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13-(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9강
20090213-(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9강
이름 : 오용익(IP:211.194.56.85)
에베소서 제 29강 (이 근호목사, 2009년 2월 13일-(1),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5장 8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 다음에 14절을 다시 보면,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방금 제가 읽었던 두 문장가운데 중요한 단어를 써보겠습니다. 빛이라는 단어, 어두움, 이것은 죽은자와 같은 것이고 그 다음 깨어나라, 이 세 가지가 상당히 중요한데 이 세가지 용어가 신약성경에 나와 있지요. 이런 용어가 신약성경에 나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사람,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이삭 야곱 이런 사람들이 활동을 하지요.
신약성경에는 8절과 14절에 보면 중요한 단어가 빛, 어두움 이렇게 나오는데 구약성경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오고 또 바벨탑 지은 사람들이 나오지요. 이 사람들이 활동을 하는 거예요. 활동한다. 자, 그렇게 될 때 신약이 이해하기 쉽습니까, 구약의 이 사람들의 활동이 이해하기 훨씬 쉬운 겁니까? 어느 쪽이 이해하기 쉽지요?
여기는 사람이 등장해서 사람이 활동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사람이 활동의 주체가 되고 하나님께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 도와주는 후원자가 되십니다. 구약성경의 이러한 이야기가 굉장히 가슴에 와 닿고 이해하기가 쉽지요.
‘모세가 앞에 바다가 있을 때 어쩔 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바다가 갈라졌다 … 여리고성이 있었는데 이길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매일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돌때는 일곱 바퀴를 돌아서 총 열세바퀴를 도니까 여리고성이 무너졌다 … 열왕기하 5장에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이 걸렸는데 요단강에 일곱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담그니까 낳았더라 … 히스기야가 기도하니까 해가 뒤로 물러가면서 히스기야의 병이 나으면서 생명이 15년간 연장 되었더라 … 다니엘의 세친구가 불속에 들어갔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니까 불속에서도 살아났다.’
어쨌든 놀랍고 기이하지만 먼저 사람이 먼저 활동하고, 사람을 먼저 앞장세워놓고 그 다음에 사람한테 난처한 입장, ‘아, 하나님 이것은 안 됩니다’ 라는 난처한 입장에 있을 때 ‘봐라, 하나님의 솜씨를 보여주마’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더니만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나더더라. 그래서 그 기적을 사람이 가져가더라.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엘리야, 엘리사 등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사람이 없어요. 한 번 적어 볼게요. 구약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전도하는 사람이 있고 뭔가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고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지시 따라 움직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등의 사람이 있는데 신약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없거든요. 신약에는 종말이기 때문에 먼저 일하고 하나님이 도와줄만한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누가 신약성경을 쉽다고 이야기 하나요? 누가? 신약성경을 보고 쉽다는 사람은 분명히 신약성경을 구약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활동하는데 좀 도와주셔야죠. 고맙습니다. 헌금하겠습니다.’
이러한 공식, 틀 속에서 내가 일하면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원래 제자리로 가야돼요. 그 사람은 처음부터 새로 출발해야 됩니다. 신약성경에 와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빌딩을 짓는데 거기에 일군이 필요하지요. 그 다음에 식당에서 밥하는 아줌마 필요하지요. 자재공급자 필요하고 설계하는 설계사, 건축사 필요하지요.
돈 대주는 주주, 자금줄 필요하지요. 허가하는 공무원 필요하지요. 그러면 건물이 하나 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맨드라미, 개미, 코스모스, 바퀴벌레 이런 것이 도움이 됩니까? 안되지요. 집짓는데 코스모스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우리 유치부 학생, 빌딩 100층 짓는데 코스모스가 도움이 돼요?
니 한테 한번 물어볼까? 니, 운다고 빌딩 올라가나, 안 올라가나? 도움 안 되지요. 신약에서 하나님나라는 종말이기 때문에 일절 사람이 도움이 안됩니다. 도움이 안되면 빌딩 짓는데 있어서 개미나 맨드라미의 역할, 코스모스, 해바리기는 있느나 마나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도움이 안 되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집짓는 대지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으면 불도우저가 어떻게 해요?
다 밀어버려야죠. 다 밀어서 그 자리에 지하주차장을 만든다는 말이죠. 그러면 코스모스가 ‘저는 여린 코스모스입니다. 아이 엠 어 코스모스. 아파요. 저를 뭉개지 마세요.’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붕, 하고 다 밀어버리면 옛날에 코스모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런 것은 소용도 없어요. 그런 식으로 코스모스를 뭉개듯이 사람들을 뭉개버린 그 터전위에 오직 하나님나라를 세울 분에 의해서만 천국은 세워집니다. 그것이 신약성경입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강의합니다. 우리 강의가 좋은 점이 그거예요. 늦게 와도 괜찮다는 것, 일찍 오신 분들은 한 번 더 들으면 되니까. 구약사람들은 먼저 사람을 보내놓고 ‘해 봐라.’ ‘안되던데요.’ ‘앞에 홍해 건너봐라.’ ‘안되는데요.’ ‘그럼 내가 도와줄게.’ ‘어, 되네요.’ ‘거 봐라. 하나님의 은혜 아닌가!’ 이런 공식이에요.
‘먼저 사람 보내놓고 그게 안 되는 일만 만나게 해놓고 기도 열심히 댕기니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도와주셔서 일 되더라’ 라는 것이 구약, 아직까지 종말이 되기 이전에 천국이 이르기 전에는 그랬었어요. 그랬다고요. ‘종아, 내가 도와줄게.’ 이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시편에 나오는 그 모든 말씀, ‘내가 기도하면 응답해 줄게’ 시편에 나오는 그 사람, 그 인물, '내가 의인을 도와준다.'
그 분은 누구냐 하면 그분은 사람이 아니에요. 시편에 나오는 등장인물, 미지의 인물은 오늘날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5장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빛이라는 분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시편에 나오는 그 하나님이라면,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보고 이야기했습니까? 딩동댕!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보고 이야기 했어요.
종말이라는 의미는 인간들이 할 도리 다 해봤고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다 따라봤지만 남는 것은, 그들은 쓰레기였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시편 39편 5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흔히들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듣게 되는 목사님들 하는 소리가 뭐냐 하면 ‘신앙생활 좀 조심스럽게 하라’고 하지요. 정신 차리고 조심스럽게 말씀에 따라서 ‘이게 죄냐 의냐,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가려서 항상 긴장 가운데 조심스럽게 하라’고 하잖아요. 조심스럽게 긴장가운데 착실하게 해도 소용없습니다. 허사이고 헛것입니다.
내가 든든하게 ‘야, 오늘 새벽에 은혜 받았는데 내가 든든하다.’ 할 때 그 든든한 그것도 헛것입니다. 쓸데없어요. 괜히 자기 착각에 빠진 거예요. 그러면 신약성경의 신앙의 주체는 뭐냐 하면 오직 한분 밖에 없어요. 마태, 마가 말고, 거기는 예수님이고 사도바울서신에서는 그분을 빛이라고 얘기해버리고 성도를 빛의 자녀라고 이야기해버리는 겁니다.
여기서는 인간은 빠져버립니다.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어떻게 일이 되어가지고 천국이 이루어지고 자기백성이 구원받더라.’ 이게 신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빠지는데 구원받을 사람이 자기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고 한 것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사람 말고, 구원받을 사람 말고 제 삼자가 등장해서 어찌어찌 해서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빛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확확 빼야 돼요. 쫙쫙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빼는 그 재미, 요 재미없으면 신앙생활 못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빼는 재미, 그야말로 시편 39편 5절의 말씀처럼 날마다 느껴지는 뭐냐 하면 ‘내가 든든하다고 여겨지는 그때에도 나는 하나의 허구였고 허사였고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그 재미, 그 재미가 있지요.
제가 유, 초등부를 위해서 만화 하나를 그리겠습니다. 만화는 보통 사각형 안에 들어있지요. 시커멓게 모든 것을 그려놓고 그 다음에 여기에다 뭐만 하나 그리냐 하면 눈동자만 이렇게 그리고 이 앞에 말을 집어넣는 이걸 하나 해야지요. ‘야, 불 켜!’ 이런 만화 기억나지요. 캄캄한데 눈동자만 반짝 반짝 하면서 하는 말이 ‘야, 불 켜. 누가 전등 껐어. 불 켜!’
이런 만화 기억나지요. 이거? 신약성경입니다.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버려요. 에베소서 5장 14절에 보면 “잠자는 자여 깨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했는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지금 잠자고 있는데 ‘잠자는 자여’ 하고 있으면 이게 들립니까, 안 들립니까? 들리지를 않지요. 죽은 자에게 ‘어이, 형씨! 일어나!’ 해서 그 사람이 일어나면 그 사람은 죽은 자가 아니고 산자가 되겠지요.
죽은 자한테는 그 사람의 귀에다가 확성기를 대고 무슨 고함을 쳐도 그 사람은 그냥 가만 있지요. 그게 바로 신약성도입니다. 여기 불끄기 전에 이 네모 안에서 이 사람들이 뭘 했느냐하면 한 사람은 밥 먹고 있었어요. 밥 먹기, 한 사람은 설교하기, 한 사람은 전도하기, 한 사람은 기도하기, 한 사람은 운동하기, 한 사람은 잠자기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했어요.
불을 꺼버리니까 새까맣게 되어서 눈동자만 남지요. 이게 뭐냐? 죽은 자에요. 자기 딴에는 기도하고 설교하고 뭔가를 하니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요. 죄송합니다. 죽은 자입니다. 사람이 뭔가 활동을 하면 자기가 죽은 자인줄 몰라요. 왜? 활동하는 그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꾸 의미를 둬요. ‘아, 내가 전도를 하다니. 내가 설교를 하다니. 내가 강의를 하다니… 아, 내가 의미 있고 가치가 있구나.’
자기에게 자꾸 의미와 가치를 둔다 이 말이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표시를 달아줍니다. 표시, 팻말,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알지요? 그것처럼. 제가 말은 쉽게 하지만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나오지요. 마찬가지로 ‘죽은 자여 깨어나라.’ 자기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람한테는 ‘죽은 자여 깨어나라’ 이게 무슨 소리인줄 모릅니다.
‘주여, 저의 찬송을 받으소서.’ 그러고 있는데 ‘죽은 자여 깨어나라. 너희는 포위되었다. 죽은 자여 깨어나라.’ ‘주여, 저는 살아서 전도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여 깨어나라.’ 자기 자신을 구약 때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기도하니까 도와주소서.’ 도와줘봤어요. 도와줘 봐도 소용없습니다. 구약 때 아무리 하나님이 많이 도와줘도 신약의 예수님이 영광을 돌린 만큼 영광을 돌릴 수가 없어요.
그게 로마서 3장에 나오는데 한 번 봅시다. 제가 지금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 기쁜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되려면 어느 정도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는가? 한 번 보세요.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흠모할 만하고 기뻐할 만한 영광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자기백성에게만 ‘기쁘지. 기쁘잖아. 얼마나 기뻐’ 라고 이야기하고 만약에 자기 자신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사람 같으면 이것은 절망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저 어쩌란 말입니까? 어떻게 뭘 더 해야 돼요? 모든 것이 죄라면, 죄 아닌 것이 없다면 그러면 죄 아닌 게 뭡니까? 그러면 제가 죄 아닌 것을 반드시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이래 나올거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죠. 말귀. 말귀, 해놓고 뒤에 물음표 하나 되어 있는 것 봤지요? 말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구약성경식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택한 자가 아니면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모든 사람이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속이 다 시원해요. 무슨 짓을 해도 영광 안 되는데 아예 포기하세요. 포기하는 그 즐거움, 그게 신앙생활 즐거움입니다.
모든 사람이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 중간과정을 제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았습니다. 참 희한하지요? 한번 적어 볼까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해놓고 약간 띄우고(…) 그 다음에 로마서 3장 죽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여러분들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한다’는 이것과 결과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는 이것을 연결시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앞에 있는 이 말도 감사하고 뒤의 말도 역시 감사하고 이것을 한 셑으로 해서 모조리 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구원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만 감사하지 말고 그 앞에서 원인이 되는 것을 한번 찾아봐요. 도대체 이 줄이 어디서 시작된 거야? 하고 줄을 당겨보니까 제일 앞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이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라는 이것이 뒤에 있는 것만큼이나 즐거워야 되고 고마워야 되고 감사해야 된다 이 말이죠.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그게 신약시대에요. 그게 신약시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잠자는 자여 일어나 깨어나라’ 하니까 자기가 자기 깨운다고 부질없는 짓들을 하고 있어요. 여기서 잠자는 자는 무슨 말이냐 하면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가 꼼지락거리고 설쳐대면 그것은 뭡니까? 그것은 죽은 자가 아니고 자기가 살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죠.
성경에서 죽은 자라고 하면 죽은 자라고 알아들으면 아무 문제없는 걸 괜히 자기가 산자라고 행세하니까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여 잠자는데서 깨어라’라는 이 표시가 의미하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제 해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죽은 자여 깨어나라’하는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보고 하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여 깨어나라’ 하는 것은 이 행동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빛의 자녀이니까 그 자녀는 어디서 생겨난 자녀입니까? 빛의 자녀이니까 빛에서 나온 거예요. 어둠의 자녀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어둠에서 나왔겠지요. 빛의 자녀는 빛에서 만들어낸 자녀잖아요. 그러니까 빛 되시는 분이 ‘죽은 자여 깨어나라’ 하는 그 말씀을 행사해서 그 결과로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불쑥 깨어나는 겁니다.
‘어, 이게 어떤 세계야? 그동안 내가 뭐가 없었지. 아, 그동안 내가 죽은 자였는데’ 라는 것에 대해서 새삼 화들짝 놀라는 일들이 일어날 때 그 때 옆의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깨어났네? 어떻게 해서 깨어났는데? 누가 깨웠는데?’ ‘몰라. 누가 깨웠지?’ 하고 성경 보니까 ‘죽은 자여 깨어나라’ 하고 말씀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말씀하신 분이 그분이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고 잠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일도 말씀대로 행하신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하죠. 사람이 용서를 받은 사람 같으면 반드시 용서 받은 것을 잊지를 못하게 되어 있듯이 죽은데서 깨어난 사람 같으면 자신을 죽은 자로 만들고 다시 거기서 깨어나게 하신 분을 잊지를 못하는 겁니다. 정말 죽은 자에서 깨어난 사람 같으면 옆에서 어떠한 사태, 어떠한 경제파탄, 어떤 위험한 일이 온다 할지라도 자기가 죽은 자에서 깨어나고 주께 용서 받은 것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는 전도를 해야 돼요. 예수 믿지 말라고. 교회 오지 말라고. 전도할 때 ‘예수 믿지 말라, 너 같은 인간 필요 없다’ 고 밀어도 다시 오고 밀어도 다시 올 때, 그 사람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을 용서해 주신 그분의 덕분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증거 되지요.
그것이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잖아요. 우리 가운데 잘난 자가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문벌 좋은 자가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부자가 누가 있느냐? 세상의 천하고 못난 것들을 택하사 결국 누구만 자랑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기 위해서 모인 이것이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교회라면 누구의 지시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왜? 나는 명령 해 봤자 소용없는 인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죽은 자이기 때문에. 살아난 자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났는데 예수님의 능력에 계속 머물러 있겠습니까? 떠나겠습니까? 주의 능력으로 살았으면 계속 머물러 있겠지요. 주의 능력에 머물러 있겠다는 말은 나는 계속 무슨 자가 되고? 나는 죽은 자가 되고 주님은 계속 내 안에서 산자가 되어서 내가 사는거죠. 그 논리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면 이 논리 말고 다른 논리를 이야기할게요. 죽었던 자가 살아 있는 예수님이 와서 살려주니까 ‘이제부터 나는 살았으니까 내가 산자로서 내가 나서서 에베소서 5장 말씀을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이거요, 그것은 아직도 죽은 자입니다. 방금 제가 두 가지를 이야기 했는데 그 차이점을 여러분이 아시겠습니까? 아시겠습니까, 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따라오라는 말이 아니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어떻게 느꼈는가에 따라서 되겠지요.
“아들이 자취를 하는데 용돈이 없다. 용돈이 궁했는데 그 때 아버지가 오셔서 ‘이번 달 풍성하게 써라’ 하면서 1000만원을 주고 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떠났다. 나는 그 돈 1000만원을 가지고 열심히 사용했다.” 이게 맞습니까? 아니면 “돈이 없어서 완전히 거지였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에게 와서, ‘여기 돈 1000만원이 있다. 다 쓰고 나니까 이번에는 2000만원이다. 다 쓰고 나니까 이번에는 5000만원이다. 또 쓰고 나니까 이번에는 1억이 있다.”
계속해서 주시는 거, 여러분, 어느 쪽이 복음입니까? 아버지가 계속해서 주시는 것이 맞지요. 그렇잖아요. 그게 바로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기어이 떠나지 않고 한식구가 되어서 절대 떠나지 않는 거예요.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자격으로 떠나지 않는다? ‘너는 나만 없으면 죽은 자인데 내가 있음으로 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네가 산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용서와 사랑의 능력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유일하게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강의 다시 해 봅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지요. 잘 들어 보세요. 어렵습니다. 정말 어려워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오직 누구만 알아요? 불신자가 알아요, 신자만 알아요? 오직 신자만이 알지요.
글쎄 지금 그 이야기를 한다니까요? 불신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성령 주시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행할 수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아직도 ‘모든 사람이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 자체를 이해 못하는 불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 불신자한테 ‘주님께서 성령 주셨다’고 하면 전부다 그것을 곡해해서 ‘아, 성령 받았구나. 이제부터 실천에 옮겨야지.’
전부 다 이렇게 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참, 흥분한다고 이해될 문제는 아닌데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시 합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이 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누구냐 이 말이죠. 신자만 아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인간이 참 못되기는 못되었어. 인간이 참 나빠. 죄인 중에서 그런 죄인이 없어. 하지만 (꼭 뒤에 이게 나와요) 뭔가 힘주시면 나도 착해지고 뭐가 할 수 있는데…’ 라는 이런 요소…, 그림으로 그려야 되겠습니다. 내가 답답해서 안 되겠어요.
여기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걸 뭐로 봅니까? 이젠 답변하면서 합시다. 그래야 쉬우니까. 죽은자 입니까, 산자입니까? 죽은 자지요. 이 머리 부분 죽었습니까? 아니지요. 가슴부분 죽었습니까? 답변해 보세요. 아니지요. 몸통부분 죽었습니까? 아니지요. 다 죽었습니까? 다 죽었잖아요. 다 죽은 이유는 뭡니까? 뭐만 나오기 때문에? 죄만 나오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다 죽은 인간이 약간은 그래도 선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극을 주시고 뭔가 새로운 것을 주시면, 여기 선한 것이 남아 있는 바탕이 활성화 되어서 뭔가 자극만 주시면 그 힘으로 내가 착하게 살 것인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온전하게 죽은 자에요, 안 죽은 자에요? 이것은 덜 죽은 자에요.
‘하나님께서 성령만 주시면 착하게 사는데…’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 덜 죽었어요. 아직도 그것은 구약성경이라. 구약의 사람들은요, 뭐냐 하면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는 이렇게 죄를 많이 지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받은 은혜가지고 바르게 살면 얼마든지 영광을 돌린다’라는 생각들이 시편에 나왔던 잘못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그 시편의 주인공이 누구였습니까? 사람인줄 알았더니 사람이 아니고 누구였습니까? 예수, 메시아죠. 오실 메시아고 예수님만 그분이라는 것은 예수님만 사람이고 나머지는 그냥, 아까 뭐라 했습니까? 허사, 또는 허무, 또는 흙, 죽은 자, 죽은 자를 다른 말로 하면 잠자는 자. 잠자는 공주가 예쁘지 잠자는 자가 뭐가 예뻐요?
그래서 사도의 편지에 이르기 전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내가 죄있다 하기 전에는 너는 죄가 없다. 하지만 내가 죄 있다 하면 죄 있는거야’ 라고 합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해서 뭐냐 하면 이게 무슨 차죠? 모과차죠. 이게 유자차인데 내가 모과차라고 하면 모과차입니다. 예수님 보기에는 모과차인데 왜 이걸 유자차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서 나오는 한계가 이것을 유자차라고 보는 거예요.
내가 지어낸 이야기 같아서 안 믿어집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예를 들어봅시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옆을 지나가시는데 무화과나무가 때가 안 되어서 열매가 없어요. 예수님이 목이 말라서 그걸 좀 따먹으려고 했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감히 주가 드시겠다는데 왜 열매가 없어’라고 하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와 보니까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비틀어져 죽었어요.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니 무화과나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아서 말라비틀어진 것은 제자들이 자꾸 자기들이 온전하게 죄인이라 생각 안하고 자꾸 예수님을 판단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입장에서 서서, 그것이 선악인데 선악과의 입장에 서서 자꾸 예수님을 판단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선악으로 판단한다는 그 자체가 죄에서 나온 판단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생각지도 못한 그러한 저주를 해버리니까 누가 당황스럽냐 하면 제자들이 당황스러워진 거예요. 낙타와 바늘구멍에서 부자가 천국가기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힘들다, 이렇게 할 때 제자들이 낙담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뭐라고 했어요.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이 말은 ‘그러면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낙타를 아무리 쑤셔 넣어도 바늘구멍에 안 들어가요. 이것은 결국 인간은 구원 못받는다는 이야기란 말이죠. 그 제자들이 하는 말이 맞는 말이에요. 구원이 안 되는데도 구원받겠다는 이 심성, 그 사고방식 자체가 바로 죄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죠.
안되면 안 되는 줄 알지 왜 자꾸 들어가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이렇습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지금 계속 어려운 말만 지껄입니다. 어디까지 지껄이는가 한번 봅시다. 1)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 2) 지옥이 있다. 뭘 어쩌라는 말입니까?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 그런데 지옥이 있다. 구원되지 못한 사람은 어디 간다? 지옥 간다. 이 방정식을 어떻게 풉니까?
죄지은 사람은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다고 자기 죄 문제 해결은 안 되고, 어쩌란 말입니까? 정답은? 그냥 가면 돼요. 그냥 가면 된다고. 뭔가 지옥에 안 가려고 하는 그 자체가 ‘1번,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를 모독하는 거죠. ‘그러면 안가면 되지,’ 그것은 2번을 모독하죠. 안가면 되기는 뭐가 됩니까? 지옥에 가야되지요.
진퇴양난, 빼도박도 못하게 만들어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신약에는 뭐가 없다? 사람 같은 사람은 없으니까 괜히 사람인척 하지 마세요. 이게 정답입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구약 때 이미 시효가 끝났습니다. 구약 때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 없고요. 아브라함도 그렇게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고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받은 사람 없습니다. 괜히 헛된 시도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것이 분명히 등장한 것은 신약세계에 와서 등장합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사람이 먼저 앞장세워서 일 해보다가 안 될때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니까 하나님이 도와주는 그런 식이라면 신약에는 아예 뭐가 없다? 사람이 없고 뭐가 등장합니까? 사람 자리에 뭐가 와요? 따라해 봐요. ‘어두움’ ‘죽은 자’ 이런 용어들이 나옵니다.
구약은, 개체용어고 아브라함은 개체지만 신약은 덩어리에요. 집단용어입니다. 집단에서는 개인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나 누군데요.’ ‘너 어디 소속이야?’ 이렇게 묻습니다. ‘저는 참 설교 잘하는데요.’ ‘너, 어디 소속이야?’ 이래 물어요. ‘네가 뭘 할 수 있어?’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뭘 할 수 있어?’ 라는 것은 이미 구약 때 끝났어요. 율법을 주셔서 이미 끝난 문제라는 거예요.
아예 그런 것은 묻지도 않아요. 이야기를 해봐야 실천에 옮길 것도 아니고. ‘너는 뭘 할 수 있어?’ 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너는 누구 안에 있어?’ ‘저는 예수 안에 있는데요.’ 그러면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신약에서 인간이 없다는 말을 제가 어렵게 했는데 쉽게 말해서 ‘내 이름이 없다’는 겁니다. 내 이름이 없고 대신 누구 이름이 있다?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는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지요.
이제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약성도입니다. 자기이름은 잠자는 이름이고 죽은 이름이에요. 죽은 이름이라니까. 이름을 바꿔보세요. 요새 축구선수 유명한 이름 있지요. 이 근호라고. 한골 넣을 것인데 크로스바 맡고 튀어 나왔어요. 그 이 근호라는 이름의 전의 이름이 이철수라고 합시다. 이 철수 라는 이름인데 이근호로 바꿨다면 그 사람 이름을 이철수라고 부르면 듣는 이 근호 기분 무지 나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는 원래 인간은 없어요. 인간대신 뭐다? 죽은 자 속에 소속되어 있지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만화를 그려 볼까요? 컴컴한 방에 눈동자만 있고 여기에서 뭐라고 합니까? ‘야 누가 불 껐어? 불 켜!’ 라고 하잖아요. 불 켜보니까 하나는 라면 끓이고 있고 하나는 책보고 있고 하나는 설교하고 있고 하나는 전도하고 있고 하나는 기도하고 있고 이렇게 있더라도 신약성경은 전부 다 어떻게 한다? 새까맣게 쳐버리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에베소서 5장에서는 ‘어둠에 속했다’ 고 합니다. 어둠에 속했기 때문에 자기가 어둠인 것을 인정 해야 돼요. 인정하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이 세상 안에는 어두움밖에 없고 빛은 이 외곽에 있다는 겁니다. 빛은 이 외곽에 있다. 그래서 빛이라는 분이 등장할 때는 각자 자기가 반짝 반짝 빛이 나는 빛 인줄 알았는데 막상 빛이 되시는 분이 오니까 우리는 통째로 너나 할 것이 없이 통째로 무엇에 속했다?
어둠에 속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면 ‘너 이 람보다 잘났어? 기도 이 사람보다 오래해? 헌금 많이 해?’ 이렇게 개인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고 전체를 다 해서 ‘너 어둠이야, 아니면 빛의 자녀야’ 이렇게 묻는다 이 말입니다. ‘소속이 어디야?’ 이래 묻는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개인의 내 이름은 없기 때문에.
그 축구선수, 목사 아니고 그 축구선수 이 근호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면 전의 그 사람 이름 이철수를 거론하면 이근호가 기분 나쁘죠. 대구 FC 소속의 이근호가 기분 되게 나쁘죠. 왜 자꾸 죽은 이름을 들먹이느냐 말이죠. 죽은 이름을. ‘옛날의 그 이철수 참 잘나갔는데…’ ‘허허이, 그것은 죽은 이름이라니까!’
구약에서 이철수에서 이근호로 바꾼 뒤에는 이철수도 개인적이고 이근호도 개인적이지만 신약에서 만약에 이철수에서 예수님으로 바꾸면 이철수는 개별적이지만 예수님은 자기개별적인 이름이 아니라 통째로 그리스도 몸이라는 이름으로 모두의 이름으로 하나의 이름으로만 통용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귀가 눈더러 손이 발더러 ‘쓸데없다’ 소리를 못하지요. 왜냐하면 전부다 한 통속, 한 통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는 상표, 브랜드는 ‘예수이름’입니다. 예수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는 개인적으로 부르면 안 되고 옆에 내 형제를 돌아보면서 주의 이름을 불러야 된다 이 말이죠. 만약에 개인적으로 불러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나 이 근호’ 가 되어 버려요. 그러면 경쟁이 생겨요. 주의 이름이 우선이냐, 나 이근호가 우선이냐, 이런 문제가 생긴다니까요.
죽은 자가 산자 되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거예요. 누가 불렀냐, 그게 아니라 죽은 자가 부른 거예요. 왜 죽은 자인데? 무조건 죽은 자이지요. ‘너 죄인이야.’ ‘무슨 죈데?’ ‘무조건 죄인이야.’ 왜? 따로 의인이 등장하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 따로 등장하니까 그분 빼놓고는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뭐가 됩니까? 전부 다 죄인 되어 버렸어요.
그 이유를 따진다면 그분만이 일한 것이 영광이 되고 나머지 그 분외에 어떤 사람의 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못돼요? 영광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구약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용어, 죽은 자, 사도바울은 어디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느냐? 옛날로 돌아가 봅시다. 여기가 에덴동산, 그 밑에가 현재 있는 이 인간세상이라고 할 때, 에덴동산에 살던 사람이 추방되었지요.
인간이 추방된 것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죄지었어요. 근데 추방된 것은 왜 추방되었을까요? 죄지었어도 같이 살면 되는데. 한 번 봐주면 되잖아요. ‘따먹었나?’ ‘예.’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예,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 이러면 되는데, 죄인은 상태에서 그냥 살아도 되는데 왜 추방할까요? 제가 중요한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뭘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습니까? 이것은 뭘 보호하기 위해서?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생명나무 따먹으면 안 되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사가 생명나무에 있는 거예요, 인간에게 있는 거예요? 어느 게 우선입니까? 이 생명나무는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중심입니까? 인간중심입니까? 예수님 중심이죠. 생명나무 중심입니까, 인간중심입니까? 생명나무 중심이잖아요.
그래서 생명나무 못 따먹게 했잖아요. 에덴동산 쫒아내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야, 너 생명나무 따먹고 싶지?’ ‘따먹고 싶습니다.’ ‘진짜 따먹고 싶나?’ ‘보내주세요. 따먹고 싶습니다.’ ‘오, 그래? 그러면 기어 올라오너라. 길은 아나?’ ‘예, 에덴의 동쪽입니다.’ ‘동쪽으로 오너라. 내가 길 열어줄게.’ 이렇게 했습니까?
추방하고 난 뒤에 무슨 조치를 했어요? 행여 쳐들어 올까봐 천사들로 하여금 못 오도록 만들었지요?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뭘 사랑해? 사람을 사랑한다고요?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인간을 사랑하실 것이라는 그런 사고방식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이 지상에서 인간세계에서 만들어낸 조작된 신입니다. 그 신 앞에 이름을 붙이면 무슨 신? 사랑의 신.
사람이 만들어낸 신이 뭐냐? ‘비록 사람은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지 아니했을 것이다’라는 이것,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쫒겨 날 때 같이 쫒겨난 자가 누구였지요? ‘애들은 가라!’ 뭐지요? 뱀이죠. 비암! ‘한 마리 잡솨 봐!’ 뱀이 나오지요. 뱀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인간은 뭘 했습니까?
자기의 저주받은 상태에서 힘 있게 어디로 올라간다? 다시 생명나무를 따먹으라고 시도하는 그것을 누가 열심히 도와줍니까? 악마가 도와주죠. 여기서 나온 게 뭐냐. 이게 종교고 이게 목사고 교회고 기독교 아닙니까? 기독교가 결국은 뭐냐? 악마가 만들어 놓은 거죠. 아, 극단적으로 나간다. 나갈 때 확 나가버려야죠. 설렁설렁 나가면 안 되고 튀어 나갈때는 확실히 극단적으로 나가버려야죠.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이것은 없어요. 없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빛의 자녀니까 이 자녀는 누가 창조해요? 빛이 창조한 자녀 아닙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이것은 죽은 자고, 죽은 자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만 날 이런 식으로 만들어 내고 여기에 빛이 되시는 분이 새롭게 창조 작업을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새로 창조하는 거예요. 죽은 자를 살리러 오시는 거예요. 잠자는 자를 깨우러 오시고. 다 그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다? 인간은 아니에요. 바로 신약의, 아까 이야기한 그 주도권, 누구지요? 빛이죠. 빛을 비추시니까 ‘잠자는 자여, 어둠에 속한 너희들이여, 깨어나라.’ 깨어나면 뭐가 보입니까? 깨어난 내 모습이 보입니까? 이게 오늘날 문제 아닙니까? ‘하나님 덕분에 내가 구원받았다.’
구원 받아 놓고도 누구 생각해요. ‘역시 나는 믿음 좋아.’ 자기 생각하는 이런 것은 마귀가 만들어 낸 것이고 빛이 비췄으면 ‘오, 빛이다’ 하고 뭘 잊어버립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잊어버리게 되지요. ‘오, 빛이다. 이게 웬 떡인고! 이게 웬 떡이야! 주여, 왜 이러십니까?’ ‘너는 내 자녀야.’ ‘감사합니다.’ 끝난 문제입니다.
옆에서 푹 쑤십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술술 나와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것이 거침없이 나오지요. ‘너는 부자가 천국가기 힘든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든데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은 못하지만 누구는 할수 있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이게 아주 거침없이 술술술, 고백된다고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였지만 하나님의 예정된 뜻에 의해서 구원받았다.’ 이것이 거침없는 하이킥, 거침없이 술술 나와요. 이게 논리가 아니고 그냥 고백으로 나온다고요.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한 게 아무것도 없다.’ 이게 바로 복음 아닙니까? 이게 바로 복음이잖아요.
여기 기독교가 왜 들어갑니까? 기독교가 왜 나와요. 기독교가 여기에 왜 들어가는데요? 들어갈 이유가 없다니까, 여기에. ‘열심히 기독교 믿어서 생명나무 따먹어라.’ 그렇다면 애초부터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을 안 시켜 놓았지요. 에덴동산 아예 4차선도로 뚫어놓지요. 그렇지 않았어요. 아예 차단시켜 놓았어요.
하나님이 한 번 결정한 것은 취소하지 않습니다.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너를 구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구원되는 자가 있다면 너를 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 중심으로, 구원받는 너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다시 창조에 나서시기 때문에 …, 첫 번째 창조, 첫날에 뭘 만들었습니까? 뭘 만들었다? ‘빛이 있으라.’ 그 빛에 의해서 마지막 6일째 빛의 자녀를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신약성경에 창조한 겁니다. 10분간 쉽시다.
첨부파일 : 엡 29(20090213-1).hwp (115.0K), Down: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