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칠곡강의(서양철학)02(강의정리)-고르기아스,크세노파세스,아리스토텔레스등등
06칠곡강의(서양철학)02(강의정리)-고르기아스,크세노파세스,아리스토텔레스등등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06칠곡강의 [서양철학] 02 ☞ 교재 - 파깨비의 철학노트 (도서출판 상아기획)
06,01,1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신화에서 철학이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흔히들 신화에서 철학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철학은 궁금해하면서도 신화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을 하는 사람들의 허점일 수도 있는데, 오늘은 신화가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보자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화에서 철학이 나왔다는 것이 막상 곰곰이 생각해보면 납득이 잘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인간이 생각하면 그것이 곧 철학이 되는데, 그런데 무슨 굳이 철학이 신화를 거쳐서 철학이 나와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지요? 가수 '신화' 말고 말이다. (ㅋㅋ)
소설가인 이윤기씨가 번역한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한 책이 한 때 유행을 했는데, 그런데 막상 그런 책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데, 이런 과학시대에 그런 책들을 왜 읽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짜증나게 읽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인간들이 한 여인을 좋아서 서로 싸웠다고 하면, 그것은 얼마든지 우리 일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그런데 신들이 그런 짓을 했다고 하면, 그것이 어떻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신들끼리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고 살인하고, 또한 그러한 신이 인간을 향해서도 질투를 해서 인간의 것도 빼앗고 말이다. 신이 아니고 무슨 조폭 같은데 말이다.
물론 신들 가운데는 영웅들도 있지만, 그러나 인간세계에서도 영웅이 있는데, 굳이 신에게서 영웅을 찾을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잡스러운 한물간 시대의 이야기를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기씨를 비롯해서 사람들이 왜 그런 신화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고 하니, 사실 그것이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 역사는 과연 발전하는가?
그런데 그러한 의문점이, 그것을 지금은 오류라고 보는데, 그러한 오류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우리는 흔히들 이 '역사' 라는 것이 발전한다고 배웠는데, 아주 흐릿하면서도 냉철함으로, 혹은 모호하면서도 정확함으로 말이다. 모호함은 낙후된 것이고 정확함은 발전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가 뒤로 후퇴를 하는데, 즉 신화로, 신화로 말이다. 그것이 현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발견을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역사가 단순히 거꾸로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옛날에 수준이 낮다고 여기던 곳으로, 즉 발전은 과거보다 더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있는 곳보다 더 못하다고 여기던 곳으로 역사가 흘러가고 있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내막을 이 소중한 시간에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이 역사가 발전하는데는 로고스가 한 몫을 담당했는데, 이 로고스는 지난번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성'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인간의 이성으로, 따지는 것을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아주 명철하게 따지는 것을 말이다.
◈ 프로타고라스 -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
그런데 이런 '로고스' 라는 이성이 등장했을 때는, 이것이 인간이 알고 있는 이성인데, 그렇게 이 세상은 이성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이제 이 세상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 넘어오는 것이고, 그렇게 점점 더 나가면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인간이 보기에 따라서 진리가 된다고 여기는 것인데, 즉 인간의 생각자체가 진리는 것이다.
◈ 고르기아스 - 참은 없는데, 있어도 알 도리가 없고, 알아도 전달할 도리가 없어 !!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고르기아스'와 같은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그만 회의적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참은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알 도리가 없고, 또한 안다고 해도 전달할 도리가 없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다 거짓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다 참이 아니라, 거짓이 된다는 말도 된다는 것이다.
먼저 이렇게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한 사람이 있는데, 갑자기 그 사람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데, 혹시 누가 기억이 나는 사람이 없어요? 아하, 이제 생각나는데, '프로타고라스' 라고, 바로 그 양반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아닌, 프로타고라스가 말이다. (ㅋㅋ)
그런데 이렇게 보니, 프로타고라스의 주장도 지금 우리 시대에 해당이 되는 것이고, 또 고르기아스의 주장도 역시 우리시대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즉 지금 이 시대를 그렇게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인정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다고 따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역시 인간이야" 라고 인정할 수도 있고, "아니, 완벽한 놈이 어디에 있어?" 라고 따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 로고스를 통해서 진리를 깨달았다고 희망을 걸고서 왔는데, 그런데 그만 이렇게 꼴아 박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하는 그 모든 노력이 그만 헛수고로 돌아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이성이 무엇인가? 아까도 말했지만 정확함이고 냉철함이고, 또한 분석력이고 말이다. 이런 모든 것이 바로 과학이 되는데, 그런데 이 과학이 발달하고 또 발달해서 "우주가 무엇인가?" 라는 것은 인간이 보기 나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인간이 어떻게 보던지 간에 그것을 진리라고 해주자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프로타고라스가 말한,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르기아스가 주장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가지고서, "만약에 니가 참이면 나는 참이 아니란 말인가? 도대체 어느 놈이 진리를 아는데? 아무리 진리를 안다고 해도 언어라는 한계성 때문에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 라고 한다면, 즉 진리가 있다고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결국 진리를 알 수 없지 않는가?
왜 그런고 하니, 여기에 희미하게 진리가 있다고 하면, 그리고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제 아무리 만물의 척도라고 해도, 인간자체가 진리가 아닌 이상은, 여기에 참된 진리가 있다고 해도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것을 바라볼 때는 자기의 경계선을 탈피해서 그쪽에 접근해야 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제 아무리 접근을 한다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탈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기 때문에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그러니 진리가 있다고 해도, 아무리 자기가 자세히 보아도 자기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지, 결코 자기를 탈피해서 진리에 흡수를 당해서 진리를 아는 법은 이 세상에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내가 보는 그 관점이 나에게만 정답이 된다 !!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바로 그것인데, 즉 "내가 보는 그 관점이 나에게만 정답이 된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정답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르기아스가 참 대단한 인물인데, 그 어떤 인간이라도 참은 없는 것이고, 설령 있다고 해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또한 안다고 해도 전달할 방법이 없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즉 "오늘날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아라" 라고 하는 이유가 드러나는데, 왜 우리가 그런 구닥다리(?) 알아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제 아무리 과학시대를 외쳐도, 그 과학이 우리의 지식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 신화가 왜 진부하게 여겨지는가?
강의를 다시 한번 정리하면, 철학은 신화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내용이 "신화란 무엇인가?" 라는 것이고 말이다. 신화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진부하다고 할까, 마치 무협지 내용과도 비슷한데, 그런데 왜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고 하니, 이미 철학과 과학의 눈으로 보니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화의 내용들이 시시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과 철학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주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해결책을 어디에서 찾는가? 오늘날은 신화가 아니라, '시(詩)'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옛날의 이러한 시가 곧 신화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신화는 그 당시의 시인들이 모두 만들어낸 것이니 말이다.
이러한 시인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고 하니까, 즉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의 의지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표현이 될 때,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진리는 느낌으로 발현이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동(精動)' 이라고 하는데, 감정이나 충동과도 같은 의미라는 말이다.
◈ 집사님이 없으니 하는 말인데 ??
예를 들어서, 우리 오 집사님이 질문을 하면서 주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목사님, 그런 줄을 알기는 알지만 제 마음과 제 느낌이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질문을 해서 강의흐름을 끊어놓는데, 그것을 알기는 알지만 그래도 또 질문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 없어서 하는 이야기지만, 물론 나중에 들으면 그때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 어쩔 수 없고 말이다. (ㅋㅋ)
다시 말해서, 오 집사님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알기는 아는데 그런데 왜 마음이 따라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자기도 알면서도 그렇게 하니 답답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느낌이 우선이고, 아는 것은 변명으로 그냥 따라붙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오 집사님은 이성적으로 안다고 하는 것이 우선이고 느낌은 그냥 뒤에 따라붙는다고 보았는데, 하지만 사실은 느낌이 우선이고 이성적으로 아는 것은 그냥 변명 조로 따라붙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느낌이 우선이고, 이성적인 것은 마치 엄마 뒤를 아이가 따라가듯이 그냥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여자가 아름답다" 라고 하면, 이성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사람이 팔등신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눈과 코의 비율이 적당히 맞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만으로는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 라고 했다면, 왜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는지 다 안다는 것이다. 분명히 나쁜 것이니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이성적으로 분석을 한다고 해서 과연 나쁘다는 것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즉 '살인'에 대해서 연구하고, 또 '말라' 라는 의미를 사전을 찾아서 확인하고 말이다. 결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살인이 악하다는 의미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 아름다우면, 그냥 아름다워 !!
그러니 지금 제가 주장하는 것은, 감정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그 감정을 변명하든지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따라나오는 것이 바로 인간의 로고스, 즉 이성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여인이 아름다우면, 이성적으로 따져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냥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 아무리 팔등신에 이목구비가 반듯해도,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여자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키도 조금 적고, 생긴 것도 비율이 제재로 맞지 않아도 자기가 마음에 땡기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 자기 와이프가 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과학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어디에 빠지는고 하니까, 앞에서 말한 바로 그런 것에 한계를 느껴서 결국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프로타고라스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아니면 고르기아스에 빠지든지 한다는 말이다.
◈ 시인(詩人)들의 등장 !!
그래서 처음부처 신화를 만들어낸 시인들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진리라고 하는 것은 느낌으로 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로고스를 집어넣어서 정확하게 따진다고 해서 될 문제가 결코 아니라고 했다는 말이다. 느낌이고 감정이지 이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옛날 초창기의 그리스어를 보면 동의어가 상당히 많았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아주 과거에는 단어가 별로 없었는데, 그런데 그 적은 단어를 가지고서 무수히 많은 이 세상의 변화를 다 설명을 해야하니, 그러니 당연히 동의어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성경이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은 신학자들이 언어를 따진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해서 진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여보, 당신은 인터넷이 뭔지 알아?
고대에서는 언어가 세분화되지를 않았는데, 이 언어는 현대에 들어와서 사물이 늘어나고, 인간의 활동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것을 표현해야하는 새로운 신조어가 계속해서 발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인터넷' 이라고 하면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요즘은 3살 자리도 다 아는 그 유명한 단어를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언어라는 것은 그 사회의 의사소통의 수단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회가 다양하고 복잡하게 커지게 되면 언어의 양도 덩달아서 커지게 되고, 또한 사회가 단순해지게 되면 언어의 양도 역시나 단순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분의 별명이 '언어제조기(?)'였는데, 예를 들어서, 음식의 맛을 본다든지 하면 그것을 표현할 때 생전 듣지도 못한 그런 말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부사나 형용사를 이용해서 말이다. 사전에 없는 단어를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은 원래가 그렇다는 말이다. 시인들은 동의어와 몇 개의 단어를 같은 사물에다 마구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게 사용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시인들은 마구 섞어서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시인들이 그렇게 단어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때는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가? 스토리로 하는데, 그렇게 스토리를 가지고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그것이 바로 '시' 라는 것이다.
◈ 감정은, 내가 만든 게 아니기에 내가 표현할 수 없어 !!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인간의 언어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거기에는 비록 자기 감정이라고 해도, 그 감정은 자기가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든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건방지게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하는, 바로 그러한 겸손함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참으로 중요한데, 자기가 어느 여자를 좋아하는 경우에도, 일부러 그 여자를 좋아하려고 준비를 해서 감정을 유발시킨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도 모르게 그 여자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물론 계획적으로 여자에게 접근하는 비열한 인간들도 많지만, 그러나 그런 경우는 감정적으로 그 여자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시인은 항상 우는 사람 !!
그러한 의미에서 시인은 항상 우는 사람인데, 예쁜 여자를 만나도 울고, 경치가 너무 좋아도 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언어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그래서 너무너무 화가 나서 운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시인은 대동강가에 가서 정말로 울었다고 하는데, '산, 산, 산' 이라고 3글자만 적어놓고 말이다. 자기 앞에 펼쳐진 그 산의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말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만약에 그 언어로서 이 세상을 만든다고 하면 그 어떤 것이라도 다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감정은 자기가 유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에는 감정이라는 것은 자기가 아닌 자기 바깥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인데, 바로 신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화(神話)'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왜 그렇게 신들끼리 서로 붙들고 싸우는지를 말이다. 왜 신들끼리 질투하고 미워하는가? 그러한 인간의 감정이 인간들이 의도해서, 즉 인간의 의지나 인간의 이성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즉 자기에게는 바깥에서 준 어떤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몇 개밖에 안 되는 단어를 가지고 표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자기 감정을 신을 동원해서 표현 !!
바로 그렇게 몇 개밖에 안 되는 단어를 가지고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곧 신을 동원하는 것인데, 즉 감정 하나하나에 신을 다 일일이 동원시킨다는 것이다. 즉 태양에 신을 동원시키고, 바다에 신을 동원시키고, 그리고 땅에 신을 동원시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태양신이 있고, 바다의 신이 있고, 땅의 신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들이 파도를 일으키고 지진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옛날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았는가? 가는 곳곳마다 집집마다 다 신이 있다는 것이다. 부엌에도 있고, 마루에도 있고, 화장실에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을 해도 날짜를 택해서 잡고, 또 이사를 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데, 요즘에도 손이 없는 날이라고 해서 이삿짐 비용을 더 달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한 세계가 바로 신화의 세계라는 것이다.
◈ 신은 인간의 감정을 설명해주는 출구 ??
그러니 신화의 세계라고 해서 신이 있느냐고 따지면 안 되고, 물론 로고스의 세계는 단일신이 있지만, 신화의 세계는 단일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의 감정이 하나가 아닌데 어떻게 단일신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왜 신을 동원하는가? 그렇게 신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감정을 자기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한 여인을 보고 반했다고 하면, 그것은 무슨 신이라고요? 에로스 신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에로스' 라는 신이 있어서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을 그 남자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지 아시겠지요?
* 질문 - 그러니 인간이 자기 감정을 그 당시 몇 개밖에 안 되는 단어를 가지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으니, 즉 그러한 근원을 찾지 못하니 신화로 대신해서, 그렇게 신을 등장시켜서 설명을 했다는 말씀이지요?
만약에 자기가 어떤 여자를 보고서 사랑하게 되었다면, 요즘은 "내가 사랑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외부에 어떤 누군가가 있어서 그 여자에게 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그 여자를 보고 반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그 어떤 외부의 누군가를 신으로 표현하면 설명하기가 싶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에로스가 사랑의 화살을 그 남자에게 쏘아서 그 여자를 사랑하도록 했다고 하면, 그것이 나름대로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시인들은 그 당시의 몇 개 안 되는 단어와 재료를 가지고 그렇게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요즘도 이것 이상의 설명은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는가?
◈ 신들은 시인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러한 아이들용 컴퓨터가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로켓트를 만드는 과학자에게 가지고 놀라고 하면 놀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지금 로켓트를 가지고 노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초등학교 때는 이 컴퓨터를 가지고서 재미있게 놀았다는 것이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는 노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두 가지가 다 같은 놀이기구인데, 그러니 어릴 때는 이런 컴퓨터를 가지고 놀고, 어른이 되어서는 로켓트를 가지고 논다는 말이다. 사람이 놀고 즐기면서 연구를 해야 능률이 오르고 재미가 있지 억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의 신들은 시인들이 가지고 노는 일종의 장난감이었다는 말이다.
◈ '크세노파세스' 라는 방랑시인이 !!
그 당시에 엘레아 학파 소속의 '크세노파세스' 라고 하는 유명한 방랑시인이 있었는데, 왜 지난번에 이오니아 학파를 이야기했는데, 지중해의 터키 남쪽에 위치한 밀레토스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엘레아 학파는 이탈리아 남쪽지역인데, 이들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모든 것을 '단수'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하나로 말이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이오니아 학파의 경우에는,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 엘레아 학파와는 달리, 여러 가지 변화와 생성에 대해서 단수가 아닌 다원성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즉 원천의 줄기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고 말이다.
◈ 이 인간들아, 어떻게 신이 여러 명인가?"
그러나 이 '크세노파세스' 라는 사람은 다니면서 진리를 전파했는데, 그래서 유랑시인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는 이오니아 학파의 주장과는 달리, "이 인간들아, 어떻게 신이 여러 명인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인간적인 신은 신이 아니데, 왜냐하면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말이다. 이 우주의 진짜 신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는 이렇게 하나의 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 즉 단수라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말한 존재론의 '파르메니데스'도 역시나 엘레아 학파이고 말이다. 그렇게 오직 하나로 모으는데, 그렇다면 그 하나는 무엇인가? 형체도 없을 것이고, 인간의 모든 감정과 의지와 이성으로부터도 역시 초월한 무형의 신, 즉 보이지 않는 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아하, 그래서 신화를 배경으로 철학이 !!
그러므로 이렇게 "신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라는 신 개념이 무엇을 배경을 할 때에 비로소 나오는 것인가? 신화를 배경으로 했을 때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강의 처음에 시작할 때 뭐라고 했는가? "신화에서 철학이 나왔다" 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신화에서 철학이 나왔는데,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철학에 다시 신화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즉 철학이 주장하는 보이지 않는 원천적인 신이 있다고 하는, 거기에 대한 반발과 의심과 회의 때문에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철학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신에서 어떻게 다양함이 나오는가?" 라는 것을 설명을 해주어야 하니 말이다.
◈ '아낙사고라스'의 씨앗이 곧 '정신' !!
지난 시간에 '아낙사고라스' 라는 사람은 그것을 씨앗이라고 보았는데, 그것이 곧 '정신' 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 철학자가 정신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는데, 물질과 반대가 되는 개념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이 양반에게는 이것을 정신이라고 하면, "도대체 그 정신이 어디 있을까?" 라고 하는 질문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정신에다가 "어디에 있을까?" 라고 하는 공간성을 집어넣으면, 그런 공간성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정신이 아닌 물질의 특징이기 때문에 말이다. 물질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고 공간을 차지하는데, 그러나 정신은 이런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또 바뀌지만 말이다.
◈ 사랑은 정신인가? 물질인가?
제가 방금 물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러한 정신의 세계가 중세철학에서는 통용이 되었는데, 근세에 들어와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랑은 분명하게 정신인데, 그런데 그런 사랑이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 분명히 변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시간을 따라 변하고, 공간에 의해서도 변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신도 역시 시공간의 저촉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다고 하면 그것이 도대체 정신이냐는 말이다. 물질이지 말이다. 그런데도 이 사랑은 보이지 않는데, 그러니 또한 정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이면서 물질이고 하니, 결국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에너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현대는, 의식인가? 에너지인가?
다시 말해서, 이제는 "의식인가? 에너지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에너지라고 보면 물리학에 속하고, 또한 의식이라고 보면 심리학인 인문학에 속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문제가 처리가 되지 않아서 여전히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다.
왜 지난 시간에 죽은 자의 영혼이 사고를 낸 상대방의 자동차 번호를 알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것은 영혼이 공간을 점령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자기가 그렇게 죽어서 순간적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가 되었는데, 그런데 거기서 정말로 영혼이 시공간을 초월했다고 하면 그 영혼이 자동차의 번호만을 알 것이 아니라, 2만키로 이상이 떨어진 미국의 어떤 아파트에서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고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알겠는가?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공간적으로 자기 근처에서 일어난 일만 아느냐는 것이다. 마치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우리 인간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한계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정신이라고 할 수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 최면술이 엉터리인 이유가?
흔히 최면을 걸어서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최면이 말이 안 되는 것이, 자기가 전생에 '내시'였다고 하면 그런 내시에 관해서 자기가 내시였다는 것만 알 것이 아니라, 내시가 고위관직이었는데, 그러니 자기 쌍방울을 자른다고 내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요즘 말로 하면 사법고시에 합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공자와 맹자에 대해서도 다 알아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전생에서 자기가 내시라고 하는 사람에게 체면을 걸어서 공자의 한 구절을 외우라고 한다면, 과연 외울 수가 있겠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짜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무슨 전생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기억에 없으면 자기 경험도 부정해 !!
그러니 그런 현상은 집합된 기억 속의 하나를 우발적으로 취사선택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경험 가운데 말이다. 물론 자기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하지만 사람의 경험은 그것이 기억이 될 때만 경험으로 보는 것이지, 설령 경험을 해도 그것이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으면 경험에서 그만 빼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기식(氣息)' 이라고 하는데, 뭔가 어디서 본 듯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과연 옛날 사람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가?
오늘날 철학이나 과학에서, 그렇게 모든 구조가 초반부터 이미 다 짜여져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기분이 좋은 것 같지만 어떤 때는 화가 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철학에서는 인간이 그렇게 독보적인 존재라고 해서, 거기에 속았다는데 대해서 분노나 짜증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대에서 이렇게 과거의 신화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으니, 이제는 뒤집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옛날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다가 이제 와서 큰 코를 다치고 말았는데, 그런데 옛날 사람들을 왜 무시했는고 하니, 그 당시 사람들은 언어의 구조자체가 그렇게 적은 숫자의 단어를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수준이 낮아 보이고 시시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언어자체가 다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어떠한가? 언어가 아주 다양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중에서 제대로 잘 골라서 사용만 하면, 상당히 고상해 보이고, 또한 유식해 보이고, 거기에 노련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 논술고사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노자' 같은 경우에, 그 책에 보면 단어 하나를 가지고 오만가지를 다 설명하고 있는데, 만약 그렇게 요즘 논술시험을 찬다면 다 떨어지지 싶은데, 지금은 명확하게 그 자리에, 즉 적재적소에 알맞은 단어를 사용해야 하니 말이다.
* 선생님 : 이게 정확하게 무슨 뜻이야?
* 학 생 : 예, 다 됩니다.
* 선생님 : 뭐, 다 된다고? 되기는 뭐가 된다는 말이야?
* 학 생 : 그냥, 다 되는데요.
* 선생님 : 지금 니가 쓴 단어는 10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그 중에 어느 것이야? 하나만 말해.
* 학 생 : ? ? ?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그 당시가 상당히 편리한 점도 있었지만 말이다. 한 가지 단어만 사용하면 되니 말이다. 단지 의사소통에 있어서 장애가 조금 있지만 말이다. 요즘의 손으로 하는 수화와 같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 법전(法典)이 어려운 이유는?
법전(法典)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해석의 여지를 넓혀주지 않고 자꾸만 좁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누군가가 법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든지 해서, 그렇게 이용해먹으려고 하면, "그러한 뜻이 아니야" 라고 하면서,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서 보조법전들을 동원해서 그런 소지를 최소한으로 줄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전이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요즘 많은 사람들이 사법고시에 달려들지만, 보통 머리로서는 불가능한데, 그것도 자기 성격에 맞아야 하고 말이다.
법전은 어떤 단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다른 쪽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자꾸만 없애는 쪽으로 가기 때문에, 그 법전내용이 딱딱하고 냉철하고 복잡하고, 또한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화의 세계에서는 그게 아니라, 하나의 단어를 가지고 10개, 20개의 의미로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말이다.
◈ 과연 현대인들이 더 똑똑한가?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더 똑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인간의 이성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감정인데, 사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별로 인정도 해주지도 않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보모가 자식을 때렸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일도, 즉 부모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로서 자식이 잘못하면 때릴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은데, 잘못하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도 엄연히 하나의 객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부모라도 감정을 앞세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감정보다는 이성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감정을 억지로 이성에 맞추어야 하니까 더 힘이 든다는 말이다. 그러니 법전의 측면으로 볼 때는 미국이 법이 훨씬 더 발달했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더 복잡해지고 말이다. 당연한가?
◈ 이제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를 !!
이제 우리가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먼저 지난 시간에 '엠페도크레스' 라는 사람을 살펴보았는데, "미워하면 떨어지고 사랑하면 붙는다" 라고 말이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물질들을 어떻게 설명했는고 하니, 사랑하면 융합해서 붙고 미워하면 밀쳐서 떨어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의 제자인 '아낙사고라스' 라는 사람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씨앗'이 따로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 씨앗이 곧 '정신' 이라고 해서, 최초로 정신을 언급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신이 어디 있는가?" 라고 따지다가 보니, 그만 정신이 물질화가 되어버리는데, 그렇게 물질화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고민을 하게 되는데, "왜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는가?" 라고 말이다.
◈ 다시, 왜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는가?
이것이 그 당시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역시나 큰 고민거리인데, "왜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는가?" 라고 말이다. 태양이 왜 스스로 움직이는가? 그것을 고대의 시인들은 신과 결부시켜서, 즉 태양신이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크세노파네스' 이후에, 이제는 신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데, 뉴턴이 나오기 이전까지 이 문제가 정말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답은 "I don't know" 인데, 하지만 철학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과거 신화의 시대 같으면 태양의 신 '아폴론'이 태양을 움직이면 되는데, 그런데 크세노파네스가 말하기를, 왜 자꾸만 신을 끌어들이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아폴론이 떨어져나갔다고 하면, 크세노파네스에게 다시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즉 "태양이 왜 움직이는지 설명을 해봐" 라고 말이다. 그러면 그는 대답하기를, 보이지 않는 단일체가 있어서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나중에 그 보이지 않는 단일체가 또 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신은 움직이게는 하지만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데, 즉 신은 왔다갔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폴론 신은 태양을 따라서 움직였다고 해도, 이제 그것을 거부하고 난 다음에는 진짜 신은 촐랑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그래야 신이 신답다는 말이다.
◈ 데미우르고스와 로고스 !!
그렇다면 도대체 물체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서, 외부에서 주어진 능력으로서 움직인다고 하면, 즉 외부의 신, 즉 '데미우르고스' 라는 창조신이 있어서, 이 신은 아폴론처럼 촐랑거리면 안 되는데, 그러면 신화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하니 말이다. 이제는 신화의 세계와는 관계를 끊었는데,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는 신이 다양성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그것을 두고 '창조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데미우르고스'를 초대교회에서는 구약의 하나님으로 보았는데, 즉 구약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것을 신약에서 와서는 '로고스' 라고 보았는데, 또한 이 로고스는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이 되고 말이다. 이 로고스는 말씀이라는 의미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초대교회는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을 다 버린다고 한다면, 과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책이 있느냐는 것이다.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태양이 도대체 어떻게 움직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가 얼마나 철학자들이 괴롭혔는지 감히 짐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F=G*m1*m2/r²
그런데 드디어 이것을 뉴턴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각자의 질량에 비례해서 모든 세상의 힘은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의 만유인력의 법칙인데, "F=G*m1*m2/r²(F=만유인력, G=만유인력상수, m1과 m2=물체의 질량, r=거리)" 라고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나, 지구와 태양 사이의 모든 것은 다 이런 법칙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힘이 있는데 우리는 그 힘을 느끼지 못하는가? 그것은 바로 지구가 태양을 당기는 힘이 너무나도 크고, 우리는 또한 너무 작기에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지구를 벗어나게 되면 태양이 당기는 힘을 더욱 더 크게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엠페도크레스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는데, 왜 그런고 하니, 지금까지 설명은 모두가 물질로 보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 엠페도크레스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물질과 정신을 결합시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여보, 저리로 가세요 ??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잠을 자더라도 같이 있고 싶고 당기고 싶은데, 그런데 마누라가 옆에 오면 "이 여자가 와 이라노? 저리 안가나" 라고 하는 것은, 즉 그렇게 당기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사람도 사실상 물체로 되어있는데, 세포로 말이다. 물론 옛날에는 세포라는 말은 없었지만, 이 세포는 1665년 영국의 '훅'(Robert Hooke) 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발견하였고 말이다. 아무튼 사람은 그래도 몸뚱이라는 물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양이 왜 움직이는가?" 라는 것과 "인간이 왜 움직이는가?" 라는 것은 서로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 다시, 인간이 왜 사랑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는가?
아까 말한 것을 다시 반복하면, 인간이 왜 사랑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는가? 그것은 곧 사랑과 슬픔의 신이 있어서, 그 신이 감정을 주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기타를 치고 하프를 치면 왜 기쁜가? 이상하지 않는가? 물론 뮤직이까 그러한데, 왜 그 뮤직이 기쁘냐는 것이다. 왜 주현미 노래를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묘한 감정이 드느냐는 말이다.
◈ 감정을 되풀이하면, 이성이 !!
그것은 이성이 아니고 분명 감정인데, 그런데 감정을 되풀이하니 이성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감정이 되풀이되면 굳혀지는데, 즉 또 다시 그렇게 기쁠 것이라고 예상이 되니, 그러니 그것이 이성이 된다는 것이다. "역시 클래식보다는 트롯트가 좋아" 라고 이성이 작동되는데, 그러니 시작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라는 말이다. 감정으로 시작해서 이성으로 마친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랑하면 땡기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사람은 분명히 물체인데, 그렇게 물체가 맞다고 하면 왜 서로 좋아서 붙어 다니느냐는 것이다. 즉 사랑하니 땡기는 것이고, 미워하면 같이 가다가도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란 물체가 그러하다면, 다른 물체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일단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뛰어넘어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먼저 하겠는데, 그는 이것을 '목적인(目的因)'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목적으로 하는 원인이 있다는 말이다. 또 그런 목적을 만드는 운동하는 원인이 있는데, 그것을 '운동인(運動因)'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작용하는 '작용인(作用因)'이 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왜 나무가 위로 자라는가?" 라고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고 하니, 나무가 보다 더 많은 태양을 바라보고 자라나려는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해야 자기가 더욱 더 잘 자라니 말이다. 바로 그것이 내장이 되어있어서 그렇게 위로 자란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플라톤과 다른 점이 "내장이 되어있다" 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플라톤은 무엇인고 하니, 물체 안에는 물체를 움직이는 어떤 자체적인 원인은 내장이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에서 본래의 본체가 있는데, 그것을 모방하고 따라하는 입장에서 물체가 그렇게 움직인다는 말이다.
◈ 10개 가운데서 어느 것이 참인가?
여기 이렇게 '1'을 10번을 적어보면, "1, 1, 1, 1, 1, 1, 1, 1, 1, 1" 라고 말이다. 그러면 여기 이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1' 인가? 여기 10개가 모두 '1' 이라고 하면 '프로타고라스'의 경우이고, 또한 그 어느 것도 '1'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고르기아스' 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모든 것이 다 '1' 이라고 하면,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그 무슨 짓을 해도 모든 것이 다 진리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동일한 예를 들어서, "아내를 사랑한다" 라는 것을 10번이나 이야기했을 때, 과연 그것 중에서 어느 것이 참이냐는 말이다. 방금 집사님이 대답한 것처럼 "모든 것이 다 사랑한다" 라는 것이 정답이 될 때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도 남편의 입장에서는 역시 사랑의 한 가지 형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용납하면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데, 즉 뭔가 이것이 아내사랑이고, 거기에서 이탈이 되면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게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설령 여기서 사랑을 10개 가운서 하나로 규정한다고 해도, 그것을 동일하게 되풀이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 어느 마누라의 생일 이야기 !!
예를 들어서, 아내생일에 아침에 케이크를 사주고 저녁에는 외식을 시켜주고, 또 스카프를 사주었다고 한다면, 제가 현숙씨에게 그렇게 했다는 말이 아니고, 그런데 그 다음 해의 생일 때에 그냥 케이크만 하나 덜렁 사주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만 사랑이라고 정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사랑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작년과 똑같이 해주었다고 하면, 하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이상하게도 작년의 그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이 우선이 아니라 감정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 감정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흐르는 강물에 동일하게 두 번 발을 담글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도 그 물이 아니고 발도 역시 그 발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상하게도 그때 그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누라는 그러한 감동을 받고 싶어하니, 즉 동일한 감정을 만들어내라고 하니까 그야말로 환장을 하는데, 그래서 할 수 없이 스카프에다가 외투를 하나 더 사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좋아서 입이 벌어지고 말이다. 지금 제가 말한 것이 오늘 강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의문점도 조금은 풀렸지 싶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 고민을 했는지 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집사님이 없어서 다시 정리를 하면, 제가 '1'을 10번을 적어놓고 그 중에서 어는 것이 진짜 '1' 이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님은 10개가 전부다 '1' 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다음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내를 10번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 중에서 어는 것이 진짜로 사랑하는 것이지 말이다.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질문 - 기준을 잡으려고 하니 그런 것이 아닌가요?
물론 그러한데, 그런데 기준을 잡았으면 다음에도 그러한 기준대로 해주면 되는데,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설령 그렇게 해주어도 마누라는 그때 그 기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 우선이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감정의 원천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래서 감정의 출처를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 드디어 회의주의자 '소크라테스'가 등장 !!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회의주의'와 '의심' 이라는 것인데, 바로 그 회의주의와 의심의 최초의 인물이 누구인고 하니,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 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상대방이 갈 때까지 가도록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것인데, "태양이 무엇인가? 그러면 그것이 정말 태양인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끝까지 가서 결국에는 "I don't know" 라는 것으로 마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진리라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인데, 이 소크라테스에 이어서 회의주의에 들어간 사람이 바로 고르기아스인데, 즉 "참은 없고, 있다고 해도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전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참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다 거짓이고, 환상이라는 말이다.
◈ 플라톤 - 이 세상은 모방이고 그림자 !!
그러므로 플라톤 말이 맞는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방, 즉 그림자에 불과하고, 참된 형상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다. 즉 '1'을 이렇게 10개를 적어도, 어떤 사람은 이것을 '1' 이라고 하고, 또한 어떤 사람은 저것을 '1' 이라고 하는데, 서로가 보면 '1'이 아니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1'을 쓰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또 '1'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대 언어학자인 '소쉬르'에게 오게 되면, 그것이 모두가 '1'이 되는데, 왜냐하면 서로가 차이가 나니 말이다. 즉 '1' 이라는 숫자를 좀 이상하게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차이가 나니 고유의 의미를 챙긴다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오면 말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1' 이라고 보는 것은, 각각의 '1'이 모두 표준이 아니라, 그것은 하늘에, 즉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데, 그것이 본래 '1'의 원형이란 것이다. 즉 '1'의 형상은 따로 있는데, 이 세상에는 그것이 모방되어 있다는 말이다.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로 시작해서 정신으로 가는데, 그 실제의 형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이렇게 점선으로 더욱 높아가고, 즉 정신에 가까워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쪽은 '형상계' 라고 하고, 여기는 '실제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느낀다고 해서 여기를 '감각계' 라고 하는데, 이 감각계에서는 형상계를 모방해서 점점 점선으로 이렇게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이 내용을 녹음으로 듣는 사람은 이해하기가 참 곤란하지 싶은데, 아무튼 이렇게 물질에서 정신으로 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물질의 세계에서 신을 뽑아내면 그만 신화의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해가 됩니까?
◈ 술은 박카스가 빚어서 !!
예를 들어서, '박카스' 라는 것이 마시는 드링크제가 아니라 원래 술의 신인데, 분명히 술은 물질인데 하지만 그 술을 빚어내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박카스 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봐서는 우연한 타이밍이 술이 만들어지니 말이다. 그러니 술이란 물질에서 박카스라는 신의 세계로, 즉 정신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에서는 이것이 신화의 세계가 아니라, 촐랑거리며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인 하나의 신으로 나아가는데, 바로 그것을 '무정형' 이라고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물질이 정신으로 가면서 점점 더 본래의 형상을 닮게 되는데, 그것을 아까 "1, 1, 1, 1, 1, 1, 1, 1, 1, 1"을 가지고 설명을 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복실이도 있고 메리도 있지만, 그러나 개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합쳐서 개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는 형상계에 속하고, 복실이나 메리는 감각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현상계에 말이다. 형상계와 현상계가 발음도 비슷하고 해서 구분을 잘해야 하는데 말이다.
◈ 플라톤의 철학이 곧 복음 ??
그러니 위는 형상계이고 정신, 혹은 영혼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현상계인데, 그 현상계에는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뜻 들으면 기독교와도 비슷한데, 즉 우리는 지금 나그네로서 땅에 살고 있고, 우리의 원래 본향은 저기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도 복음도 전혀 아니고, 그 지역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기 400년 전에 이미 플라톤이 다 이야기한 헬라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헬라철학은 어디를 배경으로 나왔는가? 신화를 배경으로 나왔는데, 그러면 왜 신화를 배경으로 했는가? 꼭 지금 제가 소크라테스가 하듯이 묻고 있는데, 사실 그 산파술이 효과적이고 말이다. 아무튼 왜 신화에서 나왔는고 하니, 그렇게 알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몇 개밖에 되지 않는 그 당시 단어를 가지고 표현을 해야하니, 그렇게 신들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같이 단어가 다양하고 아주 많으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될지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적은 단어를 가지고 대충(?) 설명을 해주는 것인데, 그런데 그 단어를 가지고 미지의 어떤 인간의 감정을 설명해주어야 하니까, 그렇게 하나하나마다 각각의 신으로 일일이 다 대입을 시킨다는 것이다.
◈ 인간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
다시 말해서, 자기 속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면 울화를 내게 하는 신이, 그리고 기쁨이 넘치면 기쁨이 넘치게 하는 신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밖으로 나오면 울화의 신과 기쁨의 신이 자기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어떤 여자와 동침하고 싶으면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동침의 신이 따로 있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렇게 여자와 함부로 동침하면 안 된다는 신이 있으니, 그들이 서로 싸운다고, 그렇게 인간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내부를 그렇게 표현한다는 말이다.
◈ 외부에게 누군가가 감정을 인간에게 !!
요즘 같으면 그냥 우리 인간들만 있다고 할지 몰라도, 그런 식으로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인간만 있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러한 감정을 인간에게 준 외부의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미지의 누군가가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의 물체인데, 물체가 어떻게 그런 정신에 속한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질문을 하고 싶어도 참는 표정들인데, 사실 이런 강의는 중간 중간이 끊어져도 괜찮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이 너무 복잡하고 함축된 것이 되어서, 그래서 우리가 서로 생각을 좀 하면서 진행이 되어야 하는데, 마치 수학공식처럼 죽죽 나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물질에서 정신을 저렇게 끄집어내는 것은 분리가 된다는 의미인가요?
실제로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분리가 되는 것 말고는 달리 표현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단어가 너무 적으니 말이다. 사실 이 '정신' 이라는 단어도 아낙사고라스가 최초로 사용한 것이고, 그래서 그 이전에는 물질은 물질인데, 물질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되는, 그런 섞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 신화의 세계는, 물질과 정신이 구별이 안 돼 !!
그것이 바로 신화의 세계인데, 즉 신과 인간이 마음대로 이야기를 하고, 또 서로 사랑도 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물질이면서도 정신이 있고, 정신은 또 물질이고 말이다. 마치 무슨 젤리상태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음식의 '수프' 와도 비슷한데, 밥도 아니면서 국도 아닌 것이 말이다. 만약에 물질이라면 딱딱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은유의 세계이고, 상징의 세계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회사에서 하청업체에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라고 오더를 낼 때는, "내일 중으로 소나타 핸들 200개를 입고바람" 이라고 쓰는데,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왜 운전할 때 손에 잡고서 움직이는 둥근 것이 있지요? 그것을 200개를 주세요(??)"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것이 물질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냥 물질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질 속에 정신이 녹아져있고, 그러니 요즘 말로 하면 비유와 은유와 상징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돌맹이조차도 그러한데, 왜 성경에 보면, "돌들도 소리를 지르리라"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표현이 얼마나 상징적이냐는 것인데, 즉 정신과 물질이 하나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플라톤의 시대에 와서는 그것을 분리시키려고 노력을 했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그래서 예리하게 따진다는 말이다. 과학도 발달하게 되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의 대가인데, 생물의 종을 아주 다양하게 분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밑바닥에는 "백날 이성적으로 해봐라. 그렇게 해서 되나 보자" 라고 하는 감정의 층이 또 따로 있다는 것이다.
◈ 현대에는, 감정이 이성을 극복해버려 !!
역시 아니나 다를까 이것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감정이 이성의 층을 극복해버렸다는 말이다. 과학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라는 것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 왜 포스트모더니즘인가?
이것이 바로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인데, 즉 "내 팔을 내가 흔드는데 니가 왜? 이렇게 흔드는 것도 나의 개성이니 간섭하지 말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에게 이런 이런 개성이 있으니 얼마나 유용한가?" 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전에 나왔던 존듀이의 실용주의이고, 또는 제임스의 도구주의이고 말이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오히려 정반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어떠한 이익이 오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인데,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런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당신은 왜 수염을 깍지 않는가?" 라고 하면, "멋있어 보이려고" 라고 하는 것이라, "그냥 내 마음이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행동에 대해서 그렇게 가치를 정해버리면 서열이 그만 매겨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낮은 서열은 높은 서열에 대해서 결핍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런 결핍은 다시 욕망을 부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람이 살기가 무척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을 없애는 방법은 없는가? 그것이 바로 아예 서열자체를 없애버리면 된다는 말이다. 즉 "니는 니 팔을 흔들고, 나는 내 팔을 흔들면서 살자"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욕망을 없애는 것입니까?
욕망을 없앤다기보다는 욕망자체를 긍정적으로 보자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 먼저 니체가 주장한 것인데, 기존의 모든 로고스 중심의 것을, 즉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따지고 분석하든 것을 말이다. 그것을 이성이 아닌 감정중심으로 올려놓았는데, 여기에 '의지' 까지 더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절대권력의지' 라고 하는데, 즉 모든 인간의 의지는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 니체 -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정치적이다 !!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말인데,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정치적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 의지에서 행동이 나오니 말이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인간은 항상 자기 힘이 얼마나 센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끌어들이는 수법으로서 의지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움직일 때마다 "나에게 동조할 사람은 손들어보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