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1a 울산강의-창세기50장
20090501a 울산강의-창세기50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501a 울산강의-창세기50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창세기 마지막 50장입니다. 창세기 마지막 장이 야곱의 죽음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야곱의 죽음이라고 돼있지만 사실은 야곱의 죽음이 아니고, 야곱 언약이 죽음으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살아있는 야곱을 통해서 야곱 언약이 진행되는 절차가 이제는 야곱의 죽음 속에서 야곱 언약이 어떻게 이뤄지는가?
보통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것도 기회가 없어진다고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사람은 비록 죽어도 언약은 살아있다. 오히려 제가 말을 이렇게 해야 되겠죠. 사람이 죽어야 비로소 언약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말이 더 정확한 겁니다. 살아있으면 하나님의 언약을 내가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자꾸 반대하는 경향, 나는 살아야 되겠고, 언약도 살아야 되겠고. 이게 안 되거든요. 그런데 내가 죽을 때 언약이 제 모습을 제 능력을 그대로 발휘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 죽어봐야 살려주심을 실감하게 된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관계에서 그냥 부자도 살아있고 거지 나사로도 살아있을 때 그들에게는 아브라함 언약, 아브라함이라는 이 분의 가치가 별로였어요. ‘아브라함? 그게 어느 동네 할아버지인데? 그 아저씨 누구신데?’ 별로 의미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때 부자는 그냥 살아있는 게 아니고 부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죠. 그때 아브라함의 있음과 아브라함이 없는 곳에 가있는.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는 어디에 합류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세계, 그걸 예수님은 ‘나라’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그 나라에 거지 나사로가 합류했고, 부자는 지옥 불에 갔는데, 지옥 불이란 결국 아브라함이 없는 곳에 간 거겠죠.
그들이 살아생전에는 아브라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모르고 너는 거지, 나는 부자 이렇게 살았는데 막상 죽고 난 뒤에 보니까 아브라함과 함께 있다는 그것이 바로 축복이고, 여기는 아브라함이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을 제가 두 자로 고쳐볼게요. ‘언약’ 이렇게 바꿀 수가 있거든요. 아브라함이라는 것은 언약이다. 언약이란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약속이죠.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죽어봐야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살아있을 때는 겉모습으로 비교가 되기 때문에 그리고 개들도 여기 와서 왕왕거리면서 달려들고 하니까 겉모습으론 사람들의 평가가 둘러싸여서 진짜 거지 나사로가 천사에 받들려 올라간다는 진가를 전혀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둘러싸였습니까? 언약에 둘러싸였습니까? 부자는 아무것도 자기를 둘러싼 게 없어요. 그냥 자신뿐이에요. 자기뿐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믿을 게 없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없다는 것. 자기 외에 믿을 게 없을 때 그걸 불신앙이라 합니다. 보이는 자기뿐이니까. 그런데 여기 거지는 자기가 거지된 자체를 신앙으로 보지 않고, 믿지를 않고 함께 되신 분을 믿지요. 약속을.
그래서 제가 창세기 50장을 마무리 지으면서 사람이 죽었을 때 이 야곱에게 한 약속이 어떻게 이뤄지느냐를 이제 시작점,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야곱 언약은 어떻게 살아 역사하느냐? 그걸 보여주는 출발점에 와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50장 이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뭐냐? 그것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 언약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갖고 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무지몽매하게 무식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왔었다는 그 경과가 창세기,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 이런 긴 역사의 순간이 그 순간입니다.
꼭 우리들 이야기죠. 예수 믿는다 해놓고는 돌아서면 이 순간에 예수가 무슨 의미 있느냐? 예수가 내가 왜 필요한데? 예수가 도대체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지? 예수 믿는 것 하고 그림 그리는 것하고 무슨 관계있으며, 내 사업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도대체 연관성을 지을 길이 없어요.
제가 오늘 낮에 상당히 이슈가 되는 상당히 논쟁거리가 되는 유명한 영화를 강 장로님하고 보고 왔어요. [박쥐]라는 영화입니다. 다른 사람은 영화를 봐도 그냥 편하게 볼 수 있는데 저는 꼭 숙제로 다가옵니다. 거기에 대한 평가를 글로 써야 된다는 압박을 받아서 오기 전까지 피씨방에 가서 두 시간 붙들어서 삼분의 일쯤 써났어요. 오늘 끝나고 난 뒤에 새벽 여섯 시까지는 마무리 안 되겠네나 싶어요. 여러분 잠든 시간에 글 쓸게요. 박쥐에 대한 줄거리와 의미, 신께 도전하는 인간의 태도, 종교에 대한 인간의 본모습 다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문제점이 여기와 똑같아요. 살아있는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실 것이냐? 그 주제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살아있게 되면 누가 하나님의 구원을 자꾸 방해하느냐 하면, ‘나 살아있습니다’ 하는 이 살아있다는 이것 때문에 구원을 방해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정 구원의 힘은 살아있는 나를 의식할 때는 내가 까먹는 게 돼요. 진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까먹게 돼요. 불평이 되고, 불만을 자꾸 품게 되고.
그런데 내가 눈을 감고 죽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아무 일없이 이뤄진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살아있을 때는, 물론 죽었을 때는 모든 게 정리됐기 때문에 조용하잖아요. 하지만 살아있으면서 언약의 혜택을 받으면 이게 상당히 복잡해요. 복잡할뿐더러 조용한 것이 아니고 복잡해져서 저 밑에 내려가죠. 고난 받습니다. 상당히 박해를 받아요. 그리고 미움을 받고. 언약 때문에 박해 받고, 고난 받고, 미움 받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들어가면 고난 받고, 박해 받고, 미움 받으면 여기 반드시 박해자가 있고, 피해 입히는 가해자가 있고 고난을 주는 이런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래서 조용한 언약이 완성된 세계가 실체라면, 여기 그림자는 가해자와 피해자 이 양쪽으로 이 세상은 구성돼있습니다. 성경 하나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7장 2절. 제가 무척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한 구절인데. 골로새서 1장 16절로 더불어 상당히 기뻐하는 건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참 재미있지요. 여기에 보면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어떻게 구분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 아버지로부터 모든 세상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는데 예수님 쪽에서 둘로 구분돼요. 하나는 만민이 나오고, 한쪽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 선택한 자, 주신 자가 따로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이 지상에서 발휘되면 만민과 아버지께서 주신 자하고 구분 짓는데 활용되는 권세다.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죠. 메뚜기부터 개미 하나까지 전부다 아버지, 예수님께서 다스리고 인도하시는데 그 목적이 뭐냐 하면, 만민과 아버지가 주신 자를 구분하는데 왜 구분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영생은 결코 만민에게 주어질 용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생은 오직 아버지가 주신 자에게만 영생이 돌아가도록 그렇게 그들에게만 주어지도록 권세는 거기에만 쓰이는 거예요.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제 말이 맞는가 보세요. 아버지께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이쪽에 주신 자죠. 뭘 준다 했습니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그 다음에 뭡니까? 만민을, 어떻게 하십니까? 다스리는 권세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준 거예요.
어떤 경우라고 나사로하고 부자하고 섞이는 법이 없게 하는 겁니다. 착각했다. ‘내가 널 구원하려는 걸 깜빡 잊었네’라는 법은 없어요. 그리고 ‘너는 구원받지도 못할 자가 여기 천국에 와있지. 내가 실수했나.’ 이런 법도 없어요. 철저하게 영생 얻을 자와 얻지 못할 자를 구분 짓는데 이 세상의 모든 에너지, 모든 역량들이 여기에 다 투자가 됩니다. 다 투여해요.
이걸 구약적으로 보면 언약입니다. 언약에 속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여기에 속한 자. 야곱이 지금 죽습니다. 야곱이 죽을 때 이 야곱을 예수님이라 봅시다. 예수님에게 영생 얻을 자와 그 다음에 만민이 구분되지요. 반드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언약을 실현시킬 힘도 같이 주어지게 되고, 그 힘은 어디서 어떻게 구분되느냐 하면, 영생 얻을 자와 얻지 못할 자를 구분하는데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살아있거든요. 제가 뭐라 했습니까? 언약에 속한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핍박과 박해와 억압을 받지요. 나머지는 가해자가 되지요. 그런데 야곱이 죽고 난 뒤에 과연 언약은 스톱되는가? 그렇지 않아요. 야곱은 죽더라도 야곱의 죽음이 산 사람을 영생 얻을 자와 영생 얻지 못할 자를 구분하는 힘으로 여전히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죽음이 주는 효과죠. 오늘 창세기 마지막을 하면서 이 대목에 공부를 해봅시다.
그걸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유훈통치’라 했는데. 지금 서경수 목사님이 살아계셔서 설교를 매주하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약간 기분 나쁘지만 돌아가셨다고 합시다. 그런데 돌아가셔도 ‘이 빈자리는 아무도 앉지 마. 여기는 서경수 목사님 자리야.’ ‘집사님, 돌아가셨는데요?’ ‘돌아가셔도 비워 놔’ 하고 교인들이 앉아서 ‘이제 예배 시작합시다’ 하니까 비워 있는 자리에서 옛날 서경수 목사님 음성이 나온다면 아주 무서운 일이 되겠지요.
그 무서운 현상이 그대로 현실화시키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못 믿겠죠. 그래서 우리 정낙원 목사님 늘 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 ‘비켜, 비켜. 안 보이는데 봐야 돼. 없어도 살아계신 거야.’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하여튼 창세기는 끝까지 애를 먹여. 끝까지 어려워요.
화산에서 마그마가 불똥이 튀잖아요. 그런데 화산에서 언약이 나온다면 이 언약은 아무도 있어서는 안 돼요. 이거는 공백입니다. 죽음이죠. 죽음이기 때문에 살아있지 않습니다. 산 사람 같으면 이야기가 돼요. 죽어있기 때문에 아무도 없어요. 공백이죠. 비어있음. 공백에서 어떤 힘이 나올 때 ‘여기가 공백이다. 여기는 화산 터지는 장소다’라는 걸 뭐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화산이 터지는 그 위에 한라산처럼 둘러싸서 높은 구멍을 만드는 어떤 산이 있을 때 이 안에 텅텅 비어있어요. 물이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터져 나왔다는 흔적이 둘러쌀 때 이걸 ‘언약 사건’이라 합니다.
이게 하나의 사건인데 어떤 사건이 나왔다는 말은 안에 존재가 있다, 없다? 존재가 없다. 존재가 없고 그 대신 사건이 있다. 사건이 한 번 터지고 똑같은 상황이 없어요. 한 번 지나간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 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사건이라는 것은 만질 수가 없어요. 그걸 요한복음 3장에서는 ‘바람’같다.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리게 하지만 그 흔드는 현장에 가보세요. ‘누가 흔들었어?’ 물으면 누가 대답합니까? 바람이요 하잖아요. 아무도 없다니까. 한 번 지나갔잖아요.
우리가 바람을 잡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바람이 우리에게 역할을 날리게 만들어요. 기다렸다가 바람 잡으려고 머리카락 풀고 있다가 잡았다 바람. 그게 바람 잡힙니까? 그냥 내 머리카락만 날리고 지나가죠. 그처럼 존재라 하는 것은 붙잡을 수 있지만 사건은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변화를 일으키면서 그냥 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런 사건이 나오려면 존재가 비켜줘야 돼요. 사건이 되려면 존재는 사라져줘야 되는 겁니다. 그 존재가 사라지는 그 공백, 어디서 사라졌는가?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 그 분이 어디서 사라졌지’라고 할 때 이 지점이군 하고 이 지점을 이야기할 때 사건을 지칭할 수 있는 변화의 어떤 테두리, 그 안에 바로 우리에게 지금 혜택을 주는 분이 이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거는 사건으로 남는 겁니다.
이게 여러분이 제가 이야기하면 그게 바로 뭐다?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누군가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무슨 언약이라 합니까? ‘새 언약’ 마지막 언약, 새 언약을 줬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말이고,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남자를 죽음으로서 이야기한다는 말이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하고 타협하고, 우리한테 뭘 지시하고, 명령하고, 율법 지키라고 따지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는 제쳐버리고 구원을 뭐로 한다? 화산 분화구에서 뿜어 나온 한 남자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건이 우리 존재를 뭐라 합니까? 우리 존재를 존재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사건 속에 집어넣어버려요. 그럼 우리 존재는 뭐가 돼요? 사건으로 변화되고 이 사건은 무슨 사건이냐? 날마다 우리를 죽이는 사건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특히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죠. 보이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보인다는 말은, 삼다수란 대상이 보이잖아요. 보이니까 존재잖아요. 컵이 보이죠. 존재지요. 제가 존재란 어려운 말을 썼지만 쉽게 하면, 박카스가 있잖아요. 있을 때 존재라 합니다. 바람이 불어서 박카스가 넘어지면 박카스를 넘어지게 했던 바람은 어디에 존재합니까? 지나가 버렸잖아요. 그 다음에 바람 불면 박카스 떨어지겠지요. 이것도 지나가잖아요.
그러니까 사건을 붙잡을 때 붙잡는 주도권이 우리가 될 수 있다, 없다? 우리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와서 구원해야 되지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 믿음, 소망 사건도 분화구에서 터져 나와야 돼요. 사건이 터져 나와야 된다고.
‘그러면 목사님, 내가 믿는 게 믿음 맞습니까?’ 할 때 그때는 우리가 믿음 할 때 그 사건 터져 나오는 언저리, 테두리 이게 있는 거예요. 사건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머리카락이 원래 붙었는데 바람이 부니까 머리카락이 흐트러졌잖아요. ‘엄마, 뭔가 지나갔어?’ ‘거짓말 하지 마. 뭐가 지나갔어?’ ‘뭔가 지나갔어. 바람이 지나갔어. 사건이 지나갔어.’ ‘어떻게 믿나?’ ‘봐. 내 머리카락 흐트러졌잖아.’
그 머리카락 흐트러진 것처럼 나의 마음을 흩트린, 내 존재 중심, 내 중심. 내 존재 중심하면 어려운데 할 수 없이 이 말을 써야 되겠어요. ‘내 중심’이니까 분해하면 나의 중심이죠. 나의 중심이니까 여기 누가 있습니까? 나가 있잖아요. ‘나’란 말은 사건이 아니고 존재잖아요. 손에 잡히죠. 내 중심은 나의 중심이고, 나의 중심은 존재 중심이니까 존재 중심은 천국에 못 가요. 존재 중심이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사건 중심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이 사건은 어떤 사건이냐 하면, 나라는 존재를 존재로 그냥 두면 안 돼요. 내 존재를 안 두고 사건이 오기 위해서는 내 존재를 늘 죽이는 사건으로써 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 진짜 그 사건이 왔는지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이 사건이 오게 되어서 나에게 이런 결과가 주어졌다는 것을 이게 믿어지는 언저리, 화산 언저리, 테두리 여기에 믿음, 소망, 사랑, 여러 가지의 새 언약, 어떤 변화, 성령 받음 이런 것들이 둘러쌀 때 이런 게 어디서 나온 겁니까? 예전에 내가 예상도 못한 게 나왔단 말이죠.
예전에는 이런 게 아니고 내 존재 중심이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어디서 나옵니까? 나에게서 나와요. 내가 만든 믿음, 내가 만든 소망, 내가 만든 사랑, 내가 만든 선행이 나왔는데 성령의 바람, 십자가 바람이 획 지나간 뒤에는 낯선 소망, 낯선 믿음, 낯선 사랑 이게 나를 콘크리트 붓듯이 부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살아가는 것이, 내가 주도권이 아니라 사건이 나를 살게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건이 살게 할 때 내 존재는 뭉개지고 사건에 포함되니까 사시미 칼, 회칼 가지고 내 존재를 타다다탁 잘라버리면 내 존재는 토막토막 사건의 토막, 오늘 밤 밥 먹은 것도 주의 사건, 그러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숨 쉬는 것도 사건, 모든 것이 주께서 주도권을 주고 바람 불듯이 나에게 주신 거다.
하루는 화장실에 앉아서 타일을 보니까 깜짝 놀란 것이 그 타일 한 장이 왜 우리 집에 있어야 되느냐? 그 문제입니다. 나같이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에게 왜 타일 바른 화장실을 하나님이 주신 건지 이게 하나의 사건으로만 해결되는 거예요.
창세기 50장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야곱이 죽었습니다. 야곱이 죽고 난 뒤에 과연 야곱 언약도 끝났느냐 그 문제입니다. 끝난 게 아니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이 시작됩니다. 하는 식으로 이제부터 영화가 시작되는 거예요.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야곱의 효과가 얼마나 그 다음에 사건화 되는 지를 엄청난 사건이 쏟아지는지를 땡하고 제1막 1장이 시작되는 것이 바로 창세기 마지막 대목이에요.
그래서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뭘 남깁니까? 예언을 남기지요. 예언을 남긴 예언자가 죽어버리면 예언도 끝납니까? 아니지요. 야곱은 한라산 분화구 속에 들어갔어요. 죽었으니까 야곱의 자리는 비어있죠. 비어있는 걸 공백. 비어있으면서 여기서 뭐가 터져 나옵니까? 야곱이 49장에서 예언했죠.
비어있는 이미 죽은 사람에서 예언이 나와서, 예언이 나왔다는 말은 여기에 많은 존재가 있더라도 그 존재는 무시되고 예언이 덮어버리는 하나의 화산재, 사건이죠. 사건이 주어져서 앞으로 모든 것은 야곱 언약에 의해서 한쪽은 영생 얻을 자와 한쪽은 영생 얻지 못할 자로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이 야곱 언약이 실시가 되는 겁니다. 이제 이해됐습니까? 지금까지 이야기가.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해야 될 것은 방금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기준’이다. 기준점. 구원의 기준점을 제시하는 주로 목사들이 하는데 제일 목사들이 힘든 것이 뭐냐 하면, 구원의 기준점을 제대로 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안 되고, 운영이 어렵고, 교인이 다 떠나서 나중에 자기 가족밖에 없을 때 떠나간 사람을 붙잡기 위해서 구원의 기준점을 변경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거는 이론상 구원의 기준점은 누가 정했어요? 제가 정한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정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기 때문에. 지금 제가 안 죽었잖아요. 아직까지 존재가 있잖아요. 날마다 사건이 사시미 회처럼 치지만. 우리라는 존재에서는 결정 안 나고 죽으신 분, 이미 십자가에 죽으신 분, 그러니까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공백이 있고, 그 죽으신 분의 예언이 있고, 마지막에 다시 구름 타고 오시리라.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님 말씀 하나하나가 뭐가 되느냐 하면 예언이 되고, 그게 사건화 되어서 두거든요. 그러면 분화구 같은 공백에서 튀어나온 예수님 말씀이 기준점이 될 때만 우리는 천국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하면, 거지 나사로 하고 부자하고 할 때 나사로가 어디에 합류했습니까? 아브라함에 합류했지요. 그러면 거지 나사로 살 때 아브라함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아브라함은 공백이에요. 아브라함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공백이죠. 하지만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합류했다는 말은 당겨주는 거예요. 당겨주는데 뭐로 당겨주겠어요? 사건으로 당겨주는 거예요. 이 사건이 뭐냐? 아까 이야기한 아브라함 언약이었단 말이죠. 아브라함 언약을 믿음으로써 다시 말해서 성경에 나온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믿음으로써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된 겁니다.
그런데 부자는 아브라함이 없는 곳에 가요. 이것은 평소에 뭐하고 살았다? 아브라함 언약과 상관없이 버림받은 자로 살은 거예요. 그럼 부자가 사는 기준점하고, 나사로 사는 기준점이 달랐지요. 나사로의 기준점은 아브라함 언약이란 말이죠.
누가복음 16장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나사로가 천국에 갔을 때 부자가 하는 말이 ‘동생들이 있으니까 나사로를 다시 살려 보내면 혹시 동생들이 살지 않겠습니까?’ 할 때 그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그럴 필요 없다. 이 세상에 선지자와 모세의 글이 있기 때문에 그걸 믿는 자는 다 이곳에 온다.’ 이 말이거든요.
선지자와 모세의 글이란 말은 이게 사람이란 말입니까, 사람 아니란 말입니까? 책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존재가 아니고 뭐예요?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서 움직이는 하나의 사건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하나의 전체 사건 덩어리로 다가오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을 믿지 않고 말씀 믿을 거고, 글자 보기 싫어 잠 오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과 사람만 붙들고 ‘살려주세요’ 할 거다 말이죠.
예수님을 주목하고 예수님 옷을 만져도 소용없어요. 자기가 말씀의 사건화 되지 않으면 예수님이 뒤에 떠밀려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러면 그 사건화 된 기준점이 목사들에게 왔을 때 목사님들은 이미 자기 자신이 사건에 의해서 그것도 죽으신 분에 의해서 뒤집어지면 완전히 덮어쓰면 눈에 보이는 사람이란 존재가 안 보이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안 보여야 되죠. 이게 기준입니다.
설교 40분하고 난 뒤에 아무도 없네. 강아지 보고 이야기했나. 아무도 있고 없고 간에 지금 자기에게 사건이 와서 이야기할 뿐이에요. 그런데 사건으로 안 뒤집어지면 반드시 존재를 보게 돼있지요. ‘저 사람 우에 꼬실꼬?’ 이래 된다 말이죠. ‘저 사람 부자니까 우리 교회 오게 되면 헌금 많이 할 거고.’ 이래 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목사님은 구원의 기준점을 사건으로 봤지만 오랜만에 온 사람은 사건으로 보는 게 아니고 자기 존재로 보겠지요. ‘목사야, 날 설득해봐라.’ ‘니, 뭔데? 난 이미 죽은 사람 이야기합니다. 산 사람 당신 뭔데?’ ‘나, 구원 받으려 교회 왔다.’ 그 다음 나오는 말이 중요해요. ‘당신이 뭔데 구원받아야 됩니까?’ 주님은 산 사람 구원 안 합니다. 주님은 죽여서 구원합니다. 산 사람 구원 안 됩니다. 왜? 살아있으면 자기중심이 되기 때문에 구원이 안 돼요.
[박쥐]라는 영화에 박찬욱 감독이 근본적으로 모르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을 구원하는 종교도 필요 없더라. 종교도 귀신한테 못 이긴다 이 말이거든요. 영화 주제가. 내가 보기에는 박찬욱 감독은 뭘 모르느냐 하면, 인간은 왜 구원돼야 되는데? 그걸 몰라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천만에 말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영생 줄 자를 사랑하죠. 그럼 영생 줄 자 어디 있는데? 영생 줄 자는 사건으로 만들어내요.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영생 줄 자를 사건으로 준비해서 그걸 사건화시켜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셔서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를 태어나게 한 그 인간들만 데려가되 반드시 주님의 사랑으로만 건진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한테 사랑을 못 받은 인간들이 하나의 배경으로 쫙 깔려있어야 돼요. 하나의 들러리로. 신부는 하나지만 들러리는 여러 명 되잖아요. 들러리는 신부를 부각시키는 겁니다. 신부를 빛나게 하는 거예요.
영생 받은 자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 영생 못 받은 시시껄렁한, 거무티티한 인간들, 좀비 같은 인간들, 그런 인간들 많이 깔아야 돼. 이 울산에도 많습니다. 많이 깔아서 영생 주는 것이 사람이라고 다 사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건이 임해야 영생 받는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너희들은 존재로만 우겨라.
그래서 그들은 뭘 하느냐 하면, 존재에 입각해서 자기 존재를 사건 받은 목사를 핍박하게 되죠. ‘두 번 다시 이 교회 오는가 봐라.’ 날 안 알아주고. 교회 어렵게 왔는데 날 무시하고. 왜 구원의 기준점을 성경대로만 이야기하느냐? 대구에서 공부하는 천 목사님, 정말 오랜만에 취직했습니다. 대구에 어느 고등학교 교목으로 취직을 했는데, 취직할 때 신학교 나온 것 말 안 하고, 경남대학 철학과 나온 걸로 교목 됐어요. 이사진에서 목사인 줄 다 알죠.
그 학교 실권자 되는 이사장 아들이 하는 말이, ‘성경은 가르치지 마세요.’ 강의 제목도 성경 시간이 아니고 [상담과 윤리] ‘너무 성경을 가르치지 마세요’라고 당부를 해요. 과연 성경을 가르치는지 그거는 내가 만나보려고 하는지 시간이 없어서 만나지 못하는데. 얼마나 마음 고생하는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애들 영어 단어 외우고 수능에 안 나온다고 전부다 개판이라고. 그럴 때 뭡니까? 모멸감, 무시당함. 천 목사님이 언제 당했겠어요. 창세기 녹취한다고 바쁜데. 전에 무시와 박해를 받아봤겠습니까? 수고가 많다.
구원의 기준점을 변경해야 할 거냐, 말 거냐? 이게 목사로서 항상 나오는 딜레마에요. 매일같이 겪는 일입니다. 구원의 기준점을 달리하면 교인들은 모이는데 문제는 그들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의 기준점을, 좁은 길을 바로 제시해버리면 사람들은 다 떠나가지만 진리는 진리대로 남는 겁니다.
바로 이런 구원의 기준점을 전환하는 목사는 그 순간 자신의 죽음을 느끼는데 이 죽음은 자기 존재의 죽음이죠. 존재의 죽음 되면 존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자기 영광이 들어있어요. 결국 자기 영광을 죽여 버리니까 이거는 자존심 상함, 모멸감, 참 기분 나쁘다 그걸 느끼는 거죠.
이런 자기 부인, 자기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통해서 목사에게 계속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너 한번 왕창 무시 당해봐라. 너 무시당하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무시당했는지 몸소 체험해보자.’ 강의하면 대우 받는지 아는데 대우 같은 소리. 철저하게 무시당해 봐라. 그 길을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이 왔습니다.
드디어 야곱은 그 고생스런 무시당한 인생길을 마감하고 자기도 좋지요. 이제는 할 것 다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 죽고 만 자리가 뭐냐? 공백의 자리입니다. 그 공백의 자리에 대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창세기 50장 봅시다.
창세기 50장 3절에 보면,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 수가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사람들이 곡하였더라, 울잖아요. 사람이 죽었는데 왜 웁니까? 제가 너무 어처구니없는 질문했습니까? 요새 하도 죽을 때 애 먹여서 울지도 않는다는데. 어쨌든 갑작스럽게 자식이 죽는다든지 젊을 때 배우자 죽으면 울잖아요. 왜 웁니까? 크게 쓸게요. [반응]이에요. 상처에 대한 반응입니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그냥 웅덩이가 아니고 맨 땅이라 생각하면 사람들이 기대를 해요. 건너는 게 오 미터라면, 일 미터, 이 미터, 삼 미터, 사 미터 연속성으로 걷는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가는데 만약에 삼 미터 째에 갑자기 사람이 없어져요. 그러면 사 미터, 오 미터에 뭐가 없습니까? 예상했던 그 사람이 안 살잖아요. 죽어버렸으니까.
아내가 늘 고등어 굽다가 갑자기 차 사고로 죽었다고 합시다. 그 후에 가면 아직도 귀신처럼 아내가 고등어 굽는 것처럼 느껴져요. 아침에 일어나면 착각해서 지금 고등어 구을 건데. 보면 아내가 없어. 그때 그 허전함. 결국 죽음은 공백이죠. 공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뭐냐? 울음이죠.
울음을 통해서 사람은 어디에 들어가느냐 하면,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 자기 존재를 재정립해요. 뭔가 내가 이상해. 이러면 안 돼.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돼. 내 존재가 할 말이 없어. 사람이 울 때는 자기가 존재가 깨어짐에 들어가요. 자기 때문에 울어요. 왜 세상은 내 마음먹은 대로 왜 내가 예상한 대로 안 되느냐? 반발심입니다. 운다는 게. 한 마디죠. ‘악~’ 외침이에요. 이건 아니다 말이죠.
옛날 유명한 외국 노래에 그런 게 있잖아요. 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해는 그대로 뜨고, 파도는 치는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내 사랑 죽었으면 꽃은 안 펴야 되고 눈도 내리지 않아야 되고, 해도 없어져야 되는데 왜 내 사랑하는 사람 죽었는데 해는 뜨느냐 말이죠. 내 아들이 죽었는데 왜 지나가는 여학생들 웃음소리가 크냐 말이죠. 같이 울어줘야지.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온 나라가 다같이 울어줘요. 이게 뭔 뜻입니까? 바로 애굽적 사고방식입니다. 존재에 대한 허탈을 이 공백을 울음으로 메워서 전에 있던 존재와 지금 남은 존재를 연결시켜 보려고 하는. 다시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한 사람은 죽었지만 자기는 울음으로서 이걸 통과해서 다시 눈물 닦고 다시 여기서 전에 예상했던 존재를 때려치우고 새로운 존재로 새로 시작하려는 겁니다. 이게 뭐냐? 존재의 단절에 대한 반응이 울음이에요. 그걸 쉽게 말해서 울면서 마음 정돈하는 거예요. ‘아이고, 그래도 새끼하고 살아야지.’ 이런 것. 울면서.
특히 대전에 계신 분은 유명한 지휘자인데 나이 오십에 부산시 오케스트라 지휘자입니다. 세상에 나이 오십에 스트레스 받아서 암에 걸려 죽었어요. 그 미망인이 우리교회 왔었는데 처음에 기가 막히더란 겁니다. 애는 이제 대학교 들어가려하고, 일학년 고등학생 있고, 자기는 오십도 안 됐고, 남편은 덜렁 죽어버렸고. 남편은 천재란 소리 듣고 잘 나가는 유명한 부산시 오케스트라 지휘자 되는 게 완전히 베토벤 바이러스 아닙니까. 얼마나 힘든 과정입니까. 그 자리 올라가고 칠십 명 단원 관리한다고 스트레스 받아 죽어버렸어요.
그때 그 분이 우리교회 와서 고백을 해요. [피]라는 책에 보면 죽음에 대해서 하는 게 있어요. 그걸 보고 많은 위로를 받았답니다. 그 책에 보면 나오지요. 왜 내가 죽어야 되는가? 멀쩡한 내가 왜 죽는가? 기가 막힐 지경이라. 내가 왜 죽는데. 내가 죄 지어서 죽는다 할 때 죄 지었는데 왜 내가 죽어야 되느냐 말이죠.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 아닙니다. 박찬욱 감독이 그게 해결이 안 돼요. 죄 지어서 죽었다. 성경에선 우리 죽는 것은 죄 값인데 문제가 어디서 안 풀리느냐 하면, 왜 죄 값이 죽는 것으로 되느냐 하는 겁니다. 왜 죽음이 죄 값이냐 이 말이죠. WHY? 왜 날 죽이는데? 예를 들어서 죄 값은 오백 원이다. 이러면 우리는 울 필요 없어요. 그런데 죄 값이 날 죽여 버리니까.
죽는 것이 억울해서 죄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는 겁니다. 죄가 뭔지 알고 싶어도 내가 죄 값으로 죽는다는 생각해 볼 때 죄가 싫은 거예요. 왜? 어쨌든 간에 나는 안 죽어야 되니까. 그런데 내가 지금 죽거든요. 내가 매일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 존재에서 죄를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박찬욱 감독이 해결책이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사건, 영생 주기로 작정해서 나온 나라는 존재가 영생 사건이거든요. 믿습니까? 영생 사건입니다. 영생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란 말이죠. 사건이 나오니까 내가 왜 영생 사건을 존재로써 왜 존재가 이 땅에서 죽어야 되는가? ‘아, 죄라는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되는구나.’ 이럴 때는 아무 일 없이 아주 스무스하게 연결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는구나. 이것만 하고 쉽시다. 피곤하신데.
어떤 홈런 타자가 들어오는데 감독이 하는 말이, ‘어이 번트치고 넌 죽어’ 할 때 ‘내가 홈런 칠 줄 아는데 나보고 번트 대고 죽으란 말인가?’ 나중에 보니까 내가 홈런 치는 게 아니고 우리 팀이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때는 ‘아하, 나를 하나의 희생타로 보내되 그 희생이 값없이 쓰는 게 아니고 내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 팀은 역시 강해. 우리 팀의 승리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되는구나’를 알듯이 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사건으로부터 해방되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구원이 뭐냐? 내 구원받은 게 구원이 아니고, 지금 내가 있게 한 이유를 아는 게 구원입니다. 내가 여기 왜 사는지, 나는 어디로 가는지, 왜 태어났는지, 태아나기 전에 누구의 계획에 의해서 여기 태어나야만 했는지를 그런 것을 몽땅 아시는 게 그게 바로 구원 속에 이미 들어간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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