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대구강의04-죽은신을위하여(슬라보이지젝)2-2
09대구강의04-죽은신을위하여(슬라보이지젝)2-2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 그러니 최대한 법에 접근을 !!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법이 있으니 자꾸만 접근을 하는데, 즉 무한대로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치가 되면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니 일치는 하지 않는다고 하고 말이다. 하지만 최대한 접근을 하는데, 그러니 그것이 곧 성화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이 말하기를 "나는 저 세리보다는 낫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은 "예수님보다는 못합니다" 라는 의미인데, 아무튼 계속해서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기 있는 간음한 여인은 나를 따라오려면 멀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용서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 예수님 - 뒤로 돌아가 갓 !!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노선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완전히 거꾸로 해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버리니, 사랑은 바로 여기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방향을 "뒤로 돌아가 갓!"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은 그렇게 뒤로 돌아갈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에서 선으로 나아가려는 그 코스, 그것을 '벡타' 라고 하는데, 즉 그러한 방향성 이외에 다른 방향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이 아무리 악해도, 자기 선악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어 !!
그러니 "아무리 선하다", 혹은 "아무리 악하다" 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리 악해도, 아직도 양심은 살아있다" 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연쇄 살인범인 신영철이가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유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는데, 즉 인간은 아무리 악한 놈이라고 해도, 자기의 선악을 모른 체 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은 그것이 인간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오늘은 전혀 반대되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는데, 물론 평소에도 그렇지만 말이다. (ㅋㅋ) 그런데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을 골라서 주게 되니, 그것이 어리석음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야, 나는 언제 목사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을 따라가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목사라고 하면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그런 기존의 방향성을 반대로 바꾸어야만 하는 증언자들인데, 그런데 오히려 무슨 짓을 하고 하는가? 넓은 길로, 즉 지옥으로 가는 길로 대형버스를 왕창 대절해서 마구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법에는 사랑이 너무 많다. 법과 신의 사랑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이 발생할 때 숨겨진 사랑도 같이 발생함으로서 비로소 법을 주신 신도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구약 욥기의 주제는,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가 아니다. 도리어 욥은 고백하기를 '나의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물론 제대로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말을 수용할지 몰라도, 즉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이런 고통을 당한 당사자가 있다고 하면, 난데없이 고통을 당했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우리 인간의 몸에는 선악과가 박혀있는데, 그러니 선악과가 있는 인간이 고통을 당하면서 그것을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선악과가 있는데 말이다.
인간의 자리는 무고하게 자기가 만든 자리가 아닌데,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자리라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그것을 예리하게 쪼개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인간에게, 그런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이 그냥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말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나오지 않으니 사람들은 "아, 허무하다" 라는 것으로 바꾸고 마는데, 하지만 그런 "허무하다" 라는 것은, "의미 없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을 다 안다" 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자체를 선으로 본다는 말이다.
◈ 선과 악을 초월한다 ??
제가 쓴 명저(?) '피' 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는데, "인간은 선과 악을 초월한다고 하는 것 자체를 선으로 본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무슨 의미인가? 인간은 아무리 선과 악을 초월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선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의 중들이 전혀 선을 버리지 못했는데, 자기들은 아무리 초월하고 버렸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중들이 "아직도 선과 악의 굴레에 여전히 얽매여 있는가? 이 불쌍한 중생들아!" 라고 하는데, 즉 자기들은 그것보다 한 수가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 욥기를 대하는 지젝의 오류 !!
그런데 이 욥기를 보는 지젝에게 큰 오류가 있는데, 지금 그것을 살펴보겠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욥이 알게 된 신은 무능한 신이었다. 신은 정의롭지도 않았고 불의하지도 않았다. 단지 무능할 뿐이다. 욥이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욥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시험대에 오른 것은 욥이 아니라 신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지젝은 "욥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시험대에 오른 것은 욥이 아니라, 신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라고 하는데, 물론 이것이 예수님과 결부하면 말은 맞는데, 왜냐하면 욥은 선지자이고 선지자 안에는 성령이 계시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리고 신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실패한 신, 이 신이 바로 참된 신이다.
◈ 지젝은 하나님을 실패한 신으로 !!
지젝은 하나님을 실패한 신으로 보는데, 그러나 이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예'가 됩니다" 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은 실패한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지젝은 이렇게 논리의 극단으로 나가게 되었는가? 그러니 지젝이 어디에서부터 틀렸는지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의 주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는 자꾸만 사람을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아닌 사람을 의식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편 110편에서는 뭐라고 말씀하는가? 1절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하는데, 즉 모든 말씀의 성취는 오직 주님과 주님의 관계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 지젝이 말하는 십자가 의미는?
그런데 지젝은 지금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의해서 맺어지는데, 하지만 과거신학의 전통성은 버리고 십자가의 새로운 기준, 즉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십자가가 아닌 '역(逆)십자가(?)'로서, 즉 버림받은 주님이 보았던 그 십자가를 가지고 해석을 해야한다고, 그렇게 지젝이 주장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지젝이 주장하는 신학인데,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도 역시나 성경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지젝은 기존신학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살피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즉 "신이 누구인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지젝은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고, 거기에 십자가를 집어넣어서, 즉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오직 주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
하지만 저는 그런 지젝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오직 주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말씀에 의해서 바라보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세상 자체가 말씀의 세계이고 주님의 세계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어떻게 하는가? 자꾸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느낌을 구원의 요소로 집어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젝의 주장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펴볼 이유는 충분한데, 기존의 신학을 뒤엎어버리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실패한 신, 이 신이 바로 참된 신이다. 덜미 잡히고서는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허풍을 늘어놓는 신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다.
◈ 아니, 하나님이 후회를 ??
욥기에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보이는데, 욥이 "왜 고난을 주셨습니까?" 라고 하니, 하나님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니가 염소가 새끼를 낳을 때 있었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셨는데, 이 '후회' 라는 말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자기가 일을 잘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욥 39: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욥 39:2) 그것이 몇 달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삼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욥이 처음에 당혹감을 가진 것은 신을 불가해한 '사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즉 법 너머에 존재하는 선한 신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아버지가 강하다고 믿었었는데 그 아버지가 자기를 도와줄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 것을 알고 경악하는 아이와도 비슷하다. 이 경악이 예수에게 이어진다. "아버지에 왜 나를 버렸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는 신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런데 그 신이 오히려 자기를 믿고 있더라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믿듯이 말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돈 좀 주세요" 라고 하니, 아버지가 뭐라고 하는가? "어, 나는 니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들이 얼마나 기가 차겠느냐는 말이다.
◈ 오잉, 가롯유다가 구원을 ??
지젝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과 예수님에게다 그만 적용을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아버지에 왜 나를 버렸어요?"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과 가롯유다가 그만 한 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젝은 가롯유다가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까지도 하게 되는데, 지금 지젝이 주장하는 논리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젝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 자체가 바로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논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가롯유다든 누구든 간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 자체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신이 허풍을 떨면서 등장한 후부터 욥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왜일까? 그것은 신의 우스꽝스러운 허풍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욥 38:1)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욥 38: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 38: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 우리 아버지이지만 참으로 안 되었다 !!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아버지가 아주 학식이 있고 인품이 있는 아버지인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와서는 방에다가 마구 오줌을 싸고 어린아이처럼 뒹군다는 말이다. 그렇게 전혀 다른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것을 아들이 그것을 보고 그만 기가 차서 말문을 닫게 되는데, 즉 "우리 아버지이지만 참으로 안 되었다" 라고 말이다. 바로 그렇게 욥이 하나님을 쳐다보고 있는데, 바로 그렇게 처량하게 하나님을 쳐다보는 것이 이 욥기의 주제라는 것이다. 물론 지젝에 의하면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로서 신이 도움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도리어 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 우리는 당신을 도우면서 결국 우리 자신을 돕는다는 것입니다."(1942년 유대인 수용소에서 한스 요나스가 한 말)
'한스 요나스' 라는 유대인 랍비가 수용소에 갇혀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바로 그 정신이 그 유명한 '본 회퍼'의 주장이란 말이다. 그는 최고의 루터교 신학자인데 말이다. 수용소에 갇힌 신, 사형집행을 당한 신, 그러니 계시의 말씀이 성경이 아니라 현실자체 바로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틀러가 설치는 것 자체를 계시로 본다는 말이다. 즉 민중들이 히틀러에게 그만 미쳐서 날뛰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았다는 말이다.
◈ 히틀러의 반유대인 정책에 대해서 !!
오늘 강의는 이것만 더 이야기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히틀러가 엄청난 반유대인 정책을 펼쳤는데, 그래서 엄청나게 비극적인 잔인한 결과를 낳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히틀러가 반유대인 정책을 쓸 때 사람들은 그것이 히틀러의 아이디어인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1914년 이전부터 유럽에서는 불과 6%의 유대인들이 부르조아로서 엄청난 자본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러니 그 당시 유럽의 정서가 무엇인고 하니, 70%가 넘는 노동자들이 이 6%의 유대인들을 죽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틀러가 이것을 정치적으로 반영한 것인데, 즉 민중들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말이다.
이것을 조금만 더 설명하면, 독일과 영국과 프랑스에서 1870년부터 1914년까지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는 식민지주의 시대라고 하고 말이다. 이들 나라가 남미와 아프리카와 전 세계를 다 먹을 때, 그들은 무엇을 기대했는고 하니, 자기들 나라가 그렇게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게 되면, 본토박이 사람들의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인들도 그런 약속을 했고 말이다.
◈ 이놈의 유대인들, 다 나와라 !!
그런데 문제는 삶의 질이 나아지지를 않았는데, 그래서 그 분노가 어디로 향했는고 하니, 시장도 넓혀졌고 값싼 노동력도 들어와서 물건도 많이 만들어지고 말이다. 그런데 그 이익을 누가 다 차지했는고 하니, 6%밖에 되지 않는 애매한 유대인들이 그만 그것을 모두 독식했다고 덮어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돈밖에 모르고 악착같이 모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 쪽이 이익을 다 차지하니 다른 쪽은 삶의 질이 향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노동시간만 늘어나고 말이다. 왜냐하면, 일단 생산은 계속해서 많이 해야만 하니 말이다. 식민지 국가에서 고무나 면화나 주석과 같은 원자재가 마구 들어오니, 그것을 가지고 본국에서는 물건을 많이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출을 하게 되고, 국가의 소득이 올라가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적으로는 부유한데 반해서, 그러나 그 밑바닥에 있는 민중들의 삶의 질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부의 분배정책이나 복지정책과 같은 것이 없었으니 그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민중들은 그 탓을 그만 중간계층에 있는 6%의 유대인들에게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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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주의(imperialism) - 1국의 정치적·경제적 지배권을 다른 민족·국가의 영토로 확대시키려는 국가의 충동이나 정책.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1870년부터 20세기초에 걸쳐 나타난 독점자본주의(獨占資本主義)에 대응하는 정치적·경제적 구조를 총칭하는 말로 쓰인다. 대개 이 용어는 침략에 의하여 영토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팽창주의 또는 식민주의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에만 국한된 개념은 아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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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국민전체를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고, 그 민주주의를 처음 만든, 그것을 의회주의라고 하는데, 그것을 만든 그들을 위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래서 투표를 해도 이들에게 가중치를 준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들을 제한하게 되는데, 그러니 당연히 민중들이 반발을 한다는 것이다.
◈ 민주주의도 역시 그들만의 세상 !!
그렇게 민중들의 반발이 심하니 할 수 없이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나 일부 여자들을 선별해서는 투표권을 주곤 했는데, 물론 농민들에게는 처음부터 아예 주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러다가 1900년 초반에 가서야 비로소 국민 전체에게 투표권을 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이제는 의회를 위해서 국민들이 있는 것이 되는데, 이전에는 왕을 위해서 있었고 말이다. 즉 과거에는 왕을 위하던 것을 이제는 국회의원들을 위한 것으로 바뀐 것이 불과한데,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민중을 위한 민주주의는 아직 없는데,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1871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민중을 위한 자치정부가 2년 동안 존재해 있었는데, 그것을 '파리코뮨(Commune de Paris)' 이라고 하는데, 즉 파리시민 노동자들의 자치혁명단체인데, 그 당시가 나폴레옹3세 때의 일인데, 그때 프랑스가 독일과 전쟁을 해서 패배했는데, 그래서 "무능한 정부는 물러나라?" 라고 하면서 결성된 것이 이 '파리코뮨' 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도 함께 있는데, 그렇게 해서 민중을 위한 진짜 민주주의를 하자고 했는데, 그런데 그만 독일군대에게 하루에 그만 300명(?)이나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로마에서는 10만 명이나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피의 대학살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1871년 7월 28일인지,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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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 프랑스 정부에 대항하여 파리에서 일어난 봉기(1871. 3. 18~5. 28).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와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1852~70)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871년 2월 프로이센과의 평화조약을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국민의회는 지방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했다. 공화주의적인 파리 사람들은 베르사유에서 열리는 국민의회가 왕정을 부활시키지 않을까 염려했다. 임시 국민정부의 행정 수반을 맡고 있던 아돌프 티에르는 파리의 질서유지를 위해 국민방위군(주로 파리 포위전 때 싸운 노동자들로 이루어짐)을 무장해제시키기로 결정했다. 3월 18일 시(市) 수비대의 대포들을 치우려 하자 파리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그뒤 3월 26일 수비대 중앙위원회가 조직한 자치선거에서 혁명파가 승리했고 이들은 코뮌 정부를 세웠다. 새 정부에는 자코뱅파와 사회주의자들인 프루동파, 블랑키파 등이 있었다. 자코뱅파는 1793년 혁명의 전통에 따라 파리 코뮌이 혁명을 주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루동파는 전국에 걸친 코뮌의 연합을 주장했으며 블랑키파는 폭력혁명을 요구했다. 내부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코뮌이 채택한 강령은 1793년을 연상시키는 조치들(종교에 대한 지원 폐지, 혁명력 사용)과 제한된 사회개혁조치(10시간 노동, 제빵공의 야근 철폐)를 추구했다. 리옹·생테티엔·마르세유·툴루즈 등지에서 일어난 코뮌은 곧바로 진압되었으므로 파리 코뮌은 홀로 베르사유 정부와 맞서야 했다. 그러나 코뮌 병사(Federe)들은 군사조직을 갖추지 못해 공세를 취할 수가 없었고, 5월 21일 정부군이 방비가 없는 곳을 통해 파리로 들어왔다(→ 코뮈나르). 뒤따른 피의 일주일(la semaine sanglante) 동안 정규군은 코뮌의 반발을 진압했다. 반란자들은 방어를 위해 길에 방책을 치고 공공건물(그중에는 튈르리 궁전과 시청 건물이 있었음)에 불을 질렀다. 반란자들 약 2만 명과 정부군 750명가량이 죽었다. 코뮌이 와해된 뒤 정부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여 약 3만 8,000명을 체포하고 7,000명 이상을 추방했다.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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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모르겠는데, '한스 요나스' 라는 유대인의 포로수용소를 언급하다가 그렇게 되었지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그 양반은 주장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도울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 값을 한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사도바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은혜는 주어지는 것인데, 즉 "그분이 은혜를 주신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젝에 의하면, 인간이 무능한 신에게 은혜를 주어서, 그렇게 해서 신과 인간이 공존하게 되고, 또한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전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는 십자가를 통과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과하고는 인간이 다시 신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 결국 사도바울과는 십자가가 달라 !!
물론 지젝은 사도바울처럼,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인정을 하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사는 것이 자기 자신이지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과의 차이점인데, 그러니 결국 십자가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지젝의 주장이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주장이지도 모르겠는데, 즉 기존의 교회에 신물이 나고 따분하게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복음으로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절대적인 신이 되려고 하니 말이다. 그런 욕구를 이 지젝이 잘 채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지젝은 오늘 이것으로 땡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어떤 죄가 나오고 어떤 악이 나오는지를, 저희들과 똑같은 아담의 속성을 지닌 자의 입을 통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령께서 인도하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로서 작용하지 못하고, 자기의 소유로 넘겨진다는 것을 또한 알았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언제나 그 주님의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4,02 오후 11시 32분에 마침.
오우, 힘들어 !!
[ 죽은 신을 위하여 ] 슬라보이 지젝 저 김정아 역 (도서출판 길 :2008)
2008,12 이근호
죽음 안에서 신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죽음, 그것은 헛수고를 의미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 신이 바로 죽음으로 말하는 신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종교 행위로 더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종교 행위는 자신의 저주를 재촉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제시된 신은 어떤 신인가? 저자는 기존의 기독교 신론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파헤친다.
신은 숨어있는 신이다. 따라서 아무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아니, 신은 없다. 신에 대한 인간적인 인식을 발동시키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궁금하고 찾고자 하는 가운데 신은 그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들이 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알고자 하면 할수록 인간은 사실 신으로부터 고립되고 동시에 신 자신도 신에 대해서 고립되어진다.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지시하기를 자신을 배반하라고 했다.(마 26:25) 이 세상에 온갖 신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를 배반할 것을 요구하는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가롯 유다는 열두 제자로 이루어진 최초의 기독교 동아리와 보편 교회의 창시자인 사도 바울 사이를 연결하는 ‘소실되는 매개자’이다.
즉 사도 바울은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들어가서는 그 역시 스스로를 배반해야만 하는 신인 예수를 소개하게 된다. 진정한 예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은, 추종자로 하여금 예수에 대해서 배신케 함을 유발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숨어있는 X를 이해하는 것은, X로 인하여 주어지는 자신의 배신을 수긍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 앞에 서면 예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노출되어진다. 예수는 곧 ‘타인’으로서의 시선이며 그 타인으로 인해 ‘나’가 규정된다. (불교의 허점은 그 타인의 시선을 삭제하는데 있다. 즉 타인 없는 가운데 자아마저 없애려고 한다) 그런데 이 타자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타자성이 문제가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타자성이란 지루한 동일성을 지닌 타자다)
예수라는 타자는 예수라는 존재의 일관성에서 주어지는 타자성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통해서 그 명령에 호출되는 인간의 태도와 반응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의 명령을 접하게 되면 모든 인간의 자아가 분열을 일으키게 되고 그 분열과 벌어짐 속에서 비로소 비쳐 나오는 타자성이 예수로 인한 타자성이요 신성이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이 명령을 받은 인간은 “하지말라!…살인하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 바울이 전한 계시다. 즉 “살인해야만 해!”가 “하지 말라!”라는 명령의 본 내용에 해당되도록 인간 내부에서 유발된다는 것이다.
이 “네 속에서 넘쳐나는 것을 거세하라”는 곧 불가능한 명령이 되고 만다. 만약 제 때 거세 못하면 처벌이 따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 처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란 넘쳐 남을 향유하는 그것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처벌의 저주스러움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쾌락 너머의 것을 계속 집착하는데 있다. 현 쾌락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즉 얻어진 행복이 곧 저주스러운 상태가 된다.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으로 쾌락을 얻게 되지만 그것이 저주스러운 처벌이요 대가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제공한 타인을 속이려든다. 이것이 바로 희생이다. 예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뭔가 얻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속이기 위함이다.
이로서 예수는 인간과 멀찍이 떨어지게 된다. 법을 제공함으로서 신은 최고의 위반을 저지르고 만다. 범죄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응당한 처벌을 원한다. 하지만 신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범죄자로 유발시킨 법 자체가 곧 정의라는 이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신은 이로서 모든 원인을 제거한다. 신 자신의 죽었다는 그 죽음이라는 ‘결과’로서 모든 원인되게 하는 ‘원인’들을 삭제시켜 버린다.
신이 죽음으로서 신은 내부적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신과 신 사이에 간격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러한 간격은 더 이상 신이 인간의 신 인식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기 위함이다. 인간들이 신을 포착하고자 한다면 예수는 가룟 유다처럼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 우리들의 신앙을 ‘배신한 신앙’으로 만들어버리는 위치로 만들어버린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반복시키는데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선택은 실은 강요된 죄의 선택이었다. 따라서 아담의 죄성을 눈여겨볼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강요함’ 자체가 구원임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타락이 자체로 타락이 아니라 타락이 자체로 구원이 된다. ‘타락으로 오인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보는 악이란 ‘악이 악을 보는 시선’에 불과하다. 타락조차도 구원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로소 ‘사랑으로 인한 자유’가 발생한다. 악은 실질적으로 선과 동일하다. 악은 생성 중인 선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처해서 악인으로 행세한다. “그래, 거짓 사도들아, 내가 어리석은 자다. 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진정한 그리스도 닮기란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다. 죄를 부인하는 것 자체가 죄의 궁극적 증거가 된다. 신은 법을 주면서도 항상 그 법에 대해서 창조적으로 해석하며 법을 곡해한다. 이로서 인간들이 주어진 법해석으로 신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뿌리친다.
사도 바울은 모든 법에 대해서 집행을 보류시킬 것을 요구한다. ‘마치-아닌-듯’의 원칙을 적용한다. “우리는 자들은 마치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마치 없는 자같이 하며”(고전 7:30) 이것은 곧 신의 사랑 앞에서 법을 지켜야하는 인간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님’(nothing)이 되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란 인간이 행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랑이 곧 신이다.
사랑은 단순히 법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법 안에 푹 빠져 있는 태도로 표현된다. 충분히 법리적으로 법을 해석하면 사랑이 나오지 완전한 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의 문제는 ‘지나치게 법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법리적’이지 못하는데 있다.)
법에는 사랑이 너무 많다. 법과 신의 사랑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이 발생할 때 숨겨진 사랑도 같이 발생함으로서 비로소 법을 주신 신도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구약 욥기의 주제는,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가 아니다. 도리어 욥은 고백하기를 ‘나의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욥이 알게 된 신은 무능한 신이었다. 신은 정의롭지도 않았고 불의하지도 않았다. 단지 무능할 뿐이다. 욥이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욥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시험대에 오른 것은 욥이 아니라 신 자신이다 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자신을 정당화 하는데 실패한 신, 이 신이 바로 참된 신이다. 덜미 잡히고서는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허풍을 늘어놓는 신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다. 욥이 처음에 당혹감을 가진 것은 신을 불가해한 ‘사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즉 법 너머에 존재하는 선한 신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아버지가 강하다고 믿었었는데 그 아버지가 자기를 도와줄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 것을 알고 경악하는 아이와도 비슷하다. 이 경악이 예수에게 이어진다. “아버지에 왜 나를 버렸어요?”
신이 허풍을 떨면서 등장한 후부터 욥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왜일까? 그것은 신의 우스꽝스러운 허풍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말로/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2-5)
이로서 신이 도움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도리어 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 우리는 당신을 도우면서 결국 우리 자신을 돕는다는 것입니다.”(1942년 유대인 수용소에서 한스 요나스가 한 말)
신은 왜 자진해서 무능한가? 그것은 무(無)를 창조하기 위해서다. 이 무로부터 세상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세상은 타락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런 타락의 세상에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는 무신론자 밖에 없다. 실증적 존재자로서의 신을 거부하고 메시야적인 타자에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평가) 지젝이 주장이 과연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받는다” 갈 1:8) 십자가 복음에 부합되는 내용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지젝의 지적은 오늘날 기독교에 자리 잡은 신론의 허점을 잡고 시작한 내용이다. 즉 신에 대한 변증과 변호를 통해 신을 믿는 그들의 자기 긍정을 도모하는 논리에 대해 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 살해’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 예수님 살해에 사도 바울 자신도 가담하게 되어 있고 온 인류가 다 가담될 수밖에 입장에 놓여 있음을 없는 언약적으로 설명한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2-23)
즉 인간 배후에 악마가 실제로 있었고 그 악마는 필히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살해해야만 한다는 약속에 준해서 정리된 복음이다. 이 논리는 인간의 실존적 의미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예수님의 실존적 의미로 해명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부터 자신이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사흘에만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인간들은 결국 사단의 세력에 이끌리어 움직인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문제가 아니라 실은 인간 자체가 문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 됨은 인간의 이성과 종교인 열심히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임한 자라야지만 십자가로만 나타나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안다.(고전 2:9-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고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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