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5월 8일 강의 고린도후서 12장 2절 자아상실의 말씀사건과 사명
안산 5월 8일 강의 고린도후서 12장 2절 자아상실의 말씀사건과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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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08 고후12:2 말씀이 벌리는 자아상실 사건과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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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0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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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17 14:51
안산090508고후12장2절
안산090508고후12장2절, 말씀이 벌이는 자아상실과 사건 / 이근호 목사
2010-10-17 13:37:06 녹취 : 박온정
오늘은 고린도후서 12장: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이 몸이 내 몸이고 나는 여기 있다’ 분명하게 알게 될 거예요. 주위에 아무것도 없으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나밖에 없으니까 모르겠다는 말이 아니고, 분명하게 이 세상에 확실한 현실은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숨 쉬고 있고, 내가 생각하고 있고, 내 손가락이 보이고, 발가락도 보이고, 분명히 내가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르거니와 했을 때에는 여기에 뭔가 둘러친 게 있죠. 나라는 몸을 둘러쳤기 때문에 이 사람은, -사도바울인데요, - 이 사람은 관심사가 자기에게로 갈 수 있겠습니까? 안 가겠습니까? 뭔가 둘러쌌다, 이 말이죠.
자기가 자신에게 관심 둘 수 있는 형편이 못되죠. 자기는 지금 어디에 놀라고 있습니까? 고린도후서2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냐면, 이게 셋째하늘이죠. 셋째하늘. 셋째하늘에 갔을 때 사도바울은 지금 정신이 어데 팔렸다? 셋째하늘에 팔렸기 때문에 어디에 관심 없는 겁니까.
내가 지금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이 자체에 대해서 자기는 신경 쓸 겨를이 없지요? 뭣땜에 그렇습니까. 셋째하늘 땜에 그렇지요. 구약에서 시내산 위에 모세가 갔을 때, 모세가 40일 동안 몇 끼 먹었습니까. 한 끼도 안 먹었죠. 물 마셨습니까? 커피 자판기 있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그는 밥먹을 때, 물 마실 때, 신경 씁니까 안 씁니까. 쓸 수가 없지요. 모세가 시내산 올라갈 때처럼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고 셋째하늘에다가 관심을 두고 있다 이 말이지요. 내가 지금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관심 없이.
이걸 말씀사건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만들어낸 사건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말씀 사건 속에 어떤 사람이 놓여있으면 특징이 있어요. 그 특징은 자기에게 관심이 없어요. 어떤 사람이 교회 첨 나왔다. 말씀을,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걸 첨 알았다. 그때는 정신이 없었죠. 너무 충격이라서. 그건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월급이 얼만지, 곗돈 부은 게 몇 번 부었는지 관심 없어요. 돼지독감이 얼마나 돌았는지 그거 관심 없어요. 남북통일 관심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에 깜짝 놀라면서 그동안 내가 뭐했지? 하나님 살아계시는데 내가 뭘 했지? 이걸 <말씀이 만들어낸 사건>이라 합니다.
그래서 한번 정리해보면 말씀이 만들어낸 사건에서 특징이 뭐냐, 1)자기에게 관심이 없다. 2) 존재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쌍가풀 수술을 할까 말까 이런데 관심이 없어요. 자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말씀 사건은. 두 번째는 뭐냐 하며는, 이 바위가 본 셋째하늘에 대해서 증거 하기 급급해서,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사명’이라고 합니다. 사명. 자기가 본 것에 대해서 증거를 하는 거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다 아시는 거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너희 마음속에 샛별이 떠오르게 되면 현재 우리를 둘러치고 있는 이 말씀 사건들이 시야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우리를 둘러치고 있는 말씀 사건.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책 안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책 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전부다 책 밖으로 벗어나서 세상을 움직이고 우리 전체를 덮고 있는 거예요.
덮고 있을 때, 사도바울같이 셋째하늘, 천국에 대해서 관심 있는 사람은, 첫 번째 특징은 자기에게 관심이 없어요. ‘나는 지금 고난 받고 있다. 나는 지금 매 맞고 있다. 나는 지금 굶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내가 몸 밖에 있는지 몸 밖, 하늘에 있는지 나는 지금 정신이 없어요.
계속해서 말씀이 말씀대로 사건을 일으키니까 거기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소중해야 되며, 한 달 수입이 얼마며, 내 재산이 얼마며, 이 소유... 우리교회 교인 수가 몇 명이며, 이런 소유에 대해서... 장차 10년 뒤에는 적금이 얼마 되며. 이런 소유에 대해서 이런 존재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두 번째 특징은 뭐냐, 사명을 갖게 됩니다. 이걸 하면 되겠구나, 이 일을 하면 되겠구나. 사명을 갖게 되요. 사람이 사명이 없으면 뭐가 되느냐, 허무해져요. 잘하면 중 됩니다. ‘이래사나 저래사나 아무것도 아닌데, 내 맘대로 살란다.’ 사명은 없고. 세상사는 뚜렷한 의미는 찾지 못하고. ‘에잇, 내 맘대로 살란다.’ 사명이 없으니까. 세상 뭐있어, 한방 터트리면 횡재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그냥 세월 내월 가는 거예요. 사명이 없어요. 사명이.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그때까지 우리 시야에 없던 하나님의 모든 게 말씀으로 나를 인도했다는 사실과, 나라는 것은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명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해서 아직까지도 하나님께서 살게 하는구나. 사명이 받게 되는, 이 두 가지 현상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사명자의 특징은 뭐냐, 사명자의 특징은 뭐가 없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자기 존재에 대해서 어떤 위험이 있든지 죽든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자기를 둘러치고 움직이고 있는, 계속해서 유발되고 있는 말씀의 사건이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죠.
만약에 이런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선교사, 또는 전도사라고 하면 진짜 선교사 전도사의특징이 뭐예요. 목사도 괜찮아요. 목사도 특징이 뭐겠습니까. 뭐에 관심이 없다? 자기가 밥 먹고 사는 데에 관심이 없다. 이게 특징입니다. 말씀 전하는데 미쳐야지요. 주의 말씀 증거 하기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 증거 하기 위해 바빠가지고 자기 자신의 수입이, 소득이 얼마며 장차 노후대책이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사명 받은 자의 고백이 사도바울 서신에 보면 나오는데, 그게 뭐냐,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고,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주께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에 증거 하는 여기에 관심을 두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삼층천) 할 때 이런 것을 해석하려면 그 본인도 성령 받아 말씀 사건 속에 휘말려야 하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쉬웠습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졸기 전에 어려운 거 해야쥐~-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말씀 사건은 엿가락이라. 잡아당겨 버리면 결국은 우리는 죽습니다. 아무리 버텨도 92세? 좀 버틴다 해도 92세 되면 다 죽어요. 죽잖아요. 죽게 되면,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 모든 것이 뭐가 되냐면 무효가 되요. 무효가.
모든 소유가 의미가 없는 거죠. 무효가 되요.
지금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다른 사람은 그냥 보지만 진짜 사도바울 같은 사람은 말씀이 유발한 사건, 말씀이 유발시킨 사건, 말씀 사건이에요. 지금 나이가 40이다. 40세에서 41세 되면서 이 사람은 어디에 저촉을 받는가, 어디에 둘러싸여 있느냐, 안개라고 하면, 안개가 뭐라 했어요?
‘너는 반드시 죽어야 되고 너는 반드시 심판 받아야 돼’ 너는 사건에 의해 40세에서 41세로 옮겨진 거예요. 41에서 42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는 뭐냐, 말씀이 사건을 일으켜서 미래가 되요. 반드시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요, 그 다음에 심판이 있으리라 는 것은 내 가슴에 와 닿도록 자꾸 밀어 넣는 겁니다.
그런데 앞으로 쫘악 잡아당겨 보세요. 잡아당길 때, 말씀에 의하면 성도는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창세전까지 이어져요. 삼층천처럼 사도바울은 둘러싸였지만 현재 우리는 뭐냐 하면, 말씀에 둘러싸였기 때문에 말씀에 의하면 나라는 존재가 어디 가있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는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다,는 겁니다.
심지어 불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창세전에 예정되지 않고 태어난 인간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가룟유다까지. 에서까지. 야곱까지. 창세전에 예정되지 않고 태어난 인간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걸, 창세전 예정은 어디에 나오냐면 로마서에 나옵니다.
로마서 9장에. 로마서 9장에 있는 말씀이 책 안에 갇혀있는 게 아니고 책 밖으로 튀어나와가지고 현재 어떤사람이 30살에 예수 믿었다면, 창세전에 있었던 실제 계획이 말씀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이 사람을 둘러쳐버리죠. 똥파리가 달라붙으면 얼마나 싫습니까. 말씀이 똥파리처럼 빙빙 도는 거예요. '이게 뭐야~!‘ 하고 보니까 창세전에 너는 택했다, 합니다. 창세전에.
창세전에 택했다는 게 말씀이 돼가지고 자꾸 빙빙 도니까. 어떤 사람이 ‘엄마 나는 왜 태어났어’ ‘엄마에게 그걸 한번만 더 물으면 맞는다. 내가 모르는 걸 왜 물어.’ 이렇게 하겠지만 나중에 걔가 교회 가서 성경을 보고난 뒤에, ‘아~! 어머니는 매개에 지나지 않고 창세전에 있었던 이 사실을 이제사 나로 하여금 내가 창세전에 태어났음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지금 실제가 구체화시킨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역할을 누가 하냐면 바로, 성령이 합니다.
제가 아까 어떤 말을 했냐면, 불신자도 그래요. 불신자는 검은색으로 칠합니다. 성도는 피가 묻었으므로 빨간색으로... 창세전에 너를 택하여서 하나님의 사랑 받기로 작정해서 너는 지금 살아가고 있다. 그 사랑이 나중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구원받은 사람의 계열에 속할 것이다.
창세전에 이야기하고, 저 미래 아직 살지도 않았는데, 죽지도 않았는데, 죽고 난 뒤에 그 일까지 앞당겨서 똥파리처럼 주변을 빙빙빙 도는 거예요. 아직 92세 안됐는데. 죽어서 시체가 안됐음에도 불구하고, 죽고 난 뒤에 일어날 이야기까지 미리 댕겨서 말씀으로 둘러싸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증거 할 것은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게 아니고 말씀에 대해서 증거 할 뿐이죠.
더구나 십자가복음을 알게 해줄 때, 성경에 보면 나오죠? ‘십자가 복음을 아는 것은 네가 아니요, 성령께서 네게 알게 했다’할 때, 십자가의 피까지 나의 지은 죄 때문에 흘렸구나, 하는 사실을 앞당겨서 알고 그 피로 말미암아 나중에 우리가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심판 없이 그냥 천국에 간다는 사실까지 미리 앞당겨서 알게 되잖아요. 여기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될 사람들을.
그런데, 불신자 봅시다. 이 불신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죠. 이 말씀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말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걸 성경대로 하면 야곱족속에 해당되는 사람과, 예수족속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족속을 길게 쫘악 잡아당겨 보니까 야곱은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작정된 그 족속이니까. 야곱처럼 사랑 받기로 된 족속들이 (....16:41)
그러면 예수족속은 로마서 9장에 보니까 창세전에 뭐 받기로 돼있다? 미움 받기로 작정된 자의 계열, 이 두 가지 계열이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이걸 무슨 계열이라 하냐면 밑에 이걸 가지고 뭐라 하냐면 율법에 속한 자와 약속에 속한 자, 이렇게 되어 있죠.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에 속한 언약이 있고, - 두 가지 언약이니까- 이거는 약속이니까 새 언약이 있고.
새 혜택을 입을 족속이 있고, 두 가지 족속이 있다, 이렇게 되어있다 말이죠. 있는데, 특징이 뭐냐, 이게 중요합니다. 제가 아까 야곱족속에 속한 사람은 항상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지금 주위에 말씀 전체가 빙빙 돌면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잊고 말씀을 증거 하게 되어 있다, 했는데 그러면 예수족속의 특징이 뭐냐, 자기밖에 몰라요. 이건 목사가 되든, 장로가 되든 지옥 갑니다. 왜! 자기밖에 몰라요.
그래서 물어요. 왜 당신은 당신밖에 모릅니까. 그 사람들은 상당히 이성적으로 답변해요. 뭐냐면, 내가 태어나서 경험했던 경험들이 오늘날 나를 만들었다. 내 안을 자크 열고 쫙 쪼개버리면 그 안에, 내가 살았던 성장과정. 내가 살았던 고장의 환경, 문화, 이것밖에 모른 거예요.
한국에 태어난 사람이 알라스카를 어떻게 알며, 한국에 태어난 사람이 저 우간다의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요. 한국에 태어났기에 한국의 사정밖에 모른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내가 어떻게 공부하고 돈 벌고 장사하고, 그래 내가 이것만 알면 됐지, 뭘 또 아냐 이 말입니다. 내가. 그럼 묻죠. 그게 계시입니까? 그게 진리입니까?
‘나, 그거 관심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당신을 영생케 합니까?’ 그러면 ‘그것이 당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깨닫게 합니까?’ 난 그런 거 관심도 없고, 몰라요. 그러면 당신 어디에 관심 있습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는 살아야 된다는 그 사실. 어떻게 갈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살아야 된다는 거. 그럼 당신이 증거 하는 것이 뭡니까. 증거 하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거.
나는 ‘남은 죽어도 나는 안 죽어야지,’ 이것만 증거 하죠. 이 사람들 특징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거죠. 이점을 깊이 있게 들어가 볼까 합니다. 그래서 아까 그림을 다시 그리면, 여기 야곱이 있을 때 삼층천에 갔다 말입니다. 삼층천: 셋째하늘. 셋째하늘에 둘러싸였어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몸 밖에 있든지 몸 안에 있든지 모르겠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거에요.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관심이 없거니와, 내가 아는 것은 셋째하늘, 천국에 와있다는 사실 뿐이라는 겁니다. 이게 안개처럼 자신을 둘러싸여 있는데, 이걸 네 자로 뭐라했습니까? 말씀에 의해서 생긴 사건이니까 무슨 사건? <말씀사건>... 천국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한 말씀사건.
비슷한 예가 ‘변화산’이죠. 높은 산을 그리는 이유를 좀 있다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는데, 초막 한 채, 두 채, 세 채, 이게 누구용입니까? 베드로 자기용 아니지요? 이게 주로 뭡니까. 말씀이 일으키는 사건 속에 있을 때 특징이 뭐냐 하면, ‘나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는 이게 특이에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난 죽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이 날 용서했다면, 지금 천국 간다면, 내가 어떤 형편, 거지가 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목사가 설교하면서 ‘이 설교하면 몇 명 오겠나,’ 이건 말씀사건이 아닙니다. 이건 자기 밥벌이용입니다. 밥벌이용. 남이 죽든 말든 나만 살아있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말씀사건에 휘말려버리면 항상 쫙~잡아당기죠. 나는 언젠가, 내 인생도 무효가 된다, 그러면서도 ‘내가 태어난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 뜻이 있어 태어났다’ 이게 엿가락처럼 쭉~ 뻗어진 모습, 철로 위에 내가 놓여서 저 멀리와 이쪽을 한꺼번에 다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사실임을 증거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상사가 엉뚱한 것으로 나무란다. 그럴 때 갑자기 확, 분노하다가도 로마서 13장의,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 말씀사건.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달려있나니...’ 내가 달려들 이유 없다. 심판은 하나님께 있다. 옳고 그른 것은 주께서 아시겠지. 부부가 이야기 하다가, 먹는 것 입는 것 때문에 다툰다 말입니다.
다투다가, 갑자기 말씀사건이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니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참새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죽지 않는다(마6:26~32).’ 말씀이 딱, 생각나는 거예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것 때문에 창세전에...’ 이 말씀이 생각나더라 말이죠.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절망적이고, 좌절되고, 절망적이고, 낙담되고, 자존심 구기고, 예수 믿는다 해놓고 꼬락서니 좋~다, 이러다 하나님 영광 가리겠다,는 투로 자책하고 있다가 갑자기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주께서 하늘 양식으로 그 자녀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이렇게 자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문제예요.
또 이런 게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차를 운전할 때 앞차가 갑자기 스치는 것 같은데 미안하단 소리도 않고 도망친다, 입에서 대번에 배웠던 욕이 나오죠. 왜냐면 살았던 환경자체의 꾸러미 속에서 욕 하나 들었던 게 기억나죠. ‘에잇, X**' 욕한다 말이죠. 하다보니까, 갑자기 뭘 생각 하냐면, ‘아, 나도 성깔 있구나, 자존심 세구나,’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이 말이지요.
말씀사건에 의하면 ‘분노하지 마라’했는데, 나를 힘들게 했다는 이유 때문에 복수심이 발동, ‘너는 죽었다 이제...죽었어,’하는 발로심 들 때, 성령의 열매가 아닌 것이 깨닫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말씀과 연결되지 않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지금 그거는 쉬운 거고, 지금 어려운 것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거예요.
뭐냐면,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엎드리듯이, 그 말씀사건이 오늘날 주어지는데, 불신자 같은 경우에는 이렇습니다. 사람이 있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 뭐냐면, 자기 주변의 상황에 골몰하게 됩니다. ‘저게 나를 살릴까 죽일까, 저게 내게 이익일까 손해일까,’ 자기 주변의 상황을 자꾸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열두 살 때, 7세 때, 9살 때, 이 범위가...일곱 살 때 열두 살 때보면 참 철없죠? 엄마에게 김밥 안 해준다고 밥도 안 먹고 떼쓰던 생각나죠. 12살 때 휴대폰 안 사준다고 엄마에게 욕하고 달려들던 생각나죠.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19살 때 들었던 범위가. 스물일곱 살 때 군대 갔다 와서 보면 얼마나 철이 없느냐 이 말이지요. 이게...
엄마들 아기 아프면 어디 안 나옵니까. 교회 안 나오죠. 그런데 92세 되어가지고 손자가 교회가지 마란다고 92세 할머니가 교회 안 가겠습니까? ‘얘야, 나는 손자도 귀찮다, 하나님 섬길란다.’ 하고 가겠죠. 그런데 지금 막 결혼해서 아기 놓을 때는 예수도 안 보이고 하나님도 안 보이고 누구만 보입니까? 자기새끼밖에 안 보여요.
그만큼 인간은 자기 딴에 넓힌다고 넓혀봐야, 항상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는, 내가 중심에 있는 이런 범위가지고 성경말씀을 백날 해석하고 배워봤자, 자기 이득 되는 것만 따로 챙기는, 그런 부질없는 짓을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목사님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요...’ 하면 ‘압니다, 알아요’ 그게 자기에게 현실화 되지 않은 거예요.
왜? 자기는 아직까지 90이 안 넘어갔잖아요. 90이 안됐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이 90 돼야 죽는 법이 없어요. 스물여섯 살 때 죽을 수도 있다 말이죠. 하물며 그 죽는 것, ‘...죽이는 것도 하나님이요...’ 신명기, 사무엘상에 나오죠? 한번 찾아봅시다. 저는 이 말씀을 여러번 자주 해도 늘 기분이 아주 좋아요.
사무엘상2장에 보면, 2장6절, 다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 다음에 2장30절:『......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결국 무슨 뜻입니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누가 일으킨다? 죽이기도, 살리기도, 높이기도, 낮추기도, 누가 하신다? 여호와가 하는데...여호와가 하신다는데 대해서 그걸 존중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받들어 모시지 아니하고, ‘흥! 웃기네’ 이렇게 나오면 그건 뭐냐, 멸시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며는, 우리가 살고 죽고 강하고 이런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쓸 이유가 없고, 자유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뭐만 하는가. 직장에서 일할 때, ‘오늘도 살려주셔서 직장에 나왔다.’ ‘오늘도 일거리 주셔서 일하게 하신다.’ 가게에서 문 열고 손님 맞으면서, ‘주께서 보내신 손님이구나...’ 그런데 물건만 둘러보고 하나도 안사고 그냥 가는 것도 주의 뜻이다. 다음에 또 오시면 감사합니다. 웃으면서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만약에 두 시간 둘러보다 가면 ‘소금 뿌려라~’ 이게 뭐냐면 존중해야 될 사람도 사람이 아니고 뭘로 돼있다?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에 의해서 존중심이 없어진 거예요. 왜! 내 중심이니까! 오늘 마수(개시)벌이를 해야 되는데 오자마자 아침부터 두 시간 둘러보다가 나가버리면 오늘 마수벌이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현재 내가 보는 짧은 적용내에서 내가 힘들다는 느낌이 들 때, 그게 바깥으로 분노가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꾸 산으로 올려 보내죠. ‘시내산’ ‘변화산’ ‘모리아산’ 모리아산의 특징이 뭐냐면, ‘누가 내 대신 죽는다.’ 예요. 이렇게 현실과 뚝 떨어진 산 위의 불로 태움으로 말미암아, ‘산 위에서 밑을 보아라.’ 산 밑을 보면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자기밖에 모르지만 전체, 이것도 나중에 말씀사건에 의한 하나님의 배치에 불과합니다.
현재 우리 주변에 말씀사건이 항상 들끓어있어요. 마치 욕조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목욕탕 욕조 안에 들어있으면 뜨거운 물의 증기가 올라온 것처럼, 내가 어떤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데...저는 또 이렇게 표현해볼게요.
고무풍선 있죠? 고무풍선을 보면 막대기 모양의 풍선도 있어요. 질끈 묶어서 띄우죠. 어떤 풍선은...(현장 그림 모드: 여러 가지 풍선 모양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기린 모양으로 된 풍선도 있어요. 그림이 이상합니다만... 바람을 넣으니까 풍선이 되잖아요. 바람 들어가기 전에 땅에 놓으면 그냥 모양새가 편편하잖아요. 왜 이런 그림을 그리냐면,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말씀을 집어넣어버려요. 저주를 집어넣으면 예수가 되고, 축복을 집어넣으면 우리는 야곱이 되는 겁니다. 저주를 집어넣은 인간은 뭐를 해야 돼요? ‘신이시여! 왜 나를 힘들게 합니까.’ 맨날 신에게 저주 퍼붓는 일을 해야 되요. 신에게......
누가 이사야 8장21절 읽어봅시다. 이사야 8장21절:『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뭐 한다 했습니까. ‘저주 할 것이며...’ 하나님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저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이런 풍선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사람을 볼 때 어느 대학 나왔느냐, 재산 얼마냐, 직업이 뭐냐, 보지 마시고 당신의 ‘풍선 안에 어떤 말씀이 들어있습니까?’ 라고 묻는 쪽으로, 누구를 만나든지. 대통령을 만나든지, 국무총리를 만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그건 껍데기니깐. 껍데기에 불과하고 죽으면 이제 나이 90밖에서 죽으면 시체로 끝난 거고. ‘당신 안에 뭐가 들어있냐’ 말이죠.
당신 안에 야곱이 들어있나 예수가 들어있나 보라 말이죠. 뭐가 들어있나 확인할 방법은, 잘 나갈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 그거는 가짜고. 저런 불가능한 상황에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 나오는가 봐야죠.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살인자다. 신구약의 살인자가 여러 명인데 대표적인 사람을 이야기하면, 모세, 살인자입니다. 다윗, 다윗은 살인자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그 다음에 그 유명한 ‘사도바울, 여러 명 죽였습니다. 여러 명.
이 살인자가 천국에 간다. 이걸 뭐라 표현하겠습니까. 사람을 죽인 자가 천국에 갔다. 모세, 다윗, 사도바울 전부 다 천국 갔다. 여기에, 하늘의 뜻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도대체. 후라이드 치킨 선전에 보면 이런 선전이 있어요. ‘도대체 맛있어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라는 대목 나오잖아요.
사람 같지 않은 살인자. 다윗 같은 경우 절말 못됐어요. 모세도 사람 죽이고 들킬까 싶어 모래 밑에 숨었습니다. 이런 살인자가 천국 갔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이게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겁니까. 반성한다고요? 반성해봐야 한 순간밖에 안돼요. 반성하고 난 뒤에 지옥 간 거예요. 여기에 무슨 짓을 했냐, 이것이 오직, 야곱에게만 기적으로 오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고 돌아서버리죠.
사람을 죽인 죄인이 천국 갈 리가 없다. 사람은 착하면 천당 가고 못하면 지옥 간다. 사람이 죄지은 자가 천국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세상 사람은 단정하고 있습니다. 천구 가는 사람마다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네 선행으로, 네 행함으로 도저히 올 수 없단다, 이 사람아!
이 천국은 아무리 일평생 착한일 쌓아도 쌓아도 올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단다. 뭔가 하나님께서 해 주셨기 때문에 왔지 내 공로는 없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로 사건이 터진 거예요. 사람 많이 죽인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누굴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 말씀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는 그때부터, 내가 살인자요, 폭행자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했다고요.
이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저는 살인자요, 괴수입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안 되는 현상, 나 같은 인간이 천국 간다는 안 된다는 일이 저에게 터지고 말았습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이게. 누구도 안 된다는 사실. 저도 압니다. 내가 안 된다는 사실을. 그런데 주께서 무슨 짓을 했어요. 무슨 일을 벌였습니다. 십자가 말씀사건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하신 거예요.
오늘 고린도후서 12장을 아직 못 들어가요. 왜냐면 몇 가지 준비를 해야 되요, 너무 어려워서. 몇 가지만 더 설명하고 본문 들어가 봅시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부활이 아니면 우리에게 믿음이 생길까요, 안 생길까요. 예수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주시는 분으로 오셔서 성령 주심으로써 미리 왔잖아요.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여기서 불신자들은 뭐라 하냐면 사람에게는 믿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외부의 어떤 속한 것과 관계없이 믿을만하면 믿을 능력이 자동적으로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나는 버스 운전사를 믿는다.’ 믿으니까. ‘나는 비행기 조종사를 믿으면서 비행기 탄다.’ 믿으니까. ‘나는 지금 태평양 건너 미국에 있는 걸 믿는다.’ 왜? 지는 미국에 있으니까.
여러분, 이런 믿음은 십자가 부활 없이도 믿을 수 있는 거예요. 나는 3+5는 믿는다. 백날 믿어봐 천국 가는지. 십자가 부활 없이도 되는 거예요. 십자가 부활 모르면 믿어지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믿음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은 믿음입니다. 그게 행함의 일종인데, 성경에서 하나님이 천국에서 받아줄 믿음은 나에게 없는 믿음이 나와야 되요, 어리석은 십자가를 믿는 믿음.
어리석은 십자가를 믿은 믿음을 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믿음으로 변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믿음 없는 거예요. 이제 고린도후서 12장 들어갑니다. 왜? 이 믿음이, 십자가 부활을 통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사도바울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버려요. 그게 12장에 뭐냐, ‘환난’입니다. 환난. 그리고 12장에 나오는 ‘가치관’이에요.
나는 선풍기를 믿는다, 선풍기 너무 좋아! 이렇게 하다가 선풍기 꺼지는 순간, 벼락이 쳐가지고 나를 만약에 졸도시켰다면 ‘나는 선풍기 미워!’ 이렇게 합니다. 우리 형이 어릴 때,
잡채를 먹고 채한 적 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잡채를 안 먹어요. 기겁을 해요. 저는 세 가지를 싫어해요. 오리고기, 곱창, 개고기 먹어보려고 수 십 차례 시도했지만...며칠 전에 누가 오리고기 사와서 훈제고기 맛있게 먹으라고 하는데 가고난 뒤에 문 다 열어놨어요. 역겨워서.
세 가지 실패했습니다. 오리고기, 곱창...저기 가가지고 곱창 먹었어요. 억지로 먹었어요. 개고기하고. 60대에도 싫어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는 그게 있어요. 냄새 때문에 그런지 이상하게 그게 안 받아요. 받지를 않아요.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가시에 갇혔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빼달라 말이지요. 빼달라...나는 이런 것 믿기 싫습니다. 왜 세 번씩이나 빼달라고 했죠.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7~9)』
사도가 한 말 글자로 써볼게요. ‘참 하나님 못됐어,’ 예수 믿는 사람은 믿고 난 뒤에 ‘불편’이 아니고 ‘편한’ 으로 해 주셔야 되는데 ‘편한’이 아니고 뭘로 만들었다? 불편한 게 뭐냐 하면, 내가 원치 않은 이질적인 요소. ‘내가 원하지 않은’ 내 소유 같으면 당장 뺄만한, 그 가시가 내게 있는 거예요. 빼달라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 하신 말씀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입니다.
그런데 그 가시를 뭐라 하냐면, 앞에 뭐라 돼있죠? <사단의 가시> 악마의 가시다 말이죠.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스스로 자고하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죽이시고 살리시고 높이시고 낮추시고 모든, 하나님이 하신 것을 존중해주기 위해서. 내 성질 같으면 와장창 빼버리고. 성질 같으면. 가시고 사단이고 빼고 싶은데, 이미 풍선인데 내 맘대로 안 되는 거예요.
주께서 내 속에다 야곱의 말씀을, ‘너는 축복받아야 돼, 구원받아야 돼,’ 말씀을 쏙 집어넣어 놨는데 그 속에 뭐냐, 사단의 가시가 척 들어앉는 거예요. 그것조차 은혜가 된다 이 말이죠. 이게 내 안에서 말씀사건이다 말이죠. 이렇게 되니깐, 다시 써볼게요.
십자가, 부활, 승천, 주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성령세례, 성령 부어주는 걸 성령세례라고 하죠? 성령세례, 그래서 사도바울에게 믿음이 생겼다면 믿음의 원 주인이 뭐냐 하면 십자가 중심,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가 믿음 있으면 믿는 자는 주님께 코 꿰어가지고 코스를...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서 부활, 승천 하늘나라 올라가는 것. 그 코스를 그대로 밟게 됩니다.
근데 믿음이 있으면 십자가로 데려가죠.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내가 어찌하든지 죽으심을 본 받아,..’ 본받을 것이 어지간히 없죠? ‘내가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게’하죠.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죽으심을 본받아, 한다는 거죠. 이게 뭐냐면 전부다, 첨에 얘기했듯이 ‘말씀사건’이다 말이죠.
풍선 훅, 불면 나로 하여금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러서 하늘나라 승천하도록, 휴거되도록 조치해주신다 이 말입니다. 이게 내 얘깁니까? 우리 같으면 이런 게 아니죠. 우리 같으면 제물 되어가지고 선교헌금 많이 내고, 큰 병원세우고, 그럴싸한 종교적인 선행, 그쪽을 노렸을 거예요.
우리의 껍데기는 죽고 난 뒤에는 뭐가 됐습니까. 무효가 되었죠. 전부 다...얼마나 잘났느냐, 얼마나 인물이 좋았느냐, 다 무효에요 무효. 무효고 남은 건, 사건만 남습니다. 사람에게 죽는 것은 정하신 일이요, ‘정하신 일’이라는 그 말씀이 바로 너를 이긴 자다. 훅! 불면 들어가는 게, ‘너는 반드시 죽게 돼있어’ 내가 죽는 것은 말씀 때문에 죽는 거예요. 말씀 때문에 죽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말씀이 훅,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안식이요 편히 쉬는 거다. 이 말입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내 안에 뭐가 작용하는가, 이게 중요하지, 껍데기, 내가 지금 거지인가 창녀인가 안 중요해요. 내 안에 뭐가 있느냐가 중요한 거지.
자, 그러면 7절 봅시다. 사단의 사자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사단과 성령인데, 차이가 있을 거 아닙니까. 사단이 하는 일은 뭐여요. 사단의 사자가 들어가서 빼달라고 세 번씩 기도했다면 사단의 사자가 노리는 것은 뭘 노리냐 하며는, 바로, 말씀을 날려 보내고 누구만 남아요. ‘나’ 나만 남죠.
결국은 사단은 뭐냐면, 자가에서 죽은 믿음, 소망, 사람 이것을 휙, 날려 보내는, 매일같이, 말씀 그거 믿지 마라, 성경책 그거 신학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네가 할 짓이 아니다. 너는 그저 장사하는 사람이니 공부하지마 이거, 목사가 다 이야기해준다. 할 필요 없어. 이런 식으로 말씀과, 하나님의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것들 돈도 안 되는 걸 왜 믿고 있나, 하고 자꾸 해쳐 보내는 거예요.
이걸 떠나보내서 ‘믿을넘은 너밖에 없어! 성경은 구라야 구라,’ 지금 많은 99퍼센트의 목사들이 성경은 구라다! 거짓말이다! 어떻게 당나귀가 말을 하느냐, 있을 수 없다. 합니다.
많은 의사들이 얘기하는 것은, 인간의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건 이건 편두엽에서 하는, 신경전달 물질에 의한 활성화다. 두뇌세포의 활성화가 구조화되면 이게 정신의 활동이 되고 정신활동 속에 믿음 소망 사랑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사랑도 어떤 물체에 (예를 들어 로봇 같은)칩만 넣으면 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칩 넣으면 믿음 소망 사랑도 다 할 수 있어요. 현대의학은 지금 그걸 연구하고 있어요. 믿음 없다하면 비밀 번호 바꾸면 돼요. 믿음 생기도록.
* ‘A I’라는 영화에 보면 로봇에 ‘사랑’을 입력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사랑을 입력해 예상 못한 사건이 전개되는 영화도 있음-녹취자.
그러니 그걸 사도바울이 모르겠어요? 사도바울도 그렇게 알던 사람이거든요. 주를 만나기전까지는 주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의미를 몰랐습니다. 왜! 자기중심의 시야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안목 주님의 시선을 받아본 적 있습니까?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안목과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볼 줄을 몰랐었어요.
그냥 자기 하는 일만 ‘괜찮다. 정당하다’ 이랬죠. 그런데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지금 나는 잘하고 있다, 못하고 있다, 자체를 생각하면 안돼요. 이것 자체가 사단의 사자가 자꾸만 관심을 ‘너 완벽했어,’ ‘너 오늘 죄 지었어? 안 지었어? 너 죽었다 이제,’ 자꾸 나에 대해서. -다시 할게요 - 다윗과, 모세와, 사도바울의 특징이 뭐라 했습니까. 전부 다 살인자죠?
이 살인자가 천국 갔잖아요.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하나님이 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습니까. 이들에게 스스로 자책하라 했습니까? 아니에요! 이 사람들보고 ‘정신 차리라’했습니까? 아닙니다. 주께서 이걸 쫙~ 잡아당겨 보니까, 창세전부터 이들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이에요. 그걸 이사람들이 비로소 예수님 만나고 나서 성령 받아 안 거지요 이걸.
다만 알았을 뿐이에요. 그렇다고 착한 일 하는 게 아니고, ‘아하! 그렇구나!’ 하고 말씀이, 말씀대로 진척되어 가는구나, 이걸 눈치 챈 겁니다. 주일날 헌금 많이 하고 전도하고 한 게 아니에요.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그걸 눈치 챈 거예요. 그러니 현재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성경, 이거 관심 없어요.
내가 목회해서 영역을 얼마나 넓혔느냐, 관심이 자기에게 있다니까요 자기에게. 이게 사단의 종, 사단의 사자들, 사단의 메신저들이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성경은 구라고, 성경이 구라지만 이거 사람들 돈 벌 수 있기 때문에 자꾸, ‘네 자신을 포기하면 안돼, 너는 잘난 존재야!’ ‘넌 이겨야 돼, 넌 망하면 안 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완벽해야 돼,’ 훌륭함, 우리의 장기, 위엄 여기에 대해서 자꾸 압박을 가하듯이 사단의 메신저들, 사단의 사자들이 하는 짓이에요.
기도 많이 하는 수녀님이(이해인) 돼지도 안 걸린다는 돼지독감 걸렸어요. 돼지 독감 걸려서 죽은 돼지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었어요. 돼지도 안 걸리는 돼지 독감에 수녀가 걸렸잖아요. 그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이! 동료 수녀들 뭐라 하겠습니까. 그거 다 신부들에게 ...
사단의 메시지가 자꾸 작용하는 거예요. 다윗과 모세가 살인자도 구원받은 것은 바로, 예수님의 예정된 예수님의 피 때문에 그렇습니다. 용서하심이죠. 그걸 확인하는 게 십자가 부활이다 말이죠.
‘사도바울아!’ ‘예!’ ‘네가 용서 받은 거 어디서 나왔는지 알았나?’ ‘몰랐어요.’ 십자가가 그것이다. 십자가 피가 부활을 통해서 들어오니깐 사도바울은, 아!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구나, 라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주께서 사단의 가시를 주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자기에게 신경 안 씁니다. 처음에 모르고 기도했다가, ‘너는 네 몸이 아니고 너는 풍선이야,’ 휙~! 하고 말씀 들어가 있어. 할 때, ‘아...내가 약한대서 강함이구나,’ 이걸 비로소 아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약하다. 기준이 뭡니까. 국민 소득이 얼마나 높은데 약한 겁니까. ‘한국에서 백수들이 트레이닝복만 입어도 아프리카에서는 중산층이다,’고 우리가 얼마나 돈을 벌어야 스스로 만족하겠습니까. 한도 끝도 없어요.
욥이 재산 다 뺏기고 자식 죽어도 그래도 몸은 하나 튼튼했잖아요. 나중에 ‘몸 튼튼’ 조차 다 없어지니까, ‘하나님이여! 왜 저를 아프게 합니까,’ 그때 하나님을 원망했잖아요. 나중에 은혜를 깨달아 보니까, ‘나는 그저 풍선에 지나지 않는다.’ 고난주는 것도, 죽이고 살리고 부하게 가난하게 전부다 누가 한다? 이걸 하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PD다. 볼륨 올리고 싶으면 올리고, 내리고 싶으면 내리고, 카메라 세 대 있는데 1번 카메라 끄고 2번 카메라 비추는 거예요. 엑스트라 주제에 맨날 나만 비추라 할 게 아니라, 너는 일찍 죽어야 되고, 3번 카메라! 이건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2번 카메라! 이거 부자 만들어! 저거 가난하게 만들어! 이거 누구 소관입니까. 하나님은 프로듀서예요. 피디, 감독이에요. 사도바울이 안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그냥 껍데기, 풍선에 불과한데 창세전에 예정된 대로 그 코스대로, 아무 하자 없이 천국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시시때때로 원망하고, 뜻대로 안 된다고 주 앞에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변하여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자신을 맡김으로써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있음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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