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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년 청도 각북교회 대구요한계시록특강 7월 7일 강의성경요한계시록

2008년 청도 각북교회 대구요한계시록특강 7월 7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124.59.84.82)

2008년 청도 각북교회 대구요한계시록특강 7월 7일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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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124.♡.84.82)

09-03-14 17:29

대구080707a요한계시록특강a

08 대구강의 9 - 요한계시록 특강1 - 지옥의 하나님 30

08,07,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장소 : 청도 각북교회)

◈ 요한계시록 - 기록되었다 !!

오늘 강의 주제가 '요한계시록 특강' 인데, 그렇다고 해서 요한계시록 전체를 모두 다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요한계시록 중에서도 특징적인 것만 골라서 1시간 30분 정도로 할 생각인데, 이 요한계시록의 포인트가 의외로, 이 점을 사람들이 잘 놓치는데, '기록되었다' 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도 보면 '기록한 것'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22장에도 보면, 유명한 말씀인데, '예언의 말씀' 이라고 해서, 그 예언의 말씀에다가 무엇을 더하면 재앙을 더하고, 제하면 생명책에서 제하여 버리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이 책의 예언된 말씀에서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1장 3절에 있는 대로 '기록된 것', 오직 그것만을 고수하겠다는 말이다. 이미 기록된 것만 말이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전체적인 형틀은 무엇인고 하니까, 더하지도 말고 빼지고 말고, 이미 기록된 그대로 남겨달라는 것이다. 이 기록된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완료, 혹은 완성이라는 의미인데,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완료나 완성이 주는 안도감, 혹은 편안함이라는 말이다.

◈ 요한계시록이 주는 편안함 !!

그래서 성도라고 한다면, "나는 요한계시록을 보니 너무나도 마음이 편하더라. 왜냐하면, 기록이 되었으니까" 라고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이 이미 완료가 되었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로 완료가 되었는고 하니, 거기에 무엇을 더하든지 뺀다면 가짜인 줄 알라고 정도로 말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이 아마도 궁금증이 한 두 개씩 생기지 싶은데, 요한계시록의 이런 자존심(?)에 다른 성경책, 즉 창세기나 마태복음, 로마서 등도 포함이 되는지, 아니면 별개의 것인지, 그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사도행전으로 예를 들자면, "나는 사도행전이 너무 좋더라. 그것으로 만족해" 라고 한다면, 그것을 요한계시록이 들으면 삐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완료와 완성의 의미는 요한계시록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사도행전만으로 만족해한다면, 상대적으로 요한계시록이 모독(?)을 받는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은 돗대성경인가?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18절과 19절에 나오는,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 라는 것이 이 요한계시록에만 해당되는 사항인지, 아니면 성경전체를 마무리하는 것인지 말이다. 만약에 요한계시록만 고수한다면 다른 복음서나 바울서신서 등이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이 무슨 자기만 돗대인 것처럼 하니 말이다. 베드로도 뭐라고 했는가? 성경은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에 함부로 풀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다른 성경책들이 이 요한계시록에게 복종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이것이 몹시 어렵기 때문에 제가 그림으로 설명을 하겠는데, 그렇게 어려운 만큼 완료와 완성이라는 안도감이 큰데, 그것이 행복을 주는 요소인 반면에, 이 완료와 완성을 한꺼번에 이해하려고 하니 부담스럽고 힘든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더 이상 추가하고 뺄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그 힘든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해보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요한계시록은 기록된 것인데, 어떤 기록인고 하니, 완료된 기록이란 말이다. 그렇게 때문에 더 추가할 필요도 없고, 빼어서도 안 되고 말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라는 이 기록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예언들이 말이다.

그러면 구약의 예언이 이 요한계시록 안에 어떤 형태로 들어있는가? 완료된 형태인데, 그렇게 완성된 형태로서 요한계시록에 모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도대체 다른 성경책들은 무엇이냐는 말이다. 자기만 혼자 최고이고 다른 성경책들은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서, 그렇게 홀대하면 되느냐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 - 수직적 !! 마태복음 - 수평적 !!

거기에 대한 답변이 무엇인고 하니, 구약의 완성된 예언의 형태에 있어서, 구약이 수직적으로 완성된 형태가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면, 그것이 수평적으로, 즉 역사적으로 완성된 것이 공관복음서이고, 요한복음이고, 사도행전이고, 바울의 서신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서로 모순이 되지 않는데, 즉 구약의 예언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다 완성이 되었는데, 그런데 구약이 그렇게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에도 나오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가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요한계시록이 더 가치가 있는지, 그렇게 의문을 가질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묵시 - 일단 역사는 아니다 !!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행적인데,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성취가 되었는지를 보여준다면, 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완료와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이 역사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완성되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묵시적' 이라고 하는데,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일단 역사적이 아닌 다른 방식이라고 하자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의 시간관은 보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역사적이고 다른 하나는 묵시적인데, 묵시가 무엇이냐고 하면 그것은 사실 모르는데, 그래서 역사가 아닌 것을 묵시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묵시란 이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버리면, 그것이 왜 말이 안 되는고 하니,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려면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 언어는 항상 역사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가지고 묵시를 표현하기 때문에, 그 묵시를 따로 뽑아내어도 제대로 해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 !!

하다보니 말이 너무 어렵게 되었는데, 이왕 어려운 것 조금 더 어렵게 표현하면, 예들 들어서, 우리가 열쇠를 가지고 집에 들어가려면 밖에서 문을 따고서(?) 들어가야 하는데, 물론 안에 있으면 그 집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안에 있으면, 그 집의 구조를 일일이 하나씩 다 살펴볼 수 있는데, 거실의 구조는 어떠하며, 화장실은 어떻고, 베란다는 어떻고, 그렇게 말이다. 하지만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면 그 집의 구조가 '확' 하고 한꺼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안 들어오는데??)

그렇게 안에서 하나씩 살피는 것이 마태복음이고, 사도행전이고, 그리고 로마서라고 한다면, 반면에 밖에서 열쇠를 가지고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꺼번에 보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과 5장에 보면 열쇠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열쇠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안에서 여는 것이 아니라, 밖에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묵시' 라는 개념이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역사에 속한 사람은 역사를 안다는 말인가? 아니면 모른다는 말인가? 물론 알기는 알겠지만 최종적인 것은, 즉 완료되고 완성된 것은 그 안에서 헤매고 다닌 사람은 모르는데, 그냥 조금씩 조금씩 알아갈 뿐이라는 말이다. 이리저리 다니면서 집의 구조를 살펴보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 사도행전을 보고는, 성령께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활동을 하시는지 안다는 것이다. "아하, 빌립집사가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났구나", "이런,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조금씩 알아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누구나 다 어디까지나 역사 안에 있는데, 그렇게 우리도 마찬가지로 역사 안에 있으면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라든지 사도바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 등을, 그렇게 역사 속에서 역사적인 인물을 통해서 살펴본다는 것이다.

◈ 그러나 '묵시' 라는 열쇠로 문을 열어버리면 !!

그런데 요한계시록처럼 '묵시' 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열쇠를 가지고 집어넣어서 열어버리면 되니까, 그렇게 안에서 헤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씩 살펴보는 것은 복음서나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신서 등을 통해서 하면 되는 것이고 말이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밧모섬에서, 이 섬은 터기에서 약 100km 정도가 떨어져 있는데, 사실상 사도요한은 이 밧보섬에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역사 속에서 배제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밧모섬에 갇혀있으니 말이다.

사도요한이 스스로 자기가 전도하고 돌아다니는 활동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는 가만히 앉아있는데, 계속해서 누군가가 가져다준다는 말이다. 마치 구약에서 엘리야에게 까마귀가 음식물을 물어다주듯이, 그렇게 천사가 와서 계시를 날아다 준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해 !!

그런데 그 천사가 물어다주는 계시는 무엇인고 하니, 마태복음이나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처럼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묵시' 라는 계시의 열쇠를 가지고서 역사의 문을 열어버리니,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신학자들이 역사적 언어를 가지고, 그것이 마치 쇳대(?)나 되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서 설치니, 요한계시록이 해석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제대로 해석을 하려면 사실 간단한데, 우리도 밧모섬에 귀양을 가서 있다가, 천사가 와서 묵시의 계시를 물어다주면 된다는 것이다.

도미티안 황제가 어떤 일을 했고, 666은 무엇이며, 이런 것을 역사 속에서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찾아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요한계시록 말고 히브리서나 유다서나 요한 1,2,3서 등에서 하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엉터리 해석을 하겠지만 말이다.

◈ 1장 1절 - 반드시 속히 될 일을 !!

아무튼 이 요한계시록은 그냥 천사가 와서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사도요한이 졸고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1장 1절을 보겠는데, 뭐라고 하는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라는 것이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 기록되었다 - 이제 끝났다 !!

천사가 나풀나풀 날아왔는지, 비행기처럼 '씽' 하고 날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요한에게 천사가 왔는데, '기록된 것'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기록된 것으로 왔는가? 그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잠시 뒤에 이야기하겠는데, 아무튼 이렇게 뭔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앞으로 너희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고 하겠다" 라는 시대는 끝이 났다는 것이다. 즉 "앞으로 너희들이 잘하면 봐주고, 못하면 국물도 없다. 그러니 두고 보겠다" 라는 시대는 말이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겠다" 라는 것은 기록이 아닌데, 이 '기록' 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던, 역사가 어떻게 전개가 되던,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이 기록된 대로 모든 역사가 그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여기 이 기록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 1장 1절의 '속히 될 일' 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삶의 정황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인간을 배제한 채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귀향을 가야만 했고 말이다. 비록 사도라고 해도 배제를 하게 되는데, 그래서 사도요한은 오직 속히 될 일을 기록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된 대로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은 이미 누구의 손을 떠났다는 의미인고 하니, 인간의 손은 떠났다는 말이다.

◈ 요한계시록의 특징 - 인간의 손을 떠났다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손을 떠났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앞으로 우리 이렇게 합시다" 라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기록된 것이니 말이다. 그 기록된 것을 인간인 우리가 지키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속히 될 일' 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 요한계시록에서 무엇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행동을 순종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기록된 대로 속히 된다고 하는 믿음을 표현한 것인데, 즉 "아무리 사태가 어려워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라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의 생각의 배후에는 "이미 기록되었다" 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 목사님, 문서 선지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교회 사이트에 보면, 김대식씨가 질문한 내용이 그런 것인데, "목사님, 문서 선지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다. (질문내용이 조금 다른데??) 하필이면 왜 '문서' 이냐는 것이다. 이러한 문서 선지자와 대비되는 것이 엘리야와 엘리사인데, 그들은 기록으로 남기는 문서가 아니라 본인들의 활동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서 선지자들은 어디에 관심이 있는고 하니, 문서로 기록하는데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와 엘리사는 무엇인고 하니, "봐라. 내가 지금 이런 기적을 베풀었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문서가 아닌 '기적' 선지자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이렇게 막대기를 던지니까 쓴 물이 단 물이 되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활동성이 강조된다면, 여기에 반해서 문서 선지자는 무엇인고 하니, "나를 쳐다보지 마라. 나는 그냥 기록할 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앞선 한 쪽은 "나를 보아라" 라는 것이고, 다른 쪽은 "나는 기록할 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태워도, 태워도, 타지 않는 기록들 !!

특히 예레미야의 경우에,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김 왕 때에 있었던 일인데,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하자, 이것이 왕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그렇다고 예레미야가 지적을 하자, 왕은 그를 성전에 오지 못하도록 했는데, 그러자 예레미야는 글로 두루마리에 적어서 왕에게 읽히도록 하게 되는데, 그러자 왕이 "너희들, 이제 다 읽었지?" 라고 하면서 불이 타는 화로에 그것을 던져서 태워버린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바룩이라는 서기관이 그대로 적어서 낭독을 하는데, 그것이 끝나자 그것을 전부다 화로가에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인가? 예레미야는 또 기록을 한다는 것이다.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문서 선지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렘 36:21)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렘 36:22)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피운 화로가 있더라
(렘 36:23)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 문서 선지자 - 이제 세상은 끝났다 !!

문서 선지자는 이사야 시대 이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기록된 것을 강조했는데, 왜 그런고 하니, 마지막 때에는 사람의 손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기록된 것은 변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의 모든 육체라고 해봐야 풀의 꽃과 같지만, 그러나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이 요한계시록이 묵시인데, 이런 묵시를 빼고 역사적으로 예언을 한 것이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인데, 여기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강조한 것이 무엇인가? "말씀을 응하게 함이러라" 라는 것이다.

(요 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아무리 나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이 시대가 발전되기를 제 아무리 애를 써도 말씀이 응하는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뿐이지,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결코 변할 수가 없다" 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고 고난을 받는 것도 다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 말씀을 응하게 함이러라 !!

특별히 그렇게 "말씀을 응하게 함이러라" 라는 내용이 들어가는 성경구절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이 주님의 계획이 변경될 조짐이 있다고 오해할 소지가 많을 경우인데, 그래서 복음서의 기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어림도 없다. 너희들이 개입해서 주님이 수정한 줄 아는가? 천만의 말씀, 너희들이 지금 하는 것까지도 말씀이 응하게 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비해서 이 요한계시록은 무엇이 다른고 하니까, 밖에서 열쇠로 문을 열어서 한꺼번에 튀어나오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말씀을 응하게 함이러라" 라는 것으로, 그들은 실제로 걸어다니면서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특히 사도행전의 경우에는 로마까지도 가게 되면서, "말씀을 응하게 함이러라" 라는 것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인 28장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이 무엇인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라는 것도, 말씀을 응하게 하는 차원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한 말인데, 그것이 바로 종말이라는 것이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 먼저 '종말'의 개념에 대해서 !!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이 요한계시록이 좀 어려운데, 먼저 '종말'의 개념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 종말은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역사 그 이후'를 말하는 것이고, 즉 역사가 이어지는 그 마지막 대목을 종말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의 특징인데, 즉 "너희 예루살렘에서 어린아이를 밴 자들과 젖먹이가 있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고, 또 해와 달이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도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마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마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마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런데 그때 주님이 어떻게 오시는고 하니,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재림이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그게 바로 '역사 이후의 역사' 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역사가 없는가?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이 묵시처럼 되어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 가라(거짓) 예언서의 등장 !!

그런 묵시문학들이 말라기에 이후에 보면 유행을 하는데, 그런 '가라(거짓) 예언서'에는 다니엘서 7장 등에 나오는 묵시가 역사 속에 그대로 뛰어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표현해내는 것은 묵시적 용어가 아니라 역사적인 용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실제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올라가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옆에 있던 흰옷을 입은 천사들이 뭐라고 하는가? "아니, 무엇을 그렇게 놀란 토끼눈(?)으로 쳐다보는가? 주님은 올라가신 그대로 내려오신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주께서 마지막 때에 천사장의 소리와 나팔로 좇아 강림을 하실 것이고, 땅에 있는 자들은 휴거(?)를 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분명히 묵시적 사건이지만 그 표현은 역사 속에서 되는데, 역사적으로 용어를 사용해서 말이다. 그래서 이것은 역사이후의 종말, 즉 역사가 끊어짐이 없는 종말이라는 말이다.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역사의 특징은, 끊어짐이 없어 !!

그것이 바로 역사인데, 이 역사의 특징은 끊어짐이 없다는 것이다. 백만 분의 1초를 쪼개면, 그 백만 분의 1초 사이에 천만 분의 1초가 10개나 들어있다는 것이다. 또 쪼개면 또 들어있고 말이다. 그러니 어떤 경계선이 없는데, 경계선이 말이다. 그러한 경계선을 계속해서 형성을 해가는데, 그래서 '영속적' 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영속'은 의미적이니까, '연속'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진짜 시간적으로 이어져간다는 것이다. (영속, 연속 ??)

◈ 자연이 아닌 이스라엘을 통해서 - 태양아 멈추어라 !!

구약의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아모리 족속과 전쟁을 하는데, 태양이 멈춘 적이 있었는데, 사실 달도 멈추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주는 의미가 참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은 멈추는 것이 아닌데, 그 당시에는 "태양의 움직임은 곧 하나님의 작용이다" 라고 여겼다는 말이다. 그러면 태양이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태양과 같은 자연의 움직임을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본 것이 그만 틀린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멈추어져도 전쟁에서는 승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이 하나님의 손길을 대변한다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자연을 제쳐두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직접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여준 것, 그것이 바로 이 장면이라는 것이다.

(수 10: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신약에서 예수님의 경우에,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서 예수님이 그것을 잠잠케 하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아니, 도대체 저 양반이 누구이기에 바다도 잠잠케 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내막을 좀 더 살펴보면,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고 파도가 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데, 즉 "풍랑은 신의 작용이다" 라는 말인데, 그런데 그러한 신의 작용을 스톱시킨다는 것은, 풍랑이 일게 하시는 분 따로, 그것을 스톱시키는 분 따로, 그렇게 새롭게 두 노선으로 갈라져서 등장하는 방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눅 8:24) 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눅 8: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지금 제가 강의하는 내용들이 이해가 되지요? 요한계시록을 설명하려고 이렇게 힘들게 끙끙거리고 있는데, 아까 아파트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면 한꺼번에 다 드러난다고 했는데,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그 이전까지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헤맨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언어를 가지고 사도바울은 전도를 하면서, "아하, 주의 일은 이렇게 벌어지는구나", "믿는 자가 일어나는 것을 보니, 주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아파트 내부를, 즉 역사내부를 살핀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은 자를 일으키고 말이다.

◈ 요한계시록은 묵시의 '키'를 가지고 !!

그러한 역사의 내부를 살피는 언어를 가지고서 복음서도 보고, 사도행전도 살펴보고 했지만, 그러나 그런 방법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은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로마서를 해석하듯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깥에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을 두고서 '묵시' 라고 하는데, 역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한방에 다 보여준다는 말이다.

아무튼 역사라고 하는 것은, 현재 이어진 가운데서 마지막 때를 보여주는 연속성, 즉 끊어짐이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묵시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문을 열기 이전에는 단층인 줄로만 알았다가,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복층' 이더라는 말이다. 즉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이 세상을 살펴보니 말이다.

그러니 1층에서 활동이 따로 있고, 2층에서 활동이 따로 있는데, 2층에서 "말씀을 응하게 함이러라" 라고, 그렇게 말씀대로 하니, 1층은 1층대로 소소한(?) 말씀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층을 다 이야기해주어야 구약의 예언이 묵시적으로 완성되고 완료된 기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위에서 내려오는 계시만이 아니라 밑에서 올라오는 계시도 구약의 예언대로 된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드러나기에 !!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니 목사님, 구약의 예언은 예수님께서 모두 이루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보면 전부가 다 구약의 예언이라는 것이다. 단어 하나하나가 다 말이다. 그렇다면 또 이런 질문이 나오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돌아다니면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내용들은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즉 사도행전 장에서 베드로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구약을 이루려함이다" 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구석구석 밟아가면서 파악해 나가는 반면에, 요한계시록은 안에서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열쇠를 가지고 열어버리니 한꺼번에 다 열려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말이다.

그렇게 한꺼번에 '확' 하고 열어보니, 그 구조가 단층이 아니라 복층구조인데, 그런데 그것들이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2층은 1층에 영향을 주고, 또 1층은 1층대로 2층을 향해서 마치 미사일처럼 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 창세기 3장 옆에 요한계시록 12장이 !!

이것을 말로 하니까 몹시 어려운데, 예를 들어서, 창세기 3장에 보면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여자가 나오고 뱀이 등장하는데,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에도 보면 옛뱀이 나오고 아들을 안고 있은 여자가, 즉 마리아(?)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차이점이 나는고 하니까, 창세기 3장에서는 여자인 하와가 당하기만 하고 어떻게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여자가 1층에서 당하니 2층으로 올라가 버리는데, 하늘나라로 말이다. 그래서 이 악마는 그만 닭 좇던 개 신세가 되어서, 이를 갈면서 여자의 남은 후손들과 강가에서 대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요한계시록이 없다고 치고, 창세기 3장을 가지고서, "목사님, 여자가 뱀에게 당해도 너무 당하는데, 그렇게 해서 여자가 살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창세기 3장을 가지고는 완료된 안도감과 같은 것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목사님, 이제는 우리는 고생만 직사게 하네요" 라고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미완료된 상태로 죽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 창세기 3장의 사건을 밖에서 열쇠를 가지고 열어서 살펴보니, 그것이 저기 다락방 1층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묵시의 세계에서는 십자가 사건 바로 옆에 무슨 사건이 있는고 하니, 창세기 3장의 사건이 있고, 이 창세기 3장의 사건 바로 옆에 십자가 사건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이해가 안 되면 더 이상 강의를 하기가 곤란한데, 지금 우리가 바로 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밖에서 열쇠를 가지고 여는 주님의 안목으로 볼 때만 말이다. 밖에서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 문을 '철걱' 하고 열 때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심지어 목을 베인 영혼이라고 할지라도, 바로 그 목 베인 지점이 자기가 천국에 온 지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것을 가지고, 전천년설, 후천년설, 그것도 보수적 후천년설과 자유주의 후천년설로 나누어지고, 또 무천년설 등등, 여러 가지로 분류를 하는데, 하지만 그런 모든 이론의 문제점은, 심지어 무천년설도 그러한데, 묵시적인 것을 역사적 개념을 가지고 역사적인 언어로 해석을 하니, 그것이 어떻게 제대로 된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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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설(千年說)에 대해서 -- www. bamjoongsori. org
(1) 후 천년설 - 후 천년설(後千年說)은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신학적 견해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이전에 이 땅위에 천년왕국이 존재하게 되고 그 이후에 재림이 있다고 하는 신학적 학설입니다. 이후 천년설은 다분히 상징적인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이 땅위에 천년왕국이 세워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설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복음은 앞으로 계속해서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이며 온 세계가 복음화되어 이 세상은 전쟁과 범죄로 인한 시대는 지나가고 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새롭게 변한 세상이 올 것인데,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시대를 그들은 천년왕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이런 시대를 거친 후에 하나님의 교회가 사탄의 총공격을 받게 되며 이때 이 악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설이 후 천년설이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이런 후 천년설을 취한다면 요한계시록은 겉잡을 수 없는 혼미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뿐 아니라 성경전체의 진리가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2) 무 천년설 - 무 천년설(無千年說)은 문자 그대로 천년왕국이 없다고 주장하는 설입니다. 근래에 많은 신학자들이 이 견해를 선호하고 있으며 이 이론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설을 취하게 될 때 풀리지 않는 문제점들이 너무나도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무 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 천년설에 맞지 않는 성경구절이 나오면 그것을 자신들의 이론에 합치하도록 뜯어고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런 경우에, 보편적으로 상징적 해석 방법을 취하기 때문에 성경에 합치된 해석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을 결박하여 천년간 무저갱에 던져 넣는 사건을 교회시대에 사탄의 활동을 제한하는 해석으로 풀이하고, 천년이란 기간을 교회시대로 해석하는 것이 그런 경우들입니다. 첫째 부활에 대한 해석도 죽은 자들의 부활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거듭나는 중생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3) 전 천년설 - 다음에 전 천년설(前千年說)이 있습니다. 이 전 천년설은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신학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신 후 이 세상에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는데 그 왕국이 천년왕국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전 천년설은 성경에 계시된 모든 종말적인 사건과 일치되는 학설로 보수 진영의 교단 중 대부분 이 전 천년설을 종말론의 신학적 견해로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 천년설도 여러 가지 상충된 견해로 갈라지는 나머지 많은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특이한 전 천년설로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 소위 '세대주의 전 천년설'(世代主義 前千年說)입니다. 이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다른 전 천년설과 너무 현격한 차이를 두고 있기 때문에 보통 전 천년설이라고 부르지 않고,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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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역사적 언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역사 속에서 행위의 주체자로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에 반해서 묵시라고 하는 것은, 밧모섬에 귀양이나 가라는 말이다. 즉 역사 속에서 바깥으로 나와 있으라는 것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말이다.

◈ 우리는 언제나 밧모섬에 !!

요한계시록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여기 청도각북교회에 귀양을 왔는데, 요한계시록만을 달랑 들고서 말이다. 집이고 사업체고 간에 여기서는 거리가 먼데, 그러니 여기는 일종의 밧모섬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역사에 속한 인간이라면, "목사님, 빨리 강의하고 집으로 갑시다. 할 일이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녹취자 - 천 목사님은 요즘 재미가 솔솔하지 싶은데, 오늘 오셨나?)

그러나 그렇게 되면 백 날을 여기에 있어도 도로 돌아가야 될 곳이 있기 때문에, 즉 그렇게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은 '미완성' 이라는 말이다. 제가 누차 강조하지만 이런 미완성은 안도감이 없는데, 즉 평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미흡함이니 말이다.

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서 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라고 했는고 하니, "앞으로 니가 세상에 나가서 활동을 좀 한다고 해서 그것이 새로운 계시라고 여겨서, 즉 요한계시록에도 없는 내용이라고 하면서 추가하려고 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일이 없어야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아이디어조차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 녹음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이렇게 신이 나는데 ??

그러니 우리가 "여기 각북교회가 밧모섬이고, 그러면 저쪽은 세상이다" 라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 자체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아무리 집에 있고 사업체를 가지고 있어도, 그 자체가 자기의 밧모섬이 된다는 것이다.

◈ 너희들도 사도요한처럼 마음이 넉넉한가?

더 쉽게 이야기를 하면, 지금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너희들도 사도요한처럼 마음이 넉넉한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데, 지금 사도요한의 관심사는 천사가 날라다주는 묵시적인 열쇠들, 즉 "아하, 창세기 3장이 여기 이것이구나", "아하, 에스겔의 그 이야기가 그것이구나" 라고 하면서 느긋하게 밧모섬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사도요한 자기 자신은 귀양을 왔지만, 그러나 그에게 있는 그런 안도감, 넉넉함, 그런 것이 과연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그 사도요한에게 무슨 성경공부가 있고, 교회가 있고, 목회가 있고, 또 가족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이 언제 밤을 세워서 녹취를 한 적이 있던가?

사도요한은 그냥 천사가 물어다주는 묵시를 보고서는, "아하, 그것이구나.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네. 이미 기록이 다 되었구나" 라고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마냥 밧모섬에서 휴기를 즐기는 느긋함으로, 즉 초조와 불안함이 없는 상태로 말이다.

◈ 앗, 666이다. 모두 피하라 !!

그렇게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666이 나오니 불안해서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을 했기에 666에 겁을 내느냐는 말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를 내는데, 도대체 요한계시록이 주는 안도감과 편안함은 어디로 갔느냐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17장 이후에 보면 분명히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 모든 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이 살아남게 되어있다" 라고 하는데, 그 생명책이 무엇인가? 책이니 기록이라는 말인데, 그러면 여기에서 생명책이 왜 나오는고 하니, 묵시의 세계에서는 1층과 2층이 다 보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 모세와 사도요한 !!

출애굽기의 모세의 경우에, 그는 하나님이 불러서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 비로소 생명책이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생명책에 있는 대로, 역사 속에서 발자국을 남겨야 할 사명을 띠고 살았다는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살아야 하는 사명을 말이다.

하지만 사도요한이 그것이 아니라, 열쇠를 가지고 역사의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까, 2층에는 생명책이 있고, 1층에는 생명책에 있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판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데,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은 다 불못에 들어가니 말이다.

그러니 이 요한계시록은 시간적인 이어짐이 아닌데, 요한계시록 1장 다음에 2장, 2장 다음에 3장, 3장 다음에 4장, 그런 식으로 사건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열쇠를 열고 들어가니 전부가 다 한꺼번에 보인다는 것이다.

만약에 제가 3살 정도의 어린아이라면, 이 각북교회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키가 작으니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낮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강대상과 의자도 하나씩 살펴보고 만져봐야만 하는데, 하지만 어른이 되면 문을 열면 전체가 한꺼번에 다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꺼번에 보이는데, 물론 그것들에게도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변화는 기록된 것에는 벗어나지 못하고 말이다.

◈ 구약의 예언이 기록된 것 - 완성 !!

그렇게 요한계시록의 '기록된 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변화인데, 그러나 그 기록된 것들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예언이 된 것들이 기록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신약의 마지막 때에 완성이 되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더욱 더 쉽게 예를 들어보면,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이미 만들어진 음식을 맛보는 차이라고나 할까? 이미 만들어진 음식을 맛보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는데, 그러나 그렇게 음식이 오기까지는 만들어져야 하니, 그것은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복음서들이나 사도행전처럼 말이다. 더 쉽게 말하면, 사도요한은 천사의 일족(?)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렇게 천사의 계시를 받은 사도요한이 우리에게는 천사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 천사나 마귀와 우리의 차이점은?

어제 주일에 이런 설교를 했는데, 천사나 마귀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생계문제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하지만 혈육에 속한 우리는 우리의 몸 속에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항상 먹고사는 문제가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귀와 천사에게 기가 죽어서 지내는데, 저쪽은 그 문제에 대해서 느긋하니 말이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이렇게 해서 밥이나 먹고 살겠는가?" 라는 걱정만 늘어지게 하니 말이다.

◈ 사도요한은 그야말로 천사의 종족 !!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사도요한은 그야말로 천사류(類)인데, 하지만 이 사도요한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목 베인 영혼들,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라고 하는 모든 종류의 성도들도 동일하게 사도요한처럼 '천사류' 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사도요한이 천사에게 절을 하려고 하니, 천사가 뭐라고 하는가? 왜 자기에게 절을 하느냐는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계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계 22: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 요한계시록의 핵심 - 열쇠가 없이는 이 세상을 알 수가 없다 !!

이렇게 함으로서 요한계시록의 틀은 대충 잡았다고 볼 수 있는데, 물론 틀은 잡아도 핵심은 또 다시 정리를 해야 하는데, 요한계시록의 핵심이 무엇인고 하니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열쇠가 없이는 이 세상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 세상을 모르면 불안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미흡함이니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설쳐야 하는데, 즉 신앙의 용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느긋함이 아니고 불안함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밖에서 열쇠가 없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시선과 안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열쇠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니 말이다. 사도요한의 경우처럼 예수님의 안목을 가지면 이 세상을 알게 되는데, 어떻게 아는고 하니, "이 모든 것이 기록된 대로 된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완성이니, 기쁨과 행복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기쁨과 행복이 넘치게 되면, 결국은 "죽어도 좋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신학자들 - 요한계시록은 순교자들의 책이다 ??

아무튼 신학자들이 마지막에 기껏 하나 건져낸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특징은 순교자들의 책이다" 라는 정도인데, 물론 그것을 전개하는 과정은 엉터리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제가 말한 "죽어도 좋아" 라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그것도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것조차도 없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해석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이 요한계시록은 예수에게 미친 인간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이라는 소리인데, 구약의 묵시문학을 흉내내어서 자기들이 만들어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약을 흉내를 내었기에 별로 가치가 없고, 아무튼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드니 그냥 위로 삼아 읽어보면 좋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사도요한에게 천사가 와서 알려주고 하는,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소리 한 두 번을 들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사람들이 자기 책을 적을 때마다 그런 소리를 하니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알 수가 없다는 것은 엉터리이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고 말이다.

◈ 그러나 사도는 권위자이기에 !!

하지만 사도가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사도는 권위자라는 것이다. 어떤 권위인고 하니, 계시의 권위자로서 사도가 세워졌다는 말이다. 12사도가 괜히 있는 게 아닌데, 사도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이 아니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했는데, 바로 그런 취지로서 사도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신학자들이 "죽어도 좋아" 라는 결론을 끄집어내었는데, 앞에서 제가 이야기한 그런 것은 잘 모르고, 사실 관심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신학자들이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해보니, 이것이 무엇과 관련이 되어있는고 하니, 이것이 요한서신 계열에 속한다는 것이다.

◈ 요한의 서신서들에 대한 신학자들의 위험한 상상 !!

무슨 말인고 하니, 요한서신 계열에는 3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요한복음이고, 그 다음이 요한 1,2,3서이고, 마지막이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이다. 이 3가지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 공통점을 가지고 봐야 요한계시록이 풀린다는 것인데, 총신이나 장신의 교수들,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과연 맞는지 한번 들어보자는 말이다. 지금부터 그들이 그 공통점을 어떻게 끄집어내는지 한번 보라는 것이다.

이 요한서신서의 계열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들어있기에 말이다. 즉 마태, 마가, 누가와는 달리 사도요한만의 아주 독특한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 요한복음에 있으니, 그래서 여기서 그가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보았는지를 끄집어내어서 요한 1,2,3서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 아마 이 요한계시록이 '뻥' 하고 뚫릴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이다.

◈ 요한복음 - 빛과 그림자 !!

요한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을 볼 때, 자유주의나 보수주의나 모두 그런 방식으로 공부하는데, 그러면 요한복음이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와는 무슨 차이가 나느냐는 것인데, 여기서 그들은 상당히 위험한 주장을 하는데, 그들이 주장하기를, 마태, 마가, 누가는 그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런데 요한복음은 다른 어떤 사상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상이 곧 '빛과 그림자' , 혹은 '빛과 어두움' 이라는 말이다.

◈ 요한복음 -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보여주는 분 !!

다른 복음서들, 소위 공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보여주는 분이다" 라는 말이다. 즉 복음의 일을 하시는 분인데, 복음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다가가서 더 상위에 있는 어떤 세계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빛' 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이 빛의 세계에 소속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잠언 8장에 나오는, 즉 신이 있어서 예수님은 2인자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1인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1인자가 2인자를 배태하고, 즉 창조했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는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해놓고는, 이렇게 말씀이 1인자의 프로젝트 속에 합류되어있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1인자는 멈추고 있는데, 그렇게 멈추고 있는 신이 있는 반면에,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신이 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꺼번에 같이 있는 것이 구약이고, 분리된 시점이 바로 신약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고정되어 있던 것이, 마치 마징가 제트처럼 분리가 되고, 그 분리된 것이 다시금 합쳐진다는 말이다. (참고로, 마징가 제트는 분리합체가 가능한 초대형 일제로봇임, ㅋㅋ)

◈ 요한복음은 플라톤의 옷을 덧입고 !!

이것이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 그 당시에는 플라톤 사상이 유행을 했는데, 그러니 그런 사상을 이미 민중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이 그 당시 유행하던 플라톤 사상의 옷을 덧입혀서, 그렇게 해서 민중들을 납득시키려고 요한복음을 기록했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서 마태, 마가, 누가의 기록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역사적인데, 그래서 그들의 복음서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을 하시고, 그리고 성령이 오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것은 이미 다 아는 것인데, 그렇게 익히 아는 것들을 납득하는 차원에서 이 요한복음을 추가를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민중들이 알고 있는, 즉 지극히 높고 궁극적인 사상을 예수님께서 모두 이루어내신다는 것으로 말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요한복음이 4번째 복음서로서 추가가 되었다고, 공부를 꽤나 했다는 신학자들이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되는가? 이 요한계시록은 굳이 없어도 되는데, 도미티안 황제 등에 의해서 너무나 핍박이 심하니, 그렇게 핍박받고 고생하는 자들을 위로해주는 차원에서, 괜찮은 위로의 글들 중에서 이 요한계시록을 뽑아내어서 성경책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의 성경목록에는 이 요한계시록이 없었는데, 나중에 추가해서 넣었다는 것이다. 초창기 정경에는 없었는데 말이다.

이런 사상의 이면에는 요한복음에 대한 오류, 즉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그러한 주장들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에서 묵시로, 즉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초(超) 시간적인 것으로 나아간 이유에 대해서, 즉 성경이 역사와 묵시로 분류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고, 그렇다면 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풀어야 하겠는가? 여기에서 먼저 1장 7절을 한번 살펴보자.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 1장에서부터 3장까지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전체적인 대상이 누구이냐를 보여주는 것인데, 즉 천사의 소리가(?) 누구에게만 들리느냐는 말인데, 물론 사도요한 본인은 듣고 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천사가 이렇게 전달해주는 것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 사람에게 이해가 될 수 있느냐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이야기해준다는 것이다. 바로 그 대상이 누구인고 하니, 십자가에서 메시야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마태, 마가, 누가의 경우에, 물론 요한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의 기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의 일이지만, 그러나 이 요한계시록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7절에 나오듯이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라고 하는데, 바로 거기에서부터 역사적 사실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에서부터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야말로 복수이고 보복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 인데, 그렇게 전쟁을 하는데, 그 전쟁에 2층과 1층이 있다면, 2층에서 1층을 향하여 복수를 감행하고, 1층에서는 2층에 속한 자기 백성을 인질로 잡아서 복수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로 !!

여러분이 오해를 할까 싶어서 다시 말씀을 드리는데, 방금 제가 십자가로부터 시작을 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바깥에서 문을 연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십자가 이후라는 말이 성립이 되지 않는데, 그러니 사실은 처음부터 십자가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내다보고 일을 하셨고, 그래서 이 세상은 처음부터 십자가에 반발을 하도록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1장부터 3장까지는 실제로 역사적으로 있었던 7교회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을 지도로 보면 쉬운데, 아무튼 사도요한이 이렇게 밧모섬에 있으면서 7교회를 모두 다 본다는 것이다. 이 7교회를 이렇게 외우면 쉬운데, "애써서 벌어서 사두었다 빌라를" 라고 말이다. -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사대, 두아디라,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아, ㅋㅋ

아무튼 이러한 7교회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 십자가에 대해서 역사적인 사실로서, 1장부터 3장까지가 그러한데, 그 십자가에 대해서 누가 자기편이고, 또 누가 십자가의 적이 되는지를, 그것을 바로 이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준다는 말이다.

◈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었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포장해서, 그야말로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자기 자신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는데, 물론 요한계시록에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좀 이상하지요? 여기서 성경을 보면서 설명을 해야만 이단 소리를 안 듣지 싶은데, 물론 이단 소리를 항상 듣고 있지만 말이다. 예수님의 그런 과대망상적인 예를 많이 들 수 있는데, 일단은 요한계시록 2장 7절을 한번 살펴보자.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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