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5월 12일 조지래드 28 신약신학-제41과 베드로전서
부산 5월 12일 조지래드 28 신약신학-제41과 베드로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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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12 조지래드 베드로전서 (일치성=인위적 조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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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12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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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19 16:04
부산090512a조지래드28신약신학-베드로전서a
20090512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전서
(강의:이근호 목사)
시간됐는데 베드로전서 해봅시다.
베드로전서, 래드의 교재를 읽어보면, ‘하자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이겠지요. ‘손댈 게 없다. 문제점이 없다.’ 이렇게 생각되는데, 베드로전서, 래드의 요약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그냥 인문학을 한 사람이 베드로전서 보고 요약해보라 하면 나올 수 있는. 마치 내가 불교 경전을 요약하라 하면 요약할 수 있듯이, 요약할 수 있는 게 되니까, 그건 육적이니까.
영적인 사람이 봤을 때 베드로전서 하고, 육적인 사람이 분석할 때 베드로전서가 뭔가 모든 관점이 달라도 달라야 되거든요. 같은 구약을 놓고 아비가 마귀가 되는 유대인들이 구약 해석한 것 하고, 예수님이 구약 해석하는 것 하고 달라도 달아야 되잖아요. 래드의 베드로전서 보면서 ‘육적인 사람이 볼 때 이렇게 볼 수 있구나.’ 하는 그걸 많이 느꼈어요.
어디서 그걸 느꼈느냐 하면, 중간, 중간에 읽어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베드로는 모든 걸 익히 알기 때문에 다른 데 강조했다는 거예요. “성도의 삶에 대해서 강조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핵심적인 것은 이야기 안 하고, 성도의 삶에 집중해서 그렇게 했다. 제가 글을 써보겠습니다. 래드도 마찬가지고, 기존의 모든 신학자들도 마찬가지고, 신학자의 열 가지 문제 있잖아요. 갈수록 더 짙게 느껴져요. 그때 좀 더 세게 할 걸
‘원래의 자리’, 다른 말로 하면 ‘창조의 자리’ 아닙니까. 이것이 베드로전서라는 성경책이 있으면 여기 문자, 문장들이 있다 이 말이죠. 여기서 뿜어 나오는 그 힘은 우리를 쳐다보는 베드로전서를 쳐다보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이 문자 뒤로 가서 원래 자리, 창조의 자리에서 다시 베드로전서를 보기를 원하는 글들이에요.
위에서 그냥 베드로전서 보는 게 아닙니다. 마치 국어 시험문제 지문 내놓고 다음 중 저자가 의도하는 것 수능 시험 치듯이 그런 식으로 문단 나누기 할 문제가 아니에요. 프리셉트 할 문제가 아니고, 원래의 자리에서 베드로전서를 보게 되면, ‘풍덩’ 깊은 우물에 돌 던지면 한참 기다려서 소리가 들릴 정도로 깊은 우물에서 울려나오는 주님의,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 이런 것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어요.
그냥 껍데기만 문맥상 스쳐지나가는 식으로 해버리면 육적인 사람들도 베드로전서에 대해서 남의 이야기하는 것처럼 쉽게, 쉽게 할 수 있다 말이죠. 만약에 베드로전서가 신문기사다. 신문기사를 읽을 때 이거는 불교신자나 기독교신자나 관계없이 같은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죠.
그러나 신문기사가 되던, TV드라마가 되던, 영화가 되던 간에 영적인 사람은 항상 사물을 볼 때 자기가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자기가 출발했던, 자기를 태어나야 했던, 자기를 만든 창조의 자리에서 와버리면 여기서 해석하는 자아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해체가 되죠.
쉽게 말해서 뭐가 되었든 말씀을 대할 때 이렇게 해석을 해보겠다는 나 자체가 다시 한번 분해 돼버리고, 오징어 구은 것 째듯이 찢어버리는 그런 경험이 있어야 돼요. 그걸 안 찢게 되면 주님의 창조의 능력은 너무 단단한 나로 인하여 가려지지만 나를 찢어버리면 단단한 나에게 그동안 가려졌던 원래 주님의 창조 능력이 나의 자아성에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말을 어렵게 시작했는데 쉽게 합시다. 두 가지를 써보겠습니다. 인위적이냐 아니면 불가피하냐. ‘인위적’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 인간들끼리 속닥속닥이 가능한 거예요. 거룩하라. “주여, 제가 어떻게 하면 거룩하겠습니까?” 속닥속닥이 가능한 거예요. 형제를 사랑하라. 형제 둘이 사랑하자. 속닥속닥이 가능한 겁니다.
베드로전서를 보통 성도의 삶이라고 여러분 그렇게 알고, 지금까지 모든 이천 년 역사에 그래 알고 있었어요. 어느 누구도 의문점을 제시 안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의문점 오늘 제시하고 싶어요. 뭐냐 하면, 성도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베드로전후서가 있다면,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그 구상과 그 의논을 누구하고 합니까?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베드로전서에 말씀 나오지요.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서서 의논하잖아요. “거룩해야 돼.”라고 할 때 누구하고 의논한 거예요.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한 사람이 없어요. 누구보고 의논하겠습니다.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즉 너희들도 거룩하라.” 할 때 “예,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설 때 누구하고 의논한 거예요. 자기 자신하고 의논하죠.
거기서 라캉이 뭐냐 하면, 인간은 두 조각으로 나눠져서 자기가 자기하고 의논한 겁니다. 이게 바로 윤리 아닙니까. 윤리도덕이란 말이죠. 그래놓고 하는 말이, “어이, 내 양심아.” “나는 양심, 너는 자아.” “양심이 이 정도하면 거룩하다 하겠지.” 저 하늘나라 주님께서 “아직까지 거룩 안 하나?” “조금만 기다려 보이소. 지금 다 돼갑니다.” “이것 지키면 거룩하겠지.” “하나님 준비됐습니다. 자, 보세요. 제 솜씨를. 제가 고아와 과부를 돌봤습니다. 짠~ 어떻습니까? 원하는 대로 제가 맞춰드렸지요.”
이런 아이디어 말고 다른 아이디어가 또 있을까요? 사람에게서. 그걸 인위성이라, 인위적이다. 인간들 자기들끼리 또는 나아가 내 자기들끼리. 인위적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베드로전서에 나오니까. “성도는 고난 가운데 참아야 되느니라.”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럼 돌아서서 누구하고 의논하죠? 나하고 내 양심하고 의논하는 거예요. 또 나와 내 자아와 의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속닥속닥하는 거예요. “어이, 고난 가운데 힘써 있으라 하는데 니도 나고, 나도 나니까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참으라 했으니까 참자.” 그걸 누구하고 의논한 거예요? 자기 자신하고 의논하죠. 그걸 저는 인위적이란 말이죠. 일방적이란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작위적 또는 자의적. 스스로 조작한다 말이죠.
우리에게는 주위에서 어떤 명령과 지시가 오게 되면, 그걸 조작해내는 명령과 내 행동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조작된 ‘조작성’을 갖고 있어요. 인간에게는. 뭐 어려운 것 아니에요. 간단한 거예요. 어린애에게 초등학생에게 엄마가 “야, 너 성적 올려라.” 했단 이 말이에요.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 치거든요. 그럼 20등한 애가 10등 됐어요. 그러면 조작성, 작위성에 들어가죠. “10등 올렸으니까 이것은 어머니의 요청에 일치 된 것이야.”라고 일방적으로 자기에게 조작해버리죠. “어머님 성적 올렸어요.” “몇 등 했는데?” “10등이 뭐야. 내가 원하는 것은 5등이었어.”
‘5등이었어.’라는 어머니의 기준과 현재 벌어진 결과에 대해서, 어렵지만 해봅시다. 이걸 결과 지나지 않고 이 결과에다 뭘 투입하느냐 하면, “내가 열심히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라는 작위성, 인위성을 여기다 일치시켜버려요. 10등한 것도 처음부터 10등 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결과가 그렇게 나왔는데 마치 예를 들어서 목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이번 달에는 교인수가 불기를 원합니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두 명 불었을 때, 그 두 명 불어난 것이 “이번 달에는 교인수가 불기를 원합니다.” 하는 자기의 요구가 두 명이라는 결과로 일치된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죠. 여기서 자유로울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전에부터 이야기한 그걸 가지고 모든 인간은 행동에 대해서 자기 정당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로마서 10장에 보면,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자기의 의를 위해서 열심을 내는데, 열심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업적, 실적, 그 기대치, 예상치를 없는 열심은 없어요. 반드시 기대치, 예상치 그것을 향하여 일치시키려는 그런 시도가 있다 이 말이죠.
베드로전서에서 성도의 삶, 이천 년 역사 가운데 베드로전서 그렇게 이야기 다 했어요. 여기 읽어보면 내용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의 삶을 이야기했다. 거룩하라, 전부다 이런 이야기하는데 그럴 때 그 거룩이라는 것이, 내가 묻는 것이 ‘인위적이냐’ 아니면 ‘불가피한 것이야’ 이 말입니다. 불가피한 거란 뭐예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거룩한 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천 년 역사 동안 베드로전서란 성도의 삶, 인위적으로 이제는 하나님 은혜를 받아서 내 쪽에서 뭔가 작업을 이뤄야 된다는 그 인위성을 주장한 사람이, 만약에 내가 지금 불가피성을 이야기해버리면, 베드로전서는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이라고 이야기할 때에 그들은 나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면 “인간의 자아는, 자유의지는 어디 있느냐? 성도가 로봇이냐?” 이렇게 나올 거잖아요.
그때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모든 말씀은 무슨 자리에 있다? 창조의 자리, 원래의 자리로 해체, 오징어, 쥐포 뜯듯이 뭔가 말씀이 나를 산산조각 뜯어나가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런 구조를 생각해볼 때.
래드의 베드로전서를 쭉 보게 되면, 얼른 보면 거의 내용 자체가 하자가 없는 것 같아요. 멋져 보이죠. 내가 보니까 원래의 자리, 창조의 자리, 해체 자리가 안 보이는 거예요. 이게 안 보이니까 불가피성이 안 나오고, 아무리 베드로전서 책들을 보고 주석을 봐도, 박윤선 주석이고 무슨 주석 봐도 거기에 불가피성이 안 나오고 뭐가 나옵니까? 인위적이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하시면 되고, 이렇게 안 하시면 안 됩니다. 자꾸 임의대로 뭔가 지시대로 듣고 그 지시와 내 역량과 일치를 시키라는 거예요.
네가 알아서 일치시켜라. 명령이 단계가 두 단계 돼버려요. “하나님도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요. 그 명령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일 단계 명령이라면 이 단계 실천 명령에 의해서 “네가 알아서 거룩과 네 행동을 일치시켜라.”라는 거예요. 이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자리, 원래의 자리가 뭔데요? 일치시키고자 하는 인간들조차 깨버리는 게 하나님의 능력인데 무슨 수로 일치시켜요. 결국 일치 안 되니까 일치 되어야 베드로전서에 의하면 구원받으니까 그때는 남는 건 조작성, 인위성, 지 마음대로 인위적으로 ‘이건 일치됐음’ 자기가 결재 다 내리고 하는 거예요. 나름대로 의로움 돼버려요.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해서 걸쭉한 목소리로, 누군지 안 밝히고 전화 했는데, “성령 안 받은 사람도 복음 전할 수 있습니까?” 항상 저한테 전화로 물을 때는 단답을 원하거든요. “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복음을 못 전합니다.”라는 그 말 자체에 뒤에 배치돼있는 이천 년 역사가, 신학적인 사상이 배열돼있어요. 그 사상 상의 배열이 뭐냐 하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복음을 못 전한다는 게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걸 모르고 전화했겠습니까? 다 알거든요.
“성령 받지 않고 복음 전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있습니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 어떤 신학적 근거가, 그렇게 주장한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도 없는 거예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할 때 마태복음 8장 이야기했습니다. 귀신 들린 청년이 예수님 왔을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 아들이시여 우리가 아직 때가 안 됐는데 우리를 벌써 멸망시키려 오셨습니까?” 그 내용이 바로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멸망당한다.’고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그 내용은 사람들이 보통 복음으로 생각 안 하는 이유가, 복음이 보통 기쁜 소식이잖아요. 기쁜 소식으로 볼 때 또 창조의 자리, 자기의 해체 자리에서, 만약에 인위적으로 보게 되면, 기쁜 소식은 자기 구원에 관한 소식인데, 이게 해체의 자리에서 보면 나쁜 놈은, 하여튼 저주 받아야 될 인간은 저주 받고, 심판과 저주가 있는 가운데서 “나 같은 인간도 저주 받아야 될 인간도 구원받았을까?” 할 경우에만 기쁜 소식이 되거든요.
같은 복음을 보더라도 자기가 해체된, 자기 구원 욕심이 없는 상태에서 기쁜 소식을 보게 되면 마귀의 활동까지도 복음으로 들려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저렇게 무서운 분이구나.” 그게 들려질 때 그리스도의 피가 그 무서운 피가 심판주가 흘렸던 피가, 자기가 벌인 심판에서 자기를 면제해주는 건 당연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심판주, 판사 자신이 죄를 위해서 대신 피를 흘렸다는 말은 앞으로 또다시 심판 앞에 서도 이미 아는 사이잖아요. “너는 자식아. 나한테 용서 받았어.” 빼줄 수 있는 건덕지가 판사한테 이미 나왔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나를 저주할 재판장이시라는 인식이 없으면 그분이 흘린 피의 의미도 모르죠. 나는 피고인 채 살아가지 않으면 심판자이신, 판사이신 주님의 그 피의 고귀함을 그 봐주심을, 긍휼함을 감사가 없어지지요. 그래서 제가 마태복음 8장 이야기를 한 겁니다. 마귀도 복음 위해서 산다. 그래서 그분이 알아들었어요.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그런 이야기 나오죠. 어떤 이단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취지가 그 취지니까 자기는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예수 전하는 거예요. 바로 그 취지 맞습니다. 그겁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서도 그래서 내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지요. 예수를 안 믿고,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신학을 한 목사들이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숱하게 등장합니다. 그분이 마지막에 이런 질문했어요. 10분 이상 넘어간 지점에서.
“그러면 예수 믿고 난 뒤에 타락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그런 사람이 예수 믿는다는 것도 형제라고 봐줄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했지요. “그 사람이 예수 믿고 타락하고 안 하고는 우리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게 좋습니다.”라고 하면서 성경구절 하나 댔지요.
고린도전서 12장 1절에서 3절.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야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라는 구절에 의해서 내가 그 사람이라고 우기면 일단 존중해주고, 일단 존중해주되 그 사람이 나중에 타락하면, “처음부터 그 사람은 착각했었구나.” 차후에 알면 될 문제지, 우리가 처음부터 “나는 예수를 주로 믿는다.” 하는데 “당신 그렇게 한다고 주의해야 돼.” 이런 식으로 그것부터 의심한다는 것은 그건 우리의 권한을 넘어서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어요. “감사하세요.” 타락하던, 내일 타락하던, 모레 타락하던 관계없이 지금 예수를 고백한다고 하면, 의견을 존중해주고 감사할 뿐이에요. 어차피 목사라 하는 것은 자기 양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나중에 그분하고 의견이 일치됐어요. 그러면 그분이 처음에 전화할 때 궁금했던 것, “그러면 목사가 되서 저 사람 구원받을 자, 안 받을 자인지를 판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다’는 말은 안 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누구한테 맡긴다? 주님한테 맡길 문제다.
그렇게 때 목사의 자리가 해체돼버리죠. 목사 본인의 자리가 어딥니까? 바로 나로 가려진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내가 해체됨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있던 하나님의 본래의 주께서 하신 창조의 능력이 목사를 통해서 나오는 거죠. 감사함으로 나오니까. 이것은 내 양이라는 소유를 늘 포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사람이 만약에 예수 믿고 온다면 전부다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다시 쓸게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의지와 의논해서 우리 교회에 온 게 아니고 뭐로 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준 불가피성으로 보는 거예요. 그렇게 볼 때 베드로전서가 성도의 삶에 관한 겁니까,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겁니까? 창조의 능력에 관한 거죠. 그러니까 래드의 관점 자체가 잘못 된 거죠. 서론 이야기하는데 시간이 이만큼 지났어요.
인위적이 아니에요. 사람이 만약에 명령으로 봐버리면 인위적이 된다고.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건 사도 바울의 의견이지만, 베드로는 그게 아니고 사람이 실천해야 된다.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아니에요. 야고보든 베드로전서든 어느 거든 인간의 구원을 인간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관점을 보고 베드로전서를 보면, 베드로전서의 핵심은 뭐냐? 핵심은 바로 ‘고난’입니다. 그런데 고난 할 때 또 제가 걱정이 되죠. 고난이란 개념 딱 떠오르면 두 가지죠. 인위적이냐, 불가피성이냐? 또 나오는 거예요. 인위적일 경우에는 자기가 파악이 안 되죠. 자기가 말씀을 지켜보는 입장이지, 말씀을 보는 내가 말씀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으면 안 돼요. 만약에 내가 깨어져서 나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분하고 전화할 때 은혜는 쌓아놓은 은혜는 없다 했어요. 미리 쌓아놓고 빼먹는 은혜는 없고 날마다 은혜의 부스러기를 날마다 먹는 것이지, “아니고, 내 창고에 은혜 되게 많다.” 이런 것. 그거는 만나 썩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분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좋게 끊었습니다만 누군지 안 밝혔었어요.
고난이란 것을 똑같이 관점이 인위적이냐, 불가피적이냐? 만약에 이게 인위적이라면 고난 안 받으면 안 받을 수 있고, 받으면 받을 수 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나 하기 나름이다, 씨.” 뒤에 ‘씨’자가 붙지요.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설교하시는데 “여러분 고난을 받읍시다.” 하면 늘푸른 교인 중에 하나가 “나하기 나름이다, 씨.” ‘씨’가 붙으면 인위적이 돼버리죠. 이 마지막 때에.
그러니 목사님들도 설교하기가 참 힘든 거예요. 그냥 설교를 해대버리면 국어시간 돼버리니까 무엇을 건드려야 되느냐 하면, 인위적인 것, 작위적인 것, 말씀을 내 안에서 스스로 조작하려는 이것을 깨는 작업부터 하려니까 여기서부터 저항을 안 받을 수가 없죠. “내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이게 딱 붙들고 있으면 그 저항 만만치 않죠. 설교할 때 느끼죠.
재미있는 이야기할게요. 목사가 설교를 하잖아요. 인위적인 걸 깨는 쪽으로 하게 되면 버티는 모습들이 다 보여요. 그런데 만약에 계속 버티고 있으면 뒤에 진짜 본래 이야기할 준비된 게 들어갈 구멍이 없어요. 오른쪽 하면 오른쪽 다 막아버리고, 다 틀어막아 버립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것이 허물어졌을 때 설교자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기적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야 버티다, 버티다 못 버티고 허물어졌을 때 겉으론 못하고 속으론 ‘아멘’ 소리 나오죠. 그 다음부터는 진짜 성경말씀 이야기하는데 별 힘 안 들어요.
목사가 월급 받는 게 보람이 아닙니다. 사는 게 보람이 아니고 목사의 보람은 그거잖아요. 작위적이고 이기주의 그것이 허물어 성경말씀에 있는 기쁨이 봇물처럼 그 사람 속에 들어갈 때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지. 교인수, 문제 아닙니다. 만 명 있으면 뭐 합니까? 전부 버티고 앉아있는데. 힘들어 죽어요. 버티는 모습이 나온다고.
그런데 버티는 모습이 보인다는 그것은 아직까지 설교가 괜찮다는 뜻이에요. 제일 안 좋은 것은 잘 때. 잠자는 척 하는 것도 괜찮아요. 버티는 방법이니까. 아예 잠잘 때. 촌의 할머니들. 이건 버티고 뭐고 진짜 소귀에 경 읽기에요. 축도할 때만 다 깨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목사님들이 몸이 아프고 하더라도 설교가 아멘으로 화답이 되면 그 순간만은 자기 몸 아픈 것도 다 잊어버려요. 그리고 교회 사사로운 재정문제 이런 것도 그 순간은 다 날아가 버려요. 그게 바로 말씀이 주는 해체작업이고, 해체작업이 곧 뭐냐 하면, 그 순간이 주는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에요. “다시 너는 네 자리에서 나로 인하여 지음 받아라.” ‘지음 받았습니다’가 아니라 지금 지음 받아야 돼요. 지금까지는 무효. 죽음 자체가 무효거든요. 죽음은 모든 걸 무효 시키기 때문에 지나간 것도 무효, 지금 새로 지음 받으라.
베드로전서의 고난이라는 것은 인위적이 아니고 불가피한 거예요.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여기서 왜 인위적이 안 되느냐 하면, 육체의 고난 받은 자가 죄를 그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교도소 한 서너 번 갔다 오면 인간됩니까? [친절한 금자씨]가 더 인간 됐던가요? 인간이 갖고 있는 자아에 기준한 복수심은 아무리 형벌 받아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부자가 지옥 가서 인간 됐습니까? 죄송합니다. 인간 안 됐어요.
따라서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 기준을 뭐로 보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부터, 다시 말해서 성도로 하여금 작위적으로, 인위적으로,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성도 자체를 어느 집단에 묶어버리죠. 그 집단에 묶어버리는 게 베드로전서 2장에 나오죠.
2장 5절에 보면,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너희도’ 해놓고 그 다음에 한글로 하면 한 자인데 너희도 뭐가 된다? ‘집’이 되죠. 그러면 집 주인은 누굽니까? 그리고 집 주인이 집을 유지하려고 주시는 분은 누굽니까? 기초지요. 집의 기초가 뭐로 돼있습니까?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모퉁이 돌이 누구죠? 그리스도죠. 그리스도가 세운 이 집이 무슨 집입니까? 신령한 집이죠.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집에서 신령한 집이 지어진다는 이것은 어디를 염두에 두느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 이스라엘 국가가 갖고 있는 특수성, 정체성이라 하죠. 아이덴티티. 특수한 본질,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개인이 용납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개인이라는 걸 생각하지도 말라는 겁니다. 한꺼번에 움직여도 같이 움직이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지 거기서 개인이 따로 나서면 안 돼요.
개인이 나서면 개인 나선 그 자체가 이스라엘 전체를 무너뜨리게 만듭니다. 이게 아간 아닙니까. 다른 사람은 전부다 여호와 전쟁하는데 자기 혼자 여리고성의 외투와 금은을 탐냈지요. 그러니까 다른 쪽이 다 무너지는 거예요. 하나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게 돼있고, 그런 구조는 더 이상 사적인 사욕이라든지, 사적인 구원이라든지 집 안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게 베드로전서에 이미 깔린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에 있어서 이미 베드로가 “너희들 익히 알지.”라고 했을 때 익히 아는 게 뭐냐 하면, 바로 구약 이스라엘로 되돌아가서 구약 이스라엘의 기초가 개인적인 인위성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초로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거룩은 뭐냐? 그 거룩이라 하는 것은 개인에게 주는 거룩이 아니고, 이 목사님이라든지, 장 목사님이 개인적으로 주는 거룩이 없고, 그리스도 집이라는 집단적으로 주는 그런 거룩밖에 없죠. 개인 거룩은 없는 겁니다.
이런 인식조차도 기존의 베드로전서의 주석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이런 인식 자체가. 개인 구원은 없고 집단 구원밖에 없다는 인식도 안 나온다고. 분명히 성경은, 베드로전서는 그렇게 봐야 되는데.
목사님 왜 그렇게 봐야 됩니까?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나, 구원받았다.’는 소리 나오면 안 돼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이게 나와야 된다니까. “예수님은 정말 주님 맞군요.” 그게 나와야 되지, 나를 구원하신 분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독자적인 나를 구원한 주가 나오면 안 돼요. 어쨌든 개인은 해체돼야 됩니다. 다 찢어져야 돼요. 쥐포 찢듯이 찢어져야 되는 거예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될 때 그때 나오는 베드로후서에 나오지만 형제 우애, 사랑 그게 내가 인위적으로 할 게 아니고, 마치 향수를 뿌려놓은 어떤 큰 건물 안에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향수를 공유를 누리는 것처럼 같이 교류하고 있는, 흐르고 있는 그 사랑과 인애를 같이 마시는 거예요.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말로 하니 어려운데 그림으로 해보겠습니다. 개인이 있습니다. 여기에 베드로는 누굴 내세우느냐 하면, 예수님을 내세웁니다. 우리가 개인이 볼 때 예수님은 개인 맞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아니잖아요. 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이 개인은 무슨 자리로? 창조의 자리. 원래 자기가 죽어야 될 자리로 내려가 버리면, 예수님은 개인이 아니고 예수님은 집단으로 봐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개인 용도의 예수님이 아니고, 어떤 구약부터 기대했던 집단을 위한 구원이 됐죠. 이게 이쪽에서 보는 것보다 아래쪽에서 내려가면.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흘린 피는 나를 구원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함이라. 이스라엘이란 집단을 구원함이라.
그러면 나처럼 해체된 사람을 여러 사람 만나죠. 만나는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피가 주어지면 이 사이에서 서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의 성경으로 뽑아내버리면 이게 베드로전후서가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 사이에 통용되는, “뭘 받았지?” “뭘 주신 거야.” 주신 것에 대해서 통용하면 이것이 바로 베드로전서의 핵심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뭐는 아니다? 여기서 개인 하나 톡 튀어나오면 안 되죠. “나는 당신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되는데 그 ‘당신’이란 말은 당신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당신 개인을 위함이 아니라 당신이 어디에 소속돼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에 소속돼있기 때문에 이 집을 위하여 나는 존재합니다.”라는 말과 “나는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 된다 이 말이죠. 베드로전서에서.
여기 베드로가 같이 끼어들잖아요. 베드로가 서로서로가 전부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이야기하니까 서로 힘내라. 인내하라. 참아라. 우리들의 인위성, 우리의 의지 이걸 하는 게 아니고, 네가 참을 때, 네가 고난 받을 때 뭐가 임한다? 성령이 너희 위에 임해서, 갑자기 성령이 나와요.
그래서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본문에 들어가려하는데, 이 성령하고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서 11절, 이 집단 안에 우리들만 있는 게 아니고 선배들이 있죠. 선배들을 가지고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서 11절에서 누구라 했습니까? 선지자. 선지자들이 뭘 받았다고 했어요? 영인데 무슨 영으로 돼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잖아요. 그냥 선배님 해도 괜찮은데 이 동네는 선배와 후배다 동일하게 성령을 받게 돼있는 거예요. 성령을 받아서 그들이 뭘 증거 했습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을 증거 했잖아요.
그런데 그 지경에 우리도 여기에 포함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옛날 선배님들처럼 지금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고난 받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이죠. 있습니까? 이들과 이들 사이에 누굴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 그 업적, 그리스도의 하신 은혜를 위하여 마땅히 거룩을 찾고, 사랑을 찾을 수밖에 없죠.
대략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미진한 것이 있을 거예요. 미진한 것은 하면서 봅시다.
한 번 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제 주장입니다만 핵심은 뭐라 했습니까? ‘고난’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신학에서는 이 고난을 성도가 기존에 사회적으로 받는 고난으로 이야기했는데. 그래서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이 그걸 보고 무식하다 하는 거예요. 사회적으로 성도가 고난 받는 경우는 없어요. 왜냐하면 사회적으로도 개인이 구조화되거든요. 그러면 사회의 구조화를 공부해야 돼요.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고난 받았다는데 그리스도인이 고난 받았다는 이야기는 성경에서 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실제적으로 그들의 고난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압박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원인 자체가 사회적인, 정치적인,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압박 받은 것을 성경에 있는 압박과 바로 연결시켜버리니까 뭐가 빠져버립니까? 영적 요소가 빠져버린다 이 말입니다.
제가 서울서 그런 강의했지요. 어떤 해석을 할 때 영적인 해석이 빠진 상태에서 바로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보통 주석 책에 보면. 영적인 것 관계없이 고난 받는 걸 마치 고난이라 하는데 여기 베드로전서에선 이미 그걸 알고 기피했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는 건 좋은데 기존 법적인 문제에 고난 받는 것은 그건 고난이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악한 일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주님이 받은 고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악하다’ 그리고 ‘선하다’ 이 개념 자체가 영적에서 나와야 될 개념을 사회적 개념으로 따진다. 100%입니다. 모든 주석이 거기로 빠져요. 그래서 성도가 착한 일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럼 착한 일 하면 고난 안 받습니까? 진짜 그래요?
그거는 직장생활도 안 해 본 사람들이에요. 직장생활 해보세요. 어떤 대기업 사원이 되면 대기업 사원들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하청업자에게 현찰 줄 것을 어음으로 빼돌리고, 설계 변경해서 그들의 사정이 아니라 우리 대기업 사정으로서 그들에게 압박을 가할 때 그 대기업에서 유능한 선한 직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한 직원은 하청업체에서 보면 죽일 놈이라니까. 그런데 대기업 차원에서 그런 선한 일을 안 하면 그 사람 대기업에서 잘립니다. 우리가 어떤 직장이 있다는 자체가 착하고 선함이 이건 성립이 안 돼요. 장사하는 사람이 남는 것 없이 장사합니까?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사회적 구조를 너무 얍잡아 봐서 그래요.
베드로전서에서 선한 고난이라 하는 것은 복음 때문에 고난 받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해서 다른 사람은 자기, 자기, 자기, 자아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집단, 나는 이스라엘의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것 생각하다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근거를 대시오. 근거를 대지요. 그게 바로 먼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선배, 선지자들이 뭐 때문에 고난 받습니까? 장차오실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았지, 사회운동하다 고난 받은 게 아니잖아요. 쓰레기분리수거 한다고 고난 받은 게 아니란 말이죠.
대구에 자전거타기협회가 있어요. 만약에 이 사람이 우리교회 집사라 합시다. 자전거타기협회에서 하는 일은 시에 압력을 가해서 자전거전용도로를 만드는 거예요. 자전거전용도로를 만들면 업체들이 입찰하고 난리 나겠지요. 그럴 때 이 사람은 시청 앞에 시위하면서 이번에 자전거전용도로하면서 예산이 40억인데 왜 20억밖에 안 주고 20억 딴 데 돌리느냐고 데모할 때 이게 선한 일하다 고난 받는 겁니까? 불교신자고, 집산데? 선한 일로 고난 받는 거예요? 아니죠. 아무 상관없지요.
만약에 40억 통과 안 되면, 통과 된다고 철썩 같이 믿고 밥 사주고, 골프 대접했던 수주업체들 얼마나 화내겠어요. 너하고 계약했는데 할 것 아닙니까. 당신 믿고 했는데. 자전거협회 하나 만들어놓고 만약에 시에서 인정받으면 뜯어먹으려고 얼마나 날파리들이, ‘나도 장로입니다, 나도 집사입니다’ 하고 달려들겠어요.
공항소음방지대책회에 동천제일교회 당회장이 총 두목이 돼서 깃발을 들었어요. 보상금 타려고. 법원에 재판해서. 그게 선한 일입니까? 옛날에는 그건 감리교나 기장, 통합 측에서 했는데 요새는 합동 측까지 다 넘어갔어요. 이건 보수고 뭐고 정통이고 없어요. 돈 있는데는 전부다 유명한 영화처럼 [똥파리] 다 달라붙어요.
천주교가 사회운동해서 교인수 불었다 하니까 기독교도 사회운동해서 교인수 맞추려고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베드로전서에서 말하는 거룩하고 선한 일입니까? 고난 받는 거예요?
그건 불가피한 게 아닙니다. 자전거전용협회 기건 인위성이고 작위성이죠. 스스로 뭔가 움직여야 되잖아요. 불가피하게 되는 게 없잖아요. 만약에 내가 스스로 해야 된다면 모든 증거, 영광은 내가 받지만 이거는 불가피하게 됐다면 모든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죠. 그게 베드로전서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이 바로 그 복음이에요.
1장 2절에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부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일본말로 하면 입빠이, 입빠이 있을지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15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할 때 기존의 학자들이 연결점을 찾을 수가 없어요. 하나하나 좀 골치 아픈 이야기지만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기 때문에 골치 아픈 것도 해야 돼요.
‘피 뿌림’하고 ‘너희 행실이 거룩하다’ 하고 연결점이 이렇게 피 뿌림에서 이쪽 행실 거룩한 쪽으로 이어질 수 있는 메커니즘, 연결고리가 없어요. 피 뿌림은 예수님이 해놓고, 행실 거룩은 갑자기 누구 몫으로 돌아옵니까? 사람, 인간 몫으로 돌아오죠. 그러면 예수님과 인간 몫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아무리 착한 일 해도 그게 내 착한 일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안 되면 그건 연결점이 없다고 봐야 되죠. 식사하는데 나는 밥 안 먹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목사님이 밥 먹고 있으면 저절로 배 불러옵니까? 배 불러오면 연결점이 되지요. 그러면 내 배부름의 원인은 누굽니까? 내가 아니고 저쪽에서 나오죠.
그런데 아무리 저기서 맛있다 해도 내가 밥 안 먹으면 난 배고프죠. 그러면 배부름과 배고픈 사이에 연결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예수님의 피 뿌림이 아무리 많아도 내 쪽에서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나의 거룩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는 것이 기존의 학자들의 주장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단절돼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연결시키려고 합니까? 예수님의 명령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명령이 주어지면 그 다음에 우리가 행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따져봅시다. 예수님은 피만 뿌리시고 가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명령과 우리 사이에 연결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그거야 우리가 예수 믿는 의지를 발휘해서. 그러면 우리 몸, 영혼 다 떼어버리고 의지하고 명령하고 연결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잖아요. 미분, 계속 잘라보세요. 어떤 점에도 연결이 안 돼요.
그러면 사람들이 하지요. 그거는 성령으로 한다는 거예요. 이것도 안 돼요. 보세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을 가지고 주의 명령을 지킨다 하는데 그러면 명령은 다시 젖혀두고, 성령님이 우리하고 어떻게 연결됩니까? 똑같은 문제에요. 문제 해결된 게 아닙니다.
성령이 의지한테 넘어올 때, 주의 명령을 성령의 명령으로 명칭만 바꿨다 뿐이지 성령이 어르신 아닙니까. 성령이 자전거바퀴에 바람 넣는 그게 아니잖아요. 성령께서 자전거 바람 넣는 기계라 할지라도 작동은 누가 해야 돼요? 나의 의지가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나의 시냅스, 두뇌세포가 작용해서. 또 뭡니까? 공기 펌프 방치하면 계속 나는 또 거룩 안 하죠. 왜? 성령이란 기계를 사용 안 했으니까.
그러면 어떤 목사는 스위치 넣으면 된데요. 성령으로 스위치 넣으면 기도하면 된다 이 말이에요. 진짜 켜면 바람이 불듯이 기도 안 하니까 성령이 안 온다는 거예요. 기도하면 바람이 온다는 거예요. 그 스위치 안 켜면 우에 돼요? 안 되죠.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네가 있는 자리가 이미 예수님께서 기대했고, 예수님께서 하려는, 예수님께서 계획 잡은 그 자리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이게 창조의 자리고, 새로운 이스라엘 자리에요. 그러면 명령이 우리 밑바닥에서 피어나죠. 그러면 거룩함에 행실에 거룩할 수밖에 없는 인간만 구원되고, 행실에 거룩 안 한 사람은 지옥 갑니다.
예수 피 뿌림은 믿는데 행실은 안 거룩하니까 좀 모자란다는 생각은, 그런 아이디어는 성경에 아예 없습니다. 피 뿌림뿐만 아니고 행실이 안 거룩하면 구원 못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지금 구원 못 받을 자리에 있는 집단에 있으면서 뭐만 들었어요? “명령하달, 명령하달. 피 뿌림 받아라.” 이것 들은 거예요. 그래서 구원 못 받을 자리에 있는 사람은 “피 뿌림은 믿는데 아, 행실은 좀 있다 해야 되겠구나.” 이런 자리는 애초부터 예수님이 설계 안 한 자리에요. 구원 못 받은 자리에 있는 겁니다.
“피 뿌림은 우선 믿고, 행실 거룩한 것은 좀 있다 할게요.”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자체가 그 사람은 지금 작위적인 성령이 없는 자리, 인위적인 자리에 있는 거예요. 성령이 있는 것 같으면 “주님께서 다음 절차가 다음 나한테 해줄 게 행실의 거룩함이 그 다음 절차구나. 주께서 조지라고 하시는구나.” 이렇게 이해되죠.
피 뿌림을 하신 분이 그 다음 절차가 뭐라고요? 행실에 거룩한 인간으로 조져버리고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시는구나. “아이고, 이젠 조져놨어. 주님한테 당해야 돼.” 불가피성이에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시간이 이렇게 됐네. 10분 쉽시다.
관리자(IP:220.♡.176.150)
09-05-19 16:06
부산090512b조지래드28신약신학-베드로전서b
2009051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전서
(강의:이근호 목사)
안 그래도 둘째 시간에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렇습니다. 그림으로 설명할게요. 어떤 사람이 있는데 파이프가 있고, 파이프 속에 금이 흐르고 있다. 베드로전서에서 금보다 귀한 게 뭡니까?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오해하기를 예수님을 개인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이루는 집단으로 가는. 너만을 위해 피 흘린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다른 사람을 위해 피 흘렸다. 다른 사람을 합치면 전체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흘린 피가 나오죠.
고린도전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성만찬 할 때 먼저 와서 먹는다든지, 다시 말해서 전체인데 사적인, 개인적인 욕망이 앞서잖아요. 그러면 침상에 던질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이 말이죠. 할 때 죽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돼요. 저 사람에게 저렇게 일을 벌인 것은 속에 있는 금이 작용해서 벌인 건데 그 금이 누구한테 있다? “멀쩡한 우리에게도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하는데 사용하죠.
그 사람이 아프다, 죽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람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그만한 능력이 현재 누구한테 있다? “나에게도 있어서 서로를 묶어주는 역할을 계속하고 있구나.” 하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계신 분이 세상보다 더 크다. 이게 개인 속에 전체가 들어있는 거예요. 신약의 새로운 개념입니다. 구약에는 없어요.
내가 뛰면 다른 형제들이 모두 내 안에서 뛰는 것과 같은 거예요. 더 쉽게 하면 내 안에 있는 것에 내가 메여있다. 이래 보는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큰 것에 밖에 있는 작은 내가 메여있다. 원래 안에 있으면 ‘작다’가 되고, 그걸 품으면 ‘크다’가 돼야 되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돼요. 내 안에 있는 나를 삼키는 큰 것에 그 밖에 있는 큰 내가 작아지는 거예요. 인식의, 사고의 완전한 달라짐이 성립돼야 돼요.
이렇게 돼야 그 다음에 뭐가 이뤄지느냐 하면,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죠.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그날에 너희들이 내 안에 있다.” 이게 구약적 개념으로선 도저히 성립이 안 돼요. 어떻게 안에 있는 분이 더 크냐 말이죠. 크다는 말은 바깥에 걸쳐 있어야 큰데 어떻게 내 안에 계신 분이 바깥에 다 걸친다는 게 도무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이걸 공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건화 시켜서 너로 하여금 낮추고, 높이고, 죽이고, 살리고, 부자 되게 하고, 가난하게 된 사건은 전부다 누구한테 달렸다? 네 안에 달렸다. 네 안에 계신 분이 너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이 말이죠. 우리는 졸지에 하나의 그릇이 되고, 그릇 안에 계신 분은 우리의 주인이 되며, 나의 그릇은 “내 안에 계신 분이 이런 분입니다.”를 증거하는 그릇에 불과하죠.
그러니 베드로의 신학이나 바울의 신학이 같지요. 틀릴 리가 없습니다. 무슨 같은 성령 받았는데 베드로 신학이 따로 있고, 사도 바울 신학이 따로 있어요. 그건 육적인 신학자들이 해석이 안 되니까 신학을 요한신학, 다 따로 나눈 겁니다.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이걸 따로 나누지 말고 합치자 해서 조직신학 나왔는데, 조직신학도 마찬가지에요.
래드 같은 경우에 글 보면 조직신학적입니다. 제목 보세요. 이원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종말론, 인간의 고난과 하나님. 이게 인간의 고난이 어디 나옵니까? 전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지요. 성령 받았으면 그리스도 고난뿐이에요. 우리의 사적인 고난 하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기독론, 속죄론, 교회. 특히 교회할 때는 해석을 보면 아주 엉망진창입니다. 그리스도의 생활. 이건 완전히 기존의 조직신학과 안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보여요.
어디부터 먼저 보냐 하면, 방금 이야기하려는 게 어려워서 3장 18절부터 해봅시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여기에 사람은 안 나옵니다. ‘그리스도’하고 ‘불의한 자’밖에 안 나오죠. 그러면 의인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죠.
인간론, 하나님론이 없어져 버리고 인간론이 둘로 나눠져요. 하나는 ‘의인’ 나오고, 하나는 ‘불의한 자’밖에 안 나옵니다. 의인은 예수님밖에 없고, 나머지 불의한 자는 전부다 모든 인간이 줄줄이 다 뒤에 서있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의인, 불의한 이 관점을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는 불의한 자를 의인으로 바꾸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피를 뿌렸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의인이 피를 뿌려서 불의한 자를 의인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기존에 알고 있던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하고 관계없죠.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는 것과 관계없죠. 왜냐하면 구원받는 것 자체가 개인적인 욕망과 관한 거니까. 불의한 자를 의인되게 하는 이 계획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의인 아이디어죠. 그러니까 불의한 자는 이걸 생각 못 했죠. 그러면 불의한 사람의 생각들은 퇴출돼야 되죠. 퇴출돼 빠져나오는 쓰레기 같은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신과 인간론, 조직신학 모든 게 다 들어있다 이 말이에요. 충격 아닙니까. 저 혼자 충격입니까.
사고방식 자체가 “주께서 어떻게 다룹니까?” 하고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선배님.” 이거하고 달라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하는 것은 베드로전서를 전혀 이해 못한 겁니다. 그건 너무나 육적이며, 육적인 것이 결국 뭡니까? 불의한 자의 주특기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거룩해서 구원받습니까?”라는 아이디어는 베드로전서에 없어요. 아예 애초에 없어요.
우리는 불의한 자는 무엇과 단절돼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된 정도가 아니고 유일한 의인되신 예수님하고 단절돼있기 때문에 불의한 자가 의인 될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사고방식 자체가 육적이기 때문에 육적인 것은 전부다 개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개인의 구원이니까 여기서 어떻게 고생 안 하고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죽어서 좋은 나라 갈 수 있습니까? 이게 전부다 여기 포함되는 거예요.
제 취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까 베드로후서 1장에 봅시다. 1장 16절에 보면, “공교히 만든 게 아니요” 하고, 1장 17절에 보면, 내가 영광 중에 올라갔죠.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들었지요. 그 다음에 1장 19절에 보면, 우리 마음에 샛별 떠오르죠. 이거 우리 아이디어입니까? 충격 아닙니까.
우리는 좋은 나라 가고, 예수 믿는데 구원받을 것 생각하잖아요. 이 자체가 전혀 영적이 아니고 육적이며, 그거는 불의한 자들이 해낼 수 있는 아이디어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 아이디어를 뭐로 바꾼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아이디어로 바꿀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계속 지금 외부에서 만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를. “외부에서 만지십니까?” “만지십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영이 있습니다.” “외부에서 만지십니까?” “아니요. 만지긴 누가 만지는데.” “당신은 베드로전서 천 번을 봐도 구원 못 받아요.”
구약 같은 경우에는 아간이 범죄 했을 때 한 사람이 범죄 했는데 신에게 벌 받았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구약 시대의 다른 이방민족이 들으면 뭐라 그러겠습니까? 정말 미쳤어. 그런데 우리는 미쳤단 이야기를 안 하고 한 사람이 범죄 해서 다른 사람까지 힘들었다고 너무나 쉽게 이야기해버리는 거예요. 마치 그게 실제인 것처럼. 하지만 정상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 같으면 그건 있을 수 없는 거죠. 그렇잖아요.
우리 원래 자리 내려가 봅시다. 나의 생각이 없는 원래 자리 가버리면, 구약하는 이야기 자체가 당나귀가 이야기하는 자체가 전부다 괴상망측한 이야기되는 겁니다. 그 괴상망측한 이야기가 이 마지막 때에 종말에 베드로전서에서는 본격적으로 팔 벌리고 실시하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불의한 자를 거룩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 윤리 도덕적으로 한다는 그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어디에 해당됩니까? 그건 니 생각이고. 지 생각은 ‘불의한’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18절 보면,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 다음에 19절에 보면, “저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벌써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대부분의 주석을 보고, 신학을 보면, 베드로전서 1장, 2장, 3장 18절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19절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19절이 제일 쉬워요. 19절이 제일 쉬워야 그 다음에 베드로전서 1장 2절 “피 뿌림을 받기 위해서” 이게 쉬어야 이게 쉬워집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 이게 베드로전서에서 제일 쉬운 대목이고, 나머지는 이것보다 몇 천 배 더 어려운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걸 반대로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도 내 구원에 뭔가 집착하고 있고, 내 계획을 포기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가 있습니다.
흔히 어렵다는 19절 봅시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다.” 일단 여기 보면 인위성이 없죠. 지금 예수님께서 죽이심을 당하고 살림을 받을 때 여기에 인간적인 의지가 개입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인위성이 없지요. 아까 인위성이 아니면 뭐라 했습니까? 불가피성이죠.
예수님 자신이 영이 임할 때 불가피성이 임했죠. 그 불가피성을 어디에 전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할 때 그 불가피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전파하면 그 대상을 육이라 하지 않고 뭐라 한다? 그 다음에 옥에 있는 ‘영’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를 전부다 뭐로 본다? 옥에 있는 영으로 보잖아요. 옥에 있는 영들에게 거룩함을 입게 하신다. 옥에 영들을 생각하면 문제가 굉장히 쉬워져요. 왜냐하면 예수님 혼자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영이 하신 일을 주님은 영이시라고 알아먹는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 앞에 영으로 대우받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육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영이 못 되는 우리가 예수님의 불가피성의 작업 때문에 졸지에 나는 분명히 육인데, 주님 보시기에 영이라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영이라는 대상이 되면 아까 베드로전서 1장 10절, 11절. 선지자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서, 영이 임한 특징이 뭐다? 자기 생각 안 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잖아요. 뭐가 어려워요. 그럼 우리 선배들이 주님을 증거할 때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광 중에 있는 그 과정으로 인하여 그 선배들, 선지자에게 주어진 혜택을 그대로 뽑아내면 그들이 바로 참된 백성이요, 선지자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겁니다.
그들 가운데 사랑, 온유, 화평 이런 것은 다 이해되지요. 왜? 내가 뭔가 벌여야 될 육적인 관점이 아니고 내가 새삼스럽게 내 작위성, 내 인위성으로 벌인 일이 아니고, 아예 영이 와서 작업을, 완전히 인테리어를 다 바꿔놔요. 육적인 인테리어를 영적인 인테리어로 다 바꿔놨어요. 그래 놓고 나중에 하는 말이 뭐냐? “너, 샛별 떠올랐나?” 이놈에 육적인 인간이 샛별 떠오르려 하니 됩니까, 이게. 새벽기도해도 안 되는 기라. 그런데 이미 영의 대우를 받은 사람은, “샛별 떠올랐나?” “떠올랐습니다.” 그걸 다른 사람이 보면, “네가 미쳤어.”
신학자들이 왜 베드로전서를 접근도 못하느냐 작위적으로 육에서 영을 뚫으려하니까 3장 19절이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옥에 영들에게’ 할 때 공간을 묘사한 겁니다.
그 다음에 20절 봅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그렇다면 옥의 영들에게는 결국 두 종류가 있죠. 영은 같은 영인데 여덟 명 영이 있고, 여덟 명 외에 영이 있죠. 그리고 여덟 명만 구원받았다는 것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그냥 여덟 명이 아니고 앞에 뭐가 있습니까? ‘겨우’죠. 겨우 여덟 명 구원받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영이 되는 거예요.
“잘 하셨습니다. 아홉 명이 아니고 열 명이 아니고 여덟 명 하신 것, 그것도 겨우 여덟 명 하신 것 멋지게 일을 잘 마감하셨습니다.”라고 동의할 수 있는 영이라야 그게 구원받은 영이다 이 말입니다. 그 말은 뭘 포기했다? 이 세상 모든 구원은 누구 소관이다? 우리 주님의 소관이지 사적인 ‘나’ 소관이 아님을 아는 사람에게만 이것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샛별이 이해가 되고, 변화산이 이해가 되고,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가 거룩하다가 이해가 돼요. 주께서 그 다음 작업, 그 다음 작업이 계속 주어집니다.
이럴 경우에만 그야말로 얼마나 힘든 불같은 시험과 고난이 온단 해도 오히려 웃지요. “그래 마귀야. 고작 이거야. 날 구원 못 시키려고 내려치는 고난이 고작 그 정도야. 그 정도 고난 줬다고 내가 주님을 부인할 거 싶어?” 이게 바로 영적인 사람이에요. 그럴 때 그 사람 머리에 누가 임했다? 성령이 임하죠.
그리고 난 뒤에 4장 봅시다. 1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여덟 명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충분히 이게 이해가 되죠. 왜냐? 그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내가 고난 받아야 고난이 아니라 현재 입는 것 자체가 주께서 입혀주는 고난의 갑옷을 입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죠.
“내가 거룩해야 새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내가 영으로 있다는 자체가 이미 나는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한 대상이 돼가고 있는 거구나.”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적인 작업에 대상이 된 거죠. 그럴 때 비로소 베드로전서 1장부터 이해 안 될 것이 하나도 없어요.
마치 우리는 도화지 같아. 도화지에다 베드로전서 1장 1절부터 타자기로 문자가 잉크가 프린트 되는 것 같아. 팩스 같이 팩스가 날아와요. 문자가 팩스 되서 육이 아니고 육은 거부하니까. 박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으로 가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베드로전서가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막 나온다고. 그걸 학자들이 이핼 못한다고.
1장 8절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지금 영이 되서 팩스가 날아와서 팩스를 받아보니까 1장 8절부터 나옵니다. 뭐라고 하느냐? “너는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잘 믿는구나.” 이게 우리 의지로 되는 겁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보는 것만 찾는다는 것 얼마나 알아요. 믿는 것도 눈에 보이는 실적이 있을 때만. 그런데 보지 않고 믿는 건 잘 하는도다. 이게 지금 누구 이야기? 내 이야기라고 느낀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뭐냐? 선배들 나오죠. 1장 10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누구 속에?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에요. 그럼 이건 뭐냐? 선배들은 하나의 도구였고, 하나의 그릇일 뿐이다 말이죠. “그 그릇이 너냐?”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선배 그릇은 좋고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