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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0407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야고보서자유게시판야고보서

20090407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야고보서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407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야고보서

(강의:이근호 목사)

사도 바울을 볼 때는 개인으로 봐야 돼요.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내가’가 들어간다고.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다’ 빌립보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항상 내가 나와서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그리고 유대인, 저 집단은 뭐냐? 집단은 몽땅 문제가 크다. 왜? 예수를 죽인 집단이기 때문에.

그리고 집단이라고 다 버림받는 건 아니지만 집단 갖고 우기고 버티다간 우리 집단은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믿다간 그건 엉터리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믿게 된 것은 저 집단 속에 집단주의가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죽게 만든 집단이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개인적으로 성령이 오게 되면, 아까 이창섭 목사님이 이야기한 게, 개인적으로 성령이 오게 되면 개인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그런 양상으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명할 수 있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거는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열두 사도와 구약의 열두 지파와는 단절돼버립니다. 육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다?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 같으면 돌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다.’ 완전히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 그대로 단절시켜놔요. 그런데 야고보는 단절이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단절이 있느냐 하면, 집단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개인으로 갔기 때문에 개인은 다시 개인으로 오면 안 되죠. 교회가 안 되니까. 성령께서 전부다 연결시켜서 하나의 연합체를 만들어버리면 이게 뭐가 돼요? 교회가 되잖아요. 이걸 유기체라고. 심장, 간 따로 있으면 안 되잖아요. 심장, 간 따로 있으면 죽습니다. 심장 저쪽에 오 미터 Ep고, 여기에 간 칠 미터 떨어져있으면 이건 인간이 아니죠. 같이 뭉쳐져 연합해서 연결돼있을 때 그건 각자 다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경우는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연합돼서 구원받죠. 그걸 뭐라 합니까? 거대한 그리스도 몸이라 하지 않습니까? 몸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하고, 어떤 사람은 손 역할하고, 어떤 사람은 눈 역할하고. 그러나 서로서로 어느 것이 천하고 귀하다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사도 바울이 만나는 특징이 뭐냐 하면, 아무리 개인으로 출발했지만 바라보기는 누굴 바라보느냐? 머리 되시는 분만 바라봐야 돼요.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이나 야고보나 만납니다. 틀린 게 없어요. 지금 사도 바울을 오해한 게 집단에서 개인으로 갔다가 집단으로 가야 되는데 안 가고 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았지. 십자가로’ 개인으로 머무르기 때문에 그때 야고보와 만나니까 야고보가 문제되는 거예요.

야고보는 아예 개인 없습니다. 처음부터 집단으로 와서 집단으로 가버리죠. ‘개인이 없다’는 말은, 개인적으로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은 야고보에서는 성립이 안 돼요. 그런 것은 묻지도 말고 그런 것은 오히려 야고보가 물어요. 그게 무슨 말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지. 어떻게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생각을 하지. 뭘 지켜서 구원받습니까? 이게 왜 생기느냐 말이죠. 왜냐하면 유대인 자체가 이미 하나님 백성인데, 하나님 백성이면 백성된 걸 지키면 되지, 거기서 개인적으로 따로 나와서 ‘저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은 필요 없지요.

이 앞에 128번인가 다니죠. 128번 버스 안에서 전부다 가잖아요. 그러면 되는데 저 사람하고 나는 어떻게 가지? 저 사람하고 같은 차를 탔다 생각 안 하고 나만 혼자 버스 탔다고 생각하는 것은 버스 자체를 모독하게 돼요. 그러면 이런 게 있습니다. 쉬운 예니까 그냥 들으세요. 더울 때 버스 앉은 사람은 안 덥다고 창문을 안 열어줘요. 열어버리면 바람 들어온다고 짜증내버려요. 지만 생각하니까.

전체를 생각할 때 더우니까 창문 열어라. 이게 야고보서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열고 싶지 않아요. 이게 바로 자기 개인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이 개인에서 집단으로 가지 못하고 개인으로 머물러버리면 개인적 구원관이 야고보에 그대로 환원되니까 그때부터 야고보 자체가 꼴 보기 싫은 겁니다. 루터도 마찬가지.

야고보는 집단 전체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을 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가 제대로 저주받는 이유, 왜 우리는 주어야 될 이유, 제대로 아는 집단은 우리 유대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바로 유대인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 메시아라고 인정하는 우리 유대인들은 메시아 덕분에 옛날 그 전통과 그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다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야고보서를 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의미는 뭐냐? 다시 할게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아는데 거기에 율법이 들어갑니다. 율법이라 하지 말고 구약 전체를 하게 되면, 여기 처음에 창세기 3장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가 나오죠. 1장에 하나님 형상 나오죠. 그걸 우리끼리는 알잖아. 우리는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모세를 통해서 창제의 비밀, 진짜 천기누설 하듯이 천지창조하신 하나님을 누구만 아느냐? 열두 지파 우리는 안다 이 말이죠.

우리는 알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팍팍 나오는 거예요. 악마가 어떠니, 하나님 형상이 어떠니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그 아는 이야기 앞에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집단 자체가 개인을 용납하지 않아요. 전체를 위한 개인이에요. 개인이 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전체를 굴러가게 할 것이냐를 필요한 개인이라고.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스라엘답게 하느냐 여기에 있기 때문에.

여기는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의 참된 지혜가 있으면 돼요. 그 지혜자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뭐가 없느냐 하면, 십자가 부활의 의미가 사도 바울처럼 의미가 없어요.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초점이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우리 지파가 어떻게 옛날 진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과 지혜의 정신을 온전히 이룰 것인가? 거기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 부활의 개인적인 의미는 없다 이 말이죠.

다만 있다면 성령이 있죠. 사도 바울의 성령은 뭡니까? 고린도전서의 성령이라 하는 것은 성령이 있고, 없고를 뭐로 따집니까? 십자가로부터 구원의 능력이 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깊은 뜻을 아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이에요. 성령 받고 안 받고를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 안에 있느냐, 없느냐 그 여부로 따졌지만

여기 야고보서의 성령은, 하나님의 지혜가 위의 지혜와 아래 지혜를 구분할 수 있는 인식이 있느냐, 없느냐 거기에 있는 거예요. 행하냐, 안 행하냐는 관계없어요. 왜냐하면 알면 반드시 행하기 때문에. 왜 그러냐? 인간은 악마한테 영향 받듯이 쓴물 아니면 단물이에요. 여기 야고보서에서는. 샘이 있으면 뭔가 내게 돼있는데 쓴물 아니면 단물이고, 독 아니면 찬양이 나오게 돼있고. 둘 다 안 나오는 경우는 없다 말이죠. 반드시 내게 돼있는데

지금까지는 지혜를 몰라서 우리 이스라엘이 독을 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지혜자로 오고 난 뒤에는 그동안 우리가 소홀히 했던 율법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죠. 성령이 온 사람한테는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처럼 모든 율법을 다 드디어 행함으로 그 지혜가 옴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처지에 입장에 놓여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개인은 없지요. 옛날 집단과 어울려서 같이 살았던 흩어져도 마찬가지에요. 흩어지나 가까이 모여 사나 관계없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운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받고 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반기고 그걸 그리워하고 야고보 1장에 나오듯이 그걸 찾고 구하고.

제 강의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이근호 당신은 야고보를 어떻게 보느냐? 방금 제가 대략적으로 이야기했는데 단편 중심으로. 구약이 있고 여기 사도가 있다면 중간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있지요. 야고보는 예수님은 동생이고 사도죠. 동생인데 왜 사도냐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 야고보를 만났어요. 사도는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모든 부활의 증인이 사도되는 건 아니지만 사도는 반드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럼 사도 바울은 부활 후 만났나? 만났지요. 다메섹에서 만났고 그 후에도 아라비아도 가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부활의 증인된다는 말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의미를 교회에 증거하게 되는데 이 교회가 뭐냐? 구약에 뭐가 있었습니까? 먼저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들었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만들 때 율법으로 만들었죠. 야고보서에서 율법을 포함해서 전체로 지혜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혜로 이스라엘 만들고 이스라엘 되게 하신 거예요. 그런데 지혜가 빠지면 안 되는데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지혜가 도입되어서, 여긴 교회란 말 안 나오죠. 그래서 흩어진 열두 지파라 해서 계속 뭘 의식합니까? 옛날, 옛날 이스라엘이 안 죽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을 없앤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흩어진 열두 지파지 그 이스라엘이 어디 가냔 말이죠. 하나님이 열두 지파 이스라엘 만들고 안 보낸다 말이죠.

그럼 열두 지파에게 적용시켰던 지혜의 원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드디어 완성단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받느냐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관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다우냐 거기에 관심 있다고. 이제 감이 좀 잡히십니까?

그렇다면 문제를 어떻게 풀어볼 수 있느냐 하면, 제가 아까 해답을 미리 성급하게 한다고 구약에서 바로 왔다는 사실은 뭘 다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십자가 부활로 봤잖아요. 그런데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뭐로 보았느냐 하면, 온전한 율법이 뭐냐, 온전한 지혜가 뭐냐? 온전한 지혜를 하늘에서 왔으니까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잖아요. 위로부터 오신 지혜자가 이 율법을 어떻게 온전하게 이루는데 개인적인 용도가 아닙니다. 이게 중요해요.

‘너 이것 하면 구원받는다.’ 개인적으로 구원받기 위한 용도가 아니고, 옛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집단적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지혜를 예수님은 제공하시고 완료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여주느냐? 성령이란 주님 오셔야 주니까. 주님 부활하셔야 주니까. 그 점은 같거든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흩어진 열두 지파가 되면서 예수님의 공생애죠.

그러면 사도 바울은 교회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의미를 뭐냐를 이미 확정해놓고 그 다음에 뒤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 모든 말씀과 사건을 집약시키잖아요. 그러면 야고보 같은 경우에 성령을 어디로 집어넣느냐?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가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과 우리와 함께 살게 만든다 말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부활되기 이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잖아요. 그게 지혜 아닙니까. 그 지혜는 개인적인 용도가 아니고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고 ‘너는 이스라엘 맞아’라고 이미 이스라엘 단정해놓고, ‘이스라엘 같으면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그것을 공생애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걸 놓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그걸 뭐로 봤습니까? 십자가 부활로 해서 공생애 전체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모든 사람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전적 부패와 죄인 돼버렸죠. 개인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이 없어졌느냐?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그냥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과한 거예요. 그럼 예수님은 뭐냐?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가 돼요. 날 위한 메시아가 아니고. 이스라엘 안 죽었어요. 야고보에서는. 흩어진 열두 지파는 흩어졌을 뿐이지 안 죽었고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에 하신 모든 말씀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율법을 다른 말로 하늘의 지혜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느냐의 지혜를 우리에게 준 겁니다. 그럴 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뭐냐 하면, 이창섭 목사님이 질문한 게 그거에요. 지혜를 백날 줘도 율법을 백날 줘도 우리가 삐딱하니 안 지키면 그만이지. 그게 사도 바울 말 맞잖아요. 사도 바울의 말은 그게 아니고 아예 지키고자 해도 못 지키죠. 율법을 지키고자 해도 율법이 오게 되면 갑자기 없는 죄가 더욱더 죄 되게 만들어요.

개인으로 있을 때는 그게 맞다 이 말이죠. 하지만 집단으로 있을 때는 그 공식이 아니라 이런 지혜가 주어지게 되면 지혜가 헛짓하는 법은 없다는 거예요. 반드시 열매를 맺고 마는 것이 율법의 솜씨라는 겁니다. 단 조건이 있어요.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제쳐줘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과 이웃 사랑은 항상 우리 내부에서 폭발되도록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뭘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성령을 받은 자는 그게 된다는 겁니다. 개인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개인이 뭐에 활용된다? 이스라엘답게 된다. 이 말은 개인이 하늘의 지혜를 알게 되고 그 지혜대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내용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모습들을 이야기하는

예. 그렇지요. 그게 지상에서 벌써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과 야고보의 공통적인 부분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고 다른 건 집단과 개인의 차이

다른 건 없지요. 왜 집단이 되느냐?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야고보는 뭐가 없다?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가 없다 이 말이죠. 왜? 야고보는 이미 끝났다고 본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중요한 질문이 있어요. 현재 경제실천이라든지 밥 퍼주는 것 있잖아요. 그거는 이것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야고보가 말하는 율법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꽃동네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 그거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제가 질문하는 건 왜 인간들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윤리와 도덕 수준을 가지고 야고보가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지금의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저주를 모르고, 저주를 모르는 이유는 악마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이야기할게요. 질문 다시 할게요. 왜 지금 우리는 윤리의 수준 가지고, 야고보가 그 정도 수준 가지고 사용하지 않느냐? 그것은 우리는 본래의 자리가 아니고 이미 우리가 신인 양 선을 행할 수 있고, 악을 행할 수 있다고 자체적인 어떤 자리를 확보한 상태기 때문에 여기선 도덕이 나오지만 성경의 참된 지혜는 여긴 나오지 않지요.

야고보서의 우리의 자리는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 일은 악마가 다루면 다룬 대로 다뤄져야 되고, 성령이 다루면 성령에 다뤄지는 그런 희멀건 한 죽 같은 완전히 개방된, 내 것이 있을 수 없는, 쓴물 아니면 단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러한 무장 해제된 상태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근대 인간은 그게 아니고 인간이 말씀 주시면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야고보서엔 없어요. 현대인하고 이스라엘 사고방식은 다릅니다. 뭔가 행할 수 있다는 게 없어요. 야고보서도 마찬가지고요. 인간 속에 악마가 오게 되면 인간은 하늘의 지혜를 모르는 이상은 악마로부터 이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지혜가 오게 되면 악마를 이길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중심은 성령 받은 너희는 할 수 있다. 그러면 성령 받은 너희는 할 수 있으니까 또 이렇게 되면 집단이 깨져버리고 개인으로 돌아가죠. 이렇게 돼버리면 개인적인 성령 받은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개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지켰다, 안 지켰다 자체를 판단을 안 하고 이것은 위로부터 온 지혜라고 인정하게 돼요.

‘나는 오늘 가난한 사람은 도왔다, 안 도왔다’ 이게 아니라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런 지혜가 주어졌다고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항상 편입된 상태에 돌입된다고. ‘내가 하나님 지혜 속에 있구나.’ 이걸 알게 되면 개인적으로 지키고, 안 지키고 간에 그 지혜가 그 사람 속에 역사하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지혜의 순결함이 나오게 돼있지요.

나올 때 둘 다 나와요. 야고보처럼. 이것은 나쁜 것이고, 이것은 옳은 것이다. 제가 이야기 끝에 할 것을 방금 해버렸습니다. 야고보서대로 지킨 사람의 특징이 뭐냐? 이것은 땅에 속한 거고, 이것은 하늘에 속한 것, 그걸 구분할 줄 안다는 거예요.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일을 보리라’라고 하지만 이것은 나쁜 것이며 내가 뭘 하든지 간에 안개며, 주의 뜻대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하늘의 지혜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개인의 구원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로 돌아가죠. 집단으로 돌아갑니다.

그러한 지혜를 하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내가 이스라엘에 소속된 자로서 그런 지혜를 발산하게 돼있어요. 이게 야고보서가 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한 걸 한 번 더 강조하면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지켰다, 율법 지켰다 절대 그런 말 안 나옵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고, 이것은 옳은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 야고보처럼. ‘야고보처럼’입니다. ‘나 야고보 안 볼 거야.’ 이게 아니라 ‘나 야고보 볼 거야.’ 왜? 그게 보니까 전부다 내 이야기라. 나는 부자 사람은 환영하고. 가만 보니까 나쁜 기라. 왜? 사람은 풀이고 꽃인데 아무것도 아닌데. 그 돈 좀 있다고, 풀의 꽃같이 헛된 건데.

‘그리고 야고보에 또 동의하겠어. 왜? 나는 뭐든지 시험 받으면 하나님이 나보고 죄 졌다 했는데 그게 나쁜 기라. 사실은 내 속에 있는 욕심이 작용해서 나는 죄를 졌는데 하나님 책임이 없어. 이 죄가 날 사망케 했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살아가게 돼요. 야보고가 튀어 나온다 보면 돼요. 내 속에 이근호가 있는 게 아니라 야고보가 튀어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율법이 나온 거예요. 온 율법이 바로 그 사람 속에서 튀어나온 거예요. 율법을 들여다본다고 지킨 게 아니야. 그건 내가 알아. 왜? 나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킨 게 아니고 그걸 온전히 행해야 돼’라는 말이 나온다 말이죠.

그렇다면 그 사람이 온전히 율법을 하는 것은 뭐냐? 성경에 나옵니다. 율법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써 모든 걸 이뤘다는 말이 비로소 이야기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은 안 지켜도 돼요. 사랑 그 자체가 지키며 마지막 열매입니다. 그게 순결한 것이고 온유한 것이에요.

아까 이야기한 밥 퍼주는 사랑이나 세상 실천 도덕은 뭐냐 하면, 내가 이웃에 무엇을 해야 되지만 율법의 사랑의 최고는 그냥 야고보처럼 말씀을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함으로써 이웃에 대해서 이스라엘 됨이 아직도 이스라엘이 살아있음을 하나님의 지혜를 받고 있음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삶 자체가 야고보서 전체를 보여주는 삶이 되는 겁니다.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이 말은 지혜 자체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 속에 가만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혜가 우리를 후비고 사용하게 돼있어요. 그냥 지혜가 오게 되면 율법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겠지요. 우리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늘의 지혜가 오게 되면 율법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고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돼버려요.

그 행함이 뭐냐? 사랑이죠. 율법을 사랑하는 거예요. 법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법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사랑이 율법이 우리를 뒤덮어 씌워요. 그래서 하나하나 뜯어내면 돼요.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지혜고, 이것은 이런 거고, 이건 이웃 사랑이고 이게 전부다 이스라엘이란 이유 때문에 위에서부터 지혜를 퍼부어주는 겁니다. 허옇게 눈사람처럼. 뭔가 퍼부었다는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개인적으로 구원받습니다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이기에 퍼부어준 거예요. 그래서 계속해서 지혜를 구해야 되죠.

그 다음에 20절.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위에서 오는 지혜가 오게 되면 개인적인 어떤 이득이나 이런 것은 땅에 속한 것이니까 만약에 개인적인 의나 이런 게 있으면 또다시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되죠. 아담이 개인적으로 하니까. ‘사람이 성낸다’는 말은 전체적인 하늘의 지혜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지요.

여기서 아까 빠진 것 다시 해봅시다. 구약이 있고 여기 야고보서 있고 중간에 공생애 있지요. 공생애에서 예수님의 대표적인 것이 산상설교 아닙니까.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그때 야고보도 함께 있었지요. 산상설교를 다 들었잖아요. 야고보는 뭐로 이해했습니까? 이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참된 이스라엘답게 하는 하늘의 지혜라고 본 거예요. 예수님은 메시아니까 곧 지혜자고.

그러면 이 지혜가 있으면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죠. 그러면 이스라엘 안에서 뭐가 살아있어야 됩니까? 예수님이 주신 지혜가 살아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없으면 이스라엘답지 못하죠. 살아있게 되면 어떤 열매가 나오는가? 성낼 이유가 없다. 성낼 필요가 없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에 다 포함돼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낸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을, 예를 들어서 제자들이 ‘예수님, 저 인간들 하늘에 불내려 죽여 버리소.’ 할 때 뭐라고 합니까? ‘네가 할 일이 아니다’ 이 말이죠. 네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과 관계없죠.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다니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했던 설교, 사건 앞에 동행하게 만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같은 지혜기 때문에.

여기 1장 22절에 보면,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게 하나님의 지혜다 이 말이죠. 우리는 이스라엘이니까. 이스라엘은 지혜가 있어야 이스라엘 되니까.

그 다음 23절.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이게 뭐냐 하면, 자기는 늙었는데 자꾸 상상하기를 이십대로 보는 거예요. 거울을 봐도 분명히 오십 대라고. ‘아, 보기 싫다. 늙었다.’ 이러는데 거울 안 보면, ‘난 역시 이십대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이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짓이 된다 말이죠.

그럼 거울이 뭡니까? 뒤에 보니까 거울이 율법으로 돼있고, 지혜로 돼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주제파악. ‘나는 정말 이런 게 문제 있어. 이렇게 해야 되는데 이렇게 못하고 있어.’ 이런 것이 계속해서 일어난 그것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지혜를 남한테 발산시키는 쓴물이 아니고 단물이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나요?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이런 게 터져 나오면서 단물이 돼요. 쓴물이 아니고. 그럼 당신은 구원 못 받았네. 구원문제가 아니고 우린 이스라엘에 속했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집단에서 개인으로 갔다가 개인이 다시 집단으로. 그래서 사도 바울에 있는 명령과 권면이 같은 맥락이죠. 그걸 개인적으로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상을 모르고 야고보서를 들여다보면 ‘그럼 이걸 지켜야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건 애초부터 구원 못 받은 사람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미 우리는 어떤 집단에 소속돼있는데 그걸 모르고 개인적으로 가면 곤란하다 이 말이죠.

제가 지난 주일날 아침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바치라 하는데 가이사에게 바칠까요, 하나님께 바칠까요? 바치라는 자체가 우리한태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중요한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바쳐진 존재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바칠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했잖아요. 우리 자신은 고사의 돼지대가리라고.

로마서에 나옵니까? 우리 자신을 이방인의 제물로 바친다 했잖아요. 우리 자체가 개인으로 바치면 안 돼요. 반드시 어디 안에서? 그리스도가 바쳐진 존재라면 우리는 그 안에 같이 바쳐진 존재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나를 바치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널빤지 같은 그것을 보고 찬양하고 감사할 뿐이죠.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5,36) 그 이야기나 야고보 이야기나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야고보는 뭐냐? 땅의 지혜가 이런 것이 나쁘다. 이것 때문에 저주받는다. 그러니까 너는 하늘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야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그래야 이스라엘답다. 뭐가 어렵습니까? 참 쉽죠. 새삼스럽게 구원받으려고 야고보를 보던지 사도 바울을 보면 그 사람은 구원 안 받은 사람이에요. 사도 바울을 봐도 구원 안 받은 사람이고, 야고보를 봐도 구원 안 받은 사람이고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1장 25절에 보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이게 미치는 거예요. 이게 왜 자유냐 하면, 개인 생각 안 하니까 집단에 포함되니까 이미 자유가 되는 거예요. 이미 주신 하늘의 집단은 나를 위해 준 집단이 아니고 너는 이미 어디 소속해 있다며 주어진 자유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거죠.

나는 내가 알아서 구원돼야 한다는 그 소속 자체로부터 이미 벗어나게 하는, 옛날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기 위한 그걸 확인시키기 위한 법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기분 째지게 하죠. ‘내가 이런 인간이구나.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그걸 즐겁게 하니까 세상에 이런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들여다봐라’ 말이 앞뒤가 안 맞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2장 10절에 봅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것 어디서 나온 겁니까? 아까 공생애 주님과 함께 있다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야고보 이야기 듣지 말고 누구 이야기 들어야 돼요? 지금 예수님이 내 옆에서 이 이야기한다고 보세요.

그래서 예수한테 따질 겁니까? ‘십자가 져놓고 이 소리 하나?’ 이래 따질 겁니까? 못 따지지요. 십자가 졌기 때문에 마음 놓고 자유케 하는 이 말씀 주시는 거예요. ‘아 이래서 율법으로 구원 못 받는구나.’ 이걸 알게 하는 겁니다. 율법으로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위한 십자가지. 그걸 개인 용도로 사용했으니까 오해가 될 수밖에 없죠.

그러면 ‘온 율법’ 이 이야기는 어디 나오는 이야기죠? 산상설교에 나오죠. 바리새인들은 이걸 시도하려고 했잖아요. 그래서 바리새인은 잘렸지요. 그들은 지옥에 가죠. 그런데 백부장은 율법을 안 지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버렸잖아요. 모든 천국엔 나라의 본 자손을 쫓겨나가고 백부장 같은 사람은 그 나라를 대신 차지할 것이다. 그 예수님을 야고보는 온전한 율법으로 보는 거예요. 그게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 거예요. 온 사랑이 우린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사랑이 그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아니라 우릴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이것도 예수님이 이야기했죠.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용서 이야기할 때 어떤 임금님이 이만 달란트 해놓고, 가차 없이 진노의 불 떨어지잖아요. 그 이야기를 지금 야고보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또는 예수님이 옆에 서서 예수님이 야고보 속에 들어가서 우리한테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마태복음 읽으면서 야고보를 모른다? 말이 안 됩니다. 마태, 마가 즐겁게 읽으면 야고보도 즐겁게 읽어야 돼요. 어떤 입장에서? 이미 구원받은 열두 지파 입장에서, 흩어진 구원받은 입장에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거는 십자가 부활이죠. 개인적으로. 그런데 여긴 십자가 부활 안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이미 하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은 이런 겁니다. 쉽게 말하면 긍휼 이미 받았고, 긍휼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야고보와 똑같은 발언을 저와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 못 지켰다고 다 안 지키면 안 돼’라는 말을 야고보 때문에 이미 같은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 놓고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네가 다 지켜서 구원받나?’ 구원문제는 십자가 부활이야. ‘그러면 왜 이야기하느냐?’ 우리는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것이 나한테 이뤄져. 그래서 이 말씀 가지고 남한테 갔을 때 ‘주여 나는 사랑했으니까 간음해도 괜찮지요’라는 생각이 떠오를 것 아닙니까. 야고보서 2장이 떠올라서 ‘나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간음해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뭐다? ‘이거는 나쁜 거야. 세상적이야. 악마 앞에서 이건 하나님이 시킨 게 아니고 내 욕심이 죄를 범한 거야’ 하는 야고보가 다시 재현되죠. 야고보 전체가 우리 삶 속에서 재현 된다고.

‘주여 저는 믿기만 하니까 행할 필요 없죠’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 야고보 2장이 떠오르죠. 그러면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니까. 구원받지 않으면 이런 게 떠오르지 않아요. ‘이게 바로 죄구나. 역시 십자가 아니면 구원 못 받아.’ 사도 바울하고 똑같이 돼버려요. 차이가 없다고.

전에는 이걸 모르게 되면 야고보서 읽기가 설교하기도 껄끄럽고 건너뛰고 싶은 생각이 들고. 루터처럼 말이죠. 지푸라기라 하면서. 사실은 루터의 지푸라기라는 것은 쓸모없어서 지푸라기가 아니고 아기 예수를 받쳐주는 뜻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보조적이라 하는데 내가 보기엔 보조적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 하신 말씀 그대로에요. 마태복음 산상설교 그대로에요. 주님이 옆에 있는 것 같아.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이건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 보고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이러면 쉽네. 예수님이 지금 바리새인에게 이런 소리 하면 된다. 왜? 바리새인 무엇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지혜자인 걸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뭐만 남아있다? 땅에 속한 지혜만 남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변명합니까? 자기 변명하죠. 땅에 속한 지혜자의 특징은 집단이 아니고 자기 구원밖에 없다. 지만 구원받으면 최고다.

그러면 사도 바울하고 틀려요. 사도 바울은 연합해서 몸을 이루는데 지만 구원받겠다는 것은 근대인들의 사고방식, 민주주의 사고방식이지 성경이 말하는 성도하고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하죠. 그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보고 하는 말이, 좋구나. 너 같은 믿음은 귀신도 믿고 벌벌 떠느니라.

그 다음에 21절 보세요. 그냥 조상이 아니고 무슨 조상입니까? ‘우리 조상’ 아닙니까. 그러니까 야고보는 이스라엘과 단절은 안 시키고 있어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행함을 보여줬다. 윤리도덕과 상관없이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은 윤리도덕이고, 바치는 것은 믿음이고 그게 아니죠. 바치는 것이 어디 포함돼있습니까? 바로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는 율법 속에 같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온 율법이 되고 동시에 하늘에서 온 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오니까 아브라함이 안 바칠 수 없지요. 믿는 자니까. 율법이 아멘처럼 일어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내 옆에 있는 너희들이라는 거예요. 성도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 듣고 난 뒤에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만약에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누가 한 거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성령이 하신 거죠.

그때 주의 말씀이 ‘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이 말은 무엇을 버려라? 네 자신을 포기하라. 네 자신의 개인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문제다. 이스라엘은 뭐냐? 아까 이창섭 목사님 이야기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묵시에 속합니다. 묵시의 집단을 향한 말씀이지 역사적 개인을 위한 야고보가 아니다. 그러니까 묵시에 속한 사람 같으면 이 말을 전부다 찬양하죠. 입에서 독이 나오는 게 아니고 찬양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찬양, 아까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것도 찬양하듯이, 모든 것이 주로부터 주로.

야고보서 한 마디 할 때마다 찬양, 두 마디 할 때마다 찬양, 모든 지 감사. 세상에 이것보다 더 순결하고 정결한 열매가 또 어디 있습니까? 이게 포도나무요 무화과나무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 죄를 알아야 돼요. ‘이거 나쁜 거구나. 그렇게 되면 세상과 벗할 필요도 없겠구나.’ 순결한 게 있으니까.

3장에 대해서 래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 당시에 선생 된 자가 많아서 선생 많이 되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것보다도 이건 혀에 관한 게 아니고 지혜에 관한 겁니다. 개인적인 용도로 지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지혜는 하늘에서 길들여져야 된다. 성령에 의해서. 길들여지지 않은 혀는 땅의 더러운 세속적인 것, 세상적인 것이 나온다. 세상적인 것이 3장 15절에 보니까 정욕이죠. 또다시 우리를 에덴동산으로 보내버려요.

그러니까 야고보는 구약 성경을 지나가 버린 것으로 보지 않아요. 우리로 하여금 악마와 대치 돼있는 에덴동산으로 넘겨버립니다. 그게 바로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바로 악마와 짝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미 저주받은 상태인데 놀랍게도 흩어진 열두 지파는 하늘로부터 지혜를 받았으니까 너희는 새로운 이스라엘 맞잖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분을 자유롭게 합니까? 거침없이 우리는 이걸 보면서 한 마디 뜰 때마다 아멘과 감사와 찬양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걸 모르니까 성경 딴 데는 그냥 넘어가다가 야고보 볼 때마다 기 팍 죽어있는 거예요. 이것 지켜야 될 텐데. 뭘 지켜요? 개인적으로 지키는 게 없는데. 집단적으로 지혜가 주어졌는데.

그 다음에 4장 5절.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 개인을 보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넣어준 성령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죠.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누가 주체입니까? 하나님이 성령하고 상대하면서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보조로 우리를 붙여준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위해서라고 우리를 버릴 수 없죠.

큰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은혜 주신다. 이것도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보통 하신 말씀 전체가 이걸 이야기하잖아요. 이것 하라면 어느 대목 댑니까?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했지요. 바리새인과 세리. 세리가 아예 고개를 들지 못했죠. 그리고 또 있죠. 수로보니게 여인이 왔을 때 ‘맞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예수님께서 하신 지혜를 야고보가 하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예수님 말씀 받듯이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이미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러면 너희를 가까이 하리라. 새삼스럽게 개인적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면 이 말씀 해당 안 됩니다. 이미 하늘의 지혜가 이렇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 놓고 이야기해야 되죠.

그 다음에 4장 11절에 보면, “피차 비방하지 말라” 이거는 딱 마태복음 7장 아닙니까. 비판하는 그것으로 네게 비판받을 것이다. 네 눈의 들보를 빼라. 그 이야기를 다시 한 거예요. 누가 입법자고 재판장이냐? 네가 뭔데 형제를 비판해.

그 다음에 4장 13절에 나오는 안개 이야기. 예수님 같으면 무슨 이야기합니까? 아버지 장례 지내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고 너는 날 따르라. 그리고 부자가 와서 ‘난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 할 때 너는 모든 걸 다 버리고 날 따르라.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또 너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뭘 구하라? 그 나라 의를 구하라. 예수님 말도 못해요, 야고보가? 예수님 말씀 그대로 하고 있는데. 야고보가 거부한 것 같으면 우린 마태, 마가 누가복음 보지 말아야 돼요. 이미 구원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답게 하고자 주신 거예요. 그것도 우리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니까.

5장에 “들으라 부한 자들아” 이거는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잖아요. 이미 배부른 자는 통곡하라. 똑같은 이야기에요. 웃는 자는 차라리 울어라. 우는 자야 너희들이 기쁘다. 또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 나오잖아요. 예수님 이야기 그대로 아닙니까. 그동안 괜히 이천 년 동안 야고보만 욕 얻어먹었어요. 예수님 이야기만 그대로 했는데.

여기 삯을 주고받고 하는 이 이야기는 역시 예수님 이야기에 나오죠. 종 이야기, 포도원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주인이 올 때 작살내는 이야기.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이 땅에서 삯을 못 얻더라도 지혜자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수모 받았기 때문에 우린 그 지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오히려 즐거워하라.

왜냐하면 7절에 이른 비, 늦은 비 이야기하면서 9절에 보면,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이거야 예수님께서 누누이 이야기한 겁니다. 참새도 하나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 그걸 현장화 시켜버린 겁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렇습니다. 빵에다 뜨거운 버터 넣으면 어떻게 돼요? 피자에 치즈 얹으면 치즈가 어떻게 됩니까? 녹아서 스며들지요. 지혜는 녹아 스며듭니다. 이 지혜는 무슨 지혜다? 내가 없으니까 이스라엘 지혜고 이스라엘 자체가 묵시적 관점. 그러니까 이 지혜는 내 지혜가 아니고 하늘의 지혜죠. 하늘의 지혜의 아들이 누구냐? 이스라엘 흩어진 열두 지파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취지라는 겁니다. 야고보가 주장하기를. 주장한 게 아니죠. 맞는 이야기죠.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구약과 단절되어 있는 진짜 이스라엘 취지가 이거라는 겁니다. 뭔가 치즈가 우리 안에 녹아서 내릴 때 우리는 치즈하고 아닌 것하고 구분하는 지혜가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걸 오해해서 ‘목사님, 치즈가 녹아서 내리면 나쁜 것도 없어져야 되죠.’ 나쁜 것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 야고보나 예수님께서 항상 죄인 아니면서도 죄인의 길을 간 것처럼 우리가 이미 죄인 됨의 치즈로 완전히 포장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것이 나쁘니까 오직 우리는 위만 쳐다봐야 되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처럼 하게 되면, 우리는 죄인이니까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고 외칠 수밖에 없어요.

뒤에 나오는 것은 엘리야 이야기도 나오죠. 엘리야도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룰 때까지 참아라. 그리고 하늘의 지혜라는 것이 참는데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어려운 초대교회시기를 주님도 가신 길인데 고난의 길을 좀 가줘. 그들이 바로 흩어진 열두 지파 참된 이스라엘이라. 이 예수님 이야기를 우리가 왜 싫어해요. 우리는 아주 자유로운 말씀이니까 구원받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이것이 옳고, 이것은 하늘의 것, 이건 땅의 것 구분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 말씀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고 같은 말씀을 하신 야고보를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구원을 생각하게 되면 오해되지만 이스라엘 전체를 생각해볼 때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이스라엘 됨을 확인시켜 주는 그러한 주의 말씀으로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0407b 부산강의.hwp (60.5K), Down: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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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