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2:26-28 (도적의 수치)
렘 2:26-28 (도적의 수치)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예레미야 2장 26-28절
제목 : 도적의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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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4-22 20:56
도적의 수치
2009년 4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6-28
(렘 2:26, 개역) 『도적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 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 왕들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느니라』
(렘 2:27, 개역)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은 내게로 향치 아니하다가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렘 2:28, 개역)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뇨 그들이 너의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우상 숭배하는 것을 마치 도적질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도적질이란 남의 것은 자기 것인양 여겨서 제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이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의 신을 다루는 태도가 이러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 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우상을 대할 때나 통하는 버릇입니다.
참 하나님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척 오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전문 성직자나 일반 평민들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 한통속으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인들에 대한 인식이 삐뚤어졌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인간이 마음대로 변질시킬 수 없는 문제입니다. 갈라디아서 1:6-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진정한 복음은 사람을 건질 수 있는 능력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50년을 교회 출석해도 구원될 수 있는 복음을 모르면 그동안 교회 헛 다닌 것이 되고, 오늘 하루를 교회에 나와도 오늘 밤 당장이라고 낙원에 갈만한 그런 능력을 가졌다면 제대로 된 복음을 이해하신 것이 됩니다. 따라서 사도나 설교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복음을 그 어떤 경우라도 변경시키면 안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항상 그 밑바닥에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중요하지 않다는 여유로움을 깔고 이야기하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화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구더라도 그 한마디 한마디 배경에는 “저는 지금 죽어도 개의치 않게 되었어요”라는 자유함이 흘러 나오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구원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대화를 하게 되면 그 어떤 주제의 대화라도 그 밑바닥에는 “나는 반드시 살아남고야 말리라. 암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라는 식으로 생존의 집착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바로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니 여호와 하나님 마저도 자기를 살리는 우상으로 다룰려고 하는 겁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에, 그들은 자기네들이 뭔가 할 게 없었습니다. 그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는 대로 따라 다닐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되고,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하는 식으로 살아야 함을 알려주시는 환경을 조정해주신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불꽃놀이 하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옥상에 올라가서 색깔로 뒤덮힌 하얀 밤하늘을 감상하게 됩니다. “펑, 펑”하는 소리를 즐겁게 들으면서 말입니다. 이처럼 ‘내가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아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말씀하신 그 핵심은 장차 신약 때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그 전모가 밝혀집니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들의 기준을 철폐하시고 하늘에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지 그 기준을 새삼 알려주기 위해서 조치하신 겁니다.
곧 하나님이 죄인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을 인간들이 모든 식으로 하나님은 보시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주시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론은, 인간들의 보편적인 공통점을 추려서 그 토대 위에서 출발합니다. 즉 ‘인간’이라는 개념은 같은 인간들이라는 인식 하에 같은 점을 끌어모아서 그것으로 인간형의 모델로 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은 서서 걷고, 불을 사용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지·정 ·의를 지니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는 점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확실한 것부터 기초해서 더 확실한 것으로 나아가겠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되신 하나님의 모습으로 제대로 된 인간상이 나옵니다. 하늘의 요소와 인간의 요소가 함께 지니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이 죄인됨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죄란 인간을 영적 존재로 간주해서 파악하는 죄관입니다. 즉 다윗과 사울왕의 관계처럼, 과연 성령받은 자냐 아니면 악령 아래에 갇혀있는 자이냐 하는 관점에서 인간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외모나 껍데로 보지를 않겠다는 말입니다. 악령받은 인간상의 결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잘 나타내어주셨습니다. 곧 저주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에 관한 기준을 가지고 예레미야 선지자들의 계시를 해석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악마의 권세 아래 놓인 자에 대한 평가는 인간으로서는 마땅한 평가입니다.
그런데 인간 내부에 놓인 악마는 극렬하게 이런 평가에 대듭니다. 소위 점잖고, 온화한 성품을 가졌다고 우기는 자들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20-21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솔개는 하늘을 날아야 하고, 물고기는 물을 튕기면서 놀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성입니다. 인간은 뭘해야 합니까? 인간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 나라의 의는 인간이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찾는 자가 제대로 하나님의 기준을 알고 사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 기준을 철폐시켜 주시고 십자가 의의 기준이 우리 안에 늘 박혀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20:31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07강-렘2장26-28(도적의수치)-jer090422.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