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11-12 (무엇을 보았느냐)
렘 1:11-12 (무엇을 보았느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예레미야 1장 11-12절
제목 : 무엇을 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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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3-18 20:49
무엇을 보았느냐?
2009년 3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14
(렘 1:1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렘 1:12,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렘 1:13,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렘 1:14,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하나님과 선지자의 관계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당겨서 선지자의 운명에 담아내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전해야 하는 것처럼 선지자도 같은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에 갑자기 살구나무가 등장해서 보이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원한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잘 보았다’라는 것이 예레미야 대한 행위에 대한 칭찬일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다’는 것은 그냥 ‘보여져서’ 보이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달린 자는 다 보여지는 것이 보일 뿐입니다. 성질이 더럽고 악한 자들에게는 안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자질과 상관없이 지금 하나님의 사선이 예레미야 속에 들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 것을 예레미야도 같이 보게 해주시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대한 것만 골라 보게 되고 나머지는 안보게 됩니다.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게 되고 나머지는 놓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세상관을 따로 챙겨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인 본성마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는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예수님의 본성을 앞당겨 증거해야 될 자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절대 고독’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관계는 선지자에게 있으나마나입니다. 왜냐하면 사명은 그들에게서 오는 것도 아니요 그들을 보면서 선지자가 자기 의견을 참작해서 예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대 고독 속에서 선지자는 자신이 뭘해야만 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는지를 압니다. 즉 선지자는 자기 일을 가진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일이 주어진 자입니다.
이런 일은 선배 선지자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열왕기상 22:19-24에 보면, 미가야 선지자가 나옵니다. 이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고 되어 있습니다.
‘보았다’는 것은 남이 못 보게 되는 것을 보았다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볼 수 있는 것에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끼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드기야 선지자는 약이 올라서 미가야의 뺨을 친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알고 있는 신학을 동원시킵니다. 즉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가 말씀하더냐”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만 알 수 있다는 공식을 적용시킵니다. 하지만 이런 가짜 선지자는 해답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해답이 나와있습니다. 그 해답은 오직 십자가 복음과 관련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이 묻기를 “제 딸이 대학 원서를 내는데 의대를 가야할지 아니면 법대를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행위로 이미 종결되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까지 낮아지심이 하나님의 뜻이요 유일한 뜻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딸이 의대를 가던지 법대를 가던지 아니면 대학을 들어가지 않던지 상관없이 마음을 낮추되 십자가 앞에서 단독자가 되는 그것이 이미 결정 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속성을 쏟아내고 있다면, 신약의 성도는 이미 오신 예수님의 속성을 뿜어낸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살구나무를 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도 이 십자가 복음과 관련있습니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모세와 떨기나무의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다가 흘낏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이하게 여겨서 떨기나무 쪽으로 다가올 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와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살구나무에 주목하게 합니다. 그 살구나무의 의미는, 앞으로 모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뜻에서 살구나무를 미리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의 입장에서 보면 나중에 모든 말씀이 과연 성취되고 난 뒤에 비로소 그 살구나무를 보여주신 취지를 알게 됩니다. 그 취지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심판 가운데서 살아남을 예레미야 본인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즉 살구나무는 모든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증거하고 목격해야 될 목격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두 번째 보라고 하신 계시는 심판에 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 계시의 시작이지요. 이처럼 심판으로 시작하지 못하는 예언은 예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예언이 십자가 죽으심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 두 번째 보인 계시가 ‘끓는 가마솥’입니다. 그것이 북쪽에서 온다는 겁니다. 즉 방향성과 그 덮칠 내용물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신 겁니다. 북쪽에서 끓고 있는 가마솥의 기우려지는 날에는 그 뜨거운 금속물이 남쪽으로 이글거리면 쏟아져서 그 경로 안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녹아지고 불에 타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예레미야가 증거할 모든 내용은 곧 끓은 가마솥의 기울기와 그 심판의 정당성에 관한 겁니다. 그 뜨거운 용액이 어디를 덮치느냐, 왜 덮치느냐 하는 겁니다. 공연히 하나님께서 가마솥을 북쪽에다 걸어두신 것이 아닙니다. 들이붓기 위해서 유다 나라 북쪽에서 불을 집히신 것입니다.
심판 없는 구원도 없고, 심판을 전하지 못하는 사명자는 결코 예레미야가 아닙니다. 더 이상 사람의 눈치나 코치가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에게 있어 하나님이 더 무서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이게 하는 것을 보인다고 외쳐야 될 사명이 바로 오늘날 선지자인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성도가 늘 확정된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를 증거하는 증인되게 하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0-12-13 21:24
002강-렘1장 11-13(무엇을 보았느냐)-jer0903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장 11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11-13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는데 있어서 사람과 더불어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예fp미야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선지자가 장차오실 메시아를 예고하는 예고편이 되기에 먼저 보낸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그 말은 장차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 사람이 사는 세상을 방문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을 포도원에 보냈어요. 종들을 보냈다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아들을 보낸다는 것을 미리 예고하는 식으로 보낸 겁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를 보낼 때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선지자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당하게 되면 자기가 골라서 보는 재미는 사라집니다. 주님께서 봐라, 하는 것만 봐야 돼요. 괜히 주님은 관심도 없어하는 것을 주워 모아서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 세상이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해 봐야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네 마음대로 살래? 너, 선지자 아니야? 너 뭔데? 네 맘대로 그렇게 하면 되겠어?’ 하고 책망 받을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욕망대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고르고 골라서 그것을 가지고 세상은 이렇다, 인생은 이렇다, 세상경제가 어떠하다, 행복은 이렇고 불행이란 이런 것이다, 이렇게 자기 맘대로 규정을 하지요. 그런데 선지자한테는 그런 자유가 허락되지를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물어요.
1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이 대목에서 지금 예레미야가 자기도 뭔가 세상을 들여다 볼 자유도 있고 세상에 대해서 평가할 능력도 있는 사람인데 그것을 전부 다 무시해버리고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라고 지적하는 그 순간에 이미 예레미야 속에 하나님의 눈동자, 시선이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지금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 보게 되면 그 뒤의 말씀 “네가 잘 보았도다.”라는 일치성을 드러낼 수 있지요. 그러니까 선지자가 세상을 볼 때 자기 맘대로 골라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라, 하는 것만 보면서 그 대상에 대해서 외쳐야 될 것을 외쳐야 되는 겁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단속을 당하고 구속을 당하고 모든 자유가 제한당하는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절대로 자기 맘대로 아버지의 일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다.’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다. 그분은 나의 아버지인데 너희들은 그 아버지를 모르기에 나를 모른다.’고 되어 있어요.
이것을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지금 예레미야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이 세상에 60억의 인구가 있지만 일체 그런 것을 칼로 자르듯이 다 잘라버립니다. 예레미야에 걸쳐있는 일가친척, 친구, 동창생, 국적이 뭐며 부인이 누구며 그런 것을 다 잘라버려요. 다 잘라내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예레미야 혼자 남아요.
홀로 된다는 것. 『예언자』라는 책을 썼던 아브라함하셀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예언자의 특색을 한마디로 끄집어내라고 한다면 ‘고독’입니다. 어떤 사람은 취미가 고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취미가 아닙니다. 고독입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서도 안 되고 누구의 말을 두렵게 느껴서도 안 됩니다.
자기에게 누군가 ‘예레미야야, 너 겁나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해서조차도 그 존재감을 인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을 동의하지 말고 무시하라 그 말입니다. 모든 인간을 무시해버려요. 마치 예수님처럼. 고독입니다. 절대고독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가지고 단독자라고 이야기했는데 하나님과 어떤 사람이 만나게 되면 만나는 그 짧은 순간은 일가친척, 가족 아무도 없는 단독자로 돌변하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 보기에는 독백인데 자기 안에서는 대화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만약에 세상 것을 두리번거리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분위기가 전혀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하나님하고 안 맞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단독으로 만나게 되면 주변에서 태풍이 불고 불이 난다든지 하는 것도 별 문제가 되지를 않아요.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것처럼 이사야가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나 자신,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은 그때 쓰는 말이에요. 죄인이라고 하니까 옆 사람은 나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는데, 이렇게 자꾸 옆 사람과 비교하는데 죄인이라는 말을 할 때는 비교대상은 모두 사라지고 피 흘리고 있는 예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서 일가친척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런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목사가 뭐라고 해도 그런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십자가 지신 주님 외에는 달리 보이는 자가 없어야 돼요.
그 때에 비로소 죄인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지 다른 일에 분주한 가운데, 서류 작성하는 가운데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괜히 겸손한 체 하는 위선입니다. 그것은 죄인이 아니지요. ‘예레미야야, 무엇이 보이느냐.’ 하는 그 순간부터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보는 것만 봐야 되는 절대종속의 관계에 돌입하고 마는 겁니다. 땡잡은 거지요.
하나님한테 한 번 당해보세요. 땡 잡았어요. 어느 정도로 땡 잡았느냐, 더 이상 사람의 존재가 두렵지 않을 정도로 땡 잡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내게 계시를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떤 스승이 나에게 계시를 주는 것이 아니니까. 위대한 설교나 목사가 나한테 계시를 주는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계속 십자가를 통해서 직접 나에게 공수되어 전달돼요.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어떤 사람을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올 때 ‘하나님, 제 모습 괜찮지요? 제 모습이 이래서 찾아오셨습니까? 제가 너무 잘나가니까 찾아오셨습니까?’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두고 찾아왔기 때문에 내가 단독적으로 따로 하나님께 바치고 드릴 것이 필요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한테 일어날 일을 내게 쓸어 담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지자는 예수님보다 미리 와서 장차 오실 예수님의 부분 부분들을 담는 바구니가 되고 성도 같은 경우에는 이미 오신 예수님의 요소요소가 빈 바구니에 담기듯이 담기게 되는데 담을 때 우리는 하나의 단독자가 된다는 겁니다.
누구 눈치 보거나 코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인간이 있습니까?
참 희한하지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증인이에요. ‘내가 이렇습니다. 나는 이렇게 잘났습니다. 내가 당신 보기에 어떻습니까?’ 다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인데 특이한 종족이 생겼습니다. 오스 기니스라는 사람은 이걸 가지고 ‘제 3의 종족’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제 3의 종족이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이 사람들은 그 속에 뭐가 담기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요소요소,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속성이 담겨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으로 믿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고 정작 공포를 느끼는 주님이 보라고 하는 것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이 보라고 하지도 않은 엉뚱한 것을 가지고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그 문제로 귀속돼요.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말씀 못 전하겠습니다.’ 하고 남 핑계대지 마세요.
쓸데없는 변명하지 말고 남 핑계대지 마세요. 본인이 주님이 보라고 하는 것을 보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토해내면 되는데 ‘저 사람 때문에 성경공부를 못했습니다.’ 혹은 ‘저 사람 때문에 기도가 방해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단독자인데. 선지자의 이러한 특징에 대해서는 열왕기상 22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미가야 선지자가 등장하는데 거짓선지자의 숫자가 400명이니까 400대 1입니다. 400명의 거짓선지자들은 단독자가 아니고 서로서로를 봅니다. 일종의 노회, 총회지요. ‘아이고, 김 목사 왔습니까? 어이구, 최 목사 잘 있었습니까?’ 이것이 하나의 힘이 돼요. 전부 힘 되는 사람이 옆에 포진해 있습니다.
그들은 400명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입을 맞추었어요. ‘이번에 임금님이 와서 묻게 되면 다 승리한다고 합시다. 전라도 최 목사님, 가하십니까? 강원도의 이 목사님, 가하지요? 제주도의 변 목사님, 이번 투표에 가표를 던지세요.’ 연락 다 했어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다 되었어요. 그런데 그 400명중에 한 사람이 골치 아픈 인간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진짜 선지자에요. 진짜 선지자가 되어서 수평을 보는 것이 아니고 수직을 보는 사람이에요. 왜 그런가, 남들한테 믿음 좋은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미가야 자기의 본인문제입니다. 내가 받지 않은 것을 전하면 본인이 당합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안 무서워요. 하나님을 시시하게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주 우습게보고 대신 총회, 노회라는 것을 아주 무섭게 봤습니다.
자기 밥벌이니까, 자기생계가 달렸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니까 그들의 눈치를 살피지요. 그런데 미가야는 ‘야, 저 사람보다 믿음이 더 좋다.’라는 비교의 차원이 아닙니다. 나는 선지자, 선지자가 무엇인가, 선지자는 기본이 되어 있어야 돼요.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처럼 보는 것만 보고 외칠 것만 외쳐야 되는 그 문제가 본인문제에요.
선지자가 이것을 해서 돈을 번다든지, 생계를 유지하는 그것은 나중문제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기본이 뭐냐, 하나님이 알려주고 담아주는 그 속성, 장차올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만 외쳐야 될 그 기본 틀, 기본 틀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야구선수가 기본적으로 수비가 돼야 돼요. 수비가 되어야 일본을 4대 1로 이기는 겁니다.
야구선수가 이것을 해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큰 돈 벌고 그런 것 이전에 자기 앞에 오는 공을 제대로 잡아서 1루수에 던져서 아웃을 시키는 것, 내가 무엇을 해야 되고 나는 어떤 사명을 지녔으며 이 사명이 내 목숨보다 내 친구보다 내 팬들보다 나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 사람이냐, 여기에 충실한 거예요.
그래서 미가야는 자기가 본 것을 사람이 무섭다 혹은 안 무섭다 하는 그 사람은 아예 값어치도 없고요, 하나님이 무서워서라도 자기가 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이 뺨을 때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 인간 저럴지 알았다.’ 하면서 뺨을 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우리 400명을 떠나서 너 하나에게 모여들 수 있느냐.’
그들은 선지자니까 신학은 안다 그거지요.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예언할 수 있다, 하는 그 신학은 정통했는데 문제는 신학은 신학이고 그것은 지식이었고 문제는 신학을 떠나서 실제로 성령 받은 사람하고 신학을 한 사람하고 차이가 그렇게 나는 거예요. 네가 뭔데 노 혼자 은혜를 받아, 그런 식이에요.
그러나 미가야는 남들을 업신여기고 우습게 만들기 위해서 발언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바르기 때문에 바른 소리를 하는 거예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이 진리고 복음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일가친척이 ‘그런 식으로 하면 네 자리만 날아가지. 네가 계란으로 바위 친다고 해서 한국교회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를 달라지게 하기 위해서 그런 소리를 하면 그 인간이 이단이에요. 지금 한국교회가 달라지고 안 달라지고는 선지자의 소관이 아니고 우리 주님소관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를 말아먹든 달라지든 일체 그것은 성도의 소관이 아닙니다. 성도는 무엇이 옳은지 그것만 외치면 그만이에요. 무엇이 옳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 속성이 옳지요. 해답이 나와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제 아들이 ‘법대를 갈까, 의대를 갈까’ 하고 있는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찬송가에 보면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하는데 도무지 주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주의 뜻은 이미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수학 1 정석 해답지가 뒤에 붙어 있듯이 이미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 바로 해답이에요.” ‘네가 예수의 마음을 품어라. 십자가지심이 바로 그 마음이다.’ 마음을 낮추는 거예요. 어디까지 낮추는가, 바닥을 치는 것, 십자가에까지 바닥을 치는 것입니다.
해답은 나와 있는 거예요. 법대를 가도 괜찮아요. 의대를 가도 괜찮아요. 가면서 ‘내가 살길은 바로 십자가밖에 없음을 늘 피부로 접촉하면서, 그 십자가와 스킨십을 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해답은 끝났습니다. ‘목사님, 시어머니가 교회를 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래도 교회는 가고 싶은데 어느 것이 주의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가는 것도 주의 뜻이 아니고 안 가는 것도 주의 뜻이 아니에요. 마음을 안 낮춘 거예요. 시어머니를 하나님보다 더 무섭게 여긴 그것이 잘못이라는 말이지요. 진짜 십자가 앞에서 단독자가 되고 자식, 남편, 아내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십자가 피 흘린 주님만 바라본다면 거기서 사명이 주어지게 되고 사명은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내 증인이 되어라.’입니다.
해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이미 나와 있는 해답을 헷갈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앞뒤좌우로 못 보게 하느냐, 그것은 선지자의 하는 말을 통해서, 선지자가 보는 시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사람에 한해서만 인정하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그것을 신자라고 합니다. 세상 되어가는 모든 것이 말씀에서 이탈되는 법이 없구나, 하는 것을 오직 신자만이 확인하면서 즐거워하면서 행복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지자는 뭐냐, 자기 일을 가진 게 아닙니다. 자기 일을 가진 게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있을 뿐이지요. 성도가 그러합니다. 성도가 선지자니까.
특별히 가정이나 여타의 여러 가지 일을 할 때 여러분 자신의 일이라고 보십니까? 주께서 주신 일입니다. 택배일도 하시고 이런 저런 일을 하시는데 다 주께서 주신 일입니다. 내 소유의 일이 아닙니다. ‘주여, 이 일을 해서 헌금 많이 해서 영광 돌릴게요.’ 그런 법은 없습니다. 헌금 하고 안하고와 관계없이 이미 뭔가 하고 있다는 것, 뭔가 종사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주에게서 주어진 일입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지금 살구나무 본 이야기 앞서서 선배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어렵게 이야기했는지 모릅니다. 떨기나무가 있습니다. 원래 떨기나무에는 불이 안 붙어요. 그런데 모세가 양을 몰고 가다가 불이 붙은 떨기나무를 봤습니다.
내려가다가 ‘어, 내가 뭔가 봤지. 이것이 산불인가?’ 가다가 다시 돌이켜서 저게 뭔가, 하고 불붙은 떨기나무쪽으로 다가가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어렵다고 한 것은 뭐냐,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을 때에 그 특이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모세야, 떨기나무에 불이 붙을 수 있느냐?’ ‘그거 참 희한하네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에게서 일이 주어지게 되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처럼 모세 너의 인격이나 너의 자질이나 너의 소질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오해하는 것이 그겁니다. 세상에, 달란트를 키워라, 뭔가 개발해라, 그런 소리들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일이 안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히려 단독 자 되는 것이 일이지 갖고 있는 재주나 소질, 그런 것 가지고는 일이 안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지금 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맨 날 보이니까요. ‘이목사야, 무엇이 보이느냐?’ ‘떨기나무가 보입니다.’ ‘그래,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김 집사님, 무엇이 보입니까?’ ‘떨기나무가 보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이 보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에요. ‘주여, 제가 떨기나무를 가지고 어떻게 할까요?’ 떨기나무를 가지고 우리가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뭐가 보이느냐?’ 맨 날 그것만 묻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는 보기만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참 쉽죠, 잉! 문제는 교회 오면 성도인데 밖에 나가면 교인이 되어가지고 자꾸 사람만 바라보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뭐가 보이느냐?’ ‘날 사기 치는 인간들이 보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잖아요.
교회 있을 때도 주님의 십자가를 보는 것처럼 밖에 나가서도, 월, 화, 수, 목, 금, 토에도 주님 보는 것을 봐야 될 텐데 밖에 나가면 자유다, 해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기대하는 것, 소망하는 것, 욕망하는 것, 되고 싶은 것, 마음속에 음욕 품기, 이런 것만 자꾸 보이니까 여자가 보이고 미워서 때려죽이고 싶은 사람이 보이니까 자꾸 살인자가 보이고, 분통이 터지니까 ‘저런 인간은 홈런 쳐버려야 돼.’ 하면서 갑자기 야구하는 장면이 보이고 ‘박지성이는 뭐하고 있는 거야. 겨우 한 골 넣고.’ 하고 맨 날 축구만 보이고.
언제 주님께서 ‘근호야!’ ‘예’ ‘박 지성이가 보이느냐?’ ‘예, 보입니다.’ 이런 계시는 준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맨 날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 대표 팀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겠습니까?’ 되도 않는 기도제목을 내놓는 거예요.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제목으로 가져와서는 ‘주여, 주의 뜻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의대를 갈까요, 법대를 갈까요?’ 쓸데없는 자기 욕망, 자기 자식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주의 계시라고 가져오니 주께서 응답할 리가 있습니까?
살구나무 보는 것, 이것이 예레미야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낯설기 짝이 없는 선택사항이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야!’ ‘예’ ‘무엇이 보이느냐?’ ‘살구나무 보입니다.’ 예레미야가 지금 살구나무 가지고 농장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략되어 있지요. ‘하나님이 살구나무 보이게 하시니 나도 살구나무 보이네요.’
그겁니다. ‘이제는 정조준 했거든요.’ 총 쏠 때 가늠쇠와 가늠자가 일치하는 그 위에 표적이 놓여서 정조준 되듯이 주께서 정조준 시키는 거예요. ‘예레미야야, 좌로 2, 위로 3, 무엇이 보이느냐?’ ‘살구나무 보입니다.’ ‘나도 보고 있거든.’ 이렇게 보는 거예요. ‘예레미야야, 또 뭐가 보이느냐?’ ‘펄펄 끓는 가마솥이 보이는데 막 넘어지려고 합니다.’ ‘그래 잘 보고 있다.’
이것은, 이 보이고, 보이고, 보이고, 보이는 이 내용의 해답은 고맙게도 우리 신약의 성도에게는 이미 알려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데 이것이 예레미야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두 개로 갈라지죠. 하나는 살아 있는 살구나무요, 또 하나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 그 내막이 앞당겨서 지금 예레미야에게 오니까 이 예레미야가 보고 있는 살구나무에 뭐가 덮치느냐하면, 끓는 가마솥이 덮치게 돼요. 살구나무계시 +끓는 가마솥 = 십자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의 하실 일이 이 두 가지로 다 보이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보고 있는 것은 모든 계시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실 일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나라의 심판과 구원입니다. 그런데 먼저 심판부터 이뤄지죠. 북방의 끓는 가마솥은 그냥 끓기만 하는 가마솥이 아니고 기울어지는 경사면이 생기고 그 경사면이 생겨서 그 가마솥에서 끓는 모든 용액이 흐르는 모든 곳은 다 무서운 심판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렇다면 끓는 가마솥이 무서운 심판이 되어서 흘러내릴 때 거기서 과연 살아남을 자가 누구밖에 없겠는가? 이것은 살구나무 같은 예레미야 한 사람 남고 나머지는 다 죽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께서 어떤 계시를 보여준다 하는 것은 계시 보여주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아야 된다가 아니라 구원받은 입장에서 이제는 주의 종이 되어서 마음껏 원 없이 주께서 ‘저거 봐라, 저거 봐라.’ 하는 식으로 갈 수 밖에 없지요. 살구나무를 예레미야도 보고 있고 주님도 보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보는 것을 살구나무 보듯이 보는 겁니다. 그렇게 해 놓고 ‘내가 모든 말씀을 이루리라.’ 합니다.
그러면 살구나무는 뭐냐? 그 뒤에 해설이 나와 있지요. 모든 말씀으로 인해서 성취된 성취물입니다. 11절, 12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말씀을 다 이루게 되면 남는 게 살구나무 남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살구나무가 누구냐, 예레미야지요. 장차 더 나가면 예수 그리스도지요. 제가 강의한 어느 녹취록을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70이레가 곧 다니엘이라.’ 하는 겁니다. 구득영 목사님이 제목을 그렇게 달아놓았던데 제가 강의를 그렇게 했던 모양입니다.
내용을 보니까 그 논리가 죽 나와 있어요. ‘아하, 계시 받은 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상징물로서 움직이는구나. 미리 앞당긴 예수 그리스도로서 상징물로 움직일 때 선지자가 보고 있는 것과 보고 있는 본인을 일치시켜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살구나무 입장에서 말씀성취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구나.’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움직이는 거예요. 결국 말씀이 성취되게 되면 살구나무가 그 표시를 내는데 아마 말씀 다 이뤄지면 예레미야가 이랬을 거예요. ‘아하, 그때 그 살구나무가 보여준 계시대로 다 성취되었구나.’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이 무서운 심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로서 움직이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의 계시를 볼 때 ‘우리가 이 말씀 지켜야 구원받습니까, 저 말씀 지켜야 구원받습니까?’ 하지 마시고 이미 성령이 임하면 주께서 사용하셔서 이제는 주께서 머리를 제키면서 보게 하시는 대로 보면서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산다는 것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한테 해당되는 것이 맞습니다. 예레미야의 이름 자리에 우리 이름을 집어넣어도 괜찮습니다. ‘아무개야, 무엇이 보이느냐?’ ‘살구나무 보입니다.’ ‘살구나무가 뭐냐, 바로 말씀 성취된 증거물이 바로 살구나무다.’ 그 말씀이 성취되면 구원받을 자는 구원받고 살아남을 자는 살아남고 저주받을 자는 저주받고. 이것이 살아 있는 살구나무라고 표시됩니다.
그 다음에 그 모든 살구나무 건지기 위해서 그 무서운 심판이 외부에서 지금 대기하고 있는 겁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안목에서 보시는 겁니다. ‘목사님, 이것을 어떻게 전합니까?’ 우리보고 전하라는 말 안했어요. 그냥 보이는 대로 목격자로서 예수님을 어떤 현장에서든 외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레미야가 사람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주님 앞에 똑바로 설 수 있는가를 더 걱정하고 더 염려했습니다. 저희들이 세상 무섭다고 주님 앞에 하소연 하지 말고 내 자신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토해내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우리교회
10-12-13 21:33
오용익 목사님의 녹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