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9: 1- 7 (다윗을 죽여라)
삼상 19: 1- 7 (다윗을 죽여라)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사무엘상 19장 1- 7절
제목 : 다윗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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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5-10 15:42
2009년 5월 10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19:1-7
(삼상 19:1, 개역)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삼상 19:2, 개역)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삼상 19:3, 개역)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삼상 19:4, 개역)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삼상 19:5, 개역)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삼상 19:6, 개역)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삼상 19:7, 개역)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하늘의 태양이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죽일 대상으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참 하나님과 통하는 통로가 오직 하나입니다. 즉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가 되는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이 ‘하나’를 부각하는 상황이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여라고 하는데 그 아들되는 요나단은 어떻게 하든지 다윗을 지켜주려고 애쓰게 됩니다. 즉 다윗을 죽이라고 하는 아버지의 진정한 뜻이 어떠한 지를 수시로 다윗에게 알려주어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는 길을 챙기도록 해줍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은 사울과 다윗 사이에는 세상을 보는 서로 다른 기준을 둘 다 보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과 세상, 양쪽 다를 보고 있는 우리는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할 정도로 세상 권력으로부터 밉상 받는 자를 지켜주려는 위험을 우리가 감수 할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흔히 오늘날 십자가가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곧 ‘재판’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곧 인간들이 하나님을 피고로 세워놓고 재판벌리고 선고해버린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재판 사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재판 과정을 보여진 거꾸로 된 가치관을 죄악된 것으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바가 되는 겁니다.
즉 재판 과정은 서로의 다른 가치관이 만나서 대립이 되고 충돌이 되는데 그 각각의 기준이 왜 화합될 수 없는지 그 이유까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기준을 고수한다는 것은 곧 누구를 제거해야만 하는 바탕을 마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 기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 기준에 의해서 그 누구가 마땅히 미움받고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세워놓고 재판하는 와중에서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만약에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내 기준과 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 자는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제거하고 싶은 자가 말하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면 그 주장으로 인하여 더욱더 그 사람을 죽는 자리까지 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재판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믿음이 있느냐’는 겁니다. 즉 없는 믿음이 새로 생겨나야 그래야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지금 죄 안에 갇혀 있으니 죄의 권세를 스스로 떨쳐버리고 나설 위인은 없는 겁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죽음에까지 밀릴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서 가까이했던 추종 세력도 다 흩어지고 맙니다. 남는 것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됨으로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스스로 예언하신대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것이 성취된 겁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께서 메시야인줄을 알아먹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없는 믿음을 새로이 만들어서 자기 사람들 속에 넣어줄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없음’의 의미를 ‘아예 없음’으로 생각하지 말고, 분명히 나타났으나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한 그런 의미에서 ‘없음’을 생각해 봐야합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건물에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공간이 엄연히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베이트가 다니는 통로입니다. 이 어두운 통로는 지하실에서 맨 꼭대기층까지 하나로 통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검고 어두운 공간은 엘리베이트 문 뒤편에 있기에 사람들은 그 존재를 잊고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엘리베이트라는 빈 공간의 덕택으로 우리는 아래층에서 맨 윗층까지 편안하게 안내받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받혀주는 인물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다고 거부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없음’으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의 모습을 자신네들의 기준에 준해서 따로 정립해 놓으므로서 없음이 없고, 모두 있음으로 전환되어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소위 신을 부르는 그 세계 안에서도 오로지 인간의 기준만 진리로 남게 됩니다. 즉 십자가라는 재판에서 감히 죄인들이 자신을 최후 심판할 수밖에 없는 심판주를 피고로 세워놓고 사형 판결을 내렸던 그 기준이 여전히 이 세상에 통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신의 기준이라고 통용하는 그 기준이 곧 하나님을 죽인 기준이기에 악마의 기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즉 사람들은 악마를 신인줄 알고 열심히 신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행위를 하면 할수록 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은 마치 ‘없는 존재’가 분류되어 핍박과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악마같은 신을 더 선호하느냐 하면, 자신의 기존 기준을 옹호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준은 바로 이 사울왕이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악마가 인간들에게 늘 희망을 주면서 보장해주겠노라고 하는 내용은 바로 최고의 자리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고 네가 간수하고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본성은 인간이 악마로부터 배운 것이요 사울이 그것을 잘도 써먹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요나단은 사울왕이 자기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다윗편을 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곧 아버지의 기준보다 다윗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임을 인정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요나단의 자신의 기준을 포기한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날 십자가를 영접한 자들은 곧 그 재판의 잘못된 점까지 인정하는 자이기에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기준마저 죄악된 것으로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 기준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의 본성마저 죄인임을 고백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있기에 자신의 영역마저 자진 포기할 줄 아는 그 요나단이야말로 진정 다윗관계가 정상적으로 이어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억울한 다윗의 자리가 곧 예수님이 출현하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십자가 사건으로 지금도 출몰하는 주님을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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