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강의 2006년 11월 10일 [요한복음 21장] 2/2
안산강의 2006년 11월 10일 [요한복음 21장] 2/2
이름 : 조현창(IP:221.151.109.198)
안산강의 2006년 11월 10일 [요한복음 21장] 2/2
그러면 진짜 신앙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진짜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한테 들어올 때 , 그 때 시작되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원래 날카로워요. (모양이) 뾰쪽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한테 침투하면 아프죠. 상당히 아프죠. 십자가가 딱 들어오게 되면, 무엇과 무엇이 비교가 되냐하면, 뭐든지 소유해야 나의 가치가 향상된다고 여기는 [나]. 그말은 때려죽여도 나는 깨지기 싫다. 있는 것 보존하기도 급급한데 왜 깨져. 내가 미쳤나 왜 깨져.
다만 주님한테 잘 기도해서, 있는데다가 더 많이 획득해서 소유하는 거, 그것을 원하는 내 모습과... 십자가(예수님)는 "나는 다 버려도 부활되는데... 나는 다 버려도 주께서 사흘만에 부활시켜 주던데... " "있는 거 그만 교체하시지. 그거 고물인데 바꿔치기 해야지. 나의 생명으로". 하고 들어올 때는 이게 타협해서 들어올 수가 없어요. 반발입니다. 반발. 반발하게 되어있는거예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남기려고 하고, 우리는 십자가 말고, 십자가는 일단 믿어주고.. 믿어줘야 죽을 때 천당가니까 십자가 피로 공로로 구원받아야 되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으니까, 일단 믿어주고, 이 십자가는 뭡니까? 알약입니다. 알약 먹었잖아요. 이제 서랍에 넣어 둬야죠.
십자가를 사람들이 처음 믿을 때 알약으로 먹어요. 복용하고 (병이) 나았으면 집어넣는 겁니다. 후시딘 연고 있죠. 무릎 깨졌을 때 바르고 나으면 계속 바르지 안잖아요. 그 다음에 약통에 집어 넣어야 되죠. 주님께서 우리를 다룰 때는 뭘 다루냐 하면, 우리를 네온사인의 하나의 유리관으로 봅니다. 유리관에 피가 들어오면 우리는, 빈 유리관에 피가 들어오면, 빨간 빛을 발산하게 됩니다.
그 대신 뭐는 빠져야 되요? 내 것은 해체되어야 하고, 내 것은, 나의 소망 나의 것은 해체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들어와서 예수님은 이렇게 돌아가셨단다 라는 예수님의 쓴잔을 마셔야 되고 그렇게 되면 먹든지 마시든지 예수의 뻘건 피만 온통 발산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러기 싫어요. 우리는 이렇게 되면 뭐가 빠지고 해체됩니까? 제일 중요한 뭡니까? 나, 나라는 인간 자체가 의미가 없잖아요. 내가 제일 중요한데 이렇게되면 나는 예수님의 이용물 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싫고, 어떻게 하느냐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의 미래를 그리고 나의 과거를 생각해서, 과거에는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었고, 미래에는 천국에 가니까 지금 나는 뭐냐, 거룩한 생활을 하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걸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쪽 과거를 도와주셨듯이 이쪽 미래도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러니 여기에 누가 살아 있어요? 누가 안 죽었어요? 나, 나는 안죽어요.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고 예수님은 다만 구원만 해 달라는 거예요. 내가 신앙생활 반듯하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네온사인처럼 되어버리면 나는 날마다 두더지(잡기) 게임처럼 올라오면 때리고 또 올라오면 때리듯이 나는 맨날 맞는 겁니다. 나라는 인간이 솟아오르면 주님의 십자가가 이게 어딜 튀어나와 또 때리고 때리는 거예요.
자, 방금 제가 2가지의 경향 중에서 어느 것이 사도바울의 모습이냐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니, 목사님은 다른 유명한 사람들이 있는데 왜 사도바울을 예로 듭니까?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놀랍게도 마귀가 사도로 인정한 사람입니다. 왜냐?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감히 어디 이 가짜가...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마귀가 누구를 안다고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과 같이 계신 분으로 인정하잖아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살아가는 모습은 누가 뭐래도 진짜 제대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죠. 이것을 마귀도 인정했으니까.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여러 가지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자 이제 요한복음 21장의 주제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나는 사랑에 미쳤다. 그래 내 미쳤다. 어데 미쳤나, 사랑에 미쳤다. 사랑에 미친게 무어냐면 네자로... 크게 쓸께요. 사람들이 사랑 그러면 자꾸 추상적으로 생각하는데 사랑은 네자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보. 고. 싶. 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하나 있는데 뭐냐하면 빨리 제대해서 주님 보고 싶습니다, 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누구를 제일 부러워하냐면, 자기가 주도해서 죽인 사람이 있어요. 누굽니까? 스데반. 스데반을 그렇게 부러워하는 거예요. 제가 젊은 목사님과 공부할 때 객관식 문제를 내고 싶어요. 다음 중 당신들이 되고 싶은 사람은? 1번 옥한음, 2번 하용조, 3번 이동원, 4번 조용기 ... 이렇게 해놓고 제일 마지막에 스데반 집사.
신학교 졸업한 후에 소망이 무엇인가요 하면 큰 교회 담임목사, 부목사되어 노후 대책 완비되고 유학, 선교지 매년 보내주고 부교역자 열댓명 거느리고... 우리도 신학교 때 다 희망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는 아무도 그걸 손에 안가죠. 혹시나 진짜 스데반 집사처럼 돌 맞아 죽을까 싶어서요. 아직 결혼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죽어버리면 안된다. 자기 마누라는 어떻게 살아가나...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 사람들은 성경을 왜 보느냐? 목사님들이 성경을 왜 보느냐? 옥한음 하용조 되기 위한 하나의 상품으로서 이것 이것 하면 이것이 될 까 싶어서... 왜? 신이 도와주니까.
그러니 예수도 안중에 없고 스데반 집사도 안중에 없고 마귀도 인정하는 사도바울도 귀찮아요. 그리고 베드로도 귀찮아요. 왜? 베드로는 거꾸로 매달려 죽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가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소.유. 괜찮은 교회하나 꿰차고 평생동안 생계비 뽑아내는 교회하나 소유. (아직도 이게 아무것도 안되가지고 고민이지만...^^) 소유
그런데 이 십자가는 뭐라고요? 상.실. 너무나 극대극이예요. 마귀는 떡으로 산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산다. 너무나 극대극이요 완전히 정반대예요. 말씀은 이거해가지고 밥먹고 살라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통해서 남을 가르치는 너가 한 번 당해봐라는 거지요. 말씀대로 너에게 덮치더라도, 스데반 집사처럼 아 주님 저기 서 계시네, 아 이제야 제대하는 구나, 이제야 기뻐서 돌 던지는 사람들에게 주여 저들이 이 수준을 모릅니다. 그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용서나 해 주세요. 나야 좋죠. 왜? 죽으니까. 주님 품안에서 나야 좋지만. 왜? 보고 싶은 사람 보았기 때문에. 이것을 두자로 뭐라 했습니까? 사.랑.
그런데 사랑에 미친 사람이 누구라고요? 사도바울. 사도바울이 사랑에 미쳐서 하는 말이 고린도후서 뒤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제부터 산 자는 더 이상, 이게 중요하죠,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 야~ 이거예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이거 환장할 이야기 아닙니까. 말씀 보다가 이곳은 붕 건너뛰고 싶어요. 못 본체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이 말은 곧 나 자신 속에 평소에, 그릇이라 했잖아요, 평소에 그릇안에 뭐가 담기겠습니까? 나 자신 속에 뭐가 담겨있겟습니까? 자존심, 명예, 물론 사랑하는 자식들, 아내도 있겠지만 특이 여기는 남에게 인정받는 것, 자아실현, 이런 것들이 들어있겠죠.
그런데 만약 천명 전도를 해서 다 천국에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성경의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죠. 그러면 천명을 전도 해 놓고 그 성과와 업적이 뭐로 돌아와서는 안됩니까? 자신의 명예나 훌륭한 목사라고 인정받은 이런 것으로 돌아와서는 안되죠. 이것을 끊을 위인이 없습니다. 없어요. 어떤 예수 믿는 사람도, 심지어 사도바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한 업적이 자기 명예나 자기 위신과 자존심으로 누적이 안되는 경우가 없어요.
때 안산까지 가서 성경공부한다고 열내고 왔다갔다 했다... 이것이 내 머리 속에 계속 남아가지고 이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나의 우위를 확정해 주는 증거물로 삼을 것이고, 더더구나 이렇게 훌륭한 나에 대해서 하나님은 왜 안도와 주십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반발할 수 밖에 없어요. 나처럼 훌륭한 목사를 왜 주께서는 힘들게 하느냐는 겁니다. 이런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어요. 왜? 우리 모두는 인간이니까.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여기서 좀 어려워요, 요한복음 1장에서 20장까지 3년동안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토록 많은 것을 제자들이 배웠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의 장식품이었고 베드로가 세 번씩 부인할 만 해요. 심지어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물 위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양심이 없어도 그렇지, 물위를 걸었던 사람이 세 번씩 그것도 그냥 부인한 것이 아니고, 잘 모릅니다 정도가 아니라, 난 저 사람을 저주하노라 했어요. 사람이 양심이 있지 자기 장모까지 살려 주셨는데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끝까지 내가 너를 놓치지 않겠다. 그럴 때 우리는 “그거야 예수님이 계속 살아계셔서 우리를 안 떠나야 되는 거지...예수님 떠나버리면 소용없는 일이지.” 할 때, 요한 복음 21장에서 “떠난 줄 알았지롱? 안 떠났지롱, 나 살아났지롱” 살아나서 떠나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이제 제대로 본격적으로 3년동안 안 되는 인간 너희들을 이제는 내가 되게 하고야 말겠다는 이것이 21장입니다.
이것을 두 글자로 뭐라 했습니까? 사.랑. 이 사랑은요. 우리가 예수님 사랑한다고 몸 바치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나의 위신과 자존심으로 추가될 수 있는 사랑이예요. 빠진 분을 위해 다시 할께요. 사도바울이 사랑에 미쳤다 했잖아요. 사랑에 미쳤지만 아무리 인간들이 애를 써도 인간이 자기가 뭔가 움직거리면 그것이 기억이 되게 마련이고, 그 기억은 계속 나에게 나의 소유로 나는 오래 살아야돼, 나는 죽으면 안돼, 왜? 나는 가치있으니까. 자꾸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과 위신과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 마음을 명예를 자꾸 증가시키는 쪽으로 과거가 우리에게 작용을 해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니까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나 그 외에도 다 결국 예수님을 저주했잖아요. 이것은 결국 무엇이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떠나지 않고 계속 전처럼 나를 도와주면 되겠는데, 지금 주님께서 훌쩍 떠난 마당에 지금 우리들끼리 이게 뭐냐 말이죠. 바보들같이. 11명 모여가지고 지금 무슨 짓이냐 말이죠. 한 때 유명했지만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쓸쓸하잖아요. 없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뭐 할 수 없지요.
결국 인간은 나에게 원래 우리가 챙겼던 나에게 돌아오지요. 돌아오는데 그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곁을 떠난 줄 알았던 내가 떠나지 않고 살아서 이제는 산 정도가 아니고 이제 본격적으로, 하도 말씀이 안되니까 이제 말씀을 이 제자들을 통해서 이제는 주유시키고 성취시키는 내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21장에서 시작합니다.
그 때 들어오실 때 하신 말씀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른 계명이 아니고 사랑만 통하는 계명. 모든 율법이 있지만 모든 그 계명은 사랑에 다 통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뭐는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예요. 왜? 그것은 또다시 나의 명예와 위신을 위한 증거물로 계속 누적(마일리지)으로 쌓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만약에 한 천명을 전도했는데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 내 소득은 줄어드는 반면에 전도할 때 땡땡이 치고 요령부리면서 전도를 한 사람도 안했던 사람이 갑자기 사업이 잘되어서 십일조를 한달에 천만원씩 낸다고 할 때, 나는 전도 천명한 사람인데 수입은 줄어들고 저 쪽은 수입이 늘어날 때 은근히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안들겠어요. 들지요.
결국 이것은 뭐냐? 누구를 사랑했다? 주님 사랑은 하나의 빌미였고 핑계였고 주님 사랑하는 그것을 하나의 주특기로 삼아서 결국 내가 근원적으로 처음부터 노렸던 것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 이것에 뭔가 힘되라고 보템되기 위해서 살~짝 주님 사랑합니다 라는 것을 이용한 것 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그 우리의 은밀한 것을, 사태가 안되게 하므로 우리 예상밖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들추어내는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인가 폭로시키는 것이죠.
이것을 제가 전에 안산 강의할 때 했는데,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를 죽이지 않고서 일하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진짜 일은 반드시 그 일에 동원 된 나를 팍팍 누르고 나의 죄를 들추어 내면서 주께서 일하십니다. 그래야 그 나온 모든 결과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중간에 우리 나가 그것을 낚아채질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게 베드로전서 4장에 11절(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게 참 이상하죠. 잘 생각해보세요. 누가 만일 봉사하려거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함과 같이 하라 했죠. 자 이 말씀이 왜 이상한지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나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 청소를 하려는데 다른 사람은 다 가버리고 나 혼자 교회 청소하려고 남았습니다. 기분은 나쁘지만 성경공부하다 들은 것이 있어서 그래 다 도망갔지만 하나님 뜻이다. 난 청소해야겠다. 해서 하니까 청소가 잘 되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교회 청소를 말끔하게 그것도 기쁜마음으로 하니까 그러면 영광은 어떻게 되요? 하나님께서 영광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열심히 한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잖아요. 이게 우리가 아는 영광돌리는 공식이 아닙니까? 흔히 교회에서 그렇게 알고 있죠. 그런데 성경보니까 난데없이 여기 예수 그리스도는 왜 등장합니까? 예수그리도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지금 내가 내 잘난척 하는게 아니잖아요. 지금. 순전히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즐겁게 청소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는 너도 인간이야 너도 할 수 있어 네가 겸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주시면 성령주시는 힘으로 너도 할 수 있어.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제 제 힘으로 독자적으로 영광돌릴 수 있겠군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하나님 주신 힘으로 독자적으로 힘받아서 영광 돌리겠다는 이 공식이 무슨 하자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더란 말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영광돌리는 방식은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 이것 조차도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그러냐하면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오게 되면 나를 도와주느냐가 아니라, 본인이 생각하기를 MBC기자가 와서 “지금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시는데 하나님의 힘으로 하시죠?” 할때 진짜 성도 같으면 “제가 지금 제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주의 힘이 나보고 일을 시켰습니다”. 하겠지요. 내가 청소하는데 힘주세요가 아니라, 안하고 싶은데 힘이 와서 청소를 하게 된 거예요.
어떤 코메디에 늙은 노파가 물에 빠지니까 아무도 안들어가는데 어떤 용감한 청년이 들어가서 건져냈단 말이죠. 그래서 인터뷰하면서 용감하다고 하니까 누가 떠밀어서 했다는 겁니다. 아 이거 이해가 잘 안되시는 모양인데 디모데후서를 2장 26절을 봅시다. (딤후 2: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면 어떤 경우가 되어야만 가능합니까?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힘을 얻었다고, 또는 소유했다고 할 수 없잖아요. 반대로 얘기해야죠. 하나님이 나를 소유해서 이번 청소를 다 시켰다. 하나님이 사로잡지 않을 때는 또 도망갈 거야, 하지만 사로잡힐 때 나는 할 수 밖에 없어. 나는 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 해야 되요. 그것을 나는 사랑에 미쳤다.
사도사울이 하는 말이 “여러분들이여 내가 준 사랑이라고 보지말라”는 거지요. 지금 주님은 나(바울)를 사로잡고 있는데, 사람들은 “사도바울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니까 반대로 하니까 사도바울은 미치는 거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남보다 수고는 많이 했지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그린도전서 15장에 나오잖아요. 사람들이 자꾸 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세상에 저렇게 겸손하니 저런 말도 나오는 구나. 성화되었구나. 본인(사도바울)은 미치겠는데...
예수님 당시에 과부가 많았어요.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과부마다 다 도와줬습니까? 아니죠. 많은 과부가 있으되 사렙다 과부에게만 찾아가는 겁니다. 이게 뭐냐? 선택입니다. 누가 죽어서 천국가기 싫은 사람있습니까? 그런데 진짜 천국가는 사람은 사로잡혀서 천국가게 되었지, 내가 천국 연구했더니 주께서 힘주셔서 천국갔다.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임해서 소경이 눈뜨듯이 눈을 떠보니까 주께서 이미 나를 붙잡고 있더라 말이죠. 이미 용서가 되있고. 창세전부터 계획된 일을 지금 실행한다는 거예요.
이 사랑에 대해서 요한복음 21장을 설명하고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교체에 들어갑니다. 아까 제자들은 뭐에서 뭐로 되돌아간다구요? 처음부터 무엇에서 무엇으로 되돌아간다? 나에서부터 나로. 왜? 이 세상에 끝까지 죽을 때가지 나를 지켜주는 것은 나 밖에 없어요. 예수도 한때 추억이었고, 교회 열심히 다닌 것도 추억이고 목사님 참 좋았다 그것도 추억이고 낙엽처럼 다 떨어지면 뭐 나만 남았네. 결국은 나한테 돌아와요.
자식, 마누라, 남편도 그렇고 다 떨어지면 남는 것은 결국은 진솔하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요. 교인들보다 내가 더 중요해. 나는 내 사랑은 포기를 못해. 내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주느냐. 오랜만에 좋은 말 합니다. 다시 할께요. 내가 나를 사랑해 주기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주나. 관속에 끝가지 가는 것도 내가 가요. 관속에 가면서 나라는 것도 내가 느껴요.
그러니까 나에서 나온 사랑 그 사랑과 교체, 바꿔치지 않으면 이 베드로가 사도바울처럼 되질 못합니다. 이제 바꿔치기에 들어가요. 묻습니다. 먼저 과거에 해당시켜요. 과거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뭘라고 불렀습니까? 고기 억수로 많이 잡아 주었지요. 그 때 베드로가 아주 철없는 짓을 했어요. 고기 많이 잡아주니까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고맙습니다. 노량진 시장에 가져다 팔면되겠습니다. 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그 다음에 뭐예요? 그 다음에 중요한 말. 나는 죄인입니다. 십자가가 들어와 버리면 아 이제 죽어 천당가겠네, 이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아요. 나는 죄인입니다. 왜 죄인이라는 말을 했냐면 고기를 소유해야 내가 살아요. 고기 잡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되었던 누가 도와주던 자기가 짜 놓은 틀이 있어요. 뭐냐? 고기 많이 잡게 해서 이 나, 나에게 중요한 나,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나, 내 가족과 나를 먹여 살려 주니까. 도와주면 고맙습니다 하겠다는 틀을 짜 놓았는데,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고기가 잡히니까 주님앞에 이 틀 자체가 위대하신 당신 앞에서 이 틀 자체가 죄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하고 짜놓은 틀, 금요철야기도할 때 우리 첫째 애는 법대가게 해 주시고 둘째는 의대가게 해 주세요. 틀 짜 놓았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임해버리면 그 자체가 뭐라고요? 주여 제가 헛짓하고 있군요. 내가 나 밖에 모르는군요. 죄를 느끼는 거예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시킵니다. 시키는 이유가 우리 기도 응답받으라고 시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 기도와 예수님 기도가 얼마나 격차가 나는 가를 뚜렷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기도를 시켜요.
우리가 지금 구원받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우리 기도 열심히 안 쉬고 했기 때문에, 우리 덕인 줄 알고 있는데, 로마서8장에 보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기도하시는 분의 기도 덕분으로 우리가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하시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식으로 지금 인도함을 받고 있어요. 기도를 해야되요. 하는가운데서 내 기도와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가? 예수님은 이 쓴 잔을 내게 돌리지 마시고... 내가 이 쓴 잔을 마시게 하옵소서.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우리는 때려 죽여도 그런 기도 못해요. 왜? 자기가 해체되고 부서지기 때문에.
현재 있는 소유를 증가하게 해 달라고, 그걸 축복이라고 하죠. 축복해달라고 기도하지. 있는 것도 망하게 해 달라, 함부로 입을 내기가 무서워요. 진짜 응답받으면 망하게요. 기도하지 마소. 안되요. ^^ 아까 얘기했죠. 신학생들 스데반 집사되게 해달라고 그래 기도 안합니다. 주여, 옥한음 목사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하지. 스데반집사 되게 해달라는 기도 못합니다. 기도 응답받으면 자기 망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처음에 고기 잡을 때 그 때 아~ 뭔가 내가 짜 놓은 틀은 깨어져야 되는구나, 그 깨어져야 하는 것도 하나의 일시적인 것이었어요. 안 깨진 거였어요.
그러니 성령으로 영원히 거하시면서, 나오면 깨고 나오면 깨고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나에게 죽음이 임하고 생명이 너희에게 임한다. 예수의 죽으심이 나에게 임하므로 말미암아 나는 죽고 너희는 산다고 했거든요. 그게 성령의 능력이라 했어요. 그러니까 맨날 하나님은 일을 하시면서 일 한 당사자를 죽여요. 꼼짝마라 죽여요.
그걸 깨우치게 해 놓고 그 다음에 묻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지요. 이 틀은 깨고. 나는 살아야 돼, 예수도 내가 살기위한 이용물이야 하는 그 틀이 있잖아요. 예수는 하나이 추억이야 다 지나간거야 했는 데, 다시 등장하셨습니다. 등장한 의미를 이게 좀 어려운데 한 번 봅시다. 예수님께서 가끔 등장하셨습니까 늘 등장하셨습니까 늘 십자가 지기 전처럼 늘 같이 붙어다니지는 않았죠. 그러면 안 붙어다닌 겁니까? 오늘 날 교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해서, 없는 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많아요. 예수님을.
살아있는데... 마치 우리가운데 없는 분같이 느껴서, 예수님이 없다고 여기면... 그 대신 그 자리를 누가 채웁니까? 소위 사람들로 채워져요. 그래서 목사가 되어서 설교를 할 때에 무엇부터 찾아야 되냐하면 주님을 찾아서 주님이 계시다를 것을 느껴서 설교를 해야 되는데, 주님이 안 느껴지면 누가 눈에 들어오냐 하면 물주되는 장로 표정이 어떠냐 그게 눈에 들어와요. 돈 많은 헌금 많이 하는 집사가 어떤 표정을 짓느냐? 새로나온 교인이 삐지고 있느냐 아니냐 그것이 눈에 들어와요. 그게 사람들을 의식해요.
주님을 의식하면 복음의 광채가 되어서 사람들이 안보이고, 주님 계심을 생각 안하면 사람들이 의식되어서 설교를 잘 했나 못했나, 잘 했으면 한 2명 더 불고 못했으면 4명 교회 나갈텐데 이래가지고 교회 운영이 되겠나. 이러한 자기의 존재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요. 그럴 때 설교하면 설교가 뭐가 되겠어요. 위선적인 설교가 되죠. 매끄럽게 설교해서 사람 끌어 모으자는 그런 공식. 영업 정책이죠. 하나의 장사 수단에 불과하죠.
주여 지금 스데반 집사 되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으로. 지금 데려가시면 안되겠습니까? 왜? 네자로 보고싶어. 이걸 두자로 뭐라 했습니까? 사랑. 사랑은 보고 싶은 거예요.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면 그 때는 얼굴을 얼굴로 맞대고 본다. 그 때 십자가의 죽으신 못자국 보고 이것 때문에 살았구나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는 뭐로 바뀌느냐? 소유로 바뀌어요. 내 교회 있어야되고. 교인들 많아야 되고 돈 많은 사람 우리교회 많이 와야 되고 우리 아이 공부 잘 해야되고 내 마누라 이뻐야 되고. 소유. 그런 거 다 떠나도 뭐 나만 있으면 되지. 제가 아까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사는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일찌감치 남편을 포기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계속 아내를 의지하죠. 그런데 여자는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전부지 남편은 자식을 돌보는 하나의 기계죠.
내 배에서 난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식 사랑이 아닙니다. 내 사랑 이어주기입니다. 사랑 물려주기입니다. 이거 듣기 어렵겠지만 진짭니다. 내가 피운 꽃이 지더라고, 네가 꽃을 피워서 진 내 꽃을 대체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 다 십자가와 관계없는 내 소유성과 관계있어요. 여기에 성령님이 십자가를 들이대게 되면 이 바보야, 너는 처음부터 네 것이 아니야. 내 것인데 자꾸 선악과 따 먹고 난 다음부터 왜 자꾸 내 것인데 키워보자, 내 것인데 키워보자, 내것인데 키워보자. 자꾸 내것을... 내 교회를... 한다고요.
사도바울이 무슨 자기 교회가 있었습니까? 교회가 필요 없었어요, 보고 싶은 주님만 있으면 되었어요. 자격증 있어서 뭐하려고. 내 것이 누구냐가 아니라, 주님이 (너는) 내 것이다에 만족한 거예요. 주님이 나의 것으로 된 것 만으로. 심지어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비록 주님에서 끊어질지라도 내 형제들이 구원받는다면 난 지옥가는 것도 좋습니다. 내가 주님께 떨어지는 것도 좋습니다. 이런 말을 대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정도로 주께서 부르면 부르는대로, 까라면 까는 거지 뭐 말이 많노. 그게 나라는 거죠.
내 소유가 어디 있어요. 내 소유가. 만약에 내가 있고 성경공부 해 버리면, 이것은 뭐나 요한복음 1장에서 20장까지 모든 얘기를 백날 들어도,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참 그때 성경공부할 때 좋았는데, 그래도 역시 중요한 건 나야. 다시 나로 돌아와 머물러 버려요. 그런데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역시 이렇게 이야기 하는게 납니다. 그런데 감사하기는 그런 나를 주께서 지금 살아계신 주께서 부활하셔서 배후에서 그냥 두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5장에보면 징계가 없으면 남의 자식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나의 아들도 아니요 사생자다. 내 아들 취급을 안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증거해야 합니까? 내가 잘 났다는 것을 증거하면 안되고 나는 이렇게 얻어 터졌다는 것을 증거해야돼요. 목사라고 까불다가 이렇게 얻어 터졌고, 교인 좀 있다고 까불다고 4명 빠져버리고 이레 망했고. 주님은 살아계셔서 주님의 십가가 공로만 들어내는데 비해서 나는 철저히 나를 때리고 갈거다.
어디까지? 베드로같은 경우 죽는 것도 자기 맘대로 못해요. 네가 원치 않는 죽음의 길을 가기까지 주께서는 자기 사랑을 일방적으로 집어 넣어버립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좋아요. 베드로를 또 화나게 만드는 겁니다. 베드로가 저 사도요한은요? 이렇게 하거든요. 예수님도 좀 말씀을 사셔도 위로도 좀 해주고 하면 좋은데 약을 올려요. 저 인간이 살아있더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 왜 네가 아직도 사랑 사랑하면서 왜 저 사람의 것과 나의 것을 왜 또 비교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 공부를 했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안변합니다. 역시 우리는 늙어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몰라요. 주여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 밖에 안나온다니까. 최선 다 한게 무슨 자랑이라고. 최선을 다 한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하는 나를 주께서 못 살게 굴어서 기어이 천국에 집어 넣는 군요. 그것도 내 열심과 공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피로서 내 옷을 하얗게 희게 하시고, 강도가 십자가 위에서 한 것처럼 오늘 밤 낙원에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십자가만 크게 보이는 쪽으로 몰아가시는 주님의 은혜가 정말 이렇게 주님의 사랑이 이렇게 큽니다. 정말 보고 싶습니다. 주님이여. 곧 만납시다. 여러분의 기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요한복음 21장을, 요한복음 전체를 끝내면서 우리가 나 자신 밖에 몰랐음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한 번 선택한 사람, 창세전부터 작정했기에 아버지께서 보낸 자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살리신다는 그 약속이 우리 자신을 통해서 실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산강의 2006년 11월 10일.hwp (96.0K), Down:11
정낙원(IP:124.♡.243.22)
09-05-13 10:44
아니 의사가 무슨 시간이 나서 이런 일을 다 한다냐!
야! 주님이 곧 오시기는 오시려나 보네요.
곧 곧에 이상 징후들이 나타나는걸 보니 때가 차긴 찬 모양입니다.
귀한 글을 녹취하셔서 올려 주시니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피 같이 여기고 잘 먹겟습니다.
갑자기 보고싶네요.
여름 수련회 때나 보실 수 있겠지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조현창(IP:221.♡.109.27)
09-05-13 11:02
감사합니다.
처음이라 서투르고 오타도 많고요... 무엇보다 잘 못 녹취된 것은 없는지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녹취하면서 괴로움과 함께 즐거움도 많이 누렸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해 보겠습니다.
그 동안 쭉 녹취 올려 주시는 목사님들과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진짜~~ 로요.
복음은 듣고 또 들어도,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가 않네요.... 늘 새롭고요.
강구만(IP:125.♡.86.77)
09-05-13 11:18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 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133편)
이미아(IP:115.♡.210.107)
09-05-13 13:26
소유를 상실로 바꾸시는 교체작업...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시는 방식으로...우리의 잘 짜여진 틀을 깨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죄인이고 무엇을 안해도 죄인이고 존재하는 그 자체가 죄인이어서 죄인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고..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은 저주인데..이 저주를 대신해서 지신 분은 바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사랑에 미쳐 보고싶은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에 그 사랑에서 유발된 보고싶음은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둘째 시간도 녹취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