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10-(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3강
20090410-(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3강
이름 : 오용익(IP:211.194.56.75)
에베소서 제 33강 (이 근호목사, 2009년 4월 10일-(1),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6장 1절부터 4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오지요.
에베소서 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거기에는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고 형제간도 있고 부부간도 있고, 사람들이 여러 가지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것은 누구 세상이냐 하면 사람세상, 눈에 보이는 우리끼리 사는 그런 세상입니다.
약속이 없으면 자식은 자식대로 살고 부모는 부모대로 살고 형제는 형제대로 살고 다 그대로 사는데, 이것을 가지고 현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약속이 없을 경우에 그것을 현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왔다, 이렇게 해 버리면 약속이 들어온 현실이 돼요.
약속이 들어온 현실이 되면 여기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면 약속이 없을 때 느꼈던 모든 현실, ‘그것은 가짜고 엉터리다’ 하고 인정을 해야 됩니다. 약속이 들어오기 전의 현실, 이것은 ‘내가 착각을 했다. 잘못 생각했구나. 이것은 가짜야. 허구야. 허상이야’ 이렇게 하면서 약속이 없는 현실은 현실로 안 봐야 됩니다.
이게 참 힘들어요. 서울공대에 ‘약속과’ 있습니까? 연세대, 고려대에 ‘하나님의 계명과’ 있습니까? 약속이 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약속이 없는 그곳을 그렇게 좋아해요. 그 이유가 뭐냐? 지금 자기에게 약속이 없으니까 약속이 없는 나를 ‘나는 지금 옳은거야. 나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거야. 약속 없이도 나는 지금 훌륭한 사람이야. 약속 없어도 죽고 나서는 좋은데, 아마도 천국에 갈 걸.’
자꾸 이렇게 약속이 없어도 된다는 식으로 ‘나는 너무나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너끈하게 구원 하실거야.’ 자꾸만 이렇게 약속이 없는 가운데서 자신을 변호하고 남에게 알아달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을 만나지만 어떤 교인들은 저에게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우리 가정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 몸을 위해서 내가 뭘 하면 됩니까?’ 라고 물어본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지금까지 ‘그리스도 몸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어본 사람이 없어요. ‘가정에 우환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기도를 할까요? 우리 애가 몸이 아픈데 어떻게 할까요? 기도를 할까요?’ 라고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은 있었지만 ‘내가 그리스도몸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어본 게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약속이 없는 그것은 엉터리다, 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없어도 ‘이것은 현실이야. 이것은 실제야’ 라고 이것이 마치 진리인양 간주하고 있는 겁니다. 큰 실수 하신 겁니다. 약속이 없는 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약속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크게 쓰겠습니다. ‘읽어버린자.’
누가복음 15장에 나와요.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하나님의 약속이 딱 들어오고서 하는 말이 ‘너희는 잃어버린 양이야. 너희는 지금 주인도 몰라. 아무것도 몰라. 그냥 버려진 자야. 그냥 버림받았어.’ 이것을 구약에서 같은 말로 뭐라고 합니까? ‘저주’라고 하지요. ‘너희들은 저주받았어’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현실은 뭘 해도 저주받은 그런 현실이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나와요. 요한복음 3장의 끝부분에 있는 말씀을 제대로 아는 사람 같으면 아마 결혼하기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결혼하기 힘들거예요. 선 볼 때 이 말씀을 이야기하면 보나 마나 그 선은 깨집니다.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마치 형광등처럼, 교회당 천정에 형광들이 켜 있고 그게 우리 머리 위에 머물러 있지요? 이것은 잃어버림, 저주받은 거예요. 다시 결론 내리겠습니다. 현재 약속이 없는 세계는 저주받은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매일같이 화내고 있습니다. 약속이 없기 때문입니다. 뭔가 우리가 빠져 있어요.
세상 살아가는대로 가면 거기에 약속이 없어요. 로마서는 약속이 없는 거기에 뭐만 있다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행함’만 있어요.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곳에 인간의 행함,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노동만 있고 그 외에 아무것도 없고 다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르고 있지요.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의 법이 들어와 버리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저주)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가 됩니다.
저주 받았다는 것이 뭐냐? 죽으면 지옥가는거죠.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에 지옥가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로마서 8:9-11
“만일 너희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니까 약속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저주받고, 약속의 영이 있으면 우리는 사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신다면 수십억의 재산보다도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기느냐 하면 나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약속을 더 귀하고 유일한 현실로 인정하는 거예요. 앞으로 이렇게 약속을 합시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제부터 현실을 볼 때에, 약속을 집어넣고 현실을 보고 어린애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약속을 합시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 경우에만 그것을 현실로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문제 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빠져버리면 뭐가 보일까요? 약속이 빠져버리면 보통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 똑같이 보지요. 부모, 형제, 사람사이, 친구, 그냥 신월동, 신곡시장거리에 북적대는 사람들, 그들이 전부 어울려 살면서 그들이 사는 그 세상을 뭐로 보지요?
‘이것이 현실이야. 여기서 성공해야 돼. 이게 현실이야.’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여기에 약속이 침투해 버리면, 약속이라는 안목으로 세상을 봐 버리면, ‘아하, 그동안 신곡시장에서 북적대던 사람들의 그것이 현실이 아니고, 진짜 현실은 외부에서 주사기로 집어넣듯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세상을 끝장낸다는 것, 이게 진짜 현실이구나.’
이것이 바로 기적을 받아야 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듣는 귀가 있어야 하고 보는 눈이 있어야 아는 거예요. 약속을 집어넣고 현실을 보는 겁니다. 그러면 약속이 어떻게 들어왔느냐? 더워서 좀 옷을 벗겠는데 제가 입고 있는 제 티셔츠가 너무 튀어서 좀…, 이 옷이 제가 고른 옷이 아니고 어떤 권사님이 제가 젊게 보이라고 골라준 옷입니다. 그런데 이게 현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약속 앞에 이 티셔츠의 색깔이 무엇인가, 라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제가 지금 이 티셔츠를 입고 있잖아요. 약속이 들어오면 현실은 뭐냐 하면, ‘네가 저주 받을거냐, 영생 얻을거냐’ 두 가지밖에 안 봅니다. 빨간색, 노란색, 힌색, 검은색, 초록색, 그것 그야말로 아무 의미 없어요.
제가 연극을 해본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자를 보냈는데 이 하나님의 사자가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안에 사람이 식구가 몇 명이고 여자가 몇 명이고 그 집 사람들의 성격이 어떠냐, 그런 것을 묻거나 따지지도 않고 뭐만 보느냐 하면 피가 있으면 그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요. 희한하지요.
죽음의 사자가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그가 하나님께 받은 일이 뭐냐 하면, 피가 발려 있거든 그냥 넘어가라, 하는 약속을 받았어요.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분홍색 티셔츠를 입었는지 초록색 티셔츠를 입었는지 그런 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그 사람이 대머리인지, 치마를 짧게 입었는지 바지를 입었는지 그런 것은 묻지도 않고 보지도 않아요.
식구가 몇 명인지 묻지도 않고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바깥에 있는 어린양의 피가 있거든 그냥 영생이고 그냥 넘어가고 피가 없거든 죽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천사가 융통성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 융통성 없는 천사의 마음을 우리가 같이 닮아야 비로소 우리는 약속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셈이 돼요.
그 융통성 없는, 시킨 대로만 보는, 하나님이 보라고 하는 그대로만 보고 있는 그 심판의 천사와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신목시장 사람들을 바라 봐야 우리가 이 땅에서 어린양의 같은 지체가 되는 겁니다. 이런 안목을 가지고 있으면 ‘현재 저 사람이 얼마를 갖고 있으며 저 사람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몇 평이고 현재 내 자녀가 몇 명이며…’ 이러면서 내가 그것 때문에 나를 탓하거나 책망하지 않아요.
‘아, 나는 대학을 못나왔어. 나는 전문대학 나왔어.’ 죽음의 천사가 그런 것을 안따지잖아요. 그렇지요? 그래서 그 안목과 똑같은 안목을 갖는 거예요. '저 사람은 박사고 나는 석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별볼일 없는데 …‘ 그렇더라도 약속이라는 렌즈, 약속이라는 렌즈로 가져다 봐버리면 그런 것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거예요.
아무것도 따지지 않아요. 그런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현실이 보입니다. 그런 현실로 세상을 보게 되면 약속이 없는 세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잃어버린 세계’ 이고, 신약에서 그 약속은 뭐로 왔는가? 주, 주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이 와버리면 주님이 하시는 일이 뭐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가 됩니다.
내가 만약에 집나간 강아지라면, 나는 집나간 강아지고 집을 나간 줄도 모른 채 기억을 상실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강아지라 이도 저도 모른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와서 ‘나는 잃어버린 양(강아지)를 찾으러 왔다’ 할 때 ‘누구시온지?’ ‘나는 주’ 이렇게 되거든요. ‘얘야, 너 집나갔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내가 주님이거든’ 이렇게 됩니다.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고 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주님을 포함한 현실감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을 빼낸 주님을 배제한 현실이 아니라, 주님을 삽입시킨, 내 인생에 예수님을 집어넣어 놓고 그것을 합쳐서 현실이라고 봅니다. 주님이 있는 현실, 그게 유일한 현실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을 빼버리면 ‘그래, 나는 잘났어. 나는 훌륭해. 나는 남들처럼 성공해야 돼.’ 이것은 현실이 아니고 허상이 되겠지요.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절에서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할 때 여기에 두 가지 어려운 용어가 나오는데 이 두가지 용어를 오늘 강의시간 두시간안에 다 할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진도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오늘 본문에 나온 어려운 용어 중에 하나가 뭐냐? 하나는 ‘주’라는 용어입니다.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 할 텐데, 또 하나의 용어는 ‘안’ 이라는 용어입니다. ‘자녀들아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 할 때에 제일 어려운 것이 ‘주’ 라는 용어와 그리고 주 안에 있다는 것이 뭔지를 이 100분 강의를 통해서 함께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주’가 뭐냐? 이 용어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주’는 이 땅에 작품을 남깁니다. 이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은 주를 알면 안돼요. 주를 만나면 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음속에 있기 때문에 죽은자가 아무것도 모르듯이 사람들은 그냥 자기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리듯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살아요.
주를 몰라요.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이 주를 모르기 때문에 주를 알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계단식 탑을 지었지요. 계단식 탑을 지었는데, 창세기 11장에 보면 이 탑이 무슨 탑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바벨탑을 지었습니다. 지금 주를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주를 알아보려고 탐색을 하는 거예요.
현재 지구상에서 제일 높은 고층건물을 두바이에 짓고 있는데 그 거리가 1마일, 1,6킬로미터죠. 건물높이가 1.6킬로미터 짜리 건물을 짓고 있는데 과학자들이 현재 어떤 건축물을 구상하고 있느냐 하면, 여기 지구가 있으면 이 지구위에 인공위성이 같이 돌고 있어요. 같이 돌기 때문에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데 이 인공위성과 지구사이에 엘리베이터를 만들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가는 것이 아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하겠다는 그런 계획을 하고 있어요. 하여튼 알아나 보자는 거예요. 누구를?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알아보자는 겁니다. 그들은 바벨탑 쌓은 이것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보는 거예요. 현실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내가 여기 있다.’
우리들이 여기 있는 거예요. ‘우리들의 현실이 여기 있으니까 도대체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고 앞으로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그런 것들을 알아보자. 알아보는 방법은 뭐냐? 힘을 합쳐서 탑을 쌓아서 우리 이름을 하늘에 내서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 와서 어떻게 해보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에 포함이 안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도 포함 안 되어 있고 ‘주’도 여기에는 포함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를 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가 없어요. 그때 그들이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닿게 하자’ 이것이 바로 그들은 현실이라고 한 겁니다. 현실은 뭐냐? 현재 여기 내가 있다.
‘여기 있는 내 이름을, 나라는 존재를, 나라는 인간을 하늘까지, 무한대까지 계속해서 높여 나가자.’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현실을 가짜라고 봐요. ‘이것은 잘못 사는 것이다. 가짜다’ 합니다. 왜 가짜냐 하면, 이 바벨탑을 짓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짓지 못하게 만들어서 올라가려는 사람들을 그냥 흩어지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말이 통하지 않도록 해서 흩어지도록 했습니다.
이게 뭉개지고 흩어졌지요. 흩어지고 난 뒤에 그 때부터 주님께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가요. 우리가 있는 실제 이 세상 이것 말고, 주님께서 따로 뭔가 만드신다 이 말이죠. <사랑과 영혼> 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거기에 패트릭스웨이지하고 데미무어라는 배우가 출연한 영화인데 인상적인 장면이 뭐냐하면, 몰리(데미무어)가 도자기틀을 돌리면서 도자기를 빚고 있는데 그 뒤에서 셈(패트릭)이 몰리를 감싸 안 듯이 앉아서 함께 도자기를 만드는 그 장면이 있어요.
그때 주제가(Unchaind melody)도 쫙 흐르지요. ‘워- 마이 러브, 마이 달링…’ 그런 게 있어요. 평평한데 불쑥 튀어나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도자기를 하나 만들 듯이 주님께서 새로운 민족을 따로 만들어요. 나라를 만드는데 처음에 여기는 민족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불러다가 그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는 민족의 조상으로 만드는데, 이 조상으로 만들 때 이 사람은 반드시 행함, 노동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을 받는 그런 특별한 민족을 따로 만들어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것이 나중에 이스라엘 되거든요.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어려운 것이 뭐냐하면 이렇게 하나님께 아브라함을 통해서 어떤 나라를 만드는데 그 나라가 어떤 나라냐 하면 이 나라를 빼놓고는 몽땅 다 저주 받도록 하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벨탑 쌓던 사람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사람을 반드시 뭐 받게 한다?
반드시 저주받게 하고, 하나님의 징벌과 저주, 지옥불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라 하나 세웠는데 이 나라가 바로 주의 나라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주의 이름의 나라고 여기 바벨탑에 펑퍼짐하게 퍼져있던 여기는 누구 이름입니까? 사람의 나라예요.
사람들은 사람에 의해서, 그러니까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나라(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티스버그에서 링컨이 했다는 그 연설이 있잖아요. 그런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지옥 될 때까지 영원히 멸망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주의 나라가 등장하는 것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뭐 하기 위함이다? 뭐하기 위함입니까? 저주 받도록 하기 위해서 주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이 현실이기 때문에. 이 이스라엘 속에는 무엇이 삽입되어 있느냐 하면 약속이 침투되어 있고 여기 이 세상에는 약속이 없어요.
약속을 거부할뿐더러 약속을 받은 적도 없어요. 이 저주받은 나라를 가지고 이방나라라고 합니다. 이방나라를 한글자로 개라고 합니다. 어떤 여자가 말하기를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여, 저에게 떡을 주소서’ 하니까 ‘나는 주인의 떡을 개한테 안주는데. 너는 개거든’ 할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하는 말이 ‘탱규, 아멘, 아 엠어 도그. 나 개 맞습니다. 개도 순서기다리면 혹시나 떡부스러기라도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먹다가 혹시 버린 떡이 있잖아요. ‘주인이 먹다가 버린 떡이 있는데 그 떡도 개가 먹으면 그 개도 구원받습니다.’ 그래 되거든요. 그 여자는 뭘 현실로 봤습니까? ‘나는 훌륭하다. 나도 인간이다. 나도 복 받을 만하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 ‘나는 개다.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한 개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무엇으로 받아들였습니까? 현실로 받아들인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놀래서 ‘세상에 이만한 믿음이 있는 것은 처음봤다’ 고 된 거예요. ‘세상에 이만한 믿음이 어떻게 있느냐?’ 어떻게 약속을 집어넣어서 현실을 볼수 있는 그런 눈이 있느냐? 제가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애초에 없었어요. 그 이스라엘이 처음 나라 생길 때 애굽에서 빠져나오면서 나라가 생겼거든요.
그 빠져 나올 때 지독하게 융통성이 없는,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하는 죽음의 사자가 뭘 보고 넘어갔다고 했습니까? 어린양의 피만 보고, 그 집안이 부부싸움을 하든 집안싸움을 하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피만 보고 넘어 간 거예요. 피만 보고. 이거 연극한 적 있지요? 우리 한 번 둘이 싸워볼까? 피 바르고.
둘이 붙들고 싸우는데 죽음의 사자가 ‘어이, 왜 싸웁니까?’ 말리지도 않아요. 앞에 피만 보고 싸우든 말든 그냥 구원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평소에 나 자신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그런 에 신경 뚝, 신경 쓰지 말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 제가 착하게 살면 어때요?’ 그런 질문은 하는 것이 아니에요.
강의 다시 해야겠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했지요. 제가 목회하면서 어떤 사람도 ‘내가 주의 복음을 위해서 뭘 할까’를 묻는 사람이 없다고 했지요. 대부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할까요?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전부 다 자기와 자기 가정의 문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은 천사는 ‘네가 어떻게 하느냐’를 묻지 않고 네 앞에 뭐가 발려져 있느냐, 주님의 피가 발려져 있느냐, 그것을 합쳐서 현실로 본다 이 말이죠. 그걸 떼버리고 ‘나는 바르게 살아야지. 주여, 이것이 현실 맞잖아요. 말씀대로 살까요?’ 성경은 폼으로 있는 것이고 이걸 자꾸 현실로 보더라는 말이죠.
그런 현실은 우리가 지어낸 현실입니다. 칼빈주의도 분명히 이렇게 했어요. 세례문답할 때 이런 것을 주고 받습니다. ‘우리는 진노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며…’ 그것을 분명히 목사가 묻고 답을 했거든요. ‘당신은 진노 받아야 마땅함을 아십니까?’ ‘예.’ ‘그러면 세례를 주겠습니다.’ 분명히 해 놓고 세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저주? 그걸 왜 받지?’
저주 받는 이유도 모르면서 무조건 시키는대로 해야 세례를 주니까 무조건 ‘예, 예’ 하고 대답하고 이야기하더라는 말이죠. 성경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저주 받아야 마땅하며 진짜 마땅합니다.’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되고, 구원받을 입장이 안 됩니다’ 하는 뜻이에요.
‘구원받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한테는 배제되어 있어요. 왜?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니까. 우리는 개 같은 이방인이니까. 성경을 열독을 했느니 백독을 했느니, 심지어 어떤 사람이 천독을 했다고 해도 우리는 이방인에 불과하며 구원은 유대인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별로 안돼요. 왜 안 될까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에서 배제하기가 상당히 힘들기 때문에 그래요. 남은 지옥가도 자기는 천국가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 대우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한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주를 모르기 때문에 약속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신경을 잔뜩 가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 앞에 어린양의 피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신약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그래서 그게 어렵다는 거예요. 오늘 제가 강의할 것이 ‘주’와 ‘안’입니다. 그래서 ‘안’이라는 말이 어렵다는 거예요.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여기에 식구가 네 명 있고 아버지도 있고 엄마도 있는데 그 때 여기에 뭘 발랐습니까? 피를 발랐지요. 피를 바르니까 죽음의 사자가 피를 보고 넘어갔잖아요.
그렇다면 이 안의 의미가 뭐냐 이 말이죠. ‘안’의 의미가 그대로 인수인계 되어야 이것이 오늘날 신약의 믿음의 의미다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믿음의 의미인데 오늘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생쇼를 하는 거예요. ‘믿습니까?’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맨날 이짓하고 있다는 말이죠.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습니까?’ 그것은 자기 결심이죠.
그것은 네 생각이고 ‘믿습니다’ 하는 것은 구약에서 보면 안쪽에 있죠. 안쪽, 어느 안쪽에? 앞에 피가 있어서 뒤에는 뭐가 있는지 안보일정도로 깊숙한 안쪽에서 우리가 동행하면서 존재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로 안쪽에 있는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그런 것을 제시하면 안돼요. 안에 있는 사람 특징이 뭡니까?
‘바깥에 뭐가 발려 있습니다.’ 바깥을 이야기해야 그 사람이 안쪽에 있다는 것이 고백이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디에 있지요?’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당신 누구죠?’ ‘저요, 저요, 저는 말이죠.’ 이것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톡 튀어 나온 거잖아요. 톡 튀어 나온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예수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안쪽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한테 새삼스럽게 우리한테 뭘 하라고 했을까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의 사자가 융통성이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융통성이 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 그래서 약속 아닙니까? 약속된 것만 개입시켜야 우리가 몰랐던 현실을 알게 돼요.
그 약속이 뭐냐? 그 약속은 우리가 만든 약속이 아닙니다. ‘일곱시에 다방에서 만나자’는 식으로 우리가 약속한 적 없어요. 약속은 주께서 주와, 성부께서 성자와 하신 거예요. 참 이런 소리는 좀 뭐하지만 ‘저희끼리’ 했어요. 하나님쪽에서 다 해서 그 결과물로, 예수님의 자기숙제로 만든 것이 뭐냐? 이것이 주의 나라가 되는 거예요.
제가 흥분한다고 해서 더 믿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천천히 다시 해 봅시다. 원래 바벨탑을 쌓아 올릴 때 그 때는 주의 이름이 없었고 누구 이름밖에 없었다? 우리 이름, 신곡시장 거리에 돌아다니는 눈에 보이는 많은 우리와 같은 이름, ‘아, 대한민국’ 이명박 정권하에 있는 우리이름, 북쪽에는 김정일이 있는 저희들 이름, 대포동 2호인가, 광명성 2호인가 쏘아올리는 그 이름.
이번에 인공위성 쏘아올리는 것을 보고 제가 느꼈어요. 그들이 인공위성 쏘아올리는데 들어가는 금액이 3천억이 들어간답니다. 3억불이 들었대요. 3억불 들여서도 인공위성 하나 궤도 위에 올려놓지를 못했어요.
주님께서는 피 만해도 천국에 올려버립니다. 3천억 들여도 인공위성 하나 하늘에 못 올려놓는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놀게 만들어버렸어요. 어느것이 현실입니까? 이방인들은 그것을 하나의 교리요 전설이라고 보지만 그 당시에 직접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독대해서 만났던 모세의 눈에는 유일한 현실이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생긴 이 나라가 전 세계의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나라라는 그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기존의 종교와 전설과 신화 철학, 이런것들을 죽 공부해 오는 이유가, 유대인들은 약속을 포함해서 그것을 현실로 보지만 약속이 빠진 상태에서 인간들은 어떤 노력을 하느냐? 물론 성경에 보면 바벨탑 쌓았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바벨탑을 쌓기 위해서는 과학기술뿐만 아니고 모든 사회과학 인문과학, 경영도 해야되고 법적으로 처리할 것도 있을 것이고 모든 인류의 역량과 지혜와 지략이 다 포함되어 있을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바벨탑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불교라는 종교 기독교라는 종교, 천주교라는 종교, 이 종교를 통해서 모르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려고 접근해 나가느냐 이 말이죠.
접근해 나가는 그 행함과 행함 하나하나가 누적이 되어서 접근해 나가니까 그것이 가짜고 그것이 엉터리다 이 말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상주를 갔는데 차 댈 곳이 없어서 성당 안에 주차했어요. 물론 전에도 많이 봤습니다만 새삼스럽게 뭘 봤느냐 하면, 성당에 가는 사람들이 성당에 가자마자 딱 서가지고 뭘 하느냐 하면 입구에 들어오기도 전에 길 건너면서부터 벌써 마리아상을 보면서 기도하고 있더라는 말이죠.
이것은 제가 절에 가서 보기도 했는데 절에서 부처에게 하는 것과 똑같아요. 와,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성당이라는 것은 언제부터 이런 짓거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쳤을까? 성당에 다니는 천주교교인들이 만약에 이걸 마리아한테 안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 다 이렇게 하는데 자기가 안하고 갔을 때 과연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질까, 시험이라도 해 봤느냐 이 말이죠.
십일조 하는 교인이 어느 날 십일조를 안했다고 했을 경우에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든가요? 혹시 날벼락이 떨어졌다면 그것은 마귀한테 받은 거예요. 주님께서는 뭐가 부족해서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주를 보내심으로서, 주를 보내실 때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잃어버린 양으로 삼아서 보냈기 때문에, 잃어버린 양한테 돈 울궈내는 그런 주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렸잖아요. ‘네 아버지 누구야?’ ‘몰라요.’ ‘집은?’ ‘몰라요.’ ‘나한테 십일조 내면 내가너 집에 데려다 줄게.’ 이런 주님은 없습니다. ‘기도 두 시간 하면 내가 찾아줄게’ 이런 주님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 속에 자기백성 온전하게 찾아내는 그 과제가, 주님이 이미 아버지에게 받은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하고 하나님이 의논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보고 이렇게 하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건져가면서 우리를 구원하게 된 내력과 그 과정을 우리한테 우리속에 심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는 주님의 증인되는 겁니다.
나의 증인으로 살다가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같은 인간도 구원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살게 한다는 말입니다. 나 같은 인간도! ‘너같은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나 같은 인간이 너하고 똑같은 인간이지. 나밖에 모르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근사해지고 나의 가치가 위대해지고 내 영역이 확장되고 내가 유명인사가 되고 내 이름이 하늘까지 높아지는 그러한 속성을 가진 나같은 인간, 그야말로 저주받아 마땅한 나도 예수님의 피만 있으니 구원 되더라’ 하는 것을 증거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 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만든 새로운 나라이고 이것이 현실이다 이 말이죠.
이것이 약속이 있는 현실이 되는 거예요. 잃어버린 양한테 무엇을 탈취하겠어요. 다 잃어버렸는데.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천국 가는데 ‘스톱! 옷 갈아 입고 오너라’ 이런 소리 안했거든요. ‘밀린 십일조 하고 오너라.’ 이런 소리 안한다고요. 천사가 받들어서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날 설교가 뭐냐 하면, ‘뭘 새삼스럽게 성도는 바치는 것이 아니고, 성도 자체가 이미 바쳐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쟁반위에 이미 올려진 돼지대가리처럼 이미 그 자체가 바쳐져서 ‘받으소서’ 라는 것이 로마서 16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너희 이방인들을 제물로 바쳐서 드린다’고. ‘산제물로.’ 그래서 ‘누가 먼저 바쳐서 구원받겠는가? 모든 것이 주로 와서 주께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데.’ 요한복음 6장에서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는데 내 뜻은 아버지가 내게 보낸자를 마지막에 살리는 이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하시는 솜씨는 우리가 새삼스럽게 추가적으로 우리의 노동을 첨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짓은 저주받을 짓에 해당되기 때문에. 무엇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법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법에 근거해서 그 어떤 법도 우리는 못지킬 뿐만 아니라 ‘모든 법을 다 지키다가도 하나를 어기면 몽땅 다 어긴 것’ 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합니다. 주님이 왔을 때는 주님이 어떻게 구원하느냐? 안에 있게 만들어서 구원한다. 그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안에 있게 만든다. 어떤 사람이 여기 홀로 있는데 여기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아무도 없는 것을 현실로 본다 이말 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덮개가 와서 덮어버리면 졸지에 이 사람은 홀로 있다가 들판에 홀로 개방되어 있다가 졸지에 이 사람은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안’, ‘…안’ 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그러면 그것을 둘러싸는 것은 누구냐? 오늘 에베소서 6장 1절의 말씀처럼 ‘주 안’ 에 있다. 그래서 제가 주를 뭐로 봤습니까? ‘약속’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럼 이 약속은 내가 이룰 약속이 아니고 주님이 이룰 약속인데 주님의 자기숙제이고 자기과제입니다. 주께서 약속을 이루어서 아버지 앞에 바치면 우리도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함께 바쳐지는 겁니다.
이 원리에요. 이 원리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되느냐? 구약의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현대인들이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고 이것을 개인적 입장에서 보니까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하니까 ‘예, 엄마 말 듣고 제가 교회 가 줄게요’ 하면서 만 날 교회 가는 것을 가지고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으로 여기더라는 겁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 ‘해석해 보라.’ ‘아하, 자녀들아 혹시 너희 부모가 교회 가라고 하거든 교회 가고 세례 받으라고 하거든 세례 받고 주일학교 교사 하라고 하거든 교사 하거라.’ ‘예.’ ‘잘한다. 네가 앞으로 세상에서 잘 할 것이다.’ 그래 놓고서는 ‘봐라. 취직 잘되지 않냐. 봐라. 오래 살잖아. 남들 70좀 넘게 사는데 너는 90까지 살잖아. 봐라.’
여러분, 오래 사는 것은 보험회사 잘 만나면 됩니다. 알리안츠 이런 거. 그렇게 되면 이것은 누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누구 숙제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숙제가 아니고 자기 숙제가 되어 버려요. 구약에서는 이 안에 있는 사람을 뭐로 보느냐 하면 ‘포로된 자’, 또는 ‘전리품’이 됩니다. 그리고 이 전리품을 챙긴 주님이 그냥 주님이 아니고 주님앞에 뭐가 붙어요.
뭐냐? ‘우리 주님은 용사이신 주님이다.’ 전쟁을 해서 우릴 이렇게 전리품으로 챙겨서 안에 품고 그 안에 품은 그것을 두 자로 성소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성소 안에 두셔서, 자기전리품을 두셔서 자기영광을 받는 거예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자기 안에 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할 때, 전리품이 될 때 세상에 어느 군대가 전쟁을 하는데 자기 포로 된 자, 전리품을 가지고 ‘너 똑바로 안하면 구원 못 받는다’ 이렇게 할 것이며 ‘똑바로 안하면 다시 너희 나라로 보낸다’ 라고 하는 이런 것이 있습니까? ‘이미 너는 내꺼야’ 라고 한 그런 판국에 ‘너 하기 나름이다’ 라고 다시 가는 그런 것은 없다 이말입니다.
말이 어려워졌는데 이것을 예수님처럼 생각해 봅시다. 강도가 어떤 부잣집에서 가재도구를 훔쳐 갈 때 주인을 꽁꽁 묶어 놓고 난 뒤에 느긋하게 그 가재도구를 가지고 가지요. 그런데 제가 도둑놈이라고 합시다. 한 목사님은 주인인데 꽁꽁 묶어 놓았습니다. 저 옆에 있는 선풍기를 제가 가져갈 때 선풍기가 안 가려고 앙탈을 부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이말입니다.
앙탈을 부리면 안 되지요. 그냥 강도가 가재도구 들고 가면 그만이듯이 ‘하늘나라는 이와 같으니라’ 하늘나라 능력이 오게 되면 앙탈을 부리들 말든 관계없이 그냥 데려가는 과정속에 있는 거예요. 데려갈 때 ‘주님 좀 천천히 가세요’ 그런 것이 없어요. 여러분, 캥거루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캥거루 안에 보자기가 있고 그 보자기 안에 뭐가 들었어요?
캥거루 자기 새끼가 들어 있잖아요. 캥거루 어미가 뛰면 자기 새끼는 자동으로 같이 뛰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주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십자가안에 같이 있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죽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능력으로서 우리를 살려 내는 겁니다.
이것이 현실이에요. 제가 어떤 구원의 희한한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대로 하세요, 가 아니라 ‘이대로 하세요’고 뭐고 없어요. 이게 주님의 약속을 집어넣고 만들어낸 주님에 의한 현실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현실입니다. 주가 나와 함께 있다는 현실. 그리고 그 주님은 나와 맞상대 하시는 분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나를 끌고 가시고 데려가시고 인도하시는 그분이라 이 말이죠.
누가복음 마지막 대목 봅시다. 이 대목 아주 좋아요. 성경의 어느 대목도 좋습니다만 이 대목이 아주 맘에 들어요.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이것을 다 같이 찾아 봅시다. 누가복음 24장 13절인데 제가 질문을 드릴테니 답변해 보세요.
누가복음 24:13-17,30-31
“그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가지요. 가는데 15절에 보면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지요. 그런데 30절에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봤지요.
질문입니다. 처음부터 ‘나는 주님이다’ 라고 왜 이야기를 안 해줬을까요? 바바리맨처럼 ‘짠, 내가 주님이다’ 하는 것처럼 왜 처음부터 눈을 활짝 열도록 하지 않았느냐 그 문제입니다. 왜 꼭 떡을 떼실 그 때에 눈을 밝아지게 하셨는가? 제가 답변하겠습니다. 이 두제자가 구원받고 영생 얻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누구의 공로입니까?
예수님의 공로지, 어떤 경우, 주님이 가까이 옆에 있는 경우라도 자기 능력으로 눈 뜹니까? 못 뜹니까? 자기 능력으로 눈이 안 뜨인다는 것을 지금 모델로 보여주는 거예요. 성경공부해서 눈뜨는 게 아니고 기도해서 눈뜨는 게 아닙니다. 자기 능력으로 눈이 안 뜨여져요. 그래서 제가 대구공부 할 때 했지요. 『피』라는 책에 나옵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그것이 얼마나 큰 충격인지 나의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이라는 겁니다. 나의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이 뭐냐? 내가 주 안에 있다는 것. 이 충격은 내가 죽는 것 보다 더 큰 충격이에요. 약속이 없는 이 세상, 이 신곡시장의 사람들, 약속이 없는 사람들의 충격은 어떤 충격입니까? 자기가 죽는 것, 이것이 제일 큰 충격입니다.
자기하고 가까운 사람이 죽는 것도 큰 충격이지만 제일 큰 충격은 본인이 죽는 거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죽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 뭐냐, 내가 죽는 것도 별 충격이 아니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그것은 현실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죽든지 살든지 내가 주와 함께 있다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아는 충격, 이 충격이 최고에요. 최고에요.
‘목사님, 저는 그게 잘 안 느껴져요.’ 글쎄 그게 느껴지고 안 느껴지고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처럼 그 사람들이 예수님 이야기만 했잖아요. 그 다음에 눈 뜨고 안 뜨고는 그것은 이목사 소관이 아니고 진짜 주님 소관입니다. 제가 하는 것은 ‘이렇게 하시면 눈뜹니다’가 아니라 눈뜬 사람은 자기 죽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맙고 감격할 뿐이라는 겁니다.
불행 끝, 행복시작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인생은 내가 만들고 내가 다듬어가는 인생인데 눈뜨고 난 뒤에는 태어날 때부터 창세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생각이 있으셔서 나를 이 땅에 새롭게 만들어 냈다는 사실, 만들어 내시고 주님 없는 듯이 살다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믿고 살게 하고,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신거예요.
고등학교 퇴학당했다면 학교를 퇴학당하게 하시면서까지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우리 인생에서 어떤 역경과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그 융통성 없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체 행함을 묻지도 않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자신의 피, 십자가 피를 보고 우리를 건져 가시는 그 현실이 진짜 현실인 것을 우리에게 집어넣는 작업을 계속 우리에게 앞으로도 하실 겁니다.
떡 먹고 다시 합시다.
첨부파일 : 서울090410a엡6장2절a.hwp (48.0K), Dow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