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2:20-24 (귀한 포도나무)
렘 2:20-24 (귀한 포도나무)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예레미야 2장 20-24절
제목 : 귀한 포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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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4-15 20:58
귀한 포도나무
2009년 4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0-23
(렘 2:20, 개역)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렘 2:21, 개역)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렘 2:22, 개역)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렘 2:23, 개역)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너는 발이 빠른 젊은 암약대가 그 길에 어지러이 달림 같았으며』
실제 하나님과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항상 엇나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하나님상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배신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은 도리어 자기 백성을 나무라시고 책망합니다. 이것은 기존의 하나님상에 호응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전혀 다른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 이유는, 이미 인간들은 죄와 오류의 권세 아래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십자가 없이 부활하시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건장한 모습으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시체가 되셔서 거기에서 되살아나시는 형태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즉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확실한 3일이라는 단절이 있게 되는데 이 단절이 꼭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사도들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 다음 절차로서 부활하심으로서 이 세상의 ‘죄의 권세’ 아래에 있음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 이외에 그 어느 누구도 부활한 적이 없다는 말은, 여전히 인간들은 죄의 권세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죄의 권세란 곧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행함보다 죄가 더 세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죄가 만들어낸 하나님과 죄가 만들어낸 생각대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 부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게 될까요?
죄의 권세에서 빠져나오는 경우란, 이미 죄의 권세에서 빠져나오신 그 분의 빠져나올 때 발휘된 그 능력이 그대로 작용할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이로서 구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왜 이것이 기적이냐 하면, 인간들의 죄성에서 나오는 구원은 반드시 자기 구원을 먼저 교려하는 식으로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라고 묻는 식이 바로 죄에서 나오는 구원욕심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든지 꼭 구원되어 마땅하다고 우기는 겁니다. 자기 중심을 버리지 못한 소치입니다. 여기에 대한 정답은 이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집니다”고 말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이미 죄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여호와를 찾고 메시아를 찾아도 그런 것들이 다 구색이요 위선이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너무 아십니다. 그들의 내부에는 바알 종교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알 종교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입니다. 인간의 소원이란 땅의 생산력과 관련있습니다. 곡식이 잘되고, 자신의 가문이 번성하고, 벌리는 일마다 대박나는 그런 생산력을 얻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의 심리를 하나님께서는 발정기에 들어선 창녀의 욕정에다 얹어서 설명하십니다. 발정기에 몸이 한껏 달아오른 창기는 남정내가 못내 그리워서 환장을 합니다. 어쩌지를 못하고 자기 몸을 상대방에서 다 맡깁니다. 바로 이런 본성이 지금 유다 백성들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순전한 포도나무는 요한복음 12:24의 말씀처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지만 만들어지는 나무입니다.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이 인간 군상들이기에 아무도 자기 죄를 극복하면서 죄에서 빠져나올 위인이 없습니다. 도리어 인간들은 잘못된 하나님상을 가지고 참된 하나님을 죽이는데 동조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욕심이 자동차 엔진 가동하듯이 발동을 일으키면서 자신들이 예상한 하나님을 섬기면서 반대로 참된 하나님은 살해해버리는 일을 짓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포도나무는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구원에 우선적으로 욕심을 내기 때문에, 죄있는 자신을 포함시킨 그런 포도나무를 염두에 둡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나리오는 이러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결한 포도나무가 되고 싶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더니 과연 그 순결한 포도나무가 되었다”라는 줄거리를 원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5:5-6에 나와있는 참된 포도나무의 성경 내용은 이런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포도나무는, 저주를 발생하는 포도나무요, 심판을 행사하는 포도나무입니다. 즉 참된 포도나무를 키우는 그 씨앗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배척받고 미움받은 씨이기에 이 씨로 인해 자라난 포도나무도 이런 저주와 심판의 속성을 그대로 품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제일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바로, 죄와 저주와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죄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천국과 지옥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된다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상상합니다. 마치 산 밑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 보면, 번듯한 별장이 한 채 서 있음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별장이 접해 있는 바로 높고 깊은 산 위에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보면 그 별장이 숲에 가리워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사는 형편에서 하늘을 보며서 자꾸만 상상한 하나님을 구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지상에 내려보내신 것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것도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 그분 뿐입니다.
사람들은 평생을 살면서 항상 뭔가 먼저 예측하고 예상하며 살게 마련입니다. 그 예측과 예상은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되고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욕심들이 마치 발정기에 접어든 창녀들의 발작처럼 정신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신을 찾아나서게 마련입니다. 뭔가 답답하고 사는게 힘드니까 자신의 생존에 도움된다든지 혹은 자신의 형편을 지금보다 더 확장시킬 능력을 간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 영이 임하게 되면, 우리 안에 바알을 향한 탐욕이 있음을 알고 이것이 죄인 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죄인의 입에서 나올 고백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저주받을 저를 구원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얼마나 더러운지 우리가 늘 통감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구원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지워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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