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1b 울산강의-창세기50장
20090501b 울산강의-창세기50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501b 울산강의-창세기50장
(강의:이근호 목사)
둘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상당히 복잡했는데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이란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애굽 사람들은 사람 죽었으니까 자기 존재에서 야곱이 빠져나가니까 그게 애달파서 울었어요. 하지만 야곱은 죽은 것이 본격적으로 야곱이 남긴 예언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세계가 죽은 세상이고, 죽어 간 세상이 진짜 산 세계에요. 그걸 보여준 겁니다. 앞으로 창세기 마지막은 결국 야곱의 끝이 아니에요.
야곱은 죽었지만 야곱은 어디로 가느냐? 여기 5절에 나오지요. 아버지가 예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야곱은 무덤에 치중해요. 무덤이 있는 곳, 무덤이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한 화산이죠. 화산의 공백. 무덤이라는 것은 산 자가 사라진 곳 아닙니까. 산 자가 사라진 그 무덤에서 시작된 그 일이 너희들로 하여금 결국은 애굽에서 나오게 할 것이다. 뒤에 나온 것이 뭡니까? ‘출’애굽 아닙니까.
그 거대한 많은 후손들이 누구한테 결국 매여 있어요? 죽은 귀신한테, 죽은 귀신하면 안 되지만 죽은 야곱한테 종속된 운명이에요. 그 언약대로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어지는 운명이 되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제부터 상세하게 해보겠습니다.
창세기 49장 8절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에게 내린 예언이잖아요. 그러면 유다의 위치가 다른 모든 형제 위치보다 동등하단 말입니까, 위에 있단 말입니까? 위에 있지요. 찬송을 받아야 되니까. 그러니까 찬송 받아야 될 하나님께서 유다를 통해서 찬송을 받으시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형제들은 유다의 운명에 예속되지 아니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찬송드릴 통로가 없게 되죠.
‘찬송’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찬양이라 하는 것은 사건이 나왔던 구멍을 말하죠. 원천을 말합니다.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 사실은 찬양 올리게끔 사건들을 유발시킨 겁니다. 사건이 없는데 찬양될 일이 없지요. 찬송가 부른다고 찬양이 아닙니다. 사건이 터져야 돼요. 어느 정도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사건이 될 때 그게 비록 유행가 가사를 바꾸더라도 찬양이 되는 겁니다. 일어나서 주를 바라본다?
그게 가락이 문제가 아니고 가사가 문제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이 노래를 바칠 분이 있다는 것, 그거는 존재한테 하는 게 아닙니다. 사건을 유발시킨 사건의 당사자에게 이런 사건을 받은 내가 사건 주신 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몽땅 다 바칠 수 있는. 그렇게 보니까 그 노래도 찬송가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멋진 찬송. 찬송가 406장으로 넣으면 사람들 잘 부를 거예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내 존재로 인하여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건으로 인하여 내가 있었기에 마땅히 영광 받고 찬송 부를 것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라는 겁니다. 그 통로가 유다에게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는 먼 미래의 일입니다. 이 분화구, 공백이라는 화산 분화구 이 밑바닥에 먼먼 장래에서 일어날 일이거든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올 때는 아직까지 유다가 빛을 못 볼 때입니다.
언제 유다가 빛을 볼 때냐 하면 레위 지파가 붕괴될 때 레위 지파가 하나님 앞에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빛을 잃을 때 그걸 뚫고 다윗을 통해서 등장하면서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중심으로 등장하거든요. 그래서 영생 얻을 자와 영생 못 얻을 자가 구분되듯이. 이런 사건들이 분화구 속에 꽉 들어있는 겁니다. 그것을 조금씩 떼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알았어요. 좀더 신앙생활하다 보니까 자꾸 사건이 터지네요. 깁스한 사람 집어넣어야지. 자꾸 뭔가 사건이 터지고, 수술 같은 사건이 터지는데 그러한 사건을 통해서 내가 나를 부지할 수 없다는 것,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내가 조종 받고 있다는 사실을 차츰 느껴지는 것이 사건이 조금씩, 조금씩 뭔가 뿜어져 나와요. 인도받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건을 받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가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나가요. 나에 대한 가치가 떨어져나가면 내 영광, 내 찬양이 없어지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입니다’는 것이 계속해서 농도가 짙어지는 겁니다. 그전까지는 먼 미래의 이야기란 말이죠.
그렇다면 창세기 49장 8절과 그 다음 봅시다. 창세기 27장 29절. “만민이 너를 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거는 누가 누구한테 주는 축복이죠?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내리는 축복이죠.
그렇게 되면 여기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말하기를 에서도 있는데.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죠. 복종하죠. 이게 창세기 27장 29절. 그러면 아까 창세기 49장 8절 같은 경우에 이 원칙이 어디에 흘러들어갑니까? 유다한테 흘러들어가죠. 신약에 오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에게 흘러들어가죠.
이렇게 되고 보면 미래에서, 종말인데, 마지막 끝에 서서 이 앞에 있는 것들은 끝에 뭔가 집합하는 자꾸 이걸 향하여 돌진하는 한 곳으로 예수님 쪽으로 모아지면서 가면 갈수록 점점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지요. 구원받는 이유, 구원받는 근원되시는 분 점점 그 윤곽이 뚜렷해지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 자손입니까? 물론 야곱의 자손 맞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유다 자손이죠. 유다의 뿌리에서 우리의 구세주가 나잖아요. 물론 유다는 야곱의 아들이죠. 하지만 야곱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유다 아들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점점 윤곽이 구체화되는 겁니다.
구체화된다는 말은 전에는 희미했다는 말입니다.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영생 줄 자와 영생 받지 못할 자를 구분해진다는 말은 곧 뭐냐? 이 사람들의 핍박도 더욱 더 강렬해지고 미움도 강렬해진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야곱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야기가 에서한테 받는 고난보다도 야곱의 이런 예언이 어디에 해당됩니까? 바로 요셉에게 주어지지요. 꿈에 보면 요셉 형제들이 절하잖아요. 그러니까 요셉이 이런 일을 당한다는 말은 누가 미워한다? 바로 요셉에게 미움을 할 자도 점점 윤곽이 뚜렷해지지요.
그러면 유다가 이런 찬송을 받기 위해서는 유다가 어떤 수모를 당해야 됩니까? 유다 외에 다른 지파로부터 배신당하고 배반 받아야 될 그런 입장에 있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마지막에 우리를 구원할 자라면 결국 예수님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배신 받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우리에게 없지요, 아예.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받을 길 없고, 구원받을 이름은 우리가 배척해버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지요.
그러면 우리가 버린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는다면 그럼 우리 속에 뭐가 포함됩니까? 내가 포함되죠. 나로 인하여 버림받은 분이 나를 위해서 구원해주니까 나는 내 구원에서 나한테 보탬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나의 헌금, 나의 기도 어떤 것도 내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되지요. 오직 우리는 나의 헌금, 기도 이런 걸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로 인하여 버림받으면 그분이 찾아오심으로써 우리가 공짜로 구원받게 됩니다.
그러면 아까 창세기 49장 8절이 이뤄지죠. 모든 찬송은 누굽니까? 유다가 받지만 사실 내막을 들춰보니까 유다가 받는 게 아니고 유다의 자손, 다윗의 자손 되시는 분이 홀로 찬송을 받지요. 지금 창세기 49장 8절에서 보면, 유다 지파가 찬송 받게 돼있지만 그건 아직 마지막 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건 약간 희미하게 포괄적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유다 전체가 찬송 받는 게 아니고 유다 자손, 다윗의 자손 되시는 한 분이 찬송 받지요.
모든 것이 찬송이 한 분에게 쏠린다는 말은 구원받는 사람은 그 한 분의 혜택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다 그분의 혜택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이, 천국에는 뭐가 없다? ‘개성’이 없습니다. 역시 지옥에도 개성이 없어요. 천국에는 자기 주특기 필요 없다.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고.
그래서 개성을 밝힌 사람이 누구냐? 사두개인들이죠. ‘어이, 예수여. 당신이 부활이 있다며? 있으면 한 여자를 일곱 남자가 서로 내 마누라다 할 때 어떻게 될 거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천국에는 개성이 없거든. 네가 성경도 오해하고 말씀도, 능력도 오해했구나.’ 천국에는 나라는 게 없어요. 내 마누라 없습니다.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고 오직 산다는 것은 내가 저 여자 만나서 사는 게 아니고 예수님 덕분에 사는 것이지,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해서 사는 게 아니란 말이죠. 이 땅에서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해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찬양받으실 예수님을 죽이는 배척하는 하나의 원인으로써 계속 원인제공자가 되는 겁니다. 내 힘으로 산다는 것.
그래서 야곱은 훌쩍 어디로 가는가? 무덤 속으로 풍덩 뛰어들지요. 분화구 속으로. 풍덩 뛰어들면서 뭐라고 합니까? ‘나를 따르라’ 이런다 말이죠. 결국 창세기 49장에 있는 모든 예언들은 야곱이 갔던 막벨라 굴에 전부다 관심이 쏠려야 돼요. 창세기 49장에 보면 열두 지파에게 축복을 내리죠. 그것은 전부다 야곱이 풍덩하고 빠졌던 분화구, 죽음이라는 막벨라 무덤 속에 같이 풍덩, 풍덩 개구리 빠지듯이 쏠려야 돼요. 그게 바로 홍해 사건입니다.
홍해 안 건너고 약속의 땅에 간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지요. 여기 홍해 안 건너고 먼 길로 돌아가서 광야 들어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유월절 날 피 안 바르고 살아난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피 발랐다면 자기 공로는 소용없지요. 그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는 개성이 필요치 않지요. 전부다 우리는 동일한 분의 혜택을 입은 거예요. 그리고 그분 때문에 뭘 경험했는가? 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숨이 끊어지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나의 가치와 나의 영광은 조금도 천국에서 고려의 대상이 안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앞당겨 알게 된 겁니다. ‘내가 한 평생 수고하고 자식 기르고 했습니다.’ 그것 소용없습니다. ‘나는 내 마누라만 알고 잘 살았습니다.’ 그것 소용없습니다. ‘내 마누라가 셋인데.’ 셋이 되고 넷이 되고 다섯, 일곱 명 되도 그것도 의미 없어요. ‘제가 교도소 일곱 번 갔다 왔는데.’ 일곱 번 갔든 여덟 번 갔든 안 갔든 관계없어요.
찬양받으실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찬양받아야 되고. 왜? 그분만이 비로소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으로써 초대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뭐냐? 예수님의 죽음에로 초대를 받고, 저쪽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그냥 무작정 살려고만 존재를 유지하려고만 애쓰면서 살아가는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 50장 보게 되면, 다시 봅시다. 5절에.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요셉이 국장을 치러요. 온 가족과 함께. 10절에 보면, 칠 일 동안 크게 울면서.
13절에 보면, “마므레 앞 막벨라 밭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이것이 얼마나 희한한 일인지 봅시다. 여기 구덩이가 꺼지고 평지가 된다면 이게 막벨라 굴입니다. 지금 야곱이 죽어서 여기에 빠졌어요. 야곱이 죽어서 막벨라 굴에 갔거든요. 갈 때 막벨라 굴에 누가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까? 뭔가 선배들이 와있죠. 아브라함 있고, 이삭도 여기 있단 말이죠. 야곱이 여기에 묻어 달라.
왜 애굽은 안 됩니까? 왜 애굽이 영원히 매장지가 안 되느냐 하면, 야곱이 죽는 그 자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질 국가와 민족이 어디가 자기 땅이 되느냐, 그 땅 지점을 알려주는 그 자리가 야곱은 죽음으로써 지시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죽는 자리가 장차 후손들의 영원한 땅이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돌아가셨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어디에 묻혔습니까? 어느 빈 무덤에 묻혔지요. 그런데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삼일 만에 부활하셨잖아요. 부활할 때 그 빈 무덤이 열렸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 땅에서 죽음의 자리까지 몽땅 하늘에 둥둥 떠서 어디로 갔습니까? 구름타고 승천하셨지요. 승천한 자리가 주의 오른쪽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막벨라 굴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오른편에 있는 거예요. 주의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럼 성도는 어디에 합류됩니까? 주의 자리에 합류되기 위해서 주의 자리에서 재림하게 되면, 재림한 그 코스대로 우리가 갈 자리가 주와 함께 합류되어서 오른쪽으로 가야 되는 거예요. 장난 같지요.
무덤이 떠서 공중으로 날아간 것 봤습니까? 예수님이 처음이에요.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이 함께 떠서 이 막벨라 굴을 이쪽으로 이동시키면 영원한 안식처, 안식의 나라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으면서 하늘에 있는 안식을 새 땅이라고 한다면, 지상에 있는 땅은 뭐냐? 불바다 되지요. 완전히 불에 다 녹아 없어지는 겁니다. 영화 [노잉]처럼. 태양의 복사열 때문에 다 타버린다는 그런 가설을 내세웠는데.
그런 것 보면 웃겨요. [노잉]이란 영화에 보면 어린애가 숫자를 막 써요. 5, 4, 3, 2, 1 쓴다고요. 그래서 물리학자가 숫자풀이해서 어떤 사건이 풀리는데. 이게 성경에는 숫자 안 써도 됩니다. 숫자 아니라도 그냥 나는 길이요, 진리요 해도 이게 비밀이에요. 들을 귀 있는 자만 듣지 못 알아들어요.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 이걸 누가 알아듣습니까? 숫자까지 안 써도 돼요. 그냥 평범한 말 써도 돼요. 보통 인간들이 쓰는 단어, 그 단어 안에 아무리 풀어도 안 풀리는 비밀이 거기 다 담겨있습니다. 그냥 담겨있는 게 아닙니다. 보통 세상 단어는 단어 하나에 의미 하나 있잖아요. 그런데 성령 단어는 단어 하나에 신구약 다 포함돼있어요. 골치 아픕니다. 쭉 당기만 신구약이 다 달려와요. 관계없다고 여기는 것 다 달려와요.
이번에 여름수련회에 다니엘과 스가랴 하는데 묵시문학을 왜 하느냐 하면, 묵시문학 단어가 보통 인간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아니라 묵시적인, 역사를 초월한 사건이 담겨있는 것처럼 그게 그대로 예수님한테 공생애에 넘어오면 예수님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전부다 묵시언어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니엘, 스가랴가 있는 겁니다. 그걸 이번에 여름수련회에 하려고 해요. 벌써 방 얻어놨다고요. 이번에 한 오천 원 인상될 겁니다. 음식값이 너무 높아서.
막벨라 굴은 뭐냐? 막벨라 굴은 뭔가 지시하는데 뭐냐 하면, 막벨라 굴이 있는 자리가 사실은 우리가 거할 안식처가 된다. 따라서 ‘나를 그곳에 묻어줘’ 이 말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그곳으로 인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일단 내가 먼저 가 있을게. 그 뒤에 너희들 따라오게 돼있어.’ 왜? 죽은 공백에서 사건의 혜택을 입는 거예요.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는 원리에요. 그러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죠. 보이지 않는 이미 죽어버린 자가, 죽어버린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듯이.
그런데 신명기에 보면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이러한 안식 여기에 누가 임하느냐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정도가 아닙니다. 여호와 이름이 임해요. 그러니까 만약에 울산 다대포 앞 바다에 모년 모월 모시에 거기에 나가 있어라. 하늘에서 비행접시가 올 거다. 이것하고 똑같은 겁니다. 어떤 자리에 같이 만나는 거예요. 그 만남의 장소가 이것을 죽음으로 표현했다고.
야곱이 어느 나무 붙들고 있을게. 이게 아니라 막벨라 굴에 가면 이미 나보다 먼저 하나님의 이런 계시를 받았던 우리의 선배들, 할아버지 아브라함, 이삭도 같이 묻혀있는 그곳에 바로 여호와 이름이 여기에 동참하니까 결국은 하나님은 산 자로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으로 동참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과거로 돌아가면 지금 이미 우리를 여기에 죽은 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매일같이 십자가 죽음에 동참케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은 죽었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왜 자꾸 하십니까? 듣기 싫은데. 살려고 하는데. 우리가 죽었다고 이야기해야 내가 내 소유가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주님의 소유가 되려면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해야 돼요. 그렇지 않아도 맨 날 내가 살아있는데. 나는 죽었다고 이야기해줘야 ‘나는 죽었습니다’ 할 때마다 내 손, 발 전부를 누구한테 인계합니까? 내가 아닌 우리 하나님한테 인수인계하는 그 순간이 되는 겁니다.
인계해봐야 돌아서면 다시 뺏어오지만. ‘하나님 그리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우리 애 이번에 일등 해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우리가 간섭하고 하지만 어쨌든 자꾸 넘겨 오는 거예요. 그래야 나는 주와 함께 죽어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게 느껴지는 겁니다. 이게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사는 거예요.
막벨라 굴이라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보면 여기 13절에.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이 아비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군과 함께 애곱으로 돌아왔더라”
이제부터 문제가 뭐냐 하면,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남은 것은 아버지의 예언만 남아있어요. 그런데 예언은 바로 죽은 자 터져 나온 거죠. 죽었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에요. 본격적으로 죽은 자에 의해서 삶을 살게 되는. 산다는 말은 애굽에서 산다는 말이 아니고 애굽에서 빠져나온다. 빠져나올 때는 반드시 그냥 산 채로 못 빠져나오고 뭘 거칩니까? 죽음에서 빠져나오는데 언약이 주는, 언약으로 코팅된, 언약으로 파카를 뒤집어쓴 채 통과하지 않으면 죽음을 통과할 수 없어요.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이른 것처럼 너희들도 십자가에 죽어서 통과한다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 이거는 다같이 읽어봅시다. 합창합시다. 시작.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보세요. ‘주와 함께 죽었으면 비로소 삽니다.’ 이래 돼요. 주와 함께 죽으심이 없으면 사는 것도 없습니다. 얹혀서 살아야지요. 혼자서 못 산다 말입니다. 주님이란 쟁반에 얹힌 돼지 대가리가 돼야 돼요.
주님이 얹혀줘야 갈 수 있지 나 혼자 가려면 못 가는 겁니다. 항상 우리 가는 길은 주님과 함께 죽으신 그 자리가 우리가 지금 사는 길로 제대로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주와 함께 살지요. 낙하산 피지도 못하는 인간이 그냥 뛰어내리면 죽어버리죠. 그런데 낙하산 늘 뛰어내리던 전문가가 껴안고 같이 뛰어내리면 그게 사는 길입니다. 그게 탈출이겠죠.
그러니까 어쨌든 간에 구원의 기준은 뭐냐? ‘탈출’입니다. 탈출하라 이 말입니다. 어떻게 탈출해요? 이게 박찬욱 감독의 고민이었어요. [박쥐]란 영화가 뱀파이어, 흡혈귀인데 흡혈귀가 설쳐대서 성당의 신부도 속수무책이에요. 어떤 신부는 장님이 돼서 있는데 흡혈귀 된 후배 신부가 말하기를 제가 피 빨아먹는 귀신이거든요. ‘귀신이라도 좋다. 내가 눈 한번 떴으면 좋겠다. 제발 나도 흡혈귀 돼서 내가 눈 떠 보는 게 소원이다’ 하는데
그러니 이거는 하나님 뜻이고 뭐고 개인적인 욕망만 가득 차있는 교회가 흡혈귀가 날뛰는 세상에 무슨 힘이 되느냐 이 말이죠. 아무런 힘이 안 된다는 그게 영화의 주제입니다. 종교라는 것, 구원이라는 것, 교회라는 것 이게 오늘날 사람들에게 전혀 구원을 못 주고 있다는 그게 박찬욱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구원을 왜 받으라고 하는데? 스스로 만든 종말론은 가짜입니다.
그래서 영화의 뱀파이어 된 신부가 하는 말이 ‘우리 이렇게 하면 지옥 가는데’ 하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저는 종교가 없기 때문에 지옥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쫓기죠. 종교도 없는데 어디에 쫓깁니까? 죽음에 쫓기죠. 이게 모순 아닙니까. 종교는 없는데 맨 날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자기 속에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공포한테 쫓기는 거예요. 원치 않는 나의 욕망에 쫓기는 겁니다.
종교는 없어요. 교회도 다녀보고 성당도 다녔는데 없어요. 그 여자 주인공은. 하지만 자꾸만 쫓기는 겁니다. 짜증이 날 정도로. 왜 물가가 높은 거야. 왜 경제가 안 풀리는 거야. 왜 노무현은 받아 처먹은 거야. 종교는 없어요. 교회도 안 다녀요. 그냥 놀러 다녀요. 그렇지만 짜증이 나는 거예요. 내 몸은 왜 아픈 거야.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몰라. 누구 아는 사람 없어? 짜증나는 거예요.
바로 이러한 모든 것이 외부의 언약이 없으니까 야곱이 있고, 아브라함이 있으니까 그 내부에 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영생 얻은 자는 결코 있을 곳이 못된다. 거기서 탈출해야 되는데 너희들 힘으로 도저히 안 된다는 거. 왜? 산 자는 산 채로 못 빠져나온다는 거예요. 그리고 죽어도 못 빠져 나와요. 살아도 못 빠져나오고 죽어도 못 빠져나오고 그 속에 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다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뭐냐? 이미 죽은 자의 받은 예언이 너를 인도하면 너는 거기서 탈출 가능하다. 단 조건이 있다. 이미 인도했던 너를 예언했던 그 자의 운명과 같은 운명 조건 하에서만 네가 빠져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야곱이어야 되고, 이스라엘 전체가 이삭이어야 되고, 이스라엘 전체가 아브라함이어야 할 경우에만 그들은 언약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언젠가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죠. 방주를 하나 그려놨습니다. 방주에 문이 있다. 그러면 노아 식구가 올라갑니다. 올라갈 때 기분이 어떻겠느냐? 다 이런 것을 포기하고 올라간 거예요. 방주 안의 세계가 내가 살아온 세계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 때만 들어가요. 그럼 사람들이 왜 안 들어가느냐? 방주 안의 세계가 지금 내가 사는 세계보다 못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일구어 온 세계가 귀하기 때문에 방주에 안 들어가잖아요.
그럼 일구어 온 세계를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종말이니까 종말에서 노아를 다시 해석하는 거예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절에 가고 교회 가고. 이 세계는 방주 바깥의 세계입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부단히 움직이는 세계죠. 여기는 빠져나오는 힘이 없어요. 그냥 여기서 주저앉는 힘밖에 없어요. 자체적으로 퍼지게 만드는. 빠져나온다는 의식은 없어요. 못 빠져나오죠.
그런데 방주가 오게 되고 하나님이 동행하니까 전체 먹고 마시는 이 세계가 물에 덮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도 그러하다 하는데 인자가 오게 되면 전 세계가 불에 덮이죠. 불에 덮이는 세계를 미리 알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미리 알기 때문에 그 언약사건, 죽은 자가 한 소리, 예수님 죽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 한 소리 한 것, ‘인자가 올 때에 불바다 된다.’ 그 한 소리 듣고 난 뒤에 그 한 소리가 지금 나의 사건으로 내 머리카락을 지나가면서 덮어버릴 때 나는 그것을 구원의 기준점으로 잡고 거기에 준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언약의 인도함을 받아서 방주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모든 성경 원리가 그래요.
사람이 말씀을 멀리 해버리면 이 세계가 좋아요.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말씀이란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가까이해 버리면 이 세계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 목사들은 말씀을 가지고 오히려 반대로 이 세상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말씀대로 하시면 교회 부흥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여러분 출세합니다. 자꾸 퍼지는 이야기를 한다고.
오늘 아침에 제가 산책을 하는데 아주머니들이 새벽기도하고 성경을 들고 산으로 운동하러 많이 와요. 그들이 동행하며 이야기하죠. 저도 예수님처럼 동행하면서 가는데. 주로 하는 이야기가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 사업이 안 되서 이럴 때 우리가 중보기도해야 된다고.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은 뭐냐? 사업이 안 되는 걸 통해서 빠져나갈 세상이 따로 있다는 이걸 위해서 기도해야 될 건데, 사업이 안 되니까 기도하니까 사업 잘 된다는 거예요. 구원의 기준이 달라요. 그 교회는. 완전히 절이에요.
그래서 제가 거기서 한 마디 이야기하려다 바빠서. 괜히 했다가 누구십니까 나오면 골치 아파서. 산책하는 길에 수요일 되면 달걀 주고 차 끊어주면서 전도지 주는 교회가 있어요. 우리교회 바로 밑에 교회. 보게 되면 행복한 아버지 되는 법, 행복한 가정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 십계명, 이런 게 적혀있단 말이죠. 목적이 이끄는 삶, 이런 것. 목사들이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눌러앉을 생각을 하면서 교인들 가르치는 거예요.
교인들 으레 교회 오면 한 마디로 한을 풀러 와요. 한은 우리 주님이 맺혀 있어요. 지가 무슨 주체에 한이 있습니까. 주님 덕분에 평생을 살아놓고. 한 맺힐 잽이 안 됩니다. 뭐 했다고 한 맺어요. 남한테 맨 날 나쁜 짓 해놓고 무슨 한이 맺힙니까. 나쁜 짓 못해서 한이 맺히지. 진짜 한 맺힌 사람은 우리 주님밖에 없어요. 진짜를 이야기해도 거짓말로 알아들으니 얼마나 한 맺히겠습니까? 진짜 한 맺힌 사람은 복음 전하는 사람밖에 없어요. 세 시간 동안 강의해도 알아주지도 않으니 얼마나 한이 맺히겠어요.
그 정도로 이 세상이 말씀을 봐도 천 독, 만 독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더 키워야지. 이 말씀 있으니까 하나님 복 주셔서 더 퍼지게 하시지. 퍼져보세요. 뱃살, 다이어트 하려면 애 먹습니다.
이 창세기 쭉 보면서 주께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영생 얻기로 작정한 특수한 집단은 어떻게 형성되며 그들은 나중에 누구 덕분에 애곱에서 못 빠져나올 세상에서 빠져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대목을 말씀드리고 창세기 마치겠습니다. 방금 제가 뭘 했습니까? 못 빠져나올 세상이라 했지요. 그 이유가 어디 나와 있느냐 하면, 바로 여기 나옵니다. 창세기 50장 15절, 왜 못 빠져나오는가 보세요.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아비는 없다 이거거든요. 지금 사건은 사라졌으니까 존재만 남았지요. 존재는 요셉이 있고 가해자인 자기들 존재가 남아있지요.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이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그러니까 이 형제들의 썩어빠진 사고방식이 뭐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버지는 젖혀놓자 이 말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죽은 분이기 때문에 더 이상 힘 못 쓴다는 거예요. 남아있는 사람 누구한테 잘 보이면 돼요? 동생한데만 잘 보이면 우리는 살아남는다 이거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못 빠져나오는 겁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 살 궁리만 챙겨요.
그때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 뭐 했습니까? ‘울었다’ 했습니다. ‘아이고, 이 시건머리하고. 그렇게 모르겠나, 그렇게 이야기해도 모르겠나?’ 이 말이죠. 진짜 울고 싶어요.
제가 울어야 될지 안 울어야 될지 일단 질문 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죽었잖아요. 이 죽음은 예수님 혼자 잘났다고 죽은 게 아니고 죄인들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날 용서 못하면 누굴 모독하게 돼요? 용서해주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게 된다니까.
내가 나의 완벽을 주장하고 내가 나의 잘남을 하고 심지어 반성하는 나의 멋있는 모습에 신경을 쓴다면 이건 누굴 모독하는 겁니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를 모독하는 거예요. 이 죽으심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이미 용서해주기로 작정해서 용서해줄게. 그런데 우리가 나 같은 인간은 용서하면 안 됩니다. 내가 왜 쓸데없이 자기 겸손을 내세웁니까? 주님께서 용서했다면 까라면 까는 거지. 내가 날 왜 용서 못해요.
‘바보야, 바보.’ ‘원래 바보야.’ ‘내가 이럴 수가.’ ‘원래 그런 놈이야.’ ‘내가 그런 실수 하는 게 아닌데.’ ‘원래 실수투성이야. 앞으로 또 할 거야.’ 주님이 웃습니다. 용서했다면 아직도 인간은 자기 존재 가치에 미련이 남아서, 아까 이야기한 자기 영광이죠. 찬양을 누구한테 하고 싶다? 찬양을 자기한테 하고 싶은 거예요. 평생을 죽도록 고생한 나에게 찬양 보내지 않고 누구한테 보내겠느냐. 이게 인간적 사고방식입니다. 고생도 내가 했고, 힘들어도 참았고, 공부를 해도 내가 했기 때문에 모든 찬양, 영광은 나한테 돌린다.
이게 인간이니까 이제 형들은 요셉 만나서 ‘요셉아 너 나중에 딴 소리 하면 안 된다.’ 요셉이 기가 차서 ‘내가 나 된 것은 여러분들 용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그게 어디 나옵니까? 여기 19절 봅시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하나의 사건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뭘 모릅니까? 눈앞에 누가 보입니까? 요셉이란 존재로 보여서 ‘저놈이 언제 변절할까’ 이러고 있다고. 요셉은 그 덩어리가 사건 덩어리인데 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요셉의 존재로 보는 거예요. 왜 요셉을 존재로 보느냐 하면, 자기들이 자기를 존재로 보거든요. 자기 존재에 관심이 있고,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요셉이 권력 있다고 저놈을 하옥하라. 하면 골치 아프다. 미리 조치를 해놔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그런 조치는 야곱의 약속 앞에서는 다 쓸데없는 염려입니다.
제가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는데 ‘여러분들이 주님의 용서를 제발 믿으시거든 죄책감을 돌파하라.’ 했어요. 주일날 설교에서. 왜냐하면 죄책감이 남아있으면 벌 받을까봐 뭐가 생기느냐 하면, 두려워요. 두렵다는 말은 누굴 지킨다? 내 존재는 내가 지킨다. 내 고향은 누가 지킨다? 우리 예비군이 지키잖아요. 맨 날 하루 스물네 시간 생각하는 것이 내 인생은 내가 지킨다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시미 칼로 다 잘라버려야 돼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죠. 공중에 나는 참새를 누가 키운다? 주께서 키우시는데 언제까지? 시장에서 팔릴 때까지. 새총한테 맞을 때까지 키우시죠. 들풀도 키우시는데 언제까지? 다음날 아침에 불쏘시개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들풀을 키우시듯이 주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겁니다.
내일 염려는 언제 하라 했습니까? 장로님 언제 할 거예요? 내일 염려는 내일하고 오늘 염려는 몇 시간 안 남았어요. 뉴스 보고 주무시면 됩니다. 세상에 자면서 걱정하는 사람 없잖아요. 잠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염려의 단절이에요. 염려 끝. 내일 또 아침에 살려주시거든 내일 또 염려할 것 하라고. 인간이니까.
이렇게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모독하는 게 돼요. 약속은 우리 약속끼리 놀자. 우린 서로 네 이야기, 내 이야기, 너 잘났다, 못났다 나한테 끄집어내라고 말 안 할게. 약속을 끄집어내라. ‘너 주님한테 뭘 들었지? 너 선지자한테 뭐 들었노?’ 그것 이야기하란 말이죠.
‘저 못났습니다.’ 너 못난 것 천하가 아니까 심지어 공중에서 한 구석에서 한 이야기도 새들이 다 아니까 묻지 않고 넌 뭐라고 약속을 받았느냐? ‘용서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누가? ‘내 대신 돌아가신 분이.’ 지금 그분은 어디 계시느냐? ‘돌아가서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인생을 두려워합니까? 하나의 사건인데. 요셉이 울면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20절에 봅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의 사건이죠. 요셉은 사건으로 보는 거예요. 저 사람들이 나를 해하려 한 것이 하나님 주신 사건으로 다시 해석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몰랐었어요. 지금 창세기 마지막에 와서 아는 거예요. 모든 것은 전부다 어디다 끌어 모은다? 하나의 사건에서 나온 사건들, 예수님의 사건에서 나온 사건들의 다발로 보는 거예요. 하나의 사건이 종말의 사건이 터져서 지금의 사건이 된 겁니다. 마지막 사건이 미리 터져서 지금 하나하나 사건이 되는 거예요.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그 다음에 요셉이 가족들과 함께 다시 애굽으로 복귀합니다. 24절에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보세요. 탈출이에요. 창세기에 이 부분에서의 주제는 탈출입니다. 우리 여기 살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한 세상 따로 있으니까 거기 가기 전에 임시적으로 사는 곳이 이 땅이다. 나가자 우리. 그냥 약속으로 나간다. 그 약속이 와서 당겨주면 우리는 나가게 된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그 해골을, 여호수아 마지막에 봅시다. 24장 32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이렇게 한 가족처럼, 패밀리처럼 모이네요. 이처럼 약속을 받은 사람은 결국에는 주님 앞에 다 한 곳에 모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24 장로가 어린 양의 보좌 밑에 둘러서 섬기죠. 이 장로라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 사건을 받은 사람의 대표라 볼 수 있죠. 결국 이들은 모여서도 자기 보라고 모인 것이 아니고, 누구 보라고? 전부다 면류관 던져서 자기 중앙에 있는 예수님께 주지요.
이처럼 교회라 하는 것은 중앙이 있어야 되고, 중앙은 공백이 돼야 되고, 그 공백은 오직 십자가 사건, 죽음의 사건만 있어야 돼요. 십자가 죽음의 사건은 누구나 들어갈 수 없고, 사건의 조명발이 비추는 곳을 바라볼 때 십자가 위에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든지 주님을 본 받으라 십자가에 이르려 함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이른 것은 부활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주님을 본 받아서 공백에 참여해서 공백에서 나아간다. 이것이 빌립보서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끝이 아니고 새로운 야곱의 언약의 솜씨가 능력이 어떤 능력을 발휘했기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애굽에서 빠져 나갔는가 그걸 알려줍니다.
끝으로 묻습니다. 왜 그들은 애굽에서 못 빠져나옵니까? 마지막 질문인데. 아까 요셉의 형제들처럼 누굴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를 생각하는 건 모든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절대로 못 빠져나옵니다. 존재를 생각하는 것을 사건과 결부시킬 때 그 존재는 사건에 의해서 죽은 자리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하죠.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했사오니 이제는 그 사건이 있는 이상 자신을 자책하지 말고 자신을 변호하지 말고 옹호하지 말고 그저 주님께 맡겨진 인생 그 자체를 하나님께 다시 맡기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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