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48-딤후,딛,몬,히1(강의정리)
05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48-딤후,딛,몬,히1(강의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05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48 - 딤후, 딛, 몬, 히1
05,12,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니들이 영생을 알어?
오늘은 디모데후서를 하겠는데, 먼저 2장 11절과 12절을 보자.
(딤후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딤후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여기 11절에 보면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라고 하는데, 즉 이렇게 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서점에는 파는 책에서는 산다고 할 때는 이 땅에서 얼마나 풍요하게 사는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키느냐는 문제이고 말이다.
◈ 함께 죽고, 또 함께 산다는 것은?
하지만 성경에서 산다고 할 때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영생'의 문제를 말이다. 그렇게 "영원히 사는데, 그런데 너희 인간들의 힘으로는 안 될걸?" 이라는 것인데, 즉 누구와 함께 붙여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이렇게 11절에서는 "주와 함께 죽었으면"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디모데후서에서는 그것을 '부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즉 예수님이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부활을 했으니, 그러한 주와 함께 죽으면 다시금 그 부활의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실제로 부활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그분이 부활했으니 그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 ① 영원히 산다 !! ② 왜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히 사는 것인가?
그러므로 여기 디모데후서에서 첫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영원히 산다" 라는 것이고, 죽음을 이겼으니 말이다. 그러니 주님 덕분이 다시는 죽음이 없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원히 사는 것인가?"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은 전혀 왜 안 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상당히 기분이 좋은데, 자기가 영원히 산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로 들어오면 살짝(?)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산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자기도 뭔가 노력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러한 자기 노력이 왜 무시를 당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들의 자기 노력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디모데후서에 나온다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을 찾아보겠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
여기에 보면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라고 하는데, 먼저 우리 성도는 첫째로 영원히 사는데, 둘째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행위대로, 즉 그 행위에 따라서 영원히 살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행위' 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한 평생 그 자체를 의미하는데, 보모에게 효도를 했던 말았던, 교도소를 자기 안방으로 여겼던 말았던 간에 말이다. 이런 우리 인간들의 한 평생동안의 삶 그 자체가 행위라는 말이다. 장애인으로 살았던, 좋은 집안에서 살았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살았던, 혹은 부모가 없이 살았던 간에 말이다.
◈ 그러니 기쁜 소식이 아닌가?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인간의 행위하고 영생토록 사는 영생의 문제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즉 그런 인간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영원토록 살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서 복음, 즉 '기쁜소식'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기쁜 소식이라고 할 때, 어떤 경우에만 해당되는고 하니까, "내가 한 평생을 반듯하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 심적인 부담에서 해방되어서, 그런 자기 행동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에 한해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만 영원히 산다고 하는 것이 해당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면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고 하니, 그래도 참되고 올바르고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는, 이 복음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오히려 거부해야 할 슬픈 소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산다고 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디모데전서 1장 13절을 한번 보자.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나는 정말 몰랐어 !!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사도바울이 이제 무엇을 알았는고 하니, 자기가 그동안 행함을 의지했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즉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이미 준비해놓았음을 몰랐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준비해놓은 것을 모르고, 하지만 죽어서 천국에는 가고 싶고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고 하니, 자기가 천국에 갈 준비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찬하고 훌륭하게 사는 것인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고 말이다. 교회에 열심히 돈을 갖다 바치고, 열심히 전도도 하고, 그렇게 주를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 바로 그렇게 하면 자기는 좋은 곳에 갈 줄 알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한국교회가 들으면 충격을 받지 싶은데, 아닌가? 사도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부활한 주님을 만난 사람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주님을 직접 만나고 보니, 그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니가 구원을 받는 것하고, 니가 한 평생을 살면서 준비한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존 한국교회가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인데, 5만여 개의 교회가 하는 말과는 말이다. 즉 준비는 하나님이 하셨는데, 그런데 인간이 해야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니, 이것은 그야말로 정반대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 둘째야, 시장 좀 봐오너라 !!
예를 들어서, 제사를 지낼 때 이미 큰집에서 찌짐(부침개?)을 부치고 모두 준비를 해놓았는데, 그런데 이 시어머니가 치매증상이 있어서 둘째 며느리에게 전화하기를 "야야, 내일이 제사인데 아직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다. 니가 좀 해오너라" 라고 하니, 그래서 둘째 급히 시장에 가서 문어도 사고 찌짐도 굽고 해서 부랴부랴 음식을 해왔는데, 그런데 막상 큰집에 오니 형님이 음식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형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어이 동서, 지금 음식을 왜 가지고 왔지? 음식을 좀 한다고 자랑하려고 그렇게 해왔나? 평소에도 내가 모두 다 했는데, 그런데 이번에 왜 이렇게 음식을 동서가 했지?" 라고 한다면, 그 동서는 뭐라고 하겠는가?
* 첫째 며느리 : 동서, 지금 음식을 왜 가지고 왔지? 음식을 좀 한다고 자랑하려고 그렇게 해왔나?
* 둘째 며느리 : 예? 아니예요.
* 첫째 며느리 : 평소에도 내가 모두 다 했는데, 이번에 왜 이렇게 했지?
* 둘째 며느리 : 어머님이 전화를 해서 음식을 해 가지고 오라고 하던데요?
* 첫째 며느리 : 어머님이 요즘 정신이 없는 것 모르나?
* 둘째 며느리 : 어머님이요? 몰랐어요.
* 첫째 며느리 : 정말 몰랐나?
* 둘째 며느리 : 예, 몰랐어요. 그러니 이렇게 음식을 해 가지고 왔지요.
* 첫째 며느리 : 정말이가?
* 둘째 며느리 : 예, 정말이예요.
이것을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야말로 이 둘째 며느리가 정말로 몰랐으니 그렇게 음식을 한 것이지, 미리 알았다고 하면 결코 음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힘을 들여서, 돈도 낭비하고 시간도 그렇고 소비를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바로 이 디모데후서가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데, 즉 영원히 사는 밑천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마련을 해놓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 잘난 맛에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천당에 가더라도 뭔가 자기가 좀 내세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자존심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 왜 인간들은 자기 행함을 버리지 못하는가?
아무튼 그렇게 자기가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를 했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반드시 좋은 곳에 가야된다는 식으로 나간다면, 그 사람은 천국은 고사하고 바로 지옥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 바뀌어야 하는데, 사도바울이 행함이 아니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자기 행함을 고집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말씀에서 영생을 얻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이미 알아서 준비를 했다고 했는데, 그런데 인간은 왜 자꾸만 자기의 한 평생 살아온 그 행함을 가지고 천국에 가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지금 그것을 두고 개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국도 주님이 만드셨고, 그 모든 근거도 주님이 알아서 한다는데, 그런데 왜 인간들은 자기가 따로 뭔가를 행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우기느냐는 것이다. 천국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마치 자기들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이다.
◈ 문제는 바로 ③ '타인과의 경쟁' !!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디모데후서의 세 번째 요지인데(?), 곧 "타인과의 경쟁"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인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남과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즉 "니가 더 착하나? 내가 더 착하나?", 그리고 "니가 신에게 더 복을 많이 받아서 잘사나? 내가 신에게 더 복을 많이 받아서 잘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타인과의 경쟁에 들어가면, 자기만의 개성이 생기고, 또한 그러한 개성에 의한 자기만의 공적(功績)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만의 실적이 말이다. 그렇게 공적이나 실적은 바로 타인과의 비교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말이다.
◈ 동방박사들의 경우에 !!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별을 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별을 보고 왔다는 것은, 그들의 관심이 오직 이 별에만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잠자리가 불편하든지 말든지, 먹을 것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말이다. 그리고 박지성이 한 골을 넣든지 말든지, 황우석이 줄기세포를 발견하든 말든, 전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방박사들은 "왜 저 별이 떠서, 왜 나를 이렇게 인도하는가?" 라는 것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관심사는 무엇이 아니라는 말인가? 즉 전혀 타인과의 경쟁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 그런데 왜 우리 집에는 ??
그런데 예수님이 태어나자 천사들이 예수님을 애굽으로 빼돌렸는데(?), 그런데 그만 누가 박살이 나고 말았는가? 예수님과 비슷하게 아기를 낳았던 그 베들레헴이 있는 집안들이 그만 줄초상이 나고 말았는데, 2살 이하의 아기들이 그만 헤롯의 칼에 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기들의 부모들이 대성통곡을 하게 되는데, 물론 그렇게 우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데, 하지만 더욱 더 억울한 것은 왜 자기 집 아이들의 그렇게 죽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다른 동네의 아이들은 괜찮은데 말이다. 아마 온 나라에 전염병이 돌아서 그렇게 아이들이 다 죽었으면 그렇게 억울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것도 역시 타인과의 비교라는 것이다.
◈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슬픔과 고난 !!
전에 설교시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동방박사들도 빼주고 예수님의 식구도 빼주었는데, 그런데 정작 다른 베들레헴에 있던 아기들의 엄마에게는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만 헤롯이 보낸 깡패들이 와서 그만 자기 아기들을 다 죽이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세상에 무슨 그런 하나님이 다 있느냐는 말이다. 만약에 그러한 일이 있다면 당연히 집집마다 천사를 보내서 다 빼돌려주어야지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아기 예수 때문에 발생된 일이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슬픔이고 고난이라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은 하나님께서 준비했기에 !!
이것을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까, 이러한 심각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바탕은 "너희들이 한 평생동안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다 마련해놓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경쟁하지 말고 말이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천국에 가는 것은 이미 주님이 마련을 해놓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이 땅에서 쌓아올린 한 평생의 삶을 버리지 못하고, 즉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구원을 받는지, 자꾸만 여기에다가 희망을 걸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술을 너무 자주 많이 마셔도 불안한데, 너무 이렇게 하면 자기가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닌지 하고 말이다. 또한 담배를 피워도 조금 불안하고 말이다. 그리고 바람을 피워도,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꾸만 자기 행함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술을 마시던지, 바람을 피우든지, 사람을 두드려 패든지 간에, 그것하고 구원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마련되고 준비된 것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감옥에는 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까 본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사람을 한 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지 못했기에,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때는 자기가 천국에 간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준비한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렇게 했는데, 그것도 다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여겼으니 말이다. 자기는 반듯하게 살아야만, 즉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은 기쁜 소식을 그냥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기 행함으로 대체하려고 했다는 말이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디모데야, 복음에 굳게 서라 !!
사도바울이 이러한 사실을 디모데전서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하면서, 디모데후서로 넘어가면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러니 디모데야, 제발 이 복음에 굳게 서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는 이미 이러한 복음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디모데후서 4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여기서 4장 6절 이하를 한번 보자.
(딤후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 이미 영생의 면류관을 준비되었기에 !!
여기 6절에 관제가 나오고 부음이 나오는 것은, 이미 자기는 죽은목숨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는 비록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의 행위를 보지 않고 이미 의의 면류관을, 즉 영생의 면류관을 준비해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까 살펴본 2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이고 말이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라고 말이다.
(딤후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딤후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그러니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꼬이든 간에 이렇게 살았으면, 즉 영생을 얻었다고 하면 본전을 건지고 남은 인생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이 들고 열을 받는 일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말이다. 마누라가 도망을 가든, 또한 교도소가 자기 집보다 더 친숙하든 간에 말이다. 아무튼 살았으면 되었지 않느냐는 것이다. 경제가 좀 어렵고, 기름 값이 비싸도 말이다. 그것이 바로 디모데전후서에서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 질문 - 영생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강한가요? 아니면 지금 이 땅에서 삶의 애착이 더 강한가요?
둘 다 똑같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영생의 삶을 살게 하는데, 그러면서 이 땅의 삶을 지독하게 바라보고 살아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함으로 말미암아서 "아하, 진짜 하나님의 구원은 내 삶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현실적 삶을 통해서 영생을 추구하도록 하신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택함을 받은 자에 한에서 말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경우에, 사실 그러한 강도의 모습이 우리에게 다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 강도를 자꾸만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한 사마리아인도 돈이 있을 경우인데, 돈이 없으면 그런 것도 모두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호기만이고 상호위선이라는 말이다.
◈ 죽음이 다가오면, 삶에 대한 집착도 더욱 강해져 !!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면 갈수록 이 땅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지는데, 그래서 노인네들이 죽고 싶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야야, 내가 아프니 돈도 많이 들고 참 힘들지. 그만 죽을 란다" 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렇게 죽음이 다가오면 삶에 대한 집착이 더욱 더 강해지는데, 차라리 젊었을 때, 그렇게 철없이 까불 때가 그런 것이 덜하지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100세에 가까워지면 현실적 삶과 영생의 삶이 어떻게 되나요?
그렇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 현실적 삶과 영생의 삶이 같이 나란히 더욱 선명해진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살아가면서 허무를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렇게 허무를 강하게 느끼면 느낄 수록, 그러한 허무를 느끼는 것 옆에 그것을 깨닫는 또 다른 것이 함께 뚜렷하게 등장한다는 말이다. 어린아이들의 경우는 둘 다 있기는 하지만 둘 다 희미하고, 어른이 되면 둘 다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하나가 없어지고 하나만 남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다시 말해서, 허무는 어디론가 없어지고 인생을 찬양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찬양은 찬양대로 그렇게 하면서 허무는 허무대로 또한 짙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과 악의 정체가 점점 더 뚜렷하게 등장한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 불교신자를 사랑하게 되면 !!
예를 들어서, 복음을 아는 남자가 있다고 하면, 그런데 그 사람의 애인은 독실한 불교신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남자는 그 여자와 헤어지는 것이 맞다고 여기는데, 그러한 생각이 분명하게 있는데, 그런데 그러한 생각이 뚜렷해지면 질수록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이 점점 더 짙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자기 마음을 숨기는데, 자기는 그런 불교신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남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여자를 잊지 못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남자가 불교신자를 사랑하는 것을 청산하고, 다른 예수를 믿는 여자에게로 돌아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행함에 해당이 되는데, 그래서 그 남자는 자기가 그렇게 애인과 결별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그 남자의 행함을 깨부수는데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남자가 생각하는 그런 자기 행함을 깨부수기 위해서, 계속해서 불교신자인 애인이 생각나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즉 그 남자는 불교신자인 여자를 만나지 않으면 견디지를 못하도록, 그렇게 일을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택한 자의 경우에 말이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는 알고 보니 옛날의 남자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래서 그에게 그만 실컷 얻어맞았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여자가 그만 자기 옛 애인을 쫓아가서 돌아서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꺾어버리면, 그 남자는 다시 새로운 애인을 찾아서 나서는데, 이전의 그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대체물을 말이다.
◈ 악은 미워할수록 점점 더 크게 자리를 !!
이 부분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철학으로 설명하면 좋은데, 철학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악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악은 점점 더 크게 그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는 말이다. 악을 미워하게면, 악이 청산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미워하는 원수가 점점 강하게 자기에게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바쁘면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런데 "저것을 내게서 떼 내어야지" 라고 미워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점점 더 분명해지면서 자기에게서 떼 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럴 때는 억지로 떼어내려고 하지 말고, 그런 것조차도 하나님께 감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 당신 예수는 당신이나 믿어라 ??
* 질문 - 저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아무리 성경을 좀 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이 많은데, 지난번에 한 '1+1'의 경우도 그렇고 말입니다. 사실 저의 경우에, 극단적으로 말해서 제가 지옥에 갈지 천국에 갈지 확신이 서지 않는데, 물론 인생자체는 지옥에 가야 될 인생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느껴지고 말입니다.
* 질문 - 그런데 제 아내를 보면 종교성이 아주 강한데, 금요일에는 철야를 가야만 되고, 방언도 좀 해야 스트레스가 풀리고 말입니다. 또 저의 어머니는 조금은 저질스럽다고(?) 할까요, 아무튼 교회에 가서 빌어야 복을 받는다고 여기는 전형적인 기복신앙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짓을 두 사람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 질문 - 그래서 제가 안타까운 마음에 복음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당신 예수는 당신이나 믿어라"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느끼기에는, 저렇게 예수를 믿으면 지옥으로 가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데 말입니다. 이런 저의 생각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게 좀 궁금해서 말입니다.
◈ 아무리 자기 가족이라고 해도 !!
지금 집사님의 생각의 문제점은, 지금 집사님의 세계관에는 어머니도 들어있고, 또한 사랑하는 아내도 있고 말이다. 아내나 엄마도 결국 타인이기에, 제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자기 생각대로 행동을 해야 마음에 들고 예쁜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자기 종교에 대해서 기복신앙이고 공격을 하면, 물론 자식이기에 용납해주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남이라고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욕을 날린다는 것이다. 구약 사사기의 미가가 그런 경우인데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보증을 서지 말라" 라고 하는데, 그것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뭐가 잘났다고 남의 인생에 관여하는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그 사람 인생의 책임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자식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또한 아내도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아내와 남편은 서로 이용하려고만 할뿐 !!
그러면 아내와 남편은 왜 같이 사는가? 그것은 바로 서로 이용해 먹으려고 살아가는 것인데, 그래서 아내가 "돈이나 좀 벌어와 봐. 좀 즐기자" 라고 하면, 남편은 "그래 알았다. 밥이나 좀 해라. 그리고 내 아를 낳아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자는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밥이나 해주고, 돈을 챙기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이렇게 자기 통밥을 굴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부부간의 문제 뿐만은 아닌데, 그러니 어떻게 자기 한 사람의 세계관을 가지고서 남을 지배하고 통치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가족이라고 해도 말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말이다.
◈ 그러니 일단 먼저 감사를 해야 !!
그러니 집사님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고 하니, 일단 그러한 어머니와 아내를 주신 것을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고, 그리고 그렇게 하면 지옥에 간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옥이니 말이다. 우리가 모두가 다 지옥에 태어났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뽑혀서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그것으로 그냥 지옥이고, 다만 주님께서 뽑아주시면 천국으로 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뽑아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복음에 대한 기쁨인데, 즉 자기 행함이 아니라, 영생은 오직 예수님의 의해서, 즉 다른 사람은 전혀 아닌 되고, 오직 예수님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강의 처음에 말한 1번과 2번인데, 그렇게 이미 주님께서 준비한 것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천국과 지옥을 항상 !!
이러한 소식이 차버리는 괴로운 소식이 아니라, 기쁨의 소식으로 들린다고 하면, 그 사람이 곧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을 언제나 하게 되는데, 바로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그 구원의 레이더망에 걸려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이 현실적인 삶보다 영생에 대한 생각을 한다는 말씀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이렇게 채널에 SBS가 있고 KBS가 있고 MBC가 있는데, 이런 각자의 채널을 좋아하는 사람이 다 따로 있다는 것이다. 마누라는 SBS를 좋아하고, 아이들은 MBC를 좋아하고, 자기는 KBS를 좋아하고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각각 다 다른 채널로 인도하시는데, 그런데 구원을 받은 사람은 복음의 채널도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CBS는 아니고 말이다. (ㅋㅋ)
◈ 사람은 각자의 채널이 다 있어서 !!
그러니 그런 것을 가지고 타인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데, 즉 "나는 천당에 가는데, 니는 지옥에 가지" 라고 말이다. 결코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전체를 하나님께 감사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두고 "나와 저 사람이 어떻게 다르고, 또한 나는 어떻게 뛰어난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자기의 행위로 인해서, 타인이 천국에 가고 지옥으로 가는 것에 전혀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변화가 생기지 않는데, 그것이 일종의 채널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그 많은 채널을 알 수 있는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편이 아내를 알 수가 있는가? 결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아내가 어떤 사건을 일으키면 그 사건에 의해서 영향을 입을 뿐이지 말이다. 아내가 또 무슨 사건을 일으킬 지도 모르고 말이다.
◈ 인간은, 결국 자기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고 !!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그래서 자기가 무슨 사건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은 제가 음주가무를 하지 않지만, 5년 뒤에 폭탄주를 마시고 거리에서 방황할지 어떻게 아느냐는 말이다. 이렇게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구원을 받는 것은 자기의 문제가 아니라, 즉 "내 인생을 바르게 살아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이미 준비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 복음의 채널을 'GBS' 라고 한다면, SBS나 KBS나 MBC를 보는 사람들은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복음의 채널을 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꼭꼭 숨겨놓은 채널이니 그렇지만 말이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채널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다만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항상 이 복음의 채널을 생각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집사님은 너무 그렇게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시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아내가 5년 뒤에 "내가 당신이 전에 그렇게 이야기할 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어요" 라고 한다면, 그리고 돌아서서 하는 말이 "당신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왜 그 따위로 살아요?" 라고 한다면, 역전이 되어서 말이다. 사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목사님, 그래도 요즘은 아내와 어머니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이 조금 드는 것이, 과거에는 그런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면 다 좋아했는데, 그런데 요즘은 "무슨 설교를 저렇게 하노?"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제 아내가 말입니다. 좋게 생각해서, 아무튼 옛날보다는 조금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만약에 그런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점진적인가요? 아니면 즉각적인가요?
그것은 이렇게 보면 되는데, 사실은 점진적인 것과 즉각적인 것이 둘 다 사실은 즉각적이라는 것이다. 점진적이 아니고 말이다. 점진적은 다만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즉각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여기에 사기꾼이 개입하는데, "당신은 지금 1단계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열심히 해서 2단계로 올라가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주님이 보시기에, 점진적인 것도 즉각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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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디도서를 !!
이제 디도서를 하겠는데, 진도가 잘 나가지요? 이렇게 진도가 나가는 재미도 조금은 있어야 공부를 할 맛이 나는데 말이다. 먼저 3장 4절과 5절을 살펴보자.
(딛 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혹시, 'not A but B' 용법을 아세요?
여기에 보면, 영어의 "not A but B" 용법이 나오는데, 즉 "A는 아니고 B이다" 라고 말이다. 이것이 이번 수능에 나올지도 모르겠는데(ㅋㅋ), 그런데 여기에서 무엇을 아니라고 하는가?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는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못 생각하면, "아하, 나의 의로운 행위는 아니구나" 라고 할 수도 있는데, 물론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의로움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라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점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정당성을 추구하는데, 설령 자기가 길에서 오줌을 누었더라도 정당성이 있는데, 즉 자기가 누고 싶어서 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줌이 나오게 했다는 것이다. 도둑질을 해도 정당성이 있는데, 우리 부모는 이혼을 하고 그렇게 돈이 없이 혼자 살다보니, 즉 사회가 그렇게 자기를 만들었다고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정당성을 추구해 !!
또한 컨닝을 하더라도, 자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우기고 말이다. 그리고 "집사가 왜 술을 마시는가?" 라고 해도, "아니, 집사는 사람이 아이가? 땡기는데 우짜노?"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게 전부가 다 자기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냥 행위라고 하지 않고, 앞에 '의로운' 행위라고 한 것은, 나쁜 행위가 있고 의로운 행위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행위는 다 자기 나름대로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자체를 아예 '의로운 행위' 라고, 그렇게 못을 박아버린다는 말이다.
◈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자비, 사랑, 긍휼 !!
그러면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오고, 또 5절에 긍휼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재미있는 게, 그냥 자비와 사랑이라고 하면 불교에서도 얼마든지 사용하는 용어들인데, 그런데 그것이 '긍휼' 앞에서 부수어진다는 것이다. (??)
이 긍휼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불쌍히 여기심' 인데, 그 뉘앙스가 어떠한고 하니, 처음부터 우리의 어떤 행동이나 과거의 행적을 일절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니가 왜 그렇게 행동했지?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라는 것을 묻지 않고, 그냥 불쌍히 여겨주심만 쏟아져서, 그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디도서 3장에 나오는 "A not B but" 용법이고, 영생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자비나 사랑이나 긍휼이나 궁극적으로 같은 의미가 아닌가요?
물론 같은 의미인데, 자비나 사랑은 기존의 종교에서 누구나 다 사용하기 때문에 오해할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비와 사랑과 긍휼은 원래 구약의 언약에서 나온 용어들인데, 말이 나온 김에 이것을 좀 설명하고 지나가자는 것이다.
◈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이것을 설명하기 이전에 '라인홀드 니버' 라는 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면, 이 양반은 20세기초 미국의 신학자인데, 그의 책 가운데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 개개인은 모두가 도적적인데,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모이면 왜 비도덕적 사회가 되는가?" 라는 것이다. 그 책의 주제가 아주 흥미로운데 말이다.
* 질문 - 비도덕적인 사회는 말이 되는데, 도적적 인간은 좀 그렇지 않나요?
집사님의 질문이 바로 이 책의 결론을 본의 아니게(?) 맞추고 말았는데, 니버가 이 책에서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는고 하니, 한 사람은 한 사람은 상당히 친절하고 착한데, 예를 들어서, 아침에 운동을 할 때 서로 인사도 잘하고, 또 부모님에게 문안도 여쭙고 출근하는데, 즉 그렇게 착하고 효도도 잘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직장에서는 왜 뇌물을 받고 장부를 조작하느냐는 것이다.
◈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해서 !!
그것은 바로 개인으로 있을 때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를 했는데, 즉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를 위한 사랑으로 말이다. 설령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나서 모두가 다 죽더라도 자기만은 살아남는, 그런 사랑으로 오해를 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가 나서 다른 사람은 모두가 다 죽었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살아남는다고 하면, 물론 고통스러운 마음도 있겠지만, 그래도 자기 혼자만은 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살아남았다고 하는 쾌감도 역시나 있다는 것이다.
왜 이웃사촌이 잘못되면 아프던 배도 낫는다고 하지 않는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그 반대로도 가능하니 말이다. (아닌가?) 그렇게 "신이시여, 이렇게 축복을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그만 개인적인 용도로, 즉 자기를 위한 사랑으로 여겨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독일에서 월드컵 축구경기를 하게 되면. 평소에 전라도와 경상도가 그렇게 싸우다가도, 그런 게임을 하면 한 마음이 되어서 응원을 한다는 것이다. "아, 대한민국! 으자차 차차"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갑자기 모두가 같은 편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 니버 - 하나님의 사랑은 혹독한 정의로움 !!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위한 사랑이 되었을 때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는데,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은 혹독한 정의로움의 사랑인데, 즉 하나님의 사랑을 혹독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이 니버가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니버의 주장이 상당히 중요하고 귀담아 들어둘 만한 내용이라는 말이다.
니버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사람들이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은 마치 산타클로스와도 같이, 그렇게 이웃에게 무엇을 베풀어주는 것을 사랑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혹독한 정의로움이 사랑인데 말이다.
◈ 저에게는 이것이 합당합니다 !!
예를 들어서, 12년 동안 하혈을 하는 여인이 나오고, 또한 강도가 나오고,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자가 나오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인가? 그런 것은 오히려 저주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문둥병자이고 말이다. 그것이 무슨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것이냐는 것이다. 차라리 건강하고 그런 징그러운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 훨씬 더 좋지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12년 동안 하혈을 하면서 살아온 여인이, 사실상 사랑이 아닌 저주를 받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것이 결코 저주가 아닌 자기에게 합당한 하나님의 사랑인 줄로 알고, 즉 "맞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합당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바로 그 여인은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12년 동안 피를 흘리며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아온 자기 처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자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일하게 여기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달은 자라는 말이다.
◈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오직 십자가로 !!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오직 십자가로 나타나는데, 그러니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잡아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십자가 앞에서는 그 어떤 인간라도 다 죽어야 하니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는 예수님이 거기에 달려서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들이 다 이렇게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사랑은 바꾸어서 말하면, "너는 살 가치도 없어. 진작 버림을 받았어야만 돼"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에 대해서 "예, 맞습니다. 저는 바로 그런 인간입니다" 라고 동의를 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 성도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이 있어야 !!
아까 제가 강의하면서 말한 첫째와 둘째를 다시 이야기해보면, 첫째는 이미 죽은 자도 산다고 하는, 즉 영원히 산다는 것이고, "내가 주와 함께 죽었고, 주와 함께 살았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인간의 행위는 아니고, 그래서 예수님이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가 무엇인고 하니, 타인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자기의 착함이나 훌륭함 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전혀 경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디도서에 의하면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서, 즉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이 언제나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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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빌레몬서를 !!
이제 빌레몬서를 보겠는데, 오늘 진도가 잘 나가는데 말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놓치지 않고 모두 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고, 먼저 빌레몬서 1장 14절 말씀을 보자.
(몬 1: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에 보면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즉 '선한 일'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선한 일이란 무엇인고 하니, 아까 인간의 행위를 버리라고 해놓고 지금은 왜 또 선한 일을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 쟈크 엘룰 - 하나님의 사건만 선(善)이다 !!
이 선한 일을 '쟈크 엘룰' 이라는 사람의 주장을 빌어서 이야기해보자면, 혹시 이런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20세기 중반의 철학과 법학을 전공한 유명한 사람인데 말이다. 이 사람의 책 중에서 '뒤틀려진 기독교' 라는 책이 대장간에서 출판되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즉 기독교는 처음부터 뒤틀려져 왔는데, 그러니 지금의 기독교는 가짜라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가 가짜인 것처럼 말이다.
이 양반이 선과 악에 대해서 무슨 주장을 했는고 하니,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인간이 주장하는 모든 선과 악은 다 엉터리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선(善)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사건만이 말이다. 즉 하나님의 사건을 사건으로 제대로 이해하는 그것이 곧 선이라는 것이다.
◈ 컵이 옆으로 놓여진 것을 보면 왜 찜찜한가?
여기에 컵이 이렇게 거꾸로 놓여있다면 그것도 보기 싫고, 또한 옆으로 놓여있으면 그것도 보기 싫고, 그런데 이렇게 바로 놓여있으면 괜찮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 앞에서처럼 컵이 거꾸로 든지, 혹은 옆으로 놓이면 보기가 싫은가? 사람은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는데, 물론 여기에서 '진'은 진리이고, '선'은 선함이고, '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3+5=9' 라고 하면 뭔가 찜찜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3+5=8' 라고 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3+5=9' 라고 하면 악한 것이고, 그것이 '3+5=8' 라고 해야 선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컵도 옆으로 놓여있던지 바로 놓여있지 않으면 악한 것이고, 컵이 바로 놓여있으면 선하다고 본다는 말이다.
◈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비로소 눈이 밝아지는데 !!
바로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까,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재미가 있는 것이, 인간이 언제 눈이 밝아지는고 하니, 죄를 지어야 비로소 눈이 밝아지니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만약에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병신(?)인데, 즉 하나님이 처음에 만든 인간은 병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악마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는 똑똑해졌다는 말이다. 인간이 그렇게 똑똑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행위를 의지하게 되는데, 즉 "내가 선하고, 내가 참되고, 내가 아름다울 때, 비로소 '나'다운 것이다" 라고 말이다.
◈ 어리빙빙한 사건을 자기 택한 백성에게 !!
그런데 하나님의 사건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중요한데, 처음에 창조했던 그 어리빙빙한(?) 사건을 자기 택한 백성에게 발생을 시킨다는 것이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누가 저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요즘 무엇을 해도 기억도 제대로 안 나고 완전히 맛이 갔습니다" 라고 말이다.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어떤 사건인고 하니까, 똑똑한 자기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총명하고 똑똑한 내가 그러한 실수를 하다니, 있을 수 없어" 라고 하는 사건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총기가 있고 똑똑한 시절을 다 보내버리고,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어리빙빙하게 만들어버리는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바로 인간이 창세기 3장에서 죄를 짓기 전의 사건인데(?), 즉 원초적 사건이라는 말이다.
◈ 선(善) - 하나님의 사건을 통해서 자기의 못남을 !!
그러한 사건을 우리 인생에 집어넣어 버리면, 무엇과 무엇이 싸우는고 하니, 지금의 똑똑한 자기 자신과 죄를 짓기 전의 어리빙빙한 자기 자신과 마주치게 되면서, "안 돼. 나는 계속해서 똑똑해야 돼. 나는 모든 것을 꿰뚫어야만 돼. 나같이 참되고 선하고 착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이런 사건이 말이 안 돼. 이것은 나를 망치는 사건이야" 라고 하면서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그 사건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러면 안 되겠어. 내가 나의 똑똑함을 의지하면 정말로 안 되겠어" 라고 하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사건을 두고 쟈크 엘룰은 바로 '하나님 선하심'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쟈크 엘룰 - 오직 하나님의 언약으로 구원을 !!
상당히 어려운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복음적인데, 그 양반은 평신도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기독교는 모두 엉터리이며, 오직 하나님의 언약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사람인데, 그러니 놀랍게도 언약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반세기 이전의 사람인데 말이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구원을 받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인간의 행함은 이슬람교의 도적주의가 기독교에 침투해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하지만 교회가 그러한 도덕주의로 흐르게 되면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 오늘 저녁에 교회사 시간에 !!
그것이 바로 오늘 저녁에 교회사를 하면서 강의할 내용인데, 그의 '뒤틀려진 기독교' 라는 책을 오늘 저녁에 요약해서 강의할 것인데, 아무튼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이 책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단 한 명의 참된 기독교인만 있어도 기독교였는데, 그런데 전도해서 여러 사람이 모일 때부터 이미 기독교는 끝이 나버렸다는 것이다. 65페이지에서 그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그런 내용하고, 전에 기독교 신문인 '뉴스앤조이'의 최재호 기자가 이광호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뭐라고 질문을 했는고 하니, "만약에 참된 교인이라면 지금 한국교회에서 어떻게 할까요?" 라고 직설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이광호 목사님은 "그러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흐름이 같은 것이 아닌가요?
물론 그런 측면이 있는데, 아무튼 지금 한국교회를 교단을 가지고 이단인지 정통인지를 구분하려고 한다면, 사실은 그 자체가 큰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정통교단(?)에 속한 교회에 다니지를 않으면 쉽게 이단이라고 해버린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교회에 잘 다니는데, 그런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자기의 진선미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기존교단에 속한 교회에 다니게 되면,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기의 행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말은 아니고, 그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실 문제이고 말이다.
◈ 난 못났어, 정말 못났어 !!
다만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쉬지 않고 옆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자기가 바보병신인가를 깨닫게 하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니가 신장을 떼 주고, 또 구제를 한다고? 그것이 모두가 누구의 것인데? 전부가 다 내 것이지 않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의 마음을 낮추게 하는 사건이 계속해서 터진다고 하면, 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성도라는 말이다.
* 질문 - 저는 제가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저의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오리지널 이단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얼마 전에 장소는 어딘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제가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바로 우리 자신이 악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자신이 악마라고 깨닫게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날 때 그렇게 되는데, 그때는 이러한 악마라는 표현보다는 "아하, 우리들은 이미 범죄한 죄인이구나"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 다시 빌레몬서를 !!
이제 빌레몬서를 하겠는데(아까도 말했는데, ㅋㅋ), 이 빌레몬서에 보면 '오네시모' 라고 하는 노예가 하나 등장하는데, 물론 그 당시의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사실 노예들에게는 그렇게 취급을 받는 것이 오히려 더 편했다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은 그것이 이해가 잘 안 될지 몰라도 말이다.
◈ 사도바울, 빌레몬, 오네시모 !!
그래서 시골에서는 자식들이 있으면 도시의 잘 사는 친척집이나 아는 집에 식모로 보내기도 했는데, 아무튼 거기에서는 그래도 일만 하면 먹고 살아갈 수는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운이 좋으면 공부도 하고 시집도 갔다는 것이다. 잘릴까봐 걱정도 했고 말이다. 그런 것이 습관화가 되어서, 아무튼 그렇게 남의 집에서 기대서 살아가는 것이 편한 팔자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한 노예 중에서 오네시모가 있었는데, 이 오네시모를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을 하려고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에게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 사도바울 : 오네시모를 내가 좀 일을 시켜도 되겠는가?
* 빌 레 몬 : 오네시모에게 말입니까?
* 사도바울 : 그래. 하나님의 일을 억지로는 하기 싫고, 어떻게 좀 되겠어?
* 빌 레 몬 : 그럼요.
* 사도바울 : 솔직히 마음에 내키는 데로 이야기를 해봐.
* 빌 레 몬 : 얼마든지 좋을 데로 하세요.
* 사도바울 : 그래, 고마워.
* 빌 레 몬 :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 사도바울 : THANK YOU.
* 빌 레 몬 : WELCOME.
◈ 주의 일은 자연스럽게 ??
이것이 바로 빌레몬서의 내용인데, 그러니 사도바울의 주의 일을 할 때 억지로 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주의 일이 나 개인 소유의 일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사도바울이 답답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기도 주의 종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므로 마치 자기가 주인이 된 것처럼 그렇게 설치고 말고 할 이유가, 아닌 그러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마귀만 좋아하지 말이다. 그러니 주의 일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해야하지,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빌레몬서는 바로 그런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오네시모에 대한 사랑과 노예제도에 대한 태도라든지 하는, 그런 것보다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이제 히브리서를 하겠는데, 여러분이 알든 모르든 간에 진도를 나가니 기분은 좋은데(?),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아무튼 영생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라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미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자기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것이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서 오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번째는 타인과의 경쟁인데??)
그렇게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게 되면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리고 마는데,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말이다. 무엇을 바쳐야 되고, 섬겨야 되고, 봉사를 해야 되고 말이다. 십일조, 주일성수 등등, 그러나 결단코 그런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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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히브리서를 !!
이제 히브리서를 보겠는데, 히브리서의 내용은 이러한데, "한 마디로 예수님이 다했다" 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엇을 다 했는가?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이다. 어떤 율법을 다 지켰는가? 특히 제사법을 다 지켰다는 말이다. 그렇게 율법을 예수님께서 다 지켜서 구원을 하셨다는 것이다.
◈ 한 마디로, 예수님이 다했다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좀 어려운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면 그냥 자기의 능력으로 구원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제사법을 다 이루어서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기에, 그래서 죄인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죄 있는 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는 그 어떤 형태로든 죄가 들어오면 안 되는데, 그래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의 공로가 들어와야 하는데,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렇게 구원한다고 해서 "예수님,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과 함께 둥실 두둥실 !!
지금 제 말이 어려운가요?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첫째로 잘못된 상태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고 인간은 여기에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또 여기에 계셔서 "이것은 내 공로이다. 이제 나는 가거라" 라고 해서, "예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해서 웃으면서 만세를 부르면서 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히브리서에서 무엇이 옳은 상태인고 하니,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고 인간이 여기에 있는데,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예수님과 손을 잡고 간다는 것이다. 마치 이렇게 고무풍선이 두둥실 둥실 떠서 그 안에서 들어서 함께 가듯이,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에게로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된 그림이라는 말이다.
그 차이점을 알겠지요?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그러니 "어이 이근호, 내가 다 알아서 해놓았어. 어서 빨리 가"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휘파람을 부르면서 자기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은 없는데, 반드시 '같이', '함께', '위드(?)'를 해서 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풍선을 타고 두둥실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챙겨주신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로임을 잊지 않도록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시는데, 그래서 그런 예수님에게 딸려있는 우리가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바라보고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데, 일단 24절과 25절을 보자.
(히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까, 철없이 까불기만 하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계속해서 기도를 해주니,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도로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주님의 기도로 구원을 받는가? 예수님의 기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아, 나의 낙타무릎아 !!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