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구강의13-존재란무엇인가(질송)1
06대구강의13-존재란무엇인가(질송)1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06 대구강의 13 - [존재란 무엇인가?] E. 질송 저, 정은해 역, 서광사(서울: 2003)
06,10,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성도와 비성도의 차이점은?
저는 저 나름대로는 성도와 성도가 아닌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서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는 것이다. 일단은 자기 영역이 남아있다고 하면 저는 약간(?) 의심을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영역이 남아있다는 말은 자기의 증인이지,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부분이 다 말이다. 이렇게 자기 영역, 자기 범주가 남아있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 영역 굳히기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냐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존재'와 비교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그렇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즉 '나' 라는 존재가 어떠한지, 그것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자기 존재로부터 여전히 탈피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간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기 영역이 없는 사람은, "저 사람은 십자가에 맞아서 완전히 깨어졌구나" 라고 본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다시 자기 영역을 찾다가는 혼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는 너희가 죽었고 !!
신학교도 졸업하고 나름대로 신학공부를 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골로새서 3장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특히 2절과 3절의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 라는 구절을 말이다.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만 입을 다물고 마는데,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일단 자기가 살았다는 가정 아래에서 시작하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서 더욱 잘 살 것인가?" 라는 것이 줄줄이 이어져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희가 죽었고" 라는 것을 한번 설명해보라고 하면, 그야말로 난감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만약에 여기에 대해서 동의를 한다고 하면, "너희가 죽었고" 라는 한 마디가, 그야말로 자기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이 다 소용이 없는 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 "너희가 죽었고" 라는 것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한다고 하면, 즉 "죽은 놈이 무슨 일을 하겠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극단적인 소극적 자세로 말이다.
◈ 자기 영역이 따로 없는 사람에게만 !!
그러니 이렇게 3절에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양쪽을 다 설명해보라고 하면 상대방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만 설명이 가능해지는고 하니, 자기 영역이 따로 없는 사람에게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기 영역이 없는 사람에게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이미 자기 영역이 없고, 즉 자기는 죽었고 그냥 주님의 소유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되니, 이 말씀이 그대로 맞아떨어진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주님이 개입해서 이렇게 합니다" 라고, 그렇게 주님을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 니는 죽었나? 살았나?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성경은 이렇게 "너희는 죽었다" 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나는 살았다" 라고 나온다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자기 잘남을 펼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밀고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철학을 공부한 학생이나 교수든지, 아니면 신학교 교수나 목사든지 말이다. 그런 양반들에게 이 성경말씀을 슬쩍 질문하게 되면, 대부분이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저의 존재를 공격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물론 자기 영역이 깨진 사람은 대답을 하는데, 즉 "더 이상 나의 소유는,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영역을 굳히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렇게 자기 영역을 부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환영을 하고 반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해야할 일을 그렇게 도와주니 말이다.
하지만 자기 영역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당신이 달려드는가?" 라고 되기 때문에, 골로새서 3장 3절의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이 그만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직까지 이 말씀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무슨 택배가 사용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과연 자기 존재 부수기가 가능한가?
바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과연 존재 부수기가 가능한가?" 라고 질문했을 때,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불가능한지, 바로 그것을 지금 이 시간에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질송의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즉 '나' 라는 존재가 과연 '나'를 부술 수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살펴보자는 말이다.
그런데 질송의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 라는 존재는 신의 피조물이고, 또한 신께서 일하는 곳이라는 것만 이야기하지, 제가 앞에서 말한 그런 자기 존재 부수기에 대해서는, 즉 인간에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교재를 1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존재란, 질료와 형상, 그리고 실존이 함께 구성해낸 복합체' 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실존적인 인간이 집요하게 매달리고 궁극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관심사가 '존재'에 있음을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다.
◈ 본질(本質)인가? 실존(實存)인가?
여기에 보면, '존재', '질료', '형상', 그리고 '실존'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런 것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보면 '본질' 이라는 개념도 나오고, '실체' 라는 개념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본질인가? 실존인가?" 라는 것인데, 즉 둘 중에서 어느 것에서부터 출발을 하느냐는 것이다. 즉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 가는데 있어서, 본질로부터 출발을 해야하는지, 아니면 실존으로부터 출발을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즉 실존이라는 것은, 본질이 만들어낸 하나의 열매에 불과하다고 하는 쪽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들이 모여서, 즉 연역적으로 그것이 나중에 모여서 결과적으로 만들어낸 구성물, 즉 인간이 의식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최근이라는 것은 19세기 이후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아무튼 칸트 이후에는 그러한 쪽으로 흘러간다는 말이다. 즉 본질이 아니라 실존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그러니 본질을 가지고서 너무 실존을 핍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앞 시대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보았는고 하니까, 어떻게 인간이 존재하는고 하니, 즉 인간이 어떻게 실존을 하고 있느냐는 것은, 그 사람의 본질을 구체화하는, 즉 그 사람의 본래 성격과 성질을 감추지 못해서 드러내는 것이 그 사람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행동이고 사고방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질이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질송 - 본질이 우선이 아닌가?
그래서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중요한고 하니, 그것을 이 책의 저자인 '질송' 이라는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 쪽을 따른다는 것이다. 즉 본질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지 살펴보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존재란, 뭔가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경이로움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요구하게 된다. 즉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돌멩이가 있고, 또 저 들판에 풀이 있고 하늘에는 태양이 있다는 것이다.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하필이면 그것들만이 왜 꼭 있어야하는가?' 라는 의문점은 심오한 철학가가 아니더라도 존재자라면 누구나 다분히 품고 살아가게 된다.
◈ '나'는 왜 있어야만 하는가?
그러니 "왜 나는 없으면 되지 않는가?" 라는 것인데, 이것을 고대의 철학자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사람들은, "내가 있다는 것은 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 라는 것인데, 즉 신의 존재에 대한 증인이 되라고 말이다. 그렇게 신과 연관해서 자기가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될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사는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자기가 왜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 고대 철학자들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파악한 반면에,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윤리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맹목적으로, 그냥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 왜 신학적 인간에서, 윤리적 인간의 바뀌게 되었는가?
제가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과거에는 신학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자기를 살피다가, 왜 현대에 와서는 윤리적으로, 즉 자기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를 고려하면서, 그렇게 살피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윤리적으로 전환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사상적인 계기가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던져버렸기에 그러하냐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쪽에서 스스로 신을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이 신을 왜 스스로 버렸겠는가?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과학과 기술이 신의 말씀을 대신해주기 때문에, 그래서 굳이 신을 찾을 이유가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 과연 인간이 신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여기서 우리가 머리를 좀 사용해서, 그렇다고 하면 고대나 중세에 있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신과 관련을 시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진정으로 신을 사랑하고 좋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 당시에는 아직까지도 인간의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을 규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굳이 글로서 표현을 하자면 '한시적인 기대기' 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이 세상에 대한 자기 해석의 미흡함을 추상적인 개념을 동원해서 대충 메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신을 찾았다는 말이다. 신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더 솔직하고, 더 노골적이고, 더 총기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은 신이 모든 것을 다 해주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구태여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그렇게 주목해서 바라볼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 교회를 즐겁게 다닌다구요 ??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교회를 아주 즐겁게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약간(?) 수상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평소에 골치 아픈 일들을 신에게 다 맡기기 때문에, 자기는 그렇게 편안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바로 제대로 된 성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수시로 이야기하지만, 말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녀도 성도라고 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교인은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골치 아픈 것은 "모든 것은 다 신의 뜻입니다" 라고 하면서 맡겨버리고 자기 편하게 산다고 하는 것은, 이제 자기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신이 다 알아서 해주니 말이다. 마치 모두 알아서 해주는 자동차보험 '하이카(?)' 라고 할까? 그렇게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데, 굳이 수리비가 얼마인지, 사고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것을 자기가 알아야 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고, 그렇게 자기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옛날 고대의 방식이라고 하면, 하지만 현대에 들어오게 되면, 그렇게 하면 항상 어린아이의 수준밖에 되지 않으니, 그냥 어리광을 부리는 말이다.
◈ 나는 엄마가 너무 너무 미워 !!
예를 들어서, 아이들을 보면 성질이 너무 급해서 앞뒤를 가리지 않는데, 그래서 화가 나면 엄마에게도 마구 달려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너무 너무 미워. 제발 저리가" 라고 하면서, 그야말로 막되어먹은 불효자식과 같은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어떠한가? 사실은 그러한 동일한 마음이 들더라도 "나는 엄마가 너무 미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아주 차분하게 순화를 시켜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어머니, 생각을 조금만 바꾸시죠?" 라고 말이다. 사실은 같은 말인데, 그런데 그런 이야기하는 태도가 경박스럽지 않고 침착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처음부터 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 !!
사실 인간은 처음부터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신을 포기하고 자립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 최초로 노골적으로 발생한 것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살인사건인데, 즉 인간의 껍데기가 아닌, 인간의 근본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살인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얼마든지 살인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살인죄가 항상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데, 물론 지금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보고서 욕하고 미워하는 것도 역시 살인죄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원초적으로 항상 살인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살인자라는 이유만으로 살인을 하게 되면, 그 살인죄가 그만 정당화되고 유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한 가인에게 어떤 표징을 주어서, 다른 사람들이 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인을 죽여버리면 그 가인의 속성이 후대에 전파가 되지 않는데, 그러나 죄는 확산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죄를 확산시키고 있는데, 우리의 윤리와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말이다.
◈ 인간은 괜찮은데, 신이 괴팍해서 ??
하지만 중세 때는 이러한 이야기를 감히 할 수가 없는데, 즉 하나님은 자기의 선함을 전파하지 악을 전파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근세에 들어오면서부터 신이 노는 세계와 인간이 노는 세계가 따로 있어서, 결국 인간은 괜찮은데 신이 성질이 좋지 않아서 착하게 사는 인간을 힘들게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 헤겔이 말하는 '성육신' 이란?
그래서 보통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렇게 우리 인간들을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의 경우에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을 했는고 하니, 그렇게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한 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헤겔에 의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제가 헤겔의 주장을 이야기할 텐데, 여러분이 듣고 그 주장의 문제점을 한번 지적해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 지저분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인간은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훌륭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미처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굴리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그 사실 앞에서, 그렇게 우리 인간의 가치가 천사보다 더 높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부터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이는데 전력을 다 해야한다" 라고 말이다.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그런데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신적인 이성인데, 따라서 이 이성적인 것을 잘 개발하고 교육해야 하는데, 여기에 총책임자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국가가 백성들로 하여금 신적인 이성에 어울리는 훈련을 쌓아서 국가가 곧 신의 세계, 이성이 재현되는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에 있는 그리스도가 말하는 천국의 모형으로서 합당하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으니, 인간은 고귀하다 ??
그것이 헤겔이 주장하는 전체적인 틀인데, 즉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으니, 그만큼 인간은 고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8편 5절에 보면,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내버려두지 않고 귀한 존재로 간주했는데, 그런데 우리가 너무 쉽게 함부로 여긴다면, 즉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대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죄를 퍼트리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적인 법을 가지고 그것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가 필요하다고, 그런 국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는 말이다.
◈ 헤겔은 십자가가 아닌, 성육신에서 출발을 !!
그렇다면 헤겔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과연 그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의 말이 다 맞는가? 헤겔은 어디에서 출발을 했는고 하니, '성육신'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이지만, 십자가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출발했다고 가정을 하게 되면, 즉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논리를 가지고 헤겔의 주장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육신은 무엇의 시작인고 하니까, 저주의 본격적인 개시라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의 "다스리고 정복하라" 라는 것을 오해하면 안 되는데, 그냥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두고서 저주가 아니라 희생을 했다고 우기는데, 즉 예수님은 저주를 받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사랑으로 다가왔는데, 그러므로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저주라는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죽었는가? 죽을 뻔했는가?
그렇다면 아까 골로새서 3장에서 살펴보았던 "우리는 죽었고" 라는 것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고, "우리는 죽을 뻔했지만,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십자가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인간의 가치는 그 자체가 고귀하게 남아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남아있으면 남아있는 것이지,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라고 한다면, 남아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 가치가 있다고 해서 쏟아져 나오는 여러 사고방식과 윤리도덕과 그러한 기준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죽음의 개념은 이렇고, 삶의 개념은 이렇고, 죄의 개념은 이렇고, 정의의 개념은 이렇고, 심판의 개념은 이렇고, 계시의 개념은 이렇고, 또 율법의 개념은 이렇고, 등등 말이다.
◈ 인간의 가치와 예수님의 대충돌이 곧, 십자가 !!
그러니 인간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과 잣대와 모델 등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 한 군데로 모여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대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과 충돌을 일으키고, 지금은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님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의 기준은, 그에게 돌을 던지는 바리새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에게 있어서, 살아있다고 까불면서 돌을 던져도 그것은 죽은 것이고, 자기는 돌에 맞아서 죽어가고 있어도, 그것은 살아있다는 말이다.
스데반 집사님에게 성도의 살아가는 것 중에서 하나가 바로, 자기처럼 돌아 맞아서 죽는 것도 제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 중의 하나의 모습으로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아이쿠, 목숨이 끊어지면 천당에 가서 살면 되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미 산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숨이 끊어져도 그것은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 새언약과 관계가 있어야 !!
그렇게 목숨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마지막 때는 주님이 악인도 부활을 시키는데, 그런 사람도 살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산 것이 아니라, 저주이고 곧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새언약과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죽음이고, 새언약과 연결이 되어있다면 그것은 죽어도 살아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것에서 나오는데, 즉 예수님이 저주를 받았다면 우리도 당연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는 그냥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비추어볼 때 죽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예수님 사건에 비추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래, 내가 옛날에는 죄로 말미암아서 죽었다. 그런데 예수님 덕분에 새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살았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없는 상태에서 죽어버린다고 하면, 그 십자가가 산 상태에서는 십자가가 그만 없어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가 떨어져 버리게 되면, 그냥 자기 혼자서 죽고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것은 로마서 6장 4절에서 "함께 장사되고, 함께 산다" 라는 복음적인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간은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
그런 주장은 성경이 아니라 근대주체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자기의 목적과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겠다고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신학적인 표상을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철학자들이 지은 모든 기독교 관련서적들이 바로 다 이런 주장을 하는데,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인간은 비로소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얻게 되었다" 라고 말이다. 물론 천주교도 그렇고 말이다.
지금 여기에 말벌이 성경공부를 하려고 왔는지 몰라도 한 마리 들어왔는데(ㅋㅋ), 지금 우리가 설령 말벌에게 물리는 한이 있어도 정신을 집중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말벌 집이 우리교회 건물 안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들도 우리교회 식구인가?
지금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보게 되면, "목사님, 예수를 믿는 사람이 굳이 이런 책을 보아서 무엇을 합니까?" 라는 인상을 받기 쉬운데, 하지만 우리가 근대이후에 속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한다고 하면, 이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말하기를, 인간이 존재하기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 자체가 곧 행동이다'고 했다.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느냐 혹 저런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은, 행동만 따져서 파악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라는 점을 알아야 가능하다.
◈ 토마스 아퀴나스 - 존재함 자체가 곧 행동이다 !!
우리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을 들어보면 도저히 반박을 할 수가 없을 만큼 뛰어난데, 다만 그가 십자가를 빼먹은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여기에 보면 그는 "인간이 존재하기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 자체가 곧 행동이다" 라고 했는데, 오늘날 어줍잖은 철학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는 존재함 자체가 곧 행동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왜 그런가? 거기에 대해서 토씨(?)는 뭐라고 답변을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신이 그 사람 속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멋진 답변인데, 신학과 철학을 완전히 통합했다는 말을 들을 만하다는 것이다. 즉 신이 그 사람 속에서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곧 행동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무엇이 빠졌는가? 방금 말했지만, 십자가가 없는 것만 빼고는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십자가가 빠지고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모두 엉터리라는 말과도 같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에 의하면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느냐는 것은, 그러한 행동만을 따져서 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존재론은 인간들이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생각의 집약점이다. 이미 존재하기에 생각하고, 믿고, 따지고, 잠자고, 노래하고, 행동하기에 존재론을 정립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모든 학문의 근원을 차지한다. 근원이란 하나(1)를 뜻한다. 그 하나(1)가 발휘하고 보여주는 모든 것이 곧 인간이요 인간 세상의 전부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존재론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기에 생각하고, 믿고, 따지고, 잠자고, 노래하고, 행동하기에 말이다. 그러니 그런 존재론도 따지지 않고 무슨 철학과 문학과 예술과 경제와 정치를 이야기하느냐는 말이다.
** 그래서 존재론을 방치하고서 벌리는 신학 논쟁이나 신학적 토론은 자신의 진정한 면을 은밀하게 감추고 시도하는 지적 여흥에 불과하다. 즉 자신이 신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성경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그 행위가 어디로 하나(1)로 집약되는 지도 모르는 채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 모든 것은, 존재로부터 나와서 존재로 !!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하나'가 바로 '존재' 라는 것인데,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신은 존재를 통해서 행동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존재로부터 나와서 존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기 자신이 부수어진 사람이 바로 성도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이미 너희는 죽었고" 라는, 자기에게 그런 느낌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내 존재의 영역만은 노터치 !!
그렇다면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면 어떻게 되는가? 즉 자기 존재가 확장이 되면 존재영역이 되는데, 즉 필드가, '존재의 장(場)'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까지를 인간의 생존본능이라고 보아서, 그것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즉 그것은 자기 구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이 그런 구역을 만드는 것은, 결국 당신 존재 하나를 사수하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하지만 그렇게 당신 존재를 사수하게 되면, 그것은 존재가 되지 못하고, 그만 실존이 되고 만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실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하지만, 실존은 신과 연결이 안 돼 !!
그것이 왜 문제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그러한 실존은 신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를 통과해야 신을 만나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실존에서 멈추게 되면 "나는 나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자기를 때려서 "왜 때리노?" 라고 하면, "아니, 내가 때라고 싶어서 때리는데, 니가 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만다는 것이다.
아무튼 자기가 때리고 싶어서 때리겠다고 하는데 무슨 말이 많으냐는 것이다. 목소리만 크면 이긴다는 말고 있지만, 그렇게 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까, "목사님, 말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지 소리인데, 그런데 반박은 안 되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목사는 신학적으로 해결을 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의 뜻인 줄 압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실존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 실존에서 곧바로 신으로 가버리면, 이 세상은 개판 !!
바로 그러한 점을 가지고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공격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에서 신으로 바로 가게 되면, 즉 "내 주먹을 내가 흔들겠다고 하는데, 당신이 왜?"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면 니도 한번 내 주먹 흔드는데 맞아봐라" 라고 하면 사회가 그만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가 자기의 실존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서, 그러면서도 둘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까 말이다. 세상에 무슨 그런 하나님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에 대해서 관여하는데, 인간들은 자기 실존에 대해서 관여한다고 하면서, 그만 자기 실존의 존재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존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행동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파트에서 노래를 마구 불러서 옆집에서 조금 조용히 해달라고 하면, "내가 내 집에서 노래하는데, 니가 왜?" 라는 식이라는 말이다. 일반인들이 무심코 살아가는데, 물론 바빠서 그냥 대충하고 넘어가지만,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모든 것이 이 실존문제에 걸려있다는 것이다.
◈ 실존에서 존재로 가는데, 그것이 곧 '본질' !!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시대는 무엇인고 하니, 실존을 낮추어보고, 이 실존에서 존재로 가는 길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론' 인데, 이제 본질이 이해가 되지요? 실존에서 존재로 가게 하는 말이다.
그러니 실존이라는 것을 뭉개버리기 위해서, 즉 실존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지, 그러니 실존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인간은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는데, 그것을 실존을 가지고 우는 것도 잘했다고 하고 웃는 것이 잘했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진짜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본질에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실존을 가지고 정당화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 윤리가 장만이 되는데, 이런 것을 우리가 어렵다고 해서 기피하면 안 되는데, 중요한 것이니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결코 불필요한 것이 아닌데, 고맙게도 우리 인생의 선배들이 오래 살면서 고민도 많이 하면서 나온 결론들이라는 말이다.
◈ 본질을 서로 비교해보면 !!
인간들이 자꾸만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라고 하면서 우기니, 그렇다면 본질을 한번 대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본질로 가보니, "니는 강도가 본질이고, 니는 천사가 본질이다" 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이라고 하니 자꾸만 어렵게 느껴지는데, 함축된 의미를 담고 있어서 말이다.
본질을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성질이 아주 급하고, 또 어떤 사람은 침착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을 아주 고분고분하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불뚝 성질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한꺼번에 이야기를 하니, 본질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뚝 성질이 실존이 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안에 담겨 있다가 뭔가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되면 그 불뚝 성질이 튀어나오는데, 그러면 옆에 있던 사람이 "당신, 오늘 왜 그래?" 라고 하면, "나는 성질이 원래 그래. 우리 아버지도 나와 똑같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닮았는데,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이 확장을 시켜서, 그것을 인간 종(種)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과 식물의 세계에게도 다 확장을 시키는데, 즉 본질이 다양하다는 것을 밝혀서 존재에까지 이르게 하는데, 존재의 '일자(一者)'에까지 말이다.
◈ 돌맹이와 인간의 차이점은?
그렇다면 굳이 왜 그렇게 하는가?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돌맹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런 돌맹이와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즉 도대체 그 무엇이 다르기 때문에, 돌맹이는 돌맹이고 인간은 인간이냐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실존이 다르다고 하는데, 사실은 실존이 아닌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는 똑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는 모두 같은 존재인데,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다양성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 즉 존재는 같은데 본질이 다르기에 그렇다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강의가 이렇게 어렵게 진행이 되면 앞의 것을 다 잊어버리는데, 처음에 강의를 시작을 할 때 뭐라고 했는고 하니, "왜 저 돌맹이가 저기에 있어야 하고,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하는가?" 라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중세 때는 신과 관련이 되어있다고 했고, 근세에 와서는 자기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돌맹이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당연히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과 관련을 시켜도 그렇고, 또 자기와 관련을 시켜도 그렇다는 말이다. 돌맹이라고 하면 너무 딱딱하니, 저기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라고 하면, 그렇다면 "그 강아지는 왜 강아지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너는 왜 사람이 못되고 강아지인가?
여기서 "강아지야, 너는 왜 사람이 못되고 강아지이지?" 라고 물을 필요가 있는데, 물론 그 강아지는 답변을 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왜 물어야 하는고 하니, 강아지와 자기의 차이점을 통해서, 그렇게 해서 자기만의 가치와 의미를 얻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그것을 조금 더 발전을 시켜서 이야기를 하자면, 예를 들어서,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를 왔다고 하면, "아저씨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지요?" 라고 물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만약에 사기꾼이나 전과자라고 한다면, 그러한 이웃들은 아주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서운 이웃이 이사를 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무시무시한 사람이 아니고 의사나 판사가 이사를 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에게 법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또한 자기 몸이 아프게 되면 편리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웃을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아무튼 본질을 추구해야 !!
그러니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도 두어야 하는고 하니, 존재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역을 확장시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실존의 속성상 말이다. 그래서 자기 옆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알기만 해버리면 실존에 멈추게 되는데, 그렇게 실존에서 멈추게 되면 "나는 잘났다. 그러니 내가 살아가는데 걸치면 재미없어"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사회가 그만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면 안 되니, 실존은 개뿔도 아니라고 하면서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본질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그 차이점만을 연구하면 안 되고, 질적인 순서를, 즉 '윤리적 양(量)' 이라고 할까, 존재의 양을 윤리적으로 보니 말이다. 아무튼 그런 윤리적인 가치성을 따져서 서열화를 시키지 않으면 사회질서가 바로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 당신은 그동안 무엇을 했지요?
그래서 회사에 입사할 때 서류를 심사하면서 당연히 전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본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나이가 27살이고, 또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었으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반드시 묻는다는 것이다. 대학교와 대학원을 나왔으면 학교를 다녔으니 물을 필요가 없겠지만,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 그 8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세월을 채우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한국에 있는 대학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뉴질랜드에서 3년 동안 어학연수를 하고, 그 다음에는 미국에서 3년을 있으면서 자격증을 3개 땄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말은 무슨 의미인가? 자기는 8년 동안을 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살아있는 존재 속에는 소위 '생명' 이라는 것이 있는데, 즉 생명이 본질을 통해서 발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27살까지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 그것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현재 자기의 실존이라는 말이다. 즉 실존을 묻는 것이 아니라, 나이 27살은 누구든지 다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떠한 본질로서 27년의 시간을 채웠는지, 그것을 묻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질을 물으면서 "혹시나 어디 아픈 곳은 없나요?" 라고 묻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앞으로 회사에서 계속해서 부려먹기 위해서는 몸이 건강해야 하는데, 그러니 그런 생명력이 건강한지 아닌지, 그것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결국, 존재의 가치는 그 사람의 본질과 관련이 !!
그러므로 결국 존재의 가치는 그 사람의 본질과 관련되어있고, 그 본질은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그 잠재태를, 즉 잠재적인 능력까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능력적인 서열화를 하는데, 즉 순서를 매김으로 말미암아서, "당신은 간부사원, 당신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또 당신은 밖에서 일하는 영업사원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각 사람들의 본질의 역량 차이에 따라서 순서와 서열을 매기게 되는데, 그래서 지불되는 임금이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 목사님, 제 남편이 잘렸어요 !!
이번에 서울에 강의를 하려고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여자분이 자기 신랑이 나이 35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만 음주운전에다가 뺑소니로 잡혀서 말이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일단 너무 닥달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너무 그렇게 해버리면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조잡스러운 변명을 늘어놓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점점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직업 가운데 어떤 것이 있는고 하니, "청기 들어. 백기 들어. 청기 들지마. 백기 들어" 라는 것을 하루종일 하는 직업이 있다는 말이다. 그냥 자기 음성으로 말이다. 유아교육 프로그램 가운데, 아이들에게 그 게임을 계속해서 들려주어야 되는 직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까지 다해서 우리나라에 직업이 3만 가지가 넘는데, 하지만 나이 35세에 그런 일을 하면 보람이 있겠는가?
소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본질의 질이, 즉 그 순서가 낮아도 된다는 것이다. 대형마트에서 창고에서 물품을 정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힘을 쓰는 남자라면 말이다. 물론 오래하면 허리가 그냥 망가지지만 말이다. 그런 것은 대학을 나온다든지 영어를 잘할 필요가 없고, 그냥 기본적인 상식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
이 사회에서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은 항상 험한 직업이 되는데, 반면에 좋은 직장은, 그런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힘든 수련의 과정이 10년 이상이 걸린다는 것이다. 즉 좋은 것은 얻기 위해서는 좋지 않은 기간을 엄청나게 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좋지 않은 기간을 보내지 않으면, 좋지 않은 직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 인데, 즉 이 세상은 너무나 균등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너무나 공평하다는 말이다. 의사들이 전문의 하나를 따기 위해서는 15년 이상이 걸리는데, 그러니 청춘을 거기에 다 투자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를 하나 얻기 위해서는 잃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 여자 의사와 비애 !!
의사가 되려고 되면 인간적인 상식이나 교양 등은 모두 다 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선배에게 잘 보이고 해서 전문의를 딴다는 말이다. 냄새나는 환자 곁에서 하루종일 보내야 하고 말이다. 치과의사에게 허리는 또 얼마나 잘 망가지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전문의가 되면, 여자라고 해도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도 그만 두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15년 동안이나 그렇게 힘들게 공부를 했는데 말이다. 만약에 그만 둔다고 하면 주위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도 제대로 키우지를 못하고 또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아가씨의 경우에는 결혼을 하면 당장에 그만 두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만 키우는데, 물론 그렇게 하다가 살이 너무 올라서 문제가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성은 아이도 제대로 못 키우고 일에 쪼들려서 바싹 말라있다는 것이다.
◈ 차이가 곧 공평 ??
그런 의미에서는 공평한데(?), 즉 뭔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가 공평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차이성 자체를 공평으로, 즉 평등으로 본다는 말인데, 즉 그러한 것을 참된 진리의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다양성이 설명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는데, 즉 우리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존재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시도가 없다면, 자신의 사고방식의 근원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가 발생시킨 환영에 놀림감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취지에서 저자는 인류 철학사를 걸쳐서 존재에 대해서 꾸임 없는 고백과 더불어 탐색을 깊게 한 대가들의 '존재론'을 소개하고 어떠한 변천과정을 겪고 왔는가를 나열하고 있다.
◈ 현대철학은 실존에서 출발하기에 !!
현대철학은 실존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실존에서 본질과 존재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지 않고 존재는 그만 우연적인 사건으로 바뀐다고 한다는 것이다. 본질은 아예 없는 것이고, 그러니 실존은 본질이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들의 의식과 관계와 사상적 교류와 교제를 통해서 실존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실존과의 말이다.
그렇게 다른 실존이 곧 사회인데, 그런 사회의 시스템이,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사상과 윤리도덕과 같은 것에 의해서 세뇌를 받아서, 물론 세뇌라는 말은 어폐가 있지만, 아무튼 세뇌를 받아도 인간 실존은 자기가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게 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모가 요구해도 말이다. 그렇게 해서 또 다른 실존을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 교재 뒤에 '키에르케고르' 부분에 가면 나오는데 말이다.
이제 교재 2페이지를 보자.
** 처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이다. 그는 말하기를 "누구도 존재가 있지 않다고 주장하려고 하기 않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를 향해 열려진 유일한 길은 이른바 '존재는 있다'는 것이다" 라고 했다.
◈ 존재가 아닌 실존이 있지 않는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존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서 후대 철학자들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모른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는가? 실존이 있는데, 즉 실존이 있다는 것은 일지만 그러한 실존이 있음을 철학자들은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은 그만 변화하고 죽는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자기를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운전을 하나 하더라도 굳이 자기를 추월하는 차를 다시 따라 붙일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지구가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도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 앞차를 기필코 다시 추월하고 만다는 것이다. 스쿨존에 가면 시속 30km인데, 그래서 천천히 가야하는데, 걸리면 벌금이 6만원이고 말이다. 그런데도 그냥 달리다가 국가에 세금을 내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을 자기가 잡을 수가 없는데, 창세기 4장을 보면 동생이 자기 동생 가인을 죽이기 싫어도 죽이도록 되어있는데, 죄가 관여하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존재는 모르고 안다는 것이 실존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 실존이 전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 라는 것이 과연 실존인가?
그래서 철학자들이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는데, '나' 라는 것과 실존이 도대체 어떤 차이가 나느냐고 말이다. 즉 이 '나' 라는 것이 실존 안의 '나'인지, 아니면 실존밖에 '나'인지 말이다. 만약에 '나' 라는 것이 실존밖에 있다면 그 실존과 대립상태에 있는지, 실존을 다루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실존이 '나'를 다루는지 말이다.
◈ '나'는 과연 이미지에 불과한가?
이런 복잡한 문제들이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으면, "나는 이렇게 살아야 바르게 살아간다" 라고 하는, 즉 "바르게 산다" 라는 것이 정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쿠, 성질대로 그냥 살지 뭐" 라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바르게 산다고 하는 자기 주관이 없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자기 주관이 없으면 자기의 가치와 의미와 목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나쁜 사건이 오게 되면 충동적으로 자살을 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을 하는 철학자가 한두 명이 아닌데,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즉 "내가 실존을 장악하는지, 실존이 나를 장악하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라는 말이다. 도대체 실존이 만들어낸 환상이 바로 '나' 라는 것인지, 즉 '나' 라는 것이 이미지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나' 인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런 어려운 문제를 오늘날 기호학에서는, 진리가 네온사인처럼 깜박거린다고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마치 깜박거리는 네온사인과 같아서 !!
예를 들어서, 여기 앞에 주유소를 보면 'SK' 라는 글자를 네온사인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밤에 깜박거린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그 주유소 주인과 한바탕 싸웠는데, 가격표를 가지고 보행통로를 막아놓아서 말이다. 당연히 이겼지만 말이다. (ㅋㅋ) 아무튼 밤에 보면 'SK'가 깜박거리는데,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구가 깜박 깜박거리는 것이지, 사실 'SK' 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SK' 라는 정보가 전달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오늘날 인간의 몸과 심리를 연구하는, 즉 인간의 사랑과 미움과 같은 언어적 개념을 심리적이고 생물학적 구조까지 연결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이 네온사인으로 설명을 한다는 것이다. 즉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기본적인 것은 유물론인데, 즉 인간세포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다만 과거의 유물론과는 다른 점은, 'SK' 라는 글자는 아무 것도 아니고 네온의 깜박거리는 그 불빛의 물체, 그것이 전부라고 한 것이 옛날의 유물론이라면, 지금은 깜박 깜박거리는 것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렇게 깜박거리게 한다고, 그 정도까지 융통성을 부린다는 것이다. 서로 서로에게 그렇게 되먹임질을 한다는 말이다.
◈ 행복은, 자기가 기대한 바가 이루어질 때 !!
그러므로 약물을 먹이면 행복해지는 것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자기가 기대한 바를 누가 웃기고 사랑해줄 때, 바로 그러할 때 행복하다는 것이다. 스킨쉽이라고 할까? 아무튼 인간은 자기가 기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할 때 기쁘다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혀의 음파나 그런 것으로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대한 것에 대해서 흡족하게 반응을 할 때, 즉 "네가 없으면 내가 행복하지 않은 상태", 바로 그런 것에서 행복이 온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윤리적인 근거를 그런 방향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웃이 없이는 외로워서 못살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 레비나스 - 타인이 당신을 찾아오는 행복의 손님 !!
레비나스는 이것을 두고 뭐라고 했는고 하니, "타인이 바로 당신을 찾아오는 행복의 손님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손님을 핍박하게 되면 당신이 불행해지는데, 그러니 당신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손님을 대접하세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치 히브리서 13장에 있는 "나그네를 대접하라" 라는 것을 연상시키는데,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인간이 자기의 실존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데, 그래서 이웃이 와서 자기 실존의 공허함을 채워줄 때, 그것을 그들은 행복, 혹은 윤리, 혹은 도덕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복음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레비나스 주장이 땜때기식의 그야말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데, 그러니 주님에게 심판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린도후서 10장 5절과 6절의 말씀을 한번 찾아보자.
(고후 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
여기 6절에 보면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라고 하는데, 이러한 소리를 철학자들이 들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당연히 화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철학이든 이론이든 다 부수어 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박살을 내어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을 하라고 하는데, 만약 복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여기고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그러면 인간은 결국 벌을 받기 위한 노리개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으려고 하고, 설령 다닌다고 하더라도 또한 예수를 거부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그런 태도나 너무나 당연한데, 자기 자신의 존재를 비롯해서 모든 것을 다 부수어서 예수에게 복종시키려고 하는데, 그래도 적어도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그런 독선적인 예수를 믿고, 또한 교회에 다닐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또 그렇게 복종하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복종하지 않았다고 벌을 내리고 말이다.
◈ 이 놈아, 벌을 여기 받아라 !!
그렇다면 성도의 사명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을 증거하는 것인데, 예수님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고 하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데, 즉 "당신이 아무리 박사라고 해도 그리스도를 모르면 벌을 받습니다" 라고 하니 말이다.
그런 소리를 소위 잘났다고 하는 판사나 의사에게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그들이 좋아하는지 말이다. 그래도 수능 400점 만점에 390점을 맞은 사람들인데, 모두 자존심이라면 한 가닥을 하는 사람들인데, 과연 그들이 수긍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벌을 받는다고 하니 말이다.
◈ 성도의 가치는, 오직 십자가 복음뿐 !!
그러니 성도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것이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성도의 가치는 하나님과도 아니고, 이웃과의 관계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 복음과 관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목적이고, 의미이고, 가치이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말이다.
오직 그것뿐인데, 즉 신의 존재가 어떻고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나 천주교 계통에서는 전혀 여기에 대해서 무지한데,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질송도 천주교 신자이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숭배하는 자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아리스토텔레스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 존재로부터 철학을 출발시킨다. 그는 참된 실체를 '존재'(우시아) 라고 보았다.
◈ 플라톤 - 실존이 아니라 본질이 중요해 !!
플라톤의 경우에는, 존재의 정도에 따라서, 즉 더 있는 것과 덜 있는 것의 차이에 따라서, 그런 실존의 실제성의 존재를 가지고 더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별한다는 것이다. 즉 선이 더 있는 실존과 덜 있는 실존의 차이를 가지고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성화가 많이 된 사람과 적게 된 사람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본질의 차이에 의해서 본다는 것이다. (???)
이제 이해가 좀 되지요? 이 실존이라는 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고, 본질이 그 사람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성품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성품과 성질, 즉 본질에 의해서 실존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의 경우에는,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차이가 나도록 국가가 강력하게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질이 더럽고 매일같이 술이나 퍼마시는 인간이 경찰서장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인간의 본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