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3월 10일 조지래드 26 신약신학-제39과 히브리서
부산 3월 10일 조지래드 26 신약신학-제39과 히브리서
이름 : 우리교회(IP:124.59.84.82)
090310 조지래드 신약신학 39과 히브리서
(기존정통신학과의 접촉점이 없는 히브리서)
우리교회(IP:124.♡.84.82)
09-03-10 22:13
우리교회(IP:220.♡.176.150)
09-03-2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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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220.♡.176.150)
09-03-22 10:37
부산090310a조지래드26신약신학-히브리서a
20090310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히브리서
(강의:이근호 목사)
히브리서를 대하는 사람은, 신학자든, 일반목사든, 교인이든 정신을 못 차립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일관성이 있고, 베드로의 편지에는 일관성이 있는데 히브리서에는 일관성이 하나도 없어요. ‘누가 썼느냐’ 하는 그것도 하나의 논쟁거리가 될 정도로 대하는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그 힘들게 하는 요소를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내용들 어떤 것들이 산재돼있는가? 흩어져있는가를 보자. 첫 번째는 1장에 보면, 예수님은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 뛰어나다, 모든 것보다 월등하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고생 많이 했다. 되게 고생했다.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안식의 때가 아직 남아있다. 안식의 때가 미완성이다.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세상은 그림자요 모형이다. 또 뭐가 있느냐 하면, 옛날에 구약의 제사장들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 그냥 자기 죄만 지은 거예요. 제사 실컷 드리고 자기 부족을 드러내고. 구약 제사장은 한 게 없다. 실적이 없다, 업적이 없다.
또 뭐가 있느냐 하면, 7장에 들어가면, 멜기세덱의 그러한 족보는 따로 있다. 일곱 번째 보면 또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제사가 되어 율법을 폐기한다. 율법폐기설. 여덟 번째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된다. ‘믿고 사느냐’라고 묻고 있죠. 아홉 번째 보면, 하나님은 되게 무섭다. 무서운 이유가 새 언약 때문에 굉장히 무서운, 새 언약을 모독한 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 열 번째 보면, 세상 사람처럼 살지 말라.
이렇게 돼있으니까 소위 래드를 포함해서 모든 학자들이나 목사들이 도대체 어느 걸 초점을 잡을지 알 수가 없어요. 히브리서는 기존에 나온 신학에 의해서 접촉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접촉을 허락지 않는데 지금 래드는 히브리서는 쓰면서 접촉을 시도하는데 어떤 신학으로 접근했느냐 하면,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정통신학 가지고 접근한 거죠. 오다보니까 ‘신천지는 정통기독교가 아닙니다’ 돼있거든요. 정통기독교가 아닌 건 맞는데 정통기독교가 구원받습니까? 마찬가지에요. 정통기독교가 구원 못 받거든요.
래드는 정통기독교하고 히브리서를 손대려고 하는 거예요. 정통기독교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가지고 신성에 해당 부분은 신성으로 처리하고, 인성의 해당 부분은 인성으로 처리해서 예수님을 설명하려고 해요. 인성과 신성 부분으로 설명하려고 하니까 앞에 중간에 말고 이 뒤에 있는 것 있잖아요. ‘안식’ 이 대목하고 뒤에 ‘세상 사람처럼 살지 마’ 이런 대목이 예수님하고 상관되는 게 아니에요. ‘성도가 이렇게 살아라’ 그 문젠 예수님과 아무 관계없거든요.
그래서 히브리서는 보는 모든 목사나, 교인이나, 신학자라 할지라도 히브리서를 당황스럽게 만들어요. 히브리서를 시작했으면 끝까지 일관성 있게 자기 노력을 펼치도록 히브리서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히브리서가 전혀 안 도와줘요. 그렇다고 해서 히브리서를 일관성 없이 그냥 중구난방으로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안식의 때가 남아있으니까 열심히 해봅시다.’ 이래 돼버리면 뭐가 없어져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서 나오는 가치가 여기선 결합이 안 되지요. ‘여러분 안식의 때가 남아있으니까 자칫하면 못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이래 나와 버리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누구 문제로 돌아오죠? 본인 문제로 돌아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인성을 다루는데 예수님의 인성을 예수님의 신성과 다뤄버리면 어떤 모순, 잘못에 빠지느냐 하면, 예수님 혼자 잘났지요. 그럼 누가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자기 혼자 구원받는 거예요. 지금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하신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구원에 어떤 보탬이 되느냐? 우리가 지금 고리가 궁금한 거예요. 궁금하기도 하고 내심 원하기도 하고.
예수님 훌륭한 것 다 아니까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아야 되겠는데 구원받을 때 부족한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다리가 놓여있어서 어떤 파이프가 있어서 예수님이 어떻게 흘러 들어와서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여기에 관심 있다 이 말 아닙니까. 모든 교인들 다 관심 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 하지요. ‘예수님 덕 좀 봅시다.’ 아닙니까. ‘나 부족한 게 있을 테니까 예수님 덕 보고 같이 삽시다.’ 이것 아닙니까.
‘같이 삽시다’ 할 때 예수님 홀로 잘나면 안 되잖아요. 예수님 훌륭하십니다. 그럼 예수님 본인 구원받지요. 예수님께서 비록 하나님 아들이시지만 말할 수 없는 탄식과 통곡을 하면서 이 땅에서 환난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아뢰야 할 것을 아뢰었다. 따라서 너희들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는 분임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생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예수님 덕 볼 생각하지 말고 너도 예수님 본받아서 열심히 해줘야 네가 안식의 때에 탈락자가 아니라 안식의 때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줘야 뭔가 논리가 부드럽지 않습니까? 무엇이 이익이냐를 떠나 히브리서 자체를 부드럽게 나가야 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스스로 어려움과 고난의 길을 갔는데 만약에 우리가 따라 붙다 힘이 부쳐서 예수님처럼 바르게 못 살면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되긴 히브리서는 간단하죠. 못 가죠. 못 들어간다 이 말이죠.
그러면 히브리서 자체는 우리한테 어떤 덕 좀 볼게 없지요. ‘욕봐라’ 그거지. 욕보기 싫은 사람들은 결국 탈락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안 되잖아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으로 접근할 때 예수님께서 새 언약으로 모든 율법을 폐하시고 모든 제사장이 하는 부실한 제사, 해도 소용없는 제사를 대신해서 염소나 양으로 하지 않고 예수님 자기 몸으로 했다.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대목이라 볼 수 있거든요. 예수님의 신성이 아무리 율법을 폐기하고 해도 실제로 우리한테 덕이 안 된다면 예수님 혼자 잘난 분이 되잖아요. 고생했는데 고생한 효과가 없다 이 말이죠.
현대물리학이라든지 기후, 기상에 보면 ‘나비효과’란 게 있죠. 제일 시발점의 작은 차이가 끝에 가서 엄청난 파국을 낳는다는. 예상 못한 돌발적인 파국을 낳는 거예요. 상하이에서 나비의 날개 짓이 뉴욕에서는 폭풍우가 되서 쏟아지게 돼있어요. 그 과정을 살피려면 슈퍼컴퓨터 백 대를 동원해도 풀지를 못해요. 모든 변수를 다 설명하려면.
우리가 설명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설명 안 된다고 해서 비현실입니까? 지금 과학자들이 뭘 답답해하느냐 하면, 모든 과학은 설명이 되잖아요. 설명이 될 때 과학으로써 ‘우리는 과학한다’ 자부심이 있는데. 그러니까 현실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람이 납득이 되도록 사람이 설명할 때는 현실이 안 무섭지요. 왜? 내가 예상하고 설명된 현실이기 때문에 현실은 내 손 안에 있잖아요.
지금 사람들이 교회 올 때 하나님을 누구 손에 잡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하는 일을 모든 걸 자기 손에 잡아야 안심이 되는 거예요. 이걸 그들은 믿음이라 보는 거예요. ‘나 다 알았다.’ 그런데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손에 잡히지 않는 예수가 돼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를 계속해서 믿어야 되잖아요. 제 말 의미 아시겠습니까?
지금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 교회 오는 사람들이 교회를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 천당 가는 학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학원은 3개월 단위, 6개월 단위 이러면 좋지요. 학원을 20년 다니라 하면 누가 등록합니까? 지금 교인들이 교회 이, 삼 개월 다니고 천당 가는 비법 알아서 그 다음부터 교회 안 나올 생각하는 거예요. ‘다 뗐다.’ 다 떼고 싶은 거예요.
목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사람은 아담의 본성상 누구의 굴레에 그대로 있는 한 자유라는 것을 만끽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자유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주가 돼야 되지 누구를 주로 계속 묶여 산다는 것, 참을 수 없습니다. 봄 돼보세요. 아가씨들이 두꺼운 외투부터 벗어버리잖아요. 약간만 날씨 풀렸다 싶으면 다리 다 내놓지요. 그동안 자기 미모를 감추려고 얼마나 마음 고생했습니까? 세상처럼 활짝 누구 보라는 게 아니고 자기만족이니까. 그냥 다리 내놓고 빨리 봄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다 이 말이죠.
교회라 하는 것을 하도 학원들이 많으니까 중장비학원, 심지어 때밀이학원. 영어학원은 말할 것도 없이 옛날부터 생긴 거고. 컨닝하면 컨닝학원까지 생긴다니까. 모든 것이 배우면 다 내 것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 가는 것도 교회라는 이름의 학원에 한 6개월 다녀서 배워놓으면 교회 안 나오면 뭐가 좋으냐 하면, 헌금을 안 줄 수 있어요. 헌금 모아서 넓은 아파트 이사갈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니까.
옛날의 목사들은 어떻게 가르쳤느냐 하면, 초창기의 기독교는 교회 안 나오는 순간부터 지옥 가는 거예요. 교회 밖은 지옥, 교회 안은 천국입니다. 그런데 그 구라가 몇 십 년 전부터 안 먹혔어요. 순복음교회 등장해서 정통기독교 안 해도 순복음교단 하나 해도 충분히 구원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고부터는 모조리 정통을 다 뛰쳐나가서 교단 하나씩 만들었잖아요. 우리교회도 필요해서.
그러니까 뛰어나가는 버릇이 있을 때 교회 자체도 분리가 된다면 교회로부터 나를 분리해도 된다. 다만 뭔 알아야 된다? 천국 가는 비법 하나 배워서 그 다음부터는 교회 간섭, 노회 간섭부터 모든 간섭들을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느끼는데, 그 자유를 느낄 때는 반드시 손에 뭘 쥐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신다는 그걸 일단 손에 쥘 수 있을 때 우리는 교회 안 나와도 괜찮고 헌금, 봉사, 예배 참석 전혀 안 해도 내 마음에 가책이 안 느낄 정도가 되면, 이것은 ‘하나님마저 내 손안에 있소이다’ 하는 자기 자유를 얻은 게 되겠지요.
그런데 고객들이 그걸 원할 때 복음을 아는 목사든, 모르는 목사든 히브리서를 피해갈 수밖에 없어요. 왜? 히브리서는 아직 안식의 때가 남아있다. 그리고 예수님, 예수님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가만 들어보니 예수님은 혼자 잘났고, 그 다음에 나머지 몫은 누구한테 달렸다? 자기가 행동 똑바로 못하면 자기 혼자 탈락되니까. 히브리서 뒤에 나오죠.
봐도, 봐도 보기 싫은 대목이 나와요. 13장.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몇 푼이 있든 ‘아이고,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래 생각하라 이 말 아닙니까.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그러니까 ‘심판을 받으리라’ 한 이것은 앞뒤 다 해당되겠지요. 그러면 앞에서 예수님 훌륭하다, 예수님 좋다, 예수님 아주 뛰어나다, 특별하다 그게 우리한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린 예수님마저 손에 쥐고 싶은데. 예수님 훌륭하면 혼자 훌륭하고, 혼자 구원받을 거고. 닭 좇던 개처럼 내가 한때 알았던 예수 훌륭한데. 물론 예수님은 훌륭한데, 삼촌은 훌륭한데 조카는 개판이다 이 말이죠. 어쩌란 말이에요? 안 되잖아요.
그리고 믿음 없으면 뭐에 못 들어간다? 그것도 대목 봅시다. 힘든 거지만 억지로 참고 봅시다. 히브리서 4장 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화합지 아니하면 안식에 못 들어가지.
여기 시편 95편 11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학원 다녔는데 3개월짜리 끊었는데 선생님은 훌륭해. 왜? 예수님이 선생님이니까. 수강생, 학생은 안식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자동차 운전학원에서 만약에 돈 몇 백만 원 내놓고 한 번, 두 번 떨어졌다 해서 그 다음부터 학원 나오지 말라고 하면 그 학원 등록하겠습니까? 보통 학원 어떻게 해요? 될 때까지 하지요. 결혼중매회사도 수십 번 만나게 해주는 대가로 돈 수십 만 원 주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교회를 천당 가는 학원이라고 예행 삼아했는데 이게 천국 갈 보장을 못해주면 100% 합격보장 안 해주면 그 교회 등록할 맛이 납니까? 안 나잖아요. 그리고 그 학원에서 제시하는 천국의 요건이 그냥 교회 안 와도 알 수 있는 그런 요건이라면 그 학원 뭐 하러 다닙니까? 집에서 착하게 살지, 뭐.
그래서 제가 방금 이야기한 걸 한 마디로 해서 이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주체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전에 이야기했는데 다시 한번 할게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죠. 민주주의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근대국가개념입니다. 이걸 참고하라고 최근에 [제국의 시대]란 글 남겼잖아요. 세상에 근대국가라 하는 것은 조선시대, 고려시대 이런 것 없었어요. 왕 자기 나라에요. 근대국가라니까요. 근대국가는 민주주의니까 여기는 주체의식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주일 아침에 했지요. 강도의 소굴의 특징 중 하나가 한 사람만 강도되면 강도의 소굴이 아니에요. 모조리 다 되어야 그 안에 의사소통이 된다고. 이게 이야기하고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몰라요. 교회가 이단이라면 목사들만 이단 아닙니다. 전부다 이단이에요. 강도의 소굴은 같이 의사소통이 된다면 다 이단이에요.
주체의식이 뭐냐 하면, 크게 쓰겠어요. [간섭하지 말라]입니다. 이걸 초등학교 애들이 배우잖아요. 집에 가서 엄마한테 잔소리 듣겠습니까, 안 듣겠습니까? 이미 공교육 자체가 주체의식을 안 가르쳐주면 애가 나중에 대한민국 근대국가의 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애들 자립하기 위해서는 강한 주체의식을 키워주는데 이 주체의식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간섭하지 말라’입니다.
‘간섭하지 말라’에 대해서 교회가 이런 고객들이 가득 차 있는 교회에서 어딜 감히 간섭을 해요. 듣는 척하고 있지요. 하지만 애들은 ‘웃기고 있네. 내 운명은 내가 한다’ 안 듣습니다. 그럼 뭐만 골라 듣느냐? 3개월짜리 끊고, 6개월짜리 끊고 그 다음부터 드문드문 교회 나와도 구원되는데 가장 지장되지 않는 요소만 목사 입에서 뽑아낸다니까요.
‘목사님은 자기 교회에서 할 걸 여기 와서 분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러고 있는데 이거는 네 교회, 내 교회 할 것도 없어요. 추세가 그래요. 분위기가. 그래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좋다 이 말입니다. 뭐는 싫다? 히브리서는 싫은 거예요.
그런데 또 목사가 뭡니까? 그런 사람을 달래주기 위해서 히브리서를 로마서 식으로, 갈라디아 식으로 바꿔줘야 돼요. ‘아무것도 안 해도 천당갑니다’라고 바꿔주려고 하니 히브리서가 탁탁 받히거든요. 받히니까 히브리서 강해가 중구난방이 돼버렸어. 어느 걸 잡을 줄 모르겠어. 앞부분에 신성, 인성 할 때 참 잘 나갔어요.
뒷부분에 13장하고, 안식의 때 못 들어간다 할 때는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4장 들어가면서 삐져있는데. 특히 6장은 뭡니까? 한번 성령을 받고 버림받은 자는 두 번 다시 못한다. 만약에 주일 오전이 아니고 주일 오후나 수요일 한다면 안 나올 가능성이 있어요. 무서워서 못 듣겠다고.
히브리서 핵심이 없는 게 아니고 있습니다. 있는데 신학자들이나 일반목사들이나, 교인들이 구원받으려고 하니까 그 핵심이 안 보이는 거예요. 래드도 중구난방이라. 도대체 뭘 하나 잡아서 푸는 지를 본인이 열심히 써놨는데 ‘기독론’하다가 ‘대제사장’ 열심히 해놨어요. 이원론이 어떻고 나옵니다. 보면 다 맞는 것 같지요. 뭔데, 어쩌라고? 너희들이 이해하라. 난 모르겠다 한 거예요.
제가 히브리서 핵심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해석은 반드시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을 집어넣어서 해석을 해줘야 돼요. 설교할 때나 성경 해석할 때는. 현대 인간들이 뭘 원하고 있는지를. 제가 괜히 철학 쓰는 게 아닙니다. 철학하면 고상한 사람들이 이야기인 줄 압니까? 보세요. 전부다 오늘날 우리 살아가는 이야기의 바탕이에요.
크게 쓰겠습니다. 좋은 소리하는 것 다 들을 테니까 [간섭하지 말라]. 시장에 액세서리 파는 상인이 아가씨한테 액세서리 천 원 주고, 만 원 주고 파는 건 좋아요. 하지만 그 상인이 ‘어이, 담배피지 마라’고 간섭하면 오겠습니까? 안 오지요. 파는 건 좋은데 간섭하진 말라. 이게 현대구조 아닙니까. 당신이 목사니까 당신 아는 것 돈 몇 푼 받고 우리한테 팔아먹어라. 하지만 뭐는 하지 말라? 간섭하지 말라.
히브리서의 핵심은 이거에요. 크게 쓸게요. [하나님은 무섭다.] 하나 앞에 더 쓸까요? ‘되게 무섭다.’ 이게 어디 나오는가 히브리서 11장 봅시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두 군데 나옵니다. 10장 28절, 29절 읽어볼게요.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말이 재미있죠. ‘모세의 법을 폐한 자’ 히브리서에 뭐랍니까? 새 것이 있으니 옛 것을 폐하겠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가 무섭잖아요. 그런데 누가 폐했어요? 하나님이 모세의 법을 폐해버렸지요. 그러면 우리는 시시하게 보잔 말입니까, 더 무서워해야 된다 말입니까? 무서운 모세의 법을 폐한 그분이 얼마나 더 무섭겠느냐 그 이야기에요. 무서움에서 무서움으로 나가는 게 히브리서의 핵심이에요. 이걸 진짜 겁대가리 없이 간섭하지 말라는 식으로 함부로 히브리서를 봐요. 누가 함부로 히브리서를 봅니까?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얼마나 무서운지 히브리서 12장 봅시다. 12장 18절. “너희가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푹풍과 나팔 소리” 그냥 구름이 아니고 시커먼 구름이죠. 갑자기 낮에 시커먼 구름이 해 가려보세요. 기분 더럽습니다. 음침합니다.
그럴 때 짐승도 돌로, 짐승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짐승도 짱돌 맞고. 산도. 산이 무슨 의지가 있고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겠어요. 산도 무서워 떤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다 보고 뭐라 했습니까? ‘잠잠해’ 하니까 까불다가 벌벌 떨어서 잠잠해버렸죠. 산도 벌벌 떠는 거예요. 심히 두려운 거예요. 사람들 생각하기를 이걸 폐한다 하니까 하나님이 무서움을 포기한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무서움에 플러스 무서움.
여기 26절에 보면,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래서 28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사람이 되게 무서우면 어느 정도냐 하면, 자기 아이 사법고시 합격된 것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자기 땅 사놓은 것 백 배 오른 것도 귀에 안 들어오고, 로또 일 등 당첨 돼도 그거 당첨금 안 들어옵니다. 어느 정도로 공포스러워야 되고 어느 정도로 무서워야 되느냐 하면, 자기 방에 가서 오만 웃긴 것도 아무것도 아닌 거야 되고, 버스 내리다가 다리 골절 당해서 일주일 입원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어야 돼요. 얼굴이 새파랗게 갈 정도로 되게 무서워야 돼요.
3개월짜리 끊어 놨다, 6개월만 교회 다니고 그 다음부터 알아서 다닐게. 이런 생각 할 수가 없어요. 교회란 곳이 안 흔들리니까. 진동을 안 하고 바이브레이션 안 일어나고 있으니까. 노숙자가 점심 먹으러 들어오고 돈 줄까 싶어서 ‘한 푼 주세요’ 하고 돌아다니고. 그야말로 강도의 소굴처럼. 하나님 이름으로 생계형 사람들 찾아오듯이 그런 식으로 교회가 들썩들썩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하나님을 본 사람은 ‘화로다 나는 망해야 되겠구나.’ 그러면 대비해보시기 바랍니다. ‘간섭하지 말라.’ 이건 어릴 때부터 배웠던 거죠. 자립심.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두 개의 나라. 여기서 래드가 이야기하는 ‘이원론 나라’라 하는 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이야기해요. 히브리서에 이원론 하는 것은 나라가 두 개 나라 됐어요. 하나는 되게 무서운, 나를 망하게 하는 나라 따로 있고, 이게 안식이고. 그 다음에 간섭하지 말라고 버티는 나라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뭐냐? 이쪽 나라, 되게 무서운 나라가 자기밖에 모르는 이 나라를 집어삼켜서 나중에 폭파시키는 그 흐름이 히브리서 흐름입니다. 그게 우월한 거예요. 그래서 월등한 거예요. 예수님이.
그래서 간섭하지 말라는 인간세상에서 구원받겠다는 그것도 여기 망해야 되는 나라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겁니다. 옛날 구약 제사장들 제사 드리면서 무슨 생각했겠습니까? ‘하나님 이 제물 받으시고 우리 백성들 용서하소서’ 이렇게 했겠지요. 막상 제사 드리는 본인은, ‘아, 정말 제사 드린다고 들어갈 나라가 아니구나’ 알지요. 그것도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성령 받게 되면 말이죠. 본인은 제사 드리면서 ‘정말 되게 무섭다.’ 얼마나 무서우냐? 이 제사, 이 소, 염소, 양 이것 바쳐도 안 될 정도로, 못 들어갈 정도로 되게 무서운 분이 하나님이에요.
제사장이 그런 생각이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헌금 드리고, 봉사하고, 예배 참석한다고 이것 가지고 도저히 못 들어가고. 아까 음행 안 하고, 천사 대접하고, 있는 돈을 족한 줄 여긴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나는 저 나라에 못 들어가요.
그래서 만약에 저 나라에 내가 소속돼있다면 까짓것 천사 대접하고, 음행 안 하고, 있는 것 족한 줄 알고 얼마든지 해줄 용의가 생기죠. 특히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뭐가 나옵니까? 톱에 잘리죠. 광야에 유리하죠. 모세 같은 사람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고난 받기로 했죠. 그것 억지로 했겠습니까? 너무나 무서운 걸 안다면 광야에 유리하고, 톱 켜는 것, 전기톱으로 잘라도 자기 몸을 맡길 거예요. 그 나라 생각한다면. 히브리서 전체가 이런 내용입니다.
이원론은 맞는데 그 이원론이 잠재적 이원론이고 한쪽이 한쪽을 잡아먹고 있죠. 이원론과 일원론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원론이라 하는 것은 이쪽에서 이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 없다? 없을 때 이원론이에요. 건너가면 일원론 돼버리는 거예요. 서로 소통할 수 있다 이러면 일원론이죠.
이원론이라 하는 것은 이쪽 천국에서 안식일 나라에서 인간세상과 소통이 안 되고 점차 여기서 이걸 폐기처분해버리죠. 히브리서 1장 봅시다. 1장 10절을 보면,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땅과 하늘을 누가 다 만들었다 했어요? 주님께서 만들었는데 11절에 보니까 “그것들은 멸망할 것”
그런데 히브리서를 보면서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한 게 뭐냐? 1장 1절에 나오니까.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왜 세상이 망해야 되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도 손수 지었는데. 자기가 만든 나라를 꾸깃꾸깃 부셔버리느냐? 그것도 예수님을 통해서 왜 부수느냐? 예수님 오심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세상이 망할 수밖에 없는, 반드시 망해야 될 이유가 예수님을 통해서 발각이 되었어요. ‘발각’이란 말이 적당합니다. 발각이란 말은 누가 안 오면 모르는 상태, 누가 일러주지 않으면 모르는 상태에요. 누가 오게 되면 발각이 돼요. 그게 ‘죄’에요.
그래서 히브리서는 구약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구약의 율법에 종사했던 제사장부터 포함해서, 구약에 있는 인간 모두 포함해서, 구약의 하나님까지 포함해서, 땅까지 포함해서, 모세가 들렸던 시내산까지 포함해서 몽땅 죄로 보는 거예요.
그 죄가 무엇의 죄냐 하면, 실제로 있었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모형과 그림자로써 보여줄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가운데서 죄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몽땅 죄에요. 그러면 광야에서 안식에 들어간 사람 있잖아요. 갈렙과 여호수아. 그 사람은 죄 없는 게 아니에요.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도 망해야 될 사람이죠. 하지만 그 사람들 뭘 알았어요? 예수님께서 오시면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미리 알아챈 사람이죠.
어디서 정보를 받았습니까? 그건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보이는 곳에선 정보를 못 받았어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보를 받아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알아서 그 사람은 자꾸 보이는 곳으로부터 자꾸 도망치려 했어요. 왜? 망해야 될 세상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하나님의 유황불이 떨어지면 이것이 무서운 지옥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챈 사람을 ‘믿는 자’라고 합니다.
유황불 떨어지는 공간 속에 교회도 포함되죠. 그래서 히브리서 특징 중에 하나가 교회가 없어요. 왠지 압니까? ‘총회’에요. 그거 어디 있어요? 하늘에 있어요. 이 땅의 교회는 망해야 될 모임이지 그건 교회가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교인입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웃기지 마. 그런 소리 하려면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 몽땅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소리해야 돼.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안식에 들어간 사람 따로 있었고, 중간에 대부분은 망한 사람 있듯이 우리는 광야에서 고생했습니다. 그걸로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믿음의 근거가 땅에 것,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믿음의 근거로 삼는 걸 용납 못하겠다는 겁니다. 반드시 믿음의 근거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찾아라 이 말입니다. 그게 누구냐? 우리보다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보고 ‘나는 이렇게 살다가 이 길로 빠지지롱’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이 빠졌을 때 예수님 쳐다보면 안 되고 예수님이 어떻게 와서 어떻게 살다가 빠졌잖아요. 예수님이 하수구에 빠졌다면 하수구로 가는 길이 있잖아요. 쥐들이 하수구에 빠지면 흔적이 있잖아요. 예수님의 흔적을 통해서 빠진 길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은 예수님의 안식의 나라에 합류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의 믿음이란 뜻은 뭐냐? 소유가 아니고 방향성이죠. 바라보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분명히 자기 고향을 떠나 어디 갔었어요. 자기가 갈 바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갔던 가나안 땅은 무슨 땅이냐 하면, 나를 뭐로 만든다? 나그네로 만들 땅이었습니다. 자기가 가나안 땅에 안 들어오면 하란에 있었으면 나그네가 안 되었지요. 자기가 나그네 인생 살 인간이라는 걸 몰랐었지요.
그러니까 히브리서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뭐냐? 예수 믿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당신은 나그네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나그네란 것은 ‘정처 없음’ 아닙니까. ‘정주성이 없음’ 이러거든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죠. 그럼 뭐가 없다? 소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봅시다. 이것도 교인들에게 이야기하기 곤란한데. 핵심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제일 힘든 게 히브리서 10장 34절입니다. 10장 34절 누가 읽어보세요.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진짜 듣기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산업을 요즘말로 직업 아닙니까.
의사가 우리교회 나왔다. 히브리서를 생각한다면, 자기가 토요일 오후까지 근무하고 왔어요. 그 사람이 교회 예배드리는데 휴대폰 전화 옵니다. ‘의사 선생님, 오늘부로 잘렸습니다’라는 소리를 들을 각오로 왔습니까? 교회 올 때. 히브리서 10장 34절이죠. 교인들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니잖아요. 일단 든든한 직장이 있죠. 교회 좀 늦게 가도 괜찮지만 직장에 늦게 가면 안 되지요. 요새 구조조정 무섭습니다. 조금만 밉성 보이면 큰일 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산업이 있지요. 교회 오는 것은, 내가 하는 산업이 복을 받아서 잘 되어서 이 땅에서 정주되는 생활해야 되지, 떠돌아다니는 떠돌이는 지긋지긋하지요. 떠돌이 여러분 잘 안 해봤습니까? 해본 사람은 노숙자는 말이 노숙자지 지긋지긋하죠.
그런데 직업이 없어보세요. 교회가 밥 먹여줍니까? 교회에서 밥벌이 하는 것 있다. 지난 주일날 아침 설교처럼. 동전, 외환교환해주고 비둘기 팔아먹으면 되겠네.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비둘기파는 상을 엎어버리고 의자도 엎었다 했지요. 그러면 교회도 영 생계수단이 안 되네.
그러면 어떻게 돼요? 본문은 뭡니까? 다시 읽어봅시다.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여겼는데 그 다음에 더 영구한 산업이 있지요. 이건 지향성이죠. 바라보는 것. 이 지향성을 가지고 두 자로 믿음이라 했지요.
지향성 하니까 말이 어려우니까 끈, 노끈 하면 끊어지니까 안 끊어지는 밧줄이 보이는 세계에서 그러니까 천국에서 밧줄이 내려와서 우리 성도를 붙잡아서 우리로 하여금 뭘 확인하게 한다? 내가 도저히 갈 수 없는 나라에 주님께서 어떤 고생을 해서 나를 합류시켜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 구경, 이게 네 자로 ‘롯데월드’죠. 온갖 재미난 놀이기구를 다해서 재미난 것 다 보게 했지요.
며칠 전에는 도쿄돔에서 14:2, 한국팀이 콜드게임으로 깨지는 그런 걸 보게 하고, 또 어제는 뭘 봤습니까? 1:0으로 승리하는 게임을 보잖아요. 하여튼 게임을 봐도 누구하고 관계없다? 나하고도 관계없고 나의 운명하고도 관계없죠. 자칫하면 이런 게 있어요. 야구 졌다고 자살하는 인간들 있어요. 축구 졌다고 자살하는 인간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지향성이 뭡니까? 오직 축구에 있지요.
웃을 일이 아니고, 만약에 이 앞에 있는 하이마트에 자기 돈 이천 만원 투자했는데 하이마트 부도나서 주인 도망갔다? 투자한 사람 자살합니다. 그럼 뭘 지향했습니까? 하이마트란 산업을 지향했지요. 그 지향해서 하나님께 따지려고 교회 왔는데 마침 본문이 히브리서 10장 34절이다. 그 교회 나오겠어요? 그 학원 다니겠습니까? 6개월짜리 끊었는데 3개월하고 안 나오죠. ‘내가 있을 곳이 못 되는구나’ 하고 나가버리죠.
결국 뭐냐? ‘하나님이여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이거는 교인들뿐만 아니고 목사도 매일같이 부르짖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여, 내가 시킨 대로 목사 했는데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이걸 철학적으로 보면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중요한 거니까 적어볼게요. [모든 인간은 자신을 지향한다.] 자신을 겨냥한다. 목사고, 장로고, 집사고. 하이마트 지향한다고 하이마트만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하이마트 말고 다른 업체 돈 벌면 대번 돈 빼서 거기 합니다. 홈플러스 집어넣고 해요.
그러니까 하이마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날 좀 알아줘. 나도 같이 좀 살자.’ 그걸 움직이는 진동, 바이브레이션 일으키는 산 밑에서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지요. 왜? 산은 움직이는 걸 알아요. 자기가 부셔진다는 걸. 무너지고 부셔지는 폐선 같은 배 위에서 같이 멱살 잡고 너만 사나, 나도 산다. 이명박 정부 뭐 하노? 돈 좀 보태줘. 같이 살자. 이거 실제로
히브리서를 접근하기조차 지금 내 가슴이 진동됩니다. 여기에 하나님 쪽에서 양보가 있습니까? 제가 이런 글 썼지요. ‘천국에는 하나님이 양보까지 하면서 천국 넣어줄 마음 없다’고. 왜냐하면 방주가 넓었어도 들어간 사람은 몇 명입니까? 여덟 명이죠. 여덟 명 자리에요“ 크게 지을 때는 수천 명 들어갈 줄 알았지. 폼은 수천 명인데 들어간 사람은 여덟 명입니다. 그것도 말이 여덟 명이지 딴 가정은 없고 자기 집 식구밖에 없어. 무섭습니다. 정말 무서워요.
얼마나 무서운 줄 누가 아느냐 하면, 예수님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기 죽을 때 우니까 돌아보며 뭐라 했습니까? “날 위해 울지 말로 네 딸 위해 울어라” ‘아니고, 앞으로 이 땅에 살 생각하니까 내가 기가 찬다.’ 예수님께서 운 이유가 자기 때문에 우신 게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를 지향하니까 울어도 자기를 위해 울어요.
여기 ‘기뻐하라’가 뭡니까? 지향성, 밧줄 끝에 있는 예수님 보고 기뻐하고, 예수님이 싫어한 것 때문에 울어야 돼요. ‘주여, 제가 예수님 싫어한 것 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울어야 되고. 그리고 남을 위해서 울어야 돼요. 왜? 예수를 모르는 사람 때문에. ‘주여, 저 인간 복음 전해도 기어이 교회 안 나왔어. 미치겠다.’ 가슴이 찢어지는 거예요. 나만 가야 되겠나.
분명히 갈렙과 여호수아 같이 가도 나머지 다 떨어지고 갈렙과 여호수아만 갔는데 같은 동기고 같은 가족이고 식구인데. 세상에 두 사람이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둘이 껴안고 자도 소용없어요. 천사가 떼어버립니다. 한 사람은 올라가고 한 사람은 그냥 버려둔다니까. ‘주님께서 그런 말씀 대충 없는 걸로 치고 넣어주세요.’ 그런 것 안 됩니다. 어딜 흥정해, 어딜 깎아? 자갈치 시장입니까? 뭘 깎아요? 깎을 게 따로 있지 안 깎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님이 양도 안 받고 염소도 안 받고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오직 하나만 받지요. 뭡니까? 그냥 피도 아니고 누구 피? 자기 피.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 피를 받는 거예요. 자기 아들의 피가 자기 아닙니까. 이 말은 뭡니까? 너희들 준 거 안 받는다 이 말 아닙니까. 이걸 추려서 내가 하나님은 헌금 안 받는다 하니까 삐져서 난리치고.
흥분할 게 아니고 10분 쉬고 합시다.
우리교회(IP:220.♡.176.150)
09-03-22 10:38
부산090310b조지래드26신약신학-히브리서b
20090310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히브리서
(강의:이근호 목사)
히브리서 10장 31절 봅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그러니까 하나님 손에 빠져진다는 게 무섭습니다. 지금 자기가 비방 안에 있는 걸 신경 쓸 새 없어요. 하나님이 더 무서우니까.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고.
좀 어렵게 해봅시다. 밧줄이 나오는데 밧줄보다 ‘관’합시다. 천국에서 관이 나오면 파이프가 나오면, 파이프가 뭐가 흘러나오면서 어떤 힘이 나오면서 흘러들어가게 되죠. 흘러나와서 다시 도달된 사람에게 빠져 들어가는 것을 관과 연결된 천국에서 보는 시선,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 이걸 둘 다를 히브리서는 이야기하기 때문에 히브리서는 그 자체가 역사적이 아니고 묵시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애네들은 이걸 가지고 공간적 이원론이라고 하잖아요. 히브리서 여기서 래드가 말하기를 다른 서신은 전부다 시간적인 것인데, 시간적일 때는 이게 없이 한 개인만 있죠. 개인이라 하는 것은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끌려간다 이래 되잖아요. 시간은 그렇잖아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흘러가잖아요.
그런데 묵시는 어떻게 된다? 미래에서 와서 데려가는 식으로. 우리 성도가 그걸 느껴야 돼요. 주께서 나를 데려간다는 걸 느껴야 돼요. 죽을 때도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누가 와서 데려가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죠. 거지 나사로가 천국 못 갑니다. 아주 좋은 말이죠. 왜? 천사가 와서 데려가죠. 데려가는 식으로.
뭔가 나를 끌고 가는 용역업체직원, 보디가드처럼 뭔가 천국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이지만, 나를 데려가는 식으로 하다보니까 사람들의 비방거리가 되고, 놀림감이 되고, 내가 고이 가꾸어놓은 그동안 산업은 빼앗기고, 축적되고 누적된 나의 의로움도 다 없어지고. 그러니까 역사적 예수는 자칫하면 자신의 의를 쌓으면 그 의로 구원받는다, 이래 되겠는데 묵시는 데려가기 때문에 나의 선행, 이것을 필요 없고 데려가는 자체가 의로운 행동으로 보이는 겁니다. 참 어렵지요.
성경에 보면 ‘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절 많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끝에 나오지요. “그 사람 행한 대로 갚으리라” 이게 1번 시선이 아니고, 2번 시선으로 보니까 그 사람 고난 받는 것도 뭐로 보입니까? 그 사람의 행함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럼 행함으로 보이는 것을 일 번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있지요. 요한복음 3장 21절. 누가 읽어보세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보세요. 우리 행함이 아니고 먼저 우리 외곽에 빛이 나타나서 강력한 빛의 힘으로 끌고 가면 우리는 어떤 행함이 나타나는데, 그 행함은 나의 행함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을 어떻게 한다? 바깥으로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나타나게’ 드러내게 함이라. 뭘 증거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나 착하다가 아니라 ‘빛에서 나온 행위입니다’라는 것을 증거하니까 기존의 2번 시선에 있는 사람들은 누가 행해야 돼요? 자기가 자기 의지와 오기로 행하는 사람과 어떻게 돼요? 충돌이 일어나겠죠. 그러니까 비방하잖아요.
이 바깥에 1번 시선으로 왔을 때 내려왔을 때 이 내려오는 과정과 들어가는 과정에서 감사하게도 우리한테 맡기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우리한테 맡기면 제가 아까 히브리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히브리서 백날 봐도 지옥 갑니다. 근데 감사하게도 여기 뭐가 왔느냐 하면, 율법이 와요. 율법을 히브리서에서는 이걸 ‘옛 것’이라고 하죠.
옛 것이 우리한테 꽂히지요. 우리한테 꽂히면 우리는 실체가 되는 게 아니고 모형이 되고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내가 왜 그림자냐?’ 옛 것, 율법이 꽂혔으니까. 율법자체가 폐기될 거거든요. 폐기될 그것이 꽂히면 그것은 무조건 모형이고 그림자에요.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라 하는 것은 모세오경만 아니고 시편부터 해서 예레미야까지 합해서 전부다 이걸 율법이라 하고 모형과 그림자로 간주합니다.
특히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선지자 한 분 등장하죠. 히브리서에서 유일하게 구약 선지자 등장하는 게 이 부분인데 이게 누구냐 하면, 예레미야가 오죠. 예레미야 31장, 새 언약부분. 그게 인용돼있죠. 인용을 하면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구약 전체를 옛 것으로 봤잖아요. 그러면 옛 것에 접촉 받은 모든 것은 모형과 그림자죠.
율법이 우리한테 꽂히면 우리는 모형과 그림자가 된다. 그러면 꽂힌 율법을 누가 뽑아요? ‘새 것’이 와서 뽑잖아요. 새 것이 와서 뽑을 때마다 뭐가 튀어나옵니까? 죄가 나오지요. 왜냐? 제사장은 율법을 행했고 그림자니까. 죄가 나오죠. 그래서 죄가 나올 때마다 제사장은 모든 제사하는 것도 제물 바치는 것도 다 죄가 나오는데,
죄가 나오면서 뽑을 때 뭐가 나와요? ‘피’가 나오죠. 그래서 “피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 ‘사함’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뭐가 있을 때만 사함입니까? 죄가 있을 때만 용서가 있죠. 죄 없는데 용서가 필요 없잖아요. 죄 있다. 그 다음에 새 것이 와서 뽑아보니까 거기서 뭐가 쏟아진다? 피가 쏟아지면서 동시에 뭐가 쏟아져요? 우리의 감추어진 죄가 쏟아지면서 새 것이 있으니까 그 새 것 되시는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히브리서 10장에 보니까 모든 제사의 제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한 몸을 예비했다. 시편에 나오는 인용인데. 그 몸 자체가 새 것이죠. 그 몸 자체가 뽑아가면서 가신 길이 있어요. 그 가신 길을 가면서 먼저 뽑혔던 가신 길을 어떻게 하겠는가?
방금 이야기한 논리는 설명되겠죠. 꽂히고 뽑아낼 때 퐁퐁퐁 하면서 죄 쏟아지고 그 다음에 같이 뽑히면서 피 쏟아져서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것은, 율법 안에는 피가 들어있어서, 난 피가 들어있는 줄 모르고 내 행함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율법을 행함으로 지키겠다 하는 그게 죄가 되고, 실제로 율법을 뽑아보면 피가 나와서, 내가 율법을 오해한 그 죄를 피가 용서함으로써 하는데 그 작업을 새 것 되시는 분이 하신다. 새 것이 누굽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가신 거꾸로 돌아가는 길에 수많은 선배들이 징검다리를 놨죠. 그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에 제일 처음 나온 사람이 누굽니까? 에녹 나오죠. 에녹 나오고, 노아 나오고, 아브라함 나오고 그들은 나그네였고, 그 다음에 이삭 나오고, 야곱, 모세, 각종 사사들, 그리고 선지자들 쭉 나오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모형이요 그림자요 하나의 파편이죠. 모자이크 퍼즐의 한 조각으로 거기에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그 조각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래서 ‘난 조각이다’ 이러면 안 되고, 우리는 역시 뽑혀야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 4장 12절. 지금 제가 뭘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하면, ‘아까 첫째 시간에 목사님, 믿음이 없으면 안식에 못 들어간다 했는데 우리한테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지 걱정됩니다’ 3개월짜리 끊고 교회 그만 하려고 하는데 믿음 없으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하는데 여기 12절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부산지하철에 가면 ‘마음속에 칼을 빼라’하는 게 있어요. 광고에. 칼 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내가 만든 칼 말고, 남을 죽이는 칼 말고, 나를 죽이는 칼이 있어야 돼요. 그 칼을 두 자로 이야기하면 ‘말씀’입니다. 세상에 말씀을 무디게 하면 안 됩니다. 말씀은 날카로울수록 나한테 덜 고통스러워요. 단칼에 자를 수 있으니까. 망나니가 사람 죽일 때 칼 안 갈아놓으면 진짜 그 죄인은 죽을 지경입니다. 죽이려면 빨리 죽이지.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인생이란 자체가 악마란 망나니가 있어서 평생 단칼에 안 죽이고 구십 동안 끌며 죽입니다. 그 망나니 중에 마누라요, 자식이요, 목사요, 교인들이요, 이웃집 아저씨입니다. 단칼에 죽이는 게 아니고 야금야금 죽이지요. ‘컴퓨터 그만하세요. 아침 일찍 일어나세요. 밥 제때 먹으세요. 발 끌지 마세요. 약 챙겨 먹으세요. 옷차림, 넥타이 단정히 하세요. 와이셔츠 갈아입으세요. 빨 것 내놓으세요. 화장실에 물 제대로 내렸어요? 손 씻으세요.’
잔소리가 끊임없이 하는데 특징이 뭐냐 하면, 백 개 잔소리 들어놓고 한 개 하려 할라치면 거기서 화냅니다. 이상하게 손해 본 기분이야. 왜 잔소리하느냐 하지만 난 잔소리할 것 없거든. 당신은 잔소리 들을 게 많지만 난 잔소리 들을 게 없거든. 모든 인간은 누굴 지향한다? 자기 자신.
어쨌든 인생이라 하는 것이 소위 정 때문에, 우정이나 사랑, 의리 때문에 야금야금 피를 말리면서 우린 삽니다. 누가 그렇게 해요? 내가 그렇게 해요. 내가 안 죽으려고. 기어이 죽을 거면서 안 죽으려고 버티는 거 있잖아요. 참 고맙게도 복음이 있어서 그런 나를 ‘에이 죽어라’ 하고 단칼에 베어버리잖아요. 골수를 쪼개면서.
골수를 보통 쪼개면 전치 8주 나옵니다. 그렇다면 해봅시다. 혼도 영도 관절 다 쪼개면 이거는 전체가 다 망가집니다. ‘주여, 이 손으로 고아를 돌봤습니다.’ 고아 골수 다 찢어버려요. ‘네가 제대로 했어. 너만 지향했잖아.’ 하고 내가 한 오른 손 착한 손 다 잘라버려요. 물에 불은 조기 찢듯이 찢어줄 때 ‘나 없다. 내 자체가 이미 죽었다’ 하고 날려버릴 때
그래서 모든 말씀은 뽑는 거예요. 어느 구석 죄 아닌 구석 없잖아요. 진흙탕 밟을 때 어느 곳도 진흙탕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인생 자체가 죄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으로 뽑아놓고 그걸 빼면서 그냥 빼는 게 아니고 호리면서 뽑아버리죠. 뽑는 쪽으로 우리는 끌려가야 돼요. 마음이. 누가 뽑느냐? 누가 뽑아서 피를 내느냐? 그게 바로 히브리서에서 제사제도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그 제사의 주체를 땅에서 찾지 않아요. 땅은 멸망해야 되기 때문에. 멸망하지 않는 주체가 있느냐? 세상에 모든 인간은 멸망하게 돼있는데 멸망하는 주체가 없다고 보통 알고 있는데 있다는 겁니다. 어디 있느냐? 그게 히브리서 7장에 의하면 멜기세덱 이야기에요. 그래야 뚫립니다. 뚫리게 돼있어요.
1장에 주는 이미 하늘에 승천하신 주님이에요. 지상에 남아있지 않아요. 이런 것도 어려워요. 주님께서 올라가 있어요. 지금 천사한테 영광을 받고 있어요. 1장에 나오지요. 여러분 다 안다 하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주님은 좋겠다. 지 혼자 믿음 좋아서 천당 갔으니까.’ 그러면 우리하고 어떻게 돼요? 상관없잖아요. 강사 선생님 머리 좋은 것 하고 지 머리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덕을 봐야 하는데 혼자 영광 받아. 천사들한테 받들어 올라가서. 지상에 있는 우리는 상 없다 이 말이죠.
여기서 내려오는 있습니다. 지상에 내려올 때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제 그림을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도 어려워서. 여기 땅과 하늘 사이에 얇은 모조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모조지가 있으면 그림자는 보이고 실체는 안 보이는 곳, 상상되십니까? 여기에 누가 살고 있느냐 하면, 멜기세덱. 멜기세덱의 족보가 있어요.
족보가 뭡니까?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져있지요. 보통 족보는 아버지가 아들 낳고, 아들이 또 아들 낳고 이렇게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족보가 있어요. 그 족보가 무슨 족보입니까? 멜기세덱 족보지요. 그런데 그 족보에 속한 사람은 절대로 이 모조지 바깥으로 해서 땅으로 내려오진 않아요. 하나의 그림자로 보인다 말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하늘의 그림자지만 하늘에서 보면 이쪽이 뭡니까? 이쪽의 그림자가 보이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 모조지하고 멜기세덱하고 연결했던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입니다. 이 모조지 앞에서 멜기세덱한테 아브라함이 뭘 받았습니까? 복을 받았지요. 이런 해석은 구약 전체 해석의 히브리서만의 독특한 해석이에요.
사람이 직접 만나서 대화 되는데 대화도 없이 만나서 복을 받았거든요. 왜냐하면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동거한 사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님?’ ‘왜?’ ‘이제 같이 제사장 합시다.’ ‘그래.’ 이게 아니고 잠시 만났다가 복만 주고 가버렸어요. 그렇다면 이 멜기세덱 반열에 속한 인물들, A, B, C, D, E 나오는 이 모조지 바깥에 그림자로 보이는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내려오는 사다리처럼, 헬리콥터에서 내려오는 사다리가 바람에 덜렁덜렁거리죠. 이게 아브라함부터 덜렁덜렁 내려오는 거예요.
오늘 강의 중요한 대목입니다. 내려오면서 이 사다리가 땅의 세계의 숱한 족보들을 만나면서 발로 차면서 멜기세덱 족보에 해당되는 사람만 골라서 연결, 연결 되는 그런 새로운 족보가 여기서 전개돼요. 그걸 유다 족보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에서. 그러니까 히브리서에서 뭐라 합니까? 이 말은 어렵도다. 어떻게 젖을 먹는 아이들이 알 수가 있느냐? 어렵도다.
다시 할게요. 왜 이러한 그림을 그리고 하느냐 하면, 아까 했잖아요. [하나님은 무섭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 안 무섭지요. 세상에선 누구 중심이다? 내 중심이니까 ‘간섭하지 말라’ 내 중심이잖아요. 전혀 하나님이 안 무서워요. 안 무서운 세계에서 무서운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면서 구원될 자를 구원시키는 방법에서 발로 차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계속 차다보니까 무슨 이야기도 나오느냐 하면, ‘믿음이 없는 자는 안식에 못 들어간다’는 미완성, 그 다음에 ‘한 번 성령을 받고도 탈락한 자는 잘린다’는 그 미완성,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그 무서움, ‘네가 네 산업과 직업 때문에 교회 못 나온다’ 그럼 잘린 자, ‘톱 켜는 게 무섭다고 도망쳤다고? 그럼 넌 믿음 없는 자’ 자꾸 잘라내는 이유가 뭘 강조하기 위함입니까? 멜기세덱의 반열에 속한 사람만 고를 수밖에 없다는 걸 강조하는 거예요.
그럼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적인 힘으로 이 사다리에 올라탈 생각은 아예 하라, 하지 말라? 해도 소용없죠. 아예 안 되죠. 그렇다면 아브라함 밑에 사다리는 이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복’에서 나오죠. 그러면 히브리서의 복의 개념은 뭡니까? 내가 하나님의 성도가 된 걸 아는 그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증인 된 것, 내가 믿는 자 된 것 이게 복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 접근 못하니까. 계속 발로 차나가니까.
여기에 아브라함의 계열에서 내려올 때, 아까 기존의 인간들의 죄를 보여주는 족보도 함께 내려오죠. 울산강의 때 했죠. 사람에서 뭐가 나온다? 죄가 나오고 하나님의 영이 같이 나오죠. 성도한테는.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서 저주도 나오고 복이 나오죠. 예수님에게서 저주가 나오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잖아요. “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축복이 나오잖아요. 성도한테는 마찬가지로 다 나와요. 자기 죄가 나오고 하나님의 약속이 나오고 다 나옵니다.
아브라함에서 레위 지파, 그 다음에 유다 지파 나오죠. 그런데 여기서 이게 모조지 입장에서 볼 때 아브라함에서 레위 지파 나오고, 유다 지파 나오는 이것도 모형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잘리고, 잘리는 구약의 원리가 지금 신약시대 되도 히브리서에서는 아직까지 종결되지 않았어요. 계속되는 겁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가 히브리서에선 성립이 안 돼요. 구약적인 구조가 계속 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발로 차는 거니까. ‘레위 지파 아니야.’ 그럼 무슨 지파다? ‘유다 지파야.’ 그러면 진짜 레위 지파, 유다 지파는 아니죠. 왜냐하면 모조지 위에서 보면 하나의 모형이고 그림자기 때문에.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자기의 택한 백성에 대한 것이 얼마나 귀한 걸 보여주기 위해서 바깥에 택하지 않은 것을 차는 그 방식 중에 하나가 뭔가 인간적으로 다 됐다는 것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계속해서 차고, 차는 선택, 구별작업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히브리서다.
그러면 히브리서 2장 16절에 보면, 누구 자손 나오죠? 이미 택한 자손 나오죠. 아브라함 자손. 다시 이야기할게요. 히브리서는 구약을 이렇게 본다. 어떻게? 구약 다음에 신약이 아니라 구약에 있었던 구원방법이 신약에 와서 없어지는 게 아니고 구원방식에서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구약에서는 모형으로 구원했고, 신약에서는 아들로 구원하는 방법.
그러나 그 방식의 환경과 구조는 전혀 바뀐 적이 없다. 안식에 믿음 없으면 못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광야시절과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건지고자 하는 자는 뭐냐? 아브라함에게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그럼 아브라함 자손이 누구냐 하는 것은 인간적인 행함으로 접근 못하지요. 여기 2장 14절에 보면, “혈육에 속하였으매”
그런데 혈육에 속했으니까 모조지 위의 하늘나라에서 멜기세덱은 어디 속했습니까?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말을 왜 할까요? 여러분 멜기세덱도 모형입니다. 누구 모형? 예수님 모형이거든요. 모형 자리에서는 뭐가 있어야 돼요? 모조지 위에나 아래나 누가 있어야 돼요? 혈육적인 사람이죠. 그리고 멜기세덱은 실존인물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을 만났어요. 하지만 같은 혈육이라도 모형의 쓰임새가 다르죠. 역할이 다르죠.
그러니까 히브리서를 결론 낸다면 한 마디로 뭐냐? 당신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솜씨가 어떻습니까’ 묻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재주는 뭡니까’ 묻는 게 아니고, ‘당신의 믿음은 얼마나 강합니까’ 묻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