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전서
2009051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전서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51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전서
(강의:이근호 목사)
안 그래도 둘째 시간에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렇습니다. 그림으로 설명할게요. 어떤 사람이 있는데 파이프가 있고, 파이프 속에 금이 흐르고 있다. 베드로전서에서 금보다 귀한 게 뭡니까?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오해하기를 예수님을 개인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이루는 집단으로 가는. 너만을 위해 피 흘린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다른 사람을 위해 피 흘렸다. 다른 사람을 합치면 전체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흘린 피가 나오죠.
고린도전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성만찬 할 때 먼저 와서 먹는다든지, 다시 말해서 전체인데 사적인, 개인적인 욕망이 앞서잖아요. 그러면 침상에 던질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이 말이죠. 할 때 죽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돼요. 저 사람에게 저렇게 일을 벌인 것은 속에 있는 금이 작용해서 벌인 건데 그 금이 누구한테 있다? “멀쩡한 우리에게도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하는데 사용하죠.
그 사람이 아프다, 죽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람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그만한 능력이 현재 누구한테 있다? “나에게도 있어서 서로를 묶어주는 역할을 계속하고 있구나.” 하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계신 분이 세상보다 더 크다. 이게 개인 속에 전체가 들어있는 거예요. 신약의 새로운 개념입니다. 구약에는 없어요.
내가 뛰면 다른 형제들이 모두 내 안에서 뛰는 것과 같은 거예요. 더 쉽게 하면 내 안에 있는 것에 내가 메여있다. 이래 보는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큰 것에 밖에 있는 작은 내가 메여있다. 원래 안에 있으면 ‘작다’가 되고, 그걸 품으면 ‘크다’가 돼야 되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돼요. 내 안에 있는 나를 삼키는 큰 것에 그 밖에 있는 큰 내가 작아지는 거예요. 인식의, 사고의 완전한 달라짐이 성립돼야 돼요.
이렇게 돼야 그 다음에 뭐가 이뤄지느냐 하면,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죠.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그날에 너희들이 내 안에 있다.” 이게 구약적 개념으로선 도저히 성립이 안 돼요. 어떻게 안에 있는 분이 더 크냐 말이죠. 크다는 말은 바깥에 걸쳐 있어야 큰데 어떻게 내 안에 계신 분이 바깥에 다 걸친다는 게 도무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이걸 공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건화 시켜서 너로 하여금 낮추고, 높이고, 죽이고, 살리고, 부자 되게 하고, 가난하게 된 사건은 전부다 누구한테 달렸다? 네 안에 달렸다. 네 안에 계신 분이 너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이 말이죠. 우리는 졸지에 하나의 그릇이 되고, 그릇 안에 계신 분은 우리의 주인이 되며, 나의 그릇은 “내 안에 계신 분이 이런 분입니다.”를 증거하는 그릇에 불과하죠.
그러니 베드로의 신학이나 바울의 신학이 같지요. 틀릴 리가 없습니다. 무슨 같은 성령 받았는데 베드로 신학이 따로 있고, 사도 바울 신학이 따로 있어요. 그건 육적인 신학자들이 해석이 안 되니까 신학을 요한신학, 다 따로 나눈 겁니다.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이걸 따로 나누지 말고 합치자 해서 조직신학 나왔는데, 조직신학도 마찬가지에요.
래드 같은 경우에 글 보면 조직신학적입니다. 제목 보세요. 이원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종말론, 인간의 고난과 하나님. 이게 인간의 고난이 어디 나옵니까? 전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지요. 성령 받았으면 그리스도 고난뿐이에요. 우리의 사적인 고난 하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기독론, 속죄론, 교회. 특히 교회할 때는 해석을 보면 아주 엉망진창입니다. 그리스도의 생활. 이건 완전히 기존의 조직신학과 안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보여요.
어디부터 먼저 보냐 하면, 방금 이야기하려는 게 어려워서 3장 18절부터 해봅시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여기에 사람은 안 나옵니다. ‘그리스도’하고 ‘불의한 자’밖에 안 나오죠. 그러면 의인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죠.
인간론, 하나님론이 없어져 버리고 인간론이 둘로 나눠져요. 하나는 ‘의인’ 나오고, 하나는 ‘불의한 자’밖에 안 나옵니다. 의인은 예수님밖에 없고, 나머지 불의한 자는 전부다 모든 인간이 줄줄이 다 뒤에 서있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의인, 불의한 이 관점을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는 불의한 자를 의인으로 바꾸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피를 뿌렸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의인이 피를 뿌려서 불의한 자를 의인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기존에 알고 있던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하고 관계없죠.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는 것과 관계없죠. 왜냐하면 구원받는 것 자체가 개인적인 욕망과 관한 거니까. 불의한 자를 의인되게 하는 이 계획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의인 아이디어죠. 그러니까 불의한 자는 이걸 생각 못 했죠. 그러면 불의한 사람의 생각들은 퇴출돼야 되죠. 퇴출돼 빠져나오는 쓰레기 같은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신과 인간론, 조직신학 모든 게 다 들어있다 이 말이에요. 충격 아닙니까. 저 혼자 충격입니까.
사고방식 자체가 “주께서 어떻게 다룹니까?” 하고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선배님.” 이거하고 달라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하는 것은 베드로전서를 전혀 이해 못한 겁니다. 그건 너무나 육적이며, 육적인 것이 결국 뭡니까? 불의한 자의 주특기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거룩해서 구원받습니까?”라는 아이디어는 베드로전서에 없어요. 아예 애초에 없어요.
우리는 불의한 자는 무엇과 단절돼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된 정도가 아니고 유일한 의인되신 예수님하고 단절돼있기 때문에 불의한 자가 의인 될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사고방식 자체가 육적이기 때문에 육적인 것은 전부다 개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개인의 구원이니까 여기서 어떻게 고생 안 하고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죽어서 좋은 나라 갈 수 있습니까? 이게 전부다 여기 포함되는 거예요.
제 취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까 베드로후서 1장에 봅시다. 1장 16절에 보면, “공교히 만든 게 아니요” 하고, 1장 17절에 보면, 내가 영광 중에 올라갔죠.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들었지요. 그 다음에 1장 19절에 보면, 우리 마음에 샛별 떠오르죠. 이거 우리 아이디어입니까? 충격 아닙니까.
우리는 좋은 나라 가고, 예수 믿는데 구원받을 것 생각하잖아요. 이 자체가 전혀 영적이 아니고 육적이며, 그거는 불의한 자들이 해낼 수 있는 아이디어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 아이디어를 뭐로 바꾼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아이디어로 바꿀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계속 지금 외부에서 만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를. “외부에서 만지십니까?” “만지십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영이 있습니다.” “외부에서 만지십니까?” “아니요. 만지긴 누가 만지는데.” “당신은 베드로전서 천 번을 봐도 구원 못 받아요.”
구약 같은 경우에는 아간이 범죄 했을 때 한 사람이 범죄 했는데 신에게 벌 받았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구약 시대의 다른 이방민족이 들으면 뭐라 그러겠습니까? 정말 미쳤어. 그런데 우리는 미쳤단 이야기를 안 하고 한 사람이 범죄 해서 다른 사람까지 힘들었다고 너무나 쉽게 이야기해버리는 거예요. 마치 그게 실제인 것처럼. 하지만 정상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 같으면 그건 있을 수 없는 거죠. 그렇잖아요.
우리 원래 자리 내려가 봅시다. 나의 생각이 없는 원래 자리 가버리면, 구약하는 이야기 자체가 당나귀가 이야기하는 자체가 전부다 괴상망측한 이야기되는 겁니다. 그 괴상망측한 이야기가 이 마지막 때에 종말에 베드로전서에서는 본격적으로 팔 벌리고 실시하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불의한 자를 거룩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 윤리 도덕적으로 한다는 그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어디에 해당됩니까? 그건 니 생각이고. 지 생각은 ‘불의한’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18절 보면,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 다음에 19절에 보면, “저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벌써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대부분의 주석을 보고, 신학을 보면, 베드로전서 1장, 2장, 3장 18절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19절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19절이 제일 쉬워요. 19절이 제일 쉬워야 그 다음에 베드로전서 1장 2절 “피 뿌림을 받기 위해서” 이게 쉬어야 이게 쉬워집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 이게 베드로전서에서 제일 쉬운 대목이고, 나머지는 이것보다 몇 천 배 더 어려운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걸 반대로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도 내 구원에 뭔가 집착하고 있고, 내 계획을 포기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가 있습니다.
흔히 어렵다는 19절 봅시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다.” 일단 여기 보면 인위성이 없죠. 지금 예수님께서 죽이심을 당하고 살림을 받을 때 여기에 인간적인 의지가 개입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인위성이 없지요. 아까 인위성이 아니면 뭐라 했습니까? 불가피성이죠.
예수님 자신이 영이 임할 때 불가피성이 임했죠. 그 불가피성을 어디에 전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할 때 그 불가피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전파하면 그 대상을 육이라 하지 않고 뭐라 한다? 그 다음에 옥에 있는 ‘영’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를 전부다 뭐로 본다? 옥에 있는 영으로 보잖아요. 옥에 있는 영들에게 거룩함을 입게 하신다. 옥에 영들을 생각하면 문제가 굉장히 쉬워져요. 왜냐하면 예수님 혼자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영이 하신 일을 주님은 영이시라고 알아먹는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 앞에 영으로 대우받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육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영이 못 되는 우리가 예수님의 불가피성의 작업 때문에 졸지에 나는 분명히 육인데, 주님 보시기에 영이라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영이라는 대상이 되면 아까 베드로전서 1장 10절, 11절. 선지자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서, 영이 임한 특징이 뭐다? 자기 생각 안 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잖아요. 뭐가 어려워요. 그럼 우리 선배들이 주님을 증거할 때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광 중에 있는 그 과정으로 인하여 그 선배들, 선지자에게 주어진 혜택을 그대로 뽑아내면 그들이 바로 참된 백성이요, 선지자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겁니다.
그들 가운데 사랑, 온유, 화평 이런 것은 다 이해되지요. 왜? 내가 뭔가 벌여야 될 육적인 관점이 아니고 내가 새삼스럽게 내 작위성, 내 인위성으로 벌인 일이 아니고, 아예 영이 와서 작업을, 완전히 인테리어를 다 바꿔놔요. 육적인 인테리어를 영적인 인테리어로 다 바꿔놨어요. 그래 놓고 나중에 하는 말이 뭐냐? “너, 샛별 떠올랐나?” 이놈에 육적인 인간이 샛별 떠오르려 하니 됩니까, 이게. 새벽기도해도 안 되는 기라. 그런데 이미 영의 대우를 받은 사람은, “샛별 떠올랐나?” “떠올랐습니다.” 그걸 다른 사람이 보면, “네가 미쳤어.”
신학자들이 왜 베드로전서를 접근도 못하느냐 작위적으로 육에서 영을 뚫으려하니까 3장 19절이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옥에 영들에게’ 할 때 공간을 묘사한 겁니다.
그 다음에 20절 봅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그렇다면 옥의 영들에게는 결국 두 종류가 있죠. 영은 같은 영인데 여덟 명 영이 있고, 여덟 명 외에 영이 있죠. 그리고 여덟 명만 구원받았다는 것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그냥 여덟 명이 아니고 앞에 뭐가 있습니까? ‘겨우’죠. 겨우 여덟 명 구원받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영이 되는 거예요.
“잘 하셨습니다. 아홉 명이 아니고 열 명이 아니고 여덟 명 하신 것, 그것도 겨우 여덟 명 하신 것 멋지게 일을 잘 마감하셨습니다.”라고 동의할 수 있는 영이라야 그게 구원받은 영이다 이 말입니다. 그 말은 뭘 포기했다? 이 세상 모든 구원은 누구 소관이다? 우리 주님의 소관이지 사적인 ‘나’ 소관이 아님을 아는 사람에게만 이것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샛별이 이해가 되고, 변화산이 이해가 되고,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가 거룩하다가 이해가 돼요. 주께서 그 다음 작업, 그 다음 작업이 계속 주어집니다.
이럴 경우에만 그야말로 얼마나 힘든 불같은 시험과 고난이 온단 해도 오히려 웃지요. “그래 마귀야. 고작 이거야. 날 구원 못 시키려고 내려치는 고난이 고작 그 정도야. 그 정도 고난 줬다고 내가 주님을 부인할 거 싶어?” 이게 바로 영적인 사람이에요. 그럴 때 그 사람 머리에 누가 임했다? 성령이 임하죠.
그리고 난 뒤에 4장 봅시다. 1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여덟 명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충분히 이게 이해가 되죠. 왜냐? 그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내가 고난 받아야 고난이 아니라 현재 입는 것 자체가 주께서 입혀주는 고난의 갑옷을 입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죠.
“내가 거룩해야 새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내가 영으로 있다는 자체가 이미 나는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한 대상이 돼가고 있는 거구나.”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적인 작업에 대상이 된 거죠. 그럴 때 비로소 베드로전서 1장부터 이해 안 될 것이 하나도 없어요.
마치 우리는 도화지 같아. 도화지에다 베드로전서 1장 1절부터 타자기로 문자가 잉크가 프린트 되는 것 같아. 팩스 같이 팩스가 날아와요. 문자가 팩스 되서 육이 아니고 육은 거부하니까. 박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으로 가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베드로전서가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막 나온다고. 그걸 학자들이 이핼 못한다고.
1장 8절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지금 영이 되서 팩스가 날아와서 팩스를 받아보니까 1장 8절부터 나옵니다. 뭐라고 하느냐? “너는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잘 믿는구나.” 이게 우리 의지로 되는 겁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보는 것만 찾는다는 것 얼마나 알아요. 믿는 것도 눈에 보이는 실적이 있을 때만. 그런데 보지 않고 믿는 건 잘 하는도다. 이게 지금 누구 이야기? 내 이야기라고 느낀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뭐냐? 선배들 나오죠. 1장 10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누구 속에?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에요. 그럼 이건 뭐냐? 선배들은 하나의 도구였고, 하나의 그릇일 뿐이다 말이죠. “그 그릇이 너냐?”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선배 그릇은 좋고 우리는 싫다고 하면 안 돼요. 그게 2장에 넘어가면 모퉁이 돌 하나에서 나오는 집, 같은 집이기 때문에 그 집에는 어떤 벽돌 한 장, 유리창 한 장 예외 없이 모두다 선지자 같이 하나님의 여덟 명에 해당되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걸 신령한 집이라 하죠.
제가 베드로전서 지금 시간이 없어 말 못하지만 여기서 뭘 보충하기를 원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4장 같은 경우에 예배할 때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어디서 예배드립니까? ‘어디서’ 하죠. 어디서 할 때 예수님 답변이 뭡니까? 여기도저기도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작위적으로, 인위적으로, 사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배드릴 분이 나를 파고 들어왔단 말이죠. 이걸 모르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니까 예배 참석해서 또 작위적으로 해요. 세상에 신령과 진정으로 할 때 휴대폰 전화 와버리면 신령과 진정이 다 깨져. 그게 신령과 진정이 아니에요. 바이올린 치고 하나님의 성령이 있을지라, 그런 분위기 잡는 게 아니고, 예배드릴 분이 아예 내 안에 “너는 내 거야.”라고 자리 잡는 그것 자체가 예배가 된다니까요.
“그걸 목사님 우에 압니까?” 그러니까 영과 진리죠. ‘영’이란 말은 뭔가 이상스런 게 아니고 이미 내 것은 없고 주님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는 그런 뜻입니다. 디모데후서에 나오죠. ‘사로잡힌 자’ “이미 너는 내 거야.” 하고 하나님한테 삼킴을 당한 사람이에요. 졸리든지 우에 되든지 간에 삼킴을 당한 거예요.
그 자체를 베드로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크게 쓸게요. ‘고난’이라. 그 고난의 핵심이 2장에 보니까 ‘십자가의 길’ 예수님이 가서 십자가의 길을 갈 때 고난당한 것처럼 너도 삼킴 당했기 때문에 그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고, 결국 온갖 시험이 방금 제가 이야기한 예수님의 영적인 작업과 관련된 시험이에요.
자전거전용도로 때문에 시위하는 것 말고, 쓰레기 환경문제 때문에 시험이 아니고, 예수님이 영으로 하는 작업, 오직 여덟 명만 구원하는 그 작업, 옥의 영들에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그걸 자랑 삼아서 선포한 그 작업과 관련되어서 내막과 관련되어서 욕 얻어먹을 때 “너는 참아라. 네 안에 주님 계신다. 네 안에 성령 있다.” 이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할 게 없어요. 그냥 사시면 되십니다. 베드로전서뿐만 아니고 성경 전체가 그래요. 그냥 당하는 대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툭 치면 여기서 왕 같은 제사장이 툭 튀어나오고, 모퉁이 돌이 툭 튀어나오고, 툭 치면 선택 받았고, 툭 치면 피 뿌림을 얻었고. 자꾸 뭔가 툭 치면 요한복음 나오고, 베드로전서 나오는 거예요.
사람이 옷을 뭐 입고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 자체에 장악 당하니까. 툭 치면 아, 이거는 죄인 중에 괴수구나. 이게 막 나오는 거예요. 지킨다는 것, 지킨다는 자체가 이미 단절돼있어요. 그 단절을 이을 수 있는 그런 방법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중요한 거기 때문에. 의인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죠. 그 다음에 의인 빼놓고 무조건 다 불의한 자. 불의한 자 나름대로 지정의가 있잖아요. 불의한 지고, 불의한 의고, 불의한 정이고 이렇습니다. 아무리 신을 향하여 고상해도 이미 예수님 빼놓고 불의해요. 그런데 의인에서 불의한 자에게 뭐가 나온다? 피 뿌림이 있죠. 그 피 뿌림 안에서 뭐가 나옵니까? 거룩이 나옵니다. 이건 불의한 자기 때문에 불의한 자에게 새삼스럽게 ‘거룩하라’ 하는 소리는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피 뿌림에서 거룩으로 나갈 때 주님은, 의인은 뭐가 돼야 됩니까? 영이 되어야 돼요. 다른 말로 성령인데 예수님 영, 영이 되어야 인간에게 물어볼 필요 없이 본인이 알아서 다 할 수 있거든요. 영이 되어서 피 뿌림 증거하고, 거룩 증거하니까 영을 담은 그릇이 되니까, 이 그릇이 된 사람이 선지자였고, 이 선지자 있고, 여덟 명 있잖아요.
이 사람들이 증거할 것은 예수님은 영이다. 이걸 가지고 왕 같은 제사장이고, 그 다음에 2장 9절 다같이 읽어 봅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
완전히 이거는 다른 사람은 미친 인간이에요. “당신도 윤리적으로 착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합니까?” 만 날 사람들은 육적에서 영으로 넘어오려 하죠. 신학자들도 마찬가지. 이원론이 어떻습니까? 이렇습니까, 이렇습니까? 이제부터 어떤 행실을 하면. 만 날 육에서 넘어오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학자들이 구원받는다는 건 참 힘들다 이 말이죠.
1장 23절 봅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세상에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자마자 썩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안 썩는 씨는 내 안에서도 안 썩어요. 그런데 썩긴 누가 썩어요? 이 불의한 놈이 썩지요. 그게 뭐냐? 모든 육체는 뭐 같고? 풀 같이 썩고. 모든 영광은 다 썩어버리고. 왜 썩어야 됩니까? “썩지 않는 것이 내 속에 있다.” 이것 자랑하려고. 세상적인 것에 관해서는 전부다 썩어문드러져야 돼요. “모든 풀은 마르고 하지만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완전히 구약 같아. 이거는 이사야가 하는 거죠.
그 다음 2장 보면, 구약을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구약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집단만 있다는 걸 이해 못하고 자꾸 현대적 주체사상, 인간은 나밖에 모르는, 세상만사를 나 중심으로 보는 그런 사고방식 가지고 이 성경을 들이대니까 거기서 입맛 맞춰주려고 신학자들이 “당신은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하니까 둘 다 거짓말하고 있어요. 현대인이나 신학자들이나 목사나 거짓말하고 있어요. 썩지 않는 말씀만 툭툭 튀어나오면 됩니다.
3장 18절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래드도 그걸 잘 지적했는데 여기에 보면, ‘죽으사’ 앞에 뭐가 있습니까? ‘한 번’ 죽었죠. 래드가 이것 중요하다 해놓고 뜻도 몰라요. 이게 왜 중요한지 몰라요. 뭐가 중요하냐? 죽을 때 몇 번 죽었습니까? 한 번 죽었죠.
그런데 베드로전서 1장에 보니까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 한 번이 늘 거룩해야 될 것하고 어떻게 연결됩니까? 이 사람은 연결 못하고 있어요. 연결 못 하니까 이렇게 해요. 죽은 것은 한 번 죽으시고, 그 다음에 그걸 믿고 하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믿음과 소망과 인간의 의지를 동원해야 그 취지에 맞출 수 있다.’ 이래 보는 거예요.
한 번 죽었다는 말은 한 번 죽은 것은 이미 우리에게 영원을 준다는 것은 어떤 기적이냐 하면, 십자가 부활하신 믿음이 아니면 이걸 믿을 수 없어요. 인간들이 말하는 ‘나는 믿습니다.’ 이런 믿음 가지고서는 한 번이 영원으로 안 이어져요. 한 번은 한 번으로 끝나버려요. 그런데 이 한 번이 우리한테 영원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한 번에 생긴 작업이 영이 되서 우리 속에 썩지 않는 씨로 나한테 찰랑찰랑 들어있어야 그때 이 한 번이 계속 영원히 가는 한 번인 것은 알게 됩니다.
스물 살 때 믿었던 그 죽으심이나 오십 때 믿었던, 육십 때 믿었던 그 죽으심이나 두 번 죽으심이 아니고 같은 한 번에 해당되는 죽으심이라서 이 한 번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히 불의한 자가 되고, 영원히 의로운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만이 영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뭐냐? 이 불의한 자가 구원받는 것은 한 번 죽으신 의인의 그 의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주님의 한 번 때문에 구원받지 나의 거룩함 때문에 구원받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한 번’에 전부다 초점이 모입니다.
그래서 한 번이란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좌절합니다. 왜? 한 번을 잊어버리니까 자기를 바라보죠. 자기를 보니까 어설프고 지가 봐도 짜증나고, 죄 짓고, 세상적으로 돈만 좋아하고, 교회부흥만 생각하고, 눈만 뜨면 기도하는 게 교회부흥에 관한 것이고. 또 그것이 기복인 줄 알면서도 짜증나고 하는 거예요. 하여튼 한 번만 놓치면 전부다 좌절과 낙담과 목사 때려치워버려야지.
목사 때려치워도 괜찮은데 한 번은 잊어버리지 마세요. 목사 때려치웠다고 한 번 잊어버려도 된다. 그런 건 없어요. 때려치우나 안 치우나 한 번은 늘 기억한다면 그대로 목사하세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거든. 목사 때려치우는 게 안 중요해요. 그리고 내가 굶어죽고, 안 굶어죽고 안 중요해요. 어차피 불의하기 때문에.
그래서 서울강의에서 이런 모션을 했는데. 의인은 앞에 의인되셔서 가시고, 피를 줄줄 흘리고 피를 뿌리니까 여기서 피가 막 나오는 기라. 우리는 아주 즐겁게 ‘불의한 자, 불의한 자’ 하면서 앞을 보고 가는 거예요. 불신자가 뭐가 없습니까? 앞을 보고 갈 사람이 없어 불신자 아닙니까. 지가 도 닦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전서 신학자들이 래드도 하는 말이 도 닦으라는 거예요. 앞에 놓쳐버렸어. ‘피 뿌림 얻었으니까 도 닦겠습니다. 거룩하겠습니다.’ 만 날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따라가면 돼요. 이게 바로 영적인 인간입니다. 샛별 떠올라 따라가면. 왜? 썩지 않는 씨가 여기 있기 때문에. 말씀이 당기는데 안 따라갈 수 있습니까? 말씀과 말씀이 아까 이야기한 단절이 아니고, 연결. 저쪽 말씀, 이쪽 말씀 연결 되어서 알아서 말씀 내부에서 되는데, 그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너, 나가 없고 우린 하나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2장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여기에 대한 모델은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자꾸 이거 보지 마시고 구약의 선지자, 우리 선배들 항상 생각하세요. 성령 받은 먼저 선배들, 그분들이 매를 맞았는데 나쁜 짓해서, 착한 일 안 해서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고 전부다 장차오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 때문에 매 맞았어요. 장차오실 메시아 때문에 매 맞았다고. 이미 오신, 이미 한 번 죽으신 그분 때문에 그게 선이에요. 다른 선은 없습니다. 신장 떼어준다고 선한 게 아니에요.
여기 나오는 베드로전후서에 나오는 사랑, 온유 이게 전부다 썩지 않는 말씀으로 교류하는 것이지, 나는 착한데 너 착하나 자꾸 개인적인 윤리도덕으로 끄집어낸 사랑, 온유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영적인 사람답게 사는 거예요. 영적인 사람 됐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는 겁니다.
2장 13절에 보면,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인간에게 세운 모든 제도에게 순복하다’가 아니죠. 앞에 뭔가 들어가죠.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뭘 위하여? ‘주’ 위한다. 왜? 개떡도 아니니까. 순복하라 이 말입니다.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만들고.
여기 선한이란 것은 뭐냐? 복음을 방해하지 않고 복음을 도와주기 위해서 세운 로마서 13장의 내용이죠. 모든 권세자들은 복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사자’라 하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개인적 같으면 주가 아니고, 여전히 육적인 개인 같으면 순복할 때만 순복하고 그러지 말고 그놈이 날 잘라내든지 궂은일을 시키든지 순복하란 말이죠. 어차피 그게 한 번 죽으심을 취소시키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우리 육은 썩어질 건데. 그림으로 해야 돼. 말로 하면 복잡해지니까.
주님께서 지금 영이 되셔서 영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전파하는데 휘말려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아까 왕 같은 권세자고 공무원들이고 이 사람이란 말이죠. 그럼 여기 영적인 성도가 있다면 주위에 깔린 모든 배치와 배열들이 뭡니까? 주님의 영적인 피 뿌림을 증거하기 위해서 배치된 도구들이죠. 그러니까 ‘주님을 위하여 순복하라.’ 이게 주의 뜻이다 이 말이에요. 출세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공무원 잘 하면 승진한다 이 말이 아닙니다. 승진하고 관계없어요. 결국 순복하면 남는 게 뭐예요? 승진이 아니고 고난이죠. 그렇잖아요.
2장 16절 봅시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자유하다.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나오네요. ‘하나님의 종’ 완전히 선지자 아닙니까.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그리고 네 자신은 너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집단에 있다. 네 안에 여러 사람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네가 만약에 육적으로 놀면 다른 형제들이 같이 욕 얻어먹게 돼있다. 그래서 너는 형제들에게 잘해줘라. 형제우애 이런 것도 같은 형제들에게 잘해줘라 이 말입니다.
22절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그러면 죄를 어디서 찾아야 됩니까? ‘내가 육이다. 내가 죄다. 불의하다’는 근거를 어디서 찾아야 됩니까? 십자가에서 찾아야죠. 그런데 십자가 전한다고 그렇게 욕을 한다고. 또 십자가 한다고. 십자가 증거 안 하면 그 사람 죄를 어디서 찾습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자기성.
십자가에서 찾아버리면 죄 아닌 것이 없고, 불의 아닌 게 없는데. 자기한테 찾아버리면 자기는 착한 인간도 되고 때로는 나쁜 인간도. 완전히 ‘지킬과 하이드’ 같은 인간이에요. 그래 놓고 하는 말이, “착한 일 했는데 왜 벌 받지? 착한 일 했는데 일이 꼬이지?” 이러고 있다고. “네가 십자가 앞에 가봐라. 꼬이네, 안 꼬이네 할 쨉이 되는가. 밥 먹여주는 것만 고마운지 알아라. 이것들아.”
제가 어제 대구에 차를 타고 가는데 육십 가까이 된 어떤 아줌마가 국수를 먹고 있어요. 길바닥에. 나물 몇 개 놓고 국수 먹다 손님 오면 흥정하고. 그걸 보면서 느낀 게 있어요. 국수를 먹는 게 참 비참하다고 느껴지는 게 아니고, 제가 보통 안 됐다, 가난한 사람이 어렵구나 이래 생각되는 게 아니고, 국수 먹는 그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고, 저 국수만 먹어도 행복한 것보다 더 다른 행복을 찾는다는 자체가 우리한테 너무 욕심이란 생각 들어요.
개가 죽 먹을 때 개는 지금 한참 행복한데 우리는 개 보고 “아이고, 네가 영화관도 못 가고” 이렇게 하는 자체가 우리가 더 측은해요. 개는 지금 행복해 미치는데. 왜 우리로 하여금 길바닥에 앉아서 국수만 먹어도 ‘이것으로 족합니다’ 행복을 도대체 누가 빼앗아 갔느냐? 도대체 나의 욕심이, 나의 얼마나 육적인 것이, 사람들 왔다갔다하는데 부끄러운 줄 모르고 국수 맛있게 먹는 거예요. 왜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낮아지지 않느냐 말이죠. 그것마저 행복한데 거기다 무슨 행복을 더 추가한다고 그렇게 길길이 뇌물을 받고 백만 원도 받고, 오백만 원도 받고 왜 그 짓 하느냐. 흙인데 풀 같이 다 없어질 건데.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아는 그 말씀이 우릴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앞으로. “족한 줄 알라” 하는 그것이 옛날에는 “예. 알겠습니다.” 동의는 하면서도, 동의는 해야지. 안 그러면 신자 아니니까. 동의는 하면서도 시답지 않게 여겼던 것이 나중에는 “아이고, 진짜 고맙습니다.” 할 때 그게 베드로전서 식 온유와 사랑이고 겸손 아닙니까. 딴 겸손 없어요.
겸손이란 말은 반드시 십자가 앞에 가야 나오지, 지가 따지는 겸손과 온유, 여기 순서에 보면 나와요. 사랑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경건을 더하고, 이 모든 건 전부다 십자가 앞에서만 나오지 지가 알아서 하는 경건, 거짓말입니다. 아직 속에 욕심이 가득 들어있는 구라에요.
그 다음에 3장 넘어갑시다. “아내 된 자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 대목 보고 여자들 안 됐다 하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 남편들아 여자 하는 것 좀 보고 배워라 이 말이에요. 영적인 인간이, 참된 거룩한 인간이 어느 정도로 낮아지고 낮아지는지를 보라 이 말이죠. 사라가 자기 남편 보고 뭐라고 합니까? ‘주’라 하죠. ‘너는 그 만큼 낮아졌나.’ 이 말입니다. 이게 바로 주에 대한 순복입니다. 여자들 이름에 순복이란 촌스럽다고 안 짓지 옛날에 있었어요. 순복이. 여자는 그저 무조건 순종하라고. 물론 여자가 잘한 게 아니고 순복하는 게 타고난 건데.
아까 왕들에게 순복하라 했잖아요. 순복이 뭡니까? 전부다 합쳐서 이걸 베드로전서에서 두 자로 ‘고난’이라. 이것도 고난이에요.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여자는 연약한 그릇이죠. “나는 남편 전에 안 가렵니다.” 이러지 말란 말이죠. 하나의 그릇이니까. “왜 악한 왕이 와서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느냐?” 이러지 말라 이 말이죠. 순복하라. 악한 왕이든, 순한 왕이든 순복하라 이 말입니다. 환경에. 왜? 우리는 자유자기 때문에. 우리는 선지자, 영적인 존재기 때문에. 다 풀리죠. 베드로전서.
그 다음에 3장 12절.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결국은 나를 보고 나를 평가하지 말고, 주님을 보면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니까. 세상을 주님 같은 시선으로 다시 보게 되면 그저 순복하고 마지막 때에 불쌍히 여기고, 그 다음에 9절에 나오죠. 겸손히 여기고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그냥 살아. 쉽게 말해서. 부대끼는 대로 그냥 살아. ‘이미 구원받아버렸는데 샛별 떠올랐는데 끝난 문제 아니냐.’ 이런 뜻이에요.
이게 아까 베드로전서 4장에 뭐로 이어지는가? 참아라. 고난 받아라. 주의 영이 네 위에 향해 있다. 이게 계속 나옵니다.
4장 넘어갑시다. 4장 6절.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자유죠. 영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너는 정신 바짝 차리고” 그 다음에 10절부터 11절, 12절에 “누가 일을 하거든 네 힘으로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하라” 해서 누구한테 영광 돌린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내 안에 일을 벌이시고 썩지 않는 씨가 있는 것도 모든 작업도 나를 영으로 보시는 주님의 몫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전체 이스라엘의 머리되시는 그분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큰 분이 작은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이 베드로전서의 주제입니다. 큰 분이 크게 일해서 아무것도 쓸모없는 불의한 나에게 큰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참고, 순복하고, 감사하고, 봉사하면 된다 이 말이죠.
4장 15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하지 말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까짓 것, 세상적인 것 해서 뭐 하냐. 그리고 17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 마지막 때에 심판이 누구한테 옵니까? 하나님의 전한테 심판 내리신다. 그러니까 교회 보지 말고 주님 바라보라.
5장에 보면 교회 장로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거기 보면, 부득이 하지 말고, ‘부득이’ 반대말이 뭡니까? 자원함. “주께서 일을 시키는구먼. 나를 아주 못 살게 시키는구먼.” 사람보지 말고 주님 바라보라. “목자들아, 양 보지 말고 목자장 되시는 분 보라.” 네 밑에 있는 사람 보지 말고, 교인들 밑도 아니지만, 위에 봐서 네가 한 마리의 양이 되라. “주여 그 다음에 뭐 할까요?” 이렇게 늘 쳐다보며 살아라.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작용할 때 뭐가 보이느냐? 그 다음에 8절 보면 마귀가 보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자기 쳐다보는 인간 찾고 있을 때 너는 주님 쳐다보면 마귀가 떠난다. 나 때문에 떠나는 게 아니고 누구 때문에 떠나는 겁니까? 우리 안에 주님 때문에 떠나는 거죠.
10절에 보면,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11절에 보면,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끝으로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 다같이 해봅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 멋지다. 우리한테 영생 주려고 우리 말고 마귀까지 만민을 다스리는 심지어 개미까지 모든 걸 다 다스리는 해 뜨는 것부터 다 다스리는 권세를 오직 누굴 위해 사용하려고? 자기 백성에게 영생 주려고. 그 정신이 바로 베드로전서하고 같은 내용이 일치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괜히 걱정했습니다. 내가 목회 실패한다고 하나님 실패한 줄 알았고 내가 변변치 못하다고 하나님도 변변치 못한 분인 줄 착각했습니다. 이제는 나 쳐다보지 말고 우리 안에 있는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0512b 부산강의.hwp (57.5K), Down:7
이미아(IP:115.♡.210.107)
09-05-19 11:14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육적인 사람이었으나 영적인 사람이 된 자는 집이 아무리 크고 넓고 좋아도(잘사는 동네와 비교해서가 아닌, 못사는 동네하고 비교해서), 그 안에 사는 영적인 자기보다 크지 않고 넓지 않고 좋을수가 없으며, 그 영적인 자기가 아무리 크고 넓고 좋아도 그 안에 계신 예수님보다 크고 넓고 좋을수는 없다......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고 육적인 사람으로 있는 자는 예수님보다 자기가 크고 넓고 좋으며 자기보다 집이 크고 넓고 좋아야 한다.
산이 가까이 있고 마치 들판에 세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인지 유난히도 휑휑하고 부는 바람소리가 큽니다...그 바람소리와 더불어 설교와 녹취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목사 때려치워도 괜찮은데 한 번은 잊어버리지 마세요. 목사 때려치웠다고 한 번 잊어버려도 된다. 그런 건 없어요. 때려치우나 안 치우나 한 번은 늘 기억한다면 그대로 목사하세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거든. 목사 때려치우는 게 안 중요해요. 그리고 내가 굶어죽고, 안 굶어죽고 안 중요해요. 어차피 불의하기 때문에."이 말씀 녹취하시면서 마음이 뭉클하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