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4월 24일 강의 디모데후서 2장 14절
광주 4월 24일 강의 디모데후서 2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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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24 논쟁 : 율법으로 구원 vs 복음으로 구원
관리자(IP:125.♡.2.45)
09-04-2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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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17 12:40
광주 강의(09. 4. 24) 48-1
디모데후서 2장 14절부터 할 차례인데, 이 14절의 내용은 논쟁입니다. 논쟁이란 반드시 상대가 있기 마련인데 무엇과 무엇의 논쟁인가 하면, 율법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과 복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의 논쟁입니다. 이 둘은 섞이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섞어버려서 문제가 되지요. 서로 섞어서 복음조차도 율법으로 만들었지요. 율법은 한 마디로 하면 ‘행하지 아니하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한 자 본인이 구원 받아요. 율법을 옆 사람이 행해서는 안 돼요. 행한 내가 그 행한 것 때문에 내가 구원 받아요. 만약 행한 실적이 없고, 시원찮다면 구원 못 받습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교회에서 목사가 십일조를 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십일조 안하면 그 안한 사람은 복을 못 받고 구원 못 받는다는 식이 되는 겁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한국교회에서 율법일까, 복음일까를 가리는 방법이 뭐냐 하면, 행한 자만 구원 받을 때 이것이 바로 율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행함이 주사기처럼 내 속에 침투되는 거예요. 내 안에 예수님의 행하심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계속해서 쿡쿡 찔러주는 것. 나의 행한 것은 묻지도 않으시고 주님의 행하심이 내 속에 스며드는 것.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피자에 치즈가 녹아들듯이 나에게 예수님의 공로가 스며들면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이렇게 스며들 때 이것이 하나의 사건으로 오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은 자신이 율법을 지켜서 자기 사건을 따로 만들어야 됩니다.
사건이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 잘못된 사건은 뭐냐 하면, 내가 만든 사건. 이것은 구원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사건인데 이것은 구원 됩니다. 내가 만든 사건은 왜 구원이 안 되느냐 하면, 이것은 나를 확인하는 거예요. “역시 나는 훌륭해!” 내가 잘났음을 확인하는 사건이 내가 만든 사건인데, 주님이 만드신 사건은 뭐냐? “역시 주님은 사랑이 많아! 주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야.” 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건입니다. 주체가 주님께로 갈 때 주님께서 일으키는 사건이고 주체가 나에게 쏠릴 때 내가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주님이 일으키는 사건은 없고 주로 교회에서 철야기도하면서 내가 원하는 사건을 기다리고 소망할 때 그것이 바로 내가 일으킨 사건이잖아요. 기도 끝나고 난 뒤에 “역시 나는 기도를 잘 해. 내 기도는 응답을 잘 받아.” 이렇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구원 안 되는 사건입니다.
본문에서의 논쟁이 바로 이런 논쟁입니다. ‘율법으로 구원 받는가, 복음으로 구원 받는가?’ 이 논쟁이 쉽지가 않아요. 디모데전서에 보면 율법 선생이 와서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반대했지요.
율법과 복음이 논쟁이 붙었다고 할 때 누가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가? 율법입니다. 터줏대감이 텃세를 하는 거지요.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율법이 있었어요. 바울도 사도가 되기 전에는 율법주의자였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율법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율법을 행한 자만 구원 되고, 율법에 실적이 없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받지요. 이게 기정사실화 된 겁니다. 이게 종교니까. ‘종교에는 법이 있고, 법을 지킬 때 구원 받는다.’ 이게 상식으로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었어요.
만약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습니다.’라고 하면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멘을 연발한단 말이지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라고 나오는데, ‘이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고 이 말씀대로 안 살면 저주 받습니다.’ 라고 하면 모두가 ‘아멘’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생각조차 안 합니다. 왜? 지극히 당연하니까.
그런데 사도가 여기에 복음을 집어넣었어요. 그렇게 되니까 그동안 ‘내가 말씀 지켜서 복을 받는다.’고 하는 이것과 섞일 성질이 아니고 서로 대립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신은 계시고 인간도 있는데, 신이 인간에게 법을 줬어요. 그 법은 거룩한 법인데 인간은 더러운 죄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법을 지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신께서도 너를 인정해 줄 것이다.’ 이게 율법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누가 이의를 겁니까? 이건 우리 상식에 딱 맞는데.
그런데 복음은 뭐냐 하면,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두더지처럼 자꾸 고개를 내미니까 복음은 우리를 율법 밑에다가 집어넣어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을 죄인이 됩니다. 죄인이 율법을 지켜서 뚫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복음이 두꺼운 율법 층을 뚫고 이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를 건져 올리는 이 방식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율법이 주어지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복음이 오니까 우리를 오히려 율법 밑에다 집어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이 오는 것을 기다리란 말이죠. 마치 겨울에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아직 봄이 멀었는데 얇은 옷 입고 다니다가 감기 걸리지요. 봄이 오기를 기다려야지요. 이처럼 복음이 오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 논리에 의하면 여기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나의 존재가 대단한 것을 드러내는 존재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를 율법 밑의 지하실로 집어넣어버리면 이것을 뚫고 나오는 것은 내 존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사건이 파고들어오면 그 사건의 흔적이 있겠지요? 율법을 뚫고 찾아온 사건. 이것이 복음인데, 이 복음은 ‘죽으심 + 부활’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우리를 지하실로 집어넣으면 우리는 죽었는데 영으로 말미암아 살았다는 이 과정을 거치는 거예요.
우리가 죽을 때 왜 죽는가? 두꺼운 율법 층을 보게 되면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죽으시고 살아나신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죽음마저 통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 가야될 인간인데 이미 그것을 통과해 버린 것입니다. 뭔가 통과한 게 있어요. 죽어야 될 저주와 더불어 다시 그 저주마저 살려내는 그 능력이 우리 몸에 와버리면 나라는 존재는 사건, 사건, 사건 ----
나라는 존재를 토막을 내고 잘라버리면 그 하나하나가 사건이 됩니다. 산 낙지 요리할 때 요리하는 아주머니가 달인인데 손으로 낙지를 쫙 훑으니까 낙지고 놀라서 멈칫하는 순간 재빠른 칼질로 낙지를 토막을 내니까 그 한 토막, 토막이 잘려진 채 움직이는 거예요.
이처럼 주님께서는 내가 존재가 되어버리면 우리는 자꾸 자기 존재가 ‘대단하다. 내 존재는 이 정도 수순이야.’ 자꾸 남과 대조하고 비교해서 자기 존재를 껴안으려는 본성이 있어요. 그런데 복음의 사건은 그러한 낚지를 칼로 난도질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산상설교처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을 내일 염려할 것이요 오늘 염려는 오늘로 족하다.’ 왜? 내일과 오늘 사이에는 난도질하는 칼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를 내 존재가 살아있다고 보지 말고 주께서 일으키는 하나의 사건으로 보자는 말이지요. 그 정신이 바로 주기도문의 정신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루분의 양식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용할 양식을 사건으로 보고 또 연달아 사건2, 사건3이 뭐냐 하면, 우리 죄를 용서하는 사건이 일용할 양식을 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용서가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오늘 아침에 밥 먹었잖아. 그 점에 대해서 고맙습니다. 아니 그 점에 대해서 고마우면 안 되지요. 일용할 양식(사건)을 주는 그분께서 뒤에 우리 죄를 용서까지 하셨단 말이지요. 그 다음 사건이 뭐냐? 이제는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사건이 되게 하옵소서. 내가 잘라진 낚지가 되게 하옵소서.
만약 내가 오 목사님을 용서한다면 이것은 내가 용서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칼질해서 토막 난 주님의 사건이 오 목사님께 사건으로 다가가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있지요? 그 비유의 핵심이 뭐냐? 첫 번째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두 번째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지요. 세 번째 사마리아인과 강도질 당한 자가 만났어요. 이 해석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요. 왜 간단치가 않은가 하면, 남이기 때문에 그래요. 제사장에게 강도질 당한 사람은 타인입니다. 자기 일에 바빠요. 타인이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냥 간 거예요. 레위인에게도 강도질 당한 사람은 타인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마리아인은 이 만남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나의 존재가 어떤가가 아니라 주께서 지금 나에게 시키는 사건이 뭐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 속에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면 강도질 당한 사람은 남이 아니지요.
화평교회의 경우에는 성도들이 서로 직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그렇지요. 달라도 복음이라는 사건 때문에 개인의 개성이 의미가 없죠. 김 집사님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 항상 오해를 받아요. 뭐냐 하면, 집사님은 무슨 이야기를 할 때 복음이란 프리즘을 통해서 (하나의 토막 난 사건으로) 이야기하는데, 상대는 ‘너는 뭐 잘났노?’ 이렇게 받아들여요. 그래서 ‘나도 너보다 결코 못지않은 존재야!’ 이렇게 나와요. ‘그래, 네가 성경 좀 아나? 나는 잘 모른다. 그렇다고 네가 날 무시하나? 너라는 존재나 나라는 존재나 다 같은 존재인데 네 존재는 대단하고 내 존재는 무시하나?’ 이렇게 나온다고.
성도는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아니란 말이지요. 존재와 존재의 만남에 대해서 디모데후서에는 논쟁하지 말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으로 이야기하는데, 율법이란 것은 반드시 율법을 행한 본인이 구원 받아요. 자기가 율법 행했는데 자기는 구원 못 받고 다른 사람이 구원되는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법은 없어요. 율법은 어디까지나 개인 챙기기에요. 지킨 본인만 구원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 거예요.
그러나 사건은 그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점령당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2장 26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여기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에 의해 점령당한 거예요. 사건에 점령당하면 존재도 사건화 되어버려요. 점령당했는데 ‘내 존재는 끝까지 버틴다.’ 이런 존재는 없어요. 점령당하면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이것을 ‘사로잡힌바 되어’라고 한 겁니다.
사건이 시키는 대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마8:9) 누가 한 이야기입니까? 백부장이 이야기했어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놀라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어요. ‘너와 같은 자가 천국 가고, 소위 율법 지킨다는 자는 전부 지옥에 가서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지옥 가고, 너와 같은 인간만 모여서 천국 간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천국은 주님의 사건으로 가기 때문에 그래요. 그 사건을 백부장은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자기 인생에 자기 주체가 없어요. 그야말로 사로잡힌 거예요. 그래서 주님 시키시는 대로 할 뿐입니다. 왜? 어차피 나는 두꺼운 이 율법 층을 못 뚫으니까. 만약 성경 구절 한 구절 뚫었다면 다른 구절은 더 힘들어요. ‘온유하라’고 해서 온유하면, 다음에는 ‘화평하라’는 말씀이 있고, 그 다음에는 ‘형제 우애’가 있고. 이렇게 층층이 있어서 뚫지를 못합니다.
계속 보면 ‘처나 자식도 버리고 주를 따르라.’고 했는데 그 말씀을 누가 지킵니까? 이 말씀 지키면 내 존재가 남에게 욕을 먹는데 지킬 수가 없지요. 그런데 내 존재가 아니고 사시미 칼에 난도질당해서 하나의 사건화 되면 존재가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게 뭐가 이상해요? 사로잡힌바 되었는데. 이게 자유인입니다.
사람이 존재를 생각하면 자꾸 자기 존재를 껴안으려고 해요. 사수하려고 한다니까. 뭘 해도 자기를 변명하고,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은 정당한 것이고,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자기가 보호하고 감싸고 지킴으로 말미암아 살아서도 복 받고 죽어서는 천국 가려고 시도하는데,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자입니다.
알랑 바띠유라는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존재는 법이다.’ 법이 본드처럼 뭉치게 되는데, 법이 있는 곳에 반드시 존재가 있어요. 법은 존재를 겨냥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법을 지켜서 자기 존재를 건전하고 괜찮은 존재, 훌륭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하지요.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해서 우리를 살리는가? 이것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그냥 “믿습니다.”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우리가 삽니까?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우리가 삽니까?
[황산벌] 영화를 보면 사투리로 욕을 하는데 못 알아들어요. 왜냐하면 서로가 존재기 때문에 전라도 말로 욕을 해도 경상도 사람은 못 알아들어요. 전라도는 만날 ‘거시기’라고 해요. 영어로 번역하면 something 이거든요. something의 내용이 없어. ‘거시기가 거시기다.’고 하는데, ‘거시기’가 뭔데? 서로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서로 지역만 달라도 존재와 존재가 소통이 안 되는데, 화평교회 교인들은 사건화 되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해도 잘 소통이 되는데, 이것은 바로 사건이 존재를 부정하면서 다가오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돼요.
아까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했는데, 사마리아인이 ‘나는 사마리아인이고 저 사람은 유대인이니까 상종하지 않겠다.’ 이런 존재와 존재의 비교가 없지요. 왜냐하면 저 강도질 당한 사건은 바로 내가 당한 사건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냥 치료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 주막에 가서 치료비가 더 들면 그것까지 책임지려고 보험까지 들어주고 가잖아요. 이것이 바로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는 모델로 이것을 제시한 거예요.
이것이 사건으로 같이 이어지지 않으면 존재로서는 결코 안 이어져요. 그러니까 사마리아인은 자기를 존재로 보지 않고, 어떤 사건이 생기면 저 사건은 하나님이 나에게 일으키신 사건으로 봐서 거기에 개입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좀 쉬운 것을 해 보겠습니다. 질문을 할 테니까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방주가 있습니다. 이 방주 속에 노아의 식구 8명이 들어갔는데, 방주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방주 바깥 세계를 포기한 거예요. 그러면 이웃집 사람들이 방주 안에 안 들어가겠다는 것은 뭡니까? 자기 세계를 도저히 포기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신약 성경 마태, 누가복음 등에는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생존), 시집가고, 장가가고(문화), 사고, 팔고(경제)’ 했습니다. 생존, 문화, 경제 이것 전체가 뭉치면 기존의 인간 세계지요. 홍수가 날 때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살았는데 갑자기 홍수가 왔을 때 이 전부가 물에 잠겨서 멸망당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과거 이야기를 왜 했는가 하면, “인자가 올 때도 이와 같으리라(마24:39).”고 했어요. 그렇다면 지금 교회 다니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여기에다 뭘 추가해야 하는가 하면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집사 되고, 장로 되고’ 하다가 다 멸망당합니다.
이 전부가 어느 세계에서 해석하느냐 하면 서로가 존재를 인정해 주는 그런 세계였단 말이지요. 그런데 방주에 들어간 8명이나 여기 이 사람들이나 똑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어요. 그런데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에 들어갔는데 그 이유가 뭐냔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고 즐기는 세상을 포기하고 왜 방주로 갔느냔 말입니다.
뭔가 당기는 것이 있었어요. 이처럼 당기는 것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지금 이쪽 세계(세상)에 방주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방주를 이 세상 말고 외부 세계로 해석하는 겁니다. 상당히 충격적이지요?
이것이 왜 충격일 수밖에 없는가 하면, 뭔가 외부에 하나가 떴는데, 달이 떴다면 충격입니까, 충격 아닙니까? 충격이 아니죠. 왜냐하면 달이라는 존재는 현 세계 속에 포함시켜 버렸으니까. 밤에 달이 안 뜨면 더 이상해요. 별과 달은 우리와 같은 세계에 속했기 때문에 낯설지 않잖아요. 별이 있다고 해서 우리 죄를 깨닫습니까? 아니죠. 별은 그 자리에서 존재하고 나는 밑에서 존재하고. ‘우리 둘 다 존재하자. 우리는 아무 일 없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야! 오, 달이 떴군.’ 달이 정상적이듯이 달밑에 있는 나도 정상적이죠.
이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뭔가가 떴잖아요. 수학에서 이것을 ‘1:1대응’이라고 하지요.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이것이 1:1 대응이에요. 이것은 뭐냐? 같은 집합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합집합이 가능한 같은 속성이니까.
그런데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이웃 사람들은 방주를 어떻게 봤습니까? 같은 세상에 속하는 하나의 이상하게 생긴 배로 본 거예요. 그러나 노아의 8식구는 뭐로 봤습니까? 이것은 우리 세계를 부정하고, 이쪽 세계(세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징표로 본 겁니다.
제가 왜 노아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사건이 존재를 부정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란 말이지요. 우리 존재를 인정하는 그런 사건은 마귀가 주는 사건이고, 진짜 주님의 사건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거예요.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이사야 6장에 나오지요.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뭐라고 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디모데전서 1장에도 나와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나의 사건이 오게 되면 나는 지금 머물러서는 안 될 자리에 머물러 있구나. 그러면 여기 방주 안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말은 뭘 포기했다? 이쪽 세계를 부정한 자만이 방주 세계에 합류할 수 있어요. 방주에 8명이 들어갔는데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는 전부다 세상을 포기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교회 다니고 절에 가고 이런 세계를 이미 우리는 포기했습니다.’ 하는 일치 된 의견을 가질 때 이 안에 합류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주 안에는 뭐가 없는가? 개성이 없어요. 천국과 지옥의 특징이 뭐냐? 인간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아요. 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다룰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야 되지요. ‘너는 부자다. 나는 가난하다. 어린 아이다. 어른이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성령이 올 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논쟁할 때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기 때문에 구원 받고, 만약에 이방인들이 구원 받으려고 하면 반드시 유대인이 되고 난 뒤에 구원 받아야 돼요. 이것이 유대인들의 주장입니다. 이방인이 그냥 구원 받는 법은 없어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이방인도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놀랐어요.
‘율법도 모르는 인간들이 어떻게 구원 받는가?’ 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성령이 임하셨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건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율법이 있어야만 사람이 자기의 실력, 우수한 성적으로 말씀을 지켰다는 내신 성적이 표가 나는데, 만약에 율법이 없으면(시험을 안치면) 그 사람 실력을 모르잖아요. 시험도 안치고 구원 받는 법이 있습니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합격 통지서가 그냥 온다. 시험도 안치고, 이름도 안 썼는데 합격 통지서가 왔어요.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 개성을 모독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동안 애쓰고 힘쓰고 수고한 모든 개성을 무시합니다. 소위 거룩한 생활에 전념했던 그 모든 것을 날아온 합격 통지서 한통이(자기한테 온 것이 아니라 개 같은 이방인에게 온 합격 통지서가) 얼마나 분노할 만한 일입니까?
오늘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도 분노할 일입니다. 자기는 20년 믿었는데 ‘교회처음 온 사람이 구원 받았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법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배달된 거예요. 택배가 온 거예요.
이 논쟁을 지금 디모데에게 부탁하고 있는 거예요. ‘전해봐라. 반드시 논쟁이 일어난다. 그럴 때 너는 마음을 단단히 하고 오직 복음만 전해라.’ 이 복음의 바탕에는 십자가가 있지요. 십자가 사건이 말씀을 매개로 해서 튀어나오면, 말씀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튀어나와요. 십자가가 튀어나오면서 십자가의 능력 외에는 다른 것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만 있다.’ 분명히 자기는 말씀을 봤는데 십자가가 보여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그것이 송곳처럼 톡 튀어나오는 거예요. 에베소서 5장에 남편과 아내에 대한 권면이 나오는데, 그 말씀을 뚫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너희를 구원한다.’는 것이 튀어나와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목사님들이 제일 힘든 것은 뭐냐 하면, 어떤 성경 구절이든지 반드시 십자가가 뚫고 나와야 되는데 그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골치 아픈 일입니다. 김 집사님이 설교를 한 번 해봐야 되는데. 얼마나 힘든지? 정석훈 목사님이 잘 해요. 기본적으로 오 목사님은 잘 하시고.
개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좀 더 해 봅시다. 이것은 ‘사건은 존재를 무시한다.’ 이것을 하나의 경구처럼 외우시기 바랍니다. ‘사건은 나라는 존재를 무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의 개성을 무시한다.’ 내가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하든 이런 것을 다 무시합니다.
이것이 뭐냐? 사시미 회칼로 우리를 난도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끊어져서 꿈틀거리는 그 사건 덩어리가 오늘 분량(일용할 양식)의 것을 가지고 직장에 가고, 농사짓고, 학교 가고 이것이 하나의 꿈틀거리는 사건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계속해서 사건이 우리 존재를 무시하지요.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천국과 지옥에서는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옥에 간 부자. 부자가 지옥에 갔는데 자기가 부자란 것을 아직도 잊지 못해서 거지 나사로에게 요청을 하잖아요(눅16장). 지옥에서는 더 이상 거지, 부자 이런 것은 없어요.
하나님이 낯설게 준 사건의 의미를 왜 모르느냔 말이지요. 종일 생각하는 것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이런 것들이 전부 나의 존재를 더욱 더 단단히 하기 위해서 끌어 모으는 일입니다.
제가 우 집사님께 ‘퇴직하시면 뭘 하시렵니까?’ 물은 것은,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건을 이야기한 겁니다. 퇴직 하시면 지금처럼 수입이 되는 사건이 있는지. 왜냐하면 사람은 안 죽는 이상은 계속해서 천국에서 주어지는 사건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6장 19절을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사건을 이야기했는데,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실제로 어떻게 세상을 보고 어떻게 자기를 봤는가? 사도바울이 본 그 사건이 저와 여러분의 사건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사도바울은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를 ‘내가 입을 벌려 비밀을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비밀은 낯선 것이지요. 지금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은 사람들이 익히 아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의 성격은 비밀스러운 거예요. 이 말은, 현재 먹고 마시는 이 세상에서 볼 때 비밀이니까 이것은 외곽에 있지요. 외곽에 있는 소식을 이 안으로 집어넣는 일을 하는데 입을 벌려 알리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주체가 되어서 입을 벌리니까 자기는 하나의 매개체, 도구, 수단이 되어서 복음의 비밀이라는 이 주체가 나의 입을 사용해서 담대하게 알리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담대하게’ 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싫어하고 거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방주 이야기를 좀 더 해 봅시다. 입구로 들어갈 때 이쪽 세계를 포기했다고 했지요. 여기에서 ‘포기’란 말은 세상에서 취직도 하지 말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하란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니고,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함께 동행 했다고 되어 있어요. 동행 할 때 그냥 말동무 하라고 동행한 것이 아니고, 복음의 비밀, 방주 만드는 내력 여기에 대해서 늘 말씀으로 이야기하면서 동행했겠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했지요. 그냥 심심해서 따라다닌 것이 아니잖아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괜히 따라다닌 것이 아니잖아요. 광야를 통과시키기 위해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있었는데, 이 방주에 들어가려면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마음가짐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거지요.
‘십자가로 구원 받습니다.’ 라는 말에서 제일 크게 오해되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되는데, 마음이 안 바뀌고 찍어 바르는 것만 생각해요. 마음 바뀌어야 한다고 하니까 또 완벽하려고 해요. 죄 안 짓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마음이 바뀌는 것은, 낯선 외곽의 사건에 의하면 ‘나는 처음부터 끝가지 죄 아닌 것이 없다.’ 이런 마음으로 바뀌면 돼요.
만약에 외부 사건이 안 오면 ‘나는 착한 일도 했고, 나쁜 일도 했다.’ 이렇게 되는데, 마음이 바뀌게 되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뭘 해도 죄 아닌 것이 없다.’ 율법을 기준으로 볼 때 나의 모든 행위는 죄악뿐입니다. 예수님처럼 율법에 순종 못하면 순종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
첫째 시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겁니다.
복음의 비밀이 방주 출입구에서 먼저 나와야 돼요. 방주 안의 사건이 방주 밖으로 퍼져 나가서 노아가 그것을 눈치 채듯이, 지금 사도가 방주 같은 역할을 해서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는데, “디모데야! 너도 전하라. 하지만 거기에서 논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존재가 우선이라서 ‘내 존재는 내가 알아서 구원 시키는데, 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지킨 나는 구원 받고 법 못 지킨 사람은 지옥 간다.’는 자기 개성을 살리는, 자기 존재를 사수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자와의 극렬한 다툼이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09. 5. 11. 10:00 녹취 마침)
관리자(IP:220.♡.176.150)
09-05-17 12:40
광주 강의(09. 4. 24) 48-2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을 봅시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여기 ‘그릇’이 나옵니다. 첫째 시간에 제가 천국과 지옥에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개성이 없다고 했지요. 사건이 ‘나’라는 존재를 없애잖아요.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뭐냐? 사건이 존재를 없애는 동시에, 이 사건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요. 그러면 기존의 ‘나’라는 존재는 새로운 존재와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개성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아예 그릇이 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사건이 오게 되면 우리의 존재가 토막이 나서 존재를 사건으로 만든다. 그러면 토막 난 그 사건은 다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가 된다. 새로운 존재를 ‘존재2’ 라고 합시다. 새로운 존재는 이 안에 뭐가 가득 들어있는가 하면, 나는 없고 예수님이 벌이신 말씀의 사건만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4장 8절에도 나와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모든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의 사건으로 가득 찬 존재지요. 사건으로 가득 찬 존재니까 이것을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릇의 특징은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뭔가 담을 것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그릇은 뭔가가 담겨야 그릇의 용도가 되는 겁니다. 그릇 자체는 아무 의미 없어요. ‘너는 그릇이다.’라는 말은 ‘너에게 뭔가가 담긴다.’는 것입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보았는데 “이근호는 구세주다.”라는 글이 있었어요. 놀라서 무슨 내용인가 자세히 보니까 ‘일본(주빌로 이와타) 펜들에게 이근호는 구세주다.’라는 것입니다. 이근호가 2골을 넣어서 난리가 났어요. 이근호는 그릇입니다. 자기가 속한 팀을 위해서 계속 골을 넣어야 돼요. 그러면 개성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누구의 이용물이 되지요. 그게 바로 본래의 인간 모습입니다.
원래 인간이란 것은 아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을 남자로 바꿔버리고, 아담의 몸을 이루는데 아담 혼자로는 안 되고, 남자 몸에 여자를 집어넣어서 남자와 여자가 합해서 아담이 되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아담이 모든 생물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러나 아담이 이름을 붙이지 않은 나무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둘 다 이름이 없어요.
아담이 이름을 못 붙였다는 말은 누가 더 높은 레벨에 있단 말입니까? 인간은 생명나무와 선악과에 종속되어 지시를 받게 되어 있지 인간이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장악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합해서 두 사람이 이제 한 몸이 되지요. 그런데 이것으로 인간이 아니고 인간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이것까지 함유할 때만 본래의 인간이 되는데, 이 아담과 하와가 그저 한 몸 된 것이 이름 붙여준 그 사건 때문에 된 것이라면, 이제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준 사건에 의해서 이 인간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한 요지가 뭐냐 하면,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인간을 위한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그런 인간은 만들지를 않았어요. 인간은 외곽에 종속되어 있어요. 디모데후서 2장 26절에 ‘마귀에 사로잡힌 자’가 나오는데,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가 나오지요.
마귀는 알아요. 인간은 절대로 단독적으로 인간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을. 마귀도 안 보이고 인간이 뭔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개성이 있다. 인간은 인간을 위하여 산다.’ 그래서 인간의 최고 욕망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을 보면서 마귀는 비웃습니다. “이 무식한 인간들아!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 밥이지.”
인간은 마귀의 올무에 빠지든지 아니면 주님께 사로잡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께 사로잡힌 자의 특징은 ‘전에 나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과거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 진짜 주님께 사로잡힌 자입니다.
마귀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가 나를 경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5절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해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지요. 오 목사님도 이 본문으로 설교 한 것으로 아는데.
사람은 왜 사는가? 엎드리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이단들 욕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먼저 본인이 엎드릴 줄 아느냔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평소에 그런 이야기합니다. “성도라면 늘 주님 앞에 고개 숙이고 살아라.”
그런데 사람들은 엎드리는 것을 생략하고 경배하려고 해요. 그래서 문제가 생겨요. 안 엎드리니까 “경배하려고 했는데 우리 애가 아픕니다. 경배하려 했는데 사업이 안 됩니다. 경배하려고 하는데 ---” 자꾸 엎드리지를 않는 거예요. 왜 못 엎드리는가? 말씀이 자기 자신을 안 찌르니까 자기 속에 숨은 것이 안 나오고 자꾸 존재만 나오니까. 사건이 들어와야 되는데 존재만 나오니까 “옛날에는 잘 나갔는데 지금은 요 모양 요 꼴이지.”
엎드릴 줄 모르고 고개 쳐들고 경배하려고 해요. 계시가 오게 되면 사람은 욥처럼 유구무언입니다. ‘그래 너희들은 마귀한테 엎드려라. 나는 주님께 엎드리는 것이 나의 사는 보람이다. 세상에 이런 기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님 앞에 엎드릴 줄 아는 인간이 되다니 이건 정말 기적이다.’
내가 엎드릴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이것이 행복입니다. 늘 꼿꼿하게 머리 쳐들고 살던 인간이 누구한테 엎드리게 된다는 거예요. 엎드려 경배할 대상이 있다는 것. 그 엎드린 자세로 그대로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지옥은 엎드리지 않고 가다가 억지로 불 속에서 꺾이는 것이고, 천국은 지금부터 엎드리다가 천국에서도 계속 엎드리면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는 것이고.
다시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진수는 남자, 여자 둘이 한 몸 된다고 인간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간이 인간되어 있으면서도 인간 위에 존재하는 것. 하나님 편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인간이 손대면 안 돼요. 이것은 하나님 차원이에요.
인간이라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조건 하에 생명나무를 따먹어야 한다는 그것에 종속되고 지배받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께 소속되지 독립된 자가 아닙니다. 날 때부터 이런 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귀에게 놀아나지 않으면 주님께 놀아나든지 둘 중 하나인데 이 모습을 ‘그릇’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릇은 뭔가 비어있는 상태고, 그 빈 상태가 완료가 아니라 뭔가로 채워져야 되는데 무엇으로 채우느냐?
로마서 9장 21-23절을 보겠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권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여기에서 진노의 그릇의 특징이 뭡니까?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긍휼의 그릇의 특징은 계속해서 부요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노의 그릇은 하나님이 성질 죽여가면서 그냥 참아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관용을 끊고 부요함을 끊으면 누가 진노의 그릇인지 긍휼의 그릇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제가 진노의 그릇입니까, 긍휼의 그릇입니까?” 라고 해요. 이것에 대한 답변은, 뒷부분과 줄을 연결하면 됩니다. 유치원생들 이끌 때 선생님이 하는 것 있지요. 오리 - 꽥꽥. 참새 - 짹짹. 돼지 - 꿀꿀. 이렇게 이어져야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현재 우리가 있는 것이 부요함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긍휼의 그릇과 줄이 이어지고, 관용됨을 모르게 되면 진노의 그릇입니다.
진노의 그릇은 이 말씀 전체를 부정합니다. 진노의 그릇은 자신을 진노의 그릇으로 절대 인정 안 합니다. 진노의 그릇은 자기가 진노의 그릇이란 것을 다 부정하고 자기 존재를 확장하고 곤고히 하는 겁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다섯 가지 욕구입니다. 존재의 욕구로부터 소속, 안전, 인정, 자아실현까지.
긍휼의 그릇은 이 말씀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하는 일마다 너무너무 잘 되고 번성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계시는 거예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마지막에는 잘 먹이듯이.
이런 말이 있어요.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다.’ 거지 나사로가 대표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아무리 추하고 개들이 핥아도 본인은 느긋합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이기 때문에 이 구조(로마서 9장 21-23절)가 디모데한테 들어와 있어야 이것이 사건화 되어서 외친단 말이지요.
외치게 되면 2,000년 시간 간격을 뛰어넘어요. 왜냐하면 말씀 자체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변하지 않는 것을 믿어요. 나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말씀의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릇의 특징은 그릇을 자랑하지 않고 담긴 내용물을 자랑합니다. 그러면 이런 그릇 이야기가 어떤 효과를 주느냐? 그림을 보세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분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자기는 장남입니다. 장남은 꼭 장남 티를 내요. 아버지 죽었는데 자책감에 잠을 못자요. 그런데 차남과 막내는 유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잠을 못잡니다. 공짜 돈이 생겨서.
그런데 그릇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릇은 현재 그릇 되어서 그릇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그릇을 만들고 합당한 사랑을 여기에 담는 식으로 그릇조차 창세전부터 만들어서 나와요. 좋은 그릇과 나쁜 그릇이 창세전부터 만들어져 나와요. 그러면 이 사건이 개인적인 성격과 위치 이런 것을 덮어버려요. 마치 노아 시절 홍수가 모든 것을 뒤덮듯이.
사건이 휩쓸고 지나가면 어떻게 되는가? 장남이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했다는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안 죽고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창세전부터 내 운명이 확정된 채 태어나야만 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긍휼의 사건과 마주치면서 개성이 사라지고 긍휼의 부요함으로 다시 그릇에 담기지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애석함이 담긴 그릇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담을 때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남들에게 ‘나는 큰 사랑을 입고 있습니다.’라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복잡하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그릇 만들었구나!’ 라는 그 그릇은 오해할 소지가 많은 그릇입니다. 그 그릇은 내 존재, 내 자존심을 키우는 그런 해석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게 되면 내가 생각한 그릇이 아니고, 비록 아버지의 죽음이나 그런 슬픈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조차 나에게는 긍휼의 부요함으로 주어지는 사건으로 깨달을 때 그 그릇은 긍휼을 크게 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반대로 어떤 불신자가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너무너무 사업이 잘 돼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볼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보입니까? 그 사람이 부자 된 것도, 하나님이 진노를 퍼붓기 전에 많이 참으면서 관용하시면서 주어진 부라고 보는 거지요.
그래서 창세기에 예정된 그 바람이 불면, 그 사람이 의사든 판사든 장관이든 그 사람은 개성이 없고, 그 사람이 뭘 담고 있느냐(진노의 그릇, 혹은 긍휼의 그릇) 하는 하나의 그릇으로 규정받지요.
이렇게 그릇이라고 지칭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서부터 있었던 인간에 대한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생명나무 사건, 선악과 사건으로 보는 인간관이 바로 주님이 보시는 시선입니다.
“주님! 저 그릇 맞지요?” 라고 알 때, 예수님이 지금 우리를 보고 있는 그 관점을 자기도 지금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그릇 맞지요?” “맞는데, 어떻게 알았어?” “성령께서 알려주시니까 알았습니다.”
그릇이 왔을 때 ‘주님이 세상을 어떻게 봤을까?’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이 주님이 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하나의 그릇으로 보는 것. 이렇게 되면 이제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왜 했는가? 지금 논쟁이 벌어졌거든요. 율법에 대한 다툼이 일어났는데, 17절에 보면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후메내오와 빌레도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 2권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위책이고 또 하나는 생명책인데, 행위책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기준은 뭐냐 하면, 예수님처럼 행해야 구원 받습니다. 그러니 행위로 구원 받을 사람은 끝났습니다. 구원 못 받고 지옥 갑니다. 그런데 생명책에 있는 사람은 구원 받을 때 반드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생명책, 행위책 이것을 거꾸로 해 봅시다. 방금 인간 쪽에서 봤는데 반대로 예수님 쪽에서 보면 결국, 예수님 속성 가운데 두 가지 속성이 나눠진 것이 두 개의 그릇이에요. 맞지요? 방향이 인간 쪽에서, 심판주가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행위로 구원 받는 것도 인간은 실패하고, 생명책도 실패하지요. 생명책이 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공로로 구원 받으니까.
명단이 생명책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구원 받으니까 역시 구원 받는 것은 “나 생명책에 이름 있다.” 이것을 자랑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공로를 자랑해야지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는 말씀이 있어요. 이 말 ‘명단 있음’에 대해서 뭔가, 예수님께서는 사건을 율법을 뚫고 율법 밑의 저주 아래(마귀 아래) 있는 우리를 찾아오는 그 과정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 구원 받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 쪽에서 다가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 쪽에서 두 가지 종류(진노와 긍휼)가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속성이 두 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그릇’이라고 했을 때, 지금 관점이 뭐냐 하면 불신자 관점이에요. 행함. 행함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있으니까,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사람이 선을 행한 만큼 구원 받는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사람이 선을 행하려면 율법을 알아야겠지요. 그러면 누가 유리합니까? 율법을 많이 아는 사람은 구원 받기 쉽고,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구원 받기 힘들지요.
그렇다면 단계가 어떻게 돼요? 단계가 둘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많이 아는 사람, 대충 아는 사람, 조금 아는 사람, 전혀 모르는 사람. 이렇게 여러 층으로 나눠질 것이 아니냔 말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18절에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라고 했는데, 이 말씀의 뜻을 우리는 모르는데 암시가 있어요. ‘믿음을 무너뜨렸다.’고 해요. 그러면 이 디모데후서 2장 1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미쁘다고 되어 있지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이 부분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피곤하시겠지만 정신을 좀 차려주세요.
지금 사람들의 관심사, 특히 유대인들의 관심사가 누구를 바라봅니까? 사람을 바라보지요. 그래서 ‘네가 잘 났나, 내가 잘 났나?’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잖아요? 부부싸움도 항상 자기가 잘났다고 해서 벌어집니다. 지금 이것은 믿음의 세계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 누가 잘났나? 어린 아이들 노래자랑 하는 것처럼.
거북이와 토끼가 경쟁하면 누가 이깁니까? 동화에서는 거북이가 이기지요. 그런데 실전에서는 거북이와 토끼가 경쟁을 안 합니다. 왜? ‘우리가 사람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해요. 거북이와 토끼는 지금 믿음의 세계를 바라보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지금 인간들이 죄성에 빠져서 서로 누가 잘났나를 경쟁하면서 따져요. 이 자체가 믿음의 세계가 아닙니다.
토끼는 그냥 바라보면 되지만 인간은 그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는가 하면,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리라.’ 죽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 나를 바라보는 차원이 아니고 ‘믿습니다.’라고 할 때는 상대방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믿잖아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묻기를 “너, 이번에 성적 어떻게 나왔어?” “나는 주와 함께 죽어서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을 믿어” 주와 함께 죽는다는 말은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쉽고도 어려운 말인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을 믿으면 될 일이지 칼 들고 자살할 필요 없어요. 자살하면 자기 행위가 개입 되잖아요. 믿음의 행위가 아니고 마음으로 믿어지면 믿는 것입니다.
자, 지금 ‘부활이 지나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라요. 그런데 그 말 뒤에 ‘믿음을 무너뜨린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부활이 지나가서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자기 자신만 믿게 됩니다.
그럴 때 사도바울은, 사람은 그릇이고 그릇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릇은 하나님이 주신 것만 담을 때 그것을 ‘좋은 것’ 혹은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잣집엔 가난한 사람들이 꿈도 못 꾸는 것들이 있어요. 부잣집은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가난한 집의 금그릇 보다 더 좋은 것을 담아요.
위의 믿어야 될 것을 보지 않고 인간들이 생산하는 것에 자꾸 신경을 쓰니까,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고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 해서 살련다.’ 이렇게 나와요.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도하면 내 기도 때문에 내가 산다.’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목사 본인이 안 믿어요. 안 믿는 목사를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왜? 자기들도 믿지 않으니까. 그래서 안 믿는 목사와 안 믿는 교인들이 주고받는 것은 전부 ‘행함’입니다. 평소에 내가 달성할 수 있는 것.
그러면 그 그릇은 누구 그릇입니까? 이것은 사건이 와서 부숴버린 그릇이 아니고 원래부터 있었던 자기 존재를 잘 갈고 닦아서 자기 존재를 그릇으로 봐서 거기다가 자기 행함을 담는데, 이것은 바로 부잣집 그릇이 아니고 가난한집 그릇인데 이 그릇의 특징은 믿음을 필요치 않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그런 동네에서 잘도 통용되는 유대인들의 율법체계란 말이지요.
이것과 디모데는 정면충돌을 한 겁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말을 한 겁니다. 제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고 자신은 하나의 사건 덩어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건에서 또 다른 사건으로 옮겨갈 때 그것이 또 존재가 되면 그 존재는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고 날 위해 죽었다가 살아난 주님의 것을 담기 위한, ‘나는 비록 세리고 창기라 할지라도 나는 주님의 보혈의 피가 담겼다.’ 우리 사모님 쓴 글에 그런 내용이 있었지요.
창세전 예정하신 뜻에 의하면, 내 모습은 창녀요 세리지만 이것은 날아가 버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부요하심만 남아요. 그러니까 그릇도 하늘에서 운반된 것이고, 그 그릇에 담길 것도 하나님의 것이고. 그 그릇과 담길 것 사이에 믿음이라는 본드(접착제)가 떨어지지 않네요. 손바닥과 손등을 어떻게 나눕니까? 껍질을 벗기면 됩니까? 벗겨진 그 자리가 또 손바닥이 되는데. 등껍질을 벗긴다고? 벗겨보세요. 벗겨진 그것이 또 손등인데.
물체를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고 밑에서 보느냐, 위에서 보느냐 하는 관점 차이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그릇이란 것도 주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릇도 긍휼이고,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긍휼이고, 긍휼이기 때문에 담기는 것도 주님의 것이 담기니까 결국 이것은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거지요. 내 몸 자체부터 내게 일어나는 사건 전체가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믿음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부활은 뭐냐?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부활이 지나갔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무너뜨렸다고 나와요. 부활이 지나갔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되고 할 때, 여기 마귀에 사로잡힌 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성경의 내용은 뭔가 하면, 십자가 지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부활이 있지요. 부활 사건 다음에 또 있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 오심’입니다.
성령 오심은 십자가, 부활에 포함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성령께서는 자기 개성을 나타내는 분이 아니고 예수님께 일어난 사건을 되풀이 하는 분이거든요. 이게 요한복음 16장에 나와요. ‘보혜사(성령)가 오면 그분은 자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예수님)것을 가지고 이야기한다(요16:13-14).’
성령께서는 자기 부인을 잘 해요. 성령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 쪽으로 향하도록,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에요. 성령 소개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 아니고.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자신은 투명인간? 하나의 점선이 되지요. 성령을 보려고 하면 안 돼요. 성령이 보게 하는 것을 봐야지요. 그것이 뭡니까?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와서 십자가와 부활을 전체로 퍼지게 하겠지요.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다시 정리합니다.
성경에서는 십자가, 부활 다음에 뭐가 온다?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영원토록 끌고 가지요. 그러면 자꾸 십자가와 부활만 부각됩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재림은 이것들에 파생된 것으로 재림이 옵니다. 그래서 이것 전체를 ‘십자가’라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종말로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들은 믿는 게 없으니까, 자기 율법적인 것 밖에 모르니까 성경과 반대입니다. 십자가 사건 그 다음에 부활 사건. 둘 다 마귀적인데, 하나는 부활에 제사 드리는 사람. 이것이 부활절 지키는 것이죠. 그리고 또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자들. 이 양쪽 다 부활을 과거의 지나간 사건으로만 취급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성령께서 부활을 적용시키는 것은 모르고.
이렇게 되면 십자가 질 때는 십자가 믿고, 부활 할 때는 부활 믿다가 지금은 뭘 믿습니까? 현재 일어나는 것을 믿어야 되지요? 현재 일어나는 것을 믿겠다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아닙니까? 교회 행정, 제도.
그런데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지금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지나간 십자가.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 이야기하고 부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께서 첫 번째 부활하셨고 그 다음 부활이 우리 것이다.’ 계속 십자가, 부활을 이야기 해요. 지나간 것이 아니지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거잖아요.
십자가 사건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믿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이제 이야기하지 말고, 지금 신께서 어떻게 기적을 일으키는가?’ 기적을 따로 챙기는 거예요. 이런 인간들 명단이 17절에 있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입니다. 이 사람들 지금 어디 가 있는가? 지옥에 가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11절에서 “미쁘다.”는 것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것이요.” 라는 것인데, 이것을 사람들에게 믿도록 요구한다는 자체가 무리라는 것을 알아요. 알지만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누구인지 그 사람을 찾고 싶어 하는 거예요.
만날 때, 처음 창세기에서 약속하기를 이쪽에서 ‘뻐꾸기!’ 하면 저쪽에서 ‘고구마’ 라고 서로 암호가 주어져 있는데,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암호인데, 이쪽에서 “예수와 함께 죽으면” 하고 외치면, 저쪽에서 “예수와 함께 살리라.” 이렇게 화답해서 ‘아이고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이렇게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동문서답을 하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형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교회에 사람이 안 모이고, 부흥이 안 됩니다. 제임리 목사님이 왜 탄식을 하는지 압니까? 곶이 곶대로 십자가만 전하니까 사람들 반응이 ‘웃기고 있네.’ 이렇게 나오니까 목회가 안 돼요.
“암호를 대라!” 그런데 상대가 암호를 몰라요. 그 암호가 하나님 주신 사건인데 ‘십자가’라고 하면,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사는구나.’ “나는 주를 위해 죽습니다. 나는 주님 십자가 믿습니다. 방주 밖에 있는,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