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9. 2. 27) 2강 녹취
광주 강의(09. 2. 27) 2강 녹취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9. 2. 27) 46-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8절을 봅시다.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여기에 ‘다윗의 씨’가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죽어서 천국 가고 싶습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믿고 천국 간다. 자연스럽지요? 문제 있습니까?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내가 가고 싶은 데를 내가 가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신이 계시니까 신에게 지금 내가 아부를 하고 뇌물을 바치고 신에게 미움 받지 않고 해서 신으로부터 착하다는 소리 듣고 천국 가는 것. 여기에 아무 어려운 것 없잖아요. 너무 우리의 품에서 딱 맞지요.
그런데 갑자기 ‘다윗의 씨’가 등장합니다. 이것이 왜 등장합니까? 골치 아프게. 이 다윗이 누구의 민족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우리 단군의 자손에게는 다윗이 없지요. 내가 가고 싶은 천국에 신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교회 나가서 신을 섬기기 위해서 나갔는데 왜 엉뚱한 이스라엘 족속의 다윗이란 인물이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씨’ 또는 ‘다윗’을 알아야 구원 받습니까? 답변해 보세요. 내가 다윗의 씨를 통해서 구원 받는다면 노선이 어떻게 됩니까? 좀 전에 한 노선은,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 구원 받기 원한다는 이 노선이 있습니다. 이것을 B노선이라 합시다. 그리고 성경을 보니까 중간에 ‘다윗의 씨’가 나오니까 다윗의 씨를 A노선으로 보고.
A노선으로 인하여 B노선이 가짜인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B노선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나에게서 나왔지요. 나에게서 나왔으니까 이것은 그분의 것이 아니기에 그분에 의해 부정당해야 돼지요. 그러면 다윗의 씨가 누구를 공격하는가? 구원 받겠다는 나를 공격하는 역할을 합니다. 구원 받겠다는 나를 공격하는 다윗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이 기존 노선(B노선)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셔야 됩니다. 그리고 다윗의 씨(A노선)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고, 나의 노선을 사수하면서 ‘여기는 절대 손대지 마라. 이 노선은 건전하고 하자가 없다. 나는 이 노선으로 천국 갈 거야.’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그러나 B노선은 거부당합니다. 왜? A노선은 천국에서 내려왔고 B노선은 나에게서 나왔습니다. 나는 내 동생 내 부모는 아닙니다. 왜냐고요? 내 동생 노선이 또 따로 있어요. 내 부모 노선도 따로 있어요. “얘야, 나는 교회 안 가도 착하게 살았으니까 천국 갈 거야.” 이건 무슨 노선입니까? 연세 많은 할머니 노선입니다. 아까 말했지요. 100명이면 전부 자기가 투영한, 나를 위한, 내가 가능한 노선을 만듭니다.
자기가 불가능한 노선을 만들 리 있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시험을 치면서 “얘들아, 이번 시험 문제는 너희들이 내라.” 이렇게 했다면, 어느 바보 같은 학생이 자기가 모르는 문제를 출제하겠습니까? 자기가 풀 수 있는 문제를 내지요. 1번) 3 +5 = 8. 2번)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름은? 이승만. 이렇게 전부 자기가 아는 문제를 낼 것 아닙니까. 이게 오늘날 교인들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안 듣고, 전부 자기가 문제를 출제해서 ‘하나님 저 합격 맞지요?’ 이렇게 나옵니다. 자기 기분에 도취했다가 예배 마치고는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은혜를 받은 것인지 자기 기분에 도취한 것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래서 종교라는 것은 남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종교를 자기가 만듭니다. 자기 개척이고 자기 모험이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개발하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이 이렇게 엉터리입니다.
자,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하면, 왜 하나님 쪽에서 내려오는 노선은 그냥 “너, 올라오너라.”라고 하면 쉬운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다윗의 씨’를 말합니까? 다윗의 씨가 아니면 구원 못 받습니다.
[스타 워즈]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오래 된 영화라서 기억이 희미한데 그 중에 기억되는 것이 있습니다. 큰 골짜기가 있고 낭떠러지가 있어요. 그런데 적들이 쳐들어와요. 계속 도망치다가 낭떠러지 가까이 왔는데, 갑자기 다리가 나와서 건너편 계곡으로 무사히 건너갑니다.
이처럼 천국에서 혀처럼 내미는 이 발판이 ‘다윗의 씨’입니다. 다윗의 씨라고 하면 다윗이 나은 자식이 다윗의 씨가 되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그것이 아니고 씨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다윗이 태어나게 한 거예요.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고 해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지만 예수님을 낳게 된다는 예언은 마리마보다 훨씬 앞에 있지요.
천국에서 오는 이 발판은 시간을 거꾸로 간다는 것입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만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고, ‘다윗의 씨’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회수하기’입니다. 창세전에 예언된 자를 회수하는 거예요.
코카콜라 한 병 회수하면 얼마 줍니까? 우유병이나 맥주병을 회수하지요. 요즘은 회수하는지 모르겠는데 옛날에는 제조 회사에서 회수했습니다. 이처럼 창세전에 하나님이 만든 사람을 누가 회수합니까? 창세전에 만드신 하나님이 회수하잖아요. 그래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회수하는 그 다리 위에 우리가 회수당해서 가는 겁니다.
중남미 지방에 가면 개미핥기가 있어요. 입에서 긴 혀가 나와서 개미를 빨아먹지요. 이처럼 긴 양탄자 같은 것이 와서 자기 백성을 감아서 자기 속에 쏙 집어넣는 그런 방식의 능력이 다윗의 씨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과연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봐야겠지요? ‘다윗의 씨’에서 ‘다윗’과 ‘씨’를 봅시다. 제 말이 맞다면 다윗이 씨를 낳지만 사실은 씨가 되시는 분이 누구를 회수해야 돼요? 다윗을 회수해야 되지요. 죽은 다윗을 천국으로 회수하는 이 작업을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면 우리도 누구처럼 회수된다? 다윗처럼 회수된다. 이것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치게 된 이유입니다. 소경들이 예수님을 향해 외쳤잖아요.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라고.
다윗을 구원하듯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또는 다윗 이전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도 회수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 58절에 나오지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그러면 이 세상의 시간은 뭡니까?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지만 천국의 내미는 발판(다리)의 시간은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양쪽 다, 예수님이 종착점이고 나머지 양쪽 다 회수하는 시간들, 자기 백성을 건져 올리는 그 시간들로 차 있는 거예요. 신기하죠?
이것을 문장으로 표시하면 이렇게 됩니다. ‘종말의 의미가 모든 역사 속에 선취되어 있다.’ ‘선취’라는 것은 미리 취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유명한 철학자 하이데거에서 나옵니다. 하이데거 이전에도 있습니다만 이것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하이데거이고, 이것을 신학자 불트만이 인용했고 그 후배들이 쭉 이용했습니다.
종말의 의미가 모든 의미를 선취했다. 그러면 모든 의미(우리의 존재 의미도 포함해서)는 어디에 가야 밝혀집니까? 마지막 때가 되면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를 알 수 있죠. 그러면 지금은 우리가 모른다는 뜻입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상에서의 마지막 때는 2009년 이후를 마지막 때라고 하지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천국에서 내미는 그 혓바닥에서의 마지막 때는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이 지점, 이 상황이 마지막이에요. 그러니까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 개념이 아무 쓸모없음을 알려주는 그런 사건입니다.
자,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갈려면, 이 현재는 뭐가 뭉쳐서 현재가 됩니까? 과거가 쌓여서 현재가 되고 현재가 쌓여서 미래가 되잖아요. 그런데 바로(수직으로) 올라가면 쌓인 것이 아무 쓸모가 없지요. 인간의 시간 개념은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오지만 천국의 시간 개념은 원인이 소용없어요. 결과가 먼저 있고 결과에 합당한 원인을 나중에 만들어내면 되지요.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되고 ‘나는 왜 구원 받게 되었습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내가 비록 6학년 담임을 맡았지만 왜 구원 되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지요. ‘내가 연구 부장을 맡았는데 왜 구원 되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지요. 그럴 때 주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다윗의 씨 때문이다.”라고 하시지요.
그러니까 ‘다윗의 씨’는 다윗의 씨 안에 다윗의 씨 되시는 분, 예수님 안에는 뭣까지 용납되어야 합니까? 내가 뭔가 노동해서 그 결과로 업적을 이룬다는 이런 과거, 현재, 미래의 지상적인 시간 개념을 찢어버리고, 이것을 대신해서 뭔가 채워주는 요소가 다윗의 씨 속에 한 아름 있어서 이것을 우리에게 준단 말이지요.
조금 더 깊이 해 봅시다.
나의 존재 의미는 어디에서 찾습니까? 종말에서 찾는다. 종말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래입니까? 미래에 있는 종말은 없어요. 이것은 우리의 시간 개념이고, ‘다윗의 씨’를 보면 미래라는 것은 지금 현재와 같이 겹쳐 있어요. 이것을 들뢰즈는 ‘영원한 현재’라고 했는데, 이런 스토아적인 개념이 여기에는 해당 안 됩니다.
들뢰즈는 ‘영원한 현재’라고 하고, 베르그송은 ‘지속’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것들은 여기에 해당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 자체가 예수님에게서는 소용없는 의미입니다. 아무 소용없는 외침이고, 전도서의 표현을 빌리면 ‘헛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윗의 씨’에서 어떻게 이런 혜택이 주어지는가? ‘다윗의 씨’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서 구원합니다.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이것은 다양성이죠. 다양성이 있지만, 각자는 또 하나의 자기만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그 독자성에서 의지가 나오고 의지에서 원인과 결과의 상관성. ‘내가 이렇게 해야만 이런 결과가 주어진다. 내가 공부 안하는데 서울대학교 입학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모르죠. 내가 공부하도록 누가 은혜를 주셨는지는 안 따져요. 뭘 해도 내가 원인이 되어서 결과가 주어지고, 그 결과는 내가 따 먹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모든 인간의 의미는 반드시 내가 들어가요. 출판사 앞에 꽃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무심코 봤지요. 어느 날 보니까 자기 책상위에 꽃이 있어요. 그럴 때 뭐라고 합니까? 김춘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불러줬어요? 내가 불렀으니까 그 꽃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인간의 독자성이고, 인간이 독자성이 될 때 자유의지를 발휘할 보람이 있고, 그 보람 때문에 노동을 하고, 그 노동의 대가는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구원이란 내가 노력해서 구원 얻는 거예요. 내가 공부해서 남에게 주지는 않겠다는 것이지요. 내가 일한 것은 내가 얻겠다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기도해서 남이 은혜 받는 법은 없잖아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요? 거짓말입니다. ‘다윗의 씨’가 와버리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되지요.
나는 나에게 의미되는 쪽으로만 움직입니다. 이것은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요. 그렇게 평생 사는 것을 ‘다윗의 씨’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죄라고 합니다. 왜? 모든 공로에는 ‘다윗의 씨’가 작용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사회주의 국가에 비취는 햇볕과 민주주의 국가에 비취는 햇볕에 다를까요? 같지요. 태백시에 내리는 빗방울에는 독성이 있고 서울에 내리는 비는 설탕이 섞여 있습니까? 선인과 악인 구분 없이 똑같이 비가 내리지요.
중소기업에 자금 지원할 때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대통령이 정부 자금을 지원해 주잖아요. 줬는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셨다고 아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것이 재미있어요.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볕과 공기를 줬는데 이것이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골고루 주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누구냔 말이죠.
이 문제가 말은 쉬운데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그 다음 구절이 어렵습니다. 18절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17절과 18절이 서로 모순된다는 생각 안 듭니까? 17절에서는 아들이 오신 것은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했지요. 그러면 심판 자체가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에요. 심판을 받지 않게 왔는데, 심판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구원을 주러 왔다는 말을 안 믿는 쪽은 심판 받는다는 말이에요.
그 다음 19절을 봅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의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이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악을 행하는 사람은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빛이 온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아니까 미워하잖아요.
누군가가 밉다고 하는 것은 그의 정체를 알기 때문에 밉잖아요.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심판하러 온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심판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앞 구절과 뒤의 말씀이 서로 안 맞잖아요?
‘내가 온 것은 심판하려 함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할 때 사람들은 안심을 했지요. ‘아, 심판은 없구나.’ 하고 안심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너는 모르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거야.’ 라고 할 때, 뒤늦게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이런 반칙이 있나? 하나님이 우리를 갖고 노는 거야 뭐야? 아니 심판은 없다면서. 심판이 없다고 해놓고 심판하는 것을 안 믿는다고 해서 왜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 거야?’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그들이 빛을 알아요, 몰라요? 알지요. 아니까 미워하는 것 아닙니까. 21절에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그런데 빛을 아는 사람은 그 빛을 아는 것이 어디에서 왔다고 합니까? “빛으로 오나니” 즉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서 알게 되고, 그래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빛을 알면서도 이 빛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빛을 아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고 무조건 빛은 싫고 어둠을 좋아합니다. 왜? 내 행위를 내가 부정하기 싫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본문 말씀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21절은 결국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는 소통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 아는 것을 하나님 행위로 보지 않고 자기 행위로 봐요. 내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내가 구원 받았다는 이 주장을 포기 못해요. 그런데 이 나의 행위 자체를 하나님은 어두움으로 봤어요.
그런데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행위가 쏟아지면, 하나님의 행위가 주어지게 되면 이 하나님의 행위는 나의 행위와 비교되면서 나의 행위는 오직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한 것은 빛의 행위가 나에게 왔기 때문에 비로소 내 행위는 어둠이란 것을 알고, 이런 사람은 심판 받지 않고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왜 강조하는가 하면,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행위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죄인 아니다.” 이러면 이것은 엉터리란 말이죠. 하나님의 빛이 오게 되면 “나는 어둠이다.” 라고 알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왜? 그 사람만이 자기 행위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거든요.
나에게 찾아오신 분에 의해서 나를 회수하듯 가져감으로 구원 받지, 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아는 거예요. 이런 의미를 새기면서 2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그렇다면 그 사람이 6학년 담임 맡은 것은 누가 시킨 것입니까?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이만큼 산 것도 누구의 은혜입니까? 하나님. 어제 밤에 비가 왔는데 누가 내렸지요? 하나님. 아까 마태복음 5장 45절 그대로 아닙니까.
그러면 불신자는 절대로 거기에 대해서 의미를 안 두지요. 왜? 내가 한 것이 아니거든요. 내가 독서실에서 공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독서실에서 공부해서 비가 온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비 온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왜?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행위 안에서 살아가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이란 없다.’ 왜? 인간을 분해해보면 뭐가 들어 있는가? 나의 행위. 나의 노동. 이것이 뭉쳐진 것이 인간이다. 나의 행위 중에서 현재 나에게 의미 있는 것만 기억해서 그것을 ‘나’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남에게 나쁜 짓 한 것은 잊어버려요. “너, 왜 돈 5만원 안 갚는데?” “내가 언제 빌렸는데?” “한 달 전에 빌려갔잖아?” “언제?”
돈 빌려준 사람은 돈 빌려줬는데 안 갚고 있는 친구에 대한 기억이 심겨지지요. ‘저 친구는 돈 빌려놓고 안 갚는 치사한 놈이다.’ 라는 것이 기억되지요. 그래서 추궁을 합니다. 그러면 그 친구는 “아, 그 때 그 돈? 아, 그 때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잊어버렸다. 진작 이야기하지.”
그러면 내 행위 속에 뭐가 포함됩니까? 내가 남의 돈 떼먹었다는 나쁜 행위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남의 돈 떼먹은 것을 기억해 내서 갚은 그 정도로 착한 자다.’ 라는 자아가 추가로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칸트는 “반성함으로 인간은 절대 선에 가까워진다.”고 했어요.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나쁜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와 섭리를 전부 자기가 한 것으로 다 바꿔서 영광을 나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복음 안지 오래된 교인들이 권태기가 오면, “목사님, 나는 복음 압니다. 그런데 왜 꼭 교회 가야 되는데요? 요즘은 바빠서 교회 못합니다.” 이렇게 나와요. 그 때 얘기해 주세요. “당신은 누구 영광을 위해서 삽니까? 예수 믿는 것은 누구 영광 때문입니까?” 그러면 솔직하게 ‘내 영광’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이거든요.
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뭡니까? 돈을 벌든지 뭘 하든지 누구영광?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된다고요. 은혜는 누가 줬습니까? 은혜는 ‘다윗의 씨’가 줬는데, 그 공로를 나에게 돌리니 이게 바로 어둠에 속한 자의 모습이고, 지옥가야 마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탈피할 수가 없어요.
이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디모데후서 2장 3절을 봅시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다윗의 씨’가 뭐라고 했습니까? 숫자로 ‘하나’입니다. 무조건 하나입니다. 이것은 다수를 부정합니다. 각자를 부정해요. 오직 하나로 모아서 구원합니다. 이것을 제가 [스타 워즈]에 나오는 장면을 예로 들었는데, 주인공이 낭떠러지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발판이 나와서 건너게 했다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나온 발판에 실어서 회수 당하듯이 구원 되는 겁니다. 이 발판은 누구의 행위입니까? 하나님의 행위죠. 그래서 위에서는 은혜가 내려오고 아래서는 감사가 올라가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감사하지요.
이 경우에 발판에 실린 사람이 100명이라고 해도 각자 자기 자랑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지요. 오직 다윗의 자손 하나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그런데 3절에서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고난이 뭔가를 알아야 되는데 이 본문에서 찾으려고 하면 어려우니까 히브리서 11장을 보겠습니다.
23~26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계속해서 12장 1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여기에서 ‘허다한 증인’이 나오고, 11장 24절에는, 모세가 재벌 2세 됨을 거절하고 백성과 고난 받기를 좋아했단 말이지요.
자, 질문 던집니다. 고난 받을 때 이 고난의 의미가 어디에서 옵니까? 종말이 되어야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 보니까 모세는 고난으로 보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남들 보기에 건너편에 닭 쫓던 개가 될 경우에 이 사람들은 고난을 받죠. 왜냐하면, 자기 살던 동네에서 떠나니까. 이쪽 사는 동네는 지옥이고 인간 세상이죠.
인간 세상에서 천국 가는 다리는 없잖아요. 인간 세상에서 볼 때 이것은 떨어졌으니까 고난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세상은 히브리서 11장으로 보면 애굽이죠. 애굽 나라에서 모세는 소위 권력층의 자식이죠. 소위 재벌 2세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떠나니까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이란 말은 고생이란 말과는 다릅니다.
고난은 팔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넓은 길로 가지 말라고 했어요. 좁은 길로 가야 됩니다. 좁은 길이 어떤 길이냐 하면 찾는 사람이 심히 적어요. 어디로부터 격리, 뭔가 끊어지는 것,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쪽에서 봐서는 고난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상 받으니까 영광스럽지요.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에게 상 많이 주잖아요. “오신(오 목사님 장녀)은 무슨 상 받았습니까?” “공로상이요.” 졸업식장에서 “공로상, 3학년 몇 반 오신”이라고 호명할 때, 슬퍼서 웁니까? 다른 사람들,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데, 앉은 자리에서 단상으로 올라갈 때 현재는 비록 상장은 없지만 상이 기다리고 있지요. 이쪽에서 상은 못 받았지만 방향(지향점)이 상 받으려고 가잖아요.
그런데 옆에 있는 친구가 ‘아이고, 너는 고난 받는구나.’ 이런단 말이지요. 왜? 자기는 공로상이 안 보이니까, 그냥 우리하고 떨어지니까 고생길로 간다고 여기지만 모세는 세상 나라의 모든 보화보다 뭘 받기를 원한다? 공로상. 하나님이 주신 공로상 받기를 원하지요. 물론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공로지만.
예수님의 의미 있는 발판에 올라서서 상을 주기 위해서 움직이는 강단에 올라가는 겁니다. 여기에서 먼저 상 받은 사람이 있죠. 이 사람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증인들 가운데 에녹, 노아, 아브라함 쭉 나오지요.
모세도 상 받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선배, 허다한 증인들이 먼저 받고, 자기는 그 뒤를 따라 상 받기 위해서 가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고난으로 보인단 말이지요. 이제 고난의 의미를 알겠습니까? 세상과 결별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고방식과 결별되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출세하고, 재벌 2세 되고 이런 것을 하나의 이상으로 봤는데, 이것은 나의 받을 영원한 상이 아닙니다.
고난과 상은 로마서 8장 18절에 보면 ‘지금 당한 이별의 아픔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어요. 전에 이런 말을 했어요. 남편과 아내는 부부가 되었으니까 헤어지지 말라고 하는데, 성경에는 헤어지지 말라는 말은 없고, 아내와 남편은 아무리 같이 살아도 한 몸이 될 수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마태복음에 나오지요. 두 사람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남이라니까. 남들끼리 살아가는 거예요. 남들끼리 살면서 하나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데려가는 마차가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마음대로 탈 수가 없어요. 타고 싶지도 않고.
어둠에 속한 사람은 내 행위로 구원 받지 못하는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아요. 나는 내 행위로 구원 받겠다고 나오기 때문에 그쪽은 남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믿게 하셔서 주님이 준비하신 수레가 와서, 엘리야가 수레 타고 올라가듯이, 하늘에서 내려온 수레가 믿음이잖아요. 믿음이란 수레를 타고 올라가니까, 올라 탄 사람은 내 행위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피 때문에 나의 허물을 간과하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이해가 안 돼요. 이 안에서는 내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한 여자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그 한 마디에 그 여자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심판주의 마음대로입니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으면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너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힘이 있는 거예요. 목사나 신부가 죄 없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이 “너는 죄 없어.”라고 하시면 끝나는 거예요. 왜냐? 그분이 심판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축구 할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가 경기를 하는데 선수들끼리 “왜, 밀어?” “어, 치네?” “너 죽을래?” “넌 퇴장감이야!” 백날 싸워도, 심판이 와서 “너, 퇴장!”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심판되시는 분이 미리 오셔서 “너는 심판받지 않고 구원 되었어!” 라고 선언했으면 그것으로 끝이고, 그 흔적이 우리한테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라는 흔적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나의 흔적이 아닙니다. 예수의 흔적입니다. 그렇다고 십자가 문신 세기지 마세요.
내 마음속에 내가 원치 않는 낯선, 우발적인 어떤 흔적이 새겨져 있어요.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십자가 아니면 희망이 없다. 이것이 바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2:3).”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발적이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남들처럼 나만 생각하고, 나의 장래만 생각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주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렸다는 것이 나를 살리기 위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구원 받는 것은 주님께 달렸음을 남들에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3. 26. 10:0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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