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5월 8일 에베소서 6장 5절 육을 부재로 사용하는 영(십자가)의 두 이미지
서울 5월 8일 에베소서 6장 5절 육을 부재로 사용하는 영(십자가)의 두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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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08 육을 통한 영(십자가)의 두 이미지(악령,성령)
관리자(IP:220.♡.176.150)
09-05-0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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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15 18:46
서울090508a엡6장5절a
에베소서 제 35강 (이 근호목사, 2009년 5월 8일-(1),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6장 5절을 할 차례입니다.
에베소서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여기에 '육체'라는 말이 나오는데 육체라는 말을 사용할 때 항상 무엇을 염두에 두는가 하면 ‘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육체라는 말을 썼거든요. 어린이들에게는 ‘영’이 있다는 말이 상당히 어려운데 제가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육’ 이 있고 ‘영’ 이 있다, 이 말이죠. 여기 ‘육’ 아래 글자를 써보겠습니다.
‘육’이 퍼지면 육의 세상이 되고, ‘영’이 있는 곳에는 영의 세계가 되겠지요.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할 때 ‘영’ 의 세계에 속한 것이 뭐가 있느냐, 할 때 여기에 천사가 포함됩니다. 어린이 여러분, 천사 알아요? angel, 많이 들어 봤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천사를 봤습니까?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육에 있는 사람은 영을 못 봐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그것이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보는 것,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영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서로 총을 쏘면서 전쟁하는 것이 영화에 나온다’고 합시다. 영화관에 가면 군인들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영화관에 가면 수류탄하고 탱크하고 그 안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영화관에 들어가 보면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 총 쏘는 소리 막 납니다. 그것이 어떻게 된 거예요? 영화관에는 군인도 총도 무기도 없을 텐데 보고 있으면 비행기도 날아가고 총소리도 나고 탱크도 지나간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된 거예요? 도대체.
영화에서는 영화를 상영하지요. 그것을 이미지라고 합니다. 강의 시작을 어렵게 했는데 영화관에 가면 스크린은 그냥 벽이에요. 만져보면 그냥 벽이고 그 안을 뜯어보면 벽돌로 되어 있고 시멘트와 모래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냥 물질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면 총소리도 나고 군인들이 움직이지요. 아무리 들여다봐도 군인들이 없는데 벽에 그림으로 비추지요.
영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을 통해서 인간을 이미지화 시킨다는 겁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려니 저도 참 애를 먹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육을 통해서 영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하나님, 나와 봐! 하나님 나하고 악수먹자’ 이럴 수는 없어요. ‘군인 어디 있어! 군이 나와 봐!’
이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신앙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미지가 하나님의 영이 활동을 해요. 선지자가 하는 말이 ‘내가 이르는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고 이것은 성신이 임해서 하는 것이다.’ 보세요.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서 전한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 나와 보라고 해!’ ‘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내 말을 듣는 자는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네 목소리 측정 좀 해 볼까? 파장이 얼마인지.’ 그렇게 연구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합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용해서 뭘 한다? ‘인간이 어떠냐? 인간이 갈빗대가 몇 개냐?’ 이것을 이야기합니까?
아니지요. 인간을 통해서 뭘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성경은 과학적으로 맞지요?’ ‘아닌데요.’
그 분이 목사님인데 ‘성경은 과학적으로 맞는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기는 지구는 40억년의 역사를 가지고 성경에 보니까 칠일만에 세상을 창조하는 그것은 구라고 40억년의 진화가운데 인간이 생겨났다고 보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질문을 했어요.
‘아담은 인류최초의 인간이 아니고 호빗족이고 그 이전에는 유인원, 크로마뇽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네안데르탈인 같은 원시인들이 있었고 아담도 그 이전에 인간들이 이미 있었지만 아담을 최초로 등장시킨 것은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저는 보는데 목사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또 이런 질문도 있어요. ‘가인을 죽이고자 했던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고, 아담계통 사람 따로 있고 그 이전에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가인이 그 사람들을 두려워했고 가인이나 아벨이 결혼한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고 또 다른데서 이전부터 살던 사람들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친절하게. “목사님, 성경해석이라는 것은 구원될 수 있는 해석이 나와야 합니다. 지식을 알았다고 해서 지식을 모아놓는 해석이 나오면 안됩니다. 가인이 죄짓고 나서 두려워 할 때 가인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가인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담의 후손이 아니고 그 이전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의 후손이라는 말이 진짜 구원받는데 중요한 이야기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 아니고 ‘얘들아!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을 죽인 것은 최초의 후손이 아니고 아담보다 먼저 있었던 사람의 후손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는 말이죠.”
제가 계속해서 답변하기를 ‘그런데 인간이 구원되는데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연구해야 성경이 풀린다고 우기는 것은 과연 예수님과 같은 시선인가’라고 했어요.
“구약성경을 볼 때 ‘사람들이 이런 점을 궁금해하더라’ 라는 것이 성경해석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해서 ‘내가 곧 생명이고 길이고 진리다’ 하는 것을 알려줬겠는가? 그런데 초점을 맞춰야지 왜 인간이 궁금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는가” 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공룡이 몇 년도에 생겼습니까?’ 이런 것, 공룡이 몇 년도에 생겨났는지가 중요할 것 같으면 그것이 몇 년도에 태어났는지를 예수님께 이야기를 했을 거예요.
‘너희들이 공룡을 알아? 모르면 지옥간다’ 라고 했을 거란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은 뭡니까? 십자가를 아느냐 이 말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아느냐? 그 효력을 아느냐, 그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구약에 있는 가인 이야기, 아벨 이야기 전부 다 해석하면 나중에 뭐가 나와야 돼요? 역시 십자가에요. 역시 십자가뿐이에요. 십자가최고에요.
구약 어디를 봐도, 창세기 1장의 칠일만의 창조하신 것을 통해서 ‘야, 예수님 최고에요. 예수님 믿으면 구원 받아요’ 그런 해석이 나오도록 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야, 목사님은 기가 세시네요.’ 이것은 누가 더 기가 세냐 하고 승부할 문제가 아니고 왜 천하의 똑똑한 바리새인들이 왜 악마의 자식이 되었으며 왜 예수님을 팔아먹을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것은 같은 성경을 보더라도 예수님이 가진 관점과 바리새인들이 가진 관점이 틀린 정도가 아니고 정반대로 나간 거예요.
어떻게?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지식을 뽑아내서 그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어디에 들이댄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만큼 압니다. 저를 구원시켜주세요.’ 이것이 인간들이 하는 방식이에요. 신학박사들이 하는 방식이 그 방식입니다. 우리가 의존교회에서 이 성경공부를 시작한지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한 2년 몇 개월 정도가 되었습니까? 4년이 되었다고요? 세상에 그럴 수가! 4년이나 되었다니.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셨는데 여러분은 얼마나 그동안 지식을 많이 모아 놓으셨습니까? 그것은 소용없는 겁니다. 지식을 모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강의할 때마다 성경공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뭡니까? ‘예수님 최고예요.’ 이거잖아요. ‘예수님이 다 했군요.’ 이거잖아요. 매번 성경공부 때마다 돌아오는 결론은 뭡니까? ‘야, 예수님이 다 이루셨구나’ 그거잖아요. 공부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야, 이런 것도 은혜구나. 이런 것을 알게 하신 것이 기적이구나.’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 그런 모임, 그런 자리, 그런 시간이었잖아요. 무슨 지식을 모아요. 창세기 다 외웁니까? 출애굽기 다 외웁니까? 바리새인들은 다 외웠어요. 그들은 어릴 때부터 시편을 강제로 다 시켰습니다. 벽이나 문설주, 이마에 심지어 의복에다 쓰기도 해서 강제로 다 외우게 했습니다.
우리 의존교회 애들도 강제로(강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과외도 안보내고) 여기들 앉아들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런 것은 비교도 안돼요. 그들은 무조건 시편을 다 외워야 합니다. ‘율법을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이런 말씀들을 어릴 때부터 다 외워야 합니다. 율법을 다 외우고 성경에 대해서 거의 모든 흐름을 다 알아야 되고.
그런 철저한 교육을 시켰습니다. ‘우리 민족은 보통민족이 아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다. 이것들아!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인것이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너희들은 나에게서 안 태어났으면 지옥 갔어.’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어요.
마태복음 8장에 예수님께서 어떤 백부장에게 하는 말이 ‘주여,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예수님께서 감탄의 감탄을 해서 ‘와! 세상에 댓길믿음이야. 댓길이야. 이 믿음 최고’ 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 이만한 믿음은 처음 봤다는 거예요.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자아가 없는 인간이 있어요.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인간,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라고 하는 인간.
이것은 배알도 없고 자기것도 없는 인간,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이 ‘진짜 아브라함자손들은 몽땅 다 천국 못가고 이런 자들만이 아브라함 자손들이 탈락한 그 천국자리를 채울것이며 아브라함 자손은 지옥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이거잖아요. 육으로 영의 나라에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들어간다. 그 이야기를 한 겁니다.
육으로, 육적인 지식을 쌓아서는 영의 나라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라도 못 들어가요. 그러면 육이 뭐냐? 물질, 육체, 우리 인간을 이루는 재료입니다. 이것은 과학과 의학이 아주 잘 다루었고 연구가 많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 학생들도 공부를 잘 해서 알고 있을 겁니다.
인간은 약 20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포는 핵과 세포질로 구성되어 있고 세포막들로 둘러싸여서 세포와 세포사이를 삼투막작용을 하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다 살아 있는 벌레같아요. 이 세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세포의 핵속에 DNA라는 본부가 있는데 그 본부같은 DNA는 자기복제, 자기증식, 자기새끼까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런 벌레같은 DNA의 특징이 뭐냐? 이게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 있는 것인지, 어떤때는 살아 있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살아 있는 것 같고 혼동이 돼요. 죽었다고 여겼는데 이것이 번식을 하고 건드려보면 가만있는 죽은 것처럼 보이고. 돌멩이는 죽은 거예요, 산거예요? 죽었잖아요. 죽은 돌멩이가 하나 있는데 그 옆에 돌멩이가 하나 더 생겼다면 이것은 어떻게 된 거예요?
돌멩이가 새끼를 친 것인데 그러면 그 때부터 이 돌멩이는 죽은 것이 아니고 생명에 해당되겠지요. 번식이죠. 인간은 자기세포내의 DNA가 번식을 해요. 번식을 하니까 인간이란게 없고 DNA라는 것을 구성하고 모시는 물질의 덩어리, 그것을 한마디로 해서 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자아는 뭐냐? 육과 육이 어울려서 이름 하나 붙여 놓은 것이 ‘나’ 라는 겁니다.
지금 좀 어렵지요? 저기 안경 낀 학생은 몇 학년 몇 반입니까? 2학년 7반. 2학년 7반이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2학년 7반이라는 것은 뭐냐? 2학년 7반이라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인 것을 뭐라고 해요? 그것을 2학년 7반이라고 하지요. 그렇지요? 제가 너무 어려운 예를 들었나요? 대학교라는 것이 어디 있어요.
대학교는 따로 없고 대학교는 캠퍼스와 교직원과 학생들이 있지요. 물은 여기 따로 있고 컵도 따로 있지만 대학교라든지 2학년 7반이라는 것은 따로 없어요. 가보면 2학년 7반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반에 해당되는 학생들만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 여기 있다.’ 고 하면 의사선생님이 ‘뭐가 있다고요?’ ‘내가 여기 있어요’
의사가 하는 말이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없어요.’ ‘왜 없어요. 내가 여기 있는데.’ 의사가 ‘간호사 현미경 가져오세요.’ 그래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까 ‘당신은 없고 세포만 있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얼굴이 너무 예쁘다.’ ‘안 예쁜데요.’ ‘예쁘다니까요.’ ‘간호사, 현미경 들고 오세요.’ 코가 예쁘다고? 들여다보니까 거기 콧 털이 있는데 전부 세포로 되어 있어요. 이 세포나 저 세포나 똑같은데 예쁜 게 뭐가 있어요?
인간의 육은 무엇을 끝나냐 하면 흙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죽으면 흙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흙에서 뭘 만드는가? 흙에서 육을 만들었어요. 무엇의 힘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사람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이 만들었어요? 여러분이 흙입니다. 여러분이 ‘흙아, 흙아, 내가 제발 사람이 되어 다오. 얍!’ 이래서 ‘나’ 가 나왔습니까?
아니죠. 흙이 가만있는데 하나님께서 모양을 빚어서 하나님을 힘을 생령이라 했는데 하나님의 힘을 넣으니까 흙에서 뭐가 되었어요. 육이 되었지요? 그래서 그 육은 도로 어디로 가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제가 처음에 이걸 영화관으로 설명한 거예요. 이게 물질이고 이게 재료입니다. 왜 인간이 육이 되었는가? 인간이 육이되고 다시 흙이 되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의 세계를 육에다 담으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을 위한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담기 위해서 인간이 있습니다. 흙이 육이 되고 흙이 되는 이 과정에 영, 하나님의 뜻, 영의 세계가 담기면…,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죄를 지으면 육에서 흙이 되는 거예요. 죄를 지었다는 말도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육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의 뜻,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 그 주도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형상이란 분이 흙에서 육 만들고 죄지었다고 육에서 흙으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을 조진다, 죽인다고 하는 하나님의 본래의 뜻을 여기에 담은 겁니다.
초반부터 어렵게 했는데 쉽게 다시 해 볼게요. 영화관에 가면 군인들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런데 상영관 문을 살짝 열면 여기서 탱크소리 폭탄소리 비명소리 들렸어요. 영화관에 군인들이 없는데도 왜 총소리가 들렸을까요? 거기서 무엇을 상영하고 있기에 그렇습니까?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기에 그런 거지요.
그것은 이해 되지요? 그러면 영화관이 뭘 하는 곳이다?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몸이 영화관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상영해야 되지요? 하나님의 뜻을 상영하는 곳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교회 안다니는 학생들은 그것을 몰라요. ‘너 교회 안 나가나?’ ‘나 교회 안 나가.’ ‘그러면 인생은 왜 사는가?’ ‘묻지 마라. 나는 교회 안간다.’ ‘왜 사는데?’ ‘몰라. 난 그냥 사는거야.’
자기가 왜 사는지, 왜 나는 이런 처지에 놓였고 왜 나는 여자로 태어났는지, 이런 것을 다 몰라요. 남들이 사니까 그냥 사는거예요. 남들이 서울대학을 가니까 같이 그냥 가는 것이고 남들 시집 장가가니까 같이 가는 거고 남들 죽으니까 같이 현대판 고려장같은 요양병원의 조선족 아줌마한테 맡겨져서 마지막 최후를 당하는 거예요.
왜 태어났는지, 인간아! 왜 사는지 몰라요. 그저 속에 뭐가 들어있다가 나오는가? 죄만 나와요. ‘날 죽이지 마라. 날 건드리지 마라’ 이렇게 죄만 나옵니다. 왜 사는지는 모르고 죄만 나와요. 우리 청소년 여러분, 오늘 강의 참석하고 난 뒤에 나중에 ‘너 왜 사냐고’ 누가 묻거들랑 오늘 배운 것을 이야기하세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는 태어나야만 했었습니다’ 라고. 돌아서면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다시 이야기 할게요. 왜 사냐고 누군가 물으면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영화관처럼,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나는 태어나야했고 이렇게 살아야 했고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태어나서 흙이 되니까 이것은 저주받는 거잖아요. 우리가 영이 되려면 이 흙같은 인간에 누가 와야 됩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뭘 몰고 오느냐 하면, 영의 세계, 영의 스토리, 영의 줄거리를 전부 다 몰고 오는 거예요. 아까 영화관의 예를 들었는데 더 쉽게 TV의 예를 들면 되겠네요.
한동안 유행했던 드라마, 소위 막장드라마라고 ‘아내의 유혹’이라는 드라마를 했던 적이 있어요. 그걸 보겠다고 TV를 켰을 때 무식한 노인네가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저 상자 안에 사람이 들었네.’ 이러면 그것이 무식한 거죠. ‘어르신네, 그것은 상자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전파를 받아서 주사선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화면에 쏴서 그게 그림으로 나오고 그 다음에 소리 신호를 받아서 그게 들리는 거예요.’
‘야야, 골치 아프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저 안에 그냥 사람이 들었다고 해라.’ ‘없습니다.’ ‘뜯어볼까?’ ‘뜯어보세요.’ 뜯어보니까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저는 어릴 때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오길래 그 안에 조그마한 사람이 들어 있는 줄 알았어요. 아주 어릴 때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했어요.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을 거예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썰매타고 온다고 믿었던 순진한 시절이 있었잖아요. 나는 여러분의 환상을 다 깰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위치를 딱 켜면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튀어나와 버려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 영상이 우리 속에서 튀어나온다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안 나오고 악마가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인간은 둘 중의 하나예요. 예수님의 모습이 튀어나오든지 아니면 악마의 모습이 튀어나오든지.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악마의 속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악마에 속한 사람은 누구를 믿습니까? 자기만 믿어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예수 안믿는 의사의 경우를 들어볼게요.
의학공부를 해보니까 사람은 세포로 되어 있고 병이 든 것은 바이러스병원균이 침투한 것이기 때문에 그 바이러스균이 싫어하는 주사약을 넣어서 치료해서 건강하게 하면 되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병에 걸리면 호르몬 주사를 넣어서 머리카락 나게 하면 되고 주름살 생기면 보톡스로 해결보면 됩니다. 이것은 인간은 화학적인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물질로 다루면 된다는 거예요.
여기는 하나님도 필요 없고 예수도 필요 없어요. 그냥 보약 먹고, 양약 먹고 주사 놓고 세포이식하고 그러면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밖에는 안 믿지요. 그 사람들이 증거 하는 것은 자기증거, ‘나는 역시 나밖에 없어’ 라는 자기 증거하는 것밖에는 안되지요. 우리도 그런 인간이었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태어난 이유,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된 채 태어난 것, 이런 모든 이야기가 다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 안에 있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사람은 왜 태어나야 했으며 사람은 왜 죽어야 되며, 사람은 어떤 식으로 구원받는지가 이 책안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이 책이 우리에게 딱 들러붙어서 하나의 텔레비전이 나오듯이 스위치를 켜면 이 책의 내용이 막 나와야 돼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겠습니다’ 이런 것이 막 나와야 돼요. ‘부자가 구원받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을 알겠습니다.’ 이런 내용이 막 나와야 된다는 말이죠. 여기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런 것들이 막 나와야 합니다. 지난주에 이것을 설명했지요. 이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지난달에 이야기 했지요? 육신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아버지의 기능에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예수 믿게 되었는가, 그것을 주목하라는 말이고 그것이 주안에서 순종하라, 하는 말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육의 세계라는 것은 과학, 철학, 의학같은 것이 육의 세계를 이룹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서울대학에 합격시켜 주는 것이 아니에요. 육의 세계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어떤 학생들은 주일날 교회출석 했으니까 월요일부터 치는 시험에서 잘 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평소에 기도하지도 않다가 시험 때 닥치면 ‘공부는 50점이어도 성적은 100점 나오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죠.
그렇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여, 시험치는 가운데서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게 하옵소서. 컨닝하지 않도록 하게 하옵시고 이런 것에 욕심내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성적 나올 때 마다 감사케 하옵소서. 설사 0점이 나온다고 해도 감사케 하옵소서. 공부 안했으면 공부 안한 티를 내게 해 주옵소서. 이런 것을 통해서 교만한 맘을 낮추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합니까? 과학, 철학, 의학 이런 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에서 하는 겁니다. 영의 세계는 천사가 있습니다. 천사가 있고 악마가 있고 그 다음에 성부, 성자, 성령 전부 다 영의 세계에 속합니다. 그래서 육의 세계에 속한 사람은 영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영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육적인 것이 계속 육으로만 밀어붙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5절, 6절을 보면,
에베소서 6:5,6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눈가림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는 자’는 육에 속한 겁니까, 영에 속한겁니까? 육에 속했지요. 왜? 그리스도가 눈에 안보이니까. 상전을 대할 때 그리스도께 하듯 하려면, 그리스도자체가 육이 아니라 영이기에 영에 속한 사람은 눈앞에 사람을 봐도 그리스도를 겸해서 봅니다.
영화관처럼 스크린이 단지 하얀벽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영화를 비추면 전쟁놀이 나오듯이 영에 속한 사람은 남보기에는 육이지만 본인은 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상영이 없다면, 영이 없다면 남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자기욕망, 자기고집밖에 없으니까그런 입장에서 상전을 봐도 ‘자기가 뭔데?’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눈가림만 합니다.
영이 없으니까, 나도 육이고 너도 육이라는 식입니다. 눈은 앞에 달렸지요. 그러면 뒤꼭지를 언제 볼 수 있습니까? 거울 아무리 봐도 앞면만 보이고 돌아서도 맨 뒤꼭지는 볼수가 없습니다. 거울이 두 개 필요하죠. 눈가림만 한다는 것은 ‘나는 보이는 것만 믿고 그 외에는 모르겠다’ 그 말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보는 것이 진리며 내가 느낀 것이 진리며 그 외 어떤 것도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겠다’ 라고 선언하는 그런 것이 육적인 겁니다. 왜? 자기밖에 모르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아무리 틀어도 나올 것이 없는 고장난 TV입니다. 여러분한테서 뭐가 나오죠? 육 말고 영적인 이런 것이 나옵니까? 예수님의 형상, 악마가 어쩌고 천사가 어쩌고 이런 것이 나옵니까?
뭔가 나와야 됩니다. ‘아, 이건 천사구나. 이건 악마구나’ 이렇게 구분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육의 특징은 뭐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고 나만 챙기면 된다는 것,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런 것은 뒷전이고 나만 챙기는 것. ‘하나님이고 예수고 누가 봤나? 안보이면 없는 것이다.’ 빨간 글씨로 적어 보겠습니다. ‘안보이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달턴이라는 사람이 원자가 있다고 하니까 ‘원자 봤나?’ ‘못봤다.’ ‘그럼 없네.’ ‘원자가 있어야 이것이 설명이 되는데.’ ‘어쨌든 안보이는 것이니까 없는 것이다.’ 20년전에야 원자를 볼수 있는 전자현미경이 나온뒤에 그걸로 원자를 보고 나서야 ‘아하, 원자가 정말 있구나.’ 하고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 전까지는 안보이니까 없다고 치고 그냥 물리학자들만 알고 있었어요. ‘○○는 탄소분자의 긴 사슬로 되어 있다.’ ‘탄소 봤나?’ ‘안 봤다.’ ‘안 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 안봤으면 없다고 하는 거죠. 박찬욱 감독이 <박쥐>라는 영화를 만들어서 상영을 했는데 그걸 보고 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이것은 영화도 아니다. 역겹다. 빵점짜리 영화다. 토하고 싶다. 사람을 분노케 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들 말했느냐 하면 거기에 흡혈귀가 나오는데 흡혈귀는 원래 없잖아요. 없는 것을 동원시켜서 왜 우리를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느냐, 하는 불평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머니 교회 나갑시다.’ ‘하나님 믿으셔야죠.’ ‘네가 하나님 봤어?’ ‘안봤습니다.’ ‘안봤으면 말을 말아.’
그럴때는 어떻게 하느냐. ‘어머니 저도 어머니처럼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니까 제가 이렇게 변화되잖아요. 저도 하나님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하나님오고 나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은혜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십자가 지셔서 구원했습니다.’ ‘나는 본 것만 믿는다.’ ‘그러면 어머니는 왜 제사를 드립니까? 그것은 귀신한테 하는 것 아닙니까?’ ‘귀신이 있거든. 귀신한테 잘 보여야 우리가 복받는다.’ ‘그러면 귀신은 봤습니까?’ ‘그것은 남들 다 귀신이 있다고 하니까 있는거다.’
옛날 서양 중세사회에서는 남들 다 하나님 믿고 사는데 혼자 하나님 없다고 하면 그것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육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비추는, 그것을 반영이라 하죠. 하나님의 뜻이 실리는 수레같은 거예요. 그래서 육이 움직일 때마다 불신자들은 내가 움직이지만 신자들은 내 행동 하나 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파도를 느끼고 은혜의 물결을 느낍니다.
은혜의 물살을 헤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다음 중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1) 힘이 없어서 떨어졌다. 2) 졸다가 떨어졌다. 3) 심심해서 떨어졌다. 4) 하나님의 뜻이다. 몇 번입니까? 그게 마태복음에 나오는 문제라고요. 예수님이 이런 문제를 내면 답변을 어떻게 하려고요?
마태복음에 보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의 반영이라면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똑같은 문제, 어제 어떤 아저씨가 죽었는데 왜 죽었을까요? 1) 숨 못쉬어 죽었다. 2) 아침인줄도 모르고 계속 죽었다. 3)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 4) 하나님의 뜻이다. 몇 번입니까? 4)번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죽는다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게 좋은뜻도 있고 나쁜 뜻도 있고 두 가지가 다 있지만 하여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었어요 가룟유다가 자살한 것은 자기 갈 길을 저주받은 길로 가야 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간 겁니다. 그것처럼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영에서 밀어내는 대로 영에서 움직이는 대로 영의 힘에 의해서 믿거나 말거나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무덤에 가면 누가 호출합니까? 교회 안가고 예수 안믿어도 좋다고 하지요. 죽어보세요. 죽어도 ‘주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라고 해서 ‘하나는 영생의 부활로 하나는 저주의 부활로’ 다시 호출 당합니다. 육은 영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피할길이 육에게는 없습니다. 육은 영의 범주에서 못벗어납니다.
빼도 박도 못합니다. ‘나 이제부터 의존교회 안다닐래’ 라고 하면 가세요. 가도 멀리 못갑니다. 의존교회는 안 다닐수 있어도 예수 손아귀에서는 못 벗어나지요. 협박하는 것은 아니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예수 믿기로 마음을 아예 굳히세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하니까 ‘예수 그냥 믿자’ 이런 식으로.
그렇게 예수님을 원래 주인공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육과 영이 만나는 지점이 있어요. 육은 영이 안보이고 영은 육을 본다고 하는데 그 육과 영이 만날 때 스파크가 팍 일어나지요. 여기서 과학상식 하나 들어갑니다. 번개는 왜 칠까요? 이런 것 까지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린이 여러분 번개는 왜 치는 걸까요?
지면 가까이에 구름이 지나가고 있는데 그 구름위에 보면 구름이 또 있어요. 이쪽은 플러스전기, 이쪽은 마이너스전기, 이 두 전기가 서로 대립되면서 그 전기 에너지가 합치게 되면 불꽃이 튀지요. 지지직 하고 불꽃이 튑니다. 이런 종류의 번개도 있고 또 다른 것은 수백키로미터 떨어진 상태에서 넘어가는 것도 있습니다.
어쨌든 번개라는 것은 구름과 구름사이에 전기가 있는데 습기에 의해서 그것이 접촉하면서 일어나는 겁니다. 육과 영이 만나는 지점이 있었어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지요. 그 지점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사건은 영이 육에게 영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가 가진 것이 죄인줄 몰랐는데 십자가를 보니 내 죄를 가져가신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번개를 맞듯이 되었어요. 십자가에 피 흘리는 그것도 처참하지만 예수님께서 비오는 날 하늘에서 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완전히 몸 자체가 전선이죠. 갑자기 하늘에서 백색 섬광이 내려오면서 땅에 있는 사람을 새까맣게 태운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피 흘리는 것보다 더 무섭지요. 거룩한 하나님앞에 죄인은 그것으로 인생 끝입니다. 저주 받아야 됩니다. 인간인 육이 영을 만나는 것은 인간이 벼락을 맞는 것 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지신 분이 다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그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 있겠어요. 누구든지 벼락맞아야만 되는 인간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고 건져 낼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이 없으면 우리 믿음도 거짓되고 헛되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육과 영이 만났던, 하나님의 영이 작용하고 작렬했던 그 사건의 당사자가 바로 영에 속한 분임을 알고 믿으라는 겁니다.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 아니고 영적인 사람, 텔레비전 켜면 나오듯이 하나님이 켜면 하늘나라 소식이 흘러나오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안되고 싶어요? 오늘 어버이날이라고 다들 효도한다고 맥이 빠지셨는데 만일 어버이날 이틀만 더 연장하면 다들 지쳐서 죽을 거예요.
육은 영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육의 세계 따로 있고 영의 세계 따로 있는데 감사하게도 육와 영이 만나는 사건이 있었다. 그게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사건이다. 그걸 통해서 ‘아하, 예수님이 원래 영에 속한 분인데 우릴 구원하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구나. 영이 육이 되어서 오신 분이구나’ 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 여러분! 당신들은 더 이상 육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전을 대할 때도 그리스도께 하듯 그렇게 영적인 표시를 내시면서 눈가림만 하지 말고 깍듯이 그리스도 모시듯 모시라’ 그 말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런데 더 이해해야 할 것이 무엇이 남아 있느냐 하면 ‘순종하라’ 하는 이 말입니다. ‘너희가, 영에 속했으니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순종하라’ 라고 되어 있어요.
순종이 무슨 뜻이냐? 육으로 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엎드린 척 하고는 있지만 ‘내가 너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애고 더러워라. 내가 참는다 참아.’ 출세하기 위해서는 후배들이 하기도 싫지만 선배랍시고 아양 떨면서 대접을 해줍니다. ‘선배님!’ 그런 것 있잖아요. 그것처럼 육으로 순종하는 것은 공경이 아니고 힘이 있는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강해요.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영으로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한 그 순종을 그대로 영적으로 받아 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한테 순종할 때 어떻게 순종했는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순종할 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 받고 죽어서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여기서 순종이란 이미 약속과 말씀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순종하는 거예요.
약속에 대해서 인정하는 그것이 순종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나님께 순종할게요. 제가 의대를 갈까요? 법대를 갈까요? 법대 가는 것이 순종입니까? 의대 가는 것이 순종입니까?’ 이런 궁금증을 고 3된 학생 같으면 할 수 있지요? 혹시 고 3 이십니까? 의대 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법대를 가고 싶습니까?
예수님 같으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겠지만 순종이라 하는 것은 ‘어디를 가든지 간에 너 자신을 부인하고 이미 너는 네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임을 아는 것’ 이 순종입니다. 이미 내가 어떻게 될 것을 아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 순종이다 이 말이죠. 나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상태, 어디를 가든지 간에 예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면 그게 순종입니다.
의대만 가야 되는 것 아닙니다. 병원에 의사만 있는 것 아니고 간호사도 있어요. 뭘 하든지 간에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건 간에 항상 아버지앞에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 내 가는 길이 천국가는 길인 것을 고마워 하는 것,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 기도하는 것, 이것이 이미 아버지의 뜻을 알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법대에 가도 죄가 아니요 의대에 가도 죄가 아니요, 어디를 가더라도 행여 대학에 떨어지더라도 항상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감사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순종입니다. 뭘 해도 범사에 ‘고맙습니다. 구원해 주셔서 고맙고 영적인 사람 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것이 어디에 가도 하나님의 순종입니다.
관리자(IP:220.♡.176.150)
09-07-15 18:47
서울090508b엡6장5절b
에베소서 제 36강 (이 근호목사, 2009년 5월 8일-(2), 서울의존교회)
첫째시간에 했던 것을 다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생각나시는대로 답변해 보세요. 육과 영이 있는데 육은 눈에 보이는 것, 영은 눈에 안보임. 그런데 육은 안 보이는 영을 싣고 다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육은 텔레비전 같이 물질이고 재료이고 영은 그 텔레비전을 통해서 나오는 드라마같은 것입니다.
TV안에 탤런트가 없지요. 그런데 육은 무엇을 싣고 다닌다? 영의 세계를 싣고 다니지요. 영의 세계에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성령이 하실 일과 악령이 할 일, 이 두 가지를 육에다가 담아버리면 육이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성령 받은 육이고 하나는 악령 받은 육인데 이 세상에는 이 두 종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 성령 받았나, 악령 받았나, 이 두 종류 외에는 없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영을 안 믿는다’ 해도 소용없어요. 죽으면 다 흙이 되지요. 흙이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죠. 한쪽은 무엇으로 천국으로 부활시키고 나머지 한쪽은 지옥으로 부활시킵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다 어디서 나온 겁니까? 육에서 연구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영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 그 말이 맞습니까? 증거가 있어요?’ 라고 나올 겁니다. 그래서 제가 증거를 뭐라고 댔습니까? 육과 영이 만나는 그 지점이 증거라고 했지요. 육과 영이 만나는 그 지점을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희한한 일이 생겼지요. 예수님이 죽기는 죽었는데 예수님의 그 무덤이 무슨 무덤이 되었어요? 빈 무덤이 되었지요.
분명히 묻었는데 흙이 되어야 할 분이 흙이 아니고 부활체, 영체가 되었지요.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시간을 해 봅시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봅시다.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질문 나갑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방법이 뭡니까? 1) 우리의 열심가지고. 2) 우리가 성경공부해서. 3) 우리가 헌금해서. 4) 우리가 전도해서. 뭡니까? 우리 힘으로 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부 다 아니지요. 그러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뭡니까? 우리는 육이니까 우리가 아니지요.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면 우리는 뭡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요. 나아가면서 우리는 뭘 봅니까? 나아가면서 우리 앞에 계신 예수님을 보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요? 예수님은 대신 죽으신 의인이 되고 우리는 그 예수님 앞에서 불의한 자가 되지요. 맞잖아요. 의인이 불의한 자를 위해서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가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앞장서고 우리가 따라간다면 앞서가신 예수님은 의인이고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는 불의한 자가 되고. 세상에 우리가 불의한 자가 되어서 이렇게 즐거운 적이 없어요. 내가 불의하다는 것 때문에 너무나 즐거워요. 왜? 앞장서서 가시는 분이 그냥 앞장서시는 것이 아니고 뒤따라가는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용서해주신 분으로서 앞장서 가니까 우리는 즐겁게 앞장선 주님을 바라보면서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따라갈 때 우리는 육이지요. 그 육에 무슨 옷을 입어야 합니까? 그게 베드로전서 4장 1절에 있지요.
베드로전서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 예수님의 고난을 마치 갑옷처럼 드레스나 조끼 입듯이 걸치고 가야 한다는 거예요. 왜? ‘나는 죄인 맞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맞거든요’ 라고 하면서 걸치고 가면 된다는 거예요. 참 쉽죠. 앞에는 예수님 앞장세우고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즐겁게 뒤따라가면서 ‘예수님 죄송합니다. 내 대신 돌아가셨지요?’ 라고 하는 거니까 구원받는데 얼마나 쉽습니까?
문제는 악마에 속한 자들은 앞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앞에 아무도 없고 자기가 열심히 기도해서 구원받는데요. 이런 이단들이 어디 있어요. 이단들은 그것밖에 모르지만. 베드로전서 3장 18절 끝에 봅시다.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보세요. 육적세계하고 영적세계하고 다르잖아요.
육의 세계는 영의 세계로 갈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만 갔습니까? 예수님만이 육에서 죽으시고 어디로 갔다? 예수님만이 영의 세계로 가셨지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야 됩니까? 우리는 부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누구를 따라가야 됩니까?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넘어가신 그분 만이 진짜 영의 세계를 아시는 분입니다.
스웨덴 볽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 천국을 봤다, 그렇게 말하는데 그 사람 따라가면 안돼요. 진짜 예수를 따르고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뭐 밖에 없는가? 오직 십자가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있는데 누가 너희를 다른 것으로 꾀더냐, 그렇게 나옵니다. 병고침이나 무슨 기적. 이런 것에 넘어가면 안돼요.
‘오직 십자가가 우리 대신 죄를 해결 했습니다’를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가 십자가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고’ 누구를 따라라? ‘즐겁게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신 겁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 3장의 이야기인데 왜 제가 여기서 갑자기 이 본문을 들이댔느냐 하면 이렇게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다릅니다,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첫째시간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에베소서 6장 9절에 보면 성경에서 잘 안 나올 것 같은 용어가 하나 나옵니다. 그게 ‘공갈’ 이라는 용어입니다. 번역을 아주 잘했는데.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협박)을 그치라…”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 아까 했던 그 법칙을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지금 부하직원이 상전을 볼 때에 육에서 육으로 봐버리면 눈가림만 하게 되고 그것은 상전의 힘을 이용만 하려는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영적인 사람, 텔레비전에서 드라마 나오는 것 같은 사람은 ‘상전을 대할 때 그리스도에게 하듯 순종하라’ 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순종의 뜻이 뭔지를 첫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에서 순종의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순종이란 새삼스럽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확정된 계획 따라서 가는 것을 말합니다. 군대이야기 하면 여자분들 싫어하겠지만 군대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군대에서는 군법대로 해야 할 것은 무조건 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지 말아야 될 것, ‘어이 졸병 술사와’ 이런 것이 군복무규정에 나와 있습니까? ‘졸병은 상급자가 술을 사오라고 시키면 사와야 된다’ 이런 것이 나와 있습니까?
안되지요. 직장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에 순종할 때 아버지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해서 순종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안하지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 이 고난의 쓴잔 할 수만 있으면 그냥 없는 것으로 칩시다’ 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뜻은 알겠는데 제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치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하지요.
이러한 인간의 죄욕심을 꺽는데 얼마나 힘들었던지 땀방울 속에 피가 막 섞여 나왔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내 뜻을 꺽는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인데 바로 그 순종을 말하는 겁니다. ‘아버지 뜻은 알겠는데 제가 너무 싫습니다. 그냥 못 본체 넘어가면 안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했지만 결국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순종을 이루어서 돌아가셨지요.
그처럼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왜 순종 안하겠습니까? 그런데 나에게 이익이 아니고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비록 하나님의 뜻이라도 그것을 해내지를 못해요. 그래서 인간은 죄인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나오지요. ‘네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그만 되었다.’ 아, 이것이 참 힘들어요. 애가 과외비를 달라고 할 때 돈은 없지요. 휴대폰도 사달라고 하는데 또 돈은 없지요. 이것이 참 힘듭니다.
여러분, 어버이날인데 잘 들으세요. 부모 돈은 없지요. 휴대폰은 사달라고 하지요. 남들처럼 사줘야 다른 친구들에게 기 안 죽고 기 펴고 못났다는 소리 안 듣고 당당하게 살 것이 뻔한데 그래서 ‘하나님, 애 휴대폰 사줄 돈 안 됩니까?’ 할 때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니까 말씀이 나오잖아요. ‘네가 지금 못 고 사나?’ ‘아닙니다.’ ‘그러면 네가 지금 벗고 사나?’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되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그럴 때 그 엄마가 애를 불러서 ‘너 휴대폰 없으면 못살겠니? 굶어죽니?’ ‘아닙니다.’ ‘그거 없으면 공부가 안되나?’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되었다. 나중에 공부더 잘하면 사주마.’ 어린이여러분, 그 말은 믿지 마세요. 공부 잘해도 안 사줍니다. 오늘 어린이들의 환상을 다 깰 겁니다.
그러면 휴대폰은 언제 사주는가? 애들이 기분 좋을 때가 아니고 엄마가 기쁠 때, 기분 좋을때 사줍니다. 엄마가 기분 좋을 때 사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엄마는 그 좋은 기분 유지하기 위해서 휴대폰 사줍니다. 마아슬루에 따르면 인간의 육적인 욕망이 다섯 가지로 나오지요.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이 런 욕구들에서 못 벗어 납니다.
우선 밥 먹고 살아야지요. 그 다음에 집이 있어야 안정, 안전하지요. 그 다음에 혼자는 못살고 죽고 싶게 됩니다. 왕따 되면 안 되지요.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나를 변호해줄 사람들이 많을 때 안심하잖아요. 그 다음에 존경,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 다음에는 절대자가 되고 싶은 욕구, ‘내가 최고다’ 라는 이런 욕구를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겨냅니까?
돈 벌어도 공부를 해도 다 여기에 속한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다 이것 때문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갔는데 아기를 못 낳는다면 어느 욕구에 결핍됩니까? 아기도 못 낳는 여자가 아파트 부녀회에서 존경을 받겠습니까? 애를 배서 배가 볼록해 가지고 돌아다녀야 존경을 받지요. ‘새댁은 결혼한 지 얼마나?’ ‘5년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아직 안 들어서네요.’ ‘기도해 보시지…중보기도 해 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꼭 약 올리는 것 같지요. 아기가 없으니까 결핍을 느끼고 결핍을 심화되고 깊어지면 이것이 나중에 자살로 이어져요. 자살로서 시련을 장렬하게 마감하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것인데 육적인 것에 영적인 그리스도의 순종이 와버리면 ‘그리스도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상전을 대할 때 눈가림만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하듯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럴 때 상전이 하는 말이 ‘왜 다른 사람들은 다 농땡이를 부리는데 왜 당신은 그렇게 착실하게 하는가?’ 할 때 ‘저는 당신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겁니다. 이렇게 실제로 할 수 있다, 없다? 택도 없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육이라는 것은 인간의 다섯 가지 욕망이 잡아당기기 때문입니다. 존경받고 싶고, 우대받고 싶고, 집안 자랑하고 싶고 뭔가 위태로울 때 무조건 지켜주기를 원하고, 우선 먹고 잠자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와야 하고 영적인 것이 왔다고 해서 우리보고 영을 다루라는 것이 아니고 영을 다루시는 분, 전문가가 따라 옵니다.
성령께서 이런 것이 육됨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죄인중의 괴수임을 알게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니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을 마음껏 발휘하는 거예요. 두 번째로 상전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 육으로 봐버리면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떠맡기게 되는 자신의 이용물이 되어버리지요.
협박, 공갈이죠. ‘너 나하고 똑같은 인간이지. 맞지? 내가 너의 위치에 있을때는 상전에게 벌벌 기었단 말야. 그런데 왜 너는 나에게 벌벌 기지 않는거야. 요즘 후배들은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안단말야. 선배를 좀 깍듯이 모시란 말야. 그래야 신상에 좋아’ 라는 것은 자기가 육이니까 육을 육으로 보는 것 밖에는 아닙니다.
군대이야기를 안하려고 했는데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상병 달 때까지 매일 밤중에 자다가 일어나서 야구방망이로 매타작을 당했어요. 그런 날이 거의 매일밤이죠. 일주일이면 4일, 5일은 맞았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맞으니까 안 맞으면 허전해요. 왜 때리는가? 고참들이 술을 안 먹으면 괜찮은데 술만 먹으면 군대생활의 스트레스를 사람 때리는 것으로 풀기 때문에 그랬어요.
‘나도 너희들처럼 졸병 때 이렇게 맞으면서 생활해왔다. 이게 바로 군대라는 거다. 원망하지 말고 억울해 하지 마라.’ 이러면서 때렸어요. 그렇게 얻어맞다가 제가 고참이 되었는데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히 그 폐악을 없애버렸어요. ‘내가 맞을 때 힘들었다.’ 그렇게 맞으면 정신적인 파괴를 당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아픈 것이 아니고 정신이 파괴됩니다.
맞아야 되는 이유를 모르는 채 맞을 때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 하는 자기정립이 안 되는 상황, 자기정체성이 깨져버립니다. 이유 없이 맞으면서도 반항을 못할 때 그것은 사람이 아니고 기계가 되지요. 사람인데도 기계처럼 되려고 하니까 인격의 분열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이제부터 일체 이런 것은 안한다. 자는 사람은 일체 못 깨운다. 심지어 차렷, 경례도 하지 마라. 그냥 푹 자라.’
‘다 같이 객지에 와서 고생하는 마당에 서로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면 안 된다. 다 자거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참은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술만 안 들어가면 돼요. 나는 술과 담배가 없는 나라가 있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갑자기 반발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술을 많이 취하면 안된다 그 말이죠.
인간은 술 취하면 완전히 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저 사람을 위해서 몸을 바쳤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아랫사람을 대할 때 그런 마음으로 대하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것을 싣고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 힘으로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되고 성령께서 간섭해 줘야 그것도 한 3초 정도 잠시 그런 생각이 들어가다 말지요. 좀 은혜로운 사람은 한 5초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사람은 못봤고 보통 3초에서 그치고 말지요. ‘내가 저사람을 위했는데 저 사람은 나한테 해준게 뭐있나’ 라는 이런 생각이 퍼뜩 들고 말기 때문에.
제가 군대에서 그렇게 했더니만 저는 군 생활에 있어서 무능력자로(*이런 경우를 두고 군대용어로 고문관이라고 했던가?) 찍히고 말았지요.
6장 10절에 보면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말로’ 라는 것은 세상끝이라는 말이 아니고 편지 끝에 ‘마지막으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마귀가 등장하는데 불신자한테는 마귀가 없어요. 흡혈귀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귀가 없어요.
<박쥐> 라는 영화의 주제가 뭐겠습니까? 박 찬욱 감독이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한 것이 엿보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도입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으로. 아까 여기 다섯 가지 욕망에 뭐가 생깁니까? 결핍이 생기죠. 신을 믿는 이유는 생존, 안정, 소속, 존경, 등등의 욕망의 결핍에 대해서, 자기한테 모자라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신에게 아부하고 뇌물 바치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열심히 비는 거예요.
지성이면 감천인데 ‘이렇게까지 하는데 하나님이 정말 안 도와 줄겁니까?’ 하고 계속 비는 겁니다. ‘이렇게 착한 나를 안 돕고 누굴 도와줍니까?’ 라고 착한 짓을 해서 결핍을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전혀 영적이 아니지요. 박 찬욱 감독의 주장은 뭐냐? 하나님을 찾는 이런 인간, 혹은 교회의 습성이 악마의 습성과 같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주제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라든지 목사라든지 신부라든지 이런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와서 병을 고치겠다는 생각은 하나님만을 도입했기에 거기서 나온 착각인데, 실제로는 악마, 흡혈귀가 기도해주면 감전된 것 같이 찌릿찌릿 하면서 은혜를 받는다는 거예요. 그 영화에 보면 그런 게 나와요. 그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가 그러잖아요. ‘신부님이 기도하니까 막 전기가 통하듯이 은혜를 받는 것 같다’고 하죠.
박 찬욱 감독은 그걸 보여줍니다. ‘악마가 안수해주니까 감전되듯이 사람들이 은혜 받더라’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정작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찌릿찌릿하게 해 줄 수 있는 자기욕망을 메워줄 수 있는 자기 욕망이 만들어낸 신입니다. 젊은 흡혈귀 신부가 말합니다. ‘신부님, 제가 악마의 피를 받아서 제가 흡혈귀가 되고 말았습니다.’ 늙은 신부가 하는 말, ‘그래도 자네는 능력이라도 있잖아.’
능력, 남의 병을 고치는 능력은 있지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귀신쫒아내고 병도 고치고 기적도 행하고 많은 주의 일을 해도 그런 것은 믿지 말라’고 하지요. 왜? 악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