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4월 7일 조지래드 27 신약신학-제40과 야고보서
부산 4월 7일 조지래드 27 신약신학-제40과 야고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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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07 조지래드 신약신학 40과 야고보서
관리자(IP:125.♡.2.45)
09-04-0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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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IP:117.♡.139.16)
09-04-08 09:00
죽음에 대한 이해
성경의 어느 구절도 자신이 죽지 않고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하나님께서 성도 자신을 죽여가면서도 말씀은 살리는 방식으로 성도를 다루신다. 이로서 성도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죽음은 죽음으로 간주해주지 않는다. 그 또한 자신이 자신을 살리려는 방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말씀이 주어지면 성도는 늘 죽는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특징이다. 이스라엘과 일반 민족과의 차이점은 그 바탕에 있어 이스라엘은 ‘죽음과 저주에서 솟아난 민족’이라는 점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게 된다. 홍해 바다라는 죽음의 바다를 타민족(애굽)과는 차별적으로 건짐 받았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시 68:22)
그것도 자기네들의 실력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출 15:3-6)그래서 이스라엘에게서 개인적 구원이란 용납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개인은 늘 죽어있어야 한다.
즉 개인이 모여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되기 위해 죽어야 되는 자들의 집합이 곧 이스라엘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의 위력으로 이 일을 가능케하신다. 이스라엘과 동행 하시는 ‘여호와 이름’ 되시는 분은 자신의 죽음 속으로 전체 이스라엘을 쓸어 담으신다. 그들의 각자의 이름을 죽여 버리고 그들 각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살게 하시는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견지하겠다고 한다면 그 이름은 그 자체로서 살아있어 말씀을 지키려고 덤벼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말씀이 모독 받고 말씀은 윤리와 도덕으로 전락된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가만두지 않고 저주해 버립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자기 죽음 속으로 성도를 쓸어 담으신다. 마치 트로이 목마 같다. 그 안에 군사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이다.(롬 8:29) 그 안에서만 생명이 있다. 따라서 성도의 생명은 그 안에서 생명이 아니라 죽은 자가 지낸다. 세상을 향하여 십자가가 발산되면. 소위 살아있다고 우기는 세상적 기준은 거짓이었다. 실은 죽은 자들이다.
이처럼 죽음의 실제성은 말씀의 실제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말씀이 성령을 통해 활동됨을 성도가 현실로 인정하는 순간, 그 현실 안에서 성도는 늘 죽어있으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진정 산 자가 된다. 성경 말씀은 이런 성도를 통해서 외부로 발산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소위 ‘말씀이 지켜지는 것이다’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삿 7:20)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관리자(IP:220.♡.176.150)
09-04-15 16:48
부산090407a조지래드27신약신학-야고보서a
20090407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야고보서
(강의:이근호 목사)
야고보서를 여기 공동서신으로 구분해놨는데 왜 공동서신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야고보서 교재에 나와 있습니다. 특정 교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전체 교회에 다 해당되는 그런 편지라고 해서 공동서신이라고 했는데, 그건 니 생각이고. 야고보가 들으면 약간 실소를 금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고.
야고보에 대해서 기존 학자들이 어떻게 보는가? 그것부터 먼저 이야기합시다. 여기 야고보에 대해서 래드가 기존의 생각을 잘 대비해놨는데 ‘야고보에는 일관성을 찾지 못하겠다’ 하는 식으로 나오죠. 이건 우리가 지난 시간에 히브리서 할 때도 마찬가지죠. 야고보서 할 때도 상당히 자신감이 떨어진 일관성이 없이 되는 겁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야고보서를 볼 때 사도 바울의 편지를 자꾸 의식을 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야고보서를 사도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없다고 여기고 야고보서 이것만 달랑 성경책에 신약시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이후에 야고보서만 있고 나머진 없다고 여겨봅시다. 그러면 야고보서가 왜 썼는지가 잘 드러날 겁니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에베소서에 나오는 바울의 편지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야보고서의 본래의 주장하는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기존의 생각에서는 야고보서를 보면서 어디다 초점을 맞추느냐 하면, 이 사람 래드의 생각은, 교재 다 읽어봤습니까? 이것도 오래 하면 안 읽어보는 경향이 많아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면, 2장 8절에 보면, ‘황금률’이라 돼있는데 저는 성경에 아무리 봐도 황금률이라 하는 게 안 나오는데 황금률이라 하는 거예요. 황금률이 뭔가? 무슨 금으로 만든 것인가?
그게 아니고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이렇게 돼있단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내용이 실제로 뭐냐 하면, 이웃 사랑을 해줄 때 야고보서 2장 17절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그 원칙에 준해서 이웃 사랑이 있는 경우에만 비로소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있는 진짜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 아니하면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
이것을 왜 이렇게 주장하느냐 하면, 야곱보서 1장 1절에,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이 야고보가 성경이 두 사람 나오죠. 한 사람은 제자들 중에 야고보인데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일찍 갔어요.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칼로 죽이고” 일찍 돌아가셨는데 15장 13절에 보면,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중심으로 벌어지는 교회가 있어요. 그걸 팔레스타인 교회라 하는데.
예수님 태어난 고향마을에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 집단이 소위 자기가 원조, ‘원조 떡볶이’ 같은 것 있잖아요. ‘원조 할매 곰탕’ 이런 거 있잖아요. 원조로서 자처하면서 심사를 하겠다는 거예요. 그 원조 팔레스타인 교회에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야고보란 사람입니다.
야고보가 누구냐? 예수님의 형제라 했으니까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는 예수님의 배다른 형제라고 볼 수 있죠. 씨가 다르죠. 마리아 바람 피웠다는 게 아니고. 그런 형제가 있는데 이 사람의 사상이 사도 바울과는 달라서 뭔가 이웃 사랑 안 하면 율법을 버리면 당신은 믿음이라고 쳐주겠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1장 25절에 보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율법을 실행하는 그것이야 말로 자유로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존의 학자들은 이 야고보를 어떤 동네, 어떤 지역에 있는 문화다. 여러 가지 사도 바울의 문화가 있다면 이쪽 문화인데. 두 종류의 이론이 있어요. 여기 나오죠. 사도 바울을 이미 안다. 아는데 너무 방종하니까 까불지 말라고 충고했다는 설이 있고, 사도 바울을 몰라서 자기 마음대로 밀어붙이는 그런 경향이 있다. 이렇게 두 가지로 이야기해요.
그렇다면 야고보대로 이웃 사랑 하려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기서 기존 신학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고, 하나님의 율법 있는데 보통 사람들,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여기서 진짜 믿는 자, 그냥 믿는 자가 아니죠. 행함이 수반된, 행함이 들어있는 진짜 믿는 자, 보통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진짜 믿는 자 되느냐 하는 것과 두 번째 보통 사람이 아니고 거듭난 사람, 변화된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진짜 믿는 자 되느냐 하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야고보가 말하기를 일 번, ‘보통 사람에 해당되느냐?’ 아니면 ‘진짜 거듭난 사람이 되느냐?’ 하는 문제인데 여기서 거듭났다는 이야기가 야고보서에 나오느냐 이 말이죠. 야고보서에 안 나오죠. 그러면 모든 사람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율법 지키기만 하면 이웃 사랑만 해대면(최고의 법이니까) 행함에서 믿는 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필리핀이나 알래스카 사람이나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도 율법 지키면 믿느냐 하는 거예요. 거듭났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열두 지파에게 문안한다는 그걸 봐서 거듭났다고 볼 수 없습니까?
열두 지파는 혈육에 관한 것이죠. 전통이죠. 이스라엘 전통. 열두 지파라는 것은 이미 여기서 율법에 대해서 특정 집단을 말하잖아요. 전라도 사람들이 경상도 경주에서 엑스포 하는지 모르잖아요. 마찬가지로 경상도 사람들 안 거듭나도 괜찮아요. 경주에서 떡과 술잔치를 벌인다는 것은 경상도 사람은 다 안다 이 말이죠. 경주 사는 사람 중에서 자기 동네에서 떡과 술잔치 벌어진다는 그걸 경주 사람이 거듭나야 압니까? 지방에서 벌이는 하나의 문화인데.
유대인은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거듭나고 안 거듭나고 조건 필요 없이 출생 자체가 조상이 누구에요? 야곱이고 아브라함이잖아요. 아브라함 조상과 더불어서 어떤 문화성이 있느냐 하면 우리는 특별한 족속이다. 이게 인식 돼있는데 히틀러 밑에 유대인도 그렇고. 게르만 민족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 히틀러가 최고다. 우리는 게르만 민족이기 때문에. 게르만 민족 자체가 거듭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만약에 게르만족이 거듭나버리면 두 종류가 생겨요. 거듭난 게르만 민족과 거듭나지 않은 게르만 민족이거든요. 그러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히틀러가 최고인데 거듭난 사람은 히틀러 버립니까? 같은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버리면, 거듭난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떻게 봐야 돼요? 율법을 버려야 되죠. 율법으로 거듭난 게 아니니까.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열두 지파가 목사님 말씀대로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무리인데 굳이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진짜 유대인은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그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면 자기들은 진짜 유대인이죠. 진짜 유대인은 거듭날 필요 없고 그냥 가만있고 다만 예수님이 구주라는 걸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기 자신은 변화가 없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율법 앞에서 어떤 자체적인 변화가 있을 필요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보통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데 자체적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율법을 지켰다’라는 원칙이 야고보에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율법은 아무도 못 지켜요.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지켜요’라는 것이 야고보에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로마서에는 나오죠. 사람은 율법으로 해도 소용없고 마음으로 할례를 받아서 할례인데 만약에 할례 없이 율법을 앞세우면 모든 자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죄인밖에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이뤘는가? 그것은 내가 행함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성령의 의가 우리 속에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킨 셈이 된다. 만약에 지금 와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1장에 의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것이다. 분명하게 나와 있잖아요.
야고보는 그게 없는 거예요. 지금 율법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킬 때 보통 사람도 지킬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야고보서가 점검하고 있느냐 하는 그 문제를 하는 겁니다. 야고보서에서 ‘유대인은 오지 마’라고 배척하는 게 있느냐 이 말입니다. 거부하는 게 있느냐? 야고보서는 없어요.
없으니까 기존의 신학자들은 상당히 당황하기 시작한 거예요. 도대체 보통 사람도 율법 지켜서 구원받아 버리면, 마지막에 행함으로 측정하겠다는 거예요. 여기 야고보서 2장에 나오잖아요. 만약에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도 가만있으면 아무리 그리스도 종이라도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것은 귀신도 아는 것이다 말이죠. 그런 믿음은. 실제로 헐벗은 형제를 보고 가만있으면 나는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겠고,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부자가 오는 걸 환영하고 가난한 사람은 천대하는 그런 것은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그래서 야고보는 뭐냐 하면, 믿음 할 때 믿는 게 아니에요. 야고보서의 믿음은 의지하는 게 믿음이 아니고, 율법대로 이웃 사랑을 행하는 것을 가지고 그거는 안 믿는 것과 차별되는 믿음이라 보는 거예요.
로마서, 갈라디아서 없다고 여기세요. 그런 것은 들어 본적도 없고 다만 야고보만 등장한다 말이죠. 등장하면 여기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해놓고, 이창섭 목사님 말씀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거듭난 사람이냐, 아니냐 하시는데 만약에 그렇다면 야고보가 편지를 이렇게 안 써요.
하나님, 여러분 그런 거 다 아시죠. 예수님, 그런 거 잘 모르죠.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이런 분인데 믿습니까? 믿죠. 그러면 그 다음 넘어가서 ‘이 책은 야고보서는 예수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라 해서 이건 뭐냐 하면,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은 무엇을 받아들인 것이냐 하면, 유대인 보고 이제는 드디어 율법을 이웃 사랑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 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있는 것으로 간주하라 이 말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 분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야고보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뭐냐? 이웃 사랑을 온전히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새삼스럽게 ‘믿습니까’를 묻는 게 아니고, 믿고, 안 믿고를 따지고 난 뒤에 예수님의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행함이 있는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믿습니까? 행함이 부족하구나. 믿는 건 됐는데 행함 첨부하세요.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 사랑을 안 해? 그러면 나도 애초부터 예수 안 믿겠다.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새삼스럽게 예수님은 삼위일체인데 성자로 오시고 십자가에 올랐다. 이런 이야기 하나도 없어요. 여기 십자가 부활이 어디 나옵니까?
초장부터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 그리고 이는 풀의 꽃같이 지나감이라. 누가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를 달라고 해라.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조건 없어요. 도리어 이런 이야기해요.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나, 야고보한테 배워요. 예수님이 누구시냐고요? 행함을 어떻게 행할 거냐를 배워라. 그게 예수 아는 거다. 이렇게 주장해요. 예수님의 부활 그걸 믿으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행동을 하라고 시켰습니까? 제가 듣고 실행하고자 합니다. 그럼 넌 예수 믿는 사람이다. 왜? 행함으로 내용을 채웠기 때문에.
이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로마서, 골로새서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게 하나도 안 어려운데 지금 뭘 의식하느냐 하면, 아까 로마서 이게 들어있으니까, 난 그쪽을 의식했는데 딴 소리 하고 있으니까 그쪽을 버리고 이걸 취하려하니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버리기에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신학자들은 야고보서를 할 때 허둥대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래서 반칙이 나오죠. 일단 믿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그 다음에 모자란 행함은 야고보서 배워서 합쳐서 구원받는다. 이것 이단입니다. 야고보가 그런 걸 이야기한 적 없어요.
그 다음에 야고보 1장 봅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서 ‘시험’을 빼버리면 뭐가 됩니까?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세상에 교회 안 다닐 때 성경에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있는 줄 알고 신학교 가서 공부해보니까 없어요.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죠. 이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냥 참는 것은 자기 성질 죽이는 거고,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악마의 유혹에서 악마가 어떻게 유혹하는가 악마를 의식하면서 거기에 대적하는 것, ‘악마야 그게 아니야’라고 강하게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 이게 바로 복이 있다 이 말입니다. ‘아이고 성질. 참아야지.’ 이게 복이 있는 게 아니고 그건 자기 이익 챙기는 거고, 자기 이미지 관리고. 악마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서 1장의 내용만 봐도 로마서, 갈라디아서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마치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에덴동산의 경우가 그대로 와버렸어요. 우리가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우리가 있는데 에덴동산이 쳐들어와버렸어요. 그때 그 마귀가 지금 똑같이 역사하는 거예요.
사람이 죄를 지었다? 사람이 죄 지은 것은 하나님이 죄 짓게 했다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죠. 그건 니 생각하고, 진짜는 하나님께서 죄를 짓게 하신 게 아니고 네 욕심이 악마의 유혹에 짝짜궁 해서 ‘얼씨구나 좋구나. 기다렸다 악마야. 기다렸다. 유혹아. 얼마나 기다렸다고.’ 하고 짝짜궁 죽이 맞아서 그래서 죄 지어서 그 죄 값으로 죽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아, 다시 말해서 열두 지파 형제들아 지금 야고보, 내가 하는 말이 성경과 어긋나는 게 없다는 거예요. 성경핵심 그대로라는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야고보를 처음 접한다면 우리는 무릎을 치면서 백번 동의할 겁니다. ‘그렇지, 그렇지. 아담이 봐라. 아담이 유혹받아 신이 되고 싶어서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말에 유혹받아서 아담이 넘어간 것처럼 우리는 똑같은 상황이 우리한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욕심에 이끌려서 그런 죄를 안 지어야지’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요.
그와 같은 똑같이 이야기가 3장에 나오죠. 3장 1절에 선생 된 자들은 주의하라. 왜? 8절에 보면 말 가지고 사람을 죽인다 했어요. 죽이는 것이 뭐냐? 말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죽이는 독이 나오고 있는데, 우리는 독 나오지 말고 찬양 나오자 이 말 아닙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3장 9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이게 도대체 신약인지 구약 창세기 1장, 2장, 3장인지 구분 안 되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는데 어떻게 한 입으로 찬양과 저주가 나올 수 있느냐? 이것은 마땅치 않다.
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내겠느냐? 말이 안 되지요. 단물 내는 샘 따로 있고, 쓴물 내는 샘 따로 있는데 한 샘에서 단물, 쓴물 나온다는 것은 모순이죠.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쓴물 내면 쓴물만 내든지 단물 내면 단물만 내지 어떻게 둘이 나올 수 있느냐? 그래서 이건 뭐냐 하면, 단물만 내라 이 말이죠. 여기 12절에 “짠 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이게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잘했다 우겨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3장 15절에 보면,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이렇게 돼있어요.
그래서 래드는 이 야고보를 보면서 아까 이야기한 거듭남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표현이 없는가를 찾기 시작했어요. 찾은 게 뭐냐 하면, 이 사람 책에 보면 1장 21절이라 돼있던데, ‘영혼’을 가지고 승부를 거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잘못된 거고, 거듭남과 유사한 하지만 거듭난 건 아니에요. 요한복음에 나오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과는 관계없는데 하여튼 뭔가 사람이 달라야 다른 행동이 나올 게 아닙니까.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고 뭔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비법이 뭔가를 기어이 찾고자 한다면 1장 17절밖에 없어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위로부터 온다고 해서 거듭난 건 아니에요. 여기 봅시다. 사람이 위로부터 온다고 해서 이 사람이 거듭난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위로부터 오는 것을 받기만 하지 사람이 달라진 건 아니잖아요.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께서 이 사람을 일 번, 변화시켜서 이 번, 위로부터 오는 걸 알아보게 돼있다 이 말이죠. 야고보는 그게 아니고 사람은 그냥 가만있는데 위로부터 오는 걸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것과 땅에 있는 것과 구분할 줄 안다 이 말이거든요. 거듭난다는 게 없어요.
3장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아까 선한 열매라 했지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야고보서에 나오잖아요. 위로부터 오는 것을 하게 될 때는 어떤 게 생기느냐 하면,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나오죠. 사람 자체가 달라졌다는 초점이 아니고,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떤 열매를 맺으면 끝나는 거다 말이죠.
제가 지금 야고보를 이렇게 본다는 말은 한번도 이야기 안 했어요. 기존에 야고보를 볼 때 어떤 허점이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야고보는 이렇게 봅니다’라는 것을 하기 전에 먼저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의식하며 야고보를 흩어나갈 때 야고보 자체하고 기존의 바울하고 전혀 안 맞는 이런 구석들이 많이 있다는 걸 전부다 까발리고 있는 겁니다. 나열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거듭남에 대해서는 야고보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지시고 부활했다는 그 이야기도 없지요. ‘내가 십자가 지시고 부활했다. 그러니까 믿어라. 믿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행하라.’ 이게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결국 야고보는 사람 자체를 어떻게 정화하라는 게 없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뭐가 중요하다? 율법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이제 약간 감이 오십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건 야고보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야고보의 관심사는 창세기 1장부터 보게 되면, 사람은 사람을 위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한 사람으로 만들어놨지 사람 자기를 위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구약 율법 내에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몽땅 어긴 거예요. 그 사람 구원 못 받습니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사도 바울의 내용도 그게 아니지만 만약에 사도 바울에 대해서 오해한다면, ‘온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도 몇 가지 못 지키면 나머지 못 지킨 부분에 대해서 십자가 복음이 있으니까 그걸로 씻어주면 온전히 지킨 게 된다’라는 그러한 노림수가 있을 것처럼 보이죠. 사실은 그게 아닌데. 사도 바울은 그런 뜻이 아닌데.
그러나 야고보를 보든지 사도 바울 서신을 보든지 보는 사람의 정신상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나 좋으라고 내 구원 위주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이 야고보가 용서를 안 해요. 그런 믿음은 귀신도 하는 거다 말이죠. ‘나는 하나님 믿는다. 나는 구원받는다.’ 이런 믿음은 귀신도 알고 떠는 거다 말이죠.
야고보는 뭐냐 하면, 하나님 말씀이, 네가 사람이야. 사람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사람을 통해서 하늘의 지혜, 하늘이 온갖 열매가 주렁주렁 달릴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 보시기에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믿는 자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제 말을 아직도 이해 잘 못하는데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는 야고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반드시 내 말에 동의하게 돼있다 이 말입니다. ‘아이고, 야고보 사도님. 못 지켜요.’ 지키고 못 지키고는 네 사정이고. 지금 관심사가 자기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흩어진 열두 지파가 아닙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종, 흩어진 열두 지파라면 야고보의 이야기에 대해서 백 번, 천 번 동의하고 박수 치면서 ‘아이고 다 시원하다’라고 동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는 상관없다. 그런 것은 사도 바울에서 다루죠. 이건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이 안 지켜도 되는 율법으로 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래드가 이 책을 쓴 걸 보면, 일신론이 어떻고 일신론을 믿는 믿음을 의지하고 있다.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야고보 자체를 보게 되면, 야고보가 자체가 뭔가 그리고 있고, 원하고 있고, 노리고 있고, 기대하고 있는 게 있어요.
그 다음에 봅시다. 4장 1절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이 말은 뭐냐 하면, ‘싸우지 말라’ 이 말입니다.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저는 어떤 때는 한 번 싸웠는데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을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하여튼 싸우지 마. 왜 뒷말이 많아. ‘저는 싸웠는데 그럼 지옥 갑니까’라는 말도 하지 마. 그거는 야고보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그 다음에 또 뭐가 나오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간음하는’ 것은 세상을 말합니다. 왜 간음하는 말이 세상을 뜻하는가를 나중에 다 이야기할 텐데요.
지금 야고보가 쓰는 용어들이 개념 자체가 사도 바울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걸 사도 바울처럼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율법으론 안 되고 옳다구나. 십자가 있구나. 십자가 믿어야지’라는 식으로 야고보를 접근하면 이해가 하나도 되질 않아요. 싸우지 말라면 안 싸워야 되고. 그래야 돼요.
그럼 여기서 너무 어려우니까 야고보서의 진짜 의도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 시간에 하려고 했는데. 뭐냐 하면, 원래 자리, 인간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야고보가 이야기를 합니다. 본래의 자리가 뭐냐 하면, 저주 아래 있는 자리에요. 야고보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저주 아래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주인이십니다. 메시아에요.
그래서 야고보가 십자가 부활 이야기는 구원하시는 메시아 이쪽에 초점이 있다. 구원이 뭐냐 할 때는 십자가 부활이 언급돼야 되겠지만 야고보에 십자가 부활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어디에 치중하느냐 하면, 저주 아래 있는 인간상, 이것을 분석하는 겁니다.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의 자리가 저주 아래에 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왜 우리는 저주 아래 있으며, 왜 우리는 죄인이냐, 왜 우리는 어떤 식으로 구원돼야 되느냐 하는 것을 십자가 부활로 이해하기 전에 이 상황 아래서 무엇이 복이며, 무엇이 저주인가를 인간론을 가지고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지혜자기 때문에.
잠언 지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그리고 현재 있는 세상 지혜, 이거는 문제성 있는 지혜죠. 인간의 저주받은 지혜죠. 제가 잠언서 할 때 했잖아요. 이러면 저주받고 이러면 죽고, 이러면 살고, 항상 대비돼있죠. 지혜가 하늘에서 오는 지혜가 되면 이 땅에 있는 지혜가 문제 있는가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지혜가 저주받은 인간한테 흠뻑 덮여버리면 인간은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무엇이 저주받은 세상이고, 무엇이 하늘의 지혜인가를 거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관심 있는 게 아니고, 뭐가 나쁜 것이며 뭐가 하늘로 온 순결한 것인가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있단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가 흠뻑 덮일 때 그때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아로 이걸 알 수 있는 하늘의 지혜를 아는 자에게 예수님은 곧 참된 하늘로 오신 지혜자라는 것을 동의할 수 있다 말이죠.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다면요 야고보가 들으면 야고보가 의아할 거예요. 누가 하던데? 왜 야고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야고보의 관심가가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는가가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본래 자리에서는 인간이 구원될 수 없어요. 저주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더러운 인간이기 때문에. 자체가 인간은 마땅한 벌 받고 있는 사람에게, 복도에서 벌서고 있는 아이에게 ‘안 됐다’ 그런 소리하면 안 되죠. ‘의자 똑바로 들어.’ 이게 옳다 이 말이죠. 그러면 벌서고 있다가 ‘선생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너는 그런 자격도 없어.’ 이래 된다 말이죠. 그게 야고보란 말이죠.
야고보에서 예수님이 왜 오셔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진짜 율법의 정신과 지혜의 정신을 알려준 분이 없었어요.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란 걸 누구도 이야기한 적 없다 이 말이에요. 왜냐? 누구도 메시아가 아니니까.
그런데 메시아가 오게 되면, 이게 핵심이에요. 메시아가 오게 되면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가 어떻게 차이 나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는 분으로 오신다. 이게 야고보가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잊어버리세요.
야고보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면 야고보가 이야기하죠. ‘당신 죽어.’ 왜요? ‘당신 욕심 때문에 죽는다고.’ 왜요? ‘악마가 설치는 지혜에 붙었으니까 너는 죽어도 마땅하지.’ 이런 말만 할 뿐이에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아야 너는 똑바로 살 수 있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거기에 십자가 부활이 안 들어가요. 그래도 저는 신을 인정하는데요. 그런 것은 귀신도 아는 기라, 이눔아. 아이고, 잘 떠드는구나. 귀신도 안다.
야고보는 이렇습니다. 지혜를 알고 행하지 않는다는 건 그런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야고보가 인간론이 사도 바울보다 더 깊이 들어가 버려요. 세상에 지혜를 아는데 행하지 않는 법이 없을 정도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돼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마귀든 하나님이든 누구한테 영향 받게 돼있지, 마귀도 모른다, 하나님도 모른다, 난 독자적이다. 이런 인간은 애초부터 본래의 자리에서 인간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악마든, 하나님이든 지혜가 찾아오면, 악마는 가짜 지혜죠. 가짜 지혜가 오게 되면 거기에 반응을 나타내면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데 죄가 드러날 수도 있고, 의가 드러날 수 있고. 어쨌든 인간은 그런 반응, 연결되고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유동적인 존재가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뭐하라하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아요. 오늘날 사도 바울만 알고 있는 사람한테는 상당히 어색하지요. ‘너는 안개니라. 네가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를 보려고 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그럼 안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거예요. 야고보는 그런 말이 무슨 뜻이 못 알아들어요. 왜냐하면 반드시 야고보는 말을 하게 되면 실천에 옮기는 말을 하게 되지 실천에 옮기지 않는 지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듣고도 안 지킬 수 있다는 말은, 야고보한테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하늘의 지혜가 오면 반드시 그 값을 해요. 아까 나왔잖아요. 뭔가 쓴물이 나오든지, 단물이 나오든지 둘 중에 하나가 나오게 돼있지 아무것도 없는데 지혜만 아는 그런 경우는 야고보가 아는 인간에서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믿기는 믿는데 행함은 좀 부족하다. 그런 인간상은 야고보한테는 없습니다.
야고보는 인간이 뭘 믿는 게 아니고 위로부터 지혜가 주어지게 돼있어요. 하늘의 지혜가 주어지게 되면 하늘의 지혜가 나오게 돼있고, 하늘의 지혜가 없는 인간은 땅의 지혜가 나오게 돼있는데 그게 바로 행함을 통해서 믿는지, 안 믿는지가 확인 된다는 게 야고보서의 핵심이다 이 말이죠.
-하늘의 지혜가 안 내려지고도 하늘의 지혜로서 나오는 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야고보서에 나오는 이런 내용들은 기존 우리가 알고 있는 윤리도덕과 거의 흡사하지 않습니까?
전혀 흡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정결하지 않고 순결하지 않으니까
-싸우지 말라든지, 부한 자들에게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든지 이런 것들은 오늘날도 경제실천윤리 이런데서 얼마든지 이야기하는
왜냐하면 그거는 온 율법이 아니고 일부를 비슷하게 모방한 거지 온 율법이 아니잖아요. 하늘의 지혜안에는 모든 율법이 다 들어있죠. 70%만 들어있는 것이 하늘의 지혜가 아니고
-야고보서 1장부터 해서 나오는 하라는 내용이 온 율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온 율법 속에 들어가 있는 어떤
온 율법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하는 것도 온 율법이고 모든 온 율법 속에 들어있어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온 율법을 앞장세워서 이런 지혜를 주신 거예요. 흩어진 열두 지파한테.
-그럼 하나님의 지혜가 이 땅의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떨어지면 거기에서 열두 지파는 그런 행위가 나온다, 안 나온다?
반드시 나오죠.
-나옴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하늘의 지혜를 받은 것으로 다른 형제들에게 전달하는 자로서
전달할 필요 없어요. 지는 그것만 외치면 되니까. 그런 것은 자기 소관 아니니까. 반드시 그냥 나오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독자적 자기 의지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은 율법으로 이해해도 되는 겁니까?
온 율법이죠. 지혜란 율법이라 볼 수 있죠.
-그러면 사도 바울이, 율법이 가하는 것은 죄를 더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던 그 말씀
그 말은 맞죠.
-비교해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떨어졌을 때 우리가 행동이 나오지 못했을 때에 네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하려고 율법을 줬다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고
사도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한 적 없어요. 나중에 보면 똑같아요. 둘 다 차이점이 없어요. 우리가 사도 바울을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해한 것은, 하늘의 지혜가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당사자가 그렇게 해야 되는데 싸우지 말라 했는데 싸울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보면서
그 이야기는 사도 바울에 있어요. 야고보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아예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네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그럴 자격과 권한이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그럼 개인에게 이야기할 필요 없고 개인이 없으면 열두 지파 자체가 없는 것 아닙니까. 개인이 있어야지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근대사상이에요. 유대인에게는 그게 없어요. 유대인은 항상 하나에 복속돼있고 종속돼있지요. 열두 지파라는 덩어리로부터 축복과 저주를 받고 같이 움직이지 개인이라는 게 있을 수 없어요. 유대사상에서는. 그런 것은 사도 바울에게는 나타나지만, 오호라 해서 로마서 7장에 나오지만, 야고보에게는 그런 게 없습니다.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 법궤를 중심으로 같이 움직여요. 여기 법궤 자리에 누가 앉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되죠.
-전체가 움직일 때도 전체 중에서 모세에게 대항했던 일부 무리들은 멸망당하지 않습니까?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바로 개인이 어떻게 분석해 들어간 것이 아니고 하여튼 덩어리를 만약에 훼손한 놈은 죽는다는 것, 항상 이스라엘 덩어리가 우선이지 죽는 개인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없습니다. 아간 같은 경우에. 아간을 돌로 쳐 죽여서 다른 사람이 무사히 아이성까지 정복하게 만들고 그렇지요.
좀 더 하기 전에 10분 쉽시다.
관리자(IP:220.♡.176.150)
09-04-15 16:49
부산090407b조지래드27신약신학-야고보서b
20090407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야고보서
(강의:이근호 목사)
사도 바울을 볼 때는 개인으로 봐야 돼요.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내가’가 들어간다고.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다’ 빌립보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항상 내가 나와서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그리고 유대인, 저 집단은 뭐냐? 집단은 몽땅 문제가 크다. 왜? 예수를 죽인 집단이기 때문에.
그리고 집단이라고 다 버림받는 건 아니지만 집단 갖고 우기고 버티다간 우리 집단은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믿다간 그건 엉터리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믿게 된 것은 저 집단 속에 집단주의가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죽게 만든 집단이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개인적으로 성령이 오게 되면, 아까 이창섭 목사님이 이야기한 게, 개인적으로 성령이 오게 되면 개인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그런 양상으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명할 수 있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거는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열두 사도와 구약의 열두 지파와는 단절돼버립니다. 육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다?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 같으면 돌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다.’ 완전히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 그대로 단절시켜놔요. 그런데 야고보는 단절이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단절이 있느냐 하면, 집단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개인으로 갔기 때문에 개인은 다시 개인으로 오면 안 되죠. 교회가 안 되니까. 성령께서 전부다 연결시켜서 하나의 연합체를 만들어버리면 이게 뭐가 돼요? 교회가 되잖아요. 이걸 유기체라고. 심장, 간 따로 있으면 안 되잖아요. 심장, 간 따로 있으면 죽습니다. 심장 저쪽에 오 미터 Ep고, 여기에 간 칠 미터 떨어져있으면 이건 인간이 아니죠. 같이 뭉쳐져 연합해서 연결돼있을 때 그건 각자 다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경우는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연합돼서 구원받죠. 그걸 뭐라 합니까? 거대한 그리스도 몸이라 하지 않습니까? 몸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하고, 어떤 사람은 손 역할하고, 어떤 사람은 눈 역할하고. 그러나 서로서로 어느 것이 천하고 귀하다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사도 바울이 만나는 특징이 뭐냐 하면, 아무리 개인으로 출발했지만 바라보기는 누굴 바라보느냐? 머리 되시는 분만 바라봐야 돼요.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이나 야고보나 만납니다. 틀린 게 없어요. 지금 사도 바울을 오해한 게 집단에서 개인으로 갔다가 집단으로 가야 되는데 안 가고 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았지. 십자가로’ 개인으로 머무르기 때문에 그때 야고보와 만나니까 야고보가 문제되는 거예요.
야고보는 아예 개인 없습니다. 처음부터 집단으로 와서 집단으로 가버리죠. ‘개인이 없다’는 말은, 개인적으로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은 야고보에서는 성립이 안 돼요. 그런 것은 묻지도 말고 그런 것은 오히려 야고보가 물어요. 그게 무슨 말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지. 어떻게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생각을 하지. 뭘 지켜서 구원받습니까? 이게 왜 생기느냐 말이죠. 왜냐하면 유대인 자체가 이미 하나님 백성인데, 하나님 백성이면 백성된 걸 지키면 되지, 거기서 개인적으로 따로 나와서 ‘저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은 필요 없지요.
이 앞에 128번인가 다니죠. 128번 버스 안에서 전부다 가잖아요. 그러면 되는데 저 사람하고 나는 어떻게 가지? 저 사람하고 같은 차를 탔다 생각 안 하고 나만 혼자 버스 탔다고 생각하는 것은 버스 자체를 모독하게 돼요. 그러면 이런 게 있습니다. 쉬운 예니까 그냥 들으세요. 더울 때 버스 앉은 사람은 안 덥다고 창문을 안 열어줘요. 열어버리면 바람 들어온다고 짜증내버려요. 지만 생각하니까.
전체를 생각할 때 더우니까 창문 열어라. 이게 야고보서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열고 싶지 않아요. 이게 바로 자기 개인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이 개인에서 집단으로 가지 못하고 개인으로 머물러버리면 개인적 구원관이 야고보에 그대로 환원되니까 그때부터 야고보 자체가 꼴 보기 싫은 겁니다. 루터도 마찬가지.
야고보는 집단 전체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을 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가 제대로 저주받는 이유, 왜 우리는 주어야 될 이유, 제대로 아는 집단은 우리 유대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바로 유대인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 메시아라고 인정하는 우리 유대인들은 메시아 덕분에 옛날 그 전통과 그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다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야고보서를 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의미는 뭐냐? 다시 할게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아는데 거기에 율법이 들어갑니다. 율법이라 하지 말고 구약 전체를 하게 되면, 여기 처음에 창세기 3장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가 나오죠. 1장에 하나님 형상 나오죠. 그걸 우리끼리는 알잖아. 우리는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모세를 통해서 창제의 비밀, 진짜 천기누설 하듯이 천지창조하신 하나님을 누구만 아느냐? 열두 지파 우리는 안다 이 말이죠.
우리는 알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팍팍 나오는 거예요. 악마가 어떠니, 하나님 형상이 어떠니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그 아는 이야기 앞에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집단 자체가 개인을 용납하지 않아요. 전체를 위한 개인이에요. 개인이 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전체를 굴러가게 할 것이냐를 필요한 개인이라고.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스라엘답게 하느냐 여기에 있기 때문에.
여기는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의 참된 지혜가 있으면 돼요. 그 지혜자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뭐가 없느냐 하면, 십자가 부활의 의미가 사도 바울처럼 의미가 없어요.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초점이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우리 지파가 어떻게 옛날 진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과 지혜의 정신을 온전히 이룰 것인가? 거기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 부활의 개인적인 의미는 없다 이 말이죠.
다만 있다면 성령이 있죠. 사도 바울의 성령은 뭡니까? 고린도전서의 성령이라 하는 것은 성령이 있고, 없고를 뭐로 따집니까? 십자가로부터 구원의 능력이 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깊은 뜻을 아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이에요. 성령 받고 안 받고를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 안에 있느냐, 없느냐 그 여부로 따졌지만
여기 야고보서의 성령은, 하나님의 지혜가 위의 지혜와 아래 지혜를 구분할 수 있는 인식이 있느냐, 없느냐 거기에 있는 거예요. 행하냐, 안 행하냐는 관계없어요. 왜냐하면 알면 반드시 행하기 때문에. 왜 그러냐? 인간은 악마한테 영향 받듯이 쓴물 아니면 단물이에요. 여기 야고보서에서는. 샘이 있으면 뭔가 내게 돼있는데 쓴물 아니면 단물이고, 독 아니면 찬양이 나오게 돼있고. 둘 다 안 나오는 경우는 없다 말이죠. 반드시 내게 돼있는데
지금까지는 지혜를 몰라서 우리 이스라엘이 독을 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지혜자로 오고 난 뒤에는 그동안 우리가 소홀히 했던 율법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죠. 성령이 온 사람한테는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처럼 모든 율법을 다 드디어 행함으로 그 지혜가 옴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처지에 입장에 놓여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개인은 없지요. 옛날 집단과 어울려서 같이 살았던 흩어져도 마찬가지에요. 흩어지나 가까이 모여 사나 관계없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운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받고 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반기고 그걸 그리워하고 야고보 1장에 나오듯이 그걸 찾고 구하고.
제 강의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이근호 당신은 야고보를 어떻게 보느냐? 방금 제가 대략적으로 이야기했는데 단편 중심으로. 구약이 있고 여기 사도가 있다면 중간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있지요. 야고보는 예수님은 동생이고 사도죠. 동생인데 왜 사도냐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 야고보를 만났어요. 사도는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모든 부활의 증인이 사도되는 건 아니지만 사도는 반드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럼 사도 바울은 부활 후 만났나? 만났지요. 다메섹에서 만났고 그 후에도 아라비아도 가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부활의 증인된다는 말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의미를 교회에 증거하게 되는데 이 교회가 뭐냐? 구약에 뭐가 있었습니까? 먼저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들었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만들 때 율법으로 만들었죠. 야고보서에서 율법을 포함해서 전체로 지혜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혜로 이스라엘 만들고 이스라엘 되게 하신 거예요. 그런데 지혜가 빠지면 안 되는데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지혜가 도입되어서, 여긴 교회란 말 안 나오죠. 그래서 흩어진 열두 지파라 해서 계속 뭘 의식합니까? 옛날, 옛날 이스라엘이 안 죽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을 없앤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흩어진 열두 지파지 그 이스라엘이 어디 가냔 말이죠. 하나님이 열두 지파 이스라엘 만들고 안 보낸다 말이죠.
그럼 열두 지파에게 적용시켰던 지혜의 원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드디어 완성단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받느냐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관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다우냐 거기에 관심 있다고. 이제 감이 좀 잡히십니까?
그렇다면 문제를 어떻게 풀어볼 수 있느냐 하면, 제가 아까 해답을 미리 성급하게 한다고 구약에서 바로 왔다는 사실은 뭘 다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십자가 부활로 봤잖아요. 그런데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뭐로 보았느냐 하면, 온전한 율법이 뭐냐, 온전한 지혜가 뭐냐? 온전한 지혜를 하늘에서 왔으니까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잖아요. 위로부터 오신 지혜자가 이 율법을 어떻게 온전하게 이루는데 개인적인 용도가 아닙니다. 이게 중요해요.
‘너 이것 하면 구원받는다.’ 개인적으로 구원받기 위한 용도가 아니고, 옛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집단적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지혜를 예수님은 제공하시고 완료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여주느냐? 성령이란 주님 오셔야 주니까. 주님 부활하셔야 주니까. 그 점은 같거든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흩어진 열두 지파가 되면서 예수님의 공생애죠.
그러면 사도 바울은 교회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의미를 뭐냐를 이미 확정해놓고 그 다음에 뒤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 모든 말씀과 사건을 집약시키잖아요. 그러면 야고보 같은 경우에 성령을 어디로 집어넣느냐?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가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과 우리와 함께 살게 만든다 말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부활되기 이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잖아요. 그게 지혜 아닙니까. 그 지혜는 개인적인 용도가 아니고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고 ‘너는 이스라엘 맞아’라고 이미 이스라엘 단정해놓고, ‘이스라엘 같으면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그것을 공생애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걸 놓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그걸 뭐로 봤습니까? 십자가 부활로 해서 공생애 전체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모든 사람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전적 부패와 죄인 돼버렸죠. 개인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이 없어졌느냐?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그냥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과한 거예요. 그럼 예수님은 뭐냐?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가 돼요. 날 위한 메시아가 아니고. 이스라엘 안 죽었어요. 야고보에서는. 흩어진 열두 지파는 흩어졌을 뿐이지 안 죽었고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에 하신 모든 말씀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율법을 다른 말로 하늘의 지혜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느냐의 지혜를 우리에게 준 겁니다. 그럴 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뭐냐 하면, 이창섭 목사님이 질문한 게 그거에요. 지혜를 백날 줘도 율법을 백날 줘도 우리가 삐딱하니 안 지키면 그만이지. 그게 사도 바울 말 맞잖아요. 사도 바울의 말은 그게 아니고 아예 지키고자 해도 못 지키죠. 율법을 지키고자 해도 율법이 오게 되면 갑자기 없는 죄가 더욱더 죄 되게 만들어요.
개인으로 있을 때는 그게 맞다 이 말이죠. 하지만 집단으로 있을 때는 그 공식이 아니라 이런 지혜가 주어지게 되면 지혜가 헛짓하는 법은 없다는 거예요. 반드시 열매를 맺고 마는 것이 율법의 솜씨라는 겁니다. 단 조건이 있어요.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제쳐줘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과 이웃 사랑은 항상 우리 내부에서 폭발되도록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뭘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성령을 받은 자는 그게 된다는 겁니다. 개인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개인이 뭐에 활용된다? 이스라엘답게 된다. 이 말은 개인이 하늘의 지혜를 알게 되고 그 지혜대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내용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모습들을 이야기하는
예. 그렇지요. 그게 지상에서 벌써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과 야고보의 공통적인 부분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고 다른 건 집단과 개인의 차이
다른 건 없지요. 왜 집단이 되느냐?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야고보는 뭐가 없다?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가 없다 이 말이죠. 왜? 야고보는 이미 끝났다고 본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중요한 질문이 있어요. 현재 경제실천이라든지 밥 퍼주는 것 있잖아요. 그거는 이것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야고보가 말하는 율법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꽃동네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 그거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제가 질문하는 건 왜 인간들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윤리와 도덕 수준을 가지고 야고보가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지금의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저주를 모르고, 저주를 모르는 이유는 악마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이야기할게요. 질문 다시 할게요. 왜 지금 우리는 윤리의 수준 가지고, 야고보가 그 정도 수준 가지고 사용하지 않느냐? 그것은 우리는 본래의 자리가 아니고 이미 우리가 신인 양 선을 행할 수 있고, 악을 행할 수 있다고 자체적인 어떤 자리를 확보한 상태기 때문에 여기선 도덕이 나오지만 성경의 참된 지혜는 여긴 나오지 않지요.
야고보서의 우리의 자리는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 일은 악마가 다루면 다룬 대로 다뤄져야 되고, 성령이 다루면 성령에 다뤄지는 그런 희멀건 한 죽 같은 완전히 개방된, 내 것이 있을 수 없는, 쓴물 아니면 단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러한 무장 해제된 상태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근대 인간은 그게 아니고 인간이 말씀 주시면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야고보서엔 없어요. 현대인하고 이스라엘 사고방식은 다릅니다. 뭔가 행할 수 있다는 게 없어요. 야고보서도 마찬가지고요. 인간 속에 악마가 오게 되면 인간은 하늘의 지혜를 모르는 이상은 악마로부터 이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지혜가 오게 되면 악마를 이길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중심은 성령 받은 너희는 할 수 있다. 그러면 성령 받은 너희는 할 수 있으니까 또 이렇게 되면 집단이 깨져버리고 개인으로 돌아가죠. 이렇게 돼버리면 개인적인 성령 받은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개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지켰다, 안 지켰다 자체를 판단을 안 하고 이것은 위로부터 온 지혜라고 인정하게 돼요.
‘나는 오늘 가난한 사람은 도왔다, 안 도왔다’ 이게 아니라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런 지혜가 주어졌다고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항상 편입된 상태에 돌입된다고. ‘내가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