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장13-17절 제목 : 하나님에 대한 시험
막 12:13-17 (하나님에 대한 시험)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12장13-17절
제목 : 하나님에 대한 시험
듣기 :
, 보기 :
이근호
09-04-05 13:34
하나님에 대한 시험
2009년 4월 5일 본문 말씀:마가복음 12:13-17
(막 12:13, 개역)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막 12:14, 개역)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막 12:15, 개역)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막 12:16, 개역)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 12:17,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바리새인들의 자신들의 딜레마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속시원하게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이니 필시 예수님도 못 풀고 난감할 것이 분명하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해결책에 더욱더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현장에 오늘날 우리들이 있다면 별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누가 누구에게 바친다는 의식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다는 원칙이 서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에게 바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이용 대상으로만 간주될 뿐입니다.
따라서 동대구 세무서에 낼 돈은 동대구 세무서에 내면 되고, 교회 헌금할 돈은 교회 헌금하면 그만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딜레마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은, ‘신에게의 복종’은 온전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온전한 복종은 두 주인을 용납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그 외의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말아야 하며, 세상 권세자에게 복종했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내팽개쳤다는 비난을 받는 일입니다. 이러한 복종과 지배 관계 속에서는 바침과 섬김의 대상자가 둘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면 세상을 버려야 하고, 세상을 선택하면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 되는 것이 지배와 복종으로 굳혀진 체계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 속에서 과연 예수님은 빠져 나올 방도가 있습니까?
우선 바리새인들이 잘못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친다’는 일입니다. 즉 그들은 신에게 복종은 바침으로서는 성사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바친 것을 안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바쳐진 자’가 아니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바침 자체가 성사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계시는 단순히 전에 계시와 같은 계시가 아닙니다. 최종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계십니다. 그 최종적 해답에 의하면, 성도란 바쳐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 자체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자신을 바침으로 얻어진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11:33-36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인간이든지 먼저 주님께 바쳐서 그 대가로서 자신이 복을 받고 구원을 되는’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은 실적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에도 나옵니다. 시편 46:10절에 보면,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헬기장 같은 넓은 위에 사람들이 서 있으면 밑에 있는 판이 사람들을 위로 치올리는 격입니다. 이렇게 할 때, 그 판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내뱉을 고백은 다음과 같은 고백 뿐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다”고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느냐 하며는, 하나님께서 진정 받으시는 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지 않고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생겨난 자식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바로 이삭 안에 들어있는 자가 종말에나 등장되는 성도입니다. 종말에는 하늘에게 메시야가 오셔서 그 메시야가 자기 백성을 품으므로서 예수님도 바치진 동시에 그 안에 들어있는 성도도 이미 비쳐진 존재가 되는 겁니다. 마치 캥거루 자루 안에 캥거루 새끼도 같이 들어있어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런 종말 때의 해답을 알지 못하고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신을 구원하겠다고 나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감히 인간들이 알 수도 없고 해 내지도 못할 방식으로 자기 사람만을 구원하십니다.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펼치십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3:9에 보면, ‘창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2장에 보면, 느부갓네살왕이 나오는데 얼른 보면 이 사람은 신하들에게 억지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즉 자신이 어제 밤에 꾼 꿈을 알아내라는 겁니다. 신하들이 대꾸합니다. “왕이시여. 그런 일은 하나님만이 하시지 인간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지금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인간들이 바침으로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로서 나온 결과만이 구원되는 겁니다. 우리 성도는 행함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일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행함이 원인이 되고 그 결과로서 자신이 구원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 방법은 성경과 다릅니다. 시편 50편에 보면, 선천초목 사이에 뛰노는 모든 짐승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도 이미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억지로 그 짐승들을 성전으로 데리고 온다고 해서 새삼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도를 왜 이미 바쳐진 존재로 사용하시는 겁니까?
그 이유는, 성도를 가지고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삼으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너를 축복하면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는 식으로 이 우주의 원리를 적용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성도에게는 사람의 행함으로 받을 수 없는 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이 저주받는가 하며는, 행함이 없이 주어진 것을 믿지 않는 자가 곧 저주받는 겁니다. 바리새들처럼 말입니다.
마지막 때의 성도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솜씨와 결과물이요 면류관이요 색시입니다. 이 고귀한 작품이다 인간의 자기 손 떼를 새삼 묻히지 마시고, 놀랍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캥거루 자루 안에서는 더 이상 비극이 없고 불행이 없습니다. 차이를 통해서 우리가 성도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알하시는 방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것은 결국 눈에 보이는 가짜 속으로 돌아갈 뿐임을 알게 해주시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측정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6:15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57강-막12장13-17(하나님에대한시험)-mar090405.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