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2:30-35 (못된 처녀)
렘 2:30-35 (못된 처녀)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예레미야 2장 30-35절
제목 : 못된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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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4-29 20:51
못된 처녀
2009년 4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30-35
(렘 2:30, 개역) 『내가 너희 자녀를 때림도 무익함은 그들도 징책을 받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렘 2:31, 개역)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흑암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연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않겠다 하느냐』
(렘 2:32, 개역)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계수할 수 없거늘』
(렘 2:33, 개역)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렘 2:34, 개역) 『또 네 옷단에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음을 인함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로 너를 책망함을 인함이니라』
(렘 2:35, 개역) 『그러나 너는 말하시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치 아니하였다 함을 인하여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은 비록 세상에서 통용되는 용어같지만 그 담겨 있는 내용은 인간 세상에서 아무리 용 써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말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내가 피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섭습니다.
요한복음 17:2에 보면,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오로지 ‘예수님이 영생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한 조치들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움직입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변화도 다 예수님에서 나온 권세입니다.
즉 하나님의 원칙은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천국에 넣어주시는 원칙도 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국에 넣어주실 때는 그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교체시키는 방식으로 넣어주십니다. 마치 튀김 고추요리와 같습니다. 길죽한 고추의 속을 잘라서 그 안에 들어있는 매운 고추씨를 다 들어내고 거기에다 잡채와 쇠고기 다진 것을 촘촘히 넣고 튀기는 요리말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기대하고 고대하고 희망하고 욕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들어내고 거기에다 하나님이 담고자 하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담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 활약한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이미 광야 후 시대입니다. 옛날 그들의 선조들이 겪었던 광야를 겪지 않는 세대들입니다. 이들은 광야를 모릅니다. 그들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온통 세속적인 경향들입니다. 즉 자기 힘으로 자기 생계를 꾸려나가는 그런 세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모세같은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내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맞는 광야 형식을 적용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를 유감없이 다 드러내었습니다. 즉 인간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지 새삼 죄를 지을 때만 죄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속 알맹이들이 유감없이 폭로되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 그들이 소망하는 것이 전혀 달성되지 못하게 만드는 그 환경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저주없이 대들고 반발했습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그들이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입장으로 보시는 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본래의 자리를 ‘처녀’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본인이 처녀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처녀’로서 상대하고 싶어하신다는 그 마음을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처녀’, 혹은 ‘신부’라는 인간들의 용어는 하나님만이 이룰 수 있는 내용을 담게 됩니다. 그 내용이란 다름아닌, ‘오직 신랑만 쳐다보며 존재함’입니다.
즉 처녀의 순결함은 처녀 혼자만의 순결함이 아니라 신랑 앞에서 신랑만 쳐다보고 즐거워하고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그 관계성으로 인한 순결함입니다. 광야에서 진정 이스라엘이 구원되려면 자신의 불가능성에 대해서 짜증낼 것이 아니라 이런 못난 자신들을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에 눈에 뜨여져야 하는 겁니다.
사람에게 있는 죄란 말씀이 없이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진행된 모든 상황들은 전부 말씀의 연속이었습니다. 만나 내림이 이것을 뜻합니다. 즉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비로소 인간은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진정한 교회란 오로지 말씀만을 전해서 그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하실 때 다른 조건들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이 죄인이라는 그점과 관련해서 자신의 자비와 연결시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준비된 용서. ’준비된 의‘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말씀이 있는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그 전에 세상에서 자신을 잘난 존재로 만들어준 모든 조건들은 잊어야 하는 겁니다.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처녀가 패물을 잊지 못한다는 말은 오로지 신랑이 건네준 것이 신부 자신의 가진 것보다 더 고맙게 느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 지금 유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죄악된 본성대로 움직이면서 자신의, 포부와 야망만 불태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이런 환경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못 벗어나겠다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을 다 알려주는 곳이 광야였습니다. 거기서 충분히 현재 인간의 처지가 이러하다는 것을 익히도록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선조들과는 달리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때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에게 대드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다가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가버립니다.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자리가 아니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자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자신이 힘드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한지를 아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지를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미 다른 자리를 깔고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력으로 세상에서 헤어나오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현장을 광야같은 현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인간은 뭘해도 죄만 나온다는 사실을 알라고 선지자를 보낸 것입니다. 이미 그들에게 있어 성전은 흉가처럼 변하고 말았습니다. 말씀 전파가 고장 난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죄가 뭔지를 모르는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들 곁에 하나님께서는 모세 같은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신랑이 건네 준 그 패물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기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진정 신랑이 자랑스럽게 믿는 신부는 더 이상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 속에 하늘이 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듬뿍 들어있는 진정한 천국 갈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앞에서 감격하여 더 이상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 순결한 처녀가 되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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