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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9. 2. 27) 1강 녹취자유게시판디모데후서

광주 강의(09. 2. 27) 1강 녹취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9. 2. 27) 46-1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보면 ‘증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증인이란 말은 증거하는 사람인데, 쉽게 말하면 ‘목격자’이고 ‘그 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누가복음(1:2)에 보면 증인을 ‘목격자’라고 했어요.

목격이란 것은 우발성을 말합니다. ‘내가 그것 봐야지.’가 아니라 보여지는 거예요. 예수님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알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고 신학을 해도 예수님을 몰라요. 다만 ‘성경에 이런 것이 있더라.’는 것은 알지요. 이것은 아직 증인, 목격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날 성경 말씀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는데 이것은 우발성입니다. 우발성이란 말은 외부에서 나에게 허락 없이 그냥 찾아오는 사태, 혹은 사건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우발성이 있기 전까지는 나의 팽창을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선택해서 행했는데, 우발성이 주어지면 나를 누가 집어삼키느냐 하면 사태와 사건이, 우발성을 유발했던 외부인이 나를 집어삼키는데, 그때부터는 나는 사라지고 나를 삼킨 그분에 대해서 전하는 것이 바로 증인이란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증인이 되고 싶다.’고 나오는 것은 진정한 증인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자 해서 되었다.’는 것인 다 거짓말입니다. 증인이 되고, 안 되고는 이미 내 소관을 떠난 문제입니다. 외부에서 덮치는 우발적인 사건에 휘말리다 보니까 나는 목격자로써 만약에 법정에 나가서 증언하면 증언해야 돼요.

판 사: “그 날 새벽 3시에 그랜저 승용차가 오토바이를 치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까?”

목격자: “저는 순진한데요.”

판 사: “순진한가를 물은 것이 아니고, 그 날 사고를 분명히 목격 했습니까?”

목격자: “저는 교회 다니는데요.”

판 사: “교회 다니든 말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 사고를 보았는지 그것만 말씀하세요.

증인은 결국 뭐예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죽었다? 내 죄를 씻기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구약에 약속된 어린양의 피. 옛날 애굽에 죽음의 사자가 찾아 왔을 때 모든 집안의 맏아들이 다 죽었는데 안 죽은 맏아들이 있었지요? 그 때 뭔가 조치를 했는데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랐더니 그 무서운 하나님의 사자가 그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오해하면 안 돼요. 훌륭하다고 격려하면서 악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훌륭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봐 준 거예요. 세상에 훌륭한 사람은 없어요. 훌륭한 교인도 없고, 훌륭한 성도도 없습니다.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훌륭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보고 넘어가 준 거예요.

시험을 치는데 담임선생님이 마침 자기 아버지라. 얼마나 무서운 감독관인지 커닝(cheating)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그런데 보니까 자기 아이가 커닝을 하고 있어요.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줬어요.

“너 똑바로 해. 제대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 정확히 똑바로 해서 구원 받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용납하고 넘어가 주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간과한다’(롬3:25)고 합니다. 그냥 못 본 척 넘어가 주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짓는 것을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추방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옳고 그름을 판별합니다. ‘이것은 하라고 했으니까 하면 되고, 이것은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안 하면 되겠구나.’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지옥 갑니다. 그런 사람 있었지요? 부자 청년.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습니다. 아무 소용없는 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묻지도 않는 것을 제 스스로 문제내고 스스로 답을 했어요.

구원 받는 힘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도를 닦고, 성인 되고,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하는 것은 다 헛수고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은 선과 악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나무의 사고방식과는 소통이 안 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새삼스럽게 이런 인간을 상대할 이유가 없어요. 새삼스럽게 “너 이것 잘못했으니까 반성하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줘서 합격시켜 줄게.” 이럴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생명나무 관점에서 오게 되면 선악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어, 그런 식으로 구원 받습니까? 나는 착하면 구원 받는 줄 알았는데. 참 이상하네.”

여러분 집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지요. 조종사가 상공을 비행할 때 그 아래에 있는 집 주인에게 찾아가서 허락을 얻고 통과합니까? 그냥 지나가잖아요.

낯설기 짝이 없는, 사람의 머리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이 올 때, 그 때 우리는 목격자가 되는 겁니다. 목격자란 말은 우발성이기 때문에 자기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구원 받을 것이다.”라는 예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로 구원 받는다.’ 이런 말은 교회 다니면 들을 수 있어요. “예수라는 분이 있는데, 정치범으로 죽었데. 그런데 사흘 만에 부활했데.” 이런 이야기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밀어내면 됩니다. 하지만 밀어냈던 내용이 어느 날 진실로 낯설게 다가오면 그 사람은 하나의 목격자가 되고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런 목격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나는 착합니다. 나는 기도 많이 했습니다. 나는 전도 많이 합니다.”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목격한 것만 이야기하면 돼요. “새벽 3시에 그랜저가 오토바이를 치고 가는 것을 증인은 봤습니까?” “예, 봤습니다.” 본대로 진술하면 돼요.

진술을 하면 피고 측에서 “당신은 그 시간에 혹시 술에 취해 사물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었습니까?” 등등의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그래도 “나는 내 두 눈으로 틀림없이 보았습니다.” 상대가 위협을 하고 협박을 해도 본 것은 보았고, 그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격자입니다.

그래서 목격자 되는데 있어서 경제 파탄은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올해 6학년 담임 맡은 것과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목격자가 분명히 없을 것 같은데 희한하게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낯설게 구원된 자들이 툭툭 불어져 나온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 목격자들이 서로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이렇게 목격자가 된 배후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작용을 했기에 증인이 되었는지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본문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뭡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못 본 척하고 지나갔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를 보고 건너가서 구원했다는 그 원칙을 알면 되는 겁니다.

이 목격자들에게 능력이 주어지는데, 이 능력을 주시는 분이 우리의 대리인이 됩니다. 이 대리인을 메시아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서운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대리인이 하나님과 상대해서 우리를 영원토록 천국까지 인도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구원 받는데 있어서 대리인을 뽑아서 대리인과 하나님이 상대한다는 그 계획을 누가 세웠습니까? 하나님이 세웠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로 해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쫓겨나서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천국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데, 쫓겨나온 사람은 영어를 모르고 한국말만 하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기에 아무리 귀가 있고 눈이 있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못 알아듣기만 하면 괜찮겠는데 자꾸 오해를 해요. 구약에 십일조 이야기가 나오니까 ‘아하, 십일조 하면 복 받는구나.’ 이런 식으로 자꾸 오해를 한다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니까 ‘주일에 예배를 드리라는 말이구나.’ 이렇게 오해를 해요. 사도행전에 전도하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전도해야 구원 받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이 오해들이 모여서 오늘날 성당과 교회가 생겼어요. 이것은 인간들의 오해의 산물이에요. 교회, 성당으로 구원이 안 되는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 교회와 성당. 즉 기독교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오해를 해요.

사람들의 이 오해가 어디서 비롯됐는가 하면 ‘내가 구원 받는데 내가 뭔가 기여해야 되지 않겠는가?’ 내 운명이고 내 미래인데 내가 뭔가를 해야 될 것이라는 선악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하나님이 그저 구원해 줘도 그저 주신다는 것을 생각 못하고, 이것은 너무나 낯설기 때문에 그저 구원해 줘도 뭔가 구원 받으면서 살살 빌어야 되고, 뭔가 양보해야 되고, 마음을 낮춰야 되고, 회개를 해야 하고 그래야 구원 되는데 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또 오해를 한단 말이지요.

이러한 오해 때문에 심지어 베드로도 어린 소자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요. 어린 소녀의 낯짝이 의식되어서, 타인이 의식되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이 이걸 안다고 치고, 이제 남은 과제가 뭔가 하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과하심으로 거저 구원하시는지, 그 내력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동일성을 유지하는데서 인간입니다. 어렵지요? 두 살 때의 나와 스무 살 때의 나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여기에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억설이 있고 하나는 신체설이 있어요.

기억설로 해 봅시다. 2살 때의 나와 20살 때의 나와 같다. 왜? 2살 때 집 앞 개울에서 장난치다가 다쳤는데 엄마가 약을 발라주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러면 묻지요. “‘나는 두 살 때부터 기억이 난다.’ 라는 기억을 두 살 때부터 나는 나라고 생각했던 그 기억을 당신은 몇 살 때부터 기억했습니까? 일곱 살 때 했습니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한쪽은 출생부터 죽음으로 가는데, 다른 한쪽은 늙어서부터 점점 더 어린아이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출생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가는 것은 기억이 누적이 되잖아요. 일곱 살 때 어느 유치원에 다니고, 아홉 살 때 어느 초등학교 다니고 이런 기억이 되는데, 늙어서도 어린 시절의 일을 기억한다면 그 기억이 어린아이 때의 기억이냐 어른 때의 기억이냐 하는 문제가 생기거든요.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 7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된 영화인데, 참 다행스럽게도 늙은 때의 그 기억이 어린아이가 되니까 다 없어져요. 자기 부인이 할머니인데 자기는 어린아이가 되었지요. 자기 아내에게 “할머니 누구세요?” 이러고 있어요.

늙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치매에 걸리면 자기 아들에게 “여보!” 라고 해요. 한 마리로 해서 개판이라. 30대에 예수 잘 믿었어요. 나이 들어 치매에 걸리면 “예수가 누구세요?” 이래요. 그 때 죽으면 그 사람 구원 받습니까? 난처한 질문이지요.

기억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살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하다고 여겼던 그 시점이 일곱 살 때냐, 아홉 살 때냐, 언제냔 말이지요. “나는 아홉 살 때, 두 살 때의 나와 앞으로의 내가 같다는 것을 알았다.” 라고 해도 이건 문제가 해결 안 돼요. 아홉 살 때 알게 된 아홉 살 때의 기억은 몇 살 때부터 알았느냔 말이죠.

신체설은 더 위험하지요. 사람이 신체에 자아가 매달려 있다면, 신체가 만약에 변형된다면 자아 정체성은 난처하게 돼요. 사람의 두뇌가 이렇게 있는데 앞에는 전두엽이 있고 뒤에 뇌관이 있고 시상이 이렇게 있는데, 전두엽 이 부분이 무슨 부분이냐 하면 자아가 형성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라내면 자아가 없어요. 이 부분을 잘라내면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모르는데 계산도 하고 시장도 보고 다 해요. 그렇지만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니까. 그렇다면 여기에 다른 기억이 와버리면 다른 사람의 두뇌가 이식된다면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기억을 ---

기억은 전체에 다 퍼져 있어요. 단기기억은 해마라는 곳이지만 장기기억은 두뇌 전체에 퍼진다고 제가 울산 강의 때 이야기했지요. 왕왕 울리듯이 다 퍼져요. 체육관에 종을 치면 종소리가 체육관 전체에 퍼지듯이 인간의 두뇌는 공명현상이 있어서 기억이 온 전체에 다 있단 말이지요. 단기기억 말고 장기기억은 그렇게 됩니다.

자아 속에서 동질성을 찾는데 만약에 이것이 다른 사람의 기억이 들어오면 몸은 내 몸인데 타인이 자기 행세를 한단 말이지요. 신경 전달물체에 변화가 일어나면 이런 일이 많이 있어요. 노래에도 그런 것이 있잖아요. “내 안에 내가 많다.”는 가사가 있어요. [가시나무 새] 이것은 정신분열증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자아는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경험했던 타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겁니다. 타인A, 타인B, 타인C 이렇게 타인이 다르면 거기에 맞춰서 자아A, 자아B, 자아C가 발생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억이 다 다르니까.

술 취했을 때의 인간하고 술 깨고 난 후의 인간이 다르잖아요. “아, 필름이 끊겼네.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다.” 이래요. 심지어는 아침 다르고 저녁 달라요. 그것은 단기기억 때문에 그래요. 새벽기도 가서 은혜 받아놓고 오후에 싸움하고. 이건 단기기억 때문에 그래요. 교회 왔을 때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았는데 교회 문 열고 나가면 다 잊어버리고. 단기기억이 시넵스(synapse)에 연결이 잘 안 되어서 --- 왜냐하면 더 충격적인 타인이 와버리면 기존의 타인이 밀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람의 자아가 A, B, C가 되면 자아가 어떤 작용을 하느냐 하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예수님에게 잘 보이도록 나를 밀어줘요. 그러면 내가 나의 후원자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나의 후원자가 되어서 나라는 인간을 딱 설정해 놓고, 앞에 예수님을 상상해요. “예수님, 내가 왔어요.” 그러면 나의 눈동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시선이 있죠. “예수님, 제가 나거든요.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시니까 제가 이렇게 성의를 표시하는데 주님께서 잘 봐주셔서 주의 나라에 저를 넣어주세요. 좀 죄 짓고 나태하고 교회 빠지더라도 봐 주세요.”라고 그것을 쳐다보는 제 3의 눈이 또 있지요.

제 3의 눈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제 3의 눈이 뭘 또 집어넣느냐 하면 제 3의 타인을 집어넣어서 “애가 나한테 너무 신앙에 방해하지 않도록 좀 조치해 주세요.” “너 이놈! 똑바로 해. 까불면 주님이 가만 안 계셔.” 하고 있어요. 웃겨요. 내가 두 개가 되어서.

꿈(혹은 기도) 속에서 이런 일 없습니까? “주님, 내가 지금 두 시간 반 동안 기도하는데 이것은 꼭 응답하셔야 합니다. 이번에 우리아들 행정고시 시험 치는데 합격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신앙인지 흥정인지 도대체 분간이 안 됩니다. 그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실제적으로 내 몸은 매일같이 다른데 이 다른 것을 동일성으로 유지해야 내가 된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아2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자아1을 하나로 뭉쳐야 내가 마음이 편하겠다고 주장하는 자아2가 있는 거예요.

왜 자아2가 이런 소리 하는가 하면, 남들 보니까 전부 한 신체에 한 영혼 하나로 동일성을 유지하니까 나도 저 사람처럼 동일성을 유지하고 싶은, 타인을 곁눈질해서 남을 보고 그것을 나의 이미지로 잡는 겁니다.

라캉은 말하기를, “나는 나한테 없고 내가 있는 자리는 남들의 욕망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내가 있는 자리다.”라고 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욕망이 바뀌면 얼른 나를 빼서 어디로 갑니까? 이사를 가지요. 이사를 가서 전에 있는 나와 이사 간 나를 하나로 뭉치려는 또 다른 나가 있는 거예요.

이것을 생물학에서는 ‘적응’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남녀 간에 연애하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사랑’이라고 하지요. 생물학에서는 이것을 ‘짝짓기’라고 합니다. DNA의 자가 번식이죠. 유전자의 자가 번식에 불과한 겁니다. 이렇게 표현하니까 상당히 냉철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선과 악이라는 것을 떠납니다.

인간의 선과 악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분리되는 것을 악이라고 보고, 내가 하나로 뭉쳐지는 것을 선이라고 봅니다. 어렵습니까? 그러면 쉽게 하겠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오면 선이 되고, 어떤 일이든 자기에게 손실을 가져오면 무조건 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익이 뭐냐? 내가 욕망하고 내가 되고 싶은 그 타인, 그 타인과 나 사이에는 결핍이 있죠. 집사님이 음식점을 하는데 만약에 손님이 10명이 왔다면, 내일은 20명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지요. 그러면 10명 왔을 때의 내 지갑과 20명 왔을 때를 내 지갑의 두툼함이 다르잖아요.

그렇다면 뭘 느끼느냐? 10명만큼 결핍을 느낍니다. 20명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10명 왔다면 손실을 느낍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내가 손님으로 갔습니다. “혼자 오셨습니까?” “예.” “아, 오늘은 손실이다.” 그러면 듣는 손님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아니, 주인양반. 내가 여기 식사하러 왔는데 방금 당신이 뭐라고 했어요?” “오늘은 손실이다.” 이건 아주 일방적이죠.

다른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만약 식당 주인이 손해인지 이익인지는 모르는 상태에서 손님이 그 집에서 아주 맛있는 식사를 했다면, 그 손님은 이익을 본 것입니다. 손님은 맛있는 식사를 원했던 자아가 만족하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그 손님은 이익을 본 겁니다. 그러면 결국 세상에서 남는 것은 자아의 이익 중심으로 세상을 재해석 하는 거예요. 이처럼 인간들은 독한 이기주의입니다.

인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남들이 갖고 있는 좋은 것을 자기도 갖고 싶어 하는데, 현재의 나와 내가 기대한 나 사이에 결핍이 있고, 이 결핍이 매워지면 내가 큰 이익을 얻은 것 같고, 내가 기대한 것에서 더 멀어지게 되면 큰 손실을 느낍니다. 손실을 느낀다는 것은 나는 그런 자아가 되기 싫은데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 손실이고, 내가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졌을 때는 이익이고.

이러한 선악구조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뭘 계산합니까? 교회 가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설교 들으면서 뭘 계산해요? 바탕이 이익, 손실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를 하나의 타인으로 간주해서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예수라는 풍선을 띄워놓고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거기에다 다 집어넣어서 그것이 나에게 쏟아져야 됩니다.

이번에 서울 가요대상에서 ‘원더걸스’라는 여자팀이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들이 너무 좋아서 다 울었어요. 참가한 팀에 30팀쯤 됐습니다. 30팀 중 자기 팀이 대상을 받으니까 기분 좋지요. 만약에 자기 팀 혼자 나가서 대상 받았다면 기분 좋겠습니까? 아니겠지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행정고시 미달인데 합격했다면 기분 좋겠습니까? 안 좋지요. 그런데 100대 1의 경쟁에서 합격했다면 기분 좋지요.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왜 이렇게 못됐습니까? 그것은 바로 타인은 나와 같으면 안 되고, 타인이 갖고 있는 그것을 내가 침범해서 타인의 영역마저 내 것으로 동일화시킬 때 비로소 나는 이익을 본다고 여깁니다.

이런 동일성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익히 아시고, 인류의 역사를 동일성 중심(내가 되고 싶은 내 중심)으로 재편성하는 인간 자체를 바꿔 버립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 자체를 딴 인간으로 변화시켜 버려요. 그게 핵심입니다.

다른 인간이 되면 나의 이익, 손실을 따지는 것도 날아가 버리죠. 자아1, 자아2, 자아3도 이것은 다 의미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다른 인간으로 변화되니까. 그 다른 인간으로 변하는 그 모델이 누구냐? 마지막 아담. 새로운 모델의 아담.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기존에 있는 아담은 예수님을 못 알아보지요. 예수님을 같은 아담이라고 보지요. 이순신, 강감찬, 공자, 석가모니 그 정도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 류 중의 하나가 예수라고 보지, 나를 부정하기 위한 새로운 인간의 등장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모든 인간의 믿음, 소망, 사랑은 다 거부당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쏘아 올린 화살은 다시 자기에게로 부메랑처럼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앞에서 내가 ‘과거와 지금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안 됩니까? 문제가 안 되지요. “너는 새벽 3시에 승용차가 오토바이를 치고 가는 것을 봤느냐?” 하는 목격이 문제이지, 나는 내 이익만 챙기고 욕망만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간과하지요.

쉬운 예를 들면 이렇게 됩니다. 어린 손녀가 배가 아프다고 하니까 할머니가 손녀의 배를 문지르면서 ‘내 손은 약손이다.’ 하면서 문질러요. 그런데 손녀는 낮에 친구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가 자기를 속여서 기분이 나쁘고, 또 다른 친구는 생일인데 자신을 초대하지 않고 해서 배가 아프다. 뭐 온갖 이야기를 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배가 아프다고 하니까 그냥 배를 쓰다듬으면서 낳게 하지요.

이처럼 우리가 기도하면 만날 헛소리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듣지도 않는 소리를 계속 합니다. “하나님, 경제가 나아지게 하옵소서.” 아무리 기도해도 주님은 듣지 않습니다. “내 손은 약손이다.” 하면서 예수님은 자기 할 일만 해요.

이것은 내가 내 구원에 기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증인들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했다는 자기 증인이 아니고, 나는 무슨 짓을 하고 무슨 소리를 해도 주께서는 아예 듣지도 않고, 주님 홀로 다 구원을 하십니다.

사람이 동일성이 되 버리면, 자아1과 자아2가 있는데, 이 둘을 하나로 뭉치면 자아3이 나와요. 자아3에서 보는, 자아1과 자아2 때는 발견이 안 되는 제 3이 될 때 비로소 발견되는 타인이 발견됩니다. 그러면 이 타인과의 사이에 결핍이 생겨서 또 자아3과 타인과 결합해서 자아4가 되고자 하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동일성을 주장해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은 달성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아가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초월을 느껴요. 이 동네에서 아무리 자아1, 자아2 해도 인간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 하지만 이 벽을 넘으면 신비의 세계에서는 내가 안 된 것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보지요. 이것 다 소용 없습니다. 이게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안 되니까, 한계를 느끼고 허무를 느끼고, 허무가 극복되기 위한 어떤 미지의 것을 예상해서 남겨두는 것, 이것도 헛소리입니다. 이 짓을 중들이 잘 합니다.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인간이 기껏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궁극적인 선을 원한다면 이게 한계에요.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 것이다.

이게 왜 거짓말이냐 하면, 벽 넘어 뭐가 있다는 그것, 이 이미지를 누가 만들어 냅니까? 내가 만들어 내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내가 투영하면 되비쳐 나오지요. 그러니까 신이라는 것은 누가 만드느냐 하면 내가 만든 거예요. 내가 만들기 때문에 원숭이 신이 따로 있고, 갈매기 신이 따로 있고, 네가 보는 신 따로 있고 내가 보는 신 따로 있고 다 따로 있어요. 교인이 100명 있다면 그 100명이 보는 신이 다 달라요. 왜? 100명 모두가 다르니까. 다른데서 나오는 신이니까 100가지가 나오지요.

일본에는 종교가 200만 개가 있어요. 얼마나 자유분방합니까? 그래서 일본의 불교 학자들은 이런 이야기합니다. ‘뭐가 신이냐? 자유가 신이다.’ 자유 또는 자연. 인간이 스스로 하고 싶은 그 총 집합을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구약에서 여호와가 뭐예요? 여호와가 누구와 싸웁니까? 바로 인간이 만들어낸 우상과 싸우잖아요. 이사야에 보면 이 우상을 누가 만들어 낸다고 했습니까? 인간이 만들지요. 그러니까 이 우상은 조작 가능하지요. 오늘날 예수라는 신이 어떤 신입니까? 인간이 조작한 신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우상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예수를 조작한단 말입니까?’ 병 낫을 때 예수 다르고, 사업 안 될 때 예수 다르고 다 달라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하노니 진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뿐이고, 이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어요.

사람마다 예수가 다 달라요. 그런데 진짜 예수는 이런 사람들에게 죽임 당했어요. 각자 자기의 신(예수)을 찾는 인간을 제가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이 아담이 누구를 죽였어요? 하나님이 제시한 마지막 아담(예수)을 죽였지요.

인간은 각자 자기의 예수를 찾는데 이들의 공통점이 뭐냐? 결국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들은 같은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한 통속이라는 것이 로마서 5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예수가 다 다른데 그런데 진짜 예수를 가짜 예수가 죽었단 말이지요. 성경에 보면 어떤 아주머니들이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끌려갈 때 불쌍하다고 울잖아요. 그럴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고 했어요. 너희들이 지금 저주의 땅에 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남 걱정을 하느냐는 것이지요.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아이고, 우리가 잘못 죽였구나.”라고 회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죽인 것이 아니라 분괴해서 죽였어요. 왜냐? 자기 소원을 안 들어주니까. 목사들이 왜 예수를 안 믿고, 복음을 안 믿는가 하면, ‘복음이 밥 먹여 주냐?’는 것이지요. 특히 사모들은 더 그래요. 처음 사모가 될 때는 차마 말을 못하지요. 그런데 목회 10년 넘게 하면 복음이 밥 안 먹여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자신 만만하게 말합니다. “여보, 그만 치워라. 복음이 밥 먹여 주더나? 예수가 어디 있어? 차라리 욕하고 나가 죽어라.” 욥기에 나오지요.

그러면 남편은 뭐라고 하는가? “나는 벌써 예수 욕했다. 당신 그런 말하기 전에 벌써 나는 예수 안 믿었다. 돈 많은 집사나 장로 만날까 싶어서 지금까지 이러고 있지 사실 나는 예수 안 믿는다.”

그러면 솔직하면 구원 받습니까? 구원 못 받아요.

결국 모든 인간이 지어낸 예수는 가짭니다. 왜?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을 대상화 한 거예요. 투영한 거지요. 투영이란 것은 하나의 이미지입니다. 거울을 보면서 내가 되고 싶은 모습으로 꾸미듯이 내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내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희구, 기대, 염원, 한풀이 이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냥 죽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누가 오느냐, 안 오느냐 하는 것은, 이미 죽었던 분이 되살아나서 자신의 아담 됨을 이 죽은 옛날 아담 속에 심어 넣는(이것은 제가 ‘증식’이라고 했어요) 사람에게만 우발적인 사태가 벌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죽었구나. 그런데 나는 왜 죄인인가? 나는 평생 나밖에 모르고 나만 이익 보면 된다는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예수님은 나한테 떠밀려서 죽으셨다. 그래서 예수를 떠밀고 있는 나는 죄인인데, 이 죄인에게 주님께서 자기의 피로 씻어주는 의를 행함으로(예수의 피로 페인트 칠 함으로), 내가 구원 받았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내가 만약 오 목사님을 사랑한다면 오 목사님을 사랑한다고 쓰다듬는 내 손이 예뻐서 오 목사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달리 말하면 죄인을 용서하는 예수님의 자기만족이죠. 알겠습니까?

예수님의 자기만족이지만 사실은 자기만족이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께 모든 율법을 이루라고 했으니까, 모든 율법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이웃 사랑이잖아요. 예수님이 유일한 아담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죄인을 용서함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서 마음껏 발휘하신 거지요.

그 발휘하신 일에 하나의 대상이 되는 것, 그 대상으로 뽑혀 나온 자가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뽑혀 나온 사람은 예수님만 자랑하게 됩니다. “나같이 더러운 죄인이 구원을 받다니 참 부끄럽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피 공로로만 된 것이다.” 이것이 팍팍 올라오는 겁니다.

울산에서도 이런 강의를 했지만 다시 해 보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자리가 있는데, 인간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은 뭡니까? 최고의 라이벌은 신인데, 인간이 동일성을 말하지만 최고의 동일성은 예수나 하나님처럼 되는 것인데, 인간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이 인간을 자극합니다. 라이벌이 있다는 것은 내 잠자는 동기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로부터 시작해서 신을 찾아가는 것은 결국 나를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쭉 잡아당긴 거예요. 고무줄처럼. 이건 누가 만든 거예요? 내가 만들었고, 내가 조작 가능하고, 그리고 나의 자유의지와 가능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신과 나의 관계, 하나의 대상이죠.

이것이 나에게서 나온 신이라면, 내 자리를 뚫고 올라온 신은 뭐냐 하면, 내가 만든 신은 전부가짜이며, 심판꺼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내가 죄인인 것을 말해주는 자리에서 폭발적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저주받은 심판이 나오지요. 너 때문에 내가 대신 저주 받았다는 것. 너의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내가 대신 저주 받았잖아. 아버지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 나이까?”

어떤 신학자도 이것을 해석을 못해요. 세상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죽이다니 무슨 이런 괴이한 일이 다 있는지. 예수님께서 버림 받으려고 왔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그래서 우리와 함께 죽은 자리에서 함께 일으키시고, 로마서 6장에 나오지요.

예수와 함께 성령 받은 자는 죽을 때도 같이 죽고, 살 때도 같이 살지요. 이런 방식으로 이 자리가 나의 자리가 아니고 예수님의 자리가 되면서, 예수님의 자리에서 피어나오는 죄라는 이름의 의의 열매, 예수님의 작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고전7:23)”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경매품, 주께서 고가(자기 피)로 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어요. 이렇게 주님의 것이 된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10분 쉽시다.

(2009. 3. 17. 09:1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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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