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13-(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1강
20090313-(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1강
이름 : 오용익(IP:211.194.56.75)
에베소서 제 31강 (이 근호목사, 2009년 3월 13일-(1), 서울의존교회)
오늘은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그 내용을 알아봅시다.
에베소서 5:22-27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2절부터 27절까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란 말은 이 성경말씀을 목표로 살아서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아내된 자 그리고 남편된 자’ 가 나오잖아요. 제가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는 여자니까 파마를 했어요. 원피스를 입었습니다. 여기에 여자가 있고 남자는 깍두기 머리에다 넥타이에 바지를 입었어요. 이건 남자. 이 세상에는 남자, 여자, 남자 여자 말고 또 있습니까? 참 희한하지요? 남남, 여여, 그런 것이 없어요. 그냥 남자 아니면 여자 이 둘중의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이 둘중의 하나이고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남자 아니면 여자 둘밖에 없지요.
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방금 읽었던 에베소서 이 말씀하고는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에베소서 5장 말씀에는 뭐가 들어가 있느냐 하면 ‘주’가 들어가 있는데 이 ‘주’ 라는 분은 없어요. 주라는 분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주’ 라는 분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니까 빼버리면 남자하고 여자하고 결혼을 하는데 여자가 결혼하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아내가 되고 남자가 결혼하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남편이 되지요.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둘이 하나의 가정을 이룹니다. 이렇게 가정을 이루는 이 가족, 애 낳으면 또 다른 가족이 생기니까, 이 가족,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지요.
우리 어린이들은 아빠 엄마 없이 태어나지를 않았거든요. 엄마 아빠가 있다는 말은 가정이 먼저 있고 그 가정에서 자녀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 전체 눈에 보이는 가족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다가 ‘남편들이여, 아내들이여’ 라고 누가 뭘 이렇게 ‘…하라’ 예를 들어서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또는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기를…’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어떤 분에 의해서 이야기될 수 있느냐 하면 이 가족과 가정이 바로 저렇게 ‘아내들이여 남편들이여’라고 이야기하는 그분의 가정이 될 경우에만 ‘아내된 자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이여 아내를 사랑하라’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어떤 보이지 않는 그분이 가정의 주인이 될 경우에만 ‘아내들이여, 남편들이여’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뭐냐하면, 가정의 주인이 누구냐 하면 남편이나 아내, 여자나 남자가 공동소유로 가정을 소유하기 때문에 여기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아내들이여 …, 남편들이여 …’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에베소서 5장의 이것은 현실적으로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덮어놔 버려야 돼요. 이것은 안맞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산에 있는 도사가 내려와서 하는 말이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들이여 아내들을 사랑하라.’
이렇게 하면 대번 듣는 사람이 ‘당신이 우리 아내하고 어떤 관계야? 네가 뭐야? 네가 우리집 살림 사는데 돈을 보태줬나, 네가 뭐했는데? 네가 주례를 섰어? 네가 뭘 했는데? 이 가정은 어디까지나 우리 가정이야. 당신이 아내들이여, 남편들이여, 할 그렇게 나설 입장이 못 된다고. 당신은 결혼해서 당신집구석이나 잘하고 당신이나 잘해라’ 그 말이죠.
어디를 주제넘게 남의 가정에 와가지고 ‘아내들이여, 남편들이여’ 어떻게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느냐 말이죠. ‘당신 결혼해서 당신 집안이나 잘 단속하라고. 남의 가정 간섭하지 말고.’ 제 말 맞죠? 이 가정은 아내 남편이 주인이지 제 삼자가 여기에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산에서 내려온 그 도사가 하는 말이 ‘당신 그 가정은 내 가정인데.’
이래 나온다면 ‘아니, 내 가정이라니 그것이 무슨 소리냐?’ ‘당신 둘이 눈 맞아서 결혼했잖아. 그거 내가 시켜준 거라니까.’ 이럴 경우에 우리가 ‘도사님,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가만 있어 보자. 그 때 밤 10시에 우리 둘이 같은 버스에 탄 것, 그 때 당신이 다 조정했습니까?’ ‘그래. 내가 조정했어.’ ‘그러면 집에 가면서 나,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 프로포즈 한 것 당신이 이야기했습니까?’ ‘내가 다 뒤에서 조정했다.’ 이 말이죠.
현실적으로 지금 모든 가정에서 ‘이 가정은 우리 둘이,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그 둘이 맘이 맞아서 둘이 알아서 결혼 한 것이지 제 3자가 우리의 사랑이라든지 우리의 연애에 개입한 적이 없다’ 라고 알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 가정에 대해서 뭐라 뭐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는 듣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이 가정은 예수님이 이렇게 앉아가지고 ‘밥내놔’ 이런 것이 없잖아요. 그런 것이 없다 이 말이죠. 집에 가면 아내가 앞치마 두르고 이러고 있지 주님이 점심차려주고 그렇게 합니까? 그게 아내의 유혹이에요? 가정의 주인은 사람이고 사람인 우리가 주인이기 때문에 가정을 말아먹든 갈라서든 어떻게 하든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지 다른 제 삼자가 왜 거기 끼어들어서 남의 가정에 ‘아내는 이렇게 살고 남편은 이렇게 살라’고 그렇게 간섭할 입장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이 가정의 책임은 가정 당사자인 남편과 아내인 우리가 지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책임은 우리가 질테니까, 이 가정은 어디까지나 남편이고 아내인 우리들의 가정이기 때문에, 깨져도 내 가정 깨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거기 관여하면 안돼’ 라는 것을 철썩같이 믿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행여나 지나가는 과객이 지나가다가 들러서 ‘아하, 이 가정은 아내가 조금만 양보하면 행복해질수 있을텐데…’ 또는 ‘이 집 남편이 술을 좀 작작 먹었으면 이 가정이 행복해질텐…데’ 하면서 ‘나무아마타불관세음보살’ 하고 목탁 두드리고 지나갔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는그것을 참고로 들으면 돼요. ‘아하, 내가 술이 좀 과했구나. 내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술을 좀 끊으면 내 가정이 잘 될 것이다.’
이렇게 되는데 지금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은 그 말씀이 아니에요. 이 가정이라는 것은, 남편의 가정은 있다, 없다? 없어요. 아내의 가정은 있는가, 없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만나서 자기는 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주님 보시기에 우리들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정에 대해서 관여할수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의 가정은 어떤 것을 가정, 가족이라고 하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나온대로 되었을 때에만 그것을 가정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2장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제가 한번 읽어 볼게요.
창세기 2장, 주례할 때 이 본문 가지고 많이 하는데 제가 이 본문 가지고 주례를 많이 해 봤어요. 그런데 이 본문가지고 주례 한다고 행복하게 사는 가정 하나도 못 봤어요. 괜히 주례 할 때 구색 맞춰서 한번 한 것이지 뭐. 창세기 2장 22절부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22-24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하니하니라.”
세상에 어느 남자가 자기 색시감을 병원에서 가서 자기 갈빗대를 뽑아서 그걸 가지고 요술을 부려서 여자를 만드는 그런 남자, 그런 가정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그런 가정이 있습니까? 아파트 205동 105호의 가정의 아내는 그 남편이 만들었습니까? 요술공주 세리도 아니고.
‘아, 요새 심심한데 여자나 하나 만들어볼까’ 해서 갈빗대를 취해서 그거 하나 놓고 ‘갈비야, 갈비야, 여자가 되어라. 코는 약간 높고 입술은 앵두 같고 키는 전 지현 같고 … 이렇게 해서 쫙, 야, 여자다! 나하고 살자’ 이런 남편이 있습니까? 그런 남편 같으면 그 가족은 자기가족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여자도 자기가 골라낸 여자고 이 세상의 어떤 남자도 자기가 골라낸 남자지, 잠자고 있을 때 붙여준 그러한 여자, 그러한 남자는 없습니다.
혹시 모르지요. 남자가 자취방에 혼자서 자고 있는데, 우리 같이 살까요? 애들한테 이런 이야기는 참 안좋다만, 이래서 같이 사는 그런 경우도 있기는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 왜냐하면 눈 감고 있을때는 ‘아저씨 계십니까? 총각 계십니까?’ 이렇게 하지만 눈 떴을 때 맘에 안들면 그것은 깨지는 겁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제가 지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제가 지금 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 저희들끼리 가정이지 소위 말이 되는 가정, 하나님보시기에 하나님이 원하는 가정은 그런 가정이 아닙니다. 사람이 죄짓고 나서는 사람 없어요. 죄인밖에 없지 사람은 없습니다. 죄짓고 난 뒤에 가정요? 죄많은 가정, 죄많은 가정이에요. 죄 많은 가정이지 가정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을 끌어서 죽은자로 간주해 버린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그 전에 태어났든 그 뒤에 태어나든 태어나는 족속마다 이미 죽은 상태가 된 채 태어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을 성경을 모르고 그것을 연구해서 밝혀낼 재간이 있습니까? 없지요. ‘살다 보니 늙어서 죽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사람도 하나님앞에 죽은자가 된다’ 라고 고린도후서 5장의 말씀대로 자기 자신을 죽은자로 간주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죽었다 해도 ‘난 여전히 살았습니다’ 라고 고집을 부리잖아요. 이것은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성경을 보실 때에 ‘야, 우리는 이 가정인데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어떤 복을 주실까? 말씀대로 하면 이 가정이 행복해지겠습니까? 말씀대로 하면 이 가정이 화목하겠습니까?’ 이렇게 보지 마시고 ‘도대체 가정이라는데 우리가 이 가정 맞냐? 아니잖아, 이것은. 이것은 우리끼리 정분이 일어나서 하는 거지 이것은 가정이 아니야.’
이렇게 결혼해도 이것은 결혼이 아니며, 가정을 가져도 가정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보시는 진정한 가족과 가정은 무엇이냐, 이렇게 나가줘야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이 풀리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행복하지 않습니까? 방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기분 나쁘게 들리지만 가만 새겨서 들어보면 무척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이라는 의무, 아내라는 의무로부터 해방시켜 주니까. 가정도 없는데 무슨 남편이 있고 가정도 없는데 무슨 아내가 있습니까? 그냥 죄인일 뿐이지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살면 반듯하게 좋은 아내가 됩니까?’
물으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죄인이거든,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것을 물을 자격도 안 되거든.’ ‘하나님, 저는 남편인데 어떻게 하면 좋은 남편, 어떻게 하면 좋은 아버지가 되겠습니까?’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네가 그런 것을 묻는다고 해서 지키면 거기서 죄밖에 안 나와. 그러니까 그것은 네가 물을 입장이 못돼.’
얼마나 우리를 편하게 합니까? 그래서 성경말씀은 말하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의존교회로 오라. 금요일마다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이 ‘주께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할게.’ 이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들고 기독교 역사상 2000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 전 세계 수십억 되는 기독교 신자가 이 말씀을 들고 얼마나 마음의 짐을 가졌겠습니까?
이 본문을 들고 기분좋아할 사람은 누구밖에 없는가? 선종하신 추기경밖에 없어요. 신부들밖에 없어요. 왜? 그들은 결혼도 안했으니까. 오늘 읽은 이 본문,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복종하라’는 이 말씀에서 ‘아내들이여’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 없습니다. ‘남편들’에서 남편들에 해당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복종하라’에서 복종할 위인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에 아무도 없으면서 ‘아내된 자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라는 말을 그렇게 하도록 우리 성령께서 그렇게 만들어 내십니다. 왜? 아무도 안되니까. 그것이 바로 18절에 나옵니다. 5장 18절.
에베소서 5:18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아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때부터 남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더 중요한 것은 그 아내와 남편이 만나서 이루는 가정이 성령받기 전에 육의 상태에서 알았던 그 가정이 가정이 아니고 진짜 가정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가정이 뭐냐? 오늘 본문에 두 가지가 나와 있어요.
그 가정이 뭐냐 하면, 그 가정을 교회라고 이야기하고, 그 가정을 교회라고 이야기할 때 너무 난해하니까 한 단계를 거칩니다. 가정에서 한 몸이 되고, 한 몸에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이 없는 상태에서는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한 몸이 없는 상태에서는 교회가될 수 없습니다. 이게 또 어려워요. 왜냐하면 보통 한 몸 + 한 몸 = 두몸, 되잖아요.
1+1=2 가 됩니다. 맞지요? 그러면 2+2=1 이 되는 수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이것은 틀렸지요. 그러면 ‘7947+85246=1’ 이것이 성립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그런데 이것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정입니다. 방주에 들어갔던 노아의 식구가 몇 명입니까? 8명이죠. 8명같으면 1+1+1+1+1+1+1+1=얼마? 이게 1이 되는 거예요. 8 하면 안돼요.
여기에 1은, ‘1+1+1+1+1+1+1+1’ 여기에서 이 1은 자기가 1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이라고 우기는 것이고 1+1+1+1+1+1+1+1= 여기에서 8이 안되고 나온 1은 진짜 1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짜 한 몸, 진짜 하나를 위해서, 다양성이라 합니다, 다양성, 숱한 사람들을 이 세상에 깔아 놓은 거예요.
남자를 깔아놓고 여자를 깔아놓은 거예요. 참 신기하게도 이 세상에 살다간 인구가 200억쯤 된다고 합니다. 그 200억 중에서 나누면 남자 아니면 여자, 여자 아니면 남자 결국 몇종류입니까? 앞으로 살다간 인구, 앞으로 살 인구 아무리 합쳐도 종류가 몇종류입니까? 1=1이니까 몇 종류에요? 두 종류지요. 두 종류인데 이 2를 뭐로 바꾼다? 1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처음의 인간이 아니면 영광을 안 받기 때문에 그래요. 처음의 인간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고의 전환이에요. 사고의 발상이 완전히 바뀌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 에베소서 5장의 ‘아내들이여, 남편들이여’ 이것 때문에 기독교 2000년 역사동안, 그리고 지금도 기독교 신자들이 얼마나 주눅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하는데 집에 가서 ‘아이고, 내가 저 인간에게 복종을 하라고? 아이고,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래놓고는 ‘주여,’ 또 신부 찾아와서 ‘신부님 회개합니다.’ ‘왜요?’ ‘성경에는 복종하라고 하는데 또 제가 바가지를 긁었습니다. 회개합니다.’ 신부는 삐딱하게 앉아가지고 ‘주기도문 세 번 외우시고 성경 세장 읽으세요’라고 처방전 내려주고 보내버립니다.
그러면 갔다가 다시 오고. 이건 우울증 걸립니다. 성경에서 기본은 뭐냐? 이 성경 어떤 말씀도 인간이 지킬수 있는 성경말씀은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 있다’는 그것은 가수고 있다, 없다? 없어요. 어떤 말씀도 이 세상의 사람이 지킬수 있다고 해서 내놓은 말씀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왜냐? 제가 아까 힌트를 드렸지요? 고린도전서 5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뭐한 것이다? ‘죽은 것이다.’
죽은 자가 뭘 지킵니까? 죽은자가 뭘 말씀을 지켜요?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성령이 있을 경우에만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살았어’ 라고 판정을 내려주고요, 성령이 없으면요 아무리 살았다고 우겨도 ‘너는 죽었어’라고 판정을 내려 주십니다. 따라서 성령이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는 계속 죽어있고 우리안에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한다? 살려내는 일을 함으로써 사는 자가 되는데, 살려낼 때 그 수단, 도구가 뭐냐? 그게 바로 말씀입니다.
성령이 들어와서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한테 와서 우리를 바늘로 콕콕 찍어서 우리를 자극을 팍팍 시키면 그 때 진짜 죽은자는 바늘로 찍듯이 말씀 줘도 그냥 죽어 있고 진짜 산자는 말씀가지고 찌르면 펄떡펄떡 이 가슴의 심장이 뜁니다. 심장 안뛸 때 병원에서 뭐합니까? 다리미 같은 것 두 개 가지고 가슴에 충격줘서 뛰게 하잖아요. 그걸 다리미라 안하고 뭐라 하지요? 그것으로 가슴을 문지르면 심장이 다시 살아나서면서 뛰잖아요.
말씀을 들이대면 그 말씀 앞에 ‘진짜 내가 죽은자 맞구나’ 하는 것을 알아요. ‘남편된 자들이여 아내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라’ 이것은 도저히 말씀 못 지키지요? 말씀을 못지킬 경우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못되지요? 하나님께 영광이 못되면 그 사람은 죽은 자에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다’ 이것은 할 수 없지요? 안되지요? 그러면 죽은 자지요.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죄다.’ 형제를 미워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러면 그것은 살인죄지요. 항상 성경을 볼 때 하나님 앞에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폼 내려고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시선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렇게 보는데 분명히 우리는 죄인 맞을거야. 왜? 주님이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나는 성경말씀을 이렇게 보는데 그게 아니고, 이거야’ 라는 그것, ‘그게 아니고 이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리 성경을 천 독 만 독을 해도 못 지킵니다. 전부다 못 지켜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느 한 문장도 못 지킵니다. 지킨다면 그것은 자기의가 되겠지요. 그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 말씀에 위배되니까 절대적인 죄인입니다.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 지키려는 이 부담, 이 부담은 휙, 날려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누가 지키는가?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되게 하시죠. 이 말씀에 준해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 작업은 누구 소관이냐 하면 우리 소관이 아니고 누구 소관이냐? 성령님의 소관인데 성령님이 우리한테 이것을 하게 할 때 어떻게 하느냐? 명령을 통해서 하게 하십니다.
명령을 통해서 하게 하심은 우리는 명령을 준수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 그 말씀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참 희한해요. 여기 초등학교 몇 학년? 4학년, 여기 4학년 어린이가 있는데, 엄마가 명령합니다. ‘얘야, 아빠가 오늘 회사에서 신나는 일이 있는데 네가 오늘 집에서 탕수육좀 해놓아라.’ 초등학교 4학년이 탕수육 할 수 있나요? ‘그리고 육수도 끓여놓고 잡채도 좀 해볼래?’ 못하지요.
그런데 옆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오셔서 ‘얘야, 오늘 엄마가 뭐라고 하더냐?’ ‘예, 수육, 잡채, 탕수육을 해 놓으라고 하시네요.’ ‘그래. 같이 하자’ 해서 그 가정도우미가 오셔서 다 해놓고 ‘나는 간다’ 슥 가버려요. 가버리면 나중에 엄마가 와서 ‘야, 이 맛있는 것 누가 했지?’ ‘어떤 아줌마가 했어요.’ 그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야 너는 아무것도 못해’ 라고 한다는 말은 ‘이제부터 너는 하나님하고는 빠이빠이다’ 하는 그런 뜻이 아니고 ‘너는 못해’ 라는 말은 ‘너는 구원 받았어’ 라는 말이에요. 한번 적어볼까요? ‘너는 아무것도 못해’ 라는 말은 같은 말 ‘너는 이미 구원 받았어’ 그런 뜻이에요. ‘이제는 너는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가정 도우미 아줌마와 같이 있는거야.’
성령께서 같이 있는 거예요. ‘너는 이미 구원받았어.’ 왜 ‘너는 못해’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안 믿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 안해요. 지옥 갈 사람한테 그런 소리 안합니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한테만 해요. 왜? 안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맘껏 보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여러분은 이 말씀에 대해서 부담을 느낍니까?
부담느낄 필요 없어요. 성경 보면 보는 족족 전부 다 하나님께 이야기하세요. ‘하나님 오늘 이 말씀 보는데 또 안 됩니다. 주께서 이루어주옵소서’ 얼마나 좋아요. Q.T 아닙니까? 묵상 아닙니까? 멋지잖아요. 오늘 고린도전서를 봤는데 10장에 나오지요? ‘너는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역시 우리가 못하지요? ‘하나님, 이거 못하는데 주께서 하게 해 주옵소서.’ 얼마나 즐거워요. 이게. 그런데 불신자는 뭡니까? ‘이 근호 목사 말 들어보면 못한다는데 못하는 것을 뭐하러 하나? 잘되었다.’ 이것은 신자가 아니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주여, 안되는데 주께서 오셔야 되게 됩니다.’ 야, 그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실력을 믿는구나. 네가 진짜믿는구나. 너는 안되는 것을 믿고 하나님은 되는 것을 믿는구나.’
믿음이란 이처럼 불신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자 이 그림을 다 지우겠습니다. 지우고 글자 하나를 쓰겠습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자 따라 해 보세요. ‘차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반드시 그 차이에 놓여 있는 그것을 드러내고 부각시키는 쪽으로 일합니다. 남편과 아내, 일반적인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과’가 있지요. 사실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아무것도 없지요.
남편과 아내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자식이 있으면 자식이 있다고 하겠지만 자식이 없다고 치고. 신랑과 신부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세요. 남편과 아내, 신랑과 신부 사이에 누가 있습니까? 주님이 계시잖아요. 그래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양쪽에 뭐가 필요했다?
남편과 아내가 필요하고 여자와 남자가 필요했다는 겁니다. 언제? 창세기 2장부터. 처음부터.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나오면서 뭔가 차이는 발견할 생각을 안 하고 꼭 자기만 드러낼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목사님, 나는 성경대로 남편 노릇 다 하는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저 여자가 말을 안 들어서 그래서 내가 이렇게 힘듭니다. 주여, 저 여자를 벌하게 하옵소서.’ 이러고 있다니까요.
이거 누가 이야기했어요. 아담이 이야기했지요. ‘하나님, 나는 처음에는 안 따먹으려고 했는데 저 여자가 먼저 따먹고 나보고 먹으라고 해서 저 여자 때문에 내가 먹었습니다.’ ‘여자야, 너는?’ ‘저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중앙에 놓아 버리면 차이가 없어지고요, 자기와 자기주변만 남아요. 오늘 참 강의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중앙에 놓여지게 되면 자기 말고 옆에 주변이 생겨요. 주변은 타인, 남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시에 이런 거 있잖아요. ‘남’이라는 글자에서 점 하나 떼내면 ‘님’이 된다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점이 차이라. 내가 중앙에 서버리면 집에서 키우는 금붕어나 강아지도 다 타인, 남이 됩니다. 남이 되기 때문에 그 강아지가 나에게 꼬리치면 사료를 좀 더 더주고 만약에 왕왕, 짖으면 발길질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세상에 인구가 아무리 많아도 뭐만 있느냐 하면 나, 나 덩어리, 전부 다 나 덩어리만 있어요. 자, 여기 인형이 있어요. 바비인형도 있고 왕자님 인형도 있고 인형이 죽 있어요. 인형1, 인형2, 인형3…, 이렇게 죽 있는데 인형이 말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데 저것은 나보다 못하다.’ ‘저것은 남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형1, 인형2, 인형3를 셋 다 가지고 있는 어떤 여자아이가 있다면 이 여자아이에게 소속된 인형들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여자아이 입장에서 이 인형1과 인형2는 서로 싸우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전부 다 여자아이 것이니까. 그런데 인형은 말하기를 ‘내것은 내것이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내 것과 내 것 아님’ 이 세상에는 이 둘 밖에 없어요.
저 여자는 내 아내이든지 아니면 다른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니든지 이 둘 밖에 없지요. 어떻게 주님의 아내가 있어요? 주님의 아내가 어디 있어요? 주님의 남편이 어디 있어요. 자기가 눈에 보이니까 ‘다른 것은 다 의심해도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고 데카르트라는 학자가 이야기했어요.
“다른 것은 다 내가 의심할 수 있어도 지금 의심하고 있는 내가 당사자라는 점은 의심 못하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 사실, 이것이 가장 확실하다.” 그래서 그 말은 뭐냐? 내가 눈 감으면 예수가 타인처럼 성령이 타인처럼 하나님이 타인처럼 있더라도 내가 눈만 딱 감아버리면 ‘하나님이 어딨어? 내가 눈 감았는데. 내가 배고픈데 하나님이 어딨어? 내가 몸이 아픈데 예수가 어딨어? 예수도 내가 눈뜰 때 예수지 눈감으면 예수가 어딨어?’ 그리 되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내 바깥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 예수님하고 나하고는 어떤 사이가 되어야 돼요. 어떤 사이. 어떤 사이가 되어야 하는데 어떤 사이, 어떤 관계냐? 나를 불러내서 ‘너, 평소에 눈떴을 때 내 앞에서 어떻게 살았어’ 하고 나를 책망하고 나를 심판하는 주님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아하, 내가 중심이 아니었고 나는 예수님의 똘마니였구나.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야만 하는 하나의 바비인형 같은 존재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둘 중에 하나 하세요. 뭐냐 하면 눈 감으면 사라지는 그런 하나님을 믿으시든지, 눈 감아도 여전히 계시는 하나님 같으면 그 하나님 앞에 미리 복종하든지 둘 중에 하나 해야 됩니다.
그 둘 외에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차이라는 것이 뭐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차이를 가지고 구원합니다.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고’ 차이나지요? ‘너는 인간이고 나는 하나님이고’ 차이나지요? 그 차이를 계속 멀찍이 쫙쫙, 벌어지게 하는 겁니다. 어려운 것 계속 어렵게 해 봅시다. 오늘 어디까지 어려운가 한번 구경해 봅시다.
자, 강물이 흐릅니다. 이 강가, 여기는 강북이고 여기는 강남이라 합시다. 이렇게 하천이 흐르면 여기는 강북이 되고 여기는 강남이 되겠지요. 그러면 강북과 강남 사이에 뭐가 흐릅니까? 강이 흐르지요. 여기서 강북과 강남을 벌어지게 만드는 뭐가 있지요? 이게 뭡니까? 강이지요. 만약에 강물이 말라버린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강북과 강남을 가를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똑같은 땅이기 때문에 가를 것이 없잖아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난 뒤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완전히 차이가 나 버렸어요. 하나님은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영생이고 우리는 뭡니까? 죽어가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우리는 ‘왜 죽는가?’를 알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왜?’ ‘제가 이런 것을 할 테니까 복 주세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한테 그걸 요구할 입장이 못 됩니다.
‘하나님이여!’ ‘왜?’ ‘주님하고 나하고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는 차이에 대해서 기도하고 차이에 대해서 물어야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남편과 아내하고 저하고는 어떤 차이가 납니까? 이렇게 차이에 대해서 물어야 되는데, 그 차이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하고 여기 강남이 자기가 물을 퍼내서 강북 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강을 흐르게 한 이유가 없잖아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하나님과 우리사이가 얼마나 벌어졌는가를, 어느 정도로 벌어졌는가를 보여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저주받아 죽었어요. 따라서 이 강남의 입장, 우리 인간의 입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강남에 사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저주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죄를 지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저주받은 것처럼 우리도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인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저주받은 인간이 귀신을 무서워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저주를 무서워해야지요. 저주를 무서워하면 귀신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여러분, 저주 받을 사람 같으면 죽는 것이 무서울까요? 저주가 무섭지 죽는 것은 안무서워요. 죽으면 눈감고 자면 되지 그게 뭐가 무서워요. 불교 중들이 뭘 모르냐 하면 죽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철학자들도 그래요. 죽으면 그만 아닙니다. 마지막에 소금치듯이 유황불이 있어서 영원히 거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거지 나사로 하고 부자하고 둘이 살 때는 차이가 없었어요. 차이가 있기는 있었지만, 부자와 가난한자 그런 차이가 있었지만 같은 인간이지요. 거지가 여기 살고 부자가 여기 사는데 부자는 매일 아침마다 거지를 보았고 거지는 매일 부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선에서 같이 사는 같은 인간인줄 알았습니다.
왜냐? 부자도 키가 176이고 거지도 키가 176이니까 높이가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거지가 천사에 받들려서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 불에 가니까 여기서 뭐가 벌어졌어요? 차이가 나 버렸어요. 평소에 살면서는 그 차이를 발견 못한 겁니다. 그게 부자의 잘못이에요. 그 부자가 하는 말이 ‘내 동생이 다섯명이 있는데 그 동생 다섯명이 내 꼴 되기 전에 빨리 나사로 살려 보내서 전도좀 하게 해달라’ 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말렸지요.
왜? 지금 거지 나사로가 동생들한테 다시 가봐야 똑같이 인간으로 볼 것이기 때문에 역시 그들은 차이를 못 보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모세의 글과 선지자가 있으니까 그걸 봐라’는 말이죠.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을 보면 거기서 뭐가 나타나요? 거기에 차이가 나타나요.
‘하나님과 우리와 메시아와 우리와 엄청난 차이가 나는구나. 그분은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마땅히 지옥가야 되고 그분은 의인이기 때문에 마땅히 구원받아야 된다’고 하는 그 차이를 아는 거예요. 거지가 훌륭한 사람 아닙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이 뭐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그 내용이 약속에 담겼습니다.
그 약속이 신약시대에 뭐냐?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 ‘아하, 우리 입장은 하나님 앞에 저렇게 저주받고 버림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십자가 지셨거든요. 따라서 죄라는 것과 우리 자신과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늘 나 혼자 하는 것 같은데, 원래부터 그랬기는 했지만, 답변해보세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우리가 저주받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차이가 없지요. 그렇잖아요. 죄인이니까 저주받는거잖아요. 차이 없잖아요. 차이 없으니까 없는대로 죽어야지 어떻게 해요. 그 다음에 죄인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택해서 부활시켜주고 구원하는 것은 그 차이는 누가 가져와야 돼요. 예수님이 가져와야 되지요.
예수님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몇일만에 살아났어요? 사흘 만에 살아났지요. 사흘만에 살아난 그 부활이란 차이를 죽어 있는 우리 택한 백성에게 집어넣어 버리면 우리는 죽은자가 마땅한데 누구 덕택으로, 누구 은혜로? 예수님의 성령의 은혜로, 부활의 은혜로 말미암아 ‘죽을 우리몸도 다시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11절.
‘너희가 성령이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너희 속에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라’는 이 차이가 여러분의 차이입니까? 내 차이입니까? 누구 차이입니까? 예수님이 손수 만들어 내신 차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왜 보느냐 하면, 이 말씀과 우리하고 너무나 차이가 나서 감히 말씀대로 지킨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그 차이를 느끼기 위해서 교회 나와야 돼요. 그 차이를 누가 극복해 주십니까? 오직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래서 성경에 주 예수를 믿는자는 어떻게 됩니까? ‘주 예수를 믿는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안합니까? 구원을 얻으리라.
네가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성경말씀대로 못살면 죄가 됩니다. 왜?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못살면 영광이 안되기 때문에 저주 받는데, 저주 안받기 위해서 노력해봐도 저주 받아요. 왜? 우리는 못지키니까. 왜? 차이가 나니까. 하나님이 지킬수 있는 것을 우리가 못지켜요.
아까 그 초등학생한테서 탕수육이 나옵니까? 못나오지요. 완전히 죽 되어서 나오지요. 안돼요. 되지를 못합니다. 되지를 못하는데 주께서 새로운 차이, 죽었다는 차이 말고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그 새로운 차이를 가지고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집어넣어 주면 성령은 부활의 영이 되어서 우리가운데 죽은 우리를 매일같이 살려내는 그 차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만큼이나 벌어진 그 차이를 가지고 그 차이 자체가 우리에게 능력이 주어져서 그능력으로 우리를 살려내면 우리는 매일같이 성경 보면서 ‘살아 있다, 나는 구원받았다’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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