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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렘 1: 1- 6 (하나님의 임하심)우리교회예레미야

렘 1: 1- 6 (하나님의 임하심)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예레미야 1장 1- 6절
제목 : 하나님의 임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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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3-11 20:55

하나님의 임하심

2009년 3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7

(렘 1:1, 개역)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렘 1:2, 개역)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렘 1:3, 개역)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 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렘 1:4,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렘 1:5, 개역)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렘 1:6, 개역)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렘 1:7,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누구세요?” 예레미야의 시작은 이런 식으로 시작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누구세요?”가 없습니다. 서로가 보이는대로 말하고, 보이는대로 싸우고, 보이는대로 사랑을 나눕니다. 결국 보이는 현대인들에게 전부요 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낯선 누구의 방문을 인정치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시작은 ‘낯선 분’의 방문으로 엽니다. 이로서 보이는대로 사는 것은 진정 ‘신앙의 세계’가 아니라 그저 인간들만의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각자 보이는대로 조립한 세상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선택활동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도 보이는 것들을 내름대로 계속 선별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돈이요 경제가 됩니다.

이로서 사람들마다 자기가 보는 세계가 다 같지를 않습니다. 같은 배우를 보면서 사람들마다의 호감도가 다 다르듯이 각자 재조립한 세상관이 다 따로 존재하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사도신경의 내용을 주창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가끔 역-사도신경을 외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든 것을 믿지 못하며, 그 하나님에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있는 것도 인정치 못하겠으며, 동정녀에게 태어난 것도 말도 안되는 소리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죽은 지 사흘만에 되살아났다는 것은 너무나도 터무니 없으며, 하늘에 앉아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것은 더더구나 인정못하겠으며, 죄를 사하는 것과 우리가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은 전혀 사기성 있는 허풍인 것을 나는 믿습니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요소같은 것은 우리 내부에 잠재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이 무엇이냐를 알기 위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제켜보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늘 재조립해 나가기 때문에 그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차례로 제거해나가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1에서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새로 출발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 세상이라는, 우리가 흔히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말씀으로 지어진 것’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이 정말 있는 자라면 말입니다.

이 보이는 것 속에 우리 자신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보이는 내가 보이는 나를 파악하면 이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세상은 말씀으로 되어졌으니 말씀으로 눈에 보이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해석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1:5에 보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1:8에 보면,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되어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떤 점이 이상하느냐 하며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구원해내시려는 수고를 하실 것까지 없이 아예 처음부터 이 세상에 안 태어나게 하시면 그만이 아닐까요? 즉 예레미야 선지자가 평소에 하는 행동을 쭉 지켜보고 난 뒤에 너무도 죄가 많아서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실 요량이라면 ‘예레미야 개인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일하심을 이해하겠는데, 오늘 본문은 그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레미야 출생에 하나님이 관여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쓸데없이 ‘구원’이라는 수고를 하신 셈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사항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개인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예레미야가 태에서 나오기 전부터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서 예레미야는 전체 말씀의 구조 안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배치된 자가 됩니다. 이것은 큰 긍정이요 절대적 낙관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 때문에 비로소 이해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처음에 예레미야는 이런 하나님의 엄청난 긍정을 이해 못하고 눈에 보이는 자기 처지로부터 하나님께 응답하고자 나섭니다. 6절에 보면,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취지를 이해못하는 답변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동장이 산불지기를 뽑는데, 어떤 아저씨가 극구 못하겠다고 사양합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오늘 자신이 푸른 옷을 입고 와야하는데 노랑 옷을 입고 왔다는 것이 핑계입니다. 하지만 불이 났을 때, “불이야!”고 고함치는 것은 노랑옷을 입었던 푸른 옷을 입었던 아무런 상관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즉 지금 예레미야의 자리는 본인의 아이디어가 아닌 겁니다. 비록 자기 눈에는 자기 자신이 보이지만 예레미야는 ‘보이지 않는 말씀의 세계’를 거쳐서 다시 자기 자신의 자리와 배치와 역할을 봐야했습니다.

출발점을 말씀에서 잡아야지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시키면 아니되는 겁니다. 생달걀과 삶은 달걀은 겉보기에 구별하기 난처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구분할까요? 탁자 위에 놓고 돌려보면 됩니다. 삶은 달걀은 속 전체가 다 삶겼기 때문에 이미 딱딱한 고체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주면 그 힘대로 몸통이 하나가 되어 잘도 돌아갑니다.

하지만 생달걀은 그 안에 여전히 액체가 담겨 있기 때문에 고체와 액체의 돌아가는 힘의 차이로 인하여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대로 하나님과 한덩어리가 되어 잘 돌아갑니다. 하지만 액체같은 자기 자신을 고집해버리면 삐걱거리면서 내부적으로 자꾸만 반발력이 생겨납니다.

아까 우리가 보았던 역-사도신경의 경우, 일부러라도 해보면 신앙인의 마음에 잘 와닿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신앙고백을 하면 한문장, 한문장이 감격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출생과 인생 자리가 결코 우리 아이디어가 아님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9:56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01강-렘1장1-6(하나님의임하심)-jer090311.hwp

이근호

10-12-08 22:10

001강-렘1장1-6(하나님의 임하심)-jer0903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장 1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1-6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 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아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 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한 때 유명한 개그맨이 있었습니다. 김국진이라는 이름의 개그맨입니다. 그 사람이 유행시킨 개그가 있습니다. ‘누구세요?’ 그 때 당시에 이것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그 때는 그냥 우스웠어요. 그런데 예레미야 1장을 보면서 선지자 사는 것과 우리 사는 것과 차이점이 뭔가를 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는 ‘누구세요?’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이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전부 다 보이는 것을 상대합니다. 이 명박 대통령도 청와대에 계시는데 다 보이는 것입니다. ‘누구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를 못한 채 살아가요.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상대해서 구성되어 있는 이 사회 말고 ‘누구세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 자신들, 이 땅에 사는 성도들에서 구성된 나라입니다. 완전히 달라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세상, 여기서 문제는 주로 경제문제잖아요, 거기에 비해서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는 참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알튀세르라는 철학자, 경제를 논한 철학자인데요, 그는 말하기를 ‘현대사회의 인간이란 경제적인 바탕위에서, 경제적인 수단과 능력과 노동력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인품이나 도덕 같은 것은 없고 그 사람이 얼마나 노동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은 결정되는데 왜 그런가, 서로가 서로를 볼 때에 인품이나 도덕을 보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경제력이 얼마입니까?’ 반드시 이런 관계를 가지고 상대방과 관계를 맺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산력으로 인해서 지구는 발달하는데 오직 그것뿐이고 다른 것은 다 허상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찔렀지요. 제대로 찌른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11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습니까?’ ‘예’ 그렇다면 보이는 것을 한번 제켜보세요.

보이는 모든 것, 보이는 장로님도 제켜버리고 권사님도 집사님도 보이니까 제키고,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목사도 있으니까 목사도 제켜버리고, 보이는 것들을 다 풀 섶을 제키듯이 제켜버리면 남는 것이 뭡니까? 뭔가 남는 것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그 사람이 믿는다고 한 그 주장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가 되거든요.

보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니까 하여튼 보이는 것은 제켜버리고, ‘보이니까 나는 안 믿습니다. 보이니까 제킵니다. 성경 그대로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할 경우에 결국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니까, 제키고 또 제키고 걷어내고 걷어내면 남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없네.’ 한다면 그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만 살아온 것이고 ‘비로소 남았네.’ 하는 것이 있어야 돼요. 그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커튼을 걷어내듯이 보이는 인간들을 걷어내니까 모든 우주와 모든 만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져 있고 유지되고 있고 이끌려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이 뭐냐, 믿음이라는 것은 말씀이 곧 현실인 것을 믿지요. 말씀이 현실입니다. 말씀이 성경책에만 박혀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현실이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럴 때 보이는 것만 만나는 사람한테는 그것이 귀에 안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철떡 같이 그렇게 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세상이 전부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17, 18세기에 걸쳐서 칸트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시계처럼 산책하는 시간을 잘 지켰다는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지요. ‘세상이라는 것은 보이는 대로 오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대로 올 것 같으면 너와 내가 같아야 될 텐데 다르다. 그것은 사람 속에 보이는 그것을 다시 해석하고 조립하고 조작하는 요소가 사람마다 다 들어 있어서 각 사람마다 보는 세상이 제각기 다르다.’

한 사람의 영화배우를 두고 ‘저 사람이 어떠냐?’ 할 때 좋다는 사람이 있다고 별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똑같은 영화배우가 빛을 받아서 우리의 감각에 들어와도 영화배우의 인상을 조작하는 이미지가 각자가 다 다르지요. 그럴 때 사람들은 말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진리는 뭐냐? 칸트는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난 모른다.’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난 알거든.’ ‘어떻게 아는데?’ ‘난 말씀으로 지어졌거든.’ 라는 말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마 그런 소리를 했다면 유명한 철학자는 되지 못했을 거예요. 소리 소문 없이 조용하게 살다가 사라진 하나의 성도가 되었을 겁니다. 철학자로서 유명해지려면 남들에게 히트 칠 수 있고 소통될 수 있고 납득될 수 있는 소리를 해야 되는데 ‘나는 몰라.’ 하니까 그것이 대다수의 불신자에게 희한하게도 동감을 얻어낸 겁니다.

“오, 칸트라는 똑똑한 사람이 말하기를 ‘진리는 몰라.’ 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평소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그렇다, 진리는 모른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하지요. ‘모르니까 알 필요 없다. 알 필요 없으니까 내 맘대로 살자. 이제는 내 맘대로 살아도 양심에 가책을 안 받는다. 왜? 어차피 모르니까.’ 이것은 그 때에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을 집어던지는 행위와 똑같은 겁니다.

전에는 성경을 안보면 양심에 약간의 가책이 되었는데 칸트라는 위대한 분이 오셔서 ‘모른다’고 이야기하니까 적극적으로 동의한다는 표를 던지면서 따라서 모르니까, 모르기는 나만 모르는 것이 아니고 너도 모르니까 ‘목사 당신이 말하는 그것은 네 주장이고 네 생각이지.’라고 되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 우리는 토를 달 수 있어요. ‘그것은 네 생각이고.’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것은 네 생각이고.’ 우리는 이렇게 한 번 해봐야 돼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나는 절대 안 믿으며 독생자를 안 믿으며 죄 사함을 절대 믿지 않으며 교인들이 모여서 점심 먹는 것을 믿지만 성령 안에서 서로 교통하는 것은 믿지 않으며 영원히 사는 것을 절대로 난 못 믿겠으며 내 죄가 사해지는 것은 절대로 나는 못 믿겠으며…….’

그것을 하루 한 번쯤 해 봐야 돼요. ‘거꾸로 사도신경’, 이 문구가 히트 치겠는데요. 정말 이것은 해 봐야 됩니다.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으며,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인정하되(그거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것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소리며 부활하사 하늘에 앉으셨다는 소리는 있을 수 없는 소리며…….’

철학이나 과학에서 하는 그 이야기가 먼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교육받았고 어릴 때부터 우리 맘속에서 잠재되어 있던 이야기, 사도신경과 반대되는 신경, 사도신경을 안 믿는 사도신경, 그런 것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을 줄 누가 알겠어요. 겉으로는 목사라 하지만 신학교까지 나왔지만 안에 그게 잠재되어 있을 줄 누가 알겠습니까?

제가 오늘 글을 하나 썼습니다. ‘목사가 가장 하기 힘든 것은 설교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고 심방도 아니다. 그럼 뭐냐? 자기 신앙생활 제일하기 어렵다.’ 자기 신앙생활 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 대신 설교하고 목회하려고 하고 신앙생활 대신 남에게 가르치려고 하고 신앙생활 하는 대신 기도로 때우려고 하고 정작 본인의 맘속에는 ‘죄 사함? 진가민가……, 주께서 부활해서 우리도 같이 부활된다? 그것도 진가민가……,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 목사에요.

만약에 진짜 목사가 성령 받아서 믿음이 있다면 정말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면 그야말로 교회 나가라 해도 웃으면서 나갈 수 있지요. ‘나가라고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신경이 진가민가 되니까 이쪽에서 보이는 것이 계속 발목을 잡는 거예요. ‘좀 봐주세요.’ 보이는 교회를 자꾸 붙드는 거예요. ‘내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래놓고는 가르치기는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겁니다.’ 본인부터 하세요. 본인부터 보이는 교회를 생각하지 말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된 것을 믿느냐, 그 말입니다. 다 읽지 않았는데 오늘 본문의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참 어려워요.

8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고.” 다시 읽어볼게요.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얼른 들어보면 이게 뭐가 어렵나,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한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이상하다는 말이지요.

왜 이상하냐 하면, 그 앞 5절에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했거든요. 이미 예레미야가 엄마 배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아예 엄마의 나팔관에 착상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아셨다면 새삼스럽게 구원이라는 말이 필요치 않잖아요.

이게 어렵다 그 말이죠. 제 말을 잘 들어보세요. 사람이 살다 보니 죄를 많이 지었어요. 그럴 때 제가 ‘당신 보니 살아온 지난 세월동안 죄를 많이 지었네요.’ ‘죄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을 구원할게요.’ 이것은 말이 돼요. ‘당신은 이제 죄인입니다. 당신을 이제 구원해서 천국 보내겠습니다.’ 이것은 말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했”지요. 그러면 구원시키는 것은 두 번째고 아예 처음부터 안 태어나게도 할 수 있잖아요. 제가 일부러 시비를 거는 느낌이 듭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태어나게 해서 구원하지 마시고요, 아예 안 태어나게 하면 구원하시는 수고도 안 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너는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알았거든.’ 라고 해놓고는 ‘내가 너와 함께해서 너를 구원해주마.’ 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구원자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레미야를 창세전부터 태어나야만 하게 했던 겁니다. 구원자체가 뭔지를 남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예레미야의 시작부터가 아주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냥 ‘예수 믿어서 구원받지.’ 이런 것은 예레미야에게는 어울리지 않고 예레미야에게는 다른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죄 많이 지었습니다. 구원해주세요.’ 이것은 예레미야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영원히 살고 싶어서 나온 구원이고 성경하고 다른 겁니다.

예레미야뿐만이 아니고 모든 성도는 본인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하는 사람들의 집합이 오늘날 성도의 집합입니다. 사고의 전환, 생각이 바뀌어야 됩니다.

이것이 뭐냐, 제가 처음부터 이야기한 것인데 말씀의 구조, 말씀세계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말씀세계에서는 ‘하나님, 저 구원받았어요, 안 받았어요?’라고 하면 안돼요. 이미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말씀으로 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면 뭐라고 해야 되느냐하면, ‘하나님, 저의 역할은 뭡니까?’라고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돼요.

하나의 구조니까, 세상천지는 말씀으로 되어 있으니까. 설교를 다시 해볼게요.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알튀세르라는 사람이 보이는 세계를 조사해보니까 그 배후에 전부 돈과 결부되어 있어요. 인간은 사람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돈 되는 사람과 돈 안 되는 사람을 선별해서 보더라 그 말이죠.

하나님만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도 선택해요. 나한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는 사람, 손해가 되는 사람, 이것을 가려내면서 보더라는 말입니다. 일본 근해에서 우리나라 어선의 선원이 죽어도 나하고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에 나한테 심각한 문제도 타격도 안 됩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지갑 속에 돈 2만원이 들어있었다, 이것은 어부들이 죽은 것보다 더 심각한 스트레스가 오는 거예요.

예레미야는 처음에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몰랐다는 대목이 나오는 데가 6절입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아, 이런 착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청년, 혹은 30대나 40대가 되어서 신학교 처음 들어갈 때 보통 이런 소명들을 이야기합니다. ‘난 안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그런 이야기들 많이 해요. 믿거나 말거나.

사업하다 다 털어먹고 신학교 간다고 가서는 “난 안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시켰다, 난 안하려고 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사무엘처럼 ‘넌 신학교 가야 된다.’고 지정해서 그 효과로, 그걸 나비효과라고 하지요, 그 효과로서 이렇게 늦게서야 신학교 오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합니다.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또 신학교에 갈지. 그것은 나비효과이기 때문에 누가 그렇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레미야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구조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데 자기가 말씀에 의해서 이런 역할을 맡게 된 것을 감격해야 될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하면 ‘나’라고 하지요, ‘나’, ‘나는 말 못하는 아이이기 때문에, 수준 낮은 아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 엄청난 일을 감당합니까?’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레미야의 답변이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누가 네 실력으로 하라고 하더냐?’ 하나님이 들으면 참 어처구니없지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요. 마치 이런 것과 같아요. 산불 감시하는 사람보고 ‘혹시 여기서 산불이 일어나거든 불이야! 라고 외치고 방송을 하세요.’ 하니까 그 산불감시원이 하는 말이 ‘저 못합니다.’ ‘왜 못합니까?’ ‘제가 오늘 파란색 재킷을 입고 와야 될 것을 노란색 재킷을 입고 와서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불났을 때 ‘불이야!’ 그 소리 못합니까? 이거하고 노란재킷이나 파란재킷하고 무슨 관계 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잖아요. 저도 그런 것을 많이 들어왔고 많이 느꼈지만 교회에서 봉사이야기가 나오면 꼭 예레미야처럼 나옵니다. ‘저는요, 바빠서 못해요, 저는요, 실력이 없어서 못해요, 저는 …… 못해요.’ 목사도 또 웃기지요. 목사도 거기에 덩달아서 ‘기도하시면 잘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지금 무슨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까? 둘 다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없고 보이는 것과 상관있어요. 보이는 것과 상관있을 뿐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예레미야를 너무 탓하지 맙시다. 나중에 제가 예레미야를 만나면 제가 혼나지요. 출애굽기 6장 30절에서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잖아요.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고하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를 들으리이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가운데 나타나서 ‘모세야, 가라. 애굽에 가서 내 백성 끄집어내라.’라고 할 때,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은 모세 본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 본인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저는 신학교 입학하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신학교 가서 목사 되는 것이 당신의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신학교 나오고 목사를 하다가 목사일 때려치우고 돈가스 집 하는 것도 당신의 아이디어가 아니지요. 돈가스 집을 해도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한 십년 전에 저한테 그런 질문 했어요. 또 다른 경우에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사에서 제게 청탁을 했어요. ‘목사의 투 잡스에 대한 견해.’라는 주제였어요. 그것도 있고 또 ‘목사는 일을 할 수 없지만 사모가 다른 일을 해도 되느냐.’하는 주제도 있었어요.

그래서 제 글에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하면 일을 하든지 안하든 그것은 목사도 아니다.’ 라고 썼어요. 사모가 돈가스 집을 할 때에 그것을 왜 자꾸 밥 먹고 살기 위해서만 한다고 해석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게 하나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안 듭니까? 돈가스도 못 만드는 것이 왜 돈가스 집을 하느냐, 라고 따지겠지만 돈가스를 잘 만들든 못 만들든 그것은 상관 없는 겁니다.

산 불 났을 때 ‘불이야!’ 하면 되지 노란 옷을 입었는지 파란 옷을 입었는지를 따질 필요가 없듯이 사모가 돈가스 집을 하다가 제대로 못 만들어서 6개월 만에 망했다, 하는 그것도 이 말씀의 세계 속에 포함이 되어 있어야 돼요. ‘목사님, 너무 낙관적인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평생 고생하면서 살더라도 이런 낙관의 맛이라도 잠시 봐야 되지 않습니까?

무지무지한 낙관이고 이런 긍정이 세상에 또 없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낙관이고 엄청난 긍정이에요.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보이는 것을 볼 때에 보이는 그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보이는 것을 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은 그냥 해석하면 안 되고, 보이는 것을 보이는 내가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런 식은 안 되고 반드시 어디를 빙 둘러가야 되느냐, 보이는 것을, 예를 들어 보이는 돈가스 집을 그냥 보이는 돈가스 집으로 보면 안 되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 어, ‘저 집이 왜 생겼지?’ 라고 보게 되면 ‘그것도 사명이구나. 그것도 역할이구나. 그게 만약에 주님주신 역할이라면 그 사람의 잘잘못, 또는 성공이나 실패의 스트레스 자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목회를 했다. 목회가 잘 안되더라. ‘그것은 네가 죄를 지어서 목회가 잘 안 된다.’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요. 그것은 보이는 사람을 보이는 본인이 지레 해석하고 멋대로 판단해서 그런 겁니다. 반드시 세상이라 하는 것은 진짜 믿는 자라면 세상 모든 인간의 존재의 자리는 말씀대로 되어야 하고 그래서 하나의 역할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초짜가 되어서 ‘아휴, 저는 이거 못합니다. 저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하여튼 제대로 못합니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끈질기게 달라붙지요. 7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이게 ‘누구세요?’ 하는 통화내용입니다. 전화를 받고 보니 하나님에게서 온 전화에요. ‘아무개야, 이제부터 너는 내 선지자 되어라.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너에게 선지자 하라고 이미 역할을 맡겼어.’ ‘저는요, 아이라서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하나님의 통화내용이 뭐냐, ‘너는 못한다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너보고 가라고 하면 가는 거지. 네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는 너와 함께 해서 너를 반드시 구원해 줄게.’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개인구원을 위한 예레미야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겁니다. 하나의 구조속의 역할을 맡은 거예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선지자 될 이유가 없고 모든 사람이 목사 될 이유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집사 될 이유도 없어요.

현재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 자리를 ‘이것은 내 자리다.’라고 보시면 믿음 없는 겁니다. 내가 현재 하고 있는 그 자리를 둘러보세요. 어떻게? 보이는 내가 보이는 쪽으로 해석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말씀을 거쳐서 여러분 자리를 보시면 그 자리는 당신의 자리가 아니고 바로 말씀이 지정해 준 자리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낙관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긍정입니다. 스트레스 받을 이유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믿음을 거쳐서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구원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엉터리 사도신경 이야기했잖아요. 왜 그걸 해보라고 하느냐하면, 장난삼아서라도 한 번 해보면 진짜 자기가 믿느냐,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여러분은 생달걀하고 삶은 달걀하고 어떻게 구분합니까? 그 차이점은 돌려보면 알아요. 안에 액체가 들어있으면 잘 안돌지만 삶은 달걀은 고체가 되어서 한 덩어리가 되어서 같이 잘 돌지요. 진짜 신자는 엉터리 사도신경을 하면 뻑뻑해서 잘 안돌아가요. 그런데 진짜 사도신경을 해버리면 이게 사도신경이 한 몸이 되어서 팽이처럼 잘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잘 돌아가면 그 사람은 말씀의 세계를 믿는 사람이고 말씀이 오게 되면 자꾸 막고 거부하고 싫어하고 도망치는 식으로 되면 속에 액체가 있어서 생달걀 모양으로 아직까지 말씀이 안 들어왔어요. 말씀과 단단한 고체, 한 덩어리가 안 되었어요.

따로 따로 노는 거예요. 우리의 역할이 왜 중요하냐? 이 역할은 나의 구원을 포함해서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여러분, 구원은 이렇게 받는 겁니다. 구원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라는 것을 주님과 고체가 되어서, 삶은 달걀처럼 되어서 같이 한 덩어리로 돌아가라고 하나님이 각자 여러분의 자리를 지정해 주었습니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더 이상 없어요. 이미 완료된 것이니까, 이미 완성되었으니까. 우리의 어떤 자리든 우리의 그 자리를 말씀의 자리로 귀하게 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눈으로 여러분의 자리를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만 날 나만 생각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잊어버렸습니다. 신학교 가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목사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인 것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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