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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0403b 울산강의-창세기49장자유게시판창세기

20090403b 울산강의-창세기49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403b 울산강의-창세기49장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어렵기 때문에 정리할게요. 야곱이 자식에게 복을 주는 것은 자기와 똑같은 열두 명을 새끼 까는 것과 똑같다 했어요. 야곱이 받은 하나님의 복을, 그걸 순수 광선, 그걸 그대로 깔 때 순수함이 작용해도 야곱이 받은 인간의 더러운 게 있잖아요. 더러운 것도 같이 받아와서 더러움과 병행해서 더럽기 때문에 하나님의 순수함이 더욱 돋아나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럼 나는 손해 아닙니까?’ 너는 손해인 줄 모르겠지만 너를 믿는 자가 복을 받고 너를 안 믿는 자가 저주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내 입장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이스라엘답고, 야곱다우냐, 하나님 순수다우냐? 그게 지금 새순교회나 저나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저주도 받고 복 받는 기준으로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는 거예요. 우리는 만날 ‘나는 힘듭니다. 인생 어렵습니다.’ 하는데 우리 어렵고 힘든 것은 주께선 안 봅니다. 그런 것 듣지도 않아요. 네 안에 뭐 있느냐 묻지, 살아가기 힘듭니다. 너는 원래 힘들든 살든 네 몸은 내 것이지 네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첫 번째 르우벤이라 하는 것은 장자권이 박살나게 했습니다. 그건 뭐냐? 엄마의 순수, 엄마라는 걸 통해서 축복과 저주로 갈린다는 엄마의 질서를 르우벤은 깨버렸어요. 장자가 돼서. 그걸 깸으로 장자 값을 못했습니다. 물론 그런 더러운 성질도 자기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죠. 야곱 속에 이런 더러운 게 있단 말이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5절에 보면, “시므온과 레위가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자기 자식한테 저주를 해버렸어요. 그래놓고 뒤에 가선 그걸 분량대로 축복이라고 하고. 이상하게 안 맞아요. 앞엔 저주라고 해놨잖아요. 실컷 다해놓고 28절에 보면, 그들의 분량대로 축복했다.

이게 뭔 뜻이에요? 이런 뜻입니다. 순수 광선, 입체사진 만드는 것, 홀로그램이라 하는데 순수 광선이 레이저에서 나옵니다. 보통 광선은 촛불이나 햇빛은 안 돼요. 이게 분산 되서 소용없고요. 동조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군인들이 대열을 흩트리지 않고 그대로 가는 것처럼, 어떤 폭풍이 쳐도 군인들은 발을 맞추는 것처럼 레이저란 광선의 특징이 뭐냐? 어떤 경우라도 본인의 본질은 없어지는 않는 그런 광선이에요.

레이저 광선이 거울을 통해서 필름에 들어오게 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꽃이라든지, 사람이라든지 대상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두 개가 여기서 합치기 때문에 얼른 보면 흐릿해서 모른다 했지요. 두 개의 광선이 있는 거예요. 순수한 것과 이 광선은 뭐냐? 더러운 것을 거치기 때문에 불순 광선. 불순한 성질이 들어오는 게 아니고 불순 광선을 다그치는 순수 광선이 나오죠.

하나는 순수 광선 그대로 나오고, 또 하나는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죄인의 모습으로 들어오죠. 여기선 뭐로 옵니까? 이거는 피 흘림으로 오겠죠. 순수 광선 오면 뭡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오겠죠. 죄인을 용서하시는 모습으로 오고 이거는 사랑으로 오고, 이거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로 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필름 안에는 축복과 저주, 저주와 축복 양쪽이 다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복을 내리지 않으면 저주 받게 돼있어요.

그런데 둘째 아들, 셋째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똘똘 뭉쳐 다니는 모양이라. 그래서 형제라 해. 형제라 말 안 해도 형제인 줄 알지만. 저 둘은 형제 중에서도 더욱더 형제답다. 노는 꼴이 똑같다 이 말 아닙니까. 이 사람이 저주 받았죠. 왜 그러냐 하면 이유가 뭡니까? 혹독하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잖아요. 소의 힘줄을 끊었고. 여기 보면 나오죠. 분노대로 혹독하게 사람을 죽였으니까 이것은 순수 광선에서 뭘 위반했느냐 하면, 야곱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그 용서와 사랑을 시므온과 레위는 그걸 무시하고 거부해버렸잖아요.

그래서 순수한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건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저주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안에 뭐냐? 그들은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돼요. ‘아이고 시므온과 레위는 저주받았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한 만큼 순수한 뜻은 뭐냐? 사랑이었구나. 그런데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은 그 사랑을 모독하고 자기는 사랑 받아놓고 오히려 남한테는 그 사랑을 전하지 못했구나. 그래서 그들은 저주받는 역할을 해야 되겠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저주가 뭐냐 하면, 7절에 보면,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자기 땅이 없어요. 레위 지파 같은 경우에는 한데 뭉치질 못하고 온 데를 떠돌아다니면서 전 열두 지파에 조금씩 흩어지도록 한 겁니다. 집성촌이 되지 못하도록. 같은 성으로, 같은 핏줄로 못 살고 전부다 삼촌, 올케, 누이 흩어지는 저주를 받았어요. 그 저주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호수아 보면 모든 지파에 소속돼있는 그러한 팔자가 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시므온이라는 지파는 지파 중에서 사람 수가 제일 적은 지파고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형제간에 못된 짓을 하는데.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화가 났지요. 모세가 40일 동안 십계명 받고 내려오는데 밑에서는 아예 우상 축제가 벌어졌지요. 그걸 보고 화가 나서 돌판 깨버리고 말하기를 그 레위 지파 사람들이 형제를 다 죽이죠. 그러니까 레위 지파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굉장히 잔인하고 혹독하게 사람을 다루는 그런 잔인한 기계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첫 번째 르우벤이 장자인데 저주받은 것은 어머니의 질서를 깨버렸다.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냐에 따라서 육적이냐, 영적이냐 갈라지는데 그 어머니가 레아나 라헬 어머니가 하나님께 받은 계시가 곧 자기 자신들이잖아요. 둘 다 불임여성 아닙니까. 레아도 불임여성이고, 라헬도 불임여성인데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계시를 내려줬더니만 하나하나 떨어져서 열두 자식이 됐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과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 질서를 르우벤이 인간적인 욕정이 그걸 깨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장자 권한이 박탈되었고 그것이 유다와 요셉으로 둘로 갈라졌다 했습니다. 그 다음에 둘째 아들, 셋째 아들 같은 경우에는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혹독함을 이기면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복을 주었건만 그들은 순수 광선, 사랑이라는 순수 광선을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불순한 간섭이 혹독한 것으로 갚아주는 비자비성, 잔인함을 그대로 보여줄 때 이들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저주받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시므온과 레위가 진짜 저주받아서 지옥 가는 겁니까? 이렇게 의심이 들 건데 분명히 저주받았다 했으니까. 하나님의 순수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여기 필름에 홀로그램, 거울로 가는 순수 광선이 오게 되고, 여기도 순수 광선이 오긴 오는데 뭘 통해서? 불순한 대상, 더러운 대상을 거쳐서 오는 순수 광선이죠. 그러니까 필름에 모이는 것은 ‘순수 광선+순수 광선’이죠. 이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여기에 있는 더러운 불순물들은 하나님이 과연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왜 축복하면 복을 받게 되고 저주는 저주가 되는지 수단으로서 하나의 매개체로서 사용될 뿐이에요. 그게 바로 축복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돼진다는 것, 이스라엘이. 그래서 이스라엘의 내부는 곧 야곱의 내부인데 야곱은 바로 죄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용서받았다. 어째서 죄인이냐? 그건 열두 아들한테 물어봐라. 열두 아들이 어떤 짓을 했는가? 열두 아들이 혹독하게 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 갖고 있었던 죄였다.

하지만 야곱을 복을 받았잖아.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니까 용서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로 믿음으로.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믿음인데 누굴 믿을 것이냐?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함께 지내왔던 순수 광선되시는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던 이스라엘과 동행했던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구원받는 겁니다. 아브라함 때도 마찬가지고 여기 야곱 때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이 사라한테 자식이 있을 것이라 할 때 웃었지요. ‘그럴 리가. 우리 마누라 다 늙었는데 무슨 애를 낳아요.’ 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네 왜 웃느냐’ 시비 걸었죠. 아브라함이란 불순자에요. 죄인이에요. 여기 천사 세 명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장차 이삭을 낳을 것이다. 이삭도 이것도 불순하지요. 하지만 이삭 속에 뭐가 들어있다? 순수함, 하늘에서 약속이라는 순수함이 포함된 이삭이거든요. 따라서 이삭을 분해해보면 둘로 나눠지지요. 하나님은 의인이었다. 인간은, 아브라함은 죄인이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복 받은 이유는 아브라함이 누굴 믿음으로서? 이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구원받는 거예요.

어떻게 우리가 새순교회에 주님이 함께 있다는 걸 아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과 우리 사이에 뭐 때문에? 차이. ‘차이’ 속에서 뭐가 나온다? 새 생명이 나오죠. 차이 속에서 생명이 나와요. 주님한테 열심히 하고자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열심히 하고 있는 나를 믿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차이에요. 진짜 예수 믿는 것과 예수 믿는다는 나를 믿는 것과의 차이에요. 예수 믿는 나를 믿으면 우상이 되잖아요.

그건 바로 내가 나를 믿으면 보통 사진이요. 뚜렷하잖아요. 보통 사진은 흐릿하진 않잖아요. ‘나 어제 또 믿었다. 어제 기도했어.’ 주님을 믿으면 이상하게 나는 기도했는데 느낌에 이건 아닌 것 같아. 왜? 기도하게 하신 준님을 믿어야 될 건데 ‘하나님이여, 내가 안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장합니까’라고 자기 자신의 행함을 내세울 때 이 차이, 자기 행함과 그렇게 해주신 주님과의 차이에서 뭐가 나온다? ‘내가 구원받은 사람 맞구나.’ 그 차이를 알려면. 그 차이에서 바로 주께서 작용하신 덕분에 내가 나를 믿는 죄인인 것을 알았다는 거죠.

레위도 그걸 알고, 시므온도 그걸 알아요. 왜? 자기 역할을 하면서 뿔뿔이 헤어지면서 자기가 혹독하게 행동해서 그것이 얼마나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는 걸 통해서 아하, 내 역할은 저주받은 역할이지만 저주받는 것과 저주받게 하는 그것과 그것마저도 함께 동행 하시는 주님 사이에서의 차이 속에서 나는 나를 믿지 말고 지금도 동행 하시는 언약,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을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게 구약 때부터 벌써 동행해 옵니다.

그게 신약 때 와서 확실 드러나는 게 뭐냐 하면, 이미 용서해주려고 만반의 준비돼있는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용서 정도가 아니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의가 쏟아져요. 단순히 용서 받으면 우린 에덴동산만 살아야 됩니다. 거기는 무죄한 상태니까. 그러나 우리는 무죄한 상태가 아니고 천국에 가야 돼요. 적극적으로 의로운 인간입니다. 내가 의롭다 하지도 않았는데 의를 막 주는 거예요. 계속 퍼부어주는 거예요. 왜 이렇게 주십니까? 그래야 너도 의롭고 그렇게 행하시는 나도 의롭고. 이것을 하나님이 자신한테 강요하는 거예요.

이걸 조직신학으로 말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자기들끼리 이야기라니까. 성부 하나님이 성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작용해서 거기에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시고. 성부, 성자, 성령에 의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성부가 예언했고, 성자가 이루시고, 성령이 적용시키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예언이 이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자의 역할은 자기 백성과 동행 하는 거예요. 불순 대상과 부딪혀서 던지는 뺨을 맞고, 찌르는 창을 맞아야 되고, 불순이 찌르는 못에 박혀야 되고. 그러면서도 자기를 못 박은 자를 용서해주고. 이게 하나님의 순수 광선이 해야 될 일입니다. 진짜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지만 십자가 지셨던 것. 십자가 지신 것과 하나님 본체 된 것과 합쳐져서 성경이 돼버린 거예요. 사람들은 이 성경을 해석을 못하는 거예요.

‘주여, 기도하면 됩니까? 시편에 나오는 기도대로 하면 복 받습니까?’ 만날 이걸 홀로그램, 입체사진인 줄 모르고 보통 사진으로 봐서 ‘나는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 말씀대로 산다’ 전부다 자기 자신을 찍어내요. 매일같이 자기를 찍어내요.

그렇게 해서 레위 지파하고 시므온 지파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 34장 30절 봅시다. 여기도 할 이야기가 있어요. 창세기 34장이 뭐냐 하면, 시므온과 레위가 자기 여동생 디나가 욕을 보고 난 뒤에 성질이 나서 그 욕보인 세겜의 추장 아들만 죽인 게 아니고 세겜에 있는 모든 남자들 다 죽였어요.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아버지를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를 힘들게 했지요. 아버지가 알고 있는 순수 광선을 힘들게 했죠. 아버지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힘들게 한 거예요. 시므온과 레위가. 순수 광선을 모르고 동행하는 자를 모르고 성질만 부리기 때문에.

죽은 여자, 탤런트 장자연. 그분은 죽은 것 이야기하면서 자살한 것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예언이 없으니까 자살하는 거예요. 자기가 판단하기에 인생 끝내야 되겠다. 자기 인생 아닙니다. 왜 그런 일을 당하게 했는가를 미래까지 그리스도까지 이어볼 줄 알아야 되는데 자기 인생으로 끝났어요.

제가 지난 주일날 그런 설교했지요. 성도는 미래에서 당기는 인생을 산다고. 자꾸 과거 돌아보지 말고 과거는 끊어지고 미래에서 당기기 때문에 자꾸 과거 돌아보면서 ‘인생 끝내자’ 이런 생각을 성도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했지요. 앞으로 무슨 일을 역할을 맡을지 남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살아온 것이 내 인생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그거는 지난날에 하나님께서 맡긴 일이고, 오늘 뭘 맡길지 내일 뭘 맡길지 모르잖아요.

장래를 당겨주는데 점점 더 주님과 가까이 가는 그걸 감격해야지 젊을 때 좋았는데 자꾸 청춘을 돌려다오 나훈아처럼 바닥만 치지 말고 청춘이고 뭐고 그런 건 잊어버리고 점점 더 주님 앞에 가까이 간 자기 자신을 작게 여길 줄 알아야 돼요.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사람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줄 모르는데 자기가 자기 인생을 끝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언이 없어 그래요. 우리 성도한테는 예언 없는 성도 없어요. 다 하나님의 예언이 있어요. 그게 뭐냐? 복의 근원이에요. 이래야 구원받는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있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앞으로 살아생전 증거해야 돼요. 뭘 통해서? 우리의 죄를 통해서. 우리가 엉뚱한 걸 믿고 있는 실수를 통해서 예수 믿는 나라도 어느 날 예수 믿는다 해놓고 엉뚱한 걸 믿고 있는 그때 그 차이, 틈이 벌어지면서 틈 속에서 잃어버린 십자가를 다시 끄집어내는 거예요.

‘나는 십자가의 증거지 내 복 받은 것의 증인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 잘 됐다. 예수 믿고 이만큼 훌륭하다. 그걸 증거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고 십자가의 주님이 훌륭하고 주님이 대단하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 있다 하는 그걸 깨닫게 하는 틈을 만들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가 믿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앞으로 주어지요. 행함으로 믿을 수 없는 것들.

예를 들어서 목회 잘했는데 교회 나가라고 할 때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데 나보고 나가라 하느냐’ 그게 바로 예수 안 믿는 거잖아요. 뭘 믿는 겁니까? 자기가 자기의 과거, 자기의 노동력을 믿는 거잖아요. 그게 바로 에이 성질난다. 그 성질난다가 뭡니까? 시므온과 레위. 내 여동생이 강간당하는데 참으란 말입니까? 우리 보기에는 너무 당연한 거죠. 내 여동생이 개 취급당하는데 참으란 말입니까? 못 참지. 죽여 버리지요. 그게 바로 자기 혼자 사는 인생 아닙니까. 그런 역할을 레위와 시므온이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유다 나오지요. 9절에 유다는 사자 새끼. 뒤에 나오는 대부분 내용이 뭐냐? 전쟁에 관한 겁니다. 전쟁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유다의 전쟁 기술은 다윗을 통해서 알 수 있죠.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죠. 소년 때부터 이겨요. 어른 되면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전쟁을 잘하게 된 예언, 다시 말해서 전쟁 잘 하는 걸 통해서 유다 지파는 ‘내가 잘한다’가 아니라 나라는 불순한 인간이 전쟁 잘하게 한 것은 전쟁 잘하는 날 믿지 말고 실제로 전쟁은 누가 하셨다? 순수 광선, 우리 주님께서 다하셨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전쟁 잘하는 걸 통해서 예수 믿게 하는 하나님 믿게 하는 역할을 유다가 하게 되는 겁니다. 유다는 바로 외부적인 전쟁에 들어가는데 수사자 같아서 하는 겁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실로’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 공간인데 뭐로 변했어요? 어떤 인물로 변했지요.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오시기까지’니까 유다 지파는 무슨 역할을 한다? 장차오실 임금님이 영원한 왕이 오실 때까지 왕 역할을 해야만 하는 그런 위치에 있습니다.

이 유다가 왕 됨으로 말미암아 뭐가 탈락합니까? 요셉이 장자의 자리에서 탈락해서 멸망하고 말지요. 유다 족속이 왕 되기 전까지 요셉 지파가 지도자 역할, 장자 역할 하는 겁니다. 왜냐? 가장 인원수가 곱빼기로 많고 면적이 가장 넓으니까.

아까 지웠습니다만 유다 나라가 있으면 여기 사해가 있고, 요단강 있으면 중앙 지점, 여기에 요셉 지파가 다 차지해요. 위에는 므낫세, 아래는 에브라임. 사사기에 보면 므낫세 지파의 유명한 장군이 있었어요. 기드온. 기드온 혼자 승리하니까 삐진 사람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삐졌지요. 왜 너 혼자 전쟁하느냐? 우리 같은 건데. 그걸 통해서 이미 사사기에 주도권은 누가 줬다? 이 요셉 지파가 쥐게 되거든요. 그래서 전에 솔로몬 끝나고 난 뒤에 패 갈릴 때 대부분이 요셉 지파로 다 간 거예요. 워낙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니까. 다른 것들은 시시한 지파들이고 요셉은 중심권이었습니다.

여기에 유다 지파가 반항한 거예요. 그러나 처음에 유다 지파는 시세가 없었어요. 유다 지파는 기껏해야 사사 쓰실 때 한 구석에 룻기에 나오죠. 모압 쪽으로 왔다갔다 패가망신하는 집안. 거의 사사에는 맥도 못 췄지요.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11, 12절)

이렇게 해서 유다 지파가 하나의 축복을 제공하는, 포도라 하는 것은 약속의 땅의 복을 받을 때나 나올 수 있는 생산물입니다. 포도주를 먹고 싶으냐? 유다 지파에게 연락해. 포도주 다 줄 테니까. 유다 지파에게 오게 되면 네가 먹고 싶은 축복의 산물, 포도주를 마음껏 먹게 해주겠다.

그 다음에 스불론이라 하는 것은 이쪽에 므낫세 위에 있어요. 갈릴리 바다 앞에 보면 스불론이라 하는데.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그래서 이미 땅 분배에서 스불론은 전쟁을 잘해서 북쪽 해변가를 차지할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잇사갈. 스불론 옆에 잇사갈 있어요. “잇사갈은 양의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잇사갈은 전쟁보다는 농사 잘 짓고 세금 잘 바치고 그냥 온순하게 순종 잘 하는 역할로서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거예요. 지금 야곱이 할 때 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땅도 뭐고 아무것도 없지만 반드시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이런 부분들을 차지한다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나가신다는 뜻입니다.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집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이것은 뭐냐? 누구한테 복종하면서도 세금 바치면서 농사만 짓는 그런 운명을 타고난 거예요.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단 지파를 뱀이라 하는데 단 지파는 전쟁 하나는 아주 재빠르게 전쟁해서 승리케 하는 그런 기능을 하는 거예요. 여기 잇사갈 같은 경우에는 전쟁에서 얻은 것을 관리하는 쪽이라면 이쪽은 뱀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돌격대 역할을 하는. 그래서 적들이 왔을 때 적들의 약점을 캐내서 재빠르게 공격해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그런 역할을 하죠.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갓은 어디냐 하면, 요단강, 갈릴리 바다하고 사해 바다 가운데 위쪽에 갓이 있어요. 이 밑에는 르우벤이고. 갓은 이쪽에 아람, 암몬에 수비를 잘 해요. 공격하는 것은 수비할 수 있는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유다를 실로 되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기 위한 방어용으로 전쟁을 해야만 하는 그런 집단이에요.

왜 이렇게 이스라엘을 전쟁하는 나라로 만드는가? 이렇게 전쟁을 함으로 말미암아 내부적으로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들이 전쟁하면서 누굴 믿습니까? 이 전쟁은 우리 인간에게 속한 전쟁이 아니고 영적 전쟁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사사기 5장을 봅시다. 딴 건 강조 안 하는데 이건 꼭 봐야 됩니다. 5장 1절. “이 날에 드보라 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그 다음에 14절. “에브라임에 나온 자가 아말렉에 뿌리박힌 자요 그 다음에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 그 다음 넘어가서 15절. “잇사갈 방백들은 드보라와 함께 하니” 15절.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 그 다음에 17절.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찜이뇨” 그 다음. “아셀은 해빈에 앉고” 18절.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이건 뭔 뜻입니까? 온 열두 지파가 전쟁에 달려들어서 무슨 전쟁을 하느냐? 바로 20절에 나옵니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죠. 희한하지 않습니까? 제가 순수 광선과 불순 광선이 섞인다 했지요. 이스라엘 속에 섞여 있지요. 다른 나라 보기에는 이스라엘 전쟁은 자기들 같이 인간 대 인간 전쟁, 골리앗과 인간 다윗의 전쟁으로 보겠지요. 그런데 소년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있었지요. 그리고 뭐라 합니까? 이번 전쟁은 인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전쟁이라 했지요. 순수 광선이 불순 광선인 인간과 함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불순 광선만 봤지 순수 광선을 못 봤잖아요. 그냥 소년을 소년으로 봤잖아요.

마찬가지로 사사기 5장에 보면 뭡니까? 하늘에서 별들이 싸우죠. 그 별들의 대신해서 한 전쟁이 누구냐?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이 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축복의 저주의 기준점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온 열두 지파가 다 달려들어요. 그 달려드는 모습이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자기 아들에게 축복하는 그 내용대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전쟁용이에요. 이 전쟁은 단순히 외부를 치기 위한 전쟁이 아니고 내부에 ‘하나님 계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라는 것을 늘 보여줄 수밖에 없는 전쟁.

그래서 이 전쟁은 인간의 불순함과 하나님의 의, 인간의 더러움과 하나님의 거룩, 유일하게 거룩이 있고, 유일하게 하나님의 의가 넘치는 곳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밖에 없죠. 오늘날 유일하게 거룩과 의가 있는 곳은 오직 성도밖에 없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받은 거룩, 의가 없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자기가 만들어가지만 우리 성도한테는 하나님의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그 예언은 뭡니까?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로 주신 의가 있는 이상 그 의로 말미암아 세상에 나가서 축복과 저주의 기준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죠. 그 기준점으로 작용하려면 우리가 우리 성질대로 하면 안 되고, 우리 불순하니까. 우리 내부에서 전쟁이 벌어지지요. 만날 우리는 내 욕심과 내 불신, 이런 것 때문에 주께서 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얗게 눈사람 만들어주는 그리스도 의만 자랑하게 만드는 그런 인간으로 우리 내부적으로 전쟁 일어나게 해서 외부적으로 울산 바닥에서 사는 겁니다. 만날 돈 때문에 울고불고 그렇게 살아요. 그걸 사도 바울은 영적 전쟁이라 하는 겁니다.

이제 감이 잡히십니까? 이스라엘의 복은 개인적으로 얼마나 챙기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통째로 모아서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 되는 거예요. 집이란 말은 개인 방에 대해서 테이프 끄라 이 말입니다. 나는 큰 방이다. 나는 작은 방이다. 집이 없으면 큰 방도 의미 없고, 작은 방도 의미 없어요. 그 어떤 집에 있어서 화장실 되도 괜찮아요. 왜? 맨 그 집에 속하니까. 큰 방 됐다고 자랑하지 말고, 화장실 됐다고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화장실이 있어야 큰 방 있고, 큰 방 있어야 화장실 있는 거예요. 다 갖춰져야 하나의 집이 되니까. 이 집이 바로 이스라엘이란 말이죠.

어떤 사람은 노력해야 되고, 목자 나와야 되고, 어떤 사람은 여기서 저주받아야 되고. 그렇다면 결론은 뭐냐? 개인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 따져서 이 집안에는 누가 계시다? 주님이 계신 그래서 이게 교회요, 성전 아닙니까. 하나님의 예언이 있고 예언으로 이끌림을 당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말씀이 있지요. 그 안에 말씀이 있고, 빨간 것, 하나님께 받은 복이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 봅시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이 아셀이란 동네는 이쪽 동네인데 여기 므낫세 위에 북쪽에 가장 옥토에요. 여기는 딴 걱정하지 말고 전쟁도 하지 말고 좋은 것 생산해서 누굴 준다? 유다 지파한테 왕에게 바쳐서 왕으로 하여금 정치 잘 하도록 하는 역할. 공궤한다, 섬긴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아셀 옆에 납달리가 있어요. 이곳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에요. 아주 순박하고. 이 아셀을 누가 지키느냐 하면 위쪽에서 단이 지켜요. 변방에 있는 지파들은 주로 어떤 역할을 해요? 외부에 있는 적을 사생결단 다하여 막아내는 역할을 한다면, 안 쪽에 있는 지파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잘 가꿔서 누굴 지킨다? 하나님의 성전을 메시아가 오도록 지켜주는 그런 역할을 안팎에서 했던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구조라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아까 저주받았다는 레위와 시므온, 특히 레위 같은 경우에 흩어졌다는 게 저주인데 본인들은 흩어지니까 고생스럽죠. 하지만 흩어져서 그들이 뭐 합니까? 제사하잖아요. 제사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레위 지파가 하거든요. 그러면 흩어져도 그들이 저주받은 것이 아니고 흩어져놓고 하나님이 복으로써 사용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봅시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요셉은 이스라엘 중심부분을 차지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덮는 전부다 요셉의 혜택을 입게 되지요. 언제까지? 실로가 올 때까지. 그래서 요셉 지파가 둘로 나눴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인데 므낫세의 뜻은 뭐냐 하면, ‘고생 끝’이란 뜻이에요. 에브라임은 이제는 번창하리로다. 이게 바로 요셉이 애굽에서 얻었던 두 아들의 이름입니다.

두 아들의 이름을 야곱이 축복해서 아들의 반열에 집어넣었어요. 아들의 반열에 집어넣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되는데 하나의 기둥으로 하나의 주춧돌로 사용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예언 속에 편입시킨 겁니다. 새순교회도 하나님의 예언 속에 편입되면 그걸로 구원이에요.

그땐 자기가 하는 게 아니고 자기 내부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누굴 만난다? 날 만나지 않아요. 불순하니까. 하나님이 들어와서 하나님과 만나요. 성령이 와서 주님과 만나고, 주님이 들어와서 성령과 만나고, 성부와 만나고. 완전히 성부, 성자, 성령 자기들끼리 스스로 노는 판이에요. 말씀을 가지고. 이러니까 거짓말 같지요. 고린도후서에 나와요. 성령이 너희 안에 있으면 죽을 너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면 성령, 성부, 성자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가? 바로 차이. 무슨 차이? 나는 무엇을 지향하느냐? 나만 지향하죠. 그저 나만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교회 나오는 나만 생각하고, 나는 돈만 생각하고, 집구석만 생각하고, 교회가 죽든 말든 만날 나밖에 모르는 거죠.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게 바로 죄구나’라는 것을 아는 차이점, 그 차이 속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의가 나를 인도하지, 내 욕심이 나를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바로 남들 보기에 복의 근원되는 거예요. ‘너도 말이야. 내 속의 주님 믿어.’ 이렇게 증거하면 되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도 구원받을 수 있어.’ 이렇게 하면서.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장자의 역할이죠. 장자의 누릴 축복은 다 받은 거예요. 곱빼기에요. 왜냐? 므낫세, 에브라임은 원래 손자인데 아들 되었으니까 요셉 지파가 남들 하나 받을 걸 두 배로 받았어요. 그게 25절에 나옵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요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그러니까 요셉은 복을 받는 역할을 하고, 나중에 복을 주는 것은 유다로 넘어가는 거예요. 유다로 넘어가고 하는 과정 속에서 다른 지파들이 유다를 무시했잖아요. 남쪽 가는 것은 달랑 두 지파.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나머지 열 지파는 전부다 북쪽으로 다 갔잖아요. 10:2입니다. 엄청난 차이에요. 그때는 하나님 주신 그 차이를 몰랐어요.

요셉 지파 왔다고 해서 요셉 지파를 믿으면 안 되는데 유다 지파라 해서 유다 지파를 믿으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누굴 믿었습니까? 자기를 누구 지파라 합니까? 유다 지파. 하나님 약속대로 우리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거예요. 다윗의 후손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다윗 후손 아닙니다.

왜냐? 멜기세덱의 반차를 통했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그림자거든요. 유다도 그림자고 요셉도 그림자인데 그림자란 불순 대상에다 진짜 광선이 섞였는데 사람들은 섞여있는 광선은 못 보고 만날 불순자 보고 ‘야 유다 최고. 요셉 최고. 어느 교회 최고’ 만날 이것만 최고라는 거예요. 본인과 함께 숨어있는 걸 모르고. 남의 것 탐내지 마세요. 여러분과 함께 있는 주님과 여러분을 어떻게 차이를 느끼는가? 그게 중요한 겁니다. 어떤 목사가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속에 있는 주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런 예언이 들어있어야 돼요.

27절에.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이거는 봐야 돼요. 베냐민이 얼마나 못되게 했는지. 사울이 무슨 지파입니까? 베냐민 지파에요. 얍삽하기 짝이 없어. 하여튼 물어뜯는데는 귀신이라. 역할이 그런 걸 어떡해. “아침에는 빼앗을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이것은 뭐냐? 자기가 노력한 것은 하나도 없고 기마이 써도 남의 것 뺏은 것으로 기마이 쓴다 이 말입니다. 먹다먹다 배부르니까 나눠준다 이 말입니다. 이건 자기밖에 모르는 것. 꼭 사울 왕 같아.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 하니까 불따구 나서 계속 물어뜯는 이리처럼 달려들지요.

이런 역할이 있어야 그들은 눈에 보이는 지파를 믿을 것이냐, 아니면 열두 지파,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를 진짜 성도들은 그 차이를 알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차이를 모르고, 사울은 그 차이도 모르고 우연히 골리앗을 이겼겠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있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사울은 창을 들고 두 번씩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던졌는데 그 던진 것도 우연이 아니고 사울한테 누가 있었습니까? 악신이 있었죠.

영적인 세계가 불순한 자기를 반사해서 비친 것이 성경책이 되는 겁니다. 성경책은 홀로그램, 입체에요. 거기에 불순한 인간과 죄인인 인간과 의로운 주님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성경만 눈 돌리면 내 인생 내가 산 것 같고 모든 일을 내가 알아서 결정해야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는 성경을 바라보게 되면 주님과 우리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받는지 왜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지 왜 주님께서 의를 주셔야 우리가 천국 갈 수 있는지 왜 나에 맞는 의는 소용없는지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사오니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의를 퍼부어주시는 십자가의 공로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0403b 울산강의.hwp (54.0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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