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43-법,갈라디아서2(강의정리)
05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43-법,갈라디아서2(강의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05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43 - 법, 갈라디아서2
05,09,1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의 '자기 영역확대'에 대해서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정(精)으로 만난다고 말은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분석해보면, 그 사람과 자기가 공통성이 있을 때만 사람들은 대화가 소통이 되고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공통된 소통, 즉 취미가 같다든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있다든지, 같은 고향이나 학교 출신이든지 말이다. 이렇게 될 때는 상대방이 자기편이 되어주는데, 그것을 두고 자기의 '영역확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죄라고만 생각하지를 말고(?) 인간의 본능이라고 보면 되는데, 왜 짐승들이 일정한 구역마다 오줌을 눈다고 하지 않는가? 왜 그런고 하니까, 학자들마다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목소리가 그것은 개가 그렇게 오줌을 누는 것은 자기 영역의 표시라는 것이다. 물론 똥개가 돌아다니다가 자기 집이 아니라 밖에서 다리를 쳐들고 누는 것은 급해서 그런 경우가 많겠지만 말이다.
◈ 잠시 수학특강을 ??
알다시피 수학에서는 "1+1=2" 라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의 경우에는 "1+1=3", 혹은 "1+1=4", "1+1=5" 라고, 그렇게 확대가 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1+1=2"가 일시적으로 되지만, 그러나 2가 되면 저쪽에 1이 남는데, 그렇게 되면 2가 1을 잠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1+1=3"이 될 가능성이 1보다는 많다는 것이다. (??)
무슨 말인고 하니, "1+1=2"가 되는 동시에, 즉 여기에 이렇게 집단이 죽 놓여져 있다면, 이런 집단이 개별적으로 있다가 "1+1=2"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2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른 1보다 2배의 차이점 때문에 곧장 3으로 갈 가능성이 있고, 그리고 여기에 있는 1은 0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흡수통합이 되니 말이다. (??)
그래서 아파트 단지에 처음에는 각자 각자가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그렇게 이사를 오더라도, 어느 날 보면 군집이 되어있는데, 그것이 이장들이나 통장들 모임에 가보면 알 수 있는데 말이다. 바로 그것은 자기 영역의 확대를 인간은 쉬지 않고 해나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포섭을 해서 자기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 공자왈, 세 사람만 모여도 한 사람의 지도자가 !!
그래서 공자가 뭐라고 했는가? 세 사람만 모여있어도 한 사람의 지도자가 생긴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리더가 등장하고, 그래서 리더쉽이 어쩌고 하면서 가르쳐주는 곳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더쉽은 일종의 '다른 사람 이용하기'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리더에게 복종하려고 리더쉽을 공부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희생을 좀 덜하고, 당신이 성깔이 좋으니 열심히 뛰어서 뭔가 일이 되면, 우리는 그 부스러기나 좀 얻어먹을게. 그 대신 당신에게 잘한다고 박수를 쳐줄게" 라고 말이다. 그렇게 뒤에서 잘한다고 박수나 쳐주고 부추기면, 그 사람은 더욱 열심히 일을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리더는 그만큼 자기 희생에 대한 보람을 느끼는데, 즉 그냥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만약에 그 사람이 정수기를 판다고 하면 많이 팔 가능성이 있고, 또 보험회사에 다닌다면 보험계약을 많이 체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 교회도 큰 교회를 가야 !!
그래서 교회를 가더라도 큰 교회에 가게 되는데, 왜냐하면 단골을 보다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대학을 다니던 자기 아이가 방학을 하면 아르바이트 자리가 많을 수도 있고, 또 과년한 딸이 있으면 선을 볼 기회가 많아지고 말이다. 나중에 자기가 장사를 하게 되더라도 손님이 많아지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의 집단에서는, 물론 교회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무튼 하나의 집단에서는 자기 혼자 고립이 되어서는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연줄로 연줄로 해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 라캉 - 타인의 욕망이 '나'를 만들어 !!
이것을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라고 하는데, 라캉이 주장한 유명한 이론인데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나' 라고 하는 것을 항상 새롭게 조립을 하는데, 그 '나'는 타인의 욕망이 만든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도 조금 했지 싶은데, 그런데 그런 타인의 욕망이 '나'를 만들려고 하면, '나'를 타인에게 인수인계를 시켜야 하는데, 이것을 라캉은 조이너스, 즉 '항유' 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즐긴다' 라는 의미인데, 물론 이것은 육체적 쾌감과는 약간 다른데, 즉 술을 마시면 그것은 그때뿐이고 지나고 나면 머리만 아프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향유는 정신적 쾌감이 되어서, "내가 이 사람에게 술을 접대했더니만 하청을 주었더라" 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는 사실 술을 먹는 것이 쾌감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술 상무와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직업이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고통이지만, 그러나 더 정신적인 향유가 따르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는 말이다.
◈ 타인의 욕망은 외부의 시선이 !!
이러한 타인의 욕망에, 사실 여기서 이 타인의 욕망이 중요한데, 이 타인의 욕망은 어디서 만드는고 하니, 이 타인의 욕망은 외부의 시선이 만든다는 것이다. 즉 외부의 따가운 눈총이 말이다. 물론 포근하고 부러워하는 눈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타인의 그런 수많은 눈동자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데, "얼마나 잘 되는지 한번 보자"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데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거기에 물어보면 관심이 없는데, 그러니 본인은 정작 자기 것은 없고 타인의 그런 기대감에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다.
◈ 조이너스, 꼼빠니아, 논노 ??
그런 타인의 욕망을 전체적으로 다 합치면 일종의 꽃다발이 된다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한 엄청난 타인의 욕망에다 자기를 헌신하게 될 때, 그것을 '조이너스' 라고, 라캉이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조이너스' 라고 하니 과거 여성복 브랜드 이름이 떠오는데 말이다. 꼼빠니아도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조이너스, 즉 '항유' 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핍을 타인의 욕망에다 전가시켜서, 그렇게 해서 타인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너희들이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엄마가 시켰잖아 !!
이런 것이 어릴 때 잘 드러나는데, 즉 "나는 공부를 하기 싫지만, 엄마가 원해서 공부를 했잖아" 라고 하는데,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이것이 무의식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잠재되어있는데, "엄마, 한번 두고 보세요. 내가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올 테니" 라고 말이다. 그러니 어릴 때 그런 것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기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인간에게 참 불행한 것인데, 인간은 무엇을 하나 경험하면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바쁘다보니 잠시 떨어져 있다가, 어떤 계기가 되면 다시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릴 때의 여러 가지 것들이, 이것은 체험은 아닌데, 왜냐하면 체험은 날아가 버리니 말이다.
◈ 상흔(傷痕)이 복수심으로 !!
그것은 체험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마음의 상처라고 할까요? 그것을 '상흔(傷痕)' 이라고 하는데, 즉 상처가 난 흔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남아서 복수심으로 나아가는데, 이런 복수가 자기 힘으로 되지 않으니 타인의 힘을 빌리게 되는데, 그래서 타인의 욕망에 자기가 손을 들고 들어가서 남들이 보란 듯이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서, 타인의 욕망도 만족시키게 되고, 자기에는 복수도 된다는 말이다.
◈ 라캉 - 그것이 바로 '분열된 주체' !!
아무튼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부지런히 주체를 만들어나가는데, 그런 주체를 두고서 라캉은 '분열된 주체' 라고 했는데, 인간은 날마다 그렇게 분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분열이 되면 결핍이 생기는데, 그래서 인간은 안절부절을 못하는데, 왜냐하면 자꾸만 모자람이 있기에 말이다. 즉 인간은 밑 빠진 독처럼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 모자람은 바로 타인의 시선에서 나오고 말이다.
◈ 이등병은 치마만 둘러도 !!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까, 군대에서 이등병이 바라보는 애인상과 병장이 바라보는 애인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등병은 치마만 두르면 다 좋다고 하는데, 그런데 병장이 되면 마음이 달라지는데, 치마는 기본이고 얼굴도 좀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를 하고 나오면 백수가 되는데, 그때는 또 달라지는데, 다시 치마를 두르는 것으로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여자들은 백수를 잡는 것이 훨씬 유리한데, 백수들은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만으로 감격해하니 말이다. "아니, 나 같은 인간은 사랑해주다니"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렇게 사귀다가 그 남자가 취직을 하게 되면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쳐다보는데, 그것은 그 남자가 인간성이 더럽고 바람기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자기 결핍을 채우려고 배신을 ??
이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그 남자는 타인의 통해서 자기의 결핍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여자를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향유'를 하게 되는데, 즉 삶의 보람을 느낀다는 말이다. 새로운 기대와 새로운 소망 가운데서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여자 같으면 재미가 없는데, 물론 이런 이야기는 여자들이 들으면 상당히 기분이 나쁘고 외설적이 되지만, 남자가 그런 여자를 가지게 되면 그 여자에게서는 자기 결핍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그 여자는 타인으로서 자기를 땡기는 맛이 없다는 것이다. 즉 신선도가 영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점점 헤어질 핑계거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시절에는 30대라고 해도 한 여자와 사귀면 그것을 정리하고 다른 여자를 사귀었는데, 그런데 요즘은 겹치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다리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문어발 작전을 펼치는데, 이 여자를 사귀면서 또 다른 여자를 사귀고, 또 다른 여자를 걸치고 말이다.
◈ 가치는 서로의 차별을 통해서 !!
지금 분위기가 이것이 성경공부보다 더 재미가 있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무튼 사람은 자기 혼자 있으면 가치를 모르는데, 왜냐하면 가치는 서로의 차별을 통해서 드러나기에 말이다. 즉 반드시 차이를 통해서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들만 줄줄이 있는 집에 여자가 태어나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그런데 딸만 5명인데, 또 딸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혹시나 "얼굴에도 품위가 있다" 라는 말을 아세요? 얼굴에서 나는 빛이 다르다는 것인데, 그러면 어느 집에서 자란 딸이 얼굴에 더욱 더 빛이 빛나겠는가?
그리고 옷을 하나 골라도 어떠한고 하니, 10만원자리와 30만원자리가 있으면 30만원자리가 훨씬 좋아 보이지만 빛도 나고 말이다. 그러나 300만원자리가 그 옆에 오면 30만원자라는 그만 이전의 광채를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전혀 비교가 안 되게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것이 오게 되면 주체는 또 다시 새로운 기대와 소망으로 그만 설레이게 되는데, 바로 그것을 '향유' 라고 한다는 말이다. 남자의 경우에, 그 새로운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그동안 자기가 차지했던 여자를 과감하게 정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자는 남자를 정리하면 안 되나?)
그래서 잉어낚시를 하더라도 자꾸만 새로운 잉어를 잡고 또 잡아야 재미가 있고 신이 나는 것이지, 앞에서 잉어를 잡았던 즐거움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소설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말이다.
◈ 알 수 없는 소망 ??
흔히들 '알 수 없는 소망' 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애초부터 결핍된 주체가 인간 속에 태어날 때부터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가 자꾸 분열을 하는데, 자꾸만 무너지고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즐거움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그런데 그 즐거움은 결핍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결핍이 만들어져야, 그것을 '구멍' 이라고 하는데, 그런 구멍이 있어야지 욕망을 내뿜는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 질문 - 그런 즐거움은 획일화된 것은 아니지 싶은데, 그런 다양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나요? 환경인가요? 아니면 교육인가? 타고난 성격인가요?
그것은 본인의 성격이 아니라, 외부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것이다.
* 질문 - 아까 목사님은 경험의 해석인 상흔을 말씀하셨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가요?
그런 상흔은 계속해서 쌓이는데, 잊어버렸다고 해도 의식 속에서 잊어버린 것이지, 사실 무의식 속에서는 그런 잊어버린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반드시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꿈에 나타나는데, 19살 때의 자기 첫 사랑인 은정이와 손잡고 놀던 풍경이 떠오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그런 다양성의 즐거움을 어디서 비롯되는가요?
그것은 의식의 세계에서 새로운 우발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자기의 욕망과 만나면서 욕망이 새로운 결핍을 느끼게 되는데, 즉 "아, 저것을 가지고 싶어" 라고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백 만원자리 옷을 한번 입고 나면 그 촉감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자기의 형편에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소망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입고 말겠다는 것이다. - 치토스 ??
* 질문 - 그러면 그런 즐거움은 자기 경험을 해석한 것에서 나타난 것인데, 그러면 의미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마다 각자의 즐거움이 다르다는 말인가요?
거기에 대한 해석을 유명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어떻게 했는고 하니, 놀랍게도 그것을 인간의 '죽음' 이라고 보았는데, 즉 죽음이 손짓을 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간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그렇게 해석을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요?
물론 해석의 주체도 역시 타인인데, 즉 "너는 이렇게 이렇게 해야 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런 다양한 즐거움은 타인의 눈에 의해서 본인의 즐거움이 표출되는 것인가요?
그래서 정치적 타협을 하는데,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얻을 것은 얻고 말이다. 그것은 본인이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경험이 모두 다르고, 또한 거기에 대한 해석도 다들 다르니 말이다. 아니, 가정환경이 똑같은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 질문 - 그러면 결국 개인의 주체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개인의 주체는 없는데, 그래서 이런 라캉의 주장을 사람들이 굉장히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아니, 자기가 없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말이다. 이렇게 '내'가 엄연히 존재해 있는데, 그런데 주체가 없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본인이 즐거워하는 것도 타인의 의한 즐거움이 아닌가요?
물론 타인의 시선이 원하는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예비군을 갔다고 하면, 거기서 시키는 데로 하지 않으면 벌금이 나오고 하니 할 수 없이 따라하는데, 그러니 다시 '나' 라는 것은 그만 사라지고, 즉 오늘 오후에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그런 기대감은 모두가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종일 거기서 시키는 데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이다.
◈ 예, 알겠습니다 !!
그렇게 보면 라캉이 하는 말이 맞는데, "당신이 그렇게 큰소리를 쳐도 당신을 그렇게 억압하고 옭아매는 집단이 왔을 때 당신은 어떻게 되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만 다시 거기에 적응을 하는데,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다.
직장 동료들과 노래방에 가서는 "김 부장, 나와!" 라고 하면서 큰소리를 마구 쳐도, 막상 그 다음날 회사에서 그 부장을 만나면 곧 바로 기고 말이다. 바로 그런 것이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평생동안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세상의 모든 변화를 습득하기가 불가능 !!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온 세상의 모든 변화에 대해서 습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정보와 지식을 다 습득을 할 수도 없고, 더욱이 그것을 본인이 모두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가 없으니, 낯선 곳에 가서는 그만 머뭇머뭇거린다는 것이다.
왜 영화가 막 시작해서 극장 안에 들어가면 처음에 캄캄하지 않는가? 그래서 더듬어야 하는데, 그러다가 실수로(?) 앉아있는 남의 아가씨 젖가슴도 만지고 말이다. 그런데 극장 직원들은 그 복도를 귀신같이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도 조금 있다가보면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물론 그렇게 뭔가를 좀 보려고 하면 막상 영화는 끝나고 말지만 말이다. (영화만 보면 되지, 또 뭘 보려고?)
그러니 인간이라는 것은, 구약 전도서의 말씀대로 결국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된 것인데, 그러니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다. 마치 조영남이 노래한 것처럼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인생은 그렇다는 말이다.
* 질문 - 개인적 즐거움이 타인의 시선의 변화에 의해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씀인가요?
물론 가능한데, 습관은 성격이 되고, 이 성격은 정치적 타협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결국 인간은 환경적 동물이네요? 교육도 그런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당연히 그러한데, 물론 환경을 30%로 보는데, 그런데 유전적 요인이나 그런 잘 모르는 것을 빼버리면 30% 자체가 100%라는 말이다.
* 질문 - 모든 인간이 획일화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30%는 다 공통화가 되어있다는 것인가요?
그렇게 획일화된 교육을 받는데, 그런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자들이 이것을 잘 모르는데, 사실은 선생님과 인간적인 교류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다. 교육내용은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교육내용보다는 선생님이 중요 !!
그런데 배우는 학생들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신비로운데, 그래서 새로운 신비에 대한 향유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결핍을 채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좋으면 그 과목성적이 올라가게 되고 선생님이 싫으면 그 과목성적도 그만 떨어진다는 말이다. 물론 머리가 나쁘면 이래도 떨어지고 저래도 떨어지지만, 상대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너무 정을 많이 주면 안 되는데, 그것은 교육의 본래목적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교육의 본래목표는 뛰어난 학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준화' 인데, 그것이 교육의 본래적인 이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를 편애하게 되면 자기들 사이에 문제가 일어나는데, 교육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잘된 학생 하나를 위해서 열 명이 희생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 돈을 갖다 바치고 상처도 받고 말이다. 우리가 훌륭한 선생님도 기억을 하지만, 그러나 자기를 괴롭힌 그런 못된 선생님도 기억하는데, 아니 평생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못된 선생님들이 학교 안에 너무나 많고 말이다. 부모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강의한 이러한 내용들이 오늘 성경공부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게 될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법'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 법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 복음에 새로운 요소는 없다 ??
아까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김 집사님과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복음에 새로운 요소는 없다" 라고 말이다. 이것은 복음이 싫다는 말이 아니고, 더 이상 새롭게 추가된 것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은 단독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디에 들어있는데, 그것이 어디인고 하니, '법 안'에 둘러 쌓여있는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 복음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기쁜 소식인데, 이렇게 법이 아니라 복음이 구원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을 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나를 구원시켜주는 것이지,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김 집사님의 말이 분명히 맞는데, 자기가 부산으로 가든, 서울로 가든, 인천으로 가든, 아니면 광주로 가든지 간에 말이다.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대구로 간다고 해서 구원이 더 빨리지는 것도 전혀 아니고 말이다.
◈ 복음은 반드시 '법 안'에서 !!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면 안 되는고 하니, 이 복음은 반드시 법 안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아는 사람이 제가 살펴본 논문들에 의하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법인가? 복음인가?" 라고 하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지 말이다.
◈ 아니야, 법은 아니야 !!
하지만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라, 복음은 반드시 법 안에 나타나는데, 그런데 그렇게 법 안에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법은 아니고 복음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법도 전혀 없는데, "야, 내가 복음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법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가 되어있으면서 하는 말이, "글세, 내 말이 그 말인데, 법이 아니라니깐"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복음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는 그런 율법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런데 그런 율법적 굴레에서 살아가면서 복음을 안다는 말씀이지요?
참 좋은 질문인데, 당연히 그렇다는 말이다. 이 법은 어디에서 생기는고 하니, 라캉에 의하면 자기의 욕망과, 사실 자기의 욕망이라고 하면 안 되고 주체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이 너무 어려우니, 일단 자기의 욕망이라고 하면, 그 자기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이 서로 타협을 해서, 그런 타협의 결과로서 법이 생긴다는 것이다.
◈ 법을 자기가 만들고, 또 자기가 지키고 ??
예를 들어서, 일본 아줌마들이 배용준을 엄청 좋아하는데, 그래도 자기 집을 팔아서 욘사마에게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리따 공항에 나와서 손을 흔들고 디카로 찍기는 하지만, 그러나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협인데, 그런데 욘사마가 어떤 아줌마 팬에게 한국까지 초청을 해서 직접 식사를 했다고 하면, 그 아줌마는 다시 타협을 하게 되는데, 즉 집은 아니더라도 자동차를 팔 용의는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타협과 타협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한 글자로 '법'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법은 누가 만드는가? 인간인가? 물론 맞는데, 인간이라고 하지 말고 '내'가 만들었다고 하면 맞다는 것이다. 즉 법은 '내'가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법을 자기가 만들고, 또 자기가 지키고, 또 자기가 잘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깜짝 놀랄 일이란?
그러므로 이러한 법의 특징이 바로 타협인데, 이런 것이 아주 재미가 있는데 말이다. 아마 여러분이 들으면 깜짝 놀라지 싶은데,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만든 법이 있을 때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 규칙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인간이 본능 자체로 있을 때는 죄가 아닌가요?
본능이 곧 욕망인데, 그래서 들뢰즈는 "인간은 욕망 덩어리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자기가 법을 만드는데, 그런데 자기가 법을 만들어놓고도 위반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성질이 날 때라든지 말이다. 그래서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욕이 튀어나오곤 한다는 말이다.
◈ 죄가 내부적으로 선과 타협을 !!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지으면 이 죄가 내부적으로 선과 타협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나쁜 짓을 했으면 착한 일을 한 것이 지분을 떼 내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밤잠을 마구 설치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서 죄는 선에서 나온 미끼를 얻어먹고는 당분간 입을 다문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이번에 비록 욕을 해서 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일주일 전에 길을 잃고 그만 헤매는 할머니를 집에 안전하게 모셔다 주었잖아"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죄를 지은 자기 입을, 자기가 한 착한 일의 일부분을 가지고 그만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서로 적당히 타협을 해서 일종의 휴전상태에 들어가는데, 그러나 그렇게 되면 법의 경계선이 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이제 다시는 욕을 안 할거야" 라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너무 자주 욕을 하면 안 되지. 물론 안 되고 말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 그런데 그만 '자유'가 튀어나와서 !!
이것이 결코 만만한 내용이 아닌데, 아무튼 의식상태에서는 "이제는 가능한 한 욕을 하지 말아야지" 라고 하고 있는데, 그런 의식상태로 그냥 가만히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유' 라는 놈이 나와서,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 "그러면 나는 욕할 자유도 없나? 그리고 아무도 없으면 좀 해도 되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자유의지' 라는 것인데, 그것이 치고 올라온다는 말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리비도' 라고 해서 '성적욕망'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것을 추적해 나가면 죽음의 욕망과 삶의 욕망이 나오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아까 말씀한 죽음의 욕망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올라온다는 것이죠?
그렇게 무의식의 세계에서 치고 올라오는데, 그런데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나는 로봇이 아니잖아? 그런데 왜 내가 구속을 받아야 해? 나는 법에서 해방되고 싶어" 라고 부르짖으면서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 나는 법에서 해방되고 싶어 !!
여기서 무엇이 중요한고 하니, 바로 이 "나는 법에서 해방되고 싶어" 라는 것인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겨울 수련회 교재로 사용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데, 그렇다면 제가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이것이 복음인가? 아니면 우리의 본성인가?" 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본성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데 왜 기존교회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반칙이 어디 있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복음이냐는 말이다. 분명 인간의 본성인데 말이다. 그런 인간의 자유를 누가 막겠는가? 전두환이 막겠는가? 이명박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19세기 폴란드 혁명의 구호가 무엇인고 하니, "땅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했는데, 그런 자유에 대한 욕구를 누가 막겠느냐는 것이다.
◈ 인간은 누구나 바바리 맨 ??
그런데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그런 자유가 어디서 나오는가? 본인에게 물어보면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데, 왜냐하면 자기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점잖을 빼고 해도 그것이 다 눈감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놈이 이리 삐죽, 저리 삐죽 튀어나와서, 자기가 언제 바바리맨(?)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병을 어떻게 보았는고 하니, 인간이 자기에게서 올라오는 그 자유를 억누르고 짓밟는데, 올라오면 자기 생활이 엉망이 되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오지 말라고 밟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니 말이다. 그래서 정신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게 자유를 억누르는 이유가 법 때문에 그런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계속해서 억누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유를 그냥 놓아둘 수도 없고, 그래서 서로가 타협을 하는데, 그것이 법이고, 그게 오래되면 '관행'이 된다는 것이다. (관습법?) 그리고 그 관행이 그 사람의 성격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성격이 좋다" 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내 자유도 당신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성질대로 하겠다는 것은, 즉 "왜? 내 자유다. 씨" 라고 하는데,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말이다.
◈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이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무엇을 명심해야 하는고 하니,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동물적 충동과 욕망 그 자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라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복음을 좋아하면서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원초적 본능에서 나오는 자기 자유로서 이해한 복음을 생각하면서 "아멘, 할렐루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말이다.
이런 현상은 진짜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는데, 그런데 그것을 두고 "나는 복음을 안다" 라는 식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유의 확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런 자기의 자유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 자유를 두고 놀랍게도 죽음의 충동에서 나왔다고 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유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두고 제가 아까 죽음이 손짓한다고 했고 말이다. 그런 것의 일종이 마약이나 동성애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까지도 모두 다 경험할 수 있는 자유라는 말이다.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까지도 모두 정복해서 자기 존재의 영역을 확대하는 자유, 바로 그것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나온 자유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을 피우고, 온갖 짓을 다한다는 말이다.
◈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것을 !!
사도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했는가? '하지 말라' 라고 하면 그것이 또 새로운 유혹이 되어서, "내가 하고야 말리라" 라는 것으로 해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현재 모습인데, 그것이 바로 그 '자유' 라는 놈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욕망이 부추긴 자유 때문에 말이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무엇을 '하고 말고' 가 아닌 믿음 !!
그러한 의미에서 '하라'와 '하지 말라' 라는 것은 사실 같은 말인데, 왜냐하면 '하라' 라고 하면 '하지 말고 싶은' 자유가 생기고, 또 '하지 말라' 라고 하면 '하고 싶은' 자유가 생기니 말이다. 그러므로 지옥으로 가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서 가는 것이지, 결코 무엇을 한다든지, 혹은 무엇을 하지 못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러한 복음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용서가 되지 않는데, 그래서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나' 임을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라는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못난 놈인지를 말이다. 마치 개구리처럼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말이다. 또한 고백을 하지 않는 것도 자기 자유라고 하면서 버티지 말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그런 '나' 임을 아는가요?
사실 그것이 문제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주체는 규정되지 않고 허물허물해지니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주체를 누가 대신해서 담당했는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주체가 자기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확고한 주체가 십자가에서 확보가 된다는 것이다. 허물허물한 주체가 아니고 말이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같이 읽어보자.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죽고 사는 그 관계가 믿음 ??
여기에 보면 주체가 바뀌었는데, 사도바울의 주체는 죽음으로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또 살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려주는 삶이 새롭게 발생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관계를 두고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사는 것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여기 마지막 부분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사는데, 이제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고 나니, 이제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싶은데 말이다.
여기서 일단 갈라디아서 3장 1절의 말씀을 보자.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보통 불신자들은 뭐라고 말하는가? "내 주체와 십자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그 말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렇지. 주체 자체가 없는데, 왜 자꾸만 십자가를 빼놓고서 내 자유를 중심으로 단독적인 주체를 형성하려고 하는가? 아하, 그것이 참 어리석은 짓이구나"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 믿지 않아서 지옥에 !!
이것이 바로 믿음인데, 그러니 믿음은 결코 '하라'와 '하지 말라' 라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와 '하지 말라' 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습니까?" 라는 것을 묻는데, 그러므로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주체를 대신합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말이다.
◈ '나'는 무엇인가? '너'는 흐물흐물 ??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계속해서 무정형(無定形) 상태인데, 즉 정형이 되지 않은 뭔가 흐물흐물하다는 것이다. 무정형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자기의 욕망을 타협해서 법을 만들어 놓고는, 그런데 밑에서 괴물과 같은 자유가 올라와서 "내가 미쳤나? 법을 지키게. 나는 법에서 해방되고 싶어. 그것이 나의 유일한 욕망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원한다고 하면, 그것이 임자가 있는 남의 집 여편네든지, 아니면 같은 남자든지 간에, 아무튼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유가 절대화되는데, 즉 자기 욕망이 최고이고 절대라는 것이다.
◈ 그래서 국민윤리 교과서에서는 !!
그래서 그러한 자유를 사로잡기 위해서 국민윤리 교과서에 뭐라고 하는가? "인간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기만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유가 있고, 그래서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너무 자기 자유를 누리게 되면 양심에 어긋난다" 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래, 맞아. 너무 내 자유만 누리면 안 되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을 타협을 해야 하는 것이고, 일단 성질이 나면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쁜 줄은 알지만 성질이 나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차 안에서도 음악을 크게 틀고 한다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이 아무리 자기 반에서 학생들을 보고 "여러분, 같은 급우들이니 서로 사이좋게 지내세요" 라고 해도, 아무리 그렇게 해도 '짱'도 생기고 '왕따'도 생긴다는 것이다. 이 짱은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왕따는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에 의해서 한 하나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왕따는 언제나 약한 놈이 !!
우리가 다 학교를 다녀봐서 알지만 왕따를 시키고 싶어서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성질을 풀어야 하는데, 덩치 큰놈에게 덤빌 수는 없고, 또 자기 아버지가 경찰인 놈에게도 덤비기가 그렇고, 그래서 덩치도 좀 작고 성격도 온순하고 힘이 없는 놈이 왕따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학교 어느 반에 가도 다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선생님이 야단을 치는데, 즉 "애들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기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러니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해도 학생들이 말을 듣겠는가? 사실 선생님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 그런데 고3이 되면 !!
그런데 그렇게 자유를 부르짖던 아이들이 그만 법을 위해서(?) 자기 자유를 참게 되는데, 고3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수능시험 때문에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해도 다들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렇게 농띠를 치던 놈들도 말이다. 왜냐하면, 법에 수능시험을 잘 쳐야만 좋은 대학에 가도록 되어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때뿐이지만 말이다. 취직시험 때도 그렇고 말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남들도 다들 하기 때문인데, 그렇게 남들이 한다는 것은 타인의 욕망이고 말이다.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주먹으로 까불다가 이제 사회에 나오면 머리로 까불어야 하는데, 그래서 졸업할 때가 되면 공부를 한다는 말이다. 지나간 시절을 후회하면서 말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법 안에 복음이 있다" 라는 말을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보자.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여기 마지막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또한 어렵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문장에 여러 단어들이 있지만, 여기서 '육체' 라는 단어에 일단 주목을 하자는 것이다. 이 '육체' 라는 말은 우리의 몸이고 신체인데, 그냥 우리 전체를 다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마음속으로 답변을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천국에는 누가 가는가? 의인들만이 가지요? 죄가 있는 사람들은 가지 못하는데, 그러므로 천국에 가는 신체는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 자기 몸이 의롭게 되는가? 결코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인간의 몸이 법을 만들고 추구하는데 !!
그런데도 놀랍게도(?) 이러한 우리 인간의 몸이 무엇을 만드는가? 법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은 타인의 법으로서, 즉 타인의 욕망으로 만든 법이라는 말이다. 즉 여기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율법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아까 제 아무리 농띠를 치는 인간이라도 고3이 되면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수시는 왜 보는가? 빨리 대학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고 놀려고 말이다. 아무튼 왜 고3은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고3은 목표가 다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인데, 그것이 곧 타인의 욕망이고 또한 법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육체가 고3이 되면 열심히 공부한다는 법을 만나고, 동시에 육체는 그 법에 대해서 결핍과 기대와 소망을 남긴다는 것이다. 즉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법대에 합격하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할까? 그러면 이 지묘3동에 '저근호, 서울법대 합격' 이라고 플랜카드고 걸리겠지" 라고 하면서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상상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자기 자유대로 하면 안 되고,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법이 바로 수능시험이라고 하는 국가적인 법, 즉 타인의 욕망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타인의 욕망에 자기의 자유가 결합하면서,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육체는 법을 찾는데, 그 법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저근호, 이리와 봐 !!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야, 니는 그 성적으로 거기는 안 된다. 전문대학에 가라" 라고 한다면, "아닙니다. 저는 4년제 대학에 가야 됩니다. 보내주세요" 라고 하면, 선생님은 다시 뭐라고 하는가? "안 된다니까, 그러니 전문대학에 가서 좋은 기술을 배워 취직하면 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인의 법이고 말이다.
* 선생님 : 저근호, 이리와 봐. 어디 갈거야?
* 학 생 : 예, 4년제 좋은 대학요.
* 선생님 : 안 돼. 전문대학에 가.
* 학 생 : 싫어요.
* 선생님 : 성적이 안 되잖아. 진작에 열심히 좀 하지.
* 학 생 : 그래도 좀 써 주세요.
* 선생님 : 안 된다니까.
* 학 생 : ? ? ?
아무튼 이렇게 "고3 학생은 수능시험을 쳐야한다" 라는 전체 법에 대항해서 또 나름대로의 법을 만드는데, 즉 "나는 고3이니, 고3에 맞는 공부를 해야한다" 라는 것이 또 하나의 법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법을 만들고 또 만들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 하지만 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어 !!
이렇게 인간의 육체는 법을 추구하는데, 하지만 이렇게 법을 추구해서는 무엇이 나오지 않는고 하니,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의하면, 문제는 이러한 법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말한 것은 율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법들을 다 포함하는데, 즉 인간이면 생각할 수가 있는 모든 법 전체를 다 말이다.
이렇게 의(義)가 나오지 않는 것을 두고서 '죄'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도 평소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 않는가? 사람들은 죄를 지어야 죄라고 여기는데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벽한 의가 없으면, 그것을 두고 죄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니라면 모두가 다 죄인 !!
사람들이 저를 보고 뭐라고 하는가? "당신은 사람들만 보면 죄인이라고 하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가 말하는 죄인의 의미는, "예수님이 아니면 죄인이다" 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의인데, 그런데 그 의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니라면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런 죄인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법을 가지고 타협을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의인이다" 라는 쪽으로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까불지 마. 그렇게 해서는 의인이 될 수 없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의 육체는 죄만 남는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 -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육체로는 결코 의인이 될 수 없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받는 사람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오히려 그 사람은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은 법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 안에 복음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법을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고, 그 안에서 예수님 덕분이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있음으로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렇게 예수님이 함께 있는 믿음 때문에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 우리의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 덕분에 !!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는데,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예수님의 믿음 덕분이지,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상당히 일리가 있고, 산뜻하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설명을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예수님의 그러한 믿음에 동참이 되니까, 그래서 그 믿음이 자기의 믿음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러한 의인이 되는 것은 '나'의 소망인가? 아니면 주님의 소망인가?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소망인데, 왜냐하면 인간의 소망은 자기 육체를 포기하기 않는 것이니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결코 자기 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죄란, 내가 예수님처럼 완벽하지 않는 것 !!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서 우리는 이것 하나만 기억하면 되는데, 이 '죄' 라는 의미가 자기가 예수님처럼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그것이 곧 죄임을 알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허물어지는고 하니까, 법이 오는데, 그런데 그 법은 새 법으로서, 즉 예수님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법이라는 말이다.
◈ 다시 간단히 정리하면 !!
이것이 마지막 고비인데(?), 잘 한번 들어보세요. 거기에 앞서서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하게 다시금 정리하면, 기존 사람들에게 죄라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가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죄가 있으면 기분이 나쁘니 그 죄를 자기의 착한 일의 여분을 가지고 입을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착한 일을 많이 했는데도 죄인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법으로는 천국에 가지를 못하는 엉터리 법인데, 그래서 새로운 사랑의 법이 오게 되는데, 여기서 법이 바뀌는데, 자기가 만든 법이 아닌 주님의 법으로 말이다. 이렇게 사랑의 법이 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랑의 법 안에 있으면 의가 된다는 것이다. 법의 바깥에 있으면 죄가 되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 기준이 바뀐다는 것이다.
◈ 성도는 전혀 새로운 기준으로 !!
그러니 이제는 무엇을 '하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어디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 그것이 의가 되고,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전혀 새로운 기준으로 사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을 '성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하고, 말고' 하는 것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완벽한 의(義) !!
사실 우리가 살다가 일이 계속해서 꼬이면, 자기도 모르게 뭔가 좀 착한 일을 해서라도 그것을 풀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물론 계속해서 그런 생각만 들면 성도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읽고 복음적 설교를 듣다가, 그런 것마저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믿어지면, 그것이 바로 천국에 가는 완벽한 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사는 것이 좀 어렵다고 해서 착한 일을 해서 그런 것을 해결하려고 했던, 그런 어리석은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이 모두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는 말이다.
◈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어리석도다' 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상당한 심한 말인데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이렇게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도대체 누가 유혹을 하드냐는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잠시만 연극을 !!
이것을 가지고 연극을 한번 해보면, 제가 건방지게 십자가라고 한다면, 저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그만 김 집사님이 아주 비싼 도자기를 깨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십자가는 무사히 잘 있는데, 그러면 되는데 비싼 도자기를 깨었다고 사람들이 김 집사님을 마구 다그친다는 것이다. 왜 좀 조심하지 않고 깨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도자기가 깨지고 말고 하는 것은 사실상 별 문제가 되지 않는데, 아무리 비싸도 말이다. 그런데도 누가 이렇게 십자가가 아닌 이런 도자기 같은 것에 얽매이도록 유혹을 했느냐는 것이다.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그러한 의미인데, 물론 마귀가 그렇게 시켰지만 말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의미를 가리기 위해서 마귀가 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계속해서 어디에 얽매이게 되는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말이다. 즉 "내가 그렇게 하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남들이 욕을 좀 해서 욕을 들어먹으면 어떤가? 욕을 하는 그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오직 예수 안에 있을 때만 의인이라는 것이다.
◈ 예수 안에 있으면 의인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바로 의인임을 보여준 것이지, "너희들도 나처럼 완벽해야만 돼" 라고 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모두가 다 엉터리이고 가짜 예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려고 왔지, 결코 의인을 부르려 온 것이 아닌데,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우냐는 것이다.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자기가 건강한데 의사가 왜 필요하냐는 말이다. 주님은 그런 병들고 헐벗고 못난 놈들을 찾으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런데 왜 자기가 수습한다고 그런 생쇼를 벌리고, 그렇게 하라고 도대체 누가 그렇게 꼬시드냐는 말이다. 전혀 수습도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바로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라는 것이다.
◈ 참 자유는, 기존 자유가 박탈되어야 !!
그렇게 자기가 해결하고 수습을 하려면 또 하나의 법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게 되는데, 그러니 이것이 아까 말한 인간의 자유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는 그런 인간의 자유가 박탈되고, 그런데 이런 자유가 박탈되는 기쁨을 두고 성경에서는 '자유'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들의 자유가 박탈당한 그것이 바로, 기존의 모든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서 진정한 자유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종의 출애굽 사건과도 같다는 말이다.
◈ 이런,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
지금까지 강의한 것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저질렀을 때, 사실 그것은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것도 일종의 사랑인데,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그것을 위반했으니까 "이런,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베푸는 사랑의 법이 아닌, 자기가 만든 법을 위반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큰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상에 불과하지 말이다. "이어쿠, 내가 이렇게 큰 실수를 하다니, 내 인생의 오점이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생전체가 큰 오점이라면 오점이지 말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시비를 건다고 하면 주님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용서해주겠다고 십자가를 졌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니, 왜냐하면 자기에는 자기가 만든 법이 있으니, 그 법이 중요하지 십자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하는 말이, 도대체 이렇게 눈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보다도, 자기가 만든 법이 더욱 중요하다고 꼬드긴 놈이 도대체 누구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악마가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 술꾼들은 정신적으로 불안해 !!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인데, 거의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혹시 이 가운데도 정서적으로 불안한 분이 계신가요? 그러한 불안함이 혼자서 소주를 마실 때는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그러나 여러 명이 같이 마실 때는 분위기에 희석이 되어서 제대로 드러나지를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1차와 2차를 지나서 3차 정도를 가게 되면 서서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1차와 2차까지는 분위기도 좋고 단합도 잘 되는데, 그런데 3차 정도가 진행이 되면, 부장도 욕을 하고 사장도 욕을 한다는 말이다. 즉 다시 정서적으로 불안해지기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서로의 단결을 위해서는 그런 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편이야. 우리 소속이야" 라고 하는, 그런 도장을 찍는 애정이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고 하니까, "탁, 깨놓고 이야기해서" 라고 나오는데, 그런 자리가 곧 술판이고 노래판이고 고스톱판이라는 말이다.
◈ 낮은 데로 임하소서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나도 고상한 가면을 벗고 이렇게 까발렸으니, 너도 가면을 벗고 다 내어놓아라" 라는 것인데, 즉 전부가 다 벌거벗고 완전히 알몸으로 한번 나딩굴어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다 더럽기에 발가벗으면 서로가 서로를 지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다 그놈이 그놈이니 말이다. 그때는 분위기가 그야말로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인데, 무슨 우리나라 영화제목 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괜찮은 것이 제 정신이기에 말이다. 아직까지는 단결이 목적이니 정서적인(?) 것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2차를 지나서 3차를 가면 드디어 욕설이 나오고, 하소연이 나오고, 고함소리가 나오면서 결국은 대판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때는 단결이고 뭐고 모두 날아가고 없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