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8: 1- 5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
삼상 18: 1- 5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사무엘상 18장 1- 5절
제목 :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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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3-29 15:12
다윗과 요나단과의 관계
2009년 3월 29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18:1-5
(삼상 18:1, 개역)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삼상 18:2, 개역)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삼상 18:3, 개역)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삼상 18:4, 개역)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삼상 18:5, 개역)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다윗과 요나단은 같은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클럽의 특징은 생의 중심점이 이 지상에서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중심을 두고 사는 자들입니다. 골로새서 3:1-4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바로 이 신약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특징은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정확하게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원칙에 위반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는 자들이 반드시 발생하게 마련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갖는 것은, 삶의 중심점을 이 세상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에 신경쓰다보니 타인들의 욕망이 곧 자신의 삶의 진앙지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과 요나단은 타인들의 원칙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으로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원칙에 준해서 도리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눈에 뜨인 것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그룹과 ‘할례 받은 자들’의 그룹입니다. 즉 할례의 유무에 따라 하나님은 거룩한 자와 거룩하지 못한 자로 구분하시고 구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칙임을 새삼 파악하게 되는 배경으로서 세상 속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세상 중심을 타인의 안목에서 정리했습니다. 골리앗에 대해서 어른들이 한결같이 무서워한 것은 결국 할례 받지 못한 자와 같은 안목을 지녔다는 뜻이 되고, 더나아가서 할례를 행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모독하고 무시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할례란 하나님께서 거룩하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거룩하다면 누가 뭐래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을 거룩한대로 사수해주는 차원에서 그 사람을 지켜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과 능력이 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이 없으면 죽은 시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이 거룩은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집니다. 히브리서 10: 10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약에 와서 거룩이란 성도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인해 단번에 주어지는 겁니다. 이 단번에 주어지는 이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기에 성도는 더 이상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기에 세상의 평가가 세상의 인식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겁내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을 고수한 다윗은 형들에게 무시당하고 골리앗에게도 무시당했습니다. 사무엘상 17:28-30에 보면, “장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이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돌이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맏형 엘리압이 소년 다윗을 보고 건방지다는 말을 한 이유는, 다윗이 나설 자리도 아닌데 나섰다는 겁니다. 사울왕은 골리앗 장수의 위세에 대항하기 위해서 현상금과 경품을 제안했습니다. 즉 골리앗을 제압하는 자에게는 재물을 듬뿍 주어 부자가 되게 하고 왕의 딸을 신부로 맞이하게끔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원칙은 이런 경품 타내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보기에 골리앗이 반드시 죽게 되는 이유는, 그가 할례 받지 않는 자이며, 따라서 비거룩한 자이며, 그 비거룩한 자가 거룩한 백성을 저주하게 되면 반드시 저주받는다는 하나님의 원칙과 원리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2-3의 원칙이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한 취소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러니까 현재 복의 근원은 바로 이스라엘인데 저주받을 족속에 속한 장수가 감히 하늘의 복의 근원되는 나라를 저주했으니 반드시 저주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비록 메뚜기가 분명 개미보다 덩치가 커서 개미가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디까지나 메뚜기가 살아 있을 경우에나 해당될 일이요, 만약에 메뚜기가 시체가 되어 있다면 개미는 마음놓고 자기 집으로 메뚜기를 끌고 가서 양식으로 뜯어먹을 수가 있는 일입니다. 소년 다윗의 눈으로 보기에, 골리앗이 살아있어 고함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오로지 그가 할례받지 못한 자이며, 감히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나라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이미 그는 죽은 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남은 것은 이미 죽은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죽이느냐 하는 절차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년 다윗과 같은 생각을 가진 소년 한 사람이 또 나옵니다. 그는 요나단입니다. 그의 생각도 소년 다윗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리와 원칙을 결코 포기하시거나 부정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압니다. 전에 사무엘상 14장에서 요나단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전쟁 원칙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 원칙은 바로 6절에 나옵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도 분명히 거룩과 비거룩을 따로 구분해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원칙이 나옵니다. 따라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 전쟁의 승패가 ‘사람의 수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천국이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입성하는 곳이 아니라 할례 언약에 준해서 거룩을 유지하느냐 여부로 결정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단과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 노선 위에서 같이 만나고 같이 대화하고 같이 사귀고 있습니다. 이 사귐 자체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 됨이란 내부에 어떤 배선이 깔려야 성립하느냐는 점을 보여주는 바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두려움 없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해주시고, 예수님의 자유가 우리 속에 들어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3:27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상-2008/037강-삼상18장1-5(다윗과요나단의관계)-1sa090329.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