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4월 10일 고후12장
안산 4월 10일 고후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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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10 고후12장 사도의 접촉점인 고난-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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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11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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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20 15:52
안산090410고후12장
2010-10-19 12:48:01 녹취 : 박온정
안산090410고후12장, 사도의 접촉점인 고난-십자가 / 이근호 목사
오늘은 고린도후서12장 해봅시다. 고린도후서 11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고난’ 받는다. 고난 받는데, 개인적으로 사도가 고생한다, 개인적으로 ‘고생해라.’ 이것이 문제가 되면 사도가 고생하는 것 자체가 ‘참된 예수, 참된 복음, 참된 성령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 중요해요. 한번 그림 그려볼게요.
사도의 고난이 참된 예수의 증인, 참된 복음의 증인, 참된 성령의 증인으로서의 사도의 고난이 있죠? 그러면 사도 말고 거짓선지자들은 뭐가 없습니까. 사도라고 우기는 건 있지만 뒤에 뭐가 빠졌죠? 고난이 빠졌지요? 자, 이렇게 보면 사도가 성령을 통해서 고난 주신 것은 기존의 가짜와, 진짜가 있는데 진짜는 참된 복음, 참된 예수, 참된 성령과 관련 있는 게 진짠데,
여기 가짜에서 진짜로 접근하면서 뭐가 발생되었습니까? 고난이 발생되었죠? 그러면 참된 예수, 참된 복음, 참된 성령 그 배후에는 뭐가 있느냐 하며는,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있었겠죠. 그러면 가짜 진짜를 동그라미로 묶어보면 가짜 진짜가 섞여 있는 이 세상을 누가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했죠. 그러면 하나님이 이걸 둘러싼 셈이 되죠.
가짜 진짜를 둘러싼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여기 계시다가 고난의 길로 들어섰죠. 고난의 길로 접근했죠. 고난의 길로 들어서면서 어디로 접근하는 거예요. 바로 천지창조 가짜사도와 일반인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지구, 우주, 이것을 창조한 그 비밀에 접촉이 되죠. 왜냐면, 참된 예수, 참된 복음, 참된 성령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지상에 퍼붓는 진짜 본래의 진리가........ 때문입니다.
제가 복잡하게 얘기했는데 이걸 간단하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전체 우주가 뭐며, 비밀이 뭐며,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심 없지요?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내 몸부터 해서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에 하나님의 사도를 통해서 고난의 이름으로 여기에 contact, 접촉하게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사도가 뭘 외쳤느냐 하면 ‘나는 고생 안했다, 인생 성공했다,’ 이걸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는 무엇을 전하느냐 하며는,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었으며, 어디로 흘러가고 있으며, 마지막 이 세상은 어떻게 되며,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누가 오셨으며, 여기에 사도가 관심이 있지요? 그렇잖아요. 우리는 관심 있어요?
사람들이 교회 올 때, 거의 99퍼센트가 뭐냐 하면 자기 하는 일이 잘 안 되니깐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는 식으로 제가 이렇게 성의를 표했으니까 성의에 대해서 뭔가 하나님의 괜찮은 복이라도, 응답이라도 있기를 원합니다. 선한 응답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곤궁과 어려움에서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것 때문에 오죠. 그러니까, 관심사가 누굽니까. 자기 자신이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현재 내가 어떻게 하면 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가 관심사잖아요. 그렇잖아요. 교회 올 때 아프게 해달라고 교회 오지 않잖아요. 몸이 아프면 낫게 해달라고 교회 오잖아요. 지금 내가 고난 받는 것은 제게 합당치 않으오니 이 고난에서 이 병에서 이 가난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게 해 주세요, 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오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당신은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당신의 소원대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방금 이야기하는 것은 우주 원리 법칙에 전혀 상관없지요?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우주를 어떤 원리로 만들었으며,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께 어떤 존재냐, 그런데 관심이 없고 지금 고생과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만 해주시면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그것 때문에 온다 말이죠.
창세기 3장에서 우리 조상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그 아담이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이 집단화 되어 버려요. 아담이 그렇게 노려서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죠? 아담의 후손들 그들 전부 다 본인의 성격이나 본인의 희망사항과 상관없이 아담의 저주가 그대로 임하게 되어 있어요.
저보고 탓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 이 말입니다. 우리 정목사님 어렵게 사시잖아요. 아담이 범죄 해서 우리가 힘들고 어렵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의사 판사 그런 사람들 있지만 그 사람들도 힘들었어요. 그 사람들 대학 갈 때 안 놀았습니다. 지네들끼리 경쟁한다고 힘들었어요.
어떤 인간치고 룸펜 되려고 하는 그 외에는 다 힘들어요. 다 힘들어요. 심지어 아무 할 일도 없는 노인네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할 일이 없으니까. 스물 네 시간을 어떻게 때울 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은 쉴 시간 없어서 고생이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남은 인생을 메꿔야 될지 그걸 알 수 없어 힘들고, 그게, 아무것도 없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놀아본 사람이 논다고...아무튼 놀면 괴로워서 못 놉니다. 제대로 못 놀기 때문에 도박하고 돈 날리고, 뭐 해서 돈 날리고, 돈 안 벌면 돈 쓰게 되어 있어요. 철칙이에요. 아주머니도 애들 다 키우고 집에 놀아보세요. 돈 쓰게 되어 있습니다. 찜질방에 가고 점심 먹고 저녁때 비비고(?) 춤추고 돈 쓰게 되어 있어요.ㅋㅋ
그런데 일하는 사람은 맨날 일하게 되어 있지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개인이었는데 지금은 전부다 개인 이름은 있지만 하나님은 전부다 개인 이름은 인정치 않고 아담의 이름으로 묶어버렸어요. 아담의 이름을 갖고 아담에게 내린 저주가 그 안에 함유돼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같은 경우에는, 사도 같은 경우에 고난을 받는 이유는 사도가 인간이기 때문에 고난 받아요. 나쁜 짓해서 고난 받는 게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아담에 속하기 때문에 고난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도의 고난을 어디와 연결시키느냐 하면, 이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세상은 어떻게 마지막 끝장나는가...
세상은 어떻게 해서 끝장났으며 어떤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이 바른 예수, 바른 복음, 바른 성령을 전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여기와 연결을 시키려는 겁니다. 연결을...
이것은 사도뿐만 아니고 오늘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성도는 교회 올 때 이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사용하시렵니까. 라는 기도를 해야 해요.
어떤 사람은 제 강의 듣고 기도 할게 없다 하는데 왜 기도할 게 없습니까. ‘하나님이여 내일은 어떻게 사용하실 건데요.’ ‘하나님, 저는 일 년 동안 어디에 사용할겁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우주와 원리를 증거 하는데 제가 어떤 대목의 어떤 부분, 어떠한 위치에 배치되어가지고 하나님의 바른 예수와 바른 복음을 증거 하는 데에 저를 쓰실 겁니까. 라는 기도를 할 줄 알아야 돼요.
그렇게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욕심에 의하여 교회 안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교회 나오는 이유를 알고 예수 믿는 이유를 알아요. 만약에 그렇지 않고 내가 어떻게 이득 볼까 생각하고 교회 나오면 이 사람은 어디에 걸리느냐 하면 바로, 거짓선지자 악마의 종에게 백이면 백 다 걸려듭니다. 악마의 종한테...
악마의 종이 있는 이유가 있어요. 악마의 종들은 어떤 역할을 하냐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과 같이 춤추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놀아나기 위해서, 걸러내기 위해서 악마의 종들을 깔아놓아 가지고 자기의 인생이 전부고, 자기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주받게 하기 위해서 악마의 종들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겁니다.
그러면 불신자들을 한번 봅시다. 뭐‘교회도 불신자니까. 교회 나오는 불신자들, 불신자들은 관심이 어디 있다했습니까. 자기에게 관심이 있지요? 그러면 자기가 고난 받는 걸 뭐로 봅니까. 인생실패로 보지요. 이게 바로 고린도후서 11장과 얼마나 다릅니까.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해요.
어떤 분이 어제 대화하면서 그랬어요. 이목사는 기도 받는 게 뭐가 나쁜지, 기도 받는 게 있어요. 아플 때 병원가지 말고 돈 2만원 주면 기도해준다는 거예요. 기도 받으면 병이 낫는다는 겁니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하는데 내가 그랬어요, 반드시, 뭐가 나쁘냐 옳으냐는 자기 개인 위주가 아니라 성경말씀이 판단을 합니다.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게 성경말씀에 위배되는가 아니면 성경말씀이 옹호하는가를 비추어 봐야 됩니다. 내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쪽에서 할 말이 없어요. 아무소리 못하는거라,
왜 아무소리 못하냐 하면, ‘그럼 이목사! 성경말씀이 원하는 게 뭐야!’ 라고 물어야 될 거 아닙니까.
왜냐면 그들이 교회 다니기 때문에 교회 다니니까 기도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교회 안 갔다면 그것도 모르는데. 교회 다니기 때문에 방금 내가 한 말이 틀렸습니까. 틀린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성경말씀은 진리다 말이죠. 그러면 기도 받는 게 낫더라는 그게 성경적이 아니라면,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성경과 일치 돼야 되요.
그러면 성경과 일치되는 본 내용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분은 저에게 물었어야 되지요. 저와 같이 공부했던 많은 목회자들 그들은 삐졌어요. 왜 삐졌는가 하면, 지도 예수 믿고 목자라 그럽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묻지도 않아요. 성경의 본뜻이 뭡니까. 성경이 읽혀져야 할 책이라는 건 인정하겠는데 성경의 본뜻이 무엇입니까, 묻지를 않아요.
만약 그걸 물었다고 한다면 제 입에서 나오는 건 뭐겠습니까. 고린도후서11장이 나올 거라 말입니다. 분명히. 그죠? 그러니까 묻고, 고린도후서11장의 사도바울의 고난의 길을 얘기한 것을 본인이 듣게 되면, 듣는 그 순간 어떻게 되요, 본인이 지금까지 반대로 살아왔다는 것이 들통 나지요.
그런데 저에게 안 묻고, 고린도후서 이야기를 안 듣게 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네 길로 가고, 내가 내 길로 간다,’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잖아요. 이야기를 굉장히 복잡하게 되었는데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여기 계신다고 합시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는데 ‘예수님, 예수님이 하는 본뜻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 안 물어요. 왜냐면, 묻게 되면 답변하게 되고, 답변하면 지 하는 것이 들통 나잖아요. 차라리 안 묻고 지 기분대로 사는 것이 지 마음에 편하겠죠. 예수여! 너는 네 갈 길로 가고 나는 내 갈 길로 간다, 이 말이지요.
요즘 코미디에 유행하는 거 있잖아요. ‘그건, 네 생각이고~’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목사들이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말씀에 관심 없으니까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 성경과 합치됩니까? 성경에 그리되어 있던가요? 아니죠! 마태복음16장에 보면 뭡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는 경우에만 네가 살리라, 했어요.
이런 꼬마가(현장에 있는 누군가의 아이를 지적하심) ‘엄마, 성경에 나온 하나님 뜻이 뭐야,’ 이렇게 묻겠어요? 안 묻죠? ‘엄마, 나 오늘 백점 맞았데이,’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자기 이야기하잖아요. 자기 이야기. 그러니까 오늘날 목사들 자기 이야기 하고 싶은 거예요. 성경이야기 않잖아요. 우리가 성경 듣고 얘기하자는 겁니다.
보통문제 아닙니다. 왜 그런 식으로 하냐 하면, 성경에 보면서 하나님의 뜻과 교인들을 일치시키려는 게 아니고, 교인들이 원하는 게 있잖아요. 문방구에 애들 오면 ‘볼펜 하나 주세요,’ ‘과자 하나 주세요,’ 이러잖아요. 그러면 문방구 주인이 너는 과자먹지 말고 공부 해야돼, 하면서 볼펜 주고 이러지는 않잖아요. 그래야 장사가 되지 않습니까.
교회가 이문이 되고 장사가 되려면 목사가 원하는 대로 주면 안 되잖아요. 고객들, 손님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줄 때 장사가 되지 않습니까? 이거는 어른들 뿐만 아니에요. 교회 오는 청소년들, 나름대로 포부가 있고 꿈이 있고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발 우리 아부지 술도 끊게 해주시고...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어떤 영화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영화에 보면 아기 잠재울 때, ‘동사남북 사방에 있는 천사들이여! 우리 아이를 지켜주옵소서,’ 이런다고요. 동서남북 사방에 있는 천사들이여 우리 아기를 지켜달라, 는 게 성경에 일치됩니까? 그러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해요? ‘주여, 우리아이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이게 맞잖아요. 이게 맞잖아요. 차마 이 이야기가 안 나오죠? 남의 새끼는 그렇게 하겠지만 자기 새끼는 안 그러죠.
하나님은 아들을 뭘로 만들었냐면, 이 아들을 말씀덩어리로 만들어요. 지금부터 중요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이 세상 안을 말씀덩어리로 만듭니다. 말씀덩어리 안에 창세기3장이 들어있습니까 안 들어있습니까. 들어있죠? 창세기3장 이야기는 아담의 모든 후손은 뭘 받게 되어 있다? 저주 받아서 고생하고 땀 흘리게 되어 있죠. 이게 현실이잖아요. 성경에 나온 현실이라고!
그런데 사람들의 몸은 뭐하기 싫다? ‘고생하기 싫다’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 몸은 고생하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세계에서는 ‘고생을 해라!’ 이 말입니다. 나는 ‘고생하기 싫다!’ 하나님은 ‘고생해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그런 하나님은 싫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나에게 축복해주는 그런 하나님 돼 달라! 그때 얼굴을 빼꼼히 내밉니까. 누굽니까?
악마입니다. 악마! 그래서 한국교회는 악마가 세운 교회에요. 악마가. 왜, 말씀에 관심이 없다니까요. 교인들이 고난의 길을 가려하지를 않아요. 고난의 길이 본인에게 고생이 되는 거 맞아요. 하지만, 사도바울이 고난의 길을 간 것은 인생실패를 먼저 알았습니다. 뭘로 알았느냐, 고난의 길을 갈 때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진짜 원리와 원칙을 접촉해서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는 사람에게 쓰임 받는 것, 그게 사도바울의 영광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씀가운데, 여러 가지 말씀이 있지만 내가 받은 사명은 천사도 부러워한다, 했습니다. 왜 그런데? 왜 부러워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우주의 밑바탕을 접촉케 했습니다. 기본 우주의 원리를 접촉케 했습니다. 기본 원리 알아서 뭐할건데? 어디에 써먹을건데? 그거 돈 버나? 이렇게 얘기하겠지요.
기본 원리를 알면, 지금까지는 내가 날 위해 살다가 이미 내 몸은 하나님의 것이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원리를 위해서 나를 쓰시는 겁니다. 이건 과거를 소급해서 다 그래요. 과거, 내가 고등학교 때 퇴학당했다.(혹시 목사님이? ㅋ) 그때는 인생실패인 줄 알았더니만, 나중에 복음을 알고 보니까, 퇴학당해야 하기 때문에 퇴학당한 거예요.
여러분, 만화책 보면 일반 책과 다른 특징이 있죠. 만화책은 칸막이 있죠. A칸과 B칸이 섞이면 안 되죠. 막이 있으니까. 그게 바로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A라는 인간과 B라는 여인 C라는 아이를 각각 하나님의 뜻에 쓰여지는 거예요. 이걸 모른 사람은 불신자고 이걸 아는 사람은 신자입니다. 그러면 작가는 누굽니까. 작가는 하나님이죠.
그러면 주제는 뭡니까. 주제는 예수님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증거 하기 위해서 성도다, 성도 아니다, 성도다 성도 아니다, 성도라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좁은 길을 가기 때문에 이 자체가 뭐가 되겠습니까. 이 자체가 고난의 길이 되겠지요.
그런데 고난의 길을 가면서 뭘 얻게 되냐, 사명감을 얻게 되죠. 사명감. 아...나도 할 일이 있는 인간이구나, 그냥 남들처럼 돈이나 버는 게 내 사명이 아니라 나 존재 자체가, 나 같은 인간도 구원된다는 것을 남에게 자랑하는 거, 그게 사명이에요. 나 같은 못난 인간도 예수님의 피 공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유월절이 무슨 날이죠? 뭐가 넘어갔죠?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거죠. 죽음의 사자가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가지고 그분은 하나님이 시킨대로 해요. 큰아들 있고, 둘째아들 있고, 문이 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아이 네 명 있는지 세 명 있는지 파악합니까? 호구조사 합니까 않습니까. 안해요. 죽음의 천사가 뭐만 보고 넘어갑니까.
문설주와 문지방에 뭐가 있어요? 피만 보고 넘어가지요. 애가 교도소 몇 번 갔다 왔는지 안 묻지요? 여자가 창녀인지 뭔지 그런 거 안 묻지요. 그렇잖아요. 이게 구원이에요. 뭐보고 넘어간다? 피 보고 넘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피가 없으니까 줄창 누구만 관리해요? 자기관리 해야 돼요. 이게 불신자에요.
그렇다면 신자는 자기관리에 관심 있지 말고 관심을 어디 두냐 하면, 자기 문 앞에 피가 발렸는가 관심 둬야 되겠죠. 그게 바로 사명입니다. 쉽죠? 성도의 사명 쉽죠? 성도의 사명이 얼마나 쉽냐 하며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이미지관리 안 해도 된다는 사실. 풀든 묶으든 상관없이, 풀고 묶는 게 사명 아니고 뭐가 사명이다? 나 같은 인간도, ㅡ아 이거 따라 해야 되는데 따라할 인원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따라하라기 뭐하고... ㅡ
나 같은 인간도 뭣 때문에 구원받았다? 피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관심사를 피에 두는 거 그게 지금까지 사는 사명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계획은 자기 이미지입니다. 그건 껍데기고요, 하나님의 사명이 뭐냐 하면, 나는 나밖에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피 때문에 구원한다는 걸 증거 하는 겁니다. 50이 되든, 60이 되든...우리가 나중에 장가를 가든(?) (목사님이 장가를? ㅋㅋ)
장가갔다고 사명 있고 없고, 그런 거 없습니다. 이 피 안에서 장가를 가든 시집을 가든
장가를 안 가든 시집 안 가든, 하나님이 애초에 이걸 묻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사도는 뭐냐, 고난 받잖아요. 다른 사람 같으면 ‘하나님, 나 고난 받는데 보상 없습니까?’ 아니고 사도바울은 고난 받는 것 자체도 뭘 포함시켰습니까. 나 같은 인간도, 나 같은 죄인 중의 괴수도 피 때문에 예수님 피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라는 사명의 일부로 편입시켰습니다. 포함시켰다 이 말입니다. 이해되시겠지요? ㅡ욱이(?) 지금 몰라요. 나중에 크면 예수 믿으면 알아요.ㅡ
이걸 뭐냐 집단 구원이라 합니다. 개인 구원 없어요. 집단으로 옆집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도 뭐 보고 건너간다? 피 보고 넘어가죠. 그 사람도 나 부자 되는 거 관심 없고 피에 관심 있고 ‘나 한 달 오십만 원이다,에 관심 있는 게 아니고 뭐에 관심있다? 피에 관심 있으니까 두 사람이 대화가 될까요 안 될까요. 대화가 되지요. 그 대화가 되는 피 땅을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요즘 세상의 현대인들은 개인주의에요. 교회와도 개인주의입니다. 교회와도 개인주의예요. 그러니까 교회와도,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얘기했어요. ‘목사님,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걸 그렇게 묻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리스도를 위해 내가 무얼 하면 됩니까. 하고 묻는 사람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어요. 그만큼 의식이, 집단의식이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 앞의 이 피는 나만 위하는 피가 아니고 우리 집단의식을 가져야 할 건데 단체의식이 있어야 되는데, 개인의식만 갖고 있기 때문에 ‘나만 구원받으면...’ 이런 식이라요. ‘나는 이제 구원받아 놓았고, 이제 고생은 안 하면 되고,’ 전부 다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받아 챙기려고 하는 생각이 우선되는 거죠.
이 밑에 가면 있잖아요. 마트에 가면 바나나우유를 팔아요. 바나나우유 살 때, ‘바나나우유 얼마예요?’ 이렇게 물어보면 바나나우유만 사면 그만이지, 아줌마 나 여기서 할 일 없습니까? 하고 물을 필요는 없잖아요. 바로 이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교회 온다 그 말입니다.
집단의식이 없으니까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다, 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저 바나나우유 얼맙니까,’ 묻고 가져가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이 가게에서 제가 할 일이 뭡니까,’ 묻는 사람 없지요. 자기가 필요한 것만 사면 그만이니까.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교회 올 때 ‘하나님, 이거랑 이거 필요합니다 주세요.’ 라는 것만 신경 쓰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됩니까, 묻는 사람이 없다 이 말이지요. 그건, 개인구원에만 목적하고 있지 집단 구원에 대해서는 생각 않고 있는 거예요.
근데 사도 보세요. 사도가 누구를 위해 고난 받는다? 자기를 위해 고난 받는 게 아니고 남을 위해서 고난 받는 이것이 기쁘다 이 말입니다. 왜! 내 고난이 남한테 증거 하기 때문에 기쁘다 그 말입니다. 그런 의식을 갖고 있어야 된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 아시겠지요?
고린도후서11장을 보면서 사람들이 겁을 내요. 왜 겁을 내냐 하며는 고린도후서11장에 보면 뭐라고 하냐면 ‘내가 40에 하나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면, 얼맙니까. 195대죠. 200개에서 다섯 빼버리니까 백 구십 다섯 대죠. 여러 대 다섯 번 맞았으면, 태장으로 세 번 맞고 한 번 돌로 치고, 이 대목을 사람들이 읽으면서 겁을 내는 거예요. 왜 겁을 내냐 하면,
행여나 나도 이처럼 되면 나는 어떻게 되나, 나는 인생 실패다, 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는 실패가 아니고 그걸 맞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뭘 감당하고 있는 겁니까. 자기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거예요. 맞는 것도 사명이라니까요. 자,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보통사람들의 인생 성공실패는 뭘로 나눕니까?
현재 자기 위치 있잖아요. 자기 위치. 자기 위치에서 높아지면 이걸 뭐로 보죠? 성공. 낮아지면 인생실패로 보죠. 그러면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뭐다? 지금 이 수준에서 실패 쪽으로 가지 말고 뭐로 가달라? 성공 쪽으로 바꿔달라고 한다면 이거는 누구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자기생각, 자기생각만 하고 있죠.
자기생각만 하고 있으니까 여기에 뭐가 빠졌습니까. 뭐가 빠졌어요? 사도와 달리 사명이 빠진 거예요. 사명이. 사명이 없는 거예요. 사명 없는 신자 있습니까. 사명을 주시면서 사명 없는 성령 주시는 거 봤습니까? 사명감 없는 성령도 성령입니까? 그런 성령 없습니다. 제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고,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모든 그리스도의 사람을 몸이라 하죠?
몸에는 반드시 뭐가 있죠? 지체가 있죠. 지체 없는 몸 봤습니까? 없지요. 사지에요 사지.
사지 역할을 누가 한다 말입니까. 성도가 하게 돼있고, 성도라 하면 반드시 뭐를 감당해야 된다? 지체가 해야 될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 역할이 누구다? 성도다. 그러니까, 성령 받아야 그리스도 몸이 되고, 성령 받은 사람치고 지체 아닌 사람 없고. 지체가 아니기 때문에 맡은 역할 없는 성도는 있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누구를 위한 사명이다? 자기가 그리스도에 속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사명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말씀대로 자기를 뭐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다시 말해서, 현재 위치가 성공으로 가든 실패로 가든, 내가 이 자체를 부인하고 나의 현재 위치를 하나님의 어디에 써먹을 거냐가 중요하다 말이죠. 어데...하나님께 써먹는다는 자체가 영광스럽고(아멘) 천사도 흠모할만한 일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게 바로 고린도후서 고난의 의미입니다.
이제 고린도후서 11장 아신다 치고, 이제 12장 넘어갑니다. -질문 있습니까? 없지요?-
다시 정리하면,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고난은 무엇과 접촉하기 위함이다? 우주의 원리, 바른 예수 바른 복음 바른 성령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사명을 주어서 고난을 받게 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접촉했던 그 우주의 원리와 법칙을 아는 것으로 사도와 같은 지체임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12장 봅시다. 그러면 이러한 사명과 이런 고난이 오는 사도의 원 바탕이 어떠냐, 바탕이 뭐냐 하는 건데, 제가 그림을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예, 그림을 보겠습니다. 제가 이거 그림 잘 그린 거예요. 하늘이 있고 땅이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발을 어디에 딛죠? 보통사람들은 발을 땅에 딛고 사는데 지금 이 사람의 발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고 거꾸로 서서 외치고 있죠? 외칩니다.
이런 인간이 실제로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할 때 발을 땅에 딛고 사는 게 성도일까요? 어느 것이 성도이냐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 어느 것이 맞느냐 확인하면 되겠지요? 성도의 삶이 A일까요? B일까요? 놀랍게도 B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래요. (녹취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ㅎ) 이걸 가지고 뭐라 하냐면 거꾸로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거꾸로 사는 삶.
누가 이렇게 살았습니까. 빌립보서 2장5절에서 11절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지 아니하고 어디로 간다? 죽기까지 죽죽 잡아 놓았으니 어디 갔습니까. 예수님 가신 곳이 어디죠? 십자가!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너희도 어떤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을 품으라.
골로새서 3장1절에서4절 한번 봅시다. 골로새서3장1~4절 성경대목 대면 참 신나요. 그런데 저 혼자 신나는 게 문젭니다. 같이 신나야 되는데... 제가 한번 읽어볼 테니까 성경이 잘못됐는지 저와 여러분이 잘못됐는지 한번 돌아보기 바랍니다.
[골3:1~3]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 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너희가 죽었고, 그 다음에 뭐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하지 말라? 땅의 것을 생각지 마라, 했죠.
지난 주일날 우리교회 설교가 그거였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시험하기를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리이까? 마리이까? 하는 그 이야기했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동전 가져오라 해 놓고, ‘이 화상과 글씨가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입니다.’ 할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 이야기하죠?
그 대목을 설명하면서 성도는 십자가 이후에 바친다는 게 없어요. 왜냐면 성도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바치어진, 쟁반위에 있는 돼지머리(?) 같은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쳐질 때 그 안에 성부가 몸의 지체가 되기 때문에, 성도 자체 전부가 쟁반위에 바쳐진 상태가 되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바칠 게 없어요. 못나도 하나님께 받았으면 재물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못났다고 하기 이전에 우리 같은 인간도 받으시는 겁니다. 바칠 게 없다니까요. 바칠 게 없어요. 그 이유가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나오죠?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으니,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생각지 말라?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만약에 땅의 것을 생각한다면 그건 바로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상숭배.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지 않고 왜 살려두느냐, 우리는 이 사실을 사방에 전파하기 위해서 외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거꾸로 사는 사람으로 사는 겁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이미 바쳐진 존재고 하늘에 속한 존재기 때문에 미완료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사명으로 감당케 하시는 거예요.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바탕, 하늘! 하늘이 어떤 모습인가를 고린도후서 12장에 들어가 봅시다. 거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고린도후서 12장1절. 정목사님이 읽어보세요.
[고린도후서12장1~4]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 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 나님은 아시느니라)
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 다
4절에요,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했지요. 여기 셋째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누구죠? 이 사람이 사도바울 본인이죠? 그렇다면 사도바울 본인의 바탕이 어딥니까. 하늘나라. 셋째하늘이잖아요. 셋째하늘에 이미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195번의 매를 맞아도 자기는 그걸 뭐로 여깁니까.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쓰시는 방편중의 하나가 매 맞는 항목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게.
그리고 강도의 유혹과 도적의 유혹과 그것도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경애 씨 시집가서 애 키우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요. -이미 바탕이 하늘에 속한 바탕 같으면 소위, 남들이 말하는 인생 실패했다, 망가졌다, 꼴아박았다, 어찌 살래, 남들이 너보고 미쳤다고 할 때 얼굴 들고 살겠느냐, 온갖 타인, 남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우리가 전혀 없는 거예요.
제가 그걸 아까 골로새서에 뭐라 했습니까. 뭐를 생각하지 마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네 바탕, 네가 소속되어 있는 하늘을 생각해라, 만약 네가 땅의 것에 대한 성공을 외친다면 그거는 우상숭배! 탐욕! 이라 했어요.
제가 어떤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 했어요. 이 세상에서 젤 행복한 순간은, 1)마약 2) 술마시는 것 3)갑자기 떼돈 버는 것 4) 자기 죄를 아는 것, 몇 번이겠습니까. 질문한 적 있어요. 몇 번이겠습니까. ‘자기 죄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알면, 죄를 안 지어도 죄인이라는 걸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땅의 모든 근심 걱정에서 일순간 그 자리에서 다 없어져요.
죄 안지어도 죄인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는 의인되어서 하나님께 복을 얻어내겠다고 하는 모든 수고가 한 순간에, 헛짓이다. 이 말이지요. 성경보고 기도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의인되어서 그걸 밑천으로 해서 하나님의 복달라고 내민 모든 이런 장삿속이 얼마나 헛짓이에요. 이걸 일거에 만 고통이 없어지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의인이 아니고 뭐다? 뭘로 바꾼다? ‘죄인이다,’ 그 다음에 뭘 해도 ‘죄인’이다.
우리는 죄인 되었으니까. 지금 살아가는 것도 살아가는 자체가 뭐가 됩니까. 복이지요 뭐. 복이 은혜지요. 선물이지요. 사람이 울고불고 할 필요도 없어요. 가령, 울 때는 과거의 것이 후회될 때 울고요, 사람이 나는 죄인이다, 그 순간부터 이 행복감은 만약...아무리 먹어도 이거 못 따라갑니다. 마약은 약기운 떨어지면 허무해지잖아요. 이건 허무하지도 않아요.( 죄인인데 뭐!
잘되려고 하니까 마귀가 역사하고,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인정해버리니까 마귀가 떠나고 마귀가 떠난 순간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게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한, 모든 은혜인데요.
사도가 지금 낙원에 갔습니다. 낙원을 봤습니다. 도대체 사도의 고민이 뭡니까. 없어요. 우리가 고린도후서11장을 볼 때는 ‘에고~ 사도는 고민 많겠다. 매 맞고 동족의 위협과 강도의 위험과 수고하고 애쓰고, 27절에 보면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고 에고~팔자 더럽다 참, 이래도 꼭 살아야 되는가,’ 이렇게 동정심이 가고 측은해 했지만 막상 12장에 넘어와 보니까 누가 부럽습니까.
사도가 부럽지요. ‘아~ 챙길 건 다 챙겨 놓으니까 그렇게 여유 있게 했구나~’ 우리 같으면 천 번 백번 하나님께 원망했을 건데 사도는 본 게 있기 때문에, 낙원에 간 사람이 볼 것 다 봤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지난 수요일인가 그런 설교했어요. 제가 옛날에 봉화 살 때 신혼살림 하면서 집에서 혼자 물을 관리를 잘못 해가지고, 들통에 물을 담아 놓았는데 물을 그만, 그때 방에서 로마서를 읽고 있었는데, 수돗물 잠그는 걸 잊어버렸어요.
제가 물 틀어놓은 이유가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서였는데 찌꺼기 없어진 건 기본이고, 그건 옛날에 없어졌고, 물이 넘쳐요. 물이 콸콸 넘치는 거예요.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무죄상태가 되면 어디로 가요? 기껏해야 어디 갑니까? 에덴동산에 갔다가 다시 죄지어야 되겠죠.
무죄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뭐다? ‘의’가 되는 거예요. 의가.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뭐냐, 하나님이 그렇게 감당 못하는 의를 주시는 그것도 하나님 자신의 ‘의’에 속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도 의롭고 누구도 의롭고? 우리도 의롭고. 우린 하는 것도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 행해서 의인되었겠어요. 그래서 사람은 행함을 의롭지 못하고 무엇으로 한다? 이 사실을 인정함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살리라. 의롭게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뭐로 보시냐, ‘빈 컵’으로 보고 여기다 뭘 붓느냐, 여기다 계속 하나님의 의를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서 우리는 자신을 뭐로 만들고? 첨부터 나는 아담에 속한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 말미암아 현재 내게 남아있는 것은 몽땅 뭐가 된다? 하나님의 주신 의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하나님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써먹는 거지요.
그 의의 혜택이 뭐냐, 낙원에 가는 거예요. 천국에 가는 거예요. 셋째하늘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은혜로 받았던 이 셋째하늘을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나, 희한한 세상 봤다,’ 그래서 본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다음에 12장7절에 보세요. 거기 뭐라 합니까? 너무 크기 때문에 자기 육체에 뭐를 주었다 했어요? 가기를 주었죠. 가시를 주었는데 이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 기도했지요.
근데 하나님은 그 기도 안 들어주었습니다. 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뭐라 하냐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뭐한다 했습니까? 기뻐한다 했지요?
미친 거 아닙니까? 미쳤어요. 지금 거꾸로 살지요? 환란과 궁핍 같으면, 세상을 바르게 살았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 믿을 마음 안 날거예요. 하나님이 도와줘야 믿겠는데 자기 뜻대로 안 되는데 어떻게 삽니까. 이미 자기는 낙원에 있고, 자기 두 발은 어디에 속했다? 낙원에 속해 있고 이 땅에서는 뭘 당한다? 바람이 불면 궁핍과 핍박이 오면 올수록 뭐가 더 소망스럽다?
현제에 마음 두지 않고 어디에 마음 둡니까? 바람이 불고 어려울수록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겠지요. 그래서 성경에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는 보이는 것이 소망이다 아니다?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니 보이지 않은 것을 소망이 되어야 된다, 보이지 않은 것을 소망한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어디 것을 생각하라?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가지고 인도하시는 방침입니다. 이 방침에 대해서 저에게 이의를 걸면 안 돼요, 사도가 이렇게 갔고, 성도가 이렇게 갔기 때문에,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주는 그것으로, 이미 주실 것 다 줬어요. 예수님이 이렇게 살았어요. 예수님이 거꾸로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 하죠. 나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너희들은 땅에 속해서 땅의 것만 듣고자 하는구나. 그러니까 어찌 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을 하면서 그 뒤에 말이 뭐냐 하면,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너희가 하늘의 말을 알아듣게 되고, 땅에 살았던 것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 저주아래 산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이 뭐냐 하면, 성령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가 주어진다 했어요. 빈 칸이 없어요. 성령이 오든지 저주가 오든지 둘 중에 하나지, 성령도 저주도 아닌 그런 빈 칸은 남겨두지 않습니다. 귀신 나가고 난 뒤에 일곱 귀신이 오는 것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의가 오느냐 하나님의 저주가 오느냐, 그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게 아담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 그거예요.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5절에 봅시다. 『12장5절: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이건 사도바울 본인보고 하겠지요?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왜 그렇게 했을까요? 왜 사도바울이 자기가 계시 받은 걸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약한 것을 자랑할까요? 그 정답은 바로10절에 얘기 했지요? 그게 뭐냐,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것이 바로 ‘성도의 특징’입니다.
남들 보기에 너는 망했다, 할 때에 그때가 하늘나라에만 소망 두고 사는 유일한 순간이다, 이 말이죠. 내가 세상에서 실패했다고 할 때에 비로소, 하늘나라에 충성한 사람인 것을 느끼는 순간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을 하게 되면 하늘나라가 그리워지지 않고 하늘나라가 좋아지지 않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문제 하나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하늘에 소망을 둘까요? 안 둘까요? 문제입니다. 답변해보세요. 가난한 사람은 하늘에 소망을 둘까요? 안 둘까요? 안 두어요.(관객 가운데서 ‘소망을 둔다’고 답변한 듯함) 왜냐면 가난한 사람도 거꾸로 사는 게 아니고 바르게(거꾸로 반대말) 살기 때문에, 다만 가난하기 때문에, 지금 가난하니까 지금보다 더 성공적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어야 좋은 하나님인 줄 아는 겁니다. 우주원리에 의하면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뭐만 남아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는 사람이냐,는 거지요. 그래서 예레미야 1장 같은 경우에, ‘모친의 태중부터 나를 알았고’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태어나게 해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도 기도할 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하지 마시고, ‘오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됩니까?’ 라고 물어보는, 자꾸 이걸 물어보세요. 오늘 제 사명은 무엇입니까. 오늘 제 역할을 무엇입니까. 내가 뭘 좋아합니다,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어떻게 저를 쓰실 겁니까? 물어보는 그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고린도후서 11장12절을 보았습니다. 사도가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똑 같은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주어지는 줄 믿사오니 앞으로 우리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못난 이런 인간도 예수그리스도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의인되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평생 감사하면서 받아들이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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