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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9. 4. 24) 2강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광주 강의(09. 4. 24) 2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4. 24) 48-2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을 봅시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여기 ‘그릇’이 나옵니다. 첫째 시간에 제가 천국과 지옥에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개성이 없다고 했지요. 사건이 ‘나’라는 존재를 없애잖아요.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뭐냐? 사건이 존재를 없애는 동시에, 이 사건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요. 그러면 기존의 ‘나’라는 존재는 새로운 존재와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개성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아예 그릇이 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사건이 오게 되면 우리의 존재가 토막이 나서 존재를 사건으로 만든다. 그러면 토막 난 그 사건은 다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가 된다. 새로운 존재를 ‘존재2’ 라고 합시다. 새로운 존재는 이 안에 뭐가 가득 들어있는가 하면, 나는 없고 예수님이 벌이신 말씀의 사건만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4장 8절에도 나와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모든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의 사건으로 가득 찬 존재지요. 사건으로 가득 찬 존재니까 이것을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릇의 특징은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뭔가 담을 것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그릇은 뭔가가 담겨야 그릇의 용도가 되는 겁니다. 그릇 자체는 아무 의미 없어요. ‘너는 그릇이다.’라는 말은 ‘너에게 뭔가가 담긴다.’는 것입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보았는데 “이근호는 구세주다.”라는 글이 있었어요. 놀라서 무슨 내용인가 자세히 보니까 ‘일본(주빌로 이와타) 펜들에게 이근호는 구세주다.’라는 것입니다. 이근호가 2골을 넣어서 난리가 났어요. 이근호는 그릇입니다. 자기가 속한 팀을 위해서 계속 골을 넣어야 돼요. 그러면 개성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누구의 이용물이 되지요. 그게 바로 본래의 인간 모습입니다.

원래 인간이란 것은 아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을 남자로 바꿔버리고, 아담의 몸을 이루는데 아담 혼자로는 안 되고, 남자 몸에 여자를 집어넣어서 남자와 여자가 합해서 아담이 되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아담이 모든 생물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러나 아담이 이름을 붙이지 않은 나무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둘 다 이름이 없어요.

아담이 이름을 못 붙였다는 말은 누가 더 높은 레벨에 있단 말입니까? 인간은 생명나무와 선악과에 종속되어 지시를 받게 되어 있지 인간이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장악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합해서 두 사람이 이제 한 몸이 되지요. 그런데 이것으로 인간이 아니고 인간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이것까지 함유할 때만 본래의 인간이 되는데, 이 아담과 하와가 그저 한 몸 된 것이 이름 붙여준 그 사건 때문에 된 것이라면, 이제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준 사건에 의해서 이 인간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한 요지가 뭐냐 하면,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인간을 위한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그런 인간은 만들지를 않았어요. 인간은 외곽에 종속되어 있어요. 디모데후서 2장 26절에 ‘마귀에 사로잡힌 자’가 나오는데,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가 나오지요.

마귀는 알아요. 인간은 절대로 단독적으로 인간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을. 마귀도 안 보이고 인간이 뭔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개성이 있다. 인간은 인간을 위하여 산다.’ 그래서 인간의 최고 욕망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을 보면서 마귀는 비웃습니다. “이 무식한 인간들아!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 밥이지.”

인간은 마귀의 올무에 빠지든지 아니면 주님께 사로잡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께 사로잡힌 자의 특징은 ‘전에 나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과거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 진짜 주님께 사로잡힌 자입니다.

마귀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가 나를 경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5절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해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지요. 오 목사님도 이 본문으로 설교 한 것으로 아는데.

사람은 왜 사는가? 엎드리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이단들 욕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먼저 본인이 엎드릴 줄 아느냔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평소에 그런 이야기합니다. “성도라면 늘 주님 앞에 고개 숙이고 살아라.”

그런데 사람들은 엎드리는 것을 생략하고 경배하려고 해요. 그래서 문제가 생겨요. 안 엎드리니까 “경배하려고 했는데 우리 애가 아픕니다. 경배하려 했는데 사업이 안 됩니다. 경배하려고 하는데 ---” 자꾸 엎드리지를 않는 거예요. 왜 못 엎드리는가? 말씀이 자기 자신을 안 찌르니까 자기 속에 숨은 것이 안 나오고 자꾸 존재만 나오니까. 사건이 들어와야 되는데 존재만 나오니까 “옛날에는 잘 나갔는데 지금은 요 모양 요 꼴이지.”

엎드릴 줄 모르고 고개 쳐들고 경배하려고 해요. 계시가 오게 되면 사람은 욥처럼 유구무언입니다. ‘그래 너희들은 마귀한테 엎드려라. 나는 주님께 엎드리는 것이 나의 사는 보람이다. 세상에 이런 기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님 앞에 엎드릴 줄 아는 인간이 되다니 이건 정말 기적이다.’

내가 엎드릴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이것이 행복입니다. 늘 꼿꼿하게 머리 쳐들고 살던 인간이 누구한테 엎드리게 된다는 거예요. 엎드려 경배할 대상이 있다는 것. 그 엎드린 자세로 그대로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지옥은 엎드리지 않고 가다가 억지로 불 속에서 꺾이는 것이고, 천국은 지금부터 엎드리다가 천국에서도 계속 엎드리면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는 것이고.

다시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진수는 남자, 여자 둘이 한 몸 된다고 인간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간이 인간되어 있으면서도 인간 위에 존재하는 것. 하나님 편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인간이 손대면 안 돼요. 이것은 하나님 차원이에요.

인간이라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조건 하에 생명나무를 따먹어야 한다는 그것에 종속되고 지배받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께 소속되지 독립된 자가 아닙니다. 날 때부터 이런 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귀에게 놀아나지 않으면 주님께 놀아나든지 둘 중 하나인데 이 모습을 ‘그릇’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릇은 뭔가 비어있는 상태고, 그 빈 상태가 완료가 아니라 뭔가로 채워져야 되는데 무엇으로 채우느냐?

로마서 9장 21-23절을 보겠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권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여기에서 진노의 그릇의 특징이 뭡니까?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긍휼의 그릇의 특징은 계속해서 부요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노의 그릇은 하나님이 성질 죽여가면서 그냥 참아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관용을 끊고 부요함을 끊으면 누가 진노의 그릇인지 긍휼의 그릇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제가 진노의 그릇입니까, 긍휼의 그릇입니까?” 라고 해요. 이것에 대한 답변은, 뒷부분과 줄을 연결하면 됩니다. 유치원생들 이끌 때 선생님이 하는 것 있지요. 오리 - 꽥꽥. 참새 - 짹짹. 돼지 - 꿀꿀. 이렇게 이어져야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현재 우리가 있는 것이 부요함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긍휼의 그릇과 줄이 이어지고, 관용됨을 모르게 되면 진노의 그릇입니다.

진노의 그릇은 이 말씀 전체를 부정합니다. 진노의 그릇은 자신을 진노의 그릇으로 절대 인정 안 합니다. 진노의 그릇은 자기가 진노의 그릇이란 것을 다 부정하고 자기 존재를 확장하고 곤고히 하는 겁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다섯 가지 욕구입니다. 존재의 욕구로부터 소속, 안전, 인정, 자아실현까지.

긍휼의 그릇은 이 말씀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하는 일마다 너무너무 잘 되고 번성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계시는 거예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마지막에는 잘 먹이듯이.

이런 말이 있어요.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다.’ 거지 나사로가 대표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아무리 추하고 개들이 핥아도 본인은 느긋합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이기 때문에 이 구조(로마서 9장 21-23절)가 디모데한테 들어와 있어야 이것이 사건화 되어서 외친단 말이지요.

외치게 되면 2,000년 시간 간격을 뛰어넘어요. 왜냐하면 말씀 자체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변하지 않는 것을 믿어요. 나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말씀의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릇의 특징은 그릇을 자랑하지 않고 담긴 내용물을 자랑합니다. 그러면 이런 그릇 이야기가 어떤 효과를 주느냐? 그림을 보세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분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자기는 장남입니다. 장남은 꼭 장남 티를 내요. 아버지 죽었는데 자책감에 잠을 못자요. 그런데 차남과 막내는 유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잠을 못잡니다. 공짜 돈이 생겨서.

그런데 그릇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릇은 현재 그릇 되어서 그릇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그릇을 만들고 합당한 사랑을 여기에 담는 식으로 그릇조차 창세전부터 만들어서 나와요. 좋은 그릇과 나쁜 그릇이 창세전부터 만들어져 나와요. 그러면 이 사건이 개인적인 성격과 위치 이런 것을 덮어버려요. 마치 노아 시절 홍수가 모든 것을 뒤덮듯이.

사건이 휩쓸고 지나가면 어떻게 되는가? 장남이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했다는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안 죽고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창세전부터 내 운명이 확정된 채 태어나야만 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긍휼의 사건과 마주치면서 개성이 사라지고 긍휼의 부요함으로 다시 그릇에 담기지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애석함이 담긴 그릇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담을 때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남들에게 ‘나는 큰 사랑을 입고 있습니다.’라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복잡하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그릇 만들었구나!’ 라는 그 그릇은 오해할 소지가 많은 그릇입니다. 그 그릇은 내 존재, 내 자존심을 키우는 그런 해석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게 되면 내가 생각한 그릇이 아니고, 비록 아버지의 죽음이나 그런 슬픈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조차 나에게는 긍휼의 부요함으로 주어지는 사건으로 깨달을 때 그 그릇은 긍휼을 크게 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반대로 어떤 불신자가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너무너무 사업이 잘 돼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볼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보입니까? 그 사람이 부자 된 것도, 하나님이 진노를 퍼붓기 전에 많이 참으면서 관용하시면서 주어진 부라고 보는 거지요.

그래서 창세기에 예정된 그 바람이 불면, 그 사람이 의사든 판사든 장관이든 그 사람은 개성이 없고, 그 사람이 뭘 담고 있느냐(진노의 그릇, 혹은 긍휼의 그릇) 하는 하나의 그릇으로 규정받지요.

이렇게 그릇이라고 지칭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서부터 있었던 인간에 대한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생명나무 사건, 선악과 사건으로 보는 인간관이 바로 주님이 보시는 시선입니다.

“주님! 저 그릇 맞지요?” 라고 알 때, 예수님이 지금 우리를 보고 있는 그 관점을 자기도 지금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그릇 맞지요?” “맞는데, 어떻게 알았어?” “성령께서 알려주시니까 알았습니다.”

그릇이 왔을 때 ‘주님이 세상을 어떻게 봤을까?’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이 주님이 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하나의 그릇으로 보는 것. 이렇게 되면 이제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왜 했는가? 지금 논쟁이 벌어졌거든요. 율법에 대한 다툼이 일어났는데, 17절에 보면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후메내오와 빌레도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 2권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위책이고 또 하나는 생명책인데, 행위책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기준은 뭐냐 하면, 예수님처럼 행해야 구원 받습니다. 그러니 행위로 구원 받을 사람은 끝났습니다. 구원 못 받고 지옥 갑니다. 그런데 생명책에 있는 사람은 구원 받을 때 반드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생명책, 행위책 이것을 거꾸로 해 봅시다. 방금 인간 쪽에서 봤는데 반대로 예수님 쪽에서 보면 결국, 예수님 속성 가운데 두 가지 속성이 나눠진 것이 두 개의 그릇이에요. 맞지요? 방향이 인간 쪽에서, 심판주가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행위로 구원 받는 것도 인간은 실패하고, 생명책도 실패하지요. 생명책이 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공로로 구원 받으니까.

명단이 생명책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구원 받으니까 역시 구원 받는 것은 “나 생명책에 이름 있다.” 이것을 자랑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공로를 자랑해야지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는 말씀이 있어요. 이 말 ‘명단 있음’에 대해서 뭔가, 예수님께서는 사건을 율법을 뚫고 율법 밑의 저주 아래(마귀 아래) 있는 우리를 찾아오는 그 과정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 구원 받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 쪽에서 다가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 쪽에서 두 가지 종류(진노와 긍휼)가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속성이 두 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그릇’이라고 했을 때, 지금 관점이 뭐냐 하면 불신자 관점이에요. 행함. 행함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있으니까,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사람이 선을 행한 만큼 구원 받는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사람이 선을 행하려면 율법을 알아야겠지요. 그러면 누가 유리합니까? 율법을 많이 아는 사람은 구원 받기 쉽고,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구원 받기 힘들지요.

그렇다면 단계가 어떻게 돼요? 단계가 둘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많이 아는 사람, 대충 아는 사람, 조금 아는 사람, 전혀 모르는 사람. 이렇게 여러 층으로 나눠질 것이 아니냔 말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18절에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라고 했는데, 이 말씀의 뜻을 우리는 모르는데 암시가 있어요. ‘믿음을 무너뜨렸다.’고 해요. 그러면 이 디모데후서 2장 1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미쁘다고 되어 있지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이 부분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피곤하시겠지만 정신을 좀 차려주세요.

지금 사람들의 관심사, 특히 유대인들의 관심사가 누구를 바라봅니까? 사람을 바라보지요. 그래서 ‘네가 잘 났나, 내가 잘 났나?’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잖아요? 부부싸움도 항상 자기가 잘났다고 해서 벌어집니다. 지금 이것은 믿음의 세계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 누가 잘났나? 어린 아이들 노래자랑 하는 것처럼.

거북이와 토끼가 경쟁하면 누가 이깁니까? 동화에서는 거북이가 이기지요. 그런데 실전에서는 거북이와 토끼가 경쟁을 안 합니다. 왜? ‘우리가 사람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해요. 거북이와 토끼는 지금 믿음의 세계를 바라보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지금 인간들이 죄성에 빠져서 서로 누가 잘났나를 경쟁하면서 따져요. 이 자체가 믿음의 세계가 아닙니다.

토끼는 그냥 바라보면 되지만 인간은 그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는가 하면,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리라.’ 죽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 나를 바라보는 차원이 아니고 ‘믿습니다.’라고 할 때는 상대방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믿잖아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묻기를 “너, 이번에 성적 어떻게 나왔어?” “나는 주와 함께 죽어서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을 믿어” 주와 함께 죽는다는 말은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쉽고도 어려운 말인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을 믿으면 될 일이지 칼 들고 자살할 필요 없어요. 자살하면 자기 행위가 개입 되잖아요. 믿음의 행위가 아니고 마음으로 믿어지면 믿는 것입니다.

자, 지금 ‘부활이 지나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라요. 그런데 그 말 뒤에 ‘믿음을 무너뜨린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부활이 지나가서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자기 자신만 믿게 됩니다.

그럴 때 사도바울은, 사람은 그릇이고 그릇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릇은 하나님이 주신 것만 담을 때 그것을 ‘좋은 것’ 혹은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잣집엔 가난한 사람들이 꿈도 못 꾸는 것들이 있어요. 부잣집은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가난한 집의 금그릇 보다 더 좋은 것을 담아요.

위의 믿어야 될 것을 보지 않고 인간들이 생산하는 것에 자꾸 신경을 쓰니까,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고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 해서 살련다.’ 이렇게 나와요.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도하면 내 기도 때문에 내가 산다.’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목사 본인이 안 믿어요. 안 믿는 목사를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왜? 자기들도 믿지 않으니까. 그래서 안 믿는 목사와 안 믿는 교인들이 주고받는 것은 전부 ‘행함’입니다. 평소에 내가 달성할 수 있는 것.

그러면 그 그릇은 누구 그릇입니까? 이것은 사건이 와서 부숴버린 그릇이 아니고 원래부터 있었던 자기 존재를 잘 갈고 닦아서 자기 존재를 그릇으로 봐서 거기다가 자기 행함을 담는데, 이것은 바로 부잣집 그릇이 아니고 가난한집 그릇인데 이 그릇의 특징은 믿음을 필요치 않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그런 동네에서 잘도 통용되는 유대인들의 율법체계란 말이지요.

이것과 디모데는 정면충돌을 한 겁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말을 한 겁니다. 제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고 자신은 하나의 사건 덩어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건에서 또 다른 사건으로 옮겨갈 때 그것이 또 존재가 되면 그 존재는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고 날 위해 죽었다가 살아난 주님의 것을 담기 위한, ‘나는 비록 세리고 창기라 할지라도 나는 주님의 보혈의 피가 담겼다.’ 우리 사모님 쓴 글에 그런 내용이 있었지요.

창세전 예정하신 뜻에 의하면, 내 모습은 창녀요 세리지만 이것은 날아가 버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부요하심만 남아요. 그러니까 그릇도 하늘에서 운반된 것이고, 그 그릇에 담길 것도 하나님의 것이고. 그 그릇과 담길 것 사이에 믿음이라는 본드(접착제)가 떨어지지 않네요. 손바닥과 손등을 어떻게 나눕니까? 껍질을 벗기면 됩니까? 벗겨진 그 자리가 또 손바닥이 되는데. 등껍질을 벗긴다고? 벗겨보세요. 벗겨진 그것이 또 손등인데.

물체를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고 밑에서 보느냐, 위에서 보느냐 하는 관점 차이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그릇이란 것도 주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릇도 긍휼이고,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긍휼이고, 긍휼이기 때문에 담기는 것도 주님의 것이 담기니까 결국 이것은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거지요. 내 몸 자체부터 내게 일어나는 사건 전체가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믿음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부활은 뭐냐?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부활이 지나갔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무너뜨렸다고 나와요. 부활이 지나갔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되고 할 때, 여기 마귀에 사로잡힌 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성경의 내용은 뭔가 하면, 십자가 지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부활이 있지요. 부활 사건 다음에 또 있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 오심’입니다.

성령 오심은 십자가, 부활에 포함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성령께서는 자기 개성을 나타내는 분이 아니고 예수님께 일어난 사건을 되풀이 하는 분이거든요. 이게 요한복음 16장에 나와요. ‘보혜사(성령)가 오면 그분은 자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예수님)것을 가지고 이야기한다(요16:13-14).’

성령께서는 자기 부인을 잘 해요. 성령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 쪽으로 향하도록,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에요. 성령 소개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 아니고.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자신은 투명인간? 하나의 점선이 되지요. 성령을 보려고 하면 안 돼요. 성령이 보게 하는 것을 봐야지요. 그것이 뭡니까?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와서 십자가와 부활을 전체로 퍼지게 하겠지요.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다시 정리합니다.

성경에서는 십자가, 부활 다음에 뭐가 온다?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영원토록 끌고 가지요. 그러면 자꾸 십자가와 부활만 부각됩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재림은 이것들에 파생된 것으로 재림이 옵니다. 그래서 이것 전체를 ‘십자가’라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종말로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들은 믿는 게 없으니까, 자기 율법적인 것 밖에 모르니까 성경과 반대입니다. 십자가 사건 그 다음에 부활 사건. 둘 다 마귀적인데, 하나는 부활에 제사 드리는 사람. 이것이 부활절 지키는 것이죠. 그리고 또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자들. 이 양쪽 다 부활을 과거의 지나간 사건으로만 취급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성령께서 부활을 적용시키는 것은 모르고.

이렇게 되면 십자가 질 때는 십자가 믿고, 부활 할 때는 부활 믿다가 지금은 뭘 믿습니까? 현재 일어나는 것을 믿어야 되지요? 현재 일어나는 것을 믿겠다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아닙니까? 교회 행정, 제도.

그런데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지금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지나간 십자가.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 이야기하고 부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께서 첫 번째 부활하셨고 그 다음 부활이 우리 것이다.’ 계속 십자가, 부활을 이야기 해요. 지나간 것이 아니지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거잖아요.

십자가 사건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믿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이제 이야기하지 말고, 지금 신께서 어떻게 기적을 일으키는가?’ 기적을 따로 챙기는 거예요. 이런 인간들 명단이 17절에 있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입니다. 이 사람들 지금 어디 가 있는가? 지옥에 가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11절에서 “미쁘다.”는 것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것이요.” 라는 것인데, 이것을 사람들에게 믿도록 요구한다는 자체가 무리라는 것을 알아요. 알지만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누구인지 그 사람을 찾고 싶어 하는 거예요.

만날 때, 처음 창세기에서 약속하기를 이쪽에서 ‘뻐꾸기!’ 하면 저쪽에서 ‘고구마’ 라고 서로 암호가 주어져 있는데,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암호인데, 이쪽에서 “예수와 함께 죽으면” 하고 외치면, 저쪽에서 “예수와 함께 살리라.” 이렇게 화답해서 ‘아이고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이렇게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동문서답을 하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형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교회에 사람이 안 모이고, 부흥이 안 됩니다. 제임리 목사님이 왜 탄식을 하는지 압니까? 곶이 곶대로 십자가만 전하니까 사람들 반응이 ‘웃기고 있네.’ 이렇게 나오니까 목회가 안 돼요.

“암호를 대라!” 그런데 상대가 암호를 몰라요. 그 암호가 하나님 주신 사건인데 ‘십자가’라고 하면,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사는구나.’ “나는 주를 위해 죽습니다. 나는 주님 십자가 믿습니다. 방주 밖에 있는,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그것보다 방주 안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리라.’는 말씀 그것을 믿습니다.” 라고 뭔가 반응이 나와야지요.

이런 믿음의 형제를 찾아 나서라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간단해요. 여러분들이 친한 친구를 만들려고 하면 세상 이야기하고 좋은 이야기하면 가까워 질 수 있는데, 믿음의 형제를 만나기 원한다면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교회 안 다녀서 성경도 모르고 해도 ‘그 이야기 마음에 끌린다. 다음에 또 듣고 싶다.’ 뭐 이런 놀라운 기적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그릇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릇이었습니다. 진노의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긍휼이 부요하게 넘치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먹고 마시고 거기에 몰두하면서 살았습니다. 사건이 오셔서 우리를 난도질해서 이제는 우리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복음을 외칠 수 있는 사건 덩어리의 참된 그릇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5. 15. 10:4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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