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심령
38 우리야의 아내 에게서 031108상한 심령(삼하 11-12장)지난 시간에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부부 이야기를 하면서 유다가 다말로 인해 새롭게 알게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통해 아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 였구나, 다른 사람이, 이방인이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다는 죄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죄를 아는 것은 기적입니다. 죄란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몰라 봤다는 것 자체가 죄다 라는 겁니다. 유다는 은혜 입은 다말을 몰라 봤습니다. 다말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못알아 봤습니다. 그러나 다말이 불태움을 받을지언정 창녀처럼 비천하고 낮고 천한 자가 될지언정 다말은 약속을 끝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말의 낮아짐 때문에, 섬김 때문에 유다는 비로소 자신이 불태워 죽일려는 다말로 인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 (창 38:26) 라고 고백합니다.마치 예수님이 유대인(우리)들에게 그동안 기다리고 기다린 메시야가 바로 자기자신임을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어둠에 가려져서, 자기를 위한 우상적인 메시야, 우상적인 하나님을 고대하던 잘못된 구원관으로 , 오히려 어둠이 심판 받아야할 그 자리에, 정작 유대인(우리)들이 받아야 할 십자가의 형벌을(신 21:23) 대신 당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끝까지 용서하시고 끝까지 참으시고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는 그 어리석음을 깨뜨리고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셔서 다 이루신 것처럼 말이지요. 똑같은 상황과 의미를 다말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미리 앞당겨 보여 줍니다. “나의 나 된것은 주님의 은혜라”(고전 15:10)라고 고백하던 바울도 역시, 유다와 똑같은 다말의 핍박자요, 스데반 집사님을 죽인 선동자요,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 붙여 이단을 뿌리 뽑고자 온 열정을 다해 예수님을 믿는자를 핍박 하는자,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행 9:4-5) 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울을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바울을 바울답게 하시는 직접 찾아오심을 통해 어두운 눈에 비늘이 벗겨내시는(행 9:18) 작업을 하신 겁니다.지금도 우리에게 유다와 같은 죄성을, 깊이 자리잡고 있는 그 심각한 죄성을 들추어 내어서 십자가에 못박고자, 오로지 주님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살도록 용서받은 자로서만 살도록, 쉬지도 않고 우리와 악한 영들과 죄악과 싸우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어떤 누구도 자랑할 육이 없습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공로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기에 그 피만 증거하는 운명 외에는 없는 겁니다.자 그럼 오늘 그 다음 타자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신기한게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다섯 여인이 족보에 나오고 그 다섯 여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면 당연히 밧세바 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야의 아내라고 밧세바를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요? 여성신학자들이 보기에 기분 나쁘지 않을까요? 여태껏 실컷 남자들 세계를 혼내주는 말들을 하고 여성을 높여줄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밧세바를 왜 빼고 왜 우리야의 아내라고 언급하느냐고 따질수 있지 않겠습니까?성경은 인간을 옹호하는 책이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을 증거하는 계시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해서 여자는 자동적으로 구원의 세계에 참예 되는 것이 아니듯 말이지요. 여자든 남자든 결국 이 땅에서 심판이 남녀 차별없이 주어짐을 알고 그 심판의 기준은 바로 그리스도의 세계로 인해 이루어짐을 알기 위함입니다. 그 심판 앞에서 죄인임 알고 그 죄를 용서 할 분은 예수님 뿐이라는 것인데 우찌 그 앞에서 남녀의 차이를 언급 할 수 있겠습니까? 두쪽 다 죽는 입장에 ....그렇기에 그 죄인임을 아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우리야의 아내를 사용한 것입니다.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를 통해 죄를 들추어 내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다윗의 죄성을 들추어서 다윗의 죄를 도말하는 은혜를 누구를 통하여 작업을 하시는가 하며는 바로 우리야의 아내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a. 아니 그러니까 그 우리야의 아내가 밧세바 아닙니까? b. 네 맞지요. a. 그럼 우리야 빼고 밧세바라 해야 맞지요.b. 아닙니다. 우리야를 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입니다.a.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똥고집입니다. 우리야와 그 아내를 한 덩어리로 언급 하십니다. 지금 여자냐 남자냐를 언급 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죄와 연관성을 가지면서 언급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야도 그의 아내도 같이 언급하는 겁니다. 밧세바 라는 이름이 표기 되지 않은 것에 너무 서러워 마세요 여성 차별을 말하는게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의 내막이 어떠한가가 중요하지 인간의 이름은 중요치 않습니다. 어차피 예수님의 이름에 모든 것을 걸었기에 그 이름만으로 족한 겁니다.그럼 왜 우리야를 언급해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을 두 동강 내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인 겁니다. 다윗은 우발적인 충동으로 인해 자신의 실수를 감출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발적인게 아닙니다. 모세가 한참 잘나가던 입장에 하필이면 브레이크를 거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영웅답게 큰 일을 해야하는데 그만 자기 영웅심을 대업에 쓰지 못하고 자신의 정의감에 못이겨 그만 애굽인을 죽이는 사건을 통해 구원자는 커녕 살인자로써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아 안타깝다 위대한 구원자가 될수도 있었을텐데? 아닙니다. 이것이 당연한 겁니다. 만약 그런 실수가 없었다면 모세는 주님의 종이 아닌겁니다. 그럼 주님의 종이 되는 조건에 실수가 포함 됩니까? 그럼 실수 찾아서 일부러라도 해야겠네요? 그것도 물론 아니지요. 도대체 무엇을 말할려고 하는 겁니까? 제발 인간은 뒤로 빠져라 라는 겁니다. 주님의 자신의 공로만 남기기 위해서 인간의 그 무수한 잘남을 다 헛됨으로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마찬가지로 다윗이 지금 왕좌에서 그 잘남 속에 있기에 그것을 두 동강 내기위해, 오로지 주님의 공로만 열심만 남기기 위해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도 무수한 사건이 우리 일상 생활에서 터지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낮추시고자 함입니다. 예수님 만으로만 남기고 다른 것은 다 안개로 만들기 위함이지요. 나도 옛날에는 대단한 믿음이었는데, 나도 왕년에는 잘나가던 신앙이었는데. 그거 다 소용없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다윗에게 일부러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죄인임을 알기 위해, 왕좌에 있는 다윗을 죄인임을 알게 하는 은혜가, 그래서 왕좌 때문에 예수님을 고대하고 기다리지 않는 교만한 마음을 꺽고자 주님은 인간이 원치 않는 달갑지 않는 자기 사랑의 세계를 집어 넣으시는 겁니다. 그럼 다윗은 억울하겠네요? 아닙니다. 드디어 홀가분하게 왕의 무거운 짐을, 자기도 남도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그 기대치를 “나 아니오 주님”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피조물은 창조주를 바라보도록 자신은 창조주를 증거하고 뒤로 빠지는 역할로써 주님을 증거하라고(참으로 희안하게 증거하지요) 주님을 증거하라고 이런 실수가 사건이 주님 쪽에서 펼치시는 겁니다. 본인은 물론 힘들고 죽어나지요. 자신 스스로가 이렇게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기부인의 길이 완벽하고픈 인간성이 도리어 올무가 되어 자기 욕심에 자기가 스스로 넘어져서 비로소 자기부정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는 그 길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다윗은 왕이었으나 평생을 쫏겨다니는 성전을 사모한 그 열심히 도리어 성전을 소유하고자 하는 무리들에게 의해 늘 쫏겨다니는 머리둘 곳 없는 처참한 인생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졸지에 종용히 끊어짐을 당해야 하듯, 다말이 창녀노릇을 하면서 까지 유다에게 불태움을 받을지언정, 독생자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도통 인간의 지혜로는,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는 접근 조차 할 수 없는 일관된 주님의 십자가의 지혜가 우리 마음을 찔러 쪼개기 까지 합니다.그럼 예수님 믿는 길이 이래 힘든겁니까? 네 죄 아래에 있기에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겠지요. 그런데 예수 믿어서 복받아 성공하자? 말도 안됩니다. 그러나 비록 힘들지만 사실은 그것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 땅에서 왕으로써 머리 둘곳이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이었다면 그는 결코 죄를 알지 못하고 앞으로 오실 주님을 고대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비로소 땅에서 소망이 없을때 하늘에 소망을 두며, 육이 날마다 쇠할 때, 영은 날로 새로운 겁니다. 다윗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주님은 다윗을 늘 죽음의 문턱에 몰아 넣으십니다. 이 땅의 죄악에 몸서리 칠 정도로 구석으로 몰아 넣으시고 오로지 주님의 이름에 모든 것을 걸도록 땅의 소망을 모두 빼앗아 버리십니다. 말도 할수 없는 핍박이 양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듯 몰려 옵니다. 가족이 원수가 되고, 그 원수의 손을 피하기 위해 왕자리를 버리고 가장 낮은 밑바닥 인생을 격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우리야 장군과 같은 길을 가게 되지요 비록 자신의 손으로 죽였지만, 우리가 비록 우리 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아 죽였지만, 그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 했듯이 우리도 이제 용서 하며 사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다윗 또한 우리야가 고대한 주님의 이름에 모든 것을 걸기 위해 주님은 우리야가 오로지 거룩한 여호와 전쟁에만 관심 있었던 그 마음을 영의 마음을 집어넣기 위해 육을 쇠하게 하시는 겁니다. 결국 다윗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 였음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마치 유다처럼 말이지요. 그런 원수를 사랑한 그 십자가의 사랑을 처다 볼때, 불뱀에 물려 아무것도 할수 없는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 입장에서 그 장대 높이 달린 놋뱀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크신 은혜인지 말로 다 표현 못합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수에 칠 가치 없는 인생인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그 생명 되신 길 되신 진리 되신 증거하는 인생은 두말할 나위 없이 가장 용서받은 빚진자인 겁니다.나단선지자는 다윗의 죄를 지적하는 결정타를 날림과 동시에 다윗이 죄를 알아서 고백하고 회개하기 이전에 미리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을 증거합니다.(이상하지요) 병주고 약주고 혼자 나팔 분다고 비아냥 거릴수 있지만 그는 보내심을 받았기에 그 보내신 분의 뜻대로만 증거하는 증인일 뿐입니다. 심판과 용서를 한숨에 단번에 증거함으로 다윗이 회개했기에 용서한게 아니라, 이미 그 용서한 사랑이 그를 회개의 은혜 안으로 몰아가는 겁니다. 회개가 용서받는 조건이 아니다는 겁니다. 회개하는 마음 조차도 주님이 허락하심으로 가능하기에 그저 다윗은 자신의 그 죄악에 치를 떨며 울 뿐입니다.(시 51: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시 51: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시 51: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다윗은 눈을 뜹니다. 주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합니다. 주님이 왜 이런 아담 이후의 세계를 홀로 죄와 싸우시는 그 이유는 다윗은 이제 개인적인 차원의 세계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의 싸움의 대상인 죄의 심각성과 자신이 죄 아래에 갇혀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기에 비로서 주님의 마음은 무엇을 원함을 알게 되는 겁니다. 예수 믿어 부자 성공한자 예수 믿는 사람이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런 훌륭한 자가 되는 그런 비젼의 꿈을 가지는 자가 아니라, 정작 주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그 제사와 연관된 모든 종교적 의식도 원치 않고 번제 등의 모든 의식을 원치 않고, 정작 주님이 찾으시는 자는 상한 심령, 즉 죄인(자기 죄를 해결해 달라고 장대 높이 달린 구리 놋뱀을 처다보는 자). 자기 부정 하는 자를 원하신다는 겁니다.(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예수님이 오신 이 땅에 오신 이유 또한 그러합니다.(요일 4:9)(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참 이상하지요? 심판 안하신다고 해 놓고 심판을 언급하지요. 즉 악한 다윗을 죽이고 상한심령 다윗은 구원하는 살리는, 죄에 대한 저주는 분명히 심판을 하시고 그로인해 다시 살리시는 심판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죽이고 다시 주 안에서 살리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요? 선악과를 먹고 신(하나님)과 같이 된(창 3:22) 마음? 아니지요 그 마음을 반드시 죽이고 심판하고, 새마음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새마음은 상한 심령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자신의 마음을 직접 넣으셔서 새피조물로써 시작하는 세계입니다. 다섯 여인의 주님을 영접한 그 마음은 바로 다윗이 고백한 그 상한 심령(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 상한심령을 흉내 낼수 없기에 죽이시고 심판하시고 육을 쇠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시고 머리 둘곳 없게 만드시고 비로소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한심령을 원하는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상한 심령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독생자를 버리시면서 까지 끝까지 사랑한 끝까지 용서하신 하나님 자신의 마음. 긍휼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주님 ! 다윗을 통해 우리의 악한 모습을 또 보게 됩니다. 맞습니다 다윗이 주님이 베푸신 은혜로 알게 된것은 다윗 자신이 바로 주님의 원수 주님을 십자가의 저주에 못박은 원수임을 알고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가 아니라 바로 상한 심령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버리시면서 까지 그 찢어지는 마음 속에서도 죽음의 권세를 끊으실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원수의 손에 내어 주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지셨습니다. 그 주님의 낮아진 마음, 아버지의 긍휼하심, 십자가의 사랑, 상한심령이 아니면 어느 누가 우리를 악에서 구원 받을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악에서 건지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넉넉히 승리하신 그 주님의 승리를 날마다 누리며 사는 자유를 나누어 주는 빚진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