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3월 13일 강의 고후 11장 22절
안산 3월 13일 강의 고후 11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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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13 눈에 보이는 비성도 VS 성도와의 차이
우리교회(IP:220.♡.176.150)
09-03-1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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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24 10:17
안산090313고후11장22절
2010-10-21 10:55:05 녹취 : 박온정
안산090313고후11장22절, 눈에 보이는 비성도 VS 성도의 차이 / 이근호 목사
고린도후서11장22절,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22: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23: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라고 되어 있죠?
성도하고요, 성도 아닌 사람하고 차이점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하고 악마하고 딱 알지요?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악마는 나쁜, 이니까. 하나님과 악마가 차이나는 건 이해되는데, 그런데 하나님과 악마와 차이나고 하나님과 귀신하고 차이난다, 틀리다 하는 건 알지만 다 눈에 안 보이잖아요. 우리는 눈에 안 보이면 있으나마나 하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문제는 성도하고 성도 아닌 사람, 비성도 하고는 둘 다 눈에 보이잖아요. 눈에 보이는 게 차이가 나느냐, 이 말입니다. 오늘 제가 읽었던 대목에 보면 차이가 난 걸로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도인 사람과 성도 아닌 사람의 차이로 인하여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냐 마귀에 속하냐,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사람이 성도하고 성도 아닌 사람하고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과연 성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성도가 있습니까? 성도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나는 성도 될래, 믿을래, 이런 사람 많은데 진짜 하나님께서 ‘너는 성도야, 너는 하나님 백성이야,’ 라고 딱 찍어준 사람이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요?
보통 인간들은 자기 인생을 누가 사냐면 자기가 살잖아요. ‘나 천국갈래,’ 자기가 외치는 거죠? ‘나 구원받을래,’ 자기가 외친다고. 그런데 ‘나는 어느 날 성도가 되어버렸어,’ ‘어느 날 성도가 되었어.’ 그건 본인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배후에 누가 계시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 말이지요. 이거 엄청난 혜택 아닙니까?
다시 이야기 할게요. 모든 사람은 자기가 자기한테 결심을 해요. ‘나 이제부터 교회 갈래, 나 이제부터 하나님 믿을래,’ 자기가 한 결심은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나 두 달 뒤에 갈게, 나 십년 뒤에 교회 나갈 줄게,’ 이렇게 결심할 수 있거든요. 그런 것은 인간은 다 돼요.
그런데 그렇게 결심하겠다는 거 말고, 그런 거 관계없이, ‘하나님이 날 성도 만들었다,’라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역사도신경 이야기를 했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안 믿으며 나는 하나님 아들 있다는 것도 절대로 안 믿으며, 그분이 매 맞아 죽은 것은 인정하지만 그분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난 것도 나는 못 믿겠으며, 더구나 그분이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며 그분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는 것도 전혀 말이 안 되며, 그분이 죄를 사해준 것도 사기며,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도 사기며 영원한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 이건 도저히 못 믿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정상이에요.
여러분 교회 십년 다녔다고 이 마음이 없어지는 거 아니에요. 20년 다니고 목사 사모되고 집사 됐다 해서 없어지는 거 아닙니다. 이 마음 있어요. 있는데, 있어야 돼요. ‘나는 절대 죄 사함 같은 거 안 믿으며, 죽어서 다시 사는 것도 안 믿으며 영원히 사는 것도 안 믿으며, 주님께서 저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온다는 건 더더구나 그건 구라며, 공갈이며... 라는 마음이 우리 속에 있어야 돼요.
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아, 분명히 구라인데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죄 사함을 믿으며, 저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믿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성도며 신자며, 그것은 누가 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배후에 누가 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했잖아요. 아까 뭐가 정상이었습니까?
안 믿는 게 정상인데, 그게 믿어지는 것은, 왜냐면 믿는 게 정상 같으면요, 수업시간에 학생이 갈쳐주면 다 믿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사도신경을 이야기하고 성경을 이야기해도,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믿는 거 보니까 안 믿는 게 정상이에요. 안 믿는 게 정상인데, 그게 죄의 용서를 믿으며, 영원히 사는 걸 믿으며, 마지막 심판을 믿으며, 성령 안에서 아들을 믿게 된 것은 배후에 누가 계시다?
하나님이 계셔서 이런 기이한 현상을 우리에게 이렇게 변화를 시켜준 거예요. 그렇게 되면 무엇이 중요하냐면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1) 우리가 바친 것을 원한다. 2) 하나님의 변화된 걸 원하다.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바치는 걸 원합니까, 우리가 변화된 걸 원합니까.
쉽잖아요. 뭘 원해요? 예? 우리가 변화된 걸 원하죠. 그런데 그 변화는 우리 힘으로 된다 했어요? 안 된다 했어요? 어떤 점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느냐면, 사람이 자기가 돈을 번다고 해서 우리가 변화 됩니까? 안 되지요? 금식을 한 100일하면 우리가 변화 됩니까? 안되지요?
단군신화를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은 이유가 곰이 뭐를 먹어요?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 됐다고 했죠? 사람 됐다고 했잖아요. 이거 구라죠.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단군신화에 겁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느 날, 제가 죄 사함을 믿으며, 주께서 심판하시며,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으며, 우리를 기다리시며, 마지막 때에 우리를 데리러 오십니다.를 믿는 그 수준이라 하면, 곰이 마늘 먹고 파 먹고 사람 되는 수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잘남이나 우리의 똑똑함이 아니고 우리의 변화죠 변화. 우리가 변화 되었으면, 자, 그러면 우리 인생관 우리의 평소에 살아가는 인생관이 어때야 됩니까. 변화된 것을 감사하면 되지요. 돈 쟁여놓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 인생관 되면 안 되지요.
몸이 아프다가 건강 하는 걸 하나님이 원하십니까? 아니지요. 변화 아닙니까. 변화. 어느 정도의 변화. 보통 사람이 못하는 걸 달라지는 변화를 원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국회의원 나가서 당선되었다, 이건 자기하고 자기 집안 기쁘지요. 하나님은 기쁩니까 안 기쁩니까. 전혀 안 기뻐요.
하나님 기뻐하는 것은, 방금 읽었던 고린도후서 그 본문처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뭐냐면, 우리가 변화되는 거예요. 새사람 되는 거, 새사람. 새사람답게 살아라, 는 거 아닙니다. 새사람 되는 거예요. 새사람 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다? 없다? 우리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에 의해서 새사람 된 그 변화를 우리가 감사하고 그걸 고맙게 여기는 상태. 그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겁니다.
왜냐면 경제가 어려울 때 사람들은 돈 있는 걸 원하잖아요. 제가 묻고 싶은 것이, 하나님 원하시는 바가 그겁니까? 물으면, 대번에 우리가, 그래도 신자가 잘 먹고 잘 살아야 기뻐하시지, 이렇게 얘기한다 말이죠. 그것 같으면 방금 읽었던 본문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맨 끝부분에 『고린도후서11장23절: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에게 이것이 ‘난 손해 봤다, 하나님 때문에 낭패 봤다,’ 는 생각이 사도 바울에게 안 들지요.
왜냐면,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 원하시는 게 뭔가 알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매 안 맞는 사람, 내가 매 들 맞는 사람, 이걸 원하는 것이 아니고 고생을 하고 수고를 해도 주께서 변화시킨 그 변화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감사히 여기는 그거요.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라고 고맙게 여기는 그것, 그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를 생각해보는 사람도 없어진 거예요. 지금은, 내가 얼마나 잘났느냐, 그것이 중요하지 하나님이 나에게 뭘 원하실까 그런 걸 묻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근데 우리는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았는가, 보고 있다 이 말이지요.
강의를 조금 빨리 해봅시다. 제가 조금 어렵게 해볼게요. 하나님 계시고 또 악마가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걸 뭐로 알 수 있느냐, 뭐로 알 수 있느냐 하며는,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걸 봐서 하나님 살아계시죠? 그 사람을 뭐라 합니까. 성도.
근데 그 맞은편에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을 뭐라 하냐면 비 성도라 하더라 말이죠. 여기에 관계될 것 같으면 고린도후서 11장23절 들이대 보자 말이죠, 고린도후서11장23절 딱 들이대 보니까, 매를 맞고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며, 약한대서 내가 더욱 더 강함이라, 고 영광을 누구한테 돌립니까?
하나님께 돌렸지요. 그걸 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맞잖아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사람들은 이런 고린도후서11장23절은 모르고 뭐라고 하냐 하며는, 하나님 계시고 나 있으니까, ‘하나님이여, 기도할 테니까 돈 주세요.’ 기도할 테니까 건강주시고, 기도할 테니까 우리 사업 잘 되게 해주시고, 기도할 테니까 부흥되게 해 달라, 고
자꾸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원하는 돈과 건강과 사업과 교회부흥과 이런 게 있어야 그때서야 내가 하나님 있는 줄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라 말이지요. 그럼 그런 사람에게 약올려요, ‘그렇다면 사도신경을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새로 쓰면 돼요,’
전능하사 돈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사오니...그렇게 쓰라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이 저한테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왜?’ 우리 손자가 행정고시 시험 보는데 기도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사한테, ‘집사님은 사도신경은 뭡니까?’ 묻고 싶어요. 나는 손자가 행정고시에 합격될 것을 믿사오며, 그리 된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11장에서 사도 바울이 믿는 게 뭡니까? 매를 맞고 수고를 많이 해도 이미 달라진 나의 변화는 변함이 없어요. 내가 아무리 고생해도 주께서 나를 구원받게 한 이 변화에 대해서는 전혀 달라진 게 없으며, 그 뒤에는 세 번 태장 맞고 다섯 번 맞았으며... 그런 거 하더라도 주께서 주신 이 변화는, 나의 신분은 전혀 달라지지 아니하며, 여전히 하나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으며, 그걸 믿사오며. 이게 사도신경 아닙니까.
그게 사도신경 아닙니까. 여러분이 어느 교회 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 올 때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도신경을 한번 써보세요. 교인들마다 각자의 사도신경을 만들어서 교회 올 때 해보라는 거죠. 돈을 버는 것은 비성도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건강한 것도 비 성도도 할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에 나오지요? 『시73:2~4: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보세요! 딱 나오잖아요! 자기가 미끄러질 뻔했어요. 미끄러질 뻔 했는데,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약이 오른 거예요.
그런데, 악인은 분명히 하나님 벌 받아서 고통 속에 죽는다, 라는 것이라고 자기는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그 사람이 죽을 때도 뭐가 없고? 고통이 없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죽을 때도 편안하게 마지막 가는 그걸 선종이라 하죠. 선종. 잘 지내다 가는 걸 선종이라 합니다.
‘선종을 하고 향을 뿌리니…’ 꼭 이단 아닌 것 같지요? 그런데 그거 읽다가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1장23절에 보세요. 사도 바울은 뭡니까, 매를 맞고 수고하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열 번 죽을 뻔하고, 태장으로 세 번 맞고, 돌로 맞고 파선하는데서 일주일을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곳곳에…돈 떼이고 지갑 뺏기고 심지어 굶기도 하고, 헐벗기도 했다 이 말이죠.
그래도 사도 바울은 뭐랍니까. 아무리 그래봤자, 하나님이 변화시킨 이 변화, 성도라는 자격 이 신분 달라집니까? 안 달라집니까? 안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겁니다. 살아계심을. 참 우리가 그동안 성경을 건성으로 읽으면 안 보여요. 건성으로 읽으면.
어디 오늘 은혜 받아 볼까? 복 받아 볼까? 이래가지고 안 보입니다. 우리는 뭐가 복이냐 하면, 사람이 못하는 걸해야 복입니다. 사람이 못 하는 걸. 세상에 개나 소나 다 하는 그게 축복이고 변화입니까.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거!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데 하나님이 해주니까 되는 거!
만약에 우리가 그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면 사도 바울보다 더 어려운 환경이 우리에게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정목사님 같은 경우 사도 바울 못지않죠. 힘들고 힘들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돼야 되요 하나님께 영광이.
자, 그러면 여기서 더 나아가봅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매를 맞고 매를 맞는 거 이거 변화잖아요. 변화라 하는 것은, 옛날에 내가 정상적인 사람인데 비정상적인 사람. 비정상적인 사람을 두 자로 뭐라 합니까. 성도죠? 비정상적인 사람에게 정상적인 사람 되는 이걸 변화라 한다면, 그 다음에 두 번째 뭐냐 하면, 이 성도 된 사람의 무수한 고생, 시련, 역경, 어려움 이런 걸 겪지요.
이런 변화, 이런 변화 가운데서 어떻게 해서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느냐, 그게 무엇이 주어졌느냐, 그럼 문제 하나 물어봅시다. 성도가 결핍된 자입니까. 아니면 추가된 자입니까.
성도란 그 속성이 뭔가 빠져있는 겁니까? 있는데다 더 보탠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추가된 거예요? 결핍된 모자란 거예요? 결핍된 건 아니죠? 뭡니까, 추가된 게 맞아요. 자, 뭘 추가했을까요? 고린도후서11장에 보면 복음이 추가된다는 겁니다.(이런 말씀 첨들어요-녹취자)
복음이 추가된 거예요. 자 그러면 오늘 강의 어려운 대목 나옵니다. 정신 차리고 들으세요. 이거 어렵기 때문에 빨간 매직으로 표시 하겠습니다. 복음은 구조로 되어 있어요. 여러분 첨 들었을 거예요. 복음은 이렇게 얼길설기 구조로 돼있어요. 구조.
복음은 지갑이라든지 음료수 병처럼, ‘이거 복음이다 가지고 가~’ 이런 게 아니에요. 복음이라는 것은, -예를 들겠어요 쉽게 하기 위해서- 조직폭력배가 물건입니까, 조직입니까? 조직이죠? 조직폭력배에 가담하면 조직폭력배라는 걸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지 못하지요? 어떻게 됩니까.
거기 가입하면, 조직폭력배가 조직적이니까 조직폭력배 밑에 똘마니로 있든지 아니며 고참으로 있든지 조직 내에 들어가지요? ‘복음’은 ‘조직’입니다!! 그 소리예요. 복음을 어떤 말썽꾸러기 고등학교 졸업하고 조직폭력배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조직을 몽땅 자기가 인수합니까? 아니지요. 그거 똘마니 중에 똘마니로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딱 들어가 보면 뭡니까, 위의 고참들 선배들 무서운 놈들 있지요? 총 두목 있고.
마약조직 고수들 있잖아요. 그러니까 조직폭력배 됐다 이 말은 조직을 내가 인수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그 조직에 가담하게 되지요. 복음이 뭐냐 할 때 사람들이 전부 다 복음을 어떤 물건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복음을.
‘나 복음 가졌다’ 갖고 있는 지식인 줄 아나본데, 그게 아닙니다. 복음의 세계는 -참 이야기하기 좀… 뭐하지만 ㅋ ㅋ - 조직폭력배. 조폭입니다.(와~ 조폭=복음이라니요, 놀라는 녹취자.) 최고 고수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예? 넘버2가 누구예요? 예수님이죠! 사실 서열 매기지 못하지만, 여기 성령님도 계시지요, 여기 천사도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갖는 게 아니고, -이게 구조니까- 복음 속에 들어가 버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이 복음의 뭐가 되요? '똘마니‘가 되는 겁니다. ’복음세계의 똘마니‘ 조직폭력배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학교도 안 다니고 나쁜 짓만 골라 해야겠지요. 참 이거 복음의 세계 천국의 세계를 조직폭력배로 이렇게 나쁘게 비유해가지고 듣기는 좀 뭣하지만…
예수님도 이런 비유를 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뭐에 비유했냐면 도적놈으로 비유했어요. 도둑이 담 넘어 와가지고 집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가구를 가져갈 때, 그게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착한 집주인은 누가 돼요? 악마가 되고, 집주인의 가구를 훔친 도둑은 누가 됩니까?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우리 인식을 완전히 엎어버리는 거예요. 복음 속에 들어갔다 이 말은, 예를 들어서, 열아홉 살 먹은 애가 들어갔다, 그런데 걔가 남자다, 열여덟 살 먹은 애가 들어갔다, 그런데 걔는 여자다. 이건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조직폭력배 들어가 버리면 관계없이 똘마니, 만약에 A라는 자리가 똘마니 자리라면 똘마니1 똘마니2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결혼했습니까? 너 결혼하고 들어와라 이럽니까? 안 했죠? 그냥 결혼 안 해도 사도바울이 들어가 버리면 결혼 하나 않으나 그거 묻지도 않고, 그냥 천국의, 복음의 똘마니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복음 속에 들어간 사람은 뭐를 생각 못한다? 자기 입장을 생각 못 하는 거예요.
제가 똘마니 똘마니 하니까 기분 나쁘다할 수 있겠는데, 성경 한번 봅시다. 디모데후서 4장2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디모데후서 4장3절4절: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
고등학교 때 공부 대게 않다가 형 잘 만나서 조폭에 가담한 걔는 그때부터 집에 안 들어오고 똘마니하고 조폭하고 나쁜 짓 하고 돌아 댕겼지요. 그걸 고상하게 말하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은 거 아닙니까. 이걸 잘못 해석하면 성도들 자기 직업도 버리고 목사 되라 그런 뜻의 그게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떤 직업에 있든지 간에 그 사람의 사는 이유 사는 목적 사는 보람 사는 기쁨은 달라질 수 없는 자기 직업이 아니라, 이미 달라져버린 자기 신분과 관련돼 있다 이 말입니다.
성도라는 신분! 성도라는 신분. -군인들은 원래 왔다 갔다 하면 힘들어요.-군인으로서 어떠한 고난도 다 감수해야 된다. 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이런 말입니다. 사람이 힘들다 힘들다 하는데, 제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1960년대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때 60년대에 보면 성인들이 하루에, 아주머니들은 그냥 집에서 놀았고요,
아저씨들도 댓 시간 하고 나머지는 놀았습니다. 그런데 2천 년대에 들어와서 보통 하루 다섯 시간 일하면 일한 거 아니에요. 열 시간 일 해줘야 ‘요새 일하러 댕기네요?’ 이렇게 얘기한다니까요. 사람이 힘들다 하는 기준이 뭐냐 하며는, 이미 자기가, ‘내가 이정도 돼야지’ 라는 게 있으면 뭐든지 힘들어요.
‘적어도 하루에 세 끼 먹어야지,’ 이러면 세 끼 먹어야 하는데 두 끼 먹으면, ‘요새 하는 거 어떻습니까?’ 하면 ‘힘듭니다.’ ‘왜?’ ‘요새 두 끼밖에 못 먹어요.’ 하루 한 끼 먹다가 두 끼 먹으면 ‘요즘 사는 게 어떻습니까?’ 하면 ‘요즘 많이 좋아졌습니다, 하루 두 끼 먹습니다. (ㅋㅋ)’
힘들다 하는 것이 정해진 게 없어요. 힘들다 는 게. 힘든 게 정해진 게 없어요. 왜 군인들, 군에 가면서 좋아서 가는 사람은 백 명 중에 한명 있을까 말까, 그눔 미친눔이었습니다.(ㅋㅋ) 미친눔이었고, 대번에 남자들은 군에 갈 때 엄마 울고 난리 납니다. 저 같은 경우에 아예, 포기 해뿌러서 울지도 않았습니다만…(ㅋㅋ) ‘버렸다, 인생 조졌다,’ 이런 생각하고 갔지만.
군에 간 게 힘들고 어려워요. 그런데 군에 가보니까, 제가 군에 가서 놀란 게 있어요, 뭐냐면, 촌에서 지질이 못사는 동네에서 군에 온 사람이 있었어요. 나보다 계급이 조금 높은 사람인데, 너무 순박하고 일하라하면 다른 도시에 대학 나온 뺀질이들은 다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그 촌의 출신 나보다 높은 상급자들은 군에서 홈파라하면요, 일거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일하는데 쫄병들이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는 거예요. 졸병들이. 왜! ‘이리 줘봐 내가 할 게’ 촌에서 밭일 하다보니까 군에는 일도 아니라는 거예요. 한양에서 공부만 하다가 군에 오니까 모든 게 힘든데, 세상에 군 생활이 ‘너는 말뚝 박아도 되겠다,’ 그런 사람이 많이 있었어요.
촌에서 온 사람들은 힘든 게 아니고 굉장히 즐거워요. 즐거워하는 사람들 밑에 있는 부하들은 굉장히 편합니다. 왜! 본인이 즐거우니까 해코지를 않는데 소위 서울에서 대학물 먹은 넘들은 지가 힘드니까 맨날 술 먹고 와가지고 밑에 사람 때리는 거예요.
힘들다는 것이 각자 자기의 욕심 마음 정도, 푹 낮춰보세요. 푹 낮추면 살아있다는 자체가 감사해요. (감동의 도가니 -녹취자) 아파도 좋아요. 아파도 힘 안 든 게 돼버려요. 살아있다는 자체가 감사해요. 제임스리라는 분이 죽기 직전에 글을 쓴 게 있는데 보셨죠? 제가 얼마나 가슴 아팠다고요.
또 하기 전에 정낙원 목사님이 장문의 소설은 아니지만 다큐멘타리 썼잖아요. 아, 그거 볼 때 제가 리필을 달았어요. 죽는다는 그 글 보고 ‘많이 수고 했습니다,’썼다가 그걸 집사람한테 얘기했다가 집사람에게 욕 대게 먹고 고쳤어요. 어디 죽는 사람한테 말을 그리 쓰냐고...그래서 고쳐가지고 ‘산 자가 죽은 자보다 더 나으니까 소망을 가지라’ 라고 썼어요. 그분이 지웠습니다만,
복음이라는 게, 복음이 뭐냐 하면 구조라 했지요? 구조. 이 복음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십자가가 들어있지요. 그러면 예수님 십자가는 어디서 이루어지냐 하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고통, 저주. 고통은 사람들이 미워해서 아픈 게 아니고, 누가 예수님을 버렸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주했기 때문에, 저주 그 자체의 자리가 ‘십자가 자리’입니다.
십자가 자리에서 볼 때 지금 교단의 성도들은 아무리 자기가 낮췄다, 낮췄다하지만 예수님 십자가 보다는 낫지요. 그러니까 십자가 안목에서 볼 때 ‘너희들은 나와 함께 있으면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왜! 아직 너희들은 십자가 근처에도 안 갔으니까.
아직까지 그럴만하게 살만하니까. 네가 이 복음의 일을 하는데 얼마나 힘들겠느냐, 하지만 주님께서는 십자가 속에서 뭐가 나오냐면, 십자가 가지고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만약에 자기가 힘들지 않고 편안해 버리면 뭘 잊어버리냐 하면, 주님이 주신 능력과 은혜를 망실. 잊어버리게 상실하게 되요. 잊혀지기도 하고.
그걸 고린도후서11장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고린도후서11장 아시겠지요? 뭐냐 하며는, 사도들이 그렇게 힘든 일이 있었던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의 은혜가 지금 내가 힘든 것보다 월등하게 십자가 은혜가 낫다. 다시 쉽게 말해서, 나는 지금 괜찮은 동네에 와 있다. 이 구조, 복음이란 구조는 조폭입니다. 그야말로 구조입니다. 조직입니다.
복음 안에 우리가 똘마니로 들어간 이것은 내가 고생한 것보다 훨씬 나은 형편이다, 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알려주기 위해서 차마 견디기 힘든 꼴을 봤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은 ‘힘들다’ -저기 욱이에게 물어보세요,- ‘너 힘들제? 안 힘드나?’ 애들도 지 나름대로 힘들다고요,
힘들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이거 힘든 것도 아니고 이보다 더 어려워도 감사할 것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28절 봅시다.『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자지 못하는 거, 잠이 오지 않는다면 야, 이거 미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하는데 그런 잠마저 사도 바울에겐 허용이 안돼요.
여러분 밤새도록 잠 못 잔 적 있습니까? 밤새도록...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 다 세도 잠 안 올 때가 있어요. 이게 왜 그러냐, 왜 잠을 못자냐 하면 28절에 보면 ‘모든 교회를 염려한다고,’ (고후11:28) 모든 교회를 염려한다고 잠을 못 잤어요. 그러니까 성도가 돼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냥 나 하나 천당 가면 그만이지, 가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서 염려한다고 잠을 자지 못하고, 그것이 29절에 보면,『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30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상당히 민감해요.
누가 교회 나오라는데 교회 안 나온다 하면 상당히 민감해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고생하고 또 찾아가고 ‘왜 안 나오십니까, 하나님 살아계시는데 왜 안 나오십니까 주님을 믿어야 할 건데.’ 자꾸 이렇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애가 타서, 애가 타가지고 ‘내가 애가 타지 않느냐,’ 내가 애 탄다.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 내가 약하다.
하지만 하나님께 영원히 찬송할 것은,『32: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때 33: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여러분 실제로 이 일 당하면 이게 재밌는 일입니까? 아니면 속탈 일입니까. 예, 속탈 일이죠.
지금 강의하는데 누가 잡으러 와서 창문에 내려 보세요, 이게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참 팔자 더러운 팔자 아닙니까. 이 더러운 팔자라도 뭐랍니까, 그래도 하나님께 찬송할 수밖에 없다. 왜! 내가 이보다 더 추접하고 더럽고 험악한 꼴을 보더라도 성도 되었다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복음을 줘가지고 나로 하여금 복음의 똘마니 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똘마니가 되게 했다는 이 고귀한 신분에 대해서는 너무 너무 감사한 일이죠.
여기서 한번 복음이 뭔가를 배운 것을 통해서 정리해봅시다. 여러분도 이렇게 정리해 주셨으면 싶어서 정리하는 겁니다. 복음이란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뭐냐,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자기 죽음으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예수님만 죽은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라 하는 것. 상당히 깊이 있는 내용이 되겠어요. 십자가가 뭐냐, ‘아이고 십자가는 나무 두 개 크로스 된 거잖아’ 그게 아니고, 십자가란 것은 모든 인간은, - 안산에 사는 모든 사람-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모든 자가 죽었느니라.(고린도후서5장14절)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도 죽고 다 죽은 자예요. 예수님이 죽으면 다 죽은 자예요. 산 자는 없습니다. 일단 그만한 권한이 예수님한테 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다 죽었지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가 튀어나온 것은 누구의 권세냐 하면 누구의 권한이냐 하면, 예수님의 자기 권한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 자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끄집어내는데, 그런 자격을 부여받은 이유가 뭐냐,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했지요? 부활이 뭔뜻이냐 하면, 부활이라 하는 것은 죽었다가 산 자를 부활이라 하는데 그게 아니고, 부활이라 하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만들 수 있는 권한 가진 자가 된 것. 그게 부활입니다.
부활이란 말은, ‘나 죽었다가 살았다,’ 이게 아니라 남이 죽은 것을 내가 맘만 먹으면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그만한 파워! 그만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하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부활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 오빠 나사로는 부활입니까 소생입니까. 소생했지요. 사실은 다 부활의 그림자이지만,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남을 살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지요. 사람들이 그걸 몰라! 그걸 몰라! 그러니까 나사로와 예수님과 부활의 관점의 차이, 부활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본인만 죽었다가 살아난 게 아니고, 남을 살릴 수 있는 능력까지 갖고서 부활된 거고, 나사로는 그 혜택을 입어가지고 ‘헤헤~’ 하고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나사로가 주가 아닙니다. 누가 주가 됩니까. 예수님이 주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살아나신 ‘부활하신 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부활의 능력이 예수님 자신이 영이 되셔서, 성령이죠? 성령이 임한 자는 비록 그 사람은 죽으나 그 사람의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몸도 다시 살리시리라.(롬8:10)
너희 안에 성령이 임하면 비록 너희 몸은 죽게 되나, 죽은 너희 몸도 너희 안에 성령 때문에 네가 다시 살리라.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알고 있던 [복음]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변화예요. 변화. 돈? 돈을 쟁여도 이건 모르는 거예요. 사람이 아무리 건강해도 이건 모르는 겁니다. 이건 성령을 받아야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아멘.)
평생 동안 다 같이 이거 잊지 맙시다. ‘하나님 살아계십니까, 저에게 돈을 주옵소서,’ 이러지 마시고. 이미 주었다. 뭐? 똘마니로! ‘너 복음의 똘마니야!’ (나는 복음의 똘마니) 이제부터 복음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남한테 증거 하는 그런 똘마니라 말이죠.
힘든 것만 생각하지 마라! 왜! 주님은 이보다 더 힘들었으니까! 힘들다 생각하는 것은 평소에 네가 ‘나는 이정도 돼야 된다,’ 생각했기 때문에 힘든 것이지 뭐가 힘들어 모든 게 감사하지. 사도바울 봐라! 자지도 못하고, 맨날 애타고 근심하고, 교회 때문에 걱정하고. 밥도 굶고. 그 앞에서 힘들다 어쩐다 하지 마라 말이죠. 너는 돈 없다고 네 새끼나 끼운다고 힘들지. 사도 바울은 지새끼 어딨습니까. 교회 키운다고 힘들었는데.
복음이라 하는 것은, 기억 하는가 다시 해봅시당. 1) 예수님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은 다 죽은 것이다. 2) 죽은 자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누구의 권한이라?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 권한이 아니고 예수님의 권한으로 산다. 3) 왜 살리는가? 모든 사람이 죽었으면 죽음으로 끝나야 되는데 왜 살리는가? 왜 살립니까. 다 죽었으면, ‘나 죽었다 지옥데려 가거라,’ 이러면 될 텐데 왜 천국가게 살리는가?
타작마당이란 얘기 들어봤죠? 마태복음3장에 나오죠. 타작마당. 하나님께서 세상을 거룩 되게 하기 위해서 타작마당을 만들어서 심판하시는데 여기에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불에, 영원한 불에 태우시지요. 농사꾼이 마지막 타작할 때 그러잖아요. 쭉정이는 불에 태우잖아요. 하나님도 농사지을 때 그렇게 하시는데 이 거룩이라는 것 가지고 하늘의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정하게 하시는데,
세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 택한 백성을 죽음 가운데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택한 백성 안에는 뭐가 있습니까. 사랑이 있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있지요. 이걸 타일처럼 깔아가지고 하나님의 마당을 사랑과 거룩과 감사와 찬양으로 쫙~ 깔려있는 것, 타일 깔리듯이 깔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아~ 이렇게 된 것도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이런 식으로 영광 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 가운데서 성령 주셔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까만 머리 가운데 흰 털 하나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용납을 안 해요. 그래서 마지막 심판 때에는 용납을 않습니다. 기어이 찾아내서 흰 털 다 뽑아버리고 까만머리만 통일시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 빼놓고는 나머지는 다 지옥불로 보냅니다.
‘거룩한 자’를 두 자로 줄이면 뭐가 되죠? ‘성도’다 말입니다. 성도. 이게 바로 성도다 말입니다.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도 되었으니까 어떠한 고생도 힘들다 하지 말고 찬양하고 감사해라. 고린도후서11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뭐가 있느냐 하며는, 그 맞은편에 성도 아닌 사람 비성도. 성도는 그렇다하고 그럼 비성도는 뭡니까. 비성도는 누구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이거는 악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 비성도가 있어야 됩니까. 성도를 제가 뭐라 했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 했지요? 아까 강의한 거 다 잊어버렸지요?
정상적인 사람은 어떤 사도신경? 역사도신경. 나는 죄 사함을 절대 믿지 않으며, 나는 죽었다 살아남을 절대 믿지 못하며,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걸 믿지 못하겠으며, 하나님께서 한 아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분께 아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절대 안 믿으며, 이거예요. 이게 바로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면 절에 가는 사람, 절에 안 다니는 사람이 이런 역사도신경을 갖고 있네요. 라고하면 안 되죠. 목사가 되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도 마음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역사도신경이 항상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누구냐, 고린도후서11장에 보면 마귀에요. 삯꾼들, 실제로 안 믿으면서.
실제로 돈만 믿고 실제로 돈 많은 사람만 믿으면서 예수이야기하고 복음 이야기해서 그들로 자기 사업을 만들어서 자기 세력화시키는 이게 바로 그 배우에 뭐가 있다? 성경에 이 사람들을 악마의 종이라 했으니깐 이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악마는 분명히 있다, 라고 믿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항상 양의 탈을 쓴다했어요. 양의 탈. 아주 순수하시고 훌륭하시고 양의 탈을 쓴. 그래서 시편73편 봤지요. 예? 내가 미끄러질 뻔할 때 봤지요? 악인이 죽을 때 많은 사람이 형통하고 죽을 때 건강하게 죽고 고통도 없이 죽고! 세상에~ 땡잡았네. 하지만 속지 마라! 그게 바로 악마의 종들이 그렇게 된다.
진짜 주의 사도는 뭐냐, 힘들더라도 주님 고생하는 것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으로 복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아멘) 내가 하나님 때문에 인간 달라졌습니다, 라는 걸 감사하는 사람. 개뿔, 아무것도 없으면서 감사하다는 사람.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성도’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성도에게, 사도 바울에게 힘든 일만 나타났을까요? 아닙니다! 12장 봅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후12:1)』 주의 환상과 계시를 누가 받았습니까? 누가 자랑해요 지금? 사도 바울이 부득불 자랑하지요? 주의 환상과 계시 받은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본인이지요?
내가 셋째하늘에 올라갔는데 그게 몸 안에 있는지 몸밖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그곳에 가니까, 4절에 보니까,『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4절 보니까 그가 어디로 갔죠? 낙원으로 갔지요. 자, 제가 문제 던집니다.
이 사도바울이 본 낙원, 이 계시가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됩니까 아니면 사도와 같은 성도 전체에게 해당됩니까. 성도 전체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그가 대신 본 거예요. 우리 다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이 봤으면 우리도 같이 본 게 되는 겁니다. 낙원에 끌려 올라가서 그 다음에 뭐냐,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우리가 더욱더 궁금해지네요?
왜 말할 수 없을까요?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이르지 못할 말이니깐 제가 이렇게 재현해 봐도 되겠지요? ‘어, 어, 어..’ 말은 해야 되겠고, ‘허걱, 어, 어’ 이렇지요.ㅋ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걸 보고난 뒤에 세상걱정 경제걱정 애너지 걱정, 북한 미사일발사 이런 거 고민하겠습니까? 않겠습니까?
않죠. 고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같은 성도들아! 내가 본 게 너희들이 본거다. 내가 본 것은 우리가 가야될 고향인데 내가 먼저 봤다, 너희를 대신해서. 대표라 하는 것은 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봤으면 더 이상 세상염려 걱정 이런 걸 봤기 때문에 자기는 굶기도 하고 자지도 못하고, 매도 맞고 이런 게 있더라도 추호도 그런 것 때문에 ‘주여, 왜 이러십니까,’ 이럴 필요가 없었다 말이지요.
물론, 자기가 7절에 보면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자기가 가시가 있어요. 가시가. 가시가 있어가지고 8절에 보니까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 기도했지요?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능력이 있다 했는데 과연 사도의 기도는 응답 받았지요? ‘응? 빼지마라!’ 그게 응답이에요. ‘너 가기 있는 거 그냥 둬라!’ 이게 응답이었습니다.
하고난 뒤에 뭐냐, ‘아하, 내가 쓸데없는 기도 했구나,’ 그래서 네 번 다섯 번 기도 않은 거예요. 내가 약한 것이 하나님께 능력되는구나, 일부러 했구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일하지 내가 일 않는다는 것. 내가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내가 일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입니다.
계시준 것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보여주었고, 내가 매맞는 것도 하나님 뜻이었고, 내가 옥에 갇힌 것도 뜻이었고. 내가 굶는 것도 뜻이었고, 잠자지 못하는 것도 뜻이었다. 하지만 나를 낮추고 약하게 만든 것은 여기 9절에 보니까 『9: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
내가 온전하여진다는 것은 내가 누구며, 내가 군사며 내가 누구의 종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기뻐하노니! -햐,~참 끝내준다!- 이걸 기뻐한대 기뻐한대요. 왜? 돈과 재정과 이런 게 있었으면, 자기는 뭡니까, 사람들이 무언가를 많이 가지게 되면 ‘하나님 왜 나를 힘들게 합니까,’가 더 많이 나오죠. 수입이 이백만 원 나오다가 백만 원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주여, 왜 이렇게 저는 힘들어야 합니까,’ 오히려 자기가 궁핍과 어려움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힘든 게 아니라 뭐가 나와요? 감사가 나오죠.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사도 바울의 눈에는 뭐만 보인다? 예수만 보인다. 다~ 간 곳없고! 변화산처럼 사람도 안 보이고 나라도 안 보이고 가정도 안 보이고 교회도 안 보이고 오직 주님만 보입니다. 주님만 보여서 그 앞에 작아지는 나! 주님은 온전하고, 주님은 능력 있으시고 능력 없어도 되는 나!
그럴 때 우리는 ‘그 십자가 지신 주님! 모든 자를 죽게 만들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킬 사람을 따로 뽑아내는 것을 행사하신 이것만 증거 하겠습니다.’ 이게 성령 받은 성도가 되는 거지요? 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돈으로, 값으로 칠 수도 없는 하염없이 좋은 것이고 귀한 것이고 한 돈 이십만 원 하는 금보다도 더 고귀한 것인데 우리가 너무 시시하게 봤고 우리가 너무 천대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주신 성령인 줄 알아서 이 성령 받은 것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하나님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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