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9장 27-28절 제목 : 심판 사건
히 9:27-28 (심판 사건)
이름 : 이근호(IP:117.55.140.127)
본문 : 히브리서 9장 27-28절
제목 : 심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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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9-05-03 16:33
히9장27-28(심판사건)-heb090503
심판 사건 (야외 예배)
2009년 5월 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 27-28
(히 9:27, 개정)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8, 개정)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한국 교인들에게 있어 제일 심각한 문제는, 구원되지도 못할 교회에 다닌다는 점입니다. 구원시켜 줄 의사도 없고 그럴 마음이 없는 교회를 세우고 그 안에 자신이 담아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교회에서 나올 생각을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그런 교회 안에는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사건들이 그동안 누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만든 사건들을 포기 못하는 겁니다. 이는 곧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겠다는 평소의 성향을 드러낸 것입니다. 구원이란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창안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준비하시고 실시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거대한 한 사건에 휘말려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유일한 현실입니다. 그 사건은 바로 ‘마지막 심판’이라는 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쏟아낸 여파들이 오늘날 이 세상의 변화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깔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눈치 챈 자들이 관심사는 이것입니다. “이 저주 받을 세상에서 어떻게 뼈져 나올 수 있는가?”입니다.
심판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 구원에 관해 다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심판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면, 첫째 왜 우리 인간이 벌을 받아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어떻게 이 벌에서 제외되는 자들이 생겨나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첫째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즉 왜 모든 것이 끝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겁니다.
‘끝’이 있다는 말은 그 ‘끝의 사건’이 중요시 되기 때문에 남의 인생, 남의 것이 부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내가 가진 것, 내 인생을 부러워할 수가 없다는 말도 됩니다. 지금도 경쟁과 경쟁으로 나날이 보내는 세상살이에서 나의 것도 부럽지 않고 남의 인생도 부럽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분명 최후의 사건에 주목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이 부럽지 않다는 말은 자기 목숨도 부럽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쥐고 있다는 것은 곧 쓸데없는 쓰레기를 한 움쿰 쥐고 사는 것이 됩니다.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것을 마치 보석함처럼 붙잡고 있는 바가 됩니다.
심판 사건의 특징은 우리 모두를 평범하게 만들어 버리는데 있습니다. 즉 우리가 내세운 그 어떤 사건도 심판 사건 행정실에서는 서류 접수 시켜 시켜 주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건’이라고 자부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에게만 의미를 주는 그런 사건은 사건으로 취급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심판 사건에서 파생된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지막 사건은 벌써 이 세상의 바닥을 타일처럼 촘촘히 깔아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모든 죽은 자는 다 하찮은 자로 되돌아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대 심판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관 대형 스크린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옛날 시골 극장의 스크린은 천조각이었습니다. 그 천조각이 이어붙여서 대형 흰 스크린을 만들어 걸어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화 상영을 되면 각 천조각마다 영상들이 닿게 되는데 그 닿은 영상들이 모여서 그대로 주연 배우의 얼굴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그대로 모습과 하시는 일을 보여주는 각기 작은 천조각들입니다. 이 천조각 위에 예수님이 벌리시는 심판 사건이 투영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름대로 어느 처소에 열심히 산다는 것도 실은 하나님이 유발시킨 심판 사건의 일부로서 사건화된 것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인간은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주신 사건이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어항 속에 금붕어 7마리가 들어 있다고 칩시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경쟁하고 있는 차에 갑자기 어항이 흔들린다면 서로를 향해 누가 흔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밖에서 어항을 흔드니, 그 어항 속에 물도 같이 흔들리고, 물이 흔들리니 그 7마리의 금붕어도 같이 흔들리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존재는 여지없이 분산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 흔들어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안목과 시선을 갖기를 바라는 신호입니다. 이 시선은 심판을 시행하기 위한 시선이기에 이 시선을 가져야만 생명과 저주가 구분되어 보입니다.
즉 성도란 바로 하나님이 시행하시는 사건 안에서 무엇이 생명이고 무엇이 저주인가를 알아보는 시선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로 종말상황 한 가운데 빠져있는 자가 됩니다. 이들은 모든 세상 변화를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발생시키는 약속 사건의 물결이라고 보고, 약속된 그 지점에 누가 나타날지, 누가 나타나지 못할 지를 압니다.
그렇다면 이 대규모 심판사건은 과연 무슨 기준에 의해서 진행될까요? 여기에 결정적인 사건이 이미 이 세상에 터져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7:30-31에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2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구원해 내는 사건으로 ‘피’를 흘렸습니다. 자신의 피이십니다. 하늘에 계셨던 분의 피가 이 땅에 내려주심으로서 그 피로 인해서는 천국에 가게 하셨습니다. 피의 능력입니다. 이로서 이 ‘피의 능력’은 심판 사건을 이기는 유일한 사건으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즉 성도는 피의 사건이 능력이 되어서 우리 안의 사건으로 들어와서 계속 우리 내부를 삼켜버리는 능력이 발휘되는 자입니다. 저주와 피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진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 ‘피’가 들어온 자는 곧 세상에 살면서 그 본인이 사건화됩니다. ‘피의 증인’으로 사건을 유발하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자신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서 누군가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심판사건을 일으킨 당사자 하나님께서 그 사람 속에서 계셔 세상을 향해 심판 소식을 전하는 사건을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성도 전체에게 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치 천조각 위에 주연 배우의 한 얼굴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서 성도와 다른 성도들은 비록 어릴 적부터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지금 사는 환경도 다르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같은 핵심을 갖고 있기에 말이 통합니다. 즉 “나는 지금 복음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습니다”는 고백 말입니다. 이런 성도들로 인하여 구원 사건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와서는 안되는 자들을 배척하는 식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즉 오늘날의 심판사건은, “너는 구원될 수 없어”를 외치는 피 복음 사건으로 발휘됩니다. 즉 피가 없는 자는 심판을 면제 받을 수 없고, 피 없는 자는 이유도 모르는 채 자꾸만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 사건을 모독하는 식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끝을 아는 인생과 끝을 모르는 인생이 이렇게 차이납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복음 사건을 일으키는 거름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이라는 나무만 자라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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