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대구강의10(교회를넘어서)05-새언약3(에스겔)
04대구강의10(교회를넘어서)05-새언약3(에스겔)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04 대구강의 10] - 교회를 넘어서 5 - 새 언약(에스겔) 3
04,07,2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아니, 감히 하나님을 ??
오늘은 '교회를 넘어서' 238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우리가 지금 인간이나 눈에 보이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직접 공부를 하고 그 내용을 알려고 하는데, 사실 이것이 얼마나 당돌하고 건방진 일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어렵고 힘들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니가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알아!" 라고 나올 수도 있고 말이다.
이것이 인간이 만든 학문이라면 얼마든지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따지고 연구할 수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을 상대로, 그것도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현재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그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어떤 불평과 같은 것이 있으면 안 되는데, 물론 반대급부를 바라는 것도 있으면 안 되고 말이다.
우리 인간들이 달나라에 가서 달을 상대로 연구하고, 또 목성이나 토성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야, 우리는 이 지구만 바라보고 연구하는데, 당신들은 그렇게 멀리 우주에까지 가서 연구하고 대단하구나" 라고 하면서 질투심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목성이나 토성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참으로 귀하기고 하고, 또한 위험한(?) 일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무한대적인 하나님에 대해서 과연 어떤 점을 꼬투리로 잡아서, 아니 어떤 점을 연결 고리로 삼아서 내부까지 침투할 수가 있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교재 238페이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말이다.
잠시 교재를 살펴보자.
**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이 이제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되어있기 때문에, 구태여 드러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왜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소홀히 하는가? 그것은 다 이유가 있는데, 기존의 신학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기에, 그냥 하나님은 걸쳐만 놓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살아가는데 유용함이 있는지,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감히 성경의 중심이라고 할 수가 있는 정작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는 그만 외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하나님보다는 자기의 유익을 !!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이름 중에서 하나인 '엘샤다이' 라는 것이 나오면, 그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고 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런 것은 모르고, 그냥 자기가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름으로서 어떤 그런 전능하심에 동참해서 한 건을 챙길 수 있는지, 그런 것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꾸만 관심을 자기 쪽에 두게 되는데, '엘로힘' 이라는 높으신 하나님을 이야기해도, 그렇게 되면 자기도 어떻게 높게 될지, 그런 것만 염두에 두고 말이다. 그러한 경향이 제가 보기에는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되지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인간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오직 거기에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하나의 상품화로 만들어서 목회를 하려는 심보는 이 지구가 망하는 날까지 계속해서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것을 전부 물 청소를 하듯이 쓸어내어서 모두 가져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믿으면 자기가 어떻게 달라지고 이득이 있는지, 전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자는 것이다. 물론 좀 건방지고 외람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직접 다가가자는 것이다.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익카루스가 태양에 접근하다가 밀납으로 만든 자기 날개가 그만 녹아서 떨어져서 죽고 마는데, 그렇게 태양에 녹아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 다가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 선지자 이사야는 왜 벌거벗었는가?
선지자 이사야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직접 이사야를 찾아오셨는데, 그 이전에 이사야가 하나님을 전혀 몰랐겠는가? 그래도 그 당시 선지자들 중에서는 최고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겼을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고, 또한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다나라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직접 하나님이 찾아오셨기에 말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3년 동안을 벌거벗고 돌아다녔는데, 그야말로 미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사야가 왜 그런 짓을 했는가? 물론 어떤 사람은 옷을 다 벗은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물론 다 벗고 말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이사야가 그런 짓을 했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까발리는, 즉 "너희들은 감추지? 나는 드러낼 거야" 라고 해서, 그런 나체 퍼포먼스(?)를 펼쳤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사야가 자기의 수치를 계속해서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꾸만 사람들은 자기의 수치를 감추기에 급급한데, 그래서 종교나 자기 믿음을 가지고서 자기 수치를 포장하고 말이다. 그렇게 민중들은 자기를 감추고 또 감추는데, 그러나 이사야는 어떻게 하는가? 그와는 정반대로 수치를 드러내고 또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우에도 하나님과 직접 상대하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그만 자기 인생이 실패했다고 여기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복음을 전하다가도 그만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고 말이다.
◈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는데요 ??
사실 인간은 원래가 그런 존재인데, 즉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하면, 그것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고 사랑하면 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하나님은 저에게 무엇을 해줄 겁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직접 하나님을 대하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지?" 라고 나오는 것이 인간인데, 그러니 자기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인간이라는 것이다. 다같이 하나님을 대한다고 해도,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이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하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사실 우리는 그냥 허공을 칠뿐인데 말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시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 이라는 말이다.
◈ 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 인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 인가? 사실 여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신학자들이 거의 없는데 말이다. 제가 여기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그런데 읽는 사람들도 왜 그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그 취지에 대해서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만 나오는데, 바로 이 하나님의 이름에서 언약이 나온다는 것이다. 언약이 말이다. 그러니 언약에 관여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래서 창세기 3장부터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는 그런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그냥 '엘' 이라는 하나님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것이지, 결코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만, 그러나 안식 그 자체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 소관 !!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의 만족함을 위해서 만든 것인데, 거기에 대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연결고리는 하나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담당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말인데, 하나님과 인간이 사이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소관이라는 것이 말이다.
◈ '우리'의 형상대로 ??
이렇게 창세기 3장에서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왔는데,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서는 그러한 흔적이 없는가? 물론 있기는 있는데, 26절에 보면 "우리의 형상대로" 라고 해서, 그렇게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즉 창조된 사람은 아담 한 명인데, 그런데 그가 받은 형상은 '우리' 라고 해서 복수가 된다는 것이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그러니 당연히 문제가 되는데, 일대일 같으면 "내 형상을 니가 받아라" 라고, 그렇게 그대로 복사를 해서 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쪽은 다수인 '우리'이고, 저쪽은 아담 혼자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다수가 하나에게 형상을 새겼다고 한다면, 그것이 이상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이 대목을 수십 수백 억 명이 보았겠지만,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별로 없지 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금지하는고 하니까,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 형상을 연구해서 '우리'에게 도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아담' 이라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아담→우리' 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 하지만, 하나에서 다수가 나오지는 않아 !!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고속도로가 뚫리는데, 그런데 이 고속도로는 참으로 이상한 고속도로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가설 때는 고속도로가 맞지만,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고속도로는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금지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에서 다수가 나오지 않도록 되어있다는 말이다. 물론 다수에게 하나가 나왔지만, 그러나 그 흔적을 가지고 하나가 다수를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 헤겔과 셀링 !!
이렇게 분명히 안 되는데, 그런데 된다고 우기던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가 곧 '헤겔' 이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셀링'이 있었고 말이다. 셀링은 신은 제약을 받지 않는 '무제약자' 라고 했는데, 이 셀링 이전의 피히테는 절대자아를 주장했는데, 그런 절대자아의 내용이 무엇인지 따진 사람이 바로 셀링이라는 것이다. 셀링은 1800년대 사람으로 헤겔과 거의 동시대의 사람인데, 칸트는 훨씬 더 앞선 인물이고 말이다. - 헤겔(1770~1831), 세링(1775~1854), 칸트(1724~1804)
◈ 객관은, 다른 객관에 의해서 해명을 받음으로서 존재 !!
이렇게 셀링은 신을 '무제약자' 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도대체 피히테가 주장하는 절대자아를 구성한 근거가 무엇인지 따지면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 근거가 주관인가? 아니면 객관인가? 그것도 역시나 아니라는 말이다. 그해서 "객관은, 다른 객관에 의해서 해명을 받음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녹음기가 있는데, 이 녹음기가 무엇인지 설명을 하려고 하면, 녹음기는 녹음을 하는 기계라고 하면, 그러면 기계가 무엇인지 또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의 객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또 다른 객관들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객관에게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그 다른 개념의 범위로 제약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하려면 윤리학도(?) 다시 공부를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 기계는 또한 제한을 받지 않는가? 다른 객관들에게 의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무한대로 연쇄적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 또 더 근본적인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근본적인 것을 모두 다 합쳐보아야 각자가 역시나 다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또 다시 설명할 것이 필요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객관' 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다른 것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종속적인 것이란 말이다. 즉 서로 서로 종속이 된다는 것이다.
◈ 객관도 주관도 종속적이지만, 그러나 신은 무제약적 !!
이것은 '주관' 이라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주관을 객관을 보고 그 객관이 나름대로 자기 안에서 주관으로 다시 정리가 되기에 말이다. 즉 객관이 없는 '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게 알려고 하면 거울을 보던지 무엇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울 속에 있는 객관을 통해서 '나' 라는 것을 규정을 하니 말이다.
그렇게 객관이 있어야 주관이 있는 것이고, 그러니 객관이나 주관이나 다 제한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 세상이 이렇게 녹음기도 있고, 기계도 있고, 나무도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무제약적인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무제약적인 것이 모든 피조물 속에 들어있는가?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다음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무제약적인 신이 제약적인 것을 창조하는데 손을 떼었는가?" 라는 것이다. 결코 손을 떼지 않았는데, 이 셀링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신은 자기가 창조하고 손을 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섭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제약적인 것이 모든 피조물 속에 들어있는가? 당연히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무제약자가 되는 분이 제약적인 것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자기의 무제약적인 요소를 심어놓았는가? 그것은 신이 자기를 대상화해서,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셀링의 주장이고, 이것이 헤겔에 의해서 발전이 되는데, 이것은 마치 신이 자기 내장을 끄집어내어서 펼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이고, 그 역사는 다시금 절대이성으로 회수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역사는 하나님이 자기를 대상화시키는데, 그렇게 대상화된 관계 속에서 '사랑' 이라는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신은 자기를 대상화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성자' 라는 말이다.
◈ 아하, 그래서 헤겔을 삼위일체 철학자라고 !!
그러니 그 성자는 버림을 받고 잃어버림을 당해야 되는데, 그렇게 해야 무엇이 나오는가? 다시 되찾는다는 사랑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즉 버릴 때는 공의로운 것을 버리고, 다시금 찾을 때는 사랑으로 찾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철학적인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의 철학이고 신학인데, 그러니 헤겔철학은 삼위일체를 역사화시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삼위일체라는 것이 무엇인가? 유대교에서 분명히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한 것은 유대교의 주장인데, 신학적으로 보면 그게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여기 창세기 1장 26절에서도 '우리' 라고 되어있고 말이다. 그런데 이 '우리' 라는 것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삼위일체가 아니고 하늘에는 하나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도 있으니, 합쳐서 그렇게 불렀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 유일신인가? 단일신인가?
하지만 이렇게 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유대교의 주장으로 봐도 이것은 단일신인데, 유일신이 아니고 말이다. 즉 신이 하나밖에 없는 것은 유일신이 아니고 단일신이라는 것이다. 유일신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라는 개념보다는 독보적인 개념이 더 강할 때 사용한다는 말이다.
왜 유일신이 아니고 단일신인고 하니, 그렇게 단일신이 되어버리면 다른 이방신들과 차별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많은 신들 가운데 유일하다고 해서 유일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상은 인정한다는 말인가? 신약에 보면 아예 우상은 없는데, 모든 신은 다 헛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사야서에도 나오고 말이다.
그러니 사실상 처음부터 신은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는데, 다른 것들은 신이 아니라 그냥 신처럼 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마귀가 그렇게 가짜 신을 조작하는데, 인간들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유일신보다는 단일신 개념이 더 맞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어차피 신 개념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져 !!
왜 그런가? 왜냐하면 어차피 이 '신' 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개념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신을 이야기할 때는, 좋던 싫던 간에 인간들이 만든 여러 잡종신들과 관련시켜서 이야기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단일신보다는 유일신 개념이 더욱 합당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렇지요?
◈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이름으로 언약을 !!
아무튼 헤겔은 이렇게 신의 대상화를 가지고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신의 대상화보다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가지고 언약을 남긴다는 쪽으로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서 대상화를 할 수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은 모든 일은 자기 이름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구약성경에는 없는데, 신약성경인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10절 말씀을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이다.
(엡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박용기 목사의 언약개념은?
우리교회 사이트에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손성식 목사님과 조각목이라는 양반이 서로 논쟁한 것을 저에게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거기에 보면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맨 입에 그런 부탁을 해서 좀 아쉬웠지만 말이다. (ㅋㅋ)
거기에서는 로고스의 박용기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손성식 목사님은 박용기 목사의 책들을 20권이나 읽은 사람인데, 그러니 다 읽어보고 비판을 했다는 것이다. 뭐라고 비판했는고 하니까, 박용기 목사가 언약을 이야기하면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출발하지 않고 창세기 1장 28절에서 출발했는데, 하지만 창세기 1장 28절이 축복이지 그것이 무슨 언약이냐고 했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박용기 쪽에서 발끈하고 나섰는데, 왜냐하면 창세기 1장 28절이 3장 15절보다는 분명히 앞서있으니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앞선 것에 들어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들어있다면, 그 축복 속에 3대 언약이 다 들어있다고 여기고 논지를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왜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게 되는고 하니, 십자가를 중간 과정으로 보지 최종단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최고인데, 그런 축복을 인간이 받지 못하는데, 다만 그 축복을 받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손 목사님이 비판을 했고 말이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창세기 1장 28절이 그렇게 앞선다고 보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앞서는 개념이 있는데, 에베소서 1장도 있고, 요한복음 1장도 있고, 골로새서 1장도 있고 말이다. 왜 그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아예 창세 이전부터 예수 안에서 통일되어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따지면 창세 이전보다 더 빠른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 십자가는 전혀 접붙임이 안 돼 !!
그러니 손 목사님의 주장이 맞는데, 모든 것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성자를 딛고 성부에게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유대교 신학인데, 그런 유대교 신학에 십자가를 보너스로 하나 붙여놓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유대교 신학에 이 십자가가 보너스이든 부록이든 과연 붙일 수가 있는가? 반드시 튕기도록 되어있는데, 왜 그런가? 바로 십자가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도대체 십자가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 하나는 마귀신학이고, 바로 그 마귀신학에 의해서 튕겨났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십자가를 그 장엄한(?) 유대교 신학에다 가져다 붙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우주선을 수리하는 초강력 순간접착제로도 붙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런 장엄한 신학도 마지막에 십자가 앞에서 무너지게 할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만든 신학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십자가 앞에서는 그 어떤 신학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박용기 목사님을 사랑하기에 ??
우리가 과거에 영남노회를 만들 때 정관을 그쪽에서 다 베껴왔는데, 그런데 그렇게 도움을 받아놓고 지금은 이렇게 비판을 하니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그쪽을 결코 비방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말이다. 도움을 받고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가 그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코 경쟁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물론 미워하자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농땡이를 치고 사기를 칠 때,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말씀을 붙들고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도 폐쇄적이 되어서,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들과는 견해가 다른 책들을 별로 보지도 않고 말이다. 사실 그럴수록 더욱 더 보아야 하는데 말이다.
◈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을 부정하고 !!
아무튼 하나님의 이름에서 언약이 나온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에게도 역시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을 완전히 박살내고, 하나님의 이름이 담긴 새로운 이름을 언약 대상자에게 남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람' 이라는 이름을 작살내고, '아브라함'이 되게 하는데는 하나님의 이름이 되시는 분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이름은 주의 이름 앞에 완전히 뭉개졌음을 의미하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렇게 자기 이름을 박살을 내었고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자기 이름에 집착하면, 그것은 무효인생 !!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맞상대하는 것이 너무나 외람되고 건방진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리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만약에 하나님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매일같이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충성을 해야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에 집착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살던지 저렇게 살던지, 어떻게 살던지 간에 결코 우리의 이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저는 '무효인생(?)' 이라고 하는데, 80년이 아니라 180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무효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프로야구에서 20대 빵으로 신나게 이기고 있는데, 5회도 되기 이전에 비가 와서 무효가 되면 얼마나 허무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기록은 다 무효가 되는데, 자기가 쳤던 연타석 홈런이고 뭐고 간에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 인생이 자기가 장로로 살았던 목사로 살았던 간에, 마지막에는 다 무효인데, 그렇게 우리는 무효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전혀 모르고서,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하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목사님, 물이나 한잔 ??
그것은 곧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멀리서 그냥 바라보면서 자기 쪽에서 충성을 다하려고 하는 인간의 종교성인데, 거기에 대해서 것을 그냥 그렇다고 이야기할 따름이지 설득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답답해서 물만 들이키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한국교회의 전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득이 더 돌아오는지, 그렇게 모든 것을 자기의 것과 관련시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믿어서 어떤 것을 더욱 더 챙기게 될 것인지, 그런 것을 돌아보면서 자기 자신의 안녕과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을 통해서 뚜껑을 !!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면, "야,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우리가 좋은 대로 한번 해보자" 라고 해도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도저히 다가갈 수 없고 어떻게 할 수 없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이름으로 오셨고, 그 이름이 언약을 통해서 뚜껑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 언약이 아무에게나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자체를 뒤바꾸게 될 대상자를 직접 뽑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뽑아서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담아버리는데, 즉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우상숭배가 무엇인고 하니, 부처를 믿는 것만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 나머지 전부가 다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언약의 기본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은 없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언약이 떨어짐으로서, 이 언약 말고 다른 모든 집합은 모두 다 졸지에 우상이 되고 말았는데, 즉 바알을 섬겨서 우상숭배가 아니라, 그냥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있어도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교회도 모르고 절도 모르고, 그냥 평생을 감자만 캐다가 돌아가신 할머니도 우상숭배자라는 말이다.
◈ 집으로 돌아가도 역시 우상숭배 ??
저는 그 할머니가 나오는 '집으로' 라는 그 영화를 보면서, "아마 저 할머니를 예수를 믿을 거야" 라는 생각을 했는데, 너무 안타까워서 말이다.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고,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데, 물론 광주민주화운동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전혀 모르는 말이다. 대통령이 이승만인지 박정희인지도 헷깔리는 할머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 것도 몰라도 그 할머니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상숭배자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 언약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서 떨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됨으로 인해서, 우상이란 무엇인지, 그 정체가 그만 모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15장 22절에 보면 나오는데,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라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타나니 졸지에 다 죄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평상시에 하던 대로 그렇게 살았는데 그만 죄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요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졸지에 저주를 !!
역시 같은 이야기인데, 이 언약이 떨어지기 이전까지는 "내가 축복을 받을까? 아니면 저주를 받을까? 당연히 축복을 받아야지. 그래도 저주는 정말로 싫어" 라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까불다가 갑자기 아브라함이 등장하게 되니 어떻게 되는가? 그 아브라함과 함께 하지 않으면 졸지에 저주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아니, 세상에 도대체 이런 것을 믿으라고 하니, 도대체 이것을 하늘에서 불이라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야말로 "누가 믿었으리요?" 라는 것인데, 누가 믿겠는가? 오직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들만 믿는다는 것이다.
◈ 산삼은 보약이지만, 복음은 사약 !!
제가 십자가 마을에 '산삼과 복음의 차이점' 이라는 글을 올려놓았는데, 우리교회에 나오시는 최종훈 집사님이 자기가 산삼을 발견하고 난 뒤에 그 경험담을 적어놓았는데,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면서 둘 다 참으로 귀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그 차이점에 대해서 답글삼아 올려놓았는데, 즉 산삼은 모든 사람들이 다 반기지만 복음은 도망을 간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산삼은 보약이라면 보약이지만, 그러나 복음은 주님이 내리시는 사약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 놈아, 니 죄를 니가 알렸다!" 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복음을 받아야만, 비로소 자기가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무엇을 깨달았는가? 자기는 그야말로 입술이 부정한 놈이고 망하게 될 자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데요?" 라는 차원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아브라함을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상 아브라함 본인도 역시나 그렇고 말이다. 물론 아브라함 본인은 그것을 믿었지만, 그러나 그 행색은 믿지 않는 자와 같았다는 것이다.
◈ 복음은, 골룸과 진드기처럼 !!
아까 산삼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그 글에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산삼이라는 것을 우리가 찾아다니는 것이지만,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우리를 찾아다닌다는 말이다. 그리고 산삼은 우리가 골라내는 것이지만, 복음은 한번 붙었다고 하면 진드기처럼 떨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복음이 알아서 우리를 선택하고 구원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무조건 때려죽여도 구원을 받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지옥에 가려고 백 날을 죄를 짓고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코 지옥으로 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천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특징인데, 아브라함이 그런 식이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뒤에 골룸이 붙었는데, 그러니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언제 예수님을 임신할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을 배었다는 말이다. 박신양이 그냥 조용히 보내는 것과 같은데(?),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천사가 와서 말리지 말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그러한 분명한 원칙으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쪽에서 복음을 일깨워야 하고, 착하게 살아야 하고, 그래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원칙은 멀리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서 믿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 왜 인간이 지은 성전은 안 되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에스겔에 이렇게 성전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지어드리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성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전혀 성전이 아니라는 말이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듯이 말이다. (ㅋㅋ)
그렇다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데 어떻게 성전이 존재하게 되는가? 그러니 인간은 믿음이 없는데, 즉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아도 성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니,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성전을 짓지 않아도 성전이 있음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자기가 목회를 하지 않아도 목회가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목사가 믿지를 않듯이 말이다. 즉 자기가 심방을 하지 않아도 심방이 진행되고 있음을 목사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사로 하여금 심방을 시키고 설교를 하도록 하고, 그렇게 목회를 시키는 분이 따로 있는데, 그런데도 목사는 자기가 심방을 하고 목회를 해야한다는 여긴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원칙에 에스겔의 새 성전에게 그대로 !!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이 되게 한 그 원리원칙에 조금도 양보가 없이, 그것이 그대로 에스겔의 새 성전에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원칙이 그대로 듬뿍 담기고 건축이 되는 성전이 바로 에스겔의 새 성전이라는 말이다.
만약에 "목사님,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신다면, 그것은 두 가지 요소인데, 먼저 기존의 이름이 부서지는데, 즉 '아브람' 이라는 이름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새 성전에 그대로 가지고 오면 무엇이 부서지겠는가? 기존의 성전이 부서지는데, 즉 솔로몬 성전이 부서진다는 말이다. 나중에는 헤롯 성전이 부서지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솔로몬 성전과 헤롯 성전을 부수는 이유는, 이렇게 성전을 부수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나오는 어떤 아이디어라도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찬양하는 여호와를 부수고, 인간이 만든 예수를 부수고, 인간이 주장하는 삼위일체를 부수고 말이다.
◈ 성도는 완벽한 수입품 ??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이것도 부수어지고, 저것도 부수어지고, 모든 것이 다 박살이 나고 마는데 말이다. 인간은 그러한 것조차도 생각할 자격도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놈, 니 죄를 니가 알렸다!"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라고 하면, 자기가 완벽한 수입품임을 인정해야지,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하청을 받든지 해서 자체적으로 만들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얼마 가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이야기가 교재에 나오는데, 239페이지를 살펴보자.
** 여호와께서 하실 일은, 이름이 바뀌어진 그 인물을 통해서 원리원칙이 고정적으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의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그 대상이 되는 족장들을 통해서 언약이 미리 확정이 되어있음을 암시한다. 이 언약의 범위 안에서만 일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이신 여호와이시다.
◈ 시편 105편에 나타난 구속사 !!
여기서 시편 105편을 보겠는데, 이 시편 105편이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구약전체의 구속사에서 있어서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의미에서 말이다.
(시 105: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시 105: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시 105: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시 105: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
(시 105: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시 105: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 105: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
(시 105: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시 105:2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시 105:25)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시 105:26)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시 105:27)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시 105:28)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시 105:29) 저희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저희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
(시 105:36) 여호와께서 또 저희 땅의 모든 장자를 치시니 곧 저희 모든 기력의 시작이로다
(시 105:37)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시 105:38)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 이로다
(시 105:39)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시 105: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시 105:41)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시 105:42)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여기 8절에 보면,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여호와의 특징이 자기 언약을 기억한다는 것인데, 그 뒤에 아브라함이 나오고, 이삭이 나오고, 18절에는 요셉이 나오는데, 박영선 목사가 이 부분을 잘 설명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23절 이하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내용이 있고, 또 29절에 보면 10가지 재앙이 나오고, 36절에는 유월절 사건이 나오고, 그리고 40절부터는 광야에서 반석을 쳐서 물을 낸 사건이 있고 말이다.
◈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
그런데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42절 말씀인데,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이상한 일인데, 우리는 무슨 사건이 생기게 되면, 그것을 두고 "우리의 조상 단군을 기억하사"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일어난 일은 지금 우리의 잘잘못을 인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니 말이다.
지금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광개토대왕을 기억하고, 세종대왕을 기억해서 그렇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현재 우리에게 없는데, 우리에게 과거는 그냥 과거로 끝나지, 과거가 현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의 인물들은 죽고 없으니 말이다. 즉 인간이 자기 모든 것을 자기가 하게 되면, 그런 인간이 죽게 되면 그 활동도 마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경우에, 아브라함은 죽어도 아브라함의 언약은 남고, 이삭은 죽어도 이삭의 언약은 남고, 야곱은 죽어도 야곱의 언약은 남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는다' 라는 것은, 이 세상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편 105편이 힘주어 크게 외치고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즉 언약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
그러면 아마 여러분들은 "목사님, 제가 믿지요. 목사님의 강의나 설교를 한두 번을 들은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제가 하는 강의나 설교를 많이 들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정이나 밖에서 하는 일들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하나님에게 달려들더라는 것이다. "왜 제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안 됩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아브라함에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약을 믿는다고 말을 해놓고, 막상 일이 꼬이게 되면 "하나님, 제가 그렇게 열심히 심방도 하고 했는데 왜 그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삐친다는 말이다.
◈ 하나님曰, '언약밖에 난 몰라' !!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냥 들러리이고 일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데, 주님께서 다 알아서 나오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무엇을 기억해서 그렇게 하셨는가?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말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무엇을 기억해서 그렇게 하시는가? 축복할 자에게는 축복을 하고, 저주를 받을 자에게는 저주를 하신다는,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스스로 기억하사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스데반 집사는 천사의 얼굴로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었고, 사도바울은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되어도 감사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선지가 엘리아도 그 언약을 믿었기 때문에 '850:1'로 싸워도 담대히 승리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은, 우리가 좋던 싫던 간에 모든 것이 빈틈없이 언약대로 실행이 된다는 것이다.
◈ 죽은 자도 깨워서 언약대로 하시는 하나님 !!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가 요한복음 5장 29절의 말씀인데, 즉 죽은 놈들도 모두 다시 불러내어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는가? 오직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전적으로 언약의 하나님이고, 이러한 언약을 이루시는데 그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렇게 저주를 받을 자는 저주를 받아야 여호와 하나님답고,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은 안식을 누린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은 고생을 죽도록 하겠지만 말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지음을 받았는데, 그것이 창세기 1장의 말씀이고 말이다. 그것이 다 예수 안에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창세기 1장의 하나님 형상은 곧 예수님 !!
아까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그러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 도대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좍' 하고 펼쳐지는데, 에베소서 1장에도 나오고 말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말이다. 그런 것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우리의 형상' 안에 모두 다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니 그 형상이 무엇인고 하니까, 바로 예수님을 의미하는데, 즉 예수님이 속성이 점점 더 만개가 된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마치 잉크를 종이에 찍으면 하나의 점이지만, 물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되는가? 점점 더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퍼진 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데, 즉 신약시대의 성도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의 성전에는 분명히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러내는 것이다(출20:24).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 잠시 시편에 대해서 !!
시편이 의외로 어려운데, 저도 많이 읽어보지만 보면 볼수록 엄청난 신학이 들어있고, 동시에 유대교 신학이 크게 잘못되었을 알게 되는데, 물론 기존 신학도 문제이지만 말이다. 기존 신학이 이 시편을 참 모르고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성전중심으로 확대가 될 때 어떤 식으로 확대가 되는지, 그것이 시편에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성전중심으로 활동을 하시는데, 즉 성전의 그 기능으로 활동을 하는데, 그 기능이 엄청나게 다양하다는 것을 이 시편을 통해서 느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지 싶은데 말이다.
◈ 아니, 왠 저주시(詩) !!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시편을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면, 이 시편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제일로 난처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이 시편은 원수가 망하면, 그것을 그렇게 좋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을 바로 '저주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그러한 저주를 좋아하고, 남이 못되는 것을 기뻐하느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들도 그렇게 원수가 잘못되는 것을 보고서 좋아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원수가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고 좋아한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오히려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한번은 제가 "지옥에 갈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라고 하니, 어떤 분이 그것을 가지고 욕을 하더라는 말이다.
하지만 왜 이런 저주시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성전중심으로 일을 하시는데, 그 성전의 이름이 곧 '시온성', 혹은 '예루살렘성'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시편 24편에 나오는 "문들아, 들릴지어다" 라는 표현자체가 다 성전중심이라는 것이다. 3절에 나오는, "성전에 오를 자가 누가 있으리요" 라는 표현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
(시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시 24: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 24: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시 24:10)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 시편이 왜 성전중심인가?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성전중심인고 하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리는 모든 일들이 성전으로 그 초점이 모인다는 것이다. 도착지점이 바로 성전이라는 말인데, 즉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서 언약대로 일을 하시는 그 최종 종착점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건성으로 알게 되면 기존 구약 신학자들처럼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목적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라고 하는데, 그 임마누엘이 하나님이 우리의 성전이 되시는 것이고, 아무튼 그렇게 설명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외형적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런 차원이 전혀 아닌데,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모든 일의 최종점이 성전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성전과 신전은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 시편 전체주제 -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
그래서 시편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들만 성전에 골인시키는 그 여정 가운데, 그렇게 분리시키는 작업의 능력이 성전자체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것이 시편 1편에 나와있는데, 즉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이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성전에 합류하는데, 그러니 나쁜 놈들은 모두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편에 반드시 저주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것을 기뻐해야 하는데, 즉 성전을 성전답게 하기 위해서는 저주를 받을 놈들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전은 저주하는 기능이 있고, 아울러 축복으로 인도하는 기능도 있다는 것이다.
성전의 그러한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시편인데, 그렇게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성전으로 오는 도중에 너무 너무 좋아서 부르는 노래가 바로 이 시편이라는 것이다. "야호, 신난다. 나쁜 놈들은 잘 떨어졌다. 우리는 인도함을 받는 주님의 백성이고 양이로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성전을 쳐다보면서 모인다는 것이다.
◈ 성도는, 하늘에 있는 성을 사모하면서 !!
이것이 신약성경인 히브리서 11장에 16절에도 보면 나오는데, 즉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서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성도는 당연히 그 하늘에 있는 성을 사모하면서 나아가고 말이다.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런데 그러한 성으로 가는 도중에 성도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과 고난이 생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뭐라고 고백하는가? 시편 23편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원래 성전에는 누가 들어가도록 되어있는가? 모세율법에 의하면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가는데, 그런데 시편에 오면 어떻게 되는가? 모두가 다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가 다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 버려진 돌들이 모여서 !!
이것을 염두고 두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모퉁이 돌' 이라고 했는데, 이 모퉁이 돌은 원래 성전을 건축하는 건축자들이 쓰고 나서 버린 돌이라는 말이다. 자기들은 나름대로 성전을 짓는다고 하면서 지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그들이 성전을 지으면서 "이런 보기에도 흉한 돌은 버리자. 이제 쓸모가 없어" 라고 해서 '떼구르르' 굴러 버려진 돌이, 그렇게 버려진 돌이 기초가 되고, 또한 그렇게 '떼구르르' 굴러서 버려진 돌들이 함께 모여서 새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말이다.
◈ 다윗과 다윗의 기능 !!
그래서 성전이 두 개인데,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엘리야가 두 사람이라고 말이다. 먼저 하나는 엘리야 본인이 있고, 그 다음에는 그 엘리야의 기능이 있고 말이다. 이것이 말라기에는 중첩이 되어서 나타나는데, 다윗과 다윗의 기능도 중첩이 되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정말 엘리야가 오는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를 봤나?" 라고 해서, "예. 봤습니다" 라고 하면 그 엘리야는 그만 사라져버리고, 진짜 엘리야의 기능은 엘리야가 아니라 세례요한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엘리야는 아무 것도 아니니 말이다. 엘리야는 그냥 한 명의 남자인데, 그래서 자기 기능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엘리야는 엘리야답게 행동할 때만 엘리야이지, 그것이 끝나고 나면 그냥 평범한 남자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엘리야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언약은 누가 이루는가? 세례요한이 이루는데, 그러면 그 세례요한도 그 기능이 끝나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세례요한은 평범한 남자로 돌아가고, 바로 그 기능은 예수님이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든지 세례요한이든지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로 통일이 되는데, 그것을 성전을 통해서 하신다는 말이다.
◈ 에스겔 성전에서 다윗 왕을 !!
그래서 에스겔에서 말하는 성전은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을 다 파괴시켜버리고 다 성전 안으로 쫓아 넣어서, 그 성전에서 비로소 그리운 다윗 왕을 만나게 되는데, 그 왕은 동쪽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왕이 누구인가? 여호와께서 친히 왕이 되어서, 백성들도 성전에 들어가고, 그 성전에 여호와께서 '다윗' 이라는 이름으로 오셔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서, 자기 자신이 성전임을 말씀하셨고, 그러니 예수님이 곧 처소이고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오는데,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그때는 너희가 내 안에 너희가 아버지 너희 안에 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거처를 마련해서 함께 하겠다는 것인데, 17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고 말이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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