마 여기는 처음 강의하는 것 같은데.

법이 주어지게 되면, 예를 들어서 서울서 이런 강의했는가?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마라. 하는 법하고, 탐내지 마라, 살인하지 말라는 이런 십계명 있잖아요. 그러면 만약에 간음을 안 했으면 자동적으로 살인을 안 한 사람 됩니까? 아니지요. 간음을 비록 안 했더라도 남을 미워하면, 형제를 미워하면 이제 살인죄에 해당되지요. 산상설교에 의해서.

그리고 백화점에 어떤 옷을 탐낸다든지 어떤 집에 남 공부 잘 하는 것 탐을 내면, 이건 탐심에 해당되죠. 비록 이 사람이 간음을 안 하고 살인을 안 했더라도 탐을 내버리면 그 사람은 법에 의해서 뭐가 됩니까? 법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될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법이라 하는 것은 사람을 아주 못 살게 구는 거예요.

열 개 중에서 아홉 개를 지켜도 나는 아홉 개 지켰기 때문에 90% 착하다. 라는 그런 소리 못 하게 하기 위해서 법이 주어진 겁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이 말이죠. 그냥 법이 없이 선악과 따먹으면, 선과 악이 우리 속에 내장돼있기 때문에 나쁜 짓은 조금하고 착한 짓을 많이 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많이 한 비율만큼 우리는 의인이라고 그렇게 행사하는 것이 우립니다.

왜냐? 우리는 창조자 아니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으니까 우리는 스스로 자기가 창조주기 때문에 재판을 누가 해요? 내가 재판 내가 하는 겁니다. 어디 기준에 의해서? 선과 악의 비율 가지고.

슬슬 덥다.

선과 악의 비율 가지고 우리의 양심이 그거거든. 사울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나는 그동안 예수님 모를 때는 양심대로 하나님을 섬겼다 이래 돼있어요. 제가 지금 그걸 연구 중인데. 사울이라는 사람이 사도바울이 예수님 밖에 있을 때 예수 믿지 않았을 때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라는 흔적이 바울서신에 나옵니다. 그걸 지금 찾고 있는 중이에요. [피]라는 책을 쓰면서 그걸 찾고 있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작업을 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예수 믿고 난 뒤에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어떻게 했었나? 그거 말고 그 편지 가운데 사도바울이 예수를 몰랐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이해했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이해했던가가 그 흔적이 나와요. 그 중에 하나가 뭐냐? 나는 양심껏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 섬기는 방법이 뭐라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게, 잡아 족치는 게 그게 양심껏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방식이다

근데 그게 요한복음 16장 2절에 보면 그게 바로 예수님이 예언한 겁니다. 장차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출회시키고 잡아 죽이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다. 라고 예수님이 미리 예언한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예언했다면 그 예언대로 악한 역할을 해야 될 탤런트가 필요한 거예요. 그 탤런트가 누구냐? 사도바울이 돼야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속성과 말씀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역할들을 맡기 위해서 계속 누구는 탄생해야 되고 출생해야 된다 말이죠.

창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서 어떻게 흘러내리는가? 그것은 이 땅에 피조물이 어떤 역할을 하면서 각각 기능들을 하면서 움직이는가를 통해서 그게 모아 모아져서 아, 예수님의 속성은 이런 분이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싸매어 줄 걸 찢질 말든지.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 6장 2절에서 찢어놓고 싸매어버리는 거예요. 돌아오라. 그러면 너희들 찢어졌지만 내가 싸매어 줄 것이다. 그게 뭔 뜻입니까? 우리 입장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찢을 때는 찢어야 되고, 싸맬 때는 싸맴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서운 정의로운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공의와 자비라는 하나님의 두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있어야 됩니다.

제가 지금 연구하고 탐색하는 것은 뭐냐? 그런 하나님의 관계를 끊어버렸을 때 우리가 신이고, 모든 걸 우리가 결정하잖아요. 그럴 때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속에선 뭐가 나오느냐? 양심이 나와요. 양심이 어디에 기초하느냐? 선악과 따먹은 양심 아닙니까?

선악과 따먹은 양심을 가진 그 사울이라는 사람, 그러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정말 하나님을 잘 섬기는 그 바리새인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선과 악의 내부적인 갈등 속에 선한 쪽을 많이 하고, 악한 쪽을 줄여버리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되는 것이라고, 거룩한 백성이고, 점점 성화돼 점점 돼 거룩에 점점 의인에 가깝다. 이렇게 본 겁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간의 본성을 그렇게 대변해주고 있잖아요.

그런데 몽땅 이런 것, 저런 것 없이 몽땅 우리는 죄인이 된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 내부 속에 있는 선과 악 말고 다른 법이 주어져야 돼요. 다른 법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이 그 다른 법, 율법을 가지고 또 마중 나가죠.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방인한테는 양심이 계시가 되어서 자기를 송사하고란 대목이 나와요. 유대인들은 율법이고, 이방인들은 양심이.

그 양심은 새로 주어진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양심이 나와서 마중을 나오면서 자꾸 변명을 하는 겁니다. 잘해보려고 했는데. 최선을 다 했는데. 내가 어디 신이가? 내가 어디 예수가? 안 되는 걸. 지금 입장에선 나로선 더 이상 못 한다. 자꾸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죠. 변명과 핑계로 일관한다는 말은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속성이 담기기를 원합니다. 라는 뜻이 아니고, 내 뜻은 이렇습니다. 하고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 밖에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아시겠습니까?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예수님은 이런 속성을 갖고 있고, 하나님은 이런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라고 설교를 했더니만 교인들은 뭐라고 반응하느냐 하면, 아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거든. 이게 뭐예요? 지금 목사님은 복음을 가지고 예수님은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찢었지만 돌아오시면 싸매주십니다. 교인들은 더 이상 우에 하라 말입니까? 이정도 봉사하고 이 정도 헌금하고 이 정도 지금 섬기는데 더 이상 지금 나도 밥 먹고 살려고 하는데 더 이상 우에 하라는 말입니까? 나보고.

자꾸 자기 속성 있잖아요. 나는 최선을 다한다는 자기 의로움, 자기 성실성, 자기 착실함 이걸 자꾸만 하나님 앞에 이 정도는 봐주소. 아이 참. 야박하네. 봐주소. 내 입장에서는 이 이상 더 못합니다. 열심히 한다고 믿는다고 이것 밖에 안 되네요. 미안합니다. 이것 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한번 봐주소.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거예요. 자기 속성을 증거하는 겁니다. 이거 야곱 아닙니다. 곤란합니다. 그것 참.

야곱과 라반의 특징은 뭐냐? 라반은 양심대로 최선을 다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이용하기도 하고 미안하다 하기도 하고, 솔직하게 인간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반면에 야곱은 어떤 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야곱에게 또 다른 법이 주어져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사건, 선택이라는. 선택이 아까 뭐라 했습니까? 선택=법.

법이 오기 전에는 뭐가 법이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법이 되는 거예요. 이게 법이 돼버리면, 이 법이 일방적으로 야곱을 찾아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찾아와요. 찾아오면 이 법은 누가 지키는가? 이미 하늘에서 어떤 분이 지켰어요. 그분은 물론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선택이라는 법을 지켜서 지킨 그걸 가지고 야곱에게 침투해 버립니다. 침투해버리면 야곱은 자기가 법 지킨 적도 없이 이미 지켜진 법을 지켰다는 사람으로 다뤄져서 하나님께 구원의 길로 가는 그러한 혜택을 율법 이전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논리가 복잡하지요.

법이 오기 전에는 율법이 주어지기까지는 로마서 5장에 보면 나와요. 율법이 주어지지 전까지라도 아담부터 모세까지라도 이미 모든 사람은 죽지요. 천년동안 살아도 죽잖아요.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게 왜 죽느냐? 로마서 5장에 보니까 왜 죽느냐 하면, 그것이 아담은 예수그리스도의 표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적어볼게요. 이게 참. 성경에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이 말만큼 어려운 것도 별로 없을 거예요. 딴 것도 어려운 것도 많지만.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이게 어렵기 때문에 묻고 주고 그런 식으로 하겠습니다. 아담이 아담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예스, 노? 아담은 아담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노’죠. 그런데 아담은 이걸 인정한다고. 나는 나를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나 살기 위해서. 나는 나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울산시민하고 똑같은 거예요. 대구시민과 똑같은 거예요. 대한민국 교회하고 똑같아요. 내가 예수 믿고 천당하는 건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러면 아담은 자기를 표상으로 생각 안 들고 뭐로 보느냐? 실체로 보는 거예요.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해 봅시다. 사람이 자기 존재를 실체로 보게 되면, 모든 생각하는 것, 모든 행동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누구한테 돌아옵니까? 자기한테 돌아오는 거예요. 나는 예수 믿고 싶다, 하잖아요. 예를 들어서 ‘사영리’ 대학교 간사들, 네비게이토 하는 것, 중심에 나를 두지 말고 누굴 두라? 예수님을 두지요.

자, 따져봅시다. 나는 내 마음 중심에 예수님 두고 싶다. 두고 싶다고 의도한 사람이 누구에요? 자기 자신이잖아요. 두고 싶다고 해서 드디어 내 중심에 모셨다. 누가 좋습니까? 본인이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사기에요. 하고 싶다고 자기가 의도했잖아요. 자기가 의도해놓고 예수님을 중심에 두었다고 생각해놓고 그걸 좋아하는 그 사람은 누굽니까? 본인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은 절대로 중심을 둔 게 아니고, 가상으로 둔 것이 하나의 수단이 되었지요.

나는 예수 믿고 천국 가고 싶다. 그거 믿음 아닙니다. 왜? 믿음의 실체가 누구로 돼있어요? 내가 된 거예요. 진짜로 성경대로 한다면 예수님께서 믿음을 가지고 와서, 법 이전에 선택이 법 아닙니까? 선택했다면 창세전에 예정했다는 그 법을 누가 성취했습니까? 예수님 홀로 성취했지요. 한 것을 가지고 누굴 지목을 해요. 지목된 사람에게 그걸 분배를 해주면 그 사람이야말로 그 사람은 난데없는 사건이 터져서 자기중심이 아닌 걸 알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 방법이 아니고, 성경 보니까 내 마음에 예수님을 중심에 두어야겠다. 내 마음이 중심이 되선 안 된다. 해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예수 믿겠다고 나서면 백날 천날 해봐도 결국 뭡니까? 그건 자기 좋은 쪽으로 한 자기의 의도, 행동에 불과한 거예요.

그 과정의 차이를 오늘 낱낱이 추적을 해야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그 둘의 차이를. 아, 이거 복잡한 거예요. 그래서 사울이란 사람이 사도바울 되기 이전에 그 사고방식이 어떤 사고방식이었느냐 말이에요. 그 사고방식을 사도바울의 편질 통해서 보게 되면 자꾸 사도바울은 뭔가 거부한 게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말을 왜 자꾸 그걸 사용하고, 특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십자가에서 못 박았나니. 그런 이야기를 왜 합니까? 나 예수 믿는다. 구원받았다. 간단하잖아요. 간단한대 자기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왜 합니까? 고린도후서 4장에서 나는 날마다 내 안에서 예수님이 나를 죽이고, 죽인 그 현장에서 주께서 나를 살린다. 왜 하는 거예요? 뭘 염두에 두고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가짜 믿음하고 진짜 믿음을 구분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가짜 믿음은,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내가 법 집행자가 돼버려요. 예수 믿는다는 게 하나의 법이 된다고, 율법이 된다고. 탐내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뭐 하라. 끝에 보면 예수 믿어라. ‘믿어라’라는 명령이 포함된다고. 그런 식으로 예수 믿어서 구원 못 받아요.

예수 믿으라 하는 그것은 그게 하나의 법이지만 그 법은 우리 보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믿는 게 아니고, 믿고 싶은 의도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뤘는가를 그 실체를 모르면 사도바울의 그 이야기를 해석을 못해요.

바울서신의 편지를 해석하려면 율법 이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어떻게 다뤘는가를 그걸 알아야 돼요. 그걸 모르면 뒷부분의 바울서신의 해석이 곤란하다니까요. 무지무지 어렵지요.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어디까지 깊이 들어갈지 모르겠어요. 들어갈 때까지 들어가 봅시다. 들어가면 뚫히고 구멍 나겠지, 뭐.

존재라 하는 것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존재는 반드시 동질성을 갖추고 있어요. 아까 동질성 잠깐 언급했는데 다시 이야기하면, 어제하고 오늘하고 딴 사람 되면 안 되지요. 말이 안 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돈 좀 빌려줘. 백만 원 빌렸다. 어이, 오늘 갚아라. 언제? 어제 돈 빌려갔잖아.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지. 어제 나하고 오늘 나하고 같나? 니, 이근호 목사 강의도 안 들어봤나? 다 다르데.

어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오늘도 하나님이 창조하기 때문에 어제하고 오늘 같은 동질성 없어. 이러면 돈 안 갚으면 됩니까? 흔히 부부싸움에 그런 거 안 많습니까? 결혼하기 전에 손에 물도 안 묻힌다고 하는데 왜 약속 안 지키는가? 엄마손, 고무손 끼라. 물 안 묻히게. 그게 대안이다.

동질성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이 내일을 장담합니까? 내일 일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몇 절입니까? 너희는 뭐다?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니라. 뭐가 내가 도시 가서 장사해서 일 보리라. 어이, 건방진. 그것은 주의 뜻이면 우리가 혹시 살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주의 뜻이면 혹시 살고, 주의 뜻이 죽으라 하면 내일 도시에 가는 그것도 없고, 오늘밤 죽으면 끝나는 거고.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리니. 그래 나와야지. 뭐, 어느 도시에 가서 일을 보리라. 안개가 어디. 안개 주제도 파악 못하고 안개 아닌 것처럼. 그래 나온다고.

도대체 성경이 갈수록 이게 어려워요. 우리의 기존 사고방식을 완전히 근원부터 다 깨어버립니다. 십년 예수 믿는다고 좀 안다 하면 안 돼요. 보면 볼수록 대략 난감이라. 대략적으로 볼 때 난감해요.

하나님께서 관계를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는 이 존재는 하나님처럼 하나님도 아닌 게 하나님처럼 동질성을 유지하게 됩니다. 내가 만약에 땅을 샀는데 땅값 올랐다. 그럼 땅값 오른 주인이 누구냐? 나다. 그 땅과 나는 동질성을 유지해요. 손대지 마라. 울타리 쳐버려요. 왜? 내 것이니까. 비록 내가 산 땅은 십리 밖에 있어도 집에 있어도 그 십리 밖에 있는 땅과 나는 같은 거, 내 거에요. 내 영역은 그만큼 확대돼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난 뒤에 존재가 뭐냐? 존재가 동질성이니까 동질성이라는 같은 질을 갖고 있어요. 같은 질이 있으면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안에 뭘 집어넣어도 다 누가 되느냐 하면, 과거에 기억된 ‘나’라는 그 동질성에 이게 합류되어서 녹아집니다. 이해되시겠습니까?

용광로가 있는데 거기에 철 같은 것 막 녹이잖아요. 어제까지 철을 녹였잖아요. 벌겋습니다. 그러면 내일 고철 와서 녹여버리면 그 고철은 들어가는 순간에 뭐가 됩니까? 어제까지 쇳물에 합류되어서 동질성 되지요. 이해되십니까? 사람은 기억이에요. 기억된 속에 기억이 용광로에요. 오늘에 뭘 집어넣어도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어져 온 기억이라는 용광로 속에 오늘까지 전부다 똑같은 동질성으로 녹아집니다.

제가 아까 차타고 오면서 목사님하고 같이 이야기하면서 요새 젊은 사람들은 돈 푼도 없는 게 아반떼 탄다고. 왜 그러냐? 사회분위기가 좋은 차타고 싶은 분위기가 형성돼있다 이 말이죠.

생각해보세요. 이거 하나 가지고 알 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 평소에 젊은애들 길에서 툭 건드리면 왜 저를 건드립니까? 분명히 저라고 하죠. 왜 나를 건드리느냐 이야기하죠.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라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친구들 아반떼 타니까 아반떼 타고 싶잖아요. 이거는 본의 아니게 나라고 하지만 어디 휩쓸렸어요? 이미 같은 부류에 이미 같은 용광로에 녹아져 있지요.

지금 총각, 처녀들이 제 이야기 할 필요 없지만. 세 평짜리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이 말이죠. 사글세가 십 개월에 십이 만원이에요. 옛날이야기지만. 하여튼 열 달에 십이 만원부터 시작했어요. 등산 할 때 석유난로 해놓고 거기서 밥해 먹고. 이렇게 해도 부끄럽다 하는 게 없다 이 말이죠. 왜? 니는 니고, 우리 가정은 우리 가정이잖아요. 그런데 요새 젊은애들은 그러면 그런 남자한테 시집도 안 보낼 거예요. 부모들이.

자꾸 나는 나라고 말은 하는데 이미 나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은 게 뭐냐? 티비에서 본 것, 드라마에서 본 것, 잘 사는 재벌 집 아들, 2세들 노는 것 그걸 전부다 집어넣었잖아요. 그게 우리 속에 뭐가 되었다? 기억이고, 기억이 뭐다? 나의 자아다 이 말이에요. 자아라는 보따리를 풀어보세요. 기억들, 과거의 기억들 다 끄집어냅니다.

흔히 부부싸움 할 때 당신 하지만 나, 잊을게. 과거에 한 것 잊어버릴게. 천만의 말씀. 잊어버리는 것 좋아하네. 다 튀어나옵니다. 자아라는 것은 자아라는 게 없어요. 우리 몸은 있지만 자아라는 것은 누적이 돼요. 누적이 되어서,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하자.

자아라는 게 누적이 되는데, 제과점에 가면 프랑스빵인가 파이 종류 빵 있잖아요. 겹겹이 쌓이는. 이걸 하나 벗기잖아요. 하나님께서 하나씩 빼 보면 이게 자아가 과거의 누적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빼 갈 때마다 화를 내요. 우리가. 건강하면 건강 빼갔다고, 애 공부 못하면 공부. 그러니까 자기는 자기가 어떤 것이 층층이 있는 것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하나 빼 갈 때마다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 때 하나님께 대들 때 아하, 이런 게 누적되었구나. 그때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호세아 6장 2절에 뭡니까? 우리를 찢으시는 하나님과 그 다음에 찢어야 우리 자신이 처음부터 우리는 나밖에 모르고 하나님도 뒷전이고 찢을 때 비로소 알고, 찢어진 채로 오니까 누가 싸매준다? 하나님께서 싸매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층층이 아는데 이 층층이에다 자꾸 보태는 걸 미흡한 것을 채워주는 하나님으로 아는 거예요. 채워줘 놓고 가져가면 화내고, 채워줘 놓고 가져가면 화내고. 그러니까 우리는 안 찢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우리가 찢어져야 돼요. 왜? 자아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버리고 생성된 동질성이거든요. 우린 동질성이 없어요. 없는데 이미 하나님을 버린 상태기 때문에 동질성으로 유지하는 겁니다.

특징이 뭐냐? 자아에는 자아에서 수용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첫 번째 수용, 두 번째 내장, 세 번째 발산이죠. 인간의 존재는 뭐냐? 일단 외부 것은 무조건 끄집어들여요. 다 내꺼야. 무조건 오는 건 전부다 외부에서 뭐가 왔던 일단 오기만 하면 누구 것이 돼요? 내 것이 돼요. 참, 이게 원인 뭡니까?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이 와도 일단 나한테 오면, 니 성령 따로 있고, 내 성령 따로 있어요. 니 예수 피 따로 있고, 내 예수 피 따로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싸우잖아요. 똑같은 핀데. 하나님이 같은 냉장고를 줘도 이건 니 냉장고 따로 됐다 이 말이죠.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타락된 존재성이 일단 챙기면 누구 것 돼요? 경계선 오기 전까진 주님의 것이에요. 주님의 것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일단 경계선 넘어 내 것 돼버리면 뭡니까? 내 것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뺏어 가면 안 돼. 일단 수용해요. 소극적으로 수용하고 내장합니다. 그걸 발산하는 거예요. 발산하게 되면 자기 존재를 확대하면서 더욱더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점점 더 내 영역이 커지길 원합니다. 권력욕이죠.

집사 될 때는 눈물 흘렸다가 집사로 만족 안 하고 장로 돼야지. 자꾸 확대 돼야 돼. 당회장하면 시찰장, 노회장 돼야 돼. 총회장 돼야 돼. 자꾸 확대 돼야 돼. 아파트 삼십 평, 오십 평 자꾸 확대 돼야 돼. 확대 되면서 그 안에서 굳히기. 이거는 자기 권력을 굳히기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누구 품성이냐 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 없이 피조물이면서 하나님 버리고, 창조주 버리고 독자적으로 생존에 나서는 그 악마의 모습을 우리가 인간이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지옥 갈 저주 받아서 그래요.

이것은 바로 내 존재, 내 잘났다는 것을 과시하고, 나를 증거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시편에서는 누구 이름을 한다? 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요한복음 12장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 영광보다 누구의 영광을? 자기 영광을 드높이고. 지금 이것 밖에 없어요. 신약에서 이게 된다고. 나오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이걸 난데없이 사건이 터져야 위로부터 사건이 터져야 아, 이런 게 바로 죄구나. 라는 것을 알아요. 선악과를 따먹고 나는 선도 알고, 악을 알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선한 쪽으로 가게 되면 누가 좋다? 나는 이렇게 선하다. 하는 누가 좋은 거예요? 나의 존재. 존재는 뭐가 있다? 동질성. 나 봐라. 어제도 좋았는데 오늘도 좋잖아. 아아, 내일도 더 좋을 거야. 자기 동질성 유지하는 거예요.

근데 이런 동질성 유지를 자꾸 하게 되면 누굴 증거한다? 나의 잘남, 나의 믿음 좋음, 난 기도 잘함, 나의 훌륭함, 나는 신앙 좋음, 나의 소망과 괜찮음, 나의 사랑은 위대함 자꾸 자기 자랑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무슨 신앙이냐? 이게 바로 개혁주의 신앙 아닙니까? 한국교회 전체에 퍼지고 있는 개혁주의 신앙 아닙니까? 개혁주의 신앙을 제가 탓하는 게 뭐냐 하면, 예수를 복음을 증거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를 증거해요? 예수를 잘 믿는 나를 증거한다고. 목 숴도 괜찮아. 저는. 이걸 수십 년 이야기했기 때문에.

알아듣지를 못해요.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우리가 거룩해야 하나님 영광되지. 하거든. 생각해보세요. 내가 거룩해서 하나님이 영광 된다면, 그 영광됨을 바라보는 당사자는 누굽니까? 나잖아요. 나. 그러면 주인공이 누구에요? 역시 자기 포기 안 했잖아. 아직도 자기 포기 안 했다고.

그걸 거울에 보세요. 거울에 보면 여기 몸집 같으면 거울이 다 반사하잖아요. 그럼 나 있고, 내 앞에 거울 속에 나 있죠. 나는 두 개 맞지요. 우리 존재 속에 거울이 있어요. 그걸 ‘적자존재’, ‘대자존재’ 하는데 어려운 말 치우고. 사람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압니까? 선한 나와 악한 나를 만들어놓고, 악한 나가 있어야 선함이 이게 주가가 올라간다고.

인간은 생각하는 것이 뭐의 동질성? 착한 나의 동질성, 이것만 계속 기억적으로 왔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보고 뭘 봐도 야곱을 생각하면 야곱을 공부하면 나도 야곱처럼 된다. 하고 자기 앞에 있는 자기 속에 있는 거울에다가 야곱을 해놓고 야곱아, 야곱 같은 인간되려고 따라 붙는다. 열심히 하면 야곱같이 돼. 자기가 자기를 자꾸 되비추고 반성을 해요.

그 거울 속에 사울도 그랬어요. 그 거울 속에 누가 나타나는가? 예수님이 나타나버렸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니가 잘한다고 하는 짓이 결국은 나를 때리고 나를 핍박하는 것밖에 안 된다 말이에요. 결국은 예수님한테 피를 흘리게 하는 거예요. 그 거울 속에서 내 모습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이미 저주받은 나의 모습, 저주받은 여러분의 모습이 어디 등장합니까? 이야기해보세요. 저주받은 저와 여러분 모습 어디서 등장했습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 피 흘림은 누구 때문에 피 흘렸어요?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해 피 흘렸잖아요. 그러니까 그 십자가 눈앞에 보인다는 사도바울의 하는 이야기는 뭡니까? 잘난 거울 설치하지 말고, 거울 자리에 누굴 배치하라? 십자가 배치하면 진짜 내 모습은 뭡니까? 하나님께 저주받는 그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지금 까불고 찢고 하는 그것이 그 십자가 앞에서 전부다 뭐가 됩니까? 주여, 그 십자가 통해서 보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그것이 바로 신약의 사도바울 서신 말고 구약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분리되는 현상을 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219.♡.86.34)

09-05-19 08:25

울산080307b창세기31장

20080307b 울산강의-창세기 31장 이름 : 한윤범 2008-03-15 14:11:38

20080307b 울산강의-창세기 31장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31장 24절 다같이 읽어 봅시다. 시작,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따지지 말란 말이죠. 왜냐하면 이건 인간의 차원에서 야곱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차원에서 따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야곱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야곱에 씌워서 그 어깨에 하나님의 속성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야곱의 특성이고, 반면에 라반은 니는 죄인 타고난 니 마음대로 가라. 특별히 야곱한테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는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그것이 담겨있는 그러한 길을 가야 될 사람이에요. 이미 분류가 노는 동네가 영역이 달라요. 층이 다르다고. 사는 동네가 달라요.

네가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거든요. 예수님께서 천국, 지옥을 설명하면서 참 재미있는 것은 천국은 이렇고, 지옥은 이렇다고 설명 안 해요. 왜냐하면 모두들 다 지옥 안 가고 천국 가고 싶어서. 근데 예수님 방법은 뭐냐? 천국이 이렇다, 지옥이 이렇다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가는 길은 이렇고, 지옥 가는 길을 제시해버립니다. 길을 딱 제시해버리니까 다들 천국 가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길을 보니까 길 끝에 천국 달려 있고, 길 끝에 지옥 달려 있잖아요.

길 빼놓고 천당, 지옥은 되게 좋아하면서도 천국에서 내려온 길, 아, 싫어하네. 지옥에서 내려온 길, 아,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찾는 자가 많은 쪽으로 가는 길이 그게 멸망의 길이고, 찾는 이가 적은 쪽이 바로 천국 가는 길이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본성상 편하기 위해서 사는 것 아닙니까? 편하다고 하는 것은 과거에 기억된 대로 뭘 유지하면서?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사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한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차근차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지난 시간을 정리하면, 아까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져서 우린 죄인 맞습니다. 하기 이전에 죄를 따지기 이전에 너, 죄인이야. 법에 봐. 따지기 이전에 뭐부터 먼저 주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택한 법이 먼저 주어지고 난 뒤에 그 주어진 사람에 한해서 율법을 줘서 아, 그러니까 나는 내가 뭘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선택이 우선권이 있구나.

근데 선택했다는 것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받는가? 선택 자체를 이루신 분이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버려요. 선택하신 사람에 대해서. 이걸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에게 다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옳소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이 진리를 알 자가 없다고 돼있거든요. 마태복음 11장에서.

그러니까 이제는 뭐냐 하면, 책임을 누가 지느냐 하면, 법을 지키고 책임을 예수님이 져버리고 그 대신 책임을 져서 책임 있게 너를 구원했다는 겁니다. 법을 주고 너 안 지키면, 예수 믿어라. 이거 아니라니까요. 갈라디아서 설명하면서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 굉장히 많거든요. 제가 참 괴로워요. 율법 해보고 안 되면 예수 믿어라. 이거는 누가 살아 있어요?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는 거예요. 자기를 위한 예수에요. 세상에 그런 예수는 없습니다.

자아라는 것은 늘 깨어져야 됩니다. 늘 깨어지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것이 반복적으로 작용해서 깨어지는데. 깨어지고 만들어지고, 깨어지고 또 만들어지지. 왜? 우리에게는 기억이 있고, 기억은 뭘 유지한다? 동질성. 왜냐하면 동질성이 있어야 자아가 된다고. 어이, 돈 좀 빌려줘. 언제 갚을 건데? 내일 갚아줄게. 누가? 내가 갚아줄게. 오늘 돈 빌리는 내가 내일 또 있을 테니까 내일 내가 갚아줄게. 이렇게 동질성 있을 때 어제와 오늘이 연결되는 그걸 뭐라고? 자아라 하는 거예요. 이제 자아 아시겠지요.

자아라는 것을 딱 깨어보면 그 안에 동질성이 있는 거예요. 근데 동질성은 누구 마음대로 동질성이에요? 지가 지 마음대로 정했어. 여러분, 잘 이해 안 되십니까? 지가 지 마음대로 정하는 것.

여러분, 드라마 보시다보면 전 거의 안 봅니다만, 드라마 보시다보면 이유 없이 어떤 탤런트 나오면 꺼버리는 드라마 있잖아요. 저거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 왜 그 탤런트가 밉습니까? 누구 마음대로 입니까? 내 마음대로에요. 이유 없어요. 이건 내 마음대로에요. 저건 내 타입이 아니라.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에요. 왜? 나라는 동질성은 손대지 말아라. 니는 왜 그 사람이 뭐가 나쁜데? 어허, 묻지 말라고. 왜? 나는 내 동질성은 내가 정했기 때문에. 하나님 아니라 예수가 와도 손대지 마라. 나는 나니까. 나~나~나~나. 나는 나니까.

결국 남는 게 이것밖에 안 남아요. 예수 십 년 믿고 이십 년 믿고 남는 게 뭐냐? 나는 나다. 이것밖에 안 남아요. 장로 되서 삐지고 교회 안 나오고. 전부다 뭡니까? 장로 되면 믿음 좋을 줄 알았지요? 결국은 장로 되고 목사가 되도 남는 건 뭡니까? 나는 나다 말이죠. 왜 나한테 그렇게 했느냐 묻지를 마라. 나는 나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동질성이다.

옛날 어린애들은 초등학교 애들은 그게 좀 희박했어요. 옛날 초등학교 없었지, 국민학교 때 애들 말 잘 들었습니다. 저 친구하고 놀지마. 예, 안 놀겠어요. 내일 일찍 와. 예, 일찍 오겠습니다. 동질성, 자아성이 형성 안 되었으니까. 요새는 다섯 살만 되도 동질성, 꽉 잡고 있습니다. 안 되는 이유를 대라. 이미 형성돼있어요. 동질성이 형성돼있다고.

동질성이 형성돼있으면 뭐가 생기는지 알아요? 그게 유명한 선택, 선별. 사람이 동질성이 형성될 경우에 그 다음에 선택합니다. 선택해서 자기 마음에 취향에 맞는 것만 고르고, 나머진 거부해버려요. 그래서 나온 게 자유의지가 발현됐잖아요. 전부다 자아에서 나온 거라고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도 내가 알아서 믿고, 내가 믿기 싫으면 안 믿는다는 거예요. 교회 나오는 것도 내가 알아서 교회 나오고, 내가 나가기 싫으면 안 나간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이 그 사람은 교회 안 가는 것을 교회 나오기 싫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보내주셔서 그런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런데 지가 싫어서 안 간다는 사람이 라반입니다. 왜? 외부에서 자아를 깨는 요소가 없기 때문에.

오늘 강의한 것 잊어버리고 하나만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선택했다는 게 뭡니까? 선택했으면 선택된 속성이 담기기 위해서 거기에 합당한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만들어졌으면 선택된 자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그 안에는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자기 선택이 들어있는 게 아니고, 창세전부터 선택하신 하나님의 선택의 그 사람의 선택보다 더 강하겠지요.

내 선택보다 주님의 선택이 강하다. 내가 교회 나온 것도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고 주님의 선택으로 나왔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이 선택된 사람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내 말은. 맞잖아요. 그 말이 나와야 된다니까. 내가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내가 안 나오면 안 나오는 거지. 그러면 창세전에 선택은 뭐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이 아무리 선택해도 그 선택에 대해서 내 선택이 더 강해서 주님이 날 선택했지만 난 당신 버릴 거요. 하고 내 선택이 강렬해버리면 그 강렬한 선택은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선택은 나의 동질성, 자아에서 나오지요. 그 자아라는 것이 허구인데 아직도 주님의 선택보다 주님의 실체보다도 자아의 허구를 믿는다는 것은 그거는 비생산적 아닙니까?

다시 해봅시다. 로마서 5장에 아담은 무엇의 표상이라?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이잖아요. 그러면 실체가 누굽니까? 예수님만이 실체에요. 모든 아담은 뭡니까? 실체를 보여주는 표상이라니까. ‘표상’이라는 말이 실체는 아니다 이 말이죠.

표상의 임무가 있어요. 표상의 임무는 실체와 무관한 게 아니고, 실체가 이런 분입니다. 라고 드러내는 것이 그게 표상이죠. 표상의 임무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두 종류밖에 없지요. 하나는 뭐냐 하면, 지옥 가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 에서 같은 사람. 또 한 사람은 뭡니까?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 그러니까 야곱이든 에서든 둘 다 누구의 표상이다? 그리스도의 두 가지 속성, 하나는 긍휼의 그릇과 하나는 저주의 그릇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그런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 종류밖에 생기지 않았다고.

이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그 사람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도 어떤 성령이 와서 그걸 깨닫게 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 역시 우리하고 똑같이 동질성이에요. 예수 백날 믿어도 내가 믿기 싫으면 안 믿는 거지. 라고 자기 선택성이 있다고. 자기 선택성이 하나님의 계시보다 더 우세하다, 더 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야곱 같은 경우에 품삯을 한 푼도 못 받았어요. 밥만 먹고 산 거지 뭐. 라반이 이용한 거예요. 그래서 누가 악해요? 라반이 악한 겁니다. 악한데 그걸 누가 알았습니까? 하나님이 눈치 챘잖아요. 눈치 챈 게 아니라 다 보여 계셨죠. 다 보고 계셔서 야곱이 노동한 품삯보다 더 많이 가져가게 만들었어요. 왜냐? 그렇게 해야 라반은 버림 받은 놈이라는 것을 야곱을 마주침을 통해서 라반은 버렸고, 야곱은 선택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라반이 애써 버림받았다 그런 건 아니지만 라반이 이런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이 31장에 나오니까 라반이 이런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누가 아신다? 하나님이 다 아셔서 라반은 악하고 야곱은 성실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판정을 내린 겁니다. 그런데 그 판정에 누가 동의했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누가 동의했어요? 라반이 동의했어요. 왜냐하면 라반의 축적된 기억에 의해면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얼룩무늬 있는 이거는 숫자가 적고, 허한 비실비실한 불량품 양이라는 것을 익히 인간의 자아의 기억 속에 들어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인간의 자아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를 아시고 역으로 그걸 꺾어서 야곱에게 재산이 더 많이 가져가도록 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굉장히 어렵던 것은 뭐냐? 라반이 어려운 게 아니고, 그런 품삯을 정한 라반이 어려운 게 아니고, 누가 어렵겠어요? 야곱이 어려운 거예요.

왜? 야곱도 역시 자기 자아가 있지 않습니까? 너무 억울하잖아요. 만약에 이런 아롱진 것 몇 마리 안 되면 지는 이십 년 동안 헛수고 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믿음 줘서 지키는 대로 하라 시키는 대로 했다고요. 지키는 대로 했더니만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인간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많은 재산이 축적이 되고 부자가 됐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야곱은 뭘 느끼겠습니까? 나 부자 되었다는 걸 느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구나. 라는 것을 느끼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제가 평소에 하는 말이 뭡니까? 하나님의 복이 뭐냐?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창세전부터 선택했다는 걸 순간순간 깨닫는 것, 그게 복입니다. 나는 내 자아의 소속이 아니고, 내 소속은 하나님께 있다는 거예요.

언젠가 제가 설교하면서 이런 대목을 들었는데 드라마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아침드라마나 주말드라마나 ‘여자가 밉다’든지 ‘그래도 좋아’ 라든지 하여튼 그런 드라마의 내용들 하이라이트가 뭐냐 하면, 꼭 출생의 비밀이 있어요. 그렇잖아요. ‘겨울동화’도 마찬가지고요. 사실은 너희들이 배다른 남매였다. 이러고 끝나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하는데 결혼할 수 없는 뭐 있는데.

만약에 여러분의 부모님이 돌아가면서 임종 시에 여러분 보고 애야, 무릎 가까이 오너라. 아버지가 마지막 할 말이 있다. 아버지, 뭡니까? 유산이라도 남겨 줄줄 알고 뭡니까 좋아라하는데. 너에겐 출생의 비밀이 있다. 아니, 이제 와서. 그동안 내 입 다물고 있었는데 이제야 말한다. 사실은, 사실은 너희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네 아버지가 하나님이다. 하고 죽는 거예요.

에이, 시시하게. 이러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 16장에 나온다고. 네가 나 된 것은 네 혈육이 아니고, 하늘의 네 아버지이다. 출생의 비밀이 뭡니까? 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출생의 비밀이네. 그 대목이에요. 야곱의 이 대목이.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45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7,542 묻고답하기 이상규 집사님 테이프 주문 요청 - 최고관리자 09-05-24
7,541 묻고답하기 동영상 에러 해결법 - 최고관리자 09-05-24
7,540 자유게시판 몰트만 신학의 문제점 [신학] 최고관리자 09-05-24
7,539 우리교회 삼상 19:18-24 (신이 임하는 장소)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09-05-24
7,538 설교 마가복음 13장 1- 2절 제목 : 성전 소멸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5-24
7,537 우리교회 막 13: 1- 2 (성전 소멸)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5-24
7,536 자유게시판 안산강의 2006년 12월 08일(고린도후서 1강) 3/3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9-05-22
7,535 자유게시판 안산강의 2006년 12월 08일(고린도후서 1강) 2/3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9-05-22
7,534 자유게시판 안산강의 2006년 12월 08일(고린도후서 1강) 1/3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9-05-22
7,533 자유게시판 급고...!! [신학] 최고관리자 09-05-22
7,532 자유게시판 고전 13장의 사랑은..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9-05-22
7,531 자유게시판 오랬만에 듣는 성도의 고백 - 최고관리자 09-05-21
7,530 자유게시판 선을 더욱더 선으로 드러내는 강퍅 로마서 최고관리자 09-05-20
7,529 우리교회 렘 3:16-18 (하나님이 주신 희망)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09-05-20
7,528 우리교회 [일반] 철학과 신학의 허상 시리즈- [뇌과학과 철학] [철학] 최고관리자 09-05-20
7,527 강의 [뇌과학과 철학] - 최고관리자 09-05-20
7,526 강의 대구 5월19일 피 4강 대신 죽으심(가짜인간 허구 VS 약속 실체) [피] 최고관리자 09-05-19
열람 ➜ 강의 울산 08년 3월 7일 강의 창세기 30장, 31장 창세기 최고관리자 09-05-19
7,524 자유게시판 2009051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09-05-18
7,523 자유게시판 20090512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09-05-18
7,522 자유게시판 빠진 녹취를 긴급 요청합니다. [신학] 최고관리자 09-05-17
7,521 자유게시판 04대구강의14(교회를넘어서07)새언약5(에스겔)b 나머지 짤린 부분 에스겔 최고관리자 09-05-17
7,520 자유게시판 04대구강의14(교회를넘어서07)새언약5(에스겔)a 에스겔 최고관리자 09-05-17
7,519 묻고답하기 성전 누락 방식? - 최고관리자 09-05-17
7,518 우리교회 [주보] 성전 소멸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9-05-17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