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3월 27일 강의 디모데후서 2장 9절
광주 3월 27일 강의 디모데후서 2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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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27 디모데후서 2장 9절
양 쪽 두 세계에서 땡기는 소유 욕구와 서로 거부
우리교회(IP:125.♡.2.45)
09-03-2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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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0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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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090327a디모데후서2장9절a
광주 강의(09. 3. 27) 47-1
디모데후서 2장 1절에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 아들아’, ‘은혜 속에서’, ‘증인’ 이런 단어가 이 세상 보통 인간이 아닌 특수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성경공부나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우리가 특수한 신분이란 것을 어떻게 전할지 이것이 난제입니다.
세상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상황에 부닥치고 다양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은혜 안에 있는 사람한테는 그런 문제가 전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사람한테는 밖에서 파도가 치고 풍랑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방주는 하나님이 동행하시면서 인도하시기에 방주 속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까?’ 라는 이런 특수한 상황에 어리둥절해야 되고, ‘야, 여기는 희한한 곳이구나.’ 라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이것이 말씀 안에 들어오면 이렇게 되는데 말씀을 안 보면 세상의 우여곡절에 시달리지요.
에베소서 6장 19절에는 뭐라고 했는가 하면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라고 했는데, ‘말씀을 주사’ 라고 하고 ‘복음의 비밀을 알리게 하옵소서.’ 라고 했지요.
지금 우리는 디모데후서라는 비밀, 말씀의 비밀 속에 우리가 지금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볼 때 1)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2) 은혜 안에 있는 이 특수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 둘을 다 알아야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2번에 속한 사람이라면, ‘은혜 속에서’, ‘비밀’, ‘특수한 상황’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이 세상 보통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교회는 취미 단체가 되고 그냥 놀러 가는 곳이고 중요한 것은 따로 있고 이렇게 되면 특수한 의미가 없어지지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특수하냐 하면, 없는데서 생겼고, 죽은데서 살아난 자식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용을 쓰도 이런 특수한 신분이 될 수 없어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내 아들아”라는 이 말씀은 물론 바울에게 디모데가 자식처럼 여겨져서 그런 표현을 썼지만 ‘내 아들아’, ‘은혜 속에서’, ‘증인’이런 단어가 사람에게 붙여진다는 것은 구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일하심이 한꺼번에 이 집단에게 다 퍼붓는 거예요. 그리고 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세계 속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본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그냥 동화나 신화나 전설처럼 들리겠지만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보면 ‘구약에서 놀라운 기적 덩어리를 받았던 그 사람들이 신약에 있는 우리들이란 말이지.’ 라는 그런 느낌이 오게 되지요.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가 내리고 하는 그 모든 혜택을 입은 그러한 사람들이 신약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2번(성도는 어떻게 사는가?)을 하기 전에 1번(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부터 먼저 확실하게 규명 짓고 2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한 마디로 하면 [동물의 왕국]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동물입니다. 사람을 알려면 동물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어요. 심리학에서 이것을 ‘행동주의 심리학’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내부 심리를 파악해서 아는 심리학이 아니고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 심리를 거꾸로 정리하는 것인데, 이 행동주의 심리학이 지금 교육학 등 여러 곳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뭐냐? 사람은 동물과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뭐냐를 알기 위해서는 동물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동물적인 욕구가 기반입니다. 2번 세계 (성도의 세계)는 기본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이 바탕 되어 있다면, 1번 세계(불신자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동물적인 욕구가 기본입니다.
매슬로우의 심리학에 욕구단계설이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단계는 생리적 욕구입니다. 생명유지를 위한 욕구(식욕, 성욕). 이것은 동물과 같습니다. 개가 주인을 따르고 하지만 자기 밥그릇을 차면 주인을 물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가 어떻고, 예술이 어떻고, 종교가 어떻고 하지만 일단 배고픔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제 아내가 직장생활 하면서 바쁠 때는 식사도 못하고 온 천지를 다니는데, 그럴 때는 어떤 소녀가 빵을 먹고 있는 것을 보면 빼앗아 먹고 싶다고 해요. 며칠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이 배고 가프면 하나님의 말씀이고 뭐고 기억 안 납니다. 오로지 먹고 싶다는 생각 뿐입니다. 소녀에게 빵을 좀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확 빼앗아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동물이 사람인척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인간이 개보다 못하다고 해요. ‘개 같은 인간아!’ 하면 개가 화를 내요. ‘어디 점잖은 개를 사람과 비교를 해!’ 그래서 성경에는 인간을 짐승보다 못하다고 해요. 벌래보다 못하고,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사41:14)”라고 했지요.
배고픔 이것 마태복음 4장에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40일을 굶었을 때 마귀가 바로 동물적인 욕구를 지적했지요.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그럴 때 예수님 대답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그러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먹고 싶어도 40일 동안 못 먹게 만든 겁니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사람의 기본 욕구가 아니라 말씀세계는 기존의 사람 세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굶게 했습니다.
번식과 생존은 동물이나 인간이나 전부 공통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1번 욕구를 잘라버리면 여기에 소위 고상하다는 교육, 예술, 문화, 종교 전부다 물거품입니다. 교육을 왜 하는데요?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기도는 왜 합니까? 전부 살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예술, 문화, 종교 이런 것들은 다 장식에 불과하기에 이런 것들을 다 떼버리면 결국은 기본적인 욕구만 남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에 왜 옵니까? 기본적인 욕구 해결하기 위해서 옵니다. 그러니까 동물이지요. 그런데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1번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동물은 잠을 자지만 인간은 문화를 생각하고 고상한 티를 냅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장구를 치는 사람 같으면, ‘나는 장구 치는 일에 소질이 있고, 하나님의 은사고’ 별 소리를 다 하는데, 다 거짓말입니다. 배가 불러서 그런 소리 합니다. 성욕도 채워지면 등 돌리가 잡니다.
매슬로우의 이론에 의하면 사람들이 기본적인 욕구(1단계, 생리적 욕구)가 채워지면 두 번째는 안정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택문제. 떠돌이를 면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자기를 이 땅의 객이요 나그네라고 하지요.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 세계는 완전히 달라요.
하나님의 말씀 세계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나그네요 객이라고 자처하지만 인간의 세계에서는 안전 욕구를 추구합니다. 안전 욕구에도 두 가지고 있는데, 공간적 요구 즉 정주(한 곳에 머무는 것)의 욕구와 함께 보디가드를 원합니다. 누가 나를 지켜줬으면 좋겠다.
여성들이 남성을 찾을 때가 언제냐 하면, 밤에 무서울 때 지켜줄 사람, 그리고 심심할 때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 이 모두가 안전 욕구입니다. 그래서 나이든 처녀들이 결혼 상대자로 어떤 사람을 찾는가 하면 첫째로 보디가드를 할 수 있는 사람, 둘째는 대화 상대로 수준이 되는 사람, 셋째는 나의 품위를 지키도록 해 줄 사람.
일단 배부르고(1. 생리적 욕구) 난 뒤에 2. 안전 욕구를 원하고 3. 사회적 욕구(소속의 욕구)입니다. 판사 집단, 변호사 집단, 의사 집단, 교사 집단. 소속이 될 때 소속에서 안도감을 느낍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이 ‘은혜’, ‘복음의 비밀’ 이런 것들이 있는데 비밀이 되려면 바깥사람들이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비밀을 아는 사람은 특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 속에 있는 인물이 비밀을 아는 사람이고, 은혜에 속한 사람이고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특수한 생명인 것을 모르고, 성경 볼 때 그냥 자기 욕구를 가지고 ‘성경도 별 소용없네.’ 이러고 있어요. 성경의 내용들은 세상에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상관없는 이것만의 특수한 것인데, 자꾸 세상에 있는 문제를 끌고 와서 ‘성경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이런 식으로 연결시키려 하는데 사실은 연결이 안 되지요.
우리가 지금 디모데후서를 공부하면서 성경 내용 속을 이야기하는데, 1번 문제(성경 바깥의 세계)에 집착해 있고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모르면 자꾸 성경과 이것을 연결시키려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제가 먼저 성경 바깥의 세계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를 지금까지 길게 설명했습니다.
성경 바깥세계가 무슨 왕국이라고 했습니까? [동물의 왕국]이라고 했죠. 동물인데 동물의 첫 번째 욕구가 뭐라고 했습니까? 생리적 욕구인데 이것을 두 가지로 말했는데 하나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식욕)과 다음은 번식하는 것(성욕).
이것이 안 될 경우에는 2, 3, 4, 5번 욕구는 부질없는 거예요. 1번이 해결되어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노숙자가 되었건 부자가 되었건 항상 기본이 돈을 벌어야 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돈을 벌어야 욕구가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여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들이 어째서 2번 세계(은혜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하고 1번 세계(바깥 세계, 혹은 동물의 왕국)에 매여 사는가? 그들이 스스로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은 1번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 예수님은 자기의 존재가 1번(바깥 세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2번(말씀의 세계, 복음의 비밀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일부러 이 바깥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힘들게 고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통과하는 것처럼. ‘홍해까지 건너온 하나님의 백성인데 왜 광야에서 고생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습니다. 왜? 신명기 8장에 나오지요. 광야를 통과케 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어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고.
신명기 8장 2-3절 읽어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사람은 동물처럼 먹고 번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원래 원하시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요. 사람 속에는 뭐가 들어가야 돼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들어있을 때 비로소 사람으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고집에 센지 처음 만든 그대로의 인간이 아니면 인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처음 만드실 때 하나님은 말씀을 집어넣어서 말씀이 들어있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기 원한단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말씀이 들어있는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그런데 말씀이 없는 사람은 그야말로 짐승과 같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이 사는 목적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 욕구대로 살지만 예수님은 자기 사명을 알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일단 생리적인 욕구가 해결되면 그 다음은 안정 욕구가 생깁니다. 이 안정 욕구는 보디가드라든지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해 주는 것. 그 다음이 사회적 욕구인데, 이것은 어떤 집단에 소속이 되면 그 소속의 가치가 곧 자기 가치가 넘어오는 거예요.
제일 마지막 욕구가 뭐냐 하면, 자아실현 욕구입니다. 다른 욕구들은 외부에서 주어지지만 자아실현은 아닙니다. 이 욕구는 끝도 없어요. 이 욕구에 들어가면 자아에 몰두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미치는 겁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마지막 도달하는 지점이고 불교지요. ‘나는 나다. 나는 신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사람들이 전부 이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 이상으로 자기 내부에서 자기가 좋고, 자기가 위대할 때는 신을 안 믿지요. 내가 곧 신이기 때문에 신을 안 믿게 돼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바로 말씀 바깥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매슬로우가 이렇게 주장했는데, 의사들이나 과학자들이 연구를 했어요. 그런데 이 욕구가 올 때마다 인간의 두뇌 속에서 몰핀이 더욱 활성화된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욕구 하나씩 성취될 때마다 인간은 점점 더 자아에 미쳐가는 거지요.
내가 나에게 미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내가 우상이에요. 남이 하는 건 싫어요. 내가 했기 때문에 그것에 희열을 느끼고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헤겔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의 행복이란 남이 주는 밥이 아니라 내가 땀 흘려서 내가 마련한 것. 이것을 성취욕이라 하지요. 이런 것이 말씀 바깥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방금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은 성경과 상관없는 내용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 안의 세계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말씀 바깥세계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요.
예수님께서 말씀 안의 세계로 바로 오신 것이 아니고 말씀 바깥세계를 거쳐서 말씀 안으로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애를 쓰도 스스로의 힘으로 말씀 안으로 못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데리고 들어오셔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데리고 들어오시면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그야말로 동물이요 지금 그 자체지요. 우리는 끝까지 나밖에 모릅니다. 나는 내가 전부고, 남이 잘하면 질투가 생기고, 내가 잘 한 것은 대단치 않은 것에도 감격하고 -- 이것이 성취욕입니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말씀 속으로 들어오게 해서 특수한 신분이 되게 해서 복음의 비밀을 알게 했으니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냔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이것을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말한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 욕구설을 모르게 되면 본인이 그런 짐승 같은 욕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성경 말씀을 전부 그런 욕구 위에다 덮어 씌워서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이지요.
세계가 전혀 다른데, 지금 내 욕구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예수를 이용하고 교회를 이용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이 욕구설을 기억하고 있으면 ‘아하, 내가 세상 사람이구나. 교회 다니고 성경 보지만 내 밑바닥은 세상 욕구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나의 자아실현을 위해 하나님을 믿고 예수 믿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바깥세계에서 성경의 세계로 어떻게 들어오는가?
이제 디모데후서 2장을 다시 봅시다. 1절에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은혜 속에서 드디어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지요. 비밀이란 것은 우리끼리만 아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들려줘도 거부해요. 모두 다 안다면 비밀이 아니지요. 그리고 비밀 속에 들어오면 특징이 뭐냐 하면, 바깥세상의 욕구가 사라지고 비밀을 아는 기쁨이 모든 욕구를 덮쳐서 날려 보냅니다. 삭제시켜 버려요. ‘나에게 그런 욕구가 있었나?’ 할 정도로.
“복음만 있으면 좋은데, 나에게 특별한 욕구가 있었나? 내가 미쳤지. 왜 자아실현을 해. 자아실현으로 구원 받는 것도 아닌데. 자아실현은 내 노동에 대한 집착인데. 아이고, 내가 미쳤지. 그것을 왜 좋다고 했을까? 복음이 이렇게 좋은 것을.”
복음의 비밀 속으로 들어오면 바깥세상에서 있었던 모든 것이, 잘했던 못했던 상관없이 그것은 남의 이야기처럼 느끼게 합니다. 이럴 경우에 성경 말씀이 전부가 Yes(예)가 돼요.
아까 말씀드린 생리적 욕구, 안정 욕구, 사회적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런 것들이 다 날아간 상태에서, 디모데후서 2장 1절부터 보게 되면 전혀 어려운 것이 없어요.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 이렇게 나오는데, 이런 말씀들이 술술 이해가 돼요. ‘아하, 주께서 지금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깥 생활에 찌들려 있는 사람이 3절 말씀을 읽으면, ‘지금 내 살기도 바쁜데 언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며, 내 먹고 사는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언제 또 교회에 가서 봉사하란 말인가? 두 가지 일을 하려고 하니까 힘들어 죽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힘듭니까? 지금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고 힘들다면, 우리의 신분 자체가 특수한 신분인 것을 잠시 놓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은혜에 속하게 되면 고난 받는 것도 전부 은혜롭게 됩니다. 복음의 비밀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오기 때문에, 바깥세상에는 우리 힘으로 우리 욕구를 이루지만 복음 안에서는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지금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뿐이지 지금도 계속 이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좀 전에 우리가 딸기를 먹었어요. 딸기 먹는 것이 힘들었습니까? 아니죠. 그냥 맛있었지요. 그런데 딸기 먹은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분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딸기 먹는 것이 힘드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신분과 자격으로 딸기를 먹느냐? 똑같은 딸기를 먹어도 복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딸기를 먹는 것은 욕구(식욕)를 위해서지만, 말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딸기 먹는 일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오늘도 은혜로 딸기를 먹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았다.’
내가 나를 사람 만드느냐, 아니면 나를 특수한 신분 되게 하시는 분이 따로 존재하느냐? 그 차이입니다. 내 인생을 동물로 마칠 것이냐, 아니면 천사처럼 마칠 것이냐? 이것은 예수님께 달렸습니다. 예수님이 천사되게 해주면 우리는 천사가 되고, 내가 나를 만들면 우리는 동물로 시작해서 동물로 끝납니다. 마지막 동물이 자기 해탈하는 동물이지요. “나는 나다.”라고 주장하는 동물. 절에 가면 많아요. 요즘은 교회에도 많아요.
자아실현의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자아실현의 욕구가 마지막 욕구라고 하는데, 저는 하나 더 집어넣었으면 좋겠어요. 자아실현의 욕구까지는 의식이거든요. 의식 욕구 위에는 무의식 욕구가 있어요. 무의식 욕구 속에 뭐가 있느냐? 장00이 있어요. 장00 알지요? 자살한 여자 탤런트.
프로이드는 인간의 무의식 욕구에 들어가면 화끈하게 자살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까 사모님이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이 뭐하시나? 세상 빨리 안 끝내고?” 이것이 프로이드에 의하면 무의식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씀 속에 들어가면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군사로 ‘죽는 것이 이렇게 좋을 수가’라는 그리스도 때문에 죽게 하시지요. 그러니까 항상 의미와 가치가 새로운 신분자에게는 따라붙어요. 말씀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세상 바깥에는 욕구가 있어요. 여기에서 특수한 신분자(하나님의 백성)가 되면 말씀이 들어옵니다.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에 말씀도 들어오고 동물의 왕국도 들어와서 이 둘 사이에 치열한 전쟁을 하는데, 결국은 말씀이 승리하게 합니다. ‘나는 죄 덩어리며 이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용서 받는다.’는 고백이 나오도록 우리를 평생토록 인도하십니다.
만약 특수한 신분을 가진 성도가 아니라면 말씀을 튕겨버리지요. 옥토에 씨가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옥토에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말씀이 죽지 않고 살아서 열매를 맺어서 결국은 ‘나는 부족했는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았다.’는 말씀의 승리를 바깥으로, 빛으로 발산됩니다. 이것이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말씀이 뿌려지면 ‘나는 짐승인데 이런 나를 주께서 용서하셨다.’는 주님의 용서가 바깥으로 튀어나오지요. 이렇게 본문을 해석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여기 말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라고 하면 사람들이 뭘 생각하는가 하면, 교회 봉사하다가 고생하는 것, 또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선교하다가 죽는 것, 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 퍼주는 사랑, 노숙자 돌보다가 힘든 것. 이런 사례들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착한 일도 결국은 자아실현의 욕구의 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말씀과 아무 관계없습니다. 이것은 자아 집착인데 이것은 모든 짐승 같은 인간이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해탈이고 성화고 자신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라고 하지요. 이런 것으로는 절대 구원이 안 됩니다.
진짜 특수한 신분자 같으면,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짐승이라는 것을 날마다 실감하면서 삽니다. 화장실에 급히 가고 싶은데 다른 가족이 화장실을 차지하고 있을 때 짐승이 됩니다. 위, 아래도 없고 누가 들어가 있던지 빨리 나오라고 신경질을 부리고 난리를 칩니다.
짐승 키우는 사람들은 제 말에 동감합니다. ‘짐승을 키워보니까 내가 짐승을 키우는 것이 아니고 짐승이 나를 키우더라.’고 해요. 이것이 말씀의 승리지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너는 은혜 아니면 희망이 없다.’고 하는 것을 재확인 시키는 것, 이것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5-6절에 보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면류관을 얻고, 곡식을 받고 하는 모든 것들이 복음이 주는 혜택인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9절에는, 복음 때문에 우리는 남들 보기에 천하의 죄인처럼 간주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싫어하지 마시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있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죄인 취급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9절은 바울이 복음 때문에 교도소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한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돼요. 집안에 어떤 우환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집안이 힘들어도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말씀이 나 같은 인간도 구원 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기에 나에게 어떠한 상황이 일어나고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제가 지난주일 그런 말씀 했습니다. 심판의 기준만 알면 더 이상 불행할 일이 없다고. 하나님이 심판을 어떻게 하시는지 명확한 기준을 알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우리한테는 불행이란 것이 성립이 안 돼요. 심판의 기준이 뭡니까? 어린양의 피가 있는 사람은 넘어가고, 피가 없는 사람은 죽이잖아요. 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 받고, 피가 없으면 저주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 외의 일들은 슬프다고 할 필요가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복음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 바깥에 있다면 1번 욕구도 안 되고, 2번 욕구도 안 되고, 3번 욕구도 안 되고 이렇게 해서 슬프다고 하겠지만,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뻔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힘들 때가 어떤 경우냐 하면, 가난할 때가 힘든 것이 아니고 부유할 때 어려워요. 내가 돈 때문에 행복한지, 복음 때문에 행복한지 혼돈이 오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부유함을 날려 보낼 때가옵니다.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다 말씀이 이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너는 특수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상황을 준 거예요. 사무엘상 2장에도 나오고 신명기 32장에도 나와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
짐승 같은 인간에게 말씀이 와서(마치 포크레인이 돌들을 떠서) 구원하겠다는데 우리가 뭘 걱정하겠습니까?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우리가 어떤 형편이 있든지 간에 우리 내부에서 하나님의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면 이것은 엉터리에요. 나는 그냥 있는데 주께서 나를 통해서 복음 전하고, 전도하게 하고, 헌금하게 하고, 봉사하게 하고. 모든 것은 내 속에 있는 말씀의 위력이 다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이런 편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이보다 더 편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사세요. 살면 여러분 속에 찾아온 말씀이 알아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목표를 향하여 인도합니다. 우리는 다만 내가 어떤 자리와 형편에 있든지 이 형편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형편인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돼요. 이것이 믿음인데,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거죠.
10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보세요. 아까 욕구설에 나오는 것과는 다르지요.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나오고,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얼마나 좋습니까? 바깥세상에는 자기가 자기를 다듬어 나가야 해요. 이게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예수 안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택하신 자’란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의 이런 취지를 이해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교도소까지 간 사람이에요.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어디에 있든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씀이 나 같은 짐승도 구원한다는, 이 기쁜 소식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흘러넘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손해나는 장사 안 합니다. 우리 같은 인간을 구원해 놓고, 우리가 귀한 것이 아닙니다. 나 같은 인간도 구원 받았다는 그 하나님의 공로, 자기 사랑. 이것을 회수한다고 하나님은 바빠요.
이러한 점을 사도바울은 지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택하신 자가 되었으면 더 이상 우리가 세상 욕구에 휘둘려서 걱정, 고민, 근심, 두려움 이런 것은 이제 말끔하게 잊어버려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2009. 4. 9. 8:52 녹취 마침)
관리자(IP:125.♡.2.45)
09-04-17 22:44
광주090327b디모데후서2장9절b
광주 강의(09. 3. 27) 47-2
첫째 시간에는 디모데후서 내용으로 들어가지 않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어떻게 고생하고 고민하는가를 다 알고, 그것이 택한 백성에게는 전혀 해당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혼자 심각하고, 혼자 큰일 났고, 이것은 진짜 자살할 일이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복음 안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말씀의 세계(복음의 비밀)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가 해당되는 사람이지, 내가 내 인생을 꾸려나가는 세상 사람과 같은 그런 입장이 아니란 말이지요.
첫째 시간에 매슬로우의 욕구5단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1)생리적 욕구 2)안전 욕구 3)사회적 욕구(소속 욕구) 4)존경 욕구(인정 욕구) 5)자아실현 욕구 이렇게 있는데, 1에서 4번까지는 외부를 의식하지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은 남을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동네에서 야구를 잘 하는데 밖에 나가면 골드게임으로 지는 것.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줄 몰라요. 타인과 경쟁하고 비교하는 데서 ‘내가 이쯤 되는구나.’ 자신의 레벨을 가늠해요.
1에서 4번까지는 남이 있기에 내가 있는 거예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것이 곧 나다.’ 그런데 5번 욕구는 뭐냐 하면, 남이 뭐라고 하든지 나는 나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실현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져도 1에서 4번까지는, ‘행여나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겠는가?’ 하다가 나중에 5번에 가면 뭘 버립니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그 다음에는 사다리를 차버립니다. 이처럼 종교를 차버리지요. 목사들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 됩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남들에게는 잘 위로하고 적절히 말씀을 인용도 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절대로 말씀을 안 믿어요. 그러면 누굴 믿느냐? 자기 자신을 믿어요. 그래서 목사들은 남들에게는 잘 가르치고 훈계하지만 정작 자기 고백을 안 하는 이유는 자기한테는 내놓을 믿음이 없어요.
제임스 리(십자가마을 게시판에 글을 올린 목사)는 진짜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 때 자기 고백을 다 내놓잖아요. ‘내가 옛날에는 복음도 아닌 것을 전했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그것을 즐겼는데, 복음을 깨닫고부터 복음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다 떠났다.’
목사는 복음을 전해서 떠나든 미워하든 관계없이 복음 자체에 쌈 싸인 그런 존재가 될 때는 복음이 튀어나오고, 자기가 자기를 붙들고 사는 사람은 복음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목회의 경력이 좀 쌓인 사람들은 글을 못 써요. 왜냐? 자기 고백이 안 나오니까. 그저 배운 기술로 남을 가르쳐서 목사로 대우 받기를 원하지 ‘나는 평소에 이렇게 삽니다.’를 솔직하게 드러내지를 못하지요.
예수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분을 믿는다든지 의지하지는 않지요. 다만 믿는 것은 성경 말씀을 이야기하면 교인들이 나에게 생활비를 준다는 사실, 내가 그 사람들 때문에 밥 먹고 산다는 그 사실만 확실하게 믿지요. ‘교인들이 다 떠나가도 나는 예수님께 감사하겠다.’ 이런 목사는 거의 없어요.
오늘 아침에 어떤 목사님과 상담을 했어요. ‘세상 직장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칼빈 선생님이 이야기하는데 나는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제가 답했어요.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데, 하나님께서 왜 살게 하시는가? 왜 죽어야 되는지 이유를 알게 하시려고 살게 하시니까 목사님은 목회를 부지런히 하셔서 목회가 주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임을 체험하면서, 성경 말씀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역시 죽은 자가 맞구나를 체험하면서 목회에 전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옷 장사를 해야 되는가? 옷 장사를 통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기 위해서. 옷 장사는 1번 욕구(생리적 욕구) 아닙니까.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2번 안전 욕구.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4번(존경 욕구)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남들 때문에 내가 뭔가를 합니다. 만약 남들이 안 알아주면 자기는 개판으로 삽니다. 남들이 집에 찾아오면 평소와는 다르게 점잖은 행동을 합니다. 사람들은 남들로 인해 삽니다. 이것을 헤겔은 ‘인정 투쟁’이라고 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왜 투쟁하는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다. 이것을 비트겐쉬타인은 ‘인생은 게임이다.’ 라고 했어요. [피]에 보면 이것을 인용해 놓았어요.
‘인생은 게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다.’ 김인식 감독은 투수 임창용이 자신의 사인을 잘 못 받아서 정면 승부해서 이찌로에게 안타를 맞은 것 때문에 밤잠을 못 잤다고 했어요.
인생은 게임입니다. 혼자서는 게임을 할 수 없습니다.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있어야 하고, 내가 잘 하는지 못하는지 지켜보는 시선(관중)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남(관중)이 없으면 사는 재미가 없어요. 이게 바로 복음 바깥에서 사는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비록 내가 죄수 취급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왜? 9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나를 기어이 구원시켜 내는 거예요.
나는 내 노력으로는 절대 구원 못 받아요. 왜? 나는 짐승에서 못 벗어가기 때문에. 나는 생존의 욕구에서 못 벗어나고, 안전 욕구에서 못 벗어나고, 소속의 욕구에서 못 벗어나고, 인정 욕구에서 못 벗어나고, 자아실현의 욕구를 못 벗어나요. 나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남들이 욕하면 싫어요. 남들이 칭찬하면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런 짐승 같은 본능을 때려죽여도 포기 못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비밀을 아니까 내가 훌륭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훌륭해요. 나는 못났어요. 못난 나를 훌륭하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씀이 나로 하여금 있는 자리에서 말씀으로만 구원 된다는 표시가 나도록 나를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나는 하나의 허수아비죠. 누구의 허수아비? 주님의 허수아비. 내 안에는 욕망이 있어요. 탐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냉동처리 해버렸어요. 그러면 꽁꽁 얼게 되지요. 이처럼 말씀이 나를 꼼짝 못하게 고체로 만들어 버려요. 이렇게 되면 꽁꽁 얼게 된 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얼게 하신 그분의 능력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매인 군사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특수한 것은 성도가 위대해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성도를 밧줄로 꽁꽁 묶어 냉동 처리한 그분이 위대하지요. 내가 위대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묶였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위력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했어요. 수백차례 제가 들은 질문이 뭔가 하면, “목사님, 기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정답이 뭡니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하겠다는 것은 누구의 원입니까? 내 원이죠. 그러면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라는 질문 자체는 기도를 제대로 하겠다는 내 소원이 담겨 있지요. 그것이 바로 쓸데없는 바람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기도를 잘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도 주께서 냉동처리 하시면 우리는 딱딱한 막대기가 되어서 입이 얼어붙어 말이 안 나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주여, 어떻게 기도합니까?” 라고 하지만, 주님 듣기는 얼어붙은 입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해요. 그래서 그냥 무시해 버립니다.
제가 쓴 글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자기를 저주하지 아니하면 남을 저주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요한복음 12장에 나와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25절)”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남을 사랑한다면 ‘나는 나를 저주한다.’고 해야 돼요. 내가 나를 저주하면서 남에게 다가가야 그게 진정 남을 사랑하는 거예요. 왜냐? 예수님 앞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나서야 되거든요. 그러면 왜 부인해야 됩니까? 우리는 짐승이거든요.
자아를 제대로 알 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해야 된단 말이지요. 그러면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아버지 원대로 하라고 했지? 그러면 각오해!”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갔잖아요.
문제는 냉동 처리된 것이 자꾸 냉동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자꾸 풀려서 “그런데 하나님. 내 뜻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했으면, 아버지도 뭔가 제 욕구도 조금은 들어주셔야 제가 기도한 보람이 있지요.” 그러면 주님은 “너, 지금 나랑 장난 치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제가 내린 정답은 이것입니다. 기도 어떻게 합니까? 자기 원함을 다 알아야 돼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짐승의 세계에서 남을 의식해서 남에게 인정받는 것.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거예요. “봐라. 나 여기 있다. 잘났지? 내가 너희들보다는 낫잖아.” 이것을 원하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주여,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마시고 말씀이 원하는 대로 하옵소서.’ 하고 자신을 냉동 처리해서 주님 앞에 던져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택하신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했는데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뭐냐? 그것이 11절부터 나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여기에 보면, 문장이 둘로 나눠지지요? 앞에는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라고 했지요. 앞부분은 없다고 여기고 뒷부분만 생각하면, ‘주와 함께 살 것이요.’만 남습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하나님 말씀은 너무나 믿음직해서(미쁘다) 주와 함께하면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이잖아요.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예요. 끝이 ‘살 것’이면 앞에 어떤 스토리가 있더라도 상관없어요. 만약 한국과 일본이 야구를 하는데 1회에 10대 0으로 졌다. 2회에 또 5점 잃어서 15대 0. 3회에 또 5점 줘서 20대 0. 이 게임은 골드게임이 없는 경기입니다. 4회에 3점 또 줬다. 23대 0. 속 타지요. 그런데 마지막 9회 말에 가니까 35대 36으로 이겼습니다. 이렇게 이긴다면 앞에 몇 점을 내 줘도 관계없어요. 마지막에 ‘살 것이요’라고 하면, 앞의 이야기는 재밌어요. 우리 인생 재미있게 삽시다.
‘믿으라. 마지막은 산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앞에 뭐가 있는가 하면, ‘주와 함께 죽으면’이 있는데, ‘죽으면’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짐승이니까 짐승은 죽어야 돼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은 죽어야 마땅하잖아요. 이런 인간이 주와 함께 죽으면 마지막은 주와 함께 삽니다. 그러면 됐잖아요. 악센트가 뒤에 있어요.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이 말은, 우리는 안 믿더라도 주님의 시나리오는 이미 결정 났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마지막에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은 주님의 결정입니다.
아무리 드라마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주인공이 위기에 처해도 주인공은 나중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잘 사는 것으로 끝나잖아요. 주인공이 죽는 영화는 거의 없어요. 대부분 악인이 다 죽어요. 주인공을 괴롭힌 자들은 다 죽고, 망가지지만 결국 주인공은 살듯이, 지금 이 땅의 주인공은 택하신 자가 주인공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아는 택하신 자.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주님께서는 주인공 삼아서 반드시 살려내는 시나리오를 이미 짜 놓았어요. 마지막 장면은 ‘택하신 자는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며 결정 났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어떤 외부의 압력이 있어도 절대 안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직하기 때문에 외압에 굴하지 않습니다.
뭘 걱정하십니까? 인생이 괴롭다고요. 짐승 같은 인간 자기 욕망 때문에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자신이 남 의식해서 힘든 것을 어쩝니까? 남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욕망 때문에, 자기 생존욕구 때문에,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 힘든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하지만 마지막은 ‘택하신 자는 살 것이요’로 끝이 납니다.
택하신 자를 위해서 사도바울은 감옥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의 군사로서 복무를 다 하겠다는 것입니다. 2장 4절에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라고 했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끝을 아는 자는 자기 생활에 대해서 미리 염려하지 않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군사가 되었다는 말은, 이미 결정 난 게임에 승리하는 자로 출전하는 것이 본인에게는 영광스럽지요. ‘너 잘 하면 승리한다.’ 이것이 아니잖아요. 주님께서 이미 결론을 다 지어놓은 그런 게임에 선수로 선발되어 뛰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니 자기 생활에 연연할 필요가 없지요.
여기에서 ‘자기 생활’이란, 자신의 목적과 유익을 위한 삶을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 두면 그 다음부터 걱정, 근심이 늘어집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순간 아까 말한 다섯 가지 욕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 잡아먹어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자기는 복음의 결론에 미쳐 있는데 언제 남 의식해서 남들 따라가겠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말씀이 활성화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들은 남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번 강의의 주제는 뭐냐? ‘남을 의식할 필요 없다.’ ‘남을 의식하지 말자’가 아닙니다. 믿음직한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12절을 봅시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나는 그런 예수 같으면 안 믿는다.’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너는 원래 택한 자가 아니었어.”라는 결론을 내린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을 부인하고 싶어서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가 아니면 반드시 주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못 믿을 내용만 제기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것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복음이 악취와 향수로 느껴집니다. 신자들은 ‘아, 냄새 너무 좋다.’ 이렇게 되고, 불신자에게는 ‘나한테 그런 악취 풍기지 마라.’ 이렇게 나옵니다. 똑같은 내용인데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라는 결론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취고,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잊게 하는 향기로 넘쳐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런 향기가 솔솔 풍겨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악취가 난다고 괴로워하든 말든.
그 다음 14절을 봅시다.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이것은 결정적인 내용입니다. 윗선에서 결정된 사항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여기서 측정이 불가합니다.
마태복음 7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3절에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절에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뭐가 어려운가 하면, 이미 결정된 사항을 ‘이것은 결정된 사항이다.’라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이 뭔가를 믿는다면 믿을 만해서 믿고 받아들입니다. 맞선을 볼 때 중매쟁이는 이야기하지요. “그 남자 너무 좋다. 딴소리 하지 말고 그냥 결혼 하자고 해라.” 그 소리 듣고 만났는데 내가 생각한 타입과는 전혀 달라요. 그래서 “나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믿어라”고 해요. 이게 믿어서 될 문제입니까? 내가 싫은데.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미 윗선에서 어른들이 다 결정했다고 하는데, 살림은 내가 사는 것이지 어른들이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미 결정된 사항이 내 속에 들어오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내 판단과 평가가 성령을 통해서 묵사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 작용을 말씀이 하는 겁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데, 제가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복음의 비밀은 마지막에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바리새인들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했는데 이것은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걸 지킬 때는, 여기 어떤 내용이 나오면 그 내용과 보편적이고 서로 통하는 같은 성질의 것이 내 안에 있을 경우에만 우리가 친밀감을 느끼고 뭔가 소통이 되어서 저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데, 만약 복음의 비밀이 나에게 없으면 아무리 믿고 싶어도 이해가 안 돼서 믿지를 못합니다.
아까 맞선보는 이야기 했지만, 남자와 여자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을 때는 주위에서 말려도 결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짐승 같은 인간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은 자아실현의 욕구 밖에 없어요. 생존의 욕구부터 해서 ‘나는 나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 이것이 우리 주특기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욕구를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데, 여기에 어떻게 성경 말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런 말씀이 들어옵니까? 들어올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뭐냐? 거짓말하기를 ‘하나님 말씀을 내가 지키게 되면 평소에 있던 나의 욕구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다.’라는 기대를 해요. 바리새인들이.
바리새인들의 구원이 뭐냐 하면,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너는 말씀을 안 지켜서 지옥 가지만 나는 말씀을 지켜서 천당 간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창녀와 세리 이런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어요. 고상한 자신과 수준 낮은 자들과 차별화를 시도했어요.
이 바리새인들은 성경 내용과 같아서가 아니라 그 내용은 참고로 하고 자기 속에서 지킬만한 것을 끄집어내서 같다고 여기고 그것을 잡아당겨서 자아실현을 이루려 한 거예요. 요즘 한국교회가 다 이런 식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달란트 비유지요.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복 받고, 안 남긴 사람은 저주 받았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서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 라는 식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해요. 정 반대의 해석이지요.
‘열심히 봉사하면 복 준다.’ 전부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요. 모든 목사들과 모든 교인들이 한 통속이 되어서 성경 해석을 그렇게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그저 주십니다.’라는 말을 목사 입에서 할 수가 없어요. 왜냐? 그렇게 말하면 교인들이 헌금도 안 하고 봉사도 안 하고 교회 나오지도 않고 엉망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당신 말대로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 받는다며?” 라고 하면서 교회 안 나오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뭐가 되겠어요? 이렇게 되면 목사가 먹고 살기 힘들어요.
목사나 교인이나 전부 짐승 같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들은 나를 이용해서 밥벌이 했으니까 내가 가만 두지 않겠다.’ 지금 이런 말씀 들려줘도 사람들은 듣지도 않습니다.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 생존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지요.
따라서 사람이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화평교회 교인 수가 많다고 봐요. 기적을 받은 사람이 정말 이렇게 많은 것인지? 물론 우리교회는 안 믿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오는 기적은 기적이 아니거든요. 가끔 와야 돼요.
나는 내 나름대로의 목적이 따로 있는데, 나 같은 인간이 예수님을 믿는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말이 짐승 같은 우리의 입에서 나온다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성령은 우리 허락도 없이 그냥 들어옵니다. 초인종을 울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은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지킬 필요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안방을 차지하고 들어옵니다. 누가? 말씀이.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지?’ 하는데 “먹는 것, 입는 것 걱정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 너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것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것, 이것은 우리 속성이 아니고 우리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둘째 시간의 주제가 뭐냐? 소유문제입니다. 자아실현의 욕구를 이기는 방법은, ‘나는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이렇게 나가면 다 해결돼요. ‘나는 주의 것이다.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알아서 나를 활용하시고 사용하신다.’ 소유권이 나에게서 예수님께로 이전됐습니다.
그렇다면 소급해서, 태어날 때, 10살 때, 20살 때, 30살 때 일어난 모든 것도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약속이 일방적으로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그쪽으로 몰아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네 인생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소유권이 주님께 넘어갔는데, 내가 회개한다고 돈을 더 벌게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기도 안한다고 해서 망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망하든 안 망하든 이미 소유권이 주께 넘어갔는데 우리가 왜 쓸데없는 논쟁을 하느냔 것이지요.
우리의 판단은 인정하지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우리 속에서 말씀이 스스로 작용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택하신 자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2:9).”는 뜻입니다.
그 다음 18절을 봅시다.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여기 ‘진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진리에 대해서 관심 있습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했어요. 이 말을 이렇게 고쳐봅시다. ‘길은 나요, 진리도 나요, 생명도 나다.’ 즉 ‘길이 예수님이고, 진리도 예수님이고, 생명도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면, ‘우리는 길이 아니요, 진리도 아니며, 생명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해요? 길이고 진리시고 생명이신 분을 믿어야지요. 왜? 나는 길도 진리도 생명도 아니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17절에 나오는 이 후메내오와 빌레도 이런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내가 ‘내 판단은 진리다.’라고 여기는 순간부터 예수님은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간단하지요?
목회경력이 오랜 목사에게 “당신은 복음에 관심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솔직히 나는 복음에 관심 없습니다. 나는 교회에 관심 있지 복음, 진리에는 관심 없습니다.” 라고 할 때, 그러면 누가 진리라는 것입니까? 목사 본인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무슨 소리 할 때, 복음을 아는 교인이 “목사님, 그렇게 하면 진리가 아니잖아요?”라고 하면, 목사는 “내가 진린데.” 라고 해요. “이 교회에서는 내가 법입니다.” 그러면 이 목사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인가요, 처음 신학교 입학할 때부터 그랬을까요? 처음부터 그랬는데 본인이 안 믿는 것을 그 때는 몰랐지요. 그런데 목회 하면서 ‘정말 내가 불신자고,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관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교회는 자기 생활 터전이거든요. 여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목사는 뭐냐? 성경 말씀 이용해서 돈벌이 하는 직업이었지요. 이 사람은 처음부터 돈 벌어서 잘 살려는 자신에게 관심 있었지, 길과 진리와 생명에는 관심 없이 신학교에 간 거예요. 즉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것이 나에게 돈이 되기 때문에 신학교에 간 거예요. 이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결국 자기의 불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요.
진짜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