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0313-(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2강자유게시판에베소서

20090313-(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2강

이름 : 오용익(IP:211.194.56.75)

에베소서 제 32강 (이 근호목사, 2009년 3월 13일-(2), 서울의존교회)

자, 여기 앞에 있는 그림을 보면 1+1=1 이라고 되어 있어요. 성경에서 ‘남자+여자 = 하나’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성경에서 이렇게 해놓고 사람들이 '야, 그거 어렵다' 하니까,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비밀이 크도다’ 라고 하고 있어요. 비밀이 크니까 큰 비밀, 1+1=1. 그런데 세상에서는 뭐냐 하면 ‘남자+여자= 우리 가정에 2명’ 이게 보통인데 이런 가정은 성립이 안 되고 1+1=1가 될 때에만 그것이 가정이에요.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남자+여자=2가 되니까 이것은 타락후,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뒤에 남자도 ‘나는 나다’ 여자도 ‘나는 나다’ 하니까 ‘나’가 몇 명의 ‘나’가 돼요? 두 명의 ‘나’가 되니까 두 명의 나가 우선하는 이 가정은 처음에 하나님이 만든 그 가정이 아닙니다. 얼마나 행복하냐, 그런 것은 문제 안돼요. 하나님께서는 원래 가정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가정으로 인정해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제 말을 너무 섭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느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언젠가 강의할 때 그런 소리 했어요. ‘서로 사랑하라’ 하는데 서로 사랑하지 말고 그냥 서로 친하게 지내라고 했어요. 울산에서 그런 소리 하니까 울산에 있는 그 부부집사님들이 그 울산강의를 일년 넘게 해도 내내 어둡게 있는 듯 했는데 그 한마디에 온 가정들에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는 거예요.

그동안 되지도 않는 사랑 한다고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겠습니까? 사랑하지 말고 그냥 친하게 지내면 돼요. 친하게 지내면 될 것을 가지고 그것을 사랑하려고 하니까, 사랑 되지도 않는 것을 사랑하려 하니까 위선자로 변하고, 또 기대를 하니까 사랑 안한다고 삐지고 아이고, 가정 꼴이 엉망이 되지요. 여기 사랑이라는 말을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나+나=2명, 이미 주인이 두 명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이 자체가 가정 파괴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어떻게 1+1=1이 되는가? ‘이 비밀이 큰 비밀’이라고 했는데 여러분, ‘그것을 알고 싶다!’ ‘그것을 알려주마!’ 그것을 알려줄게요. 이렇습니다. 여기 보이지 않는 주님을 요 밑에 쑥 집어넣어요.

자, 남자 쪽에서 여자를 볼 때에 여자만 보이는 줄 알았더니만 중간에 예수님이 싹 올라오면 이 남자 눈에 여자와 함께 있는 누가 보이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있는 여자가 보이겠지요. 남자 눈에. 그렇지요? 주님이 빠져버리면 여자만 보이는데, 그래서 ‘당신은 내 여자’ 이렇게 되는데 여기에 주님이 싸악, 올라와버리면 ‘주님과 함께 있는 여자’ 가 되겠지요.

그러면 남자가 여자에게 명령하기를 ‘밥 도’, 경상도 말로 ‘밥도’(밥 차려줘), ‘아는?’ ‘자자’ 이 세 마디 밖에 안한다잖아요. ‘밥 도’ 하는데 주님이 싸악, 올라와버리면 지금 건방지게 누구보고 밥 차려달라고 합니까? ‘아이고 주님이십니까? 제가 밥 차려 드릴게요.’

여자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여자 앞에 주님이 있으니까, 옛날에 자기 눈에 보였던 여자로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먼저 대하게 되기 때문에 ‘아이고 주님, 혹시 배고프지 않습니까? 제가 스파게티 하나는 잘하는데 스파게티좀 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만약에 남자가 기독교신자고 여자가 불신자 같으면 여자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인간이 갑자기 미쳤나? 완전히 돌았나? 그동안 안하던 짓을 또 하고 있네’ 라고 할 겁니다. ‘여보, 내가 밥 차려줄게.’ ‘저게 갑자기 왜 저러지?’ 그런데 여자가 신자 같으면 그리고 불신자 남편 같으면 그 남편을 볼 때에 어떻게 보겠어요. 남편을 볼 때 어떻게 봅니까? 주님을 먼저 보겠지요?

‘주님이여 어떻게 복종하면 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보고 이야기를 하는데 불신 남편은 “저 여자가 왜 또 갑자기 좋게 나가지? 계가 깨졌나? 갑자기 ‘어떻게 복종해야 되겠습니까’ 라니 저게 무슨 말이지. 결혼하고 나서 처음 듣는 말인데 복종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고 왜 저러지?”

둘 다 신자 같으면 어떻게 되는가? 주님이 항상 위에 올라가기 때문에 주님을 거쳐서 남편은 아내를 보고 아내는 주님을 거쳐서 남편을 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예수님 여기 계시고 예수님에게 붙잡힌바 된 아내와 남편이 되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에는 남편이 없다고 했지요? 이 세상에는 아내가 없다고 했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한다? 남편 아닌 자를 남편 되게 하고 아내 아닌 자를 아내 되게 하지요. 그렇죠? 아까 했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께서는 말씀대로 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말씀대로 하게 될 때 주님으로부터 어떤 속성이 나오게 되느냐 하면, 주님이 갖고 있는 속성 중에서 남편의 속성을 누구에게 나눠주느냐 하면, 이 신자 된 자기 남편한데 나눠주게 되고, 여자한테는 아내 된 자가 어떤 자라는 것을 나눠주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가운데 계신 주님을 무슨 주님이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고 제 2의 아담이 되는 겁니다. 지금 저 혼자 흥분했어요, 지금. 여러분, 첫 번째 아담이 뭘 실패했습니까?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중의 뼈’라고 했건만 선악과를 떠먹고 그 다음부터는 뭡니까? ‘저 여자 때문에 내가 곤란을 당했습니다.’ 여자는 ‘저 뱀 때문에 그랬습니다.’

갑자기 뭐가 생겼어요? 둘이 한 몸이 아니고 딴 몸이 되었지요. 둘이 한방에서 잠자고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어도 항상 다른 몸이 되었다니까요. 나중에 결혼해서 둘이 부부싸움 해보세요.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으면서 발을 가지고 상대방 발을 팍팍 찹니다. 저쪽에서 차고. 처음에는 장난삼아 슬슬 차지요. 그러면 여자 쪽에서 ‘이게 어딜 또 시비를’ 하면서 더 세게 차지요.

그러면 이쪽에서 더 세게 차고. 그러면 더 세게 또 맞받아서 차고. 나중에는 둘 다 일어서서 대판 붙는 겁니다. 둘 중에 뭐가 빠졌습니까? 둘 사이에 뭐가 안 보이는 겁니까? 주님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결코 한 몸이 될 수가 없지요. 한 몸이 안 되면 남편은 남편이 아니고 아내는 아내가 아니올시다.

남편과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걸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죄인입니다. 둘 다 죄인이에요. 둘 다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뭘 가지고, 죄인을 가지고 남편 기능을 해 주시면 이 죄인은 남편 일을 할 수 있는 의인이 되고 이 아내는 아내 일을 행하는 의인이 돼요. 그러니까 아내 된 자가 남편 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필요가 없지요.

아, 내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나? 이렇게 합시다. 형은 고등학생, 동생은 초등학생. 형한테 아버지가 숙제를 냅니다. ‘너는 삼각함수를 풀어라.’ 그리고 동생한테도 숙제를 냅니다. ‘너는 구구셈법을 외워라.’ 뭡니까? 숙제를 따로 줬지요. 따로 줬는데 형이 와서 ‘야, 내가 구구셈법을 외울게. 너는 삼각함수를 풀어.’

이렇게 자기 맘대로 바꿀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래서 에베소서 5장의 이 말씀은 뭐냐하면 ‘여자로 태어나고 남편으로 태어나고 아내로 태어난 자여, 주님께서 지정한 아내고 남편이기 때문에 그 자기자리가 내가 만든 자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내자리는 없습니다. 있으면 저주의 자리일뿐이고 죄인의 자리일 뿐이지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없어요.

내 자리는 없고 내 역할만 있지요. 내 역할, 내 자리가 아니고 내 역할만 있죠. 여러분이나 저나 텔레비전을 거의 안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예화를 들기가 좀 힘듭니다만 그냥 드라마에 나오는 예화를 한 번 들어봅시다. 김 서형이라는 여자가 있어요. 신애리역, 이 여자는 뭐냐? 복수에 눈이 먼 여자에요. 장서희 라는 여자가 있어요. 얼굴에 점이 하나 있지요.

이 여자는 남편한테 버림받아서 그 남편의 재산과 그의 모든 것을 망치려고 복수하려 드는 여자입니다. 이 두 복수하는 여자가 있다 합시다. 둘 다 하는 역할이 달라요. 그런데 촬영을 부산의 한 바닷가에서 한다 합시다. 부산에서 ‘아내의 유혹’을 촬영할 때 ‘너는 나쁜 여자주인공, 또 다른 너는 좋은 여자주인공’ 했다 합시다. 그리고 촬영장소를 옮겨서 서울서 촬영한다 합시다.

그러면 부산가면 장서희(구은재역) 있습니까? 없지요. 부산가면 김서형(신애리역) 있습니까? 없지요. 부산에서 촬영했다고 해서 부산의 그 촬영장이 탤런트 자기 자리입니까? 거기에 자기 비석 세워놨어요? 없지요. 지금 제가 여러분을 속이는 겁니까? 아니지요. 지금 그 자리에 없지요. 그냥 뭐만 있어요. 서울 가든, 부산가든, 대전가든, 목포가든 뭐만 있어요?

역할만 있을 뿐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는 결혼한 남자는 남편의 역할만 할 뿐이고 결혼한 여자는 아내의 역할만 할 뿐이지 ‘이 자리가 내 자리다’ 라는 것은 우리한테는 없어요. 없다니까요. 없으면 부담이 안 되지요. ‘그래도 남편의 자리를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할 때 남편의 자리라는 것은 내가 할 것이 아니고 누구 숙제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날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 내가 그렇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아내가 내가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거에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고 우리는 다만 그 차이만 느끼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어놓고, 가만 생각해보니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여보, 내가 너무 심했지?’ 이게 무슨 자리입니까? 이게 뭘 아는 여자에요? 차이를 아는 여자지요. 그리고 남편이 ‘여보, 내가 당신 생일인데 그냥 지나가서 미안해요. 내가 앞으로 당신을 더 사랑해줄게. 내가 그냥 지나쳐서 참 미안 합니다’ 했을 때 이 남자는 무엇을 아는 남자에요?

성경에 나오는 남편과 자기와의 뭘 알아요? 차이를 알지요. 그 차이만 알면 된다니까요. 하, 얼마나 쉬워요? 그것을 쉽게 말해서 ‘내 죄만 알면 된다’입니다. 내가 성경말씀 못 지키는 그 죄만 알면 돼요. 그게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구원받지도 않은 사람은 자기 잘났다, 하지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끼리 예수 믿는 흉내 내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보, 내가 잘못했지.’ 여자가 있다가 ‘내가 더 잘못했어.’ ‘어허이, 내가 더 잘못했다니까.’ ‘허허이, 내가 더 잘못했어.’ 둘이 나중에 싸웁니다. 그것도 자기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에베소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 속성 안에 남편이 할 일과 아내가 할 일을 다 같이 품고 있는데, 이 예수님은 누구의 입장에서 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머리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예수님이 머리되시는 하나님께 한 그것을 누구에게 전해줬느냐 하면 아내에게 전해줬어요. 예수님이 자기 머리되시는 하나님아버지께 하는 그것을, 예수님의 속성을 신자된 자기 아내한테, 한 몸 된 아내한테 전해주면, 이 아내는 주님을 머리로 섬기면서, 남편을 상대로 주님한테 하듯이 그렇게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뭐가 된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된다.

어디에 나오느냐? 에베소서 5장 22,23절에 나오지요.

에베소서 5:22,2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서서히 비밀이 풀리지요? 지금 저 혼자 풀었습니까? 서서히 풀리지요? 그러니까 이 모든 말씀은 반드시 뭘 알아야 됩니까? 지금 현실적으로 우리가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그 차이를 어떻게 하라? 점점 더 넓혀가는 거예요. 좁혀가지 말고. ‘아, 잘 하면 나도 되겠다.’ 이러면 안돼요. 점점 더 차이를 넓히란 말이죠.

‘야, 때려죽여도 안 되는구나. 내가 때려죽인다 해도 남편에게 복종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알면 알수록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감동을 먹습니다. 물론 감동 먹을 사람만 먹지만, 그것도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아내에게서 남편이 황공스러워 해요. 여러분 남자를 알아야 돼요. 남자는 여자가 곱게 나오면 남자들은 정말 몸둘 바를 모릅니다.

그런데 여자가 세게 나오면 그냥 건성건성 들어주기는 하지만 복수의 칼을 갈 때가 있어요. 그런데 아내가 숙이고 들어오면 남편은 더 고개 숙이죠. ‘여보, 이것은 주님이 받을 복종이지 내가 받을 복종이 아니다. 이것은 주님께 해라.’ 여자가 이러죠. ‘내가 당신보고 하나? 주님보고 하지.’ 그런 소리해서 분위기 다 깨지 마시고, ‘당신은 내 머리되거든.’ ‘어떻게?’ ‘성경 에베소서 5장 23절에 나오데.’

‘응? 그런 소리 하지마라. 내가 미안하구만.’ ‘미안하거든 일찍 들어와. 알겠어?’ 그 다음에 남편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남자, 여자를 합해서 이 몸을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친 것처럼 이 남편(예수님)의 역할을 이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목숨을 바쳐라’ 이 말입니다. 성경말씀이 이제 다 풀렸습니다.

‘항상 주님께서 남편이든 아내든 양쪽 다 한손에 쥐고 있는 이 한 몸에게 자기 목숨을 바친 것처럼, 남편 된 자들은 아내를 위해서 목숨(생명)을 바쳐라.’ 그러면 예를 들어서 어떤 남편이 있는데 아내가 간이 아플 때, 자기 간을 떼 주고, 아내 시원하라고 자고 있을 때 잠도 안자고 졸면서도 밤새도록 꿇어앉아서 부채질해주고, 열나면 얼음찜질도 하고 물수건 바꿔주면서 돌봐주는 것, 그렇게 할 때 그 아내는 어떻겠어요?

그런 남편에게 점점 더 빠지겠지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 주님께서 우릴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바쳤다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는 점점 더 넓어지면서 우리는 그 예수님에게 빠져 들어가요. 사랑의 반대말은 뭐냐 하면 증오입니다. 증오는 배척입니다.

증오는 떠미는 것이고 사랑은 끌어당기는 것, 자기 쪽으로. 그래서 여자가 왜 있느냐? 여자라 하는 것은 남편한테 끌리기 위해서 여자가 있는 거예요. 그게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갈빗대로 여자를 처음 만들어 놓았지요? 그 다음에 뭡니까? 남자를 데리고 여자한테 붙여준 것이 아니고 여자를 데리고 남자한테 하나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1+1=1이 되는 거예요.

1+1, 이게 점이 아니고 1자입니다. 1+1=1이 아니고 1+1(뒤의 1을 점같이 작게 쓴 글자), 나중에 이 점이 작으면 점은 있으나 마나 해서 없어지죠. 1+0=1 그래서 1+1이 1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0=1 이런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사랑할 경우만 이 수식이 성립하지요. 사랑하지 않을 때는 남자가 1, 여자도 1(아주 크게 쓴 글자로), 그러면 이 결과는 2! 만날 싸우는 거예요.

그 때는 어떻게 하느냐? 남자 쪽에서 져줘야 해요. 이걸(남자쪽) 0으로 만들어서 0+1=1이 되지요. 이래 되면 가정은 화목하지요. 아주 가정 화목합니다. 이거 공처가죠. 공처가(恐妻家)란 것은 여자한테 공포를 느끼는 남자, 이걸 공처가라 합니다. 특히 이 공처가는 여자 쪽에 재산이 많을 때 심하죠. 그리고 남자가 1인데 여자를 강제로 0으로 만드는 이런 경우는 뭐냐? 여자가 혼수를 적게 해 왔을 때입니다.

혼수를 적게 해 왔을 때는 평생 시집가서 기 팍 죽어 살아야 합니다. 시어미가 ‘너 시집올 때 얼마 해왔어?’ 십년 뒤에도 ‘너, 얼마 해왔어?’ 만 날 따지는 거예요. 성경은 이런 식이 아니라, 이것은 경제논리고 사랑 안에서는, 정말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때는 남편한테 끌리는 것이 있어야 돼요. 이것이 결혼한 후 뿐만이 아니고 그 전에도 남녀간에 결혼을 할 때는 여자가 남자한테 끌리는 것이 있어야 결혼이 되는 겁니다.

요새는 어떻게 된 셈인지 여자가 잡아당기고, 연상이고 뭐고 그런 것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여자 쪽에서 확확 잡아 당겨버리고, 남자는 봐주는 식으로 결혼해주고, 사랑인지 동업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우리하고 해당사항이 없지요. 일반 보통사람들이 결혼을 왜 하느냐?

철없이 했어요. 멋도 모르고 했어요. 멋도 모르고 했기 때문에 결혼이 되었지 요즘 같이 따지면 결혼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하잖아요. 멋도 모르고 해도 가정도 아니고 잘 따져서 결혼해도 가정도 아니요, 혼자 살아도 가정 아니고, 결혼을 열 번을 해도 가정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고, 결국 진정한 가정은 뭡니까?

예수님은 신랑이 되고 우리는 신부가 되는 이것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유일한 가정이다, 그 말입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를 양보합니까? 안되지.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몸 앞에서 그 차이, 차이를 한껏 느껴야 돼요. ‘아하, 사랑이란 것은 우리에게서 나오지를 않는구나.’ 사랑은 남편 되시는 주님께서 신부를 끌어당기는 것이고, 그 다음에 한 몸 아닌 사람은 뭐냐, 발길로 차버리죠.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낌없이 증오하시는 분입니다. ‘나는 너를 저주하노라. 화 있을찐저, 나는 너를 영원히 미워하노라.’ 성경에 그런 구절 많거든요. 주님께서 배척하시는 의미는 주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부류도 있는데, ‘날 때부터 에서는 미워했다. 한쪽은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겁니다.

사랑할 때는 우리의 조건을 보지 않고 그냥 자기의 몸을 드려서 사랑할 사람을 그냥 자기쪽으로 잡아당기는 겁니다. 잡아당기는데 우리가 말씀을 왜 지킵니까? 그런데 참 희한하죠. 우리가 말씀 지키지 마시고 그 사랑만 알면 그 말씀대로 되어져가요. 이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만 알면 그게 바로 이 말씀대로 사는 겁니다.

왜? 내 부족을 아니까, 내 죄를 아니까, 그 차이를 아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신앙생활 쉽지요. ‘아, 성경하고 나하고는 엄청난 차이구나.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고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구나. 왜 아닌가? 나는 뭘 해도 내 중심이니까 나는 죄인이구나.’ 이 차이만 알면 그걸로 끝납니다.

오늘 참 어려운 것 많이 했는데 정리해봅시다.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해봅시다. 남자 있고 여자 있다.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룬다고 하는데 이런 가정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가정입니다. 1+1=2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가정은 하나님이 가정이라고 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께서 여기 가운데 서 버립니다.

주님이 가운데 서게 되면 남자가 주님을 통해서 여자를 보게 되면 여자라 하는 것은 그냥 내 여자가 아니고 누구의 여자다? 우리 주님의 여자가 되고 남편은 누구의 남편이다? 누구의 남편이에요? 우리 주님의 남편이 되는데 남자가 잘났냐, 못났냐가 아니라 남자와 함께 있는 주님이 잘났으면 주님에게 복종하면, 그것이 바로 이 말씀, 남편에게 복종한 것이 되고, 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 그것이 여자한테 목숨 바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게 하시는 이것은 누구 몫이고? 우리 주님의 몫이고 우리는 이것이 된다, 안 된다? 우리는 이것을 해 낼 수가 없어요. 26절 봅시다.

에베소서 5:26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이것을 주님을 안 집어넣어 버리면 이게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안 집어넣고 말하기를,

‘남편들아.’

‘예.’

‘네 아내를 사랑하나?’

‘아내 사랑합니다.’

‘얼마나 사랑하는데?’

‘성경 말씀대로 사랑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는데?’

‘나는 내 한 몸만 챙길 정도로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래? 그러면 너는 네 아내에게 어떻게 했는데?’

‘내 배고플 때 밥 안차려 놓았다고 상 뒤집어엎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네가 왜 나를 이해 못해줘?’ 맞잖아요. ‘내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데,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너도 나를 사랑해줘야지. 적어도 아내 너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 이상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해줘야지.’ 아내는 또 가만있습니까?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예수님을 안 집어 넣으면 이 문장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느냐?

‘주여, 제 몸은 제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지? 그러면 저 여자는 누구 것인고?’

‘제 여자도 제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몸은 어떤 몸이지?’

‘주님과 함께 있는 몸입니다.’

‘그러면 저 여자는?’

‘주님과 함께 있는 여자입니다.’

‘그러면 주님 사랑하나?’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 여자를 사랑해줘라.’

이게 바로 내가 내 몸이 주님의 몸인 것처럼, 여자도 주의 몸인 것으로 사랑할 때, 그게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저 여자를 내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뒤에 꼭 단서가 붙지요. 그런 남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남자는 없고 다만 이 실제와 현실과의 차이, 이 말씀과의 차이를 느끼는 사람은 있지요. 누구?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래서 내가 부족하구나’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아는 겁니다. 쉽죠? 아주 쉽죠. 대단히 쉽죠. 그 다음에 봅시다. 거기 30절에 보면 방금 제가 한 말이 나오죠.

에베소서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우리는 그 몸의’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지체’라고 나오잖아요. 보세요. 제 말이 맞잖아요. 우리는, 아내, 남편, 사도바울 모두는 누구의 지체다?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쉽죠, 라고 이야기한다고 쉬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이것을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몸이 주님의 지체라는 것을 우리는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돌아서는 것이 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내 몸은 누구의 지체냐 하면 내 몸은 나의 지체지요. 이 말도 어려운 말인데, 남자가 여기 있고 여자가 여기 있다. 남자가 배가 아프면 여자도 배가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안 아프지요. 남자가 이빨 아프다고 여자도 따라 아픈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남자하고 여자하고 분명히 다른 몸이죠.

이게 우리가 보는 현실이잖아요.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고, 내가 배가 아프면 여자가 배가 아픈 정도가 아니고, 내가 배가 아프면 여자가 웃고 있고, 여자가 배가 아프면 남자는 웃고 있죠. ‘까불다가 잘되었다. 벌 받았다. 벌 받았어.’ 아주 신나서 어쩔 줄 모릅니다. 아주 좋아 죽겠답니다. ‘그래, 아파 보니 남편 없이는 못살겠지. 한 번 혼나봐라’ 이런 식으로. ‘그래, 그렇게 아내를 무시하더니 아내 없이 한 번 살아봐라. 못살겠지.’ 아주 고소하다는 듯이 자기중심으로 돌아오죠.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몸의 지체가 될 수 없죠. 없다면 그러면 어떻게 이런 여자, 이런 남자가 한 몸의 지체가 될 수 있느냐? 남자는 한 몸이 되라는 여기와 자기와 느낍니까? 차이, 죄를 느끼지요. 여자는 한 몸이 되라는 여기와 자기와 뭘 느낍니까? 차이, 죄를 느끼죠. 다 같은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생각을 같이 하는 거예요.

‘여보, 내가 부족하다.’ ‘아니야, 내가 더 부족해.’ 서로 부족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두 남자와 여자를 결혼시킨 겁니다. 서로 죄인인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면 결혼 안한 사람들은? 결혼 안한 사람들은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결혼 굳이 안 해도 죄인인 것을 다 압니다. 그래도 이야기는 해보고, 혹시 괜찮은 사람이 있거든 하나님한테 건의해 보시고. 32절입니다.

에베소서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뭡니까? ‘교회에 대해서 말하노라.’ 실컷 지금까지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놓고 마지막, 막장에 와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나는 가정은 가정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33절입니다.

에베소서 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가정은 깨어져도 뭐는 깨지 마라? 교회는 깨지 말라, 그 정도가 아니고 교회는 안 깨진다. 그러니까 이혼 하더라도 교회는 나오라, 그 말입니다. 이혼 했더라도 교회 좀 나오라, 그 말이죠. 남편하고 사별하고 아내하고 사별하더라도 교회 좀 나오라, 그 말입니다. 왜? 그것은 후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진짜 영원한 사랑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는 여기에 있지 세상에 어느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자기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여자를 구하고 죽는 그런 아주 훌륭한 사람도 있지만 그 때 그 여자라는 것은 죄인 여자가 아니고 자기에게 필요한 여자이기 때문에 그렇지, 아무 여자나 보고 목숨 바치기 위해서 뛰어들 그런 사람은 없어요.

내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단지 ‘너는 내 것’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목숨 바치지 아무 여자나 보고 그렇게 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주님께서는 ‘그야 말로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느 남편이 주님 같은 남편이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주님 같은 남자가 어디 있느냐 말이죠. ‘최고의 남편, 최고의 신랑감은 우리 예수님이다’ 라고 하나님이 지정해 줬습니다.

우리가 의논해서 우리가 결정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결정하기를 ‘최고의 남편은 우리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 남편이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나 밖에 없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완벽하냐’ 묻지 않습니다. ‘네가 철저했느냐’를 묻지 않는 거예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죄인인 것을 아느냐?’ ‘압니다.’ ‘나는 의사다. 의사는 병든 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죄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내가 온 것은 병든 자를 고치려고 함이다. 내가 바로 신랑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이 대목을 제가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부산강의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대목이었는데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뭘 던지느냐 하면 표창,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던지는 표창, 율법이라는 표창을 줘요. 율법이라는 표창이 어디 꽂히느냐 하면 자기 백성에게 꽂힙니다. 여기 표창이 한 개, 두 개, 세 개, 막 머리에 꽂힙니다.

꽂히게 되면 나중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와서 이 율법을 뽑죠. 꽂히고 뽑아버리면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죄가 나오고, 피가 나와요. 이 피는 뭐냐? ‘생명을 잃어버렸다. 너는 죽어 마땅함’ 피가 나오죠. 그 다음에 주께서 율법을 주고 난 뒤에 십자가를 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뭡니까? 예수님의 피죠.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같은 말은 ‘피 흘림이 있으면 용서가 있느니라.’

이 죄에 대해서 예수님의 피가 이 뽑아낸 자국마다, 예수님의 사랑이 스며들면 이 사람 내부에 뭐가 돌겠습니까? 주님의 사랑, 사랑의 피가 돌죠. 투석, 일종의 투석이죠. 피가 뱅뱅 돌지요. 돌면 이 사람은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 꽂힐 때마다 뭘 느끼고? 죄를 느끼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뒤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온 몸에 예수님의 용서가 돌아요.

온 몸에 자기 잘남이 돌면 안 됩니다. 자기 잘남, 똑똑함이 돌면 안 되고 뭐가 돌아야 된다? 예수님의 용서가 투석되어서 온 몸을 빙빙 돌고 있을 때 그때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가 있기 때문에 의인 되는 겁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 때는 유월절 날, 하나님의 무서운 표창,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주가 먼저 왔지요.

심판의 사자가 먼저 온 뒤에 그 다음에 문설주에 뭘 발랐습니까? 어린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죽음의 사자가 ‘이집은 어디 볼까? 어, 피! 그냥 통과, pass, 어, 이집도 피, 그냥 통과’ 이렇게 어린양의 피를 보고 통과했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일을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그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는 겁니다.

그게 진리의 전부에요. 그게 사랑입니다. ‘완벽했느냐, 실수가 없었느냐, 철저했느냐, 죄 안 짓느냐’ 그걸 묻는 것이 아니에요. ‘피가 있느냐, 용서 받았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느냐.’ 그 다음에 아까 한 질문 다시 해 보겠습니까? 여러분, 저주 받은 사람에게 귀신이 무섭습니까? 안 무섭지요. 저주가 귀신보다 더 무섭기 때문에.

무슨 말이냐 하면, 우산을 안 쓰고 와서 소나기에 흠뻑 젖었는데, 형이 소나기를 맞고 개가 물속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어 왔는데, 그 때 동생이 장난친다고 물을 가지고 ‘형, 무섭지’ 하면서 물총으로 쏘면 그게 무섭겠습니까? 이미 형의 몸은 온몸이 물로 다 젖었는데 동생이 물총 쏘면서 ‘형, 겁나지?’ 그러면 무서워하겠습니까?

귀신보다 저주가 더 무서워요. 하나님의 저주를 맛본 사람은 귀신이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귀신이 안 무섭고 죽는 것이 안 무서워요. 그러니 여러분이 저주를 받아봐야 돼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뭐냐? 바닥을 쳐야 돼요. 바닥을 쳐봐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바닥을 쳤다는 것은 내가 설정해 놓은 기준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닥도 아니에요.

진짜 바닥은 이겁니다. 죽어봐야 돼요. ‘야, 내가 이래서 사라지는구나. 내가 이래서 없어지는구나.’ 그걸 느낄 때 바닥을 친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우리보고 올라오라고 하지요. ‘야, 이 근호 너, 올라와.’ ‘예, 어디로 데려 가실라고?’ ‘데려 간다기보다는 나하고 같이 십자가에 죽자.’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성령을 통해서 같이 달려버리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바닥을 치는 거예요. 바닥을 치면 우리가 그동안 갖고 있던 모든 수고와 인생의 무거운 짐이 다 없어지는 겁니다. ‘자식을 잘 키웠을까, 아들로서 제 역할을 했을까, 남편으로 가정을 잘 돌봤는가’ 이런 무거운 짐이 바닥을 친 사람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바닥을 친 사람한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집에 가서 아내한테도 ‘고맙습니다.’ 남편한테도 ‘고맙습니다.’ 애들한테도 ‘얘들아, 고맙다.’ ‘엄마, 이번에 또 시험 빵점인데.’ ‘고맙다. 건강해줘서.’ 몸이 좀 아프거든 ‘살아 있는것만 해도 고맙다.’ 일본 사람들이 뻑 하면 ‘하이’ 하고 절하듯이. 미쳤어, 미쳤어 정말!

그거 미친 기간 한 3초 갑니다. 3초 가고 그것 딱 돌아서면 정상이 돼요. ‘내가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고. 이게 인생입니다. 자, 6장을 봅시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대목은 별로 어렵지 않아요. 부모하고 자녀하고 한 몸입니까, 한 몸 아닙니까? 한 몸 아닙니다. 한 몸 아닌데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 때문에 부모가 자꾸 자식을 자기하고 한 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아요. ‘너 때문에 못 살겠다’ 하지요. ‘엄마, 나는 나 때문에 못살겠는데 엄마는 왜 나 때문에 못사는데? 나는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한다. 엄마가 왜 나 때문에 못사나? 엄마는 엄마몸 하나 챙기고 나는 내 몸 하나 따로 챙긴다. 어마가 왜?’

‘아이고, 너 때문에 못 살겠다’ ‘그거는 엄마 생각이고 나는 지금 내 친구하고 놀기 바쁜데.’ ‘너 엄마하고 하루에 이야기 몇 시간 하나?’ ‘나는 엄마하고 이야기 안하고 친구하고 이야기하련다.’ 애들 중학생 되고 청소년쯤 되면 애들 이렇게 엇나갑니다. 엇나가는지 제대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이래 나갑니다.

엄마의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분명히 엄마, 혹은 부모는 몸이 딴 몸이에요. 태어났으면 딴 몸입니다. 같은 몸 아니에요. 같은 몸 아닌데 그놈의 정이 무엇인지, 마치 어릴 때의 자기 새끼처럼 커도 자기새끼인줄 알고 계속 이어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들이 늘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죠. ‘얘야, 네가 내리사랑은 못 막는 거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엄마는 너를 잊지 않고 있단다.’

이것이 자식에게 얼마나 크게 부담이 된다고요. 자식들이 그 말을 좋아하는 경우는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어요. 성적 자기 기대보다 못나왔을 그 때, ‘엄마는 너를 예뻐한단다.’ 타이밍이 절묘하죠. ‘어머니, 감사합니다. 성적 오늘 꼴찌 했습니다.’ 그 때, 회초리 가져와.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면서?’ ‘때리는 것이 사랑이다.’

여러분, 애들에게 다 고발당하면서 이야기하는데 사랑으로 때리는 매는 없습니다. 성질나서 때리지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부모는 때릴 때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때리는 겁니다. 절대 사랑의 매가 아닙니다. 괜히 미안하니까 핑계 댈 것이 없어서 사랑의 매라고 하는데 절대로 이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자식과 부모사이에 뭘 집어넣는가? 주님을 집어 넣어버리면 자식은 주님과 한 몸이 되고 자식이 봐서 부모는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부모역할이 뭐냐? 부모 역할은 가르치는 역할이에요. 선배역할, 오래 전부터 주 안에 있었던 선배 역할을 하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한 수 배워야 될 그런 교육자 역할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무슨 역할이 있다? 가르치는 역할이 있고, 예수님은 또 아버지로부터 자식이니까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순종해야 될 것이 있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순종한 것처럼 자식들아 네 부모한테 순종하라’ 이 말입니다. 자식이 이거 될까요, 안될까요? 기대하지 마세요. 안됩니다. 안되는데 행여 되게 하실 때가 있을 거예요.

그거 성령님의 작품입니다.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약 한 3초 동안. 왜? 애가 3초 동안만 순종하거든요. 여기는 안 웃네요. 광주에 가면 웃고 난리 납니다. 왜냐하면 광주에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거든요. 금요일 날 성경공부 나와 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부모한테 순종하는 척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금요일 성경공부 참여하는 대신 나중에 요구하는 몇 가지의 조건을 들어줘야 됩니다.

타협, 협상테이블에서 협상을 시도하는 겁니다. 또 압니까? 그래가지고 자식이 구원받을지. 그래서 자식이 부모 뜻에 의해서 구원되지를 않습니다. 자식이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뜻에 의해서 구원받지 부모 뜻에 의해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기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따를 용의가 되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나님 아버지, 내 자식 구원해주세요’ 라고 주님께 자기를 순종하는 것, 부모가 먼저 주님한테 순종해서 자기 몸을 바치는 맘으로 할 때 그 기도내용 속에 ‘자식도 나처럼 구원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주시면 지금 이 소리를 듣고 있는 고개 숙인 우리 청소년들도 언젠가는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아하, 우리 부모님도 그런 부모였구나’ 깨닫고 혹시 압니까? 구원될지. 주님은 알죠.

그러니까 부모 자식관계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 부모는 부모역할 하고 자식은 자식역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자식이 없다? 그러면 그것은 그냥 부모역할 하지 말고 그냥 ( )이 되라 하는 뜻인 줄 알고 그냥 하면 돼요. 자식이 있다? 그러면 주께서 시킨 대로 부모역할을 하게 되면 그 역할을 받은 대로 자식한테 그걸 해야지요.

교회 오는데 ‘얘야, 말씀 듣는 것이 네 과외보다 더 우선되어야지 지금 아무리 특강한다 해도 거기 가서 되겠느냐? 교회 가야지’ 라고 할 때에 부모가 자기를 쏙 빼고 하지 말고 ‘내가 만약에 주님의 자식이라면 내가 과외 안가고 교회 오겠는가?’ 먼저 자기부터 돌아봐야 돼요. 돌아봐서 ‘나 같으면 교회 안가고 친구하고 놀러가겠다. 그렇다면 내 자식도 나처럼 마찬가지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시고 자식한테 권면해 보세요.

‘얘야, 나도 너처럼 놀러가고 싶지만 주의 은혜로 교회 가는데 너, 교회가지 않을래?’ 물어 볼 수밖에 없지요. 그런 것은 결혼하고 난 뒤에는 그렇게 하고 결혼하고 난 뒤에는 패야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어떻게 말로 해요? 그게 옳은데. 원숭이는 태어나면 9개월 만에 어른원숭이가 돼요. 사람은 태어나서 19년이 지나야 두뇌의 피질이 그때 완성이 된답니다. 그때에야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까지는 매를 아끼지 말고 이유를 묻지 말고 하면 애들이 따라오도록 되어 있어요. 맞을 때 아프지만 나중에 점점 더 생각하죠. 부모가 왜 자꾸 저렇게 성질을 낼까, 생각해 보면서 협상을 하든지 저가 알아서 할 것이고, 어쨌든 ‘부모 자신이 너무 자식에게 기대는 하지 말되 부모 할 도리는 다 하자’ 라는 것이 오늘 강의의 대미를 장식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귀한 말씀을 서로 상봉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빼놓고 살지 말고 항상 주님을 개입시켜서 예수님에게 받은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엡 32(20090313-2).hwp (124.0K), Down:9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52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7,367 자유게시판 06칠곡강의(서양철학)07(강의정리)-플로티누스 1 [철학] 최고관리자 09-03-25
7,366 자유게시판 06칠곡강의(서양철학)06(강의정리)-스토아학파 [철학] 최고관리자 09-03-25
7,365 자유게시판 06칠곡강의(서양철학)05(강의정리)-나를찾아떠나는17일간의여행(조연현) [철학] 최고관리자 09-03-25
7,364 묻고답하기 천국에서는 무엇을 먹나?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9-03-23
7,363 우리교회 [주보] 포도원 농부와 아들 3월 29일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22
7,362 우리교회 삼상 17:45-47 (다윗과 골리앗과 사울)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09-03-22
7,361 설교 마가복음 11장27-33절 제목 : 세례요한과 대제사장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22
7,360 우리교회 막 11:27-33 (세례요한과 대제사장)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22
7,359 묻고답하기 자살 - 최고관리자 09-03-20
7,358 우리교회 [일반] 제임스 리 목사님께 레위기 최고관리자 09-03-20
7,357 우리교회 [일반] 이단이 기준 [일반] 최고관리자 09-03-20
7,356 묻고답하기 이단의 기준 [신학] 최고관리자 09-03-20
7,355 자유게시판 20090310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히브리서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9-03-20
7,354 자유게시판 20090310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히브리서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9-03-20
열람 ➜ 자유게시판 20090313-(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2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9-03-19
7,352 자유게시판 20090313-(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1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9-03-19
7,351 우리교회 [일반] 외로움 (제임스 리 목사님의 글 2탄) [일반] 최고관리자 09-03-19
7,350 자유게시판 외로움 - 최고관리자 09-03-19
7,349 묻고답하기 갈수록 이단들이군요...왜 전부들 저런 댓글처럼 저렇게 되는 지요? - 최고관리자 09-03-18
7,348 우리교회 렘 1:11-12 (무엇을 보았느냐)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09-03-18
7,347 자유게시판 녹취하시는 분들 앞으로 문서를 첨부파일 올려주세요 - 최고관리자 09-03-17
7,346 묻고답하기 '인간'이란 '나'를 벗어나야 - 최고관리자 09-03-17
7,345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09. 2. 27) 1강 녹취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09-03-17
7,344 묻고답하기 혹시 웃사가 죽은 이유도? 같은 의미입니까? - 최고관리자 09-03-16
7,343 성경 2009 울산목양교회 [구원, 그 이후] 특강 [신학] 최고관리자 09-03-16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