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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산강의 2006년 11월 10일 [요한복음 21장] 1/2자유게시판요한복음

안산강의 2006년 11월 10일 [요한복음 21장] 1/2

이름 : 조현창(IP:221.151.109.198)

안산강의 2006년 11월 10일 <요한복음 21장> 1/2

안산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21장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서 20장까지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자신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여기 21장 마지막장은요 참 재미있어요. 이게 뭐냐하면 [상실]!. 그게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했는데, 요즘 우리 같으면 교회를 한 15년 다녔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가을철에 길가에 낙엽 떨어지면, 모든 게 우수수 저버리면, 낙엽은 져서 가버리고 남는 것은 나만 남잖아요. 나만 남아요. 그죠? 그러면, 평소에 낙엽이 좋으니 꽃잎이 좋으니 해도 세월따라 다 없어져버리면 결국은 제일 좋고 제일 중요한 게 누굽니까? 나밖에 없잖아요. 나밖에. 그죠? 나밖에 없단 말이죠.

뭐, 예수님이 좋으니, 예수님의 말씀이 좋으니 해도 결국 그거 다 떨어지면 달랑 남는 게 뭡니까? 나 밖에 안남거든요.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잖아요. 이게 21장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고 저렇게 하시고 예수님이 좋은 말씀 하시고 해도, 예수님이 떠났다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이 자기가 떠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 있는 상태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21장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과 늘 같이 있었고 심지어 3년동안 동고동락했고 잠도 같이자고 식사도 같이하고 시험과 고난과 함께 (욕을) 들으면서 살았어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49절에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 즉 예수님과 이 주님을 따르는 집단 그 집단들은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는 이런 욕까지 먹으면서 예수를 따랐지만, 그런다고해서 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렇게 딱 붙어서 살았느냐 그 말입니다.

예수님이 곁에 있어도 결국 마음은, 세상에 남는 것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 밖에 없다. 교회 한 30년 다녔다. 목사님이 좋더라, 장로님이 좋더라, 집사님이 좋더라, 하지만 그 목사님 다른 교회가고 그 장로님 이민가버리고 그 집사님 부도나 사라져버릴 때 결국 뭐 속았다라든지 뭐 배신당했다라든지 그 이야기보다도, 원래 인간이란 그런 것 아니겠어? 이런 느낌입니다. 원래 그 때는 교회에서 재미나게 놀러가기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좋았는데, 하지만 뿔뿔이 뿔뿔이 헤어지면, 뭔가 손해보았다는 생각은 안들고, 이제 본래 내 자리로 왔네. 그죠? 본래 그래 그래 그거야. 그거 뿐이었어. 이게 인간의 진면목이 아니겠어요?

이것보다 더 확실한 인간의 모습이 있겠습니까? 결국은 나만 제일 중요하고 소중하고 나머지는 하나의 귀걸이나 어느 장식품처럼 왔다가 스쳐가는 (어디 노래 가사 같다^^), 왔다가 스쳐가는, 왔나? 언제 이별할지 모르고. 이별한 사람 또 만나지만, 그 만남이 전부가 아니고 또 그 사람도 훌쩍 떠나버리고. 밀물처럼 밀물썰물이 내 발목을 물이 적셔도 해변가에 서있는 것은 결국 나 밖에 없잖아요. 나. 결국은 나로 돌아간다. 결국은 나. 요한복음 21장에서 인간은 결국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게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참~ 중요하죠. 예수님께 들었던 그 좋은 말씀도 낙엽과 함께 다 사라져버리고. 예수님 떠나면 다 떠나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하늘나라 권세주겠다고, 천국가겠다고 했던것도 하나의 해픈닝 이었고, 하나의 에피소드였죠. 젊은 날의 오기, 한 때의 열정, 열심. 이런 껍데기 같은 것들. 환영이고 환상이고 망상들. 예수=망상, (오늘 좋은 말 많이 한다) 예수=환상. 남는 것은 나. 물론 내 자식있고 내 남편있지만, 이 사람들이 언제 떠나버리면 역시 떠나고 떠나도 못 떠나는 것은 결국 나. 나는 나를 안떠나잖아요. 나는 나한테 충실한 개(dog) 아닙니까? 그죠?(^^)이 세상에서 가장 충성된 개는 나밖에 없잖아요. 내가 나를 잘 알고, 내가 나를 잘 사랑해 주고, 내 사정 내가 제일 잘 알고... 이런 것들이 옆에 있더라도 언제 훌쩍 떠나면 그만아닙니까? 자식도 나중에 커서 결혼하면 남이고, 죽을 때도 결국 마지만 관속에 함께 하는 것은 [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요한복은 1장에서부터 쭉 나오는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하늘이 갈라지고 세례주고, 2장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3장에 니고데모가 찾아오고,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찾아오고, 5장에 베데스타 못가에서 병자가 나았고, 6장에 오병이어 (기적이)일어나고, 7장에 예수님이 샘물떠가지고 성령이 이같이 오리라 했고, 8장에 간음한 여인이 그냥 용서받고, 9장에 날 때부터 소경이 눈을 뜨고 하는 이런 것도 내 추억의 앨범에 들어가는 한 장의 사진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 사진 라이터(불)로 태워버리면 끝나는 거죠. “과거에 즐거웠다” 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죠. 교회다니고 성경공부할 때 그 때 참 즐거웠다. 과거에 부곡동에서 성경공부할 때 그 때 참 좋았다. 하지만 그 때 좋으면 뭐합니까? 지금도 계속 좋아야 하는데... 지금 그런 즐거움이 없다면 남는 것은 나라는 덩어리 밖에 없죠. 아무리 나를 풍성하게 만들고 나를 더욱 더 향상시켜도, 나를 거듭나게하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하고, 나에게 성경말씀을 (물)바께스(양동이)로 뒤집어 씌우듯이 해도 백날해도, 툭툭털고 누구한테 실망 한 번 더 당하고, 주위에 일이 꼬인다든지 가족중에 누구와 사별한다면, 그동안 교회다닌 그것도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꽂혀있는, 고등학교때 끼워넣었던 다 부스러진 낙엽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뭐냐? [상실]이예요. 상실. 상실은 사람을 분노하게 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예수님과 함께 보낸 3년 세월이 그 게 나를 전혀 다른 나로 바꾸지 못하고 3년전에 예수 만나기 전이나 지금 후까지 전혀 똑같이, 오히려 3년동안 세월만 낭비하게 만들었던 그 예수에 대해서는 분노, 분노와 더불어서 억울하죠. 3년의 그 빠진 누락된 것은 누가 보상할 겁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버리고, 가끔은 나타났다 코빼기도 안 내미는데요. 없는데요.

전에 예수님과 같이 모일 때는, 쉽게 말해서 계모임할 때는 계모임하며 찌짐이(부친개?)지져먹고 잡채 해먹고 좋았지만, 그 같이 찌짐, 잡채 해 먹었던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뭐 어디갔는지 가끔 툭툭 튀어나오고 사라지고 하니까 내 손에 붙잡히지 않지 않습니까? 내 손에. 내 손에 예수가 아니잖아요. 여기서 중요합니다.

[나]라는 것이 영원토록 나가 지워지지 않는다면 이 나가 내 뿜는 모든 것은 뭐냐하면 소유, 획득이예요. 예수가 내 손에 잡히는 예수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떠나는 예수라면 나는 병신되는데요. 나는 아주 바보되는데요. 예수님께서 ‘아 나는 너를 구원한다’ 했으면 나를 구원하는 데 까지만 필요한 게 아니예요. 나를 구원한다는 예수님이 내 손에 딱 잡혀야 되요. 딱 잡혀서 내가 필요할 때마다 부려먹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21장에서 예수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동안 소유하리라 여겼던 내가 뭔가 예수님을 소유해가지고 맘대로 부려먹고, 내가 죽을 때도 천당에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내 소유만든다, 생각했는데, 그 소유가 안 될 때의 상실감. 그 분노와 그 억울함. 그동안 성경공부한 것은 뭐가 되어 버려요? 아무 소용없잖아요. 나만 달랑 남았잖아요.

그러면 모든 것이 결국 처음부터 하나의 내 눈을 가렸던, 내 눈을 혼미케 했던, 하나의 꿈덩어리였지요. 여러분, 꿈은 항상 꿈이예요. 꿈은 그냥 꿈일 뿐입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법은 없어요. 그렇지만 꿈 꿀때에는 기분이 좋아요. 피터팬처럼 막 날아다녀요. 하지만 꿈은 끝나면 곧 즐거움도 끝나는 겁니다. 예수님도 좋지만 예수님이 나를 떠난 이상 이제는 예수 좋아하면 안되요. 나는 나를 좋아해야 되요. 왜? 남는 것은 나 밖에 없는데, 나라도 나를 좋아해야 해요. 안그러면 사람 미칠지경인데요.

야고보서 한 번 봅시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 21장이요, 정말 소위 오락으로 놀이로서 예수믿는 것을 완전히 까발립니다. 야고보서 1장 11절 (약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이 말씀이 어느 말씀과 비슷하다고 느껴집니까? 이사야보면 나와 있죠. 인생이란 풀의 꽃같으니 꽃이 떨어지고 풀의 영광도 떨어지지만 무엇은 영원히 서리라? 하나님 말씀은 영원하리란 말씀이 나오죠. 그죠? 자 한 번 물어봅시다. 꽃이 활짝 필 때 그것이 꽃의 전부입니까? 언제 꽃의 진짜 본질은 들어납니까? 꽃이 질 때예요.

성경말씀은, 하나님은 이겁니다. 꽃이 활짝 피게 해 놓고 꽃을 지게 해 버려요. 접히게 하거든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꽃이 활짝 필 때가 진짜 꽃의 진면목이다,라고 생각이 들다가 꽃이 져버리면, 어?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하면서 돌아서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요, 활짝 필 때에 그것이 나의 진면목이 아니고, 내가 질 때, 내가 꼴아박을 때, 완전히 밑바닥에 내려갈 때가 원래부터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안하고 내가 꽃이 활짝 폈는데, 지려고 하니까 나는 꽃을 피우지 못하지만 뭔가 괜찮은 남편 만나서 또는 자식을 잘 키워가지고, 져버린 내 꽃을 대신할 만한 꽃을 피우는데 또 몰두합니다. 특히 여성분들 나이 좀 많아지면 (주름?)땡기고 (코?)세우고 (턱?)갈고 난리 아닙니까? 견적내보면 많이 나오거든요^^. 왜 이러냐하면 지는 꽃이 되기 싫은 거예요. 지는 꽃을 붙잡아 매어서, 나 꽃 안진다. 20대 활짝 피었던 그 모습이 내 진짜 모습니다, 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거는 발악입니다. (우리 00이 아기? 발악하듯이 발악입니다) 그저 그 때 활짝 폈던 내가 진짜 나다,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그 때 사진들고 다니면서 이것이 증거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억지로라도 우리를 지게 만듭니다. 꽃이 지게 만듭니다. 왜 꽃이 지게 만드느냐? 이게 요한복음에는 안나오고 힌트만 나오고 빌립보서에 나옵니다. (빌립보서) 2장에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 동등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그 다음 어떻게 되느냐하면 보통사람 정도가 아닙니다. 죽기까지 종노릇을 해서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노예생활, 종노릇, 낙엽 쓰는 사람쯤 되겠죠. 아무튼 사람들이 아버지 직업이 뭐고? 환경미화원이요. (라고) 차마 말 못 할 처참한 직업 있잖아요. 처참한, 제일 처참한 그것보다 더 처참하게 가는데 그게 뭐냐?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자 이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뭐냐하면 상실입니다. 상실. 상실입니다. 소유가 아니예요. 소유의 반대말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십자가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 인간들아 이거 갖고 싶지?

인간1; 예, 갖고 싶습니다’

예수님; 너 직업이 뭔데?

인간1; 저 환경미화원입니다. 부끄러워 미치겠습니다. 더 좋은 직업을 갖고 싶습니다. 좋은 직업이 있으면 이 직업을 버리겠습니다.

예수님; 너 지금 지금 몇 평짜리 집에 사노?

인간2; 지금 20평에 삽니다.

예수님; 뭐하고 싶노?

인간2; 50평짜리에 살고 싶습니다.

소유하고 싶습니다. 획득하고 싶습니다. 모든 인간이,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그 소유가 나에게 활짝 피게하는 꽃을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이 풀이 자기의 풀 값이 아니고 꽃을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영원한 활짝 핀 꽃이고 싶어하는 거예요.

참 이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합니다. 꽃은 시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왜 시들어야 되는가? 말씀이 영원함을, 말씀이 영원하지 뭔가 소유하려는 너는 시들어야 된다는 거죠. 다시 한번 해봅시다(다시 한다 해 놓고 보면 안 나온 거 한다니까....) 요한복음 21장은 1장부터 20장까지 예수님한테 들었던 것, 같이 경험했던 것, 놀라운 기적들, 심지어 오병이어의 기적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기적들이, 경상도말인지는 모르지만 다 모두 도루목이다. 도루목이라는 것이 말짱 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듣고 기적도 동참하고 심지어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는 살아났잖아요, 거기에 제자들도 있었잖아요. 나사로 되살아날 때 제자들을 몰고 갔습니다. 제자들이 나사로 살아난 것도 보고 소경이 눈 뜬것도 보고 물이 포도주된 것도 다 봤지만, 다 그거는 지나간 하나의 앨범 속에 있는 퇴색된, 색깔이 날아가버린 옛날 고등학교 시절의 하나의 사진에 불과합니다. 다 소용없는거예요. 종교라는 거, 신앙이라는 거, 이거 다 소용없는 겁니다. 그 때는 마치 신앙이 철철 넘치는 것 같지만, 그때는 지금 죽어도 천당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다 지나가면 남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나, 나 밖에 없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공부 안하면 교회 백날 다녀도 전부 다 자기 오락이예요. 취미생활이예요. 옆에 큰 교회 있으니까 나니는 거지 옆에 만약 두세명 모이는 교회 있으면 가지도 않을 거예요. 왜? 큰 교회이기 때문에 친구가 많으니까 가는 거지요. 이러한 그 종교라는 허상 허망한 것, 그런 것을 전부다 완전히 폭로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제자들 손에 놀아나지를 않습니다. 너의 실상을 알아라. 실상을. 네가 백날 예수님이 좋다, 그 때 예수님이 함께 있었을 때가 그립다 해도, 막상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죽을 때도 자기만 생각해요. 나머지 외부에 있는 것들은 뭐냐, 소유할 만한 것들이고 소유가 안되면 그냥 포기해야 할 것들이고, 결국은 남는 것은 나라는 이 주인공, 이것만 남고 나머지는 다 장식품입니다. 엑스트라,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그걸 누가 아십니까? 우리 예수님이 아십니다.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몇 번 회개했다고요? 회개해도 소용없습니다. 장모의 (병이) 나아지고 자가기 물위를 걸어도 소용없고 한 때 경험했던 거예요. 한 때 경험이지 지금 경험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지금 계속되는 경험이 아니라면 한 때 그냥 추억에 불과하지, 추억이 나를 밥 먹여 살리는 게 아니잖아요. 추억이 지금 나를 살게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 추억이라는 것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죠.

결국은 예수라는 분은 나에게 있으나 마나 한 분이예요.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고. 남는 것은 나. 결국은 나는 나에게만 돌아와요. 하나의 본능같애. 고무줄 아무리 당겨봐야 소용없습니다. 한 순가 고무줄을 놔버리면 당겨진 긴 고무줄이 원위치되어 나를 탁 칩니다. 그래 믿을 놈은 니밖에 없어. 결국 나는 나에게 돌아온다니까요.

아까 이야기한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다 떠나버리면, 떠나가도 괜찮아요, 왜? 나는 있으니까. 나만 남아있으면 그런대로 또 살아요. 그래서 남자보다 여자가 오래살아요. 남자보다 여성이 더 오래사는 이유가, 수명이 점점 벌어져 10세정도 차이가 나는데, 여자들이 오래사는 이유는요, 남자들은 철이없게도 아내한테 의존하지만, 여자는 결혼한 지 6개월만에 남편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미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앙케이트 조사결과 지금의 남편하고 살사람은 5%도 안된답니다.

남편은 지금의 아내하고 살 사람은 60%가 넘어요. 왜? 잘 부려먹었거든요. 그래서 남자들은 현재 아내하고 헤어질 마음이 없다. 왜? 그동안 부려먹는다고 길들이는데 수십년 보냈는데 왜 또 새 여자만나가지고 길들이는데 또 수십년 걸리는데 왜 그 고생을 하느냐 말이죠. 여성들이 오래 사는 이유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일찍 알았다는 그 놀라운 혜안. 지혜. 그 때문에 오래 살아요. 아예 의지할 생각을 안하니까 오래살고, 남자는 뭐 양말하나도 못 챙기고, 아내가 잘 해 줄 때는 당연히 잘 해주는 줄 알고, 아내가 그만 몸 아파버리면 그 다음부터 아내 아프다고 되게 구박하고, 아내 죽으면 화장실가서 혼자 크게 웃다가 들키고(^^)

성경은 그냥 만화책이 아닙니다. 나를 지적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나를 지적하는 게 성경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을 통해서 왜 하나님을 그렇게 하느냐? 아까 다시 할께요. 꽃 있죠. 꽃은 풀에서 꽃이 자라잖아요. 그런데 풀은 마치 꽃이 피니까 꽃이 풀의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꽃을 어떻게 하십니까? 지게 만들지요. 피었다가 지게 만들므로 말미암아 이 들풀로 하여금 너는 기껏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그럼 그게 뭐가 중요한데 (하지만), 하나님은 풀의 꽃은 져도 말씀은 영원하다. 말씀은.

오늘 아침에 병원에 갔다왔는데,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을, 내가 보호자 불러서 이렇게 말했어요. 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이 남보다 죄를 더 지어서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의 계획에 의하면 지금 그 나이에 돌아가셔도 되기 때문에 지금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얼마나 살고 싶었겠어요. 본인이 살고 싶다는 것은 풀의 희망사항이고, 풀 위에 풀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이 성경 말씀이예요.

그런데 제자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이 말씀을 가지고 내가 누구냐를 알아야 될 텐데 이 말씀을 장식품으로 떼가지고 아름다운 여배우 그림 같은 것(처럼), 조사(?)가지고, 나는 예수 안다, 이런 거 성경공부하는데 더덕더덕 붙여놓고, 나중에 이 덕지덕지 붙은 것 다 떼어버리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나 밖에 없어요. 자기 자신은 누구냐를 알려고 하지는 않고 나는 성경공부 많이 했고 예수 잘 알고, 이 예수 알았으니 죽어 천당 갈 거고, 자꾸 자기 자신이 분해되고 해체되고 져야된다는 나는 망해야 된다는 생각은 안하고, 자기를 꾸미는 거예요. 성경공부를 통해서, 목사는 신학을 통해서. 나를 부수는 성경이 아니라 나를 살찌우게 하는 성경이예요. 나를 위대하게 만드는 성경.

그러니까 결국 나중에 어려움이 오면, 예수님 미안합니다. 당분간 쉬겠습니다, 하고 다시 본래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죠. 그런데 방금 제가 말씀이라고 그랬잖아요. 말씀. 이 말씀이 왜 이렇게 우리를 낮추느냐? 그 이유가 빌립보서 2장 11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그 모든 영광을 자진해서 영광의 동등됨을 여기지 않으시고, 그걸 두자로 상실.

모든 인간은 소유죠. 예수도 소유하고 성경도 소유하고 삼위일체도 소유하고 소유하려고 하는데, 그 소유하려는 주인공은 소유를 통해서 자신을 살찌우려고 하지, 절대로 소유하는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깨어져서는 안 된다, 이것 아닙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 하나 성경말씀을 배움으로서 괜찮은 나로 바꾸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지, 내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그것은 아니올시다,라는 거지요. 우리는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냐. 처음부터 그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인데, 하나님을 상실하고 뭐로 왔다했습니까? 아무것도 소유될 수 없는 소유하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이면서도 아무것도 소유 없이, 심지어 상실했는데 빼앗기었는데... 무엇까지 빼앗겼습니까? 마지막에 인간들이 제일 아끼는 목숨까지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네가 말씀을 알아? 이게 말씀을 다 이루었다. 자기가 죽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말씀을 다 이루어다는 거지요.

이게 소유를 원하는 인간들에게는 정 반대의 길이죠. 인간은 뭐를 가져야 다 이루었다인데 , 예수님은 다 잃어 놓고 다 이루었다예요. 마치 타짜(화투치는사람)가 “오늘 1억을 땄구나 오늘 다 이루었다” 이래야 되는데 “가진 재산 1억을 다 잃어놓고, 다 날려놓고, 주여, 다 이루었군요”. 이거하고 똑 같은 거예요. 다 잃었으면 자살하지 다 이루었다 하겠습니까?

정반대의 길, 하나님은 낮아지려고 애쓰고 인간은 높아지려고 애쓰고, 서로 버스 노선이 반대로 가요. 인간은 천국을 가려고 하니까 그 천국은 지옥이고,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지옥이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지옥은 천국이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세주는 마귀였고, 인간들이 악마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 구세주였어요. 사람들은 자기 소유를 가지고 자기 소유의 중심에서 선과 악을 규정하려고 하거든요.

자기소유, 나에게 소유가 증가하면 교회에 좀 나가주고, 내 소유를 깎아버리면 교회에 발 끊어버리고. 소유가 증가하면 잘 되는 예수 믿어주고, 안들어주면 믿는 예수 끊어버리고. 자기 중심. 근데 그 자기 중심안에 누가있습니까? 악마가 있습니다. 악마가 인간을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더 끌어 모아라”. 예를 들어서 떡을 먹고 배불러야지... 하는 것이 악마가 하는 말이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실현되느냐... 여기에 예수님이 관심이 있어요.

왜냐? 우리는 풀이니까. 꽃이 져야 풀이 나타나죠. 꽃이 피어있으면 풀이 자꾸 자기가 꽃인 줄 알잖아요. 꽃을 꺾어 버려야돼요.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우리 꽃을 꺾음으로 말미암아 풀이 착각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제발 착각 좀 그만하라. 풀이면서도 꽃인 체 착각하는 그 착각을 박살내는데는 말씀 만 한것이 없습니다. 말씀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부터 20장까지 그 많은 혜택 그 많은 기적 그 많은 축복 그런것들은 아무리 제자들이 3년동안 따라다녔지만, 나라는 것을 모르고(있었기에) 나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꽃들이었죠. 그런데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드디어 이 제자들 11명은 자기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대로 드러내죠. 그거는 뭐냐? 그것은 바로 [사랑] 문제입니다.

우리 000목사님 오셨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지금 우리가 강의하는 것이 요한복음 21장인데, 요한복음 1장부터 20장까지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 놓을 것은 다 내 놓은 거예요. 기적도 있었고, 오병이어도 있었고, 포도주가 물되는 것도 있었고,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도 나았고, 간음한 여자도 그 자리에서 용서받았고, 심지어 11장에 보면 죽었던 나사로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났잖아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은 아무리 듣고 배워도 인간은 달랑 끝에 남는 것은 [나]로 되돌아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나로 되돌아온다. 말씀을 바께쓰(물양동이)로 가져다 부어도, 기적을 폭설 내리 듯 머리 어깨에 퍼부어도 인간은 절대로 나를 포기할 자가 아니예요.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나를 포기할 인간은 없어요. 그게 요한복음 21장이예요.

그러면 그 전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전부다 위선입니다. 위선. 전부다 위선이예요. 요한복음 1장부터 20장까지의 모든 기적들은 위선에 위선을 더한 것입니다. 위장에 위장을 더한 거예요. 어떤 분이 이렇게 주장했어요. “나는 예수믿고 갈 수록 나의 죄를 더욱 더 깊이 아니까, 나는 갈수록 나의 죄가 얼마나 깊고 더 심각한가를 알기 때문에 나는 갈수록 더욱 거룩해지고 있다”. 맞는 말이예요 틀린 말이예요? 틀린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나라는 인간이 갈수록 죄를 아니까 갈수록 더 겸손해지니까 이것은 전에보다도 더 훌륭하게 참 거룩하고 겸손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사는 모습이니까 그만큼 거룩의 양과 질이 깊어지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가는게 아니냐. 다시말해서 자기 죄를 더 많이 아는 식으로 훌륭해 가는 사람. 이것이 자기 자신인 거예요.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가지고 두자로 뭐라고 하냐면, 그걸 [위선]이라고 합니다.

이 요한복음 21장에서 그 걸 위선이라고 합니다. 왜 그게 위선이냐하면 내가 더욱 더 겸손해지고 낮아진다는 자체는 나라는 것이 있는 이상은 이것이 나의 의, 자기 의로 누적이 되요. 축적이 된다고요. 축적이 되면 이 것 가지고 누구하고 비교하냐면 타인하고 비교하게 되요. 타인하고 비교하게 되고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게 되요. 과거보다 향상된 면을 모아 모아서 자기의 소유로서 축적 획득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소유가 되려면 소유를 담는 그릇이 있어야 되죠.

그러니까 이 그릇은... 스스로 깨겠습니까? 안 깨겠습니까? 절대로 안깨죠. 왜? 그동안 자기 죄를 안다는 겸손이 가득들어 있는데. 주님 앞에 (자신을) 부인했다는 겸손했다는 좋은 장점들이 가득들어 있는 그 그릇을 깨버리면 자기 장점이 없어지잖아요. 그러니까 그 그릇을 못 깨는 거예요. 그것이 요한복음1장에서 20장까지 계속되어 온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물양동이로 받듯이 엄청나게 받았는데, 그것은 지분이 있는 나를 좀 더 향상시켜 나가고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어떤 힘이 되리라 생각한 거예요. 세속적인 축복을 받겠다든지 행운을 따내겠다는 것이 아니지만, 그건 아니더라도 고상한 면에서 적어도 3년동안 배웠으니까 예수님의 수제자로 있었으니까 뭔가 세상사람들하고 내가 그 만큼 월등하게 나아진 상태로서 달라져있을 것이라고 여긴 그것. 그것이 뭐냐? 뭔가 소유한 걸로 내 가치를 채우겠다는 겁니다. 그 소유가 나의 가치가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위선과 허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고 보니까 비로서 (제자들에게)발각이 된 겁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주님께서 하시는가? 꽃이 활짝 필 때 풀이 착각을 해요. 꽃이 활짝 필때 풀이 이제야 나의 진짜 진가가 나타나는구나. 아닙니다. 꽃을, 핀 꽃을 지게하므로 말미암아 풀의 가치가 나타나요. 풀은 (꽃이)져야 맛이예요. 꽃이 져야 맛입니다. 왜? 도대체 어느 놈이 이 내 꽃을 지게 해,라고 어느 놈이 감히 나의 화려했던 그 꽃을 지게해,하며 살펴보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가, “말씀이 그런다. 왜? 너는 져야하고 말씀은 영원하다. 왜? 꼽나? 왜 니가 지금 분통을 터뜨려 지금 나한테? 그것이 왜 불만이야? 그 꽃이 아름다울 때는 네가 신났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할 때는 신났지. 그런데 거두어 갈 때에는 왜 네가 화를 내는데. 욥의 부인의 (욥에게) 아주 (스스로) 저주하라고 했으니까, 에라이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으니까, 그런식의 하나님은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

(꽃이) 질 때 그게 나의 진가죠. “그래 내가 이렇게 겸손하니까 복 주지” “이렇게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 안 해줄 리가 있겠어? 하나님이 양심이 있으면” 이렇게 했는데, 그것을 지게 할 때, 갑자기 화가 납니다. 억울한 거예요.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속였는데, 자기를 위장했는데, 그 위장술을 모르고, 엉뚱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착각해 놓고, 나를 위대한 인간 만들겠다고 지 혼자 지레짐작 김치국부터 마셔놓고, 나를 완전히 쳐박아 놓으니까 그 때 갑자기 숨어있던 분노같은게 폭발하면서 “왜 나를 이지경으로 만듭니까!” 라고 반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그랬어야만 됩니다. 왜 그러냐하면 말씀이라는 것이 오게되면 피었던 꽃도 져야합니다. 왜 말씀이 그래야 하냐면 말씀의 완성이 뭐냐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갖고 있지만, 빌립보서 2장에 보면 그걸 자진해서 포기를 하시고 종의 형체를 지녀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했거든요. 그런데 십자가에 죽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을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말씀 다 이루심과 평소에 제자들이 성경말씀 다 끌어모으고 기도 다 해가지고 지금보다 나은 나가 점점 더 향상되는 거. 물론 돈 버는 향상도 있겠지만 윤리적 도덕적으로 자기가 옛날에는 개차반이었는데 이제는 인간되었다. 그러한 괜찮은 속성, 성품. 그것 가지고 뭔가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증거, 증명하고픈 증거물로 삼는 이 모습과 그 걸 두자로 뭐라고 했죠? 소유. 나의 그릇을 깨지 싫다는 거예요. 내 그릇을 몽땅 천국에 넣기 위한 괜찮을 것을 소유해서 천국가기위한 이 모든 심보를 비롯해서 계략 계획같은 것이 소유가 상실로 변하니까 거기서 숨어있던 분노가 주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폭발됩니다.

결국 인간은 예수님한테 말씀을 3년동안 따라다녀도 그것은 옷만 갈아입었다 뿐이지 자기의 내부는 하나님이라도 내 내부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말라는 식이 되었단 말이죠. 쉽게말해서 우리가 성경공부 몇 년 했지만 공부하다가 우리 다음 달부터 못합니다 하면, 못하면 못하지 뭐,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요. 나에게로. 내가 어떻게 깨어지느냐 주님처럼 어떻게 상실되느냐 이게 아니라 역시 그래도 남는 것은 뭡니까? 결국은 나는 남잖아요. 그러면 나만 남으면 됐지 뭐. 뭐 걱정이야. 이게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든 말든 간에. 그거는 한 때 좋았던 추억이었지요. 앨범속에 있는 퇴색된 옛날 지나간 학생때 찍었던 사진. 그 때 참 예뻤다. 그 때 성경 좋았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좋았는데. 야 물이 포도주로 변할 때 그 때 좋았지. 나사로가 나흘만에 살아날 때 멋있었다니까. 옛날 추억이야기하지 자기 진짜 본질은 자기가 손도 안대는 거예요. 괜찮은 예수님의 추억담만 걸치면 그것이 말씀의 성취입니까? 그게? 말씀의 성취가 아니예요. 그거는. 말씀을 이용한 거죠. 말씀을 즐긴거죠. 하나의 오락이었죠. 하나의 ?, 교회라는 통해서 재미나게 논거죠. 그냥. 목사님 좋지, 장로님 좋지, 자기 별로 돈 안내도 잘해주니까. 위로해주지, 기도해주지, 좋았다니까. 하나의 유흥, 즐기는 거예요. 오락이었습니다.

이미아(IP:115.♡.210.107)

09-05-13 13:08

눈에 보이는 예수, 손에 잡히는 예수, 귀에 들려져 쌓여진 예수를 소유하려고 하는 나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손에 잡히지 않는 예수, 귀에만 들려 쌓여진 예수를 상실시켜 버리는 십자가
.....십자가의 죽음은 소유가 아니라 상실이다.
풀이었는데 인생의 어느 한 대목에서 잘나가던 시절에 피었던 꽃으로 자기의 원래 자리를 잊어버리고 그 꽃이 영원히 지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속에 살다가 어느 순간에 져버리는 꽃을 감당하지 못하여서 원래 자기 자리로 되돌아 와야만 하는, 풀이 되버리는 상실감을 맛볼 때 분노와 억울함에 밤 잠 못이루며 시름시름 앓아 누워도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남아 있다.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한 꽃은 종교의 꽃이었다.
종교의 꽃은 나였고 그 종교는 하나님이었다.
곧 나는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진면목을 알게 하신 분은 이 꽃을 지게하시는 예수님이셨다.
아이러니다....인생의 잘나가던 시절-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기에-을 시궁창속에 꼴아박는 것으로...추하기 추한 모습으로..나라는 모든 소유를 깨는 것으로...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유혹적인 향기를 풍기는 장미꽃 한 다발이 외부적인 어떤 힘에 의해서 시들면 볼품없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것처럼... 이것을 왜 인생의 진면목이라 하십니까???
아!!!!!!!말씀 때문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5-8)

요한복음 21장 마지막 장...상실장이라.....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훌쩍 떠나버리시고 남겨진 자기들에게는 소유가 아닌 상실감으로 말미암은 분노와 억울함이었고....아무것도 소유한 것 없이 자기만 남게된...
예수님과 함께 한 그 모든 것들은 추억의 한 책장을 넘기다 발견된 책갈피 속에 꽂아둔 낙엽 한 장처럼...예수님은 추억속에서만 활동하시고 그 안에만 머물 뿐이시고...그동안 업(Up)된 자기에게서 다시 다운(Down)된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제자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21:3)

조현창 성도님.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FIGH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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