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50-히브리서3(강의정리)-1
05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50-히브리서3(강의정리)-1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05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50 - 히브리서3
05,12,3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내 인생에 웬 히브리서가 ??
이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계속해서 히브리서를 하겠는데, 이 히브리서에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이 히브리서의 내용이 어떠하든지 간에 과연 히브리서가 우리 인생에 꼭 필요로 하느냐는 것이다. 즉 과연 우리 인생에 히브리서가 개입할 이유가 있느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불교에 화엄경이 있다고 하면, 물론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은 인정을 하겠는데, 하지만 아무리 거창하다고 해도 우리가 굳이 거기에 신경을 쓸 이유가 있는가? 물론 시간이 되면 한번 읽어보면 좋겠지만, 아무튼 굳이 우리 인생에 개입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절의 중들이 알아서 하면 되지 말이다. 그러니 히브리서 내용이 이렇고 저렇고 해도, 자기가 굳이 그 성경내용에 대해서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나' 라는 자체를 하나의 성경으로 보면 되는데, 즉 '나'가 하나의 성경이고, 계시이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 자체가 완결형 인생이라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곧 진리이다" 라는 것이다. 물론 부활은 아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진리이고, 자기가 바로 성경이라는 말이다.
◈ 니가 한 예언이 맞기는 하나?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히브리서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즉 이 히브리서가 어떻게 시비를 거는고 하니, "과거에 했던 예언이나 맹세대로 되었는가?" 라고 하면서 우리의 뿌리자체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 너 같은 모습의 완결형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에 그렇게 된다고 성경에서 예언된 적이 있는가?" 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그 대상이 저 '이근호' 라고 한다면, "이근호가 지금과 같이 이렇게 된다고, 과거에 너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의 일기장에 기록된 적이 있던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존재의 뿌리에 대해서 시비를 건다는 말이다.
◈ 진리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야 !!
왜 그런고 하니, 만약에 자기가 곧 진리이고, 신이고, 현실이라고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측도 가능해야 하고 말이다. "이번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예선에서 탈락하고, 3년 뒤에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또 4년 뒤에는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대란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서 난리가 난단 말이야" 라고, 그러한 예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의 내용은 녹취자가 후대인 2009년에 첨가한 것임, ㅋㅋ)
◈ 그 털손을 떼라. 내가 곧 진리이다 ??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알 때는 그 사람을 진리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이러한 것도 모르면서,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전혀 모르면서 뭐라고 하는가? "어허, 어디를 건드리나? 그 털손을 떼라. 내가 곧 진리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에게는 어떻게 베풀어줄 것은 전혀 없으면서도, 그래도 곧 죽어도 자기가 진리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무조건 옳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예언이 되거나 맹세가 된 것들이 지금 현재에 그대로 성취가 될 경우에만, 그때만 진리가 진리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언 중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또 남아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장식할 것이고, 미래를 확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 일도 모르고, 또 1년 뒤도 모르고, 또한 10년 뒤도 모르고, 그렇게 미래를 모른다는 것은 바로 현재를 모른다는 의미인데, 즉 지금 자기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 라는 것은 불확실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똥고집 덩어리 !!
하지만 여기에 반해서 성경은 무엇인가? "과거에 이렇게 예언이 되었는데, 확실히 그렇게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오직 성경말씀을 믿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간단한가? 우리는 곧 죽어도 자기가 진리이고, 자기가 하는 것은 옳다고 우기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우길 뿐이고, 하나의 오기이고 배포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장래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 장래에 대해서, 암담하고, 불확실하고, 초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미래가 보장되지 못했으니 현재가 불안하고, 그렇게 현재가 불안하니까 나오는 것은 똥고집(?) 밖에 없고, 그래서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우기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히브리서 - 예언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
이 히브리서에 보면 예언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 예언의 중심이 누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라는 분이 예언의 중심으로서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언의 성취는 나다" 라고, 즉 모든 예언이 겨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등장하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야, 진짜 이 세상의 모든 예언은 이미 결정이 났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것이 다 결정이 되었다고, 그렇게 확정을 지을만하다고 이 히브리서가 변호하고, 혹은 증언하는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제 히브리서 3장을 보면 !!
이제 히브리서 3장을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집이 나오고, 2절에 보면 거기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한 일군인 모세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6절에서는, 또한 그리스도는 그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9절에도 보면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라고 하고, 또한 11절에도 보면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결코 만만치 않은 내용인데 말이다.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히 3: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히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 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히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히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히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히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 광야 40년의 기간이 모두가 다 예언 !!
이것이 어려우니 그림으로 설명해보면, 여기에 광야가 이렇게 있고, 즉 애굽에서 이렇게 홍해를 건너가면 광야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의 기간이 모두가 다 예언이 된다는 점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예언인가? 물론 아닌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살 때에 그것이 예언의 재료가 되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배가 고프고 물이 마시고 싶어서 좀 달라고 외쳤는데 말이다. 바로 그런 것들이 모두가 다 장치 오실 예언자를 위한 구체적인 소설(?) 줄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들은 실패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이야깃거리로 마련되기 위해서, 그렇게 40년 동안 수십만의 대군이 엑스트라로 동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이다.
* 질문 - 굳이 그렇게 많은 인원이 동원될 이유라도 있나요?
예수님을 보여주는 그것이 바로 인간과 관련된 실제상황이니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인원수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다만 그들이 중요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출현되는 아주 특수한 무리들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 당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많았나요?
다른 민족과의 비율적인 면에서는 그렇게 비율자체가 높지는 않는데, 마치 우리나라 영화에 나오는 엑스트라가 4800만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 비해서는 미미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배우 인구 자체가 얼마 되지 않으니 말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엑스트라 배우들 !!
그러므로 이들은 바로 영화배우들인데, 어떤 역할을 맡은 자들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도 실패하고, 그래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배역을 맡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기간이 40년이고, 또한 그 장소가 광야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봐라. 너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잖아. 그러니 내가 보낸 내 아들인 예수를 믿어야지. 왜냐하면, 내가 보낸 예수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분이니 말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유독 그 이스라엘이란 집단만 구원을 받도록 하셨나요?
다른 집단은 아예 방치를 해버리는데, 오직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만 그런 하나님의 관심사에 초청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언약'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언약은 일반적인 약속과는 개념이 달라서, 이 언약은 언약을 내린 사람에게만 언약대로 시행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약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까지도 다 예언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 그런데 '실패'로 끝났다는데 초점이 !!
그러니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아까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여기에 출현한 이 무리들이 실제로 자기들의 삶 가운데서 치열하게 살았던 자들인데,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성경말씀은 결국 그들은 실패로 끝났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성공이 아닌 실패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떻게 할거야? 그들처럼 실패를 할래? 말래?"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여러분은 어떠한지 궁금한데, 정말로 실패를 하고 싶은지 말이다.
◈ 다시 강의처음으로 되돌아가서 !!
다시 강의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지금 우리에게 이 성경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것인데, 이 성경말씀은 바로 실패한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함으로서, 실패를 하지 않는 경우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그렇게 우리이게 한계를 지어서 몰아넣는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의 인생은, 성공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고, 항상 실패가 무엇인지 알라는 것이다.
* 질문 -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자기들이 알아서 산 것이 아니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인도함을 받으며 살았는데, 어떻게 보면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실패라고 하는 것은 좀 어폐가 있지 않나요?
◈ 혹시 명배우 허장강을 아시나요?
그러니 구약의 광야 40년이 어렵고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허준호의 아버지인 영화배우인 허장강이 어떤 영화에 나오는데, 그가 다방마담에게 다이아몬드를 사주고 하다가 나중에 마지막에 보면 수갑을 차고 감옥에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장강이 그렇게 악역을 제대로 해주어야, 영화가 끝나고 나서 관중들에게 기립박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영화가 대박이 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악역을 맡은 사람이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해주어야만 전체 영화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 허장강이 참 나쁜 놈이야" 라고 해야 말이다. 사실 그 양반이 악역을 소화를 잘했는데, 그래서 죽은 한 참이 지난 지금도 한국영화에서 악역의 대명사로 기억이 된다는 것이다.
◈ 애들아, 내 아들 잘났지 ??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자, 여기 내 아들이 나왔다. 분위기 살리고, 살리고"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악역은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등장 인물들은 그만 엑스트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실패한 역할을 맡겨서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성경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두고 자기가 택한 자들이라고 하면서, 그야말로 독수리 날개로 업고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는데, 그렇게 마구 붕붕 띄어주는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비참하게 실패를 해버립니까?
그렇게 그들이 버려져야만 성경 전체에서 언약의 주제가 살아나는데,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성취하는 도구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므로 광야의 40년 기간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움직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버려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려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바로 언약이 제대로 그 전체구조가 아름답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언약의 전체그림이 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 광야의 백성들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오늘의 우리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철저히 인생에서 실패해야 하는데, 그렇게 실패한 우리 인생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살리고, 또 살리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실패' 라고 하는 관점이 좀 애매한데요? 그래도 이 '실패' 라는 것은 추구하는 것에 대한 어긋남이지 않습니까?
◈ 성경에서 '실패'의 진짜 의미는?
이러한 실패에 대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소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인데, 즉 우리 인간들은 구원을 추구하다가 누구나 다 실패를 한다는 것이다. 또 반드시 그렇게 실패를 해야만 하고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로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에게는 아예 실패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실패가 전혀 없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죄를 지어서 범죄를 했기 때문에, 그런 범죄한 인간의 실패라는 개념을 빌어서(?) 주님이 마치 실패한 것처럼 해서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 실패한 인생처럼 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오셔서 "아하, 우리는 실패했지만, 그분은 성공했구나" 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즉 없는 개념을 새롭게 끄집어낸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 쪽에서는 전혀 그런 실패라는 것은 없고,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이 되어나간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에게 '끌려가는 자'를 두고서 실패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것은 바둑 9단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ㅋㅋ), 이미 인간의 타락한 육적인 개념 속에는 나름대로 양보할 수 없는 '실패' 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슬쩍 이용하신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런 경우가 참 많은데 말이다.
◈ 예수님은 왜 '죽음'을 '잔다' 라고 하셨는가?
예를 들어서, 지난번에 이것을 주일학교에서 성탄절에 연극도 했는데,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는데 뭐라고 하는가? '잔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죽음이 아니라 잔다고 하면, 그냥 죽어도 깨우러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예수님은 자기를 두고서 '죽는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죽음을 그렇게 사용하니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간들의 개념을 사용하셔서 그들이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도록 역으로 쳐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야, 우리도 죽으러 가자" 라고 하니, 사실은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밀어 부쳐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이 광야 40년의 의미가 제대로 파악이 된다고 하면, 성경전체의 의미를 대부분이 다 알 수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 하나님, 튼튼하고 많은 돼지새끼를 ??
물론 가능한데, 예를 들어서, 우리가 돼지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돼지새끼가 새끼를 놓을 때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이 그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복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라고 해도, 그냥 딱 까놓고 보면 돼지새끼를 많이 잘 낳게 해달라는 것과 동일한 기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실패로 만들어버리고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기도를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제가 신학교를 가서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그런 자기가 알고 있는 신학교와 목사개념을 다 수정시켜서,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은혜를 받은 자에 한해서 말이다.
◈ 인간은 인간대로 빌고,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
그러니 하나님은 일을 하실 때는 우리가 안타까워하고 애달파하는 것은 다 인정을 하시는데, 하지만 그것을 바꾸는 작업이 하나님께서 또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일의 소원은 우리에게 있으나, 그것을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우리는 실컷 우리들의 소원대로 빌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하게 여기면 안 되고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데, 왜 그런가? "아하, 우리가 그렇게 무지한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를 않고 친히 나서서 바꾸어주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말이다.
◈ 광야 40년의 생활에 있어서, '실패'의 의미는?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광야 40년의 생활에 있어서, 이 '실패' 라고 하는 인간적 개념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것이 하나님의 개념으로 바뀌면서 그만 실패가 '성공' 이라는 개념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 쪽에서 보면 당연히 실패했다고 여기는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 그들이 바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당신, 인생을 어떻게 살았어?" 라고 했을 때, 놀랍게도(?) "에이, 나는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망했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바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부동산 값도 제법 오르고, 주식투자도 성공을 했고, 또한 장사도 잘되고" 라고 하는 사람은 뭔가가 좀 수상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개념이 바꿔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성도는, 인생의 실패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어야 !!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인생의 실패를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실패를 이기면 그것이 곧 마귀를 이긴 것이 되니 말이다. 지금도 이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을 하도록 하는가? 그래서 도대체 뭐라고 하는가? "너는 실패하면 안 돼.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 라고 하면서, 옆에서 자꾸만 부추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악마를 이기는 것은 한가지 방법밖에 없는데, "나는 원래가 그러한 놈이고, 실패자이다. 왜 꼽냐? 배 째라" 라고 하면서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악마는 뭔가 약을 올릴 만한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무대포로(?) 나오면 악마가 밥맛 떨어져한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 질문 - 이런 경우는 어떠한지 모르겠는데요?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맛본 상태에서 자기가 실패했다고 여기는 경우 말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라고 말입니다. (ㅋㅋ)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즉 "저는 실패하기 싫습니다. 제발 좀 잘해주세요. 제가 성공한 다음에 잘 섬기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오냐 잘 알았다. 니 마음대로 해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면 자기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했다고 하는 것이, 결국에는 성공이 아님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었다' 라는 의미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 어떤 경우라도 엑스트라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그런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인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러나 전체적인 영화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다는 것이다. 주님에 의해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공에 묻혀 가는데, 그것을 두고서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비록 개개인은 자기들 욕심대로 살아가는 죄인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의인으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는 말이다.
◈ '성공'과 '실패' 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이런 특별한 '세상보기' 개념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심어주는고 하니, 성공과 실패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살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것에서는 좀 자유로워야 하는데, 바로 그런 점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성공은, 이것을 성경대로 표현하면, 성공이라고 하기보다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고린도후서 1장 말씀인데 말이다. 이전에 신학교 다닐 때 설교학 시간에 같은 학생이든 김달원 목사님이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해서 제가 큰 은혜를 받았는데, 설교학 교수도 다같이 은혜를 받아서 칭찬을 많이 했고 말이다.
고린도후서 1장 19절과 20절 말씀을 보자.
(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
여기 19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이 '예'는 어떤 의미인가? 이런 표현은 요즘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말이다. 바로 '성공' 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 설교자가 "여러분, 믿습니까?" 라고 하면, 교인들은 '아멘' 이라고 대답을 하는데, 바로 그 아멘의 의미도 '성공' 이라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웬 성공??)
그리고 20절에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라고 하는데, 즉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이 되고,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구약의 선배들은 광야 40년의 생활을 통과하게 된다는 말이다.
◈ 광야 40년은 마치 어항과도 같아서 !!
그렇다면 이 광야 40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고 하니, 이 광야 40년은 마치 어항과도 같은데, 물고기가 갇혀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사각 어항이 있고, 금붕어가 있고, 수초가 있고, 물레방아도 있고 말이다. 또 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 어항은 불과 크기가 1m 정도에 불과한데, 이 어항 안을 이 금붕어 몇 마리가 하루종일 빙빙거리며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이 금붕어는 우리가 보기에 재미가 하나도 없는데, 여기에 갔다가 부딪치면 또 저리로 가고, 또 그렇게 하다가 다른 곳으로 가고 말이다. 그렇게 해도 그냥 그 안에서 빙글빙글 돌뿐이라는 것이다.
◈ 물고기님, 당신의 세상은 어떻습니까?
하지만 이 물고기에게 마이크를 대고 "당신의 세상은 어떻습니까?" 라고 한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예,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물론 이 물고기와 대화를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금붕어의 수준이 그렇다는 말이다.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말이다.
그러니 광야 40년은 마치 인간이 그 물고기처럼 어항에 갇혀서 과연 인간의 마음의 어떠한지, 그것을 노출시키는 과정인데, 인간이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그 어떤 발악을 하는지 말이다. 마치 투명한 어항을 통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인간을 살펴보는 기간이 바로 광야 40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광야 40년의 기간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 바로,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음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마치 금붕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지금 어항에 갇혀서 무슨 짓을 하는 것이지? 이제는 어항 밖으로 한번 나가서 세상구경을 해볼까?" 라고 해서 그 어항을 뛰쳐나오는 놈들이 없듯이 말이다. 그런 인식자체가 금붕어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잠시 고급수학을 ??
왜 수학에서 차원 이야기를 하는가? 그런데 직선만 이야기하는 곳에서는 그런 차원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직선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면만 이야기하지 공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3차원 공간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는 4차원 공간이 이해되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아인쉬타인은 이런 4차원을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3차원의 한계가 있음은 발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 신비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신비를 풀기 위해서 11차원 이상의 수학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고급수학(?)인데, 마치 외계인의 문자와 같은 것들을 사용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어디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었는고 하니, 중력의 원천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우리가 천체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천 개나 되는 은하계 자체의 우주와 또 그러한 우주 사이에서, 마치 그것이 샌드위치처럼 되어있는데, 거기에서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중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가설인데, 그렇게 이쪽 차원에서 저쪽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면 또 어떻게 되고 말이다. 이런 가설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 나는 넘어가면 죽는다 !!
어항 이야기를 하다가 우주까지 나갔는데, 결국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신의 신비로 타고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넘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어항인데, 즉 '광야' 라는 것이다. 이 광야 40년 동안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은 결코 불가능하더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 광야를 벗어나지를 못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재미있는데 말이다. 왜 인간이 그렇게 몸부림을 쳐도 안 되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광야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인간의 발목을 잡는 세력이 있는데, 그것이 "나는 넘어가면 죽는다" 라는 것이란 말이다.
참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처음에 선악과가 무엇인가? "그것을 따먹으면 죽는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그만 따먹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라고 하면, 인간은 반드시 모가지를 빼서 그 담을 타서 넘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라고 하는 세계가 너무나 궁금해서 반드시 바라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그것은 곧 죽음이지만 말이다.
◈ 이 세상은 호기심 천국 ??
이것은 마치 판도라 상자의 경우와 같은데, 즉 "이것을 열면 안 돼"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 판도라 상자 안에는 미래를 파괴시킬 흉측한 것들이 다 들어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망할 때는 망하더라도 그 상자를 반드시 열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호기심은 이 세상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더 강하고 세다는 것인데, 그래서 아무리 망한다고 해도 점점 더 열어보고 싶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만 상자를 열었더니만, 그 안에서 온갖 전염병과 미음과 시기와 질투와 다툼 등이 쏟아져서 이 세상에 퍼지고 말았다는, 그런 전설이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명령을 아예 용도 폐기하려는 인간들 !!
아무튼 그건 그렇고, 그렇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오히려 인간들로 하여금 현재 따먹음으로 말미암아서 무엇을 무효로 만들었는고 하니까, "따먹으면 죽는다" 라고 하는 그 명령을, 즉 그러한 법령자체를 완전히 폐기 처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것은 마치 시내산에서 돌판을 깨는 것과도 같은 내용인데, 만약에 여기에 종이가 있는데, 그런데 이 종이에 뭐라고 쓰여있는고 하니까, "이 종이의 뒷면을 보면 너는 죽는다" 라는 내용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 종이의 뒷면을 보든지, 아니면 아예 찢어서 없애버림으로서 "너는 죽는다" 라는 그 법령을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난 다음에 주어진 현상이 과연 무엇인가? 인간은 그냥 기다리는 것인데, 즉 "헤헤, 이제부터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한번 기다려 보자. 봐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 괜히 겁을 먹었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허풍쟁이 영감이 하는 말에 불과하고, 그것은 바로 인간이 조작한 것이라고 여기도록(?), 즉 하나님의 법을 그냥 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인간의 배후에서 악마가 부추긴다고,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좀 복잡하지요?
◈ 인간이 말씀을 무시하고 넘어간 공간은?
아무튼 인간은 "너는 따먹으면 죽는다" 라고 하면, 그 법령을 무시하고 넘어가게 되어있는데, 그렇게 넘어갔다고 하면 그 공간이 무엇인가? 넘어간 공간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악마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악마를 모르는데, 그런데 법을 어기게 되면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유감스럽게도(?) 처음부터 이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태어나게 되는데, 그러므로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믿으라고 했는데 믿지 않았지? 따라서 너는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난 그 악마의 세계에는 안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말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에 깔려있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 결국은, 말씀대로 다 이루시는 하나님 !!
굉장히 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것 같기도 한데, 좀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함으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 결코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믿는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기에 어디로 가는가? 히브리서 3장 11절에 나오듯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는 안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마귀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예언대로 다 이루시고 성공을 했다는 말이다.
(히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 질문 -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악마의 세계로 가려고 하는가요?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키면 아예 결코 하지 않는 본성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공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인간의 속성을 멋지게 이용하는 것이 하나님이고, 또한 그래서 인간은 악마와 한통속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속성' 이라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안 돼. 그것은 하지마" 라고 하면, 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지, 도대체 저기 바깥에 무슨 세계가 있는지 궁금해서 미친다는 것이다. 그냥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는 문제인데, 하지만 금지의 명령을 내리니 궁금해서 미친다는 것이다.
* 질문 - 하지만 다양성의 측면에서, 즉 인간들 중에서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지 않나요?
이것은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저는 어떤 영역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니 그 영역 안에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있을 수는 있는데, 그러나 모두가 같은 영역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다양해도 그 영역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러니 다양성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말이다.
◈ 나는 기어이 넘어가고 말리라 !!
지금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고 하니, 무조건 안식에 들어오지를 못하는데, 그 이유가 어떤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쪽을 들여다보면 안 돼" 라고 했는데, 그런데 담을 다리도 짧으면서도 꼭 담을 기어올라가서 보려고 하다가 그만 자빠지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봐라. 내가 봐도 아무 일도 없잖아" 라는 것이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이 곧 성경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인간은 본인에게 그러한 속성을 있음을 모르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 하달되어서 그것을 어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비로소 자기에게 그런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밖에 없는 속성이 들어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광야 40년의 생활을 통해서 우리 선배들이 제대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누구라도 안식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속성에서 벗어나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그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 예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인간은 청개구리 족속 ??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라고 하면 하려고 하고, 또한 "안 돼. 하지마" 라고 하면 하려고 하는, 바로 그러한 그야말로 청개구리 모습인데, 물론 청개구리가 들으면 엄청나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말이다. (ㅋㅋ)
* 질문 - 그러면 성경에 나타나 있는 사건들이 보여주는 것이, 인간들의 여러 속성들을 하나하나씩 그렇게 들추어내어서 나열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야말로 '아멘' 인데, 그런데 여러 가지 속성이 아니라 한 속성의 여러 가지 면들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그 속성의 좌측면이고, 우측면이고 말이다. 그것이 곧 성경전체의 내용이기도 하고, 또한 이 광야 40년에 적나라하게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5개가 있는데 1개가 나온 것이 아니라, 원래는 1개인데, 그것이 다양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다양성이란 말이 어울린다는 말이다.
◈ 다양성이 아닌 단일성 !!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성경을 왜 그렇게 해석합니까?" 라고 한다면, 즉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성경의 다양성인데, 그러나 저는 그런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신 분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들이 끼어 들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나 청개구리 종족(?)이니 말이다. 예수님 종족(?)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항상 그렇지만 "오직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해석이 아냐는 것이다. 항상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은 똥폼을 잡고 그 자리에는 제발 좀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엑스트라 주제에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인간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인간은 그렇게 실패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실패가 되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성취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허장강은 악역을 제대로 소화를 해주어야 영화가 산다고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을 듣지 않고 담장을 넘고 해야, 예수님이 주인공인 그 영화가 제대로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물론 여러분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독하게 듣지 않아야 영화가 제대로 살아나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목사님, 저는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은 없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이 그렇게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지 말이다. 과거에 우리 선배들이 그렇게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면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종족들이니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하지요?
그때는 답변을 이렇게 하면 되는데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물으면 안 되고, 자기가 지금 왜 살아있는지, 바로 그것을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왜 지금 자기가 살아있는지, 거기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십자가 마을에도 그런 질문들이 많은데 말이다.
◈ 다시 정리를 해보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그렇데 어려운 내용들이 아닌데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누가 이루시는가? 바로 예수님인데, 히브리서 1장 2절에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데, 그런데 그 약속 안에 무엇이 포함이 되어있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실패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성공자가 되면, 그 약속의 성취는 예수님의 몫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몫이 될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런 경우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실패한 자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러한 실패자인 우리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희생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까지도 그 약속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 저는 실패자이지만,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
그러니 진짜로 이런 약속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저는 실패자이지만,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자들만이 성도이고, 그들만이 참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을 받았음을 고백하는 자들만이 말이다.
◈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우리 인간들이 그것을 믿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즉 인간들이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그런 차원에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두 가지 믿음이 나누어지게 되는데,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믿음이 또 있다는 말이다.
◈ 인간들은, 믿지 않는 식으로 믿으려고 해 !!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란, 자기가 믿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믿어라" 라고 하면, 꼭 믿지 않는 식으로 믿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믿는 믿음으로, 그건 자기를 믿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렇게 성경에서 믿으라고 하면, 우리 인간들은 자기를 믿는 그 믿음으로 그러한 믿음을 대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당연히 "저는 순종했습니다" 라고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인데, 그래서 "하지 말라" 라고 하면 꼭 그와 반대로 튄다는 말이다.
◈ 내 안에 예수님을 싫어하는 적개심이 !!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기쁨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속에 예수님을 싫어하는 적개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라는 것이다. 즉 "야, 내가 이렇게 예수님을 미워하는구나" 라는 것을 파악했을 때 말이다. 이것은 '야호!' 라고 하면서 그야말로 하늘을 날 듯이 기쁜 일인데, 정말로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나쁜 인간임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면, 자기에게 어떤 착함의 요소가 있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니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윤리적 도덕적 가치를 포기한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것보다 더 편한 인생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괴변처럼 들리나요? 그렇지 않은데, 이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고민이 한꺼번에 다 사라지고 말이다.
그야말로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하, 나는 더 이상 착해질 수도 없고, 또한 그런 가능성조차도 없구나" 라고 하는 깨달을 때가 말이다. 그때는 자기 몸무게가 '제로'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 80kg을 나가든지 0.1톤을 나가든지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역사가 계속해서 되면 좋지만, 그런데 2.5초밖에 안 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2,5초가 지나면 "이제 내가 믿어야지. 회사에서 승진을 해야지" 라고 나오면, 또 자기 몸무게가 점점 늘어나게 되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자기 몸무게에 그만 깔려서 일어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존심에 짓눌려 있는데, 그러면서도 남이 뭐라고 하면 또 다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고 한다는 말이다.
◈ 오잉, 웬 노들강변 ??
지난 성탄절에 우리교회에서 아이들이 연극도 하고 공연을 했는데, 그런데 마지막에 뭐가 있었는고 하니, '노들강변(?)'도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동영상에서는 편집이 되었는데, 괜히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 공연을 주관한 집사님이 괜히 미안해하는 것 같은데, 실컷 고생을 혼자서 다하고 말이다. 물론 제가 허락을 해서 그렇게 했는데, 우리교회의 두 분의 장로님도 좋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슨 문제냐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교회에서 클래식은 괜찮고 밤안개는 안 되고" 라고 하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클래식은 그 당시의 대중가요가 아닌가?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이러한 순간이 되면 인간들이 무엇을 하는고 하니까, 여기를 이렇게 들여다보는데, 그렇다면 마음껏 한번 들여다보라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말이다.
그렇게 들여다보게 되면, 여기 이렇게 있던 클래식과 밤안개의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그동안 그렇게 고민했던 것이 그만 다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그만 새처럼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다음에 또 다른 것이 나타나서, "그러면 이것은 됩니까?" 라고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 인간은 신비를 바라보다가 악마의 세계에 헤딩을 !!
아무튼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사람의 힘으로 애초부터 전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비의 세계인데, 그런데 인간은 이런 신비를 바라보다가 그만 꼴아 박게 되는데, 그 꼴아 박는 세계가 곧 악마의 세계이고, 즉 불신앙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사람이라도 신비를 추구하게 되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런 신비를 추구하지 않더라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바로 그러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이러한 위치에 있는 인간을 끄집어내었는데, 즉 예수님은 그런 신비마저도 자기의 능력으로 극복을 하셨는데, 바로 그러한 능력을 힘입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인간의 신비를 자신의 신비로 박살내시는 예수님 !!
하지만 인간이 제 아무리 신비를 추구해도 그것은 전혀 구원이 아니라 곧 몰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인간의 신비를 추구하는 것조차도, 그렇게 해서 몰락하지 않도록, 그렇게 예수님은 신비롭게도(?) 예수님의 자신의 신비로서 그러한 인간들을 건져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수님은 이렇게 함으로서, 인간이 더 이상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그러한 모든 가능성조차도 다 박살을 내고 부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있는 신비를 추구하는, 그런 모습을 깡그리 다 말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해주신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창조의 능력이고 말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주님이 하신 일이 놀랍지 않은가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표정들인데, 성도는 바로 그런 일에 감격하고 놀라워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서 4장 7절을 살펴보자.
(히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
여기에 보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바로 구약에서 한 예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라는 예언을 이룰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있다고 하면 지금까지 한 강의가 모두 도루묵이 되어버리는데 말이다.
하지만 기존 교회에서 목사가 뭐라고 하는가? "여호수아를 봐라.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여러분은 마음을 강팍케 하는가?" 라고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누가 필요 없는가? 제일 중요한 분이 그만 빠지게 되는데, 즉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혀 필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알아서 마음을 강팍케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말이다. 물론 이것이 고함을 지른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고함을 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내가 마음을 강팍케 먹지 말아야지 ??
이것이 참으로 속기 쉬운 부분인데, 이렇게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라고 하니, "아이쿠,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이구나. 내가 마음을 강팍케 먹지 말아야지" 라고 나온다고 하면,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만 자기가 이루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예언을 이룬 자기 자신만 구원을 받고, 나머지는 다 탈락을 하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그 신비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복한 셈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신비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들이 알아서 모두 다 했으니, 예수님은 그만 할 일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 질문 - 아무튼 우리가 추구하는 그 신비의 세계와 하나님의 신비의 세계가 전혀 다른데, 그렇다면 우리가 좀 신비를 추구한들 상관이 없지 않나요?
그렇다고 하면 성도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고백 속에 '주님의 공로'가 그만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무슨 성도냐는 말이다. 즉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서 잘하셨네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냥 하나님을 보고 잘했다고 하는 것이지, 예수님의 공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무슨 천국이냐는 말이다.
* 질문 - 모든 인간이 다 영원성을 추구한다면 "너, 잘났어" 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 않나요? 그렇게 인간이 영원의 삶을 추구한다고 하면, 물론 겉으로는 자포자기를 할지라도, 즉 자살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에 "제가 말 한번 잘못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따집니까?" 라는 식으로 나올 수 있는데, 심지어 사형수도 "신이시여, 제가 나쁜 짓을 한 것을 아는데, 좀 봐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가지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닌데, 사형수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강팍치 않고 겸손해서 그런가? 그러면 그 사형수는 구원을 받는가? 결코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하신 일의 빈칸을 보다 더 많이 !!
아무튼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라고 했지만, 그러나 인간들은 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즉 그 누구라도 강팍하지 않는 인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즉 여호수아가 아무리 강팍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들이 강팍함으로서, 그 당시 전쟁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무리 강팍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역시 실패자가 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에서 계속해서 우리 인간들은 실패자이고 안 된다고 하면서, 우리를 코너로 몰아넣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공로를, 즉 예수님의 하신 일의 빈칸을 우리가 보다 더 많이 마련하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성경전체의 흐름이 계속해서 그렇게 흘러나간다는 것이다.
* 질문 - 우리가 분명히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데,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의 경우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들 스스로가 '잘났니, 못났니, 라고 하든지 말든지 간에, 아무튼 그렇게 천국에 지옥에 가는 것이 미리 다 정해져있다는 말씀이지요?
◈ 과연 그것이 즐겁고 고마운가?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러한 것이 즐겁고 고마운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러한 마음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미리 그렇게 다 정해져있다고 해서, "운명은 다 정해졌으니 내 마음대로 하자" 라고 하면, 거기에는 결코 고마움과 감사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이지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드느냐는 말이다. 놀랍게도 그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을 받은 사람의 특징인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다행스럽고 눈물나게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자기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있음을 알고, 또한 주님의 신비로 자기의 신비가 다 박살나버린 자들인데, 그런 자들은 전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주님, 저는 당신의 일이 너무너무 마음에 듭니다 !!
그렇게 자기 몸무게가 '제로'인 사람들은, 그들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인데,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주께서 구원할 자는 구원하고 버릴 자는 버리고, 그렇게 주님이 다 알아서 하는 것에 너무나 고맙게 여긴다는 것이다. 너무너무 기뻐서 그야말로 좋아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히죽거리고, 밥을 먹다가도 좋아서 혼자서 웃는다는 것이다. 물론 남들이 보면 맛이 갔다고 할지 몰라도 말이다.
* 질문 - 인간이 이 땅에서 과학과 의학과 신학과 그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한번 제대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파악했을 때, 그런데 바로 그때 구원의 또 다른 길이 있다고 느껴지면 어떻게 되나요?
◈ 인간에게 포기는 없어 !!
그렇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감사한 일인데,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을 하다가도 안 되면 되는 쪽으로 방향을 틀지 결코 포기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살을 하는 사람도 모든 것을 자포자기를 해서 자살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지 말이다.
* 질문 - 인간이 추구하는 그 신비의 길, 즉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힘으로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고 하는, 그래서 착한 짓도 하고, 또 나쁜 짓도 하고 말입니다. 심지어는 그래서 자살도 하는 것이 아닌가요?
바로 그러한데, 그렇게 구원의 길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자살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전혀 엉뚱한 짓만 하는데, 그것이 곧 미지의 'X'가 끌어당겨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언제니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지금 목사님의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인간이 살아가는 것을 구원에 집중시켜서 말씀하시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의 삶이 꼭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목적도 역시 구원이 아니고 말입니다.
◈ 인간은 구원을 목적으로 살아가는데 !!
물론 그러한데, 하지만 인간은 구원을 목적으로 살아가는데, 그건 인간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신 것은 아닌데, 그것은 인간이 범죄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말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기존의 알고 있는 개념을 이용해서, 바로 그런 개념을 엎어버림으로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 질문 -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제가 그동안 추구하고 산 모든 삶이 너무나 잘못되었음을 느끼는데, 즉 제가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추구하는 것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대단한 것인데, 먼저 앞의 질문부터 답변해보면, 인간은 자기 구원중심으로 나온다고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을 엎어버린다고 말이다. 물론 이것은 정상이 아니고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은 절대적 신이 되고 싶어서 구원을 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