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3월 3일 죽은 신을 위하여2
대구 3월 3일 죽은 신을 위하여2
이름 : 우리교회(IP:124.59.84.82)
090303 죽은 신을 위하여2
우리교회(IP:124.♡.84.82)
09-03-03 15:17
김대식(IP:124.♡.85.5)
12-12-26 12:06
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
번 역 : 김정아
출판사 : 도서출판 길 (2007)
죽음 안에서 신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죽음, 그것은 헛수고를 의미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 신이 바로 죽음으로 말하는 신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종교 행위로 더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종교 행위는 자신의 저주를 재촉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제시된 신은 어떤 신인가? 저자는 기존의 기독교 신론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파헤친다.
신은 숨어있는 신이다. 따라서 아무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아니, 신은 없다. 신에 대한 인간적인 인식을 발동시키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궁금하고 찾고자 하는 가운데 신은 그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들이 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알고자 하면 할수록 인간은 사실 신으로부터 고립되고 동시에 신 자신도 신에 대해서 고립되어진다.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지시하기를 자신을 배반하라고 했다.(마 26:25) 이 세상에 온갖 신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를 배반할 것을 요구하는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로 이루어진 최초의 기독교 동아리와 보편 교회의 창시자인 사도 바울 사이를 연결하는 ‘소실되는 매개자’이다. 즉 사도 바울은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들어가서는 그 역시 스스로를 배반해야만 하는 신인 예수를 소개하게 된다.
진정한 예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은, 추종자로 하여금 예수에 대해서 배신케 함을 유발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숨어있는 X를 이해하는 것은, X로 인하여 주어지는 자신의 배신을 수긍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 앞에 서면 예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노출되어진다. 예수는 곧 ‘타인’으로서의 시선이며 그 타인으로 인해 ‘나’가 규정된다. (불교의 허점은 그 타인의 시선을 삭제하는데 있다. 즉 타인 없는 가운데 자아마저 없애려고 한다)
그런데 이 타자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타자성이 문제가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타자성이란 지루한 동일성을 지닌 타자다)
예수라는 타자는 예수라는 존재의 일관성에서 주어지는 타자성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통해서 그 명령에 호출되는 인간의 태도와 반응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의 명령을 접하게 되면 모든 인간의 자아가 분열을 일으키게 되고 그 분열과 벌어짐 속에서 비로소 비쳐 나오는 타자성이 예수로 인한 타자성이요 신성이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이 명령을 받은 인간은 “하지말라!…살인하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 바울이 전한 계시다. 즉 “살인해야만 해!”가 “하지 말라!”라는 명령의 본 내용에 해당되도록 인간 내부에서 유발된다는 것이다.
이 “네 속에서 넘쳐나는 것을 거세하라”는 곧 불가능한 명령이 되고 만다. 만약 제 때 거세 못하면 처벌이 따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 처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란 넘쳐 남을 향유하는 그것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처벌의 저주스러움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쾌락 너머의 것을 계속 집착하는데 있다. 현 쾌락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즉 얻어진 행복이 곧 저주스러운 상태가 된다.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으로 쾌락을 얻게 되지만 그것이 저주스러운 처벌이요 대가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제공한 타인을 속이려든다. 이것이 바로 희생이다. 예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뭔가 얻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속이기 위함이다.
이로서 예수는 인간과 멀찍이 떨어지게 된다. 법을 제공하므로서 신은 최고의 위반을 저지르고 만다. 범죄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응당한 처벌을 원한다. 하지만 신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범죄자로 유발시킨 법 자체가 곧 정의라는 이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신은 이로서 모든 원인을 제거한다. 신 자신의 죽었다는 그 죽음이라는 ‘결과’로서 모든 원인되게 하는 ‘원인’들을 삭제시켜 버린다.
신이 죽음으로서 신은 내부적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신과 신 사이에 간격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러한 간격은 더 이상 신이 인간의 신 인식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기 위함이다. 인간들이 신을 포착하고자 한다면 예수는 가룟 유다처럼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 우리들의 신앙을 ‘배신한 신앙’으로 만들어버리는 위치로 만들어버린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반복시키는데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선택은 실은 강요된 죄의 선택이었다. 따라서 아담의 죄성을 눈여겨 볼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강요함’ 자체가 구원임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타락이 자체로 타락이 아니라 타락이 자체로 구원이 된다. ‘타락으로 오인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보는 악이란 ‘악이 악을 보는 시선’에 불과하다. 타락조차도 구원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로소 ‘사랑으로 인한 자유’가 발생한다. 악은 실질적으로 선과 동일하다. 악은 생성 중인 선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처해서 악인으로 행세한다. “그래, 거짓 사도들아, 내가 어리석은 자다. 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진정한 그리스도 닮기란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다. 죄를 부인하는 것 자체가 죄의 궁극적 증거가 된다. 신을 법을 주면서도 항상 그 법에 대해서 창조적으로 해석하며 법을 곡해한다. 이로서 인간들이 주어진 법해석으로 신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뿌리친다.
사도 바울은 모든 법에 대해서 집행을 보류시킬 것을 요구한다. ‘마치-아닌-듯’의 원칙을 적용한다. “우리는 자들은 마치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마치 없는 자같이 하며”(고전 7:20) 이것은 곧 신의 사랑 앞에서 법의 지켜야하는 인간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님’(nothing)이 되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란 인간이 행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랑이 곧 신이다.
사랑은 단순히 법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법 안에 푹 빠져 있는 태도로 표현된다. 충분히 법리적으로 법을 해석하면 사랑이 나오지 완전한 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의 문제는 ‘지나치게 법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법리적’이지 못하는데 있다.)
법에는 사랑이 너무 많다. 법과 신의 사랑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이 발생할 때 숨겨진 사랑도 같이 발생하므로 서 비로소 법을 주신 신도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구약 욥기의 주제는,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가 아니다. 도리어 욥은 고백하기를 ‘나의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욥이 알게 된 신은 무능한 신이었다. 신은 정의롭지도 않았고 불의하지도 않았다. 단지 무능할 뿐이다. 욥이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욥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시험대에 오른 것은 욥이 아니라 신 자신이다 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자신을 정당화 하는데 실패한 신, 이 신이 바로 참된 신이다. 덜미 잡히고서는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허풍을 늘어놓는 신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다. 욥이 처음에 당혹감을 가진 것은 신을 불가해한 ‘사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즉 법 너머에 존재하는 선한 신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아버지가 강하다고 믿었었는데 그 아버지가 자기를 도와줄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 것을 알고 경악하는 아이와도 비슷하다. 이 경악이 예수에게 이어진다. “아버지에 왜 나를 버렸어요?”
신이 허풍을 떨면서 등장한 후부터 욥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왜일까? 그것은 신의 우스꽝스러운 허풍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말로/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2-5)
이로서 신이 도움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도리어 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 우리는 당신을 도우면서 결국 우리 자신을 돕는다는 것입니다.”(1942년 유대인 수용소에서 한스 요나스가 한 말)
신은 왜 자진해서 무능한가? 그것은 무(無)를 창조하기 위해서다. 이 무로부터 세상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세상은 타락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런 타락의 세상에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는 무신론자 밖에 없다. 실증적 존재자로서의 신을 거부하고 메시야적인 타자에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평 가
지젝이 주장이 과연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받는다” 갈 1:8) 십자가 복음에 부합되는 내용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지젝의 지적은 오늘날 기독교에 자리 잡은 신론의 허점을 잡고 시작한 내용이다. 즉 신에 대한 변증과 변호를 통해 신을 믿는 그들의 자기 긍정을 도모하는 논리에 대해 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 살해’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 예수님 살해에 사도 바울 자신도 가담하게 되어 있고 온 인류가 다 가담될 수밖에 입장에 놓여 있음을 없는 언약적으로 설명한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2-23)
즉 인간 배후에 악마가 실제로 있었고 그 악마는 필히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살해해야만 한다는 약속에 준해서 정리된 복음이다. 이 논리는 인간의 실존적 의미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예수님의 실존적 의미로 해명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부터 자신이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사흘에만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인간들은 결국 사단의 세력에 이끌리어 움직인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문제가 아니라 실은 인간 자체가 문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 됨은 인간의 이성과 종교인 열심히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임한 자라야지만 십자가로만 나타나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안다.(고전 2:9-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고전 2:14)
김대식(IP:124.♡.85.5)
12-12-26 12:09
대구090303죽은신을위하여(슬라보이지젝)2
09 대구강의 4 - [죽은 신을 위하여]2 슬라보이 지젝 저, 김정아 역 (도서출판 길, 2008)
09,03,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역시, 죽은 신을 위하여 ??
이제 교재 ‘죽은 신을 위하여’를 지지난 주에 이어서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도록 하겠는데, 먼저 교재 2페이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 예수라는 타자는 예수라는 존재의 일관성에서 주어지는 타자성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통해서 그 명령에 호출되는 인간의 태도와 반응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 ‘호출’에 대해서 !!
여기에 ‘호출’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호출이 무엇인지 한번 설명해보면, 여기에 이렇게 예수님이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서 계시는데, 키도 좀 크고 말이다. 이렇게 사람이 여기 있을 때,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주게 되면, 그 사람은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생각한다는 것이 “예, 알겠습니다.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라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 글에 보면,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호출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출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데, 예를 들어서, “2학년 3반 이 아무개 교무실로 와” 라는 것은 호출이고, 그런데 “복도 유리창을 제대로 닦아” 라는 것은 굳이 호출을 받아서 교무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청소를 잘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리를 이동할 필요가 없이 말이다.
그런데 교무실로 오라고 하는 것은 유리창 청소를 하거나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교무실로 호출한 사람에게 담겨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것은 반드시 자기의 자리를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자리를 포기하고 호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기를 그대로 유지를 하면서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호출을 당하면서도 말이다.
◈ 2학년 3반 이근호, 교무실로 와 !!
무슨 말인고 하니, 선생님이 “2학년 3반 이 아무개 교무실로 와” 라고 하니까, 그 학생은 “지금 내가 운동화를 신고 있나? 실내화를 신고 있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출한 선생님은 그 학생이 운동화를 신었는지 실내화를 신었는지를 확인하려고, 그래서 학교 안에서는 실내화를 신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호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주님은 우리와 함께 살려고 호출을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호출하신 주님이 있는 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가 별 이상이 없지? 이 모습을 가지고 주님에게 나아갈 수 있을까? 내가 완벽해?”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 베드로의 현실감각은?
그러한 예가 마태복음 14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이 어두운 한 밤중에 바다 위를 걸어오면서 베드로를 호출했다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이 호출했다기보다는, 아무튼 예수님이 그렇게 걸어오니까 베드로는 땅인지 바다인지 구별도 못하고 그냥 배에서 내려서 예수님에 대해서 마중을 나간다고 하면서 걸어서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갈 때는 물위를 잘 걸었는데,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미쳤지. 지금 뭐하는 짓이지?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라고 하는 순간에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물 속에 그만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 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마 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 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 신앙은, 자기 자리에 대한 곁눈질도 용납하지 않아 !!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성경에 이 말씀이 왜 기록되어있느냐는 것이다. 이 말씀에 무엇을 실천하라는 것이 있고, 바르게 살라고 하는 것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신앙의 진수인데, 신앙은 결코 자기 자리를 곁눈질로라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즉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까 읽은 문장이 참으로 어려운데, 다시 한번 보자.
** 예수라는 타자는 예수라는 존재의 일관성에서 주어지는 타자성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통해서 그 명령에 호출되는 인간의 태도와 반응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 존재의 일관성 ??
여기서 말하는 존재의 일관성은, “예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에 비해서 나는 무엇인가?” 라고 하는데, 즉 자기는 수시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으려고 하면 한결같은 분을 믿어야 하는데, 즉 변하는 자기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보통 그런 식으로, 변하는 자기보다는 일관성이 있는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 조립된 신앙인고 하니, 자기 자신에 의해서 조립된 신앙이라는 말이다.
◈ 신앙은 호출하신 분에 의해서 !!
그런데 위의 문장에서 말하는 것은, 신앙인지 아닌지는 자기가 그렇게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호출하신 분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제대로 된 신앙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변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신앙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신앙심은, 즉 한결같이 변하지 열심이나 충성과 같은 것을 가지고 주님에게 들이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호출을 하게 되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신앙은, 즉 그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다 엉터리임이 드러나게 되고, 주님께서 준비해놓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은사로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 그런데 호출을 명령을 통해서 !!
그런데 위의 글에 의하면, 호출을 당하는 사람은 주님께 어떤 방식으로 호출을 당하는고 하니, 그분의 ‘명령’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신학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명령을 하시고 인간은 실천에 옮기면 된다는 식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지젝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주님은 명령을 통해서 호출을 하는데, 그것이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라는 방식으로 호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치 사무엘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주님은 호출을 어떻게 하시는가?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이 명령을 받은 인간은 ‘하지 말라! … 살인하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바울이 전한 계시다. 즉 ‘살인해야만 해!’가 ‘하지 말라!’라는 명령의 본 내용에 해당되도록 인간 내부에서 유발이 된다는 것이다. 이 ‘네 속에서 넘쳐나는 것을 거세하라’는 곧 불가능한 명령이 되고 만다.
이것도 참 어려운 내용인데, 즉 로마서 7장에서 “탐내지 말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갑자기 자기 마음속에서 말씀의 자극과 더불어 탐심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이 탐심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데,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이 나쁜 것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제거를 여기서 ‘거세’ 라고 하다는 말이다.
◈ 그것은 불가능한 명령이 아닌가?
그러니 실천에 옮기고 말고 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계속해서 자기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그러한 탐심을 내부에서도 계속해서 거세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이고 성화론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거세를 하는데, 그런데 과연 그런 거세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지젝은 이것을 불가능한 명령이 아니냐고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만약 제 때 거세를 하지 못하면 처벌이 따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 처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란 넘쳐 남을 향유하는 그것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 명령자체가 곧 처벌 !!
그렇게 죄가 넘쳐나게 되면 그 죄의 값은 사망이니 당연히 처벌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의 욕망이란 넘쳐 남을 향유하는 그것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도 참 어려운 말인데, 아무튼 그렇게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래서 그것을 거세해도 일어나고, 또 다시 거세해도 일어난다는 말이다.
시지프스 신화에 무슨 내용이 있는고 하니, “여기 커다란 산꼭대기에 놀려다 놓아라” 라고 하는 벌을 받는데, 그렇게 해서 1915m나 되는 지리산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뜨려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또 다시 산꼭대기에 가져다 올리고, 다시 밑으로 떨어뜨리고 말이다. 그런 징벌이 영원토록 계속해서 된다고 하면, 얼마나 기가 치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지젝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바로 이러한 처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거세를 했나? 거세를 했다. 했나? 했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 자체를 처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명령이 새삼스럽게 뭔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명령자체가 우리에게는 처벌이 된다는 것이다. 즉 명령자체가 우리 인간이 벌을 받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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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Mythe de Sisyphe - 프랑스의 작가 A.카뮈가 1942년에 발표한 평론. 부제에 있듯이 <부조리에 관한 시론>이며 소설 《이방인》과 짝을 이룬다. 시지프(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데 신들에게서 바위를 산꼭대기에 운반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져서 시지프는 영원토록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운반하는 작업을 되풀이해야만 한다.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 안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을 보았다.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자각하면서 이 부조리에 대하여 반항을 기도하는 인간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만, 이 인간의 운명에 비참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발견하고 있는 데 그의 독자성이 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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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처벌의 저주스러움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쾌락 너머의 것을 계속 집착하는데 있다.
그러니 쾌락 너머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즉 “탐내지 마라” 라고 했을 때는, 인간은 탐이 나지 않는 상태를 집착하고 소망을 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이 얼마나 인간의 심리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 인간은, 끊임없이 쾌락 너머의 것을 집착해 !!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냥 솔직히 “나는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그래서 탐을 낸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인간은 선악과는 이미 따먹었기에, 그렇게 마귀는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죄는 있으면서도, 죄를 짓지 않은 ‘나’, 또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나’, 그렇게 착하기 그지없는 ‘나’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은 거세를 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지젝이 하는 말이, 인간은 그렇게 거세가 되지 않는 것을 거세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처벌이라는 것이다.
◈ 소경이 주님께 감사 ??
성경에 세리와 창기가 나오고, 또 눈먼 소경이 등장하는데, 사실 이러한 소경이 주님을 부른다고 하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장애인들의 정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께 감사하는 것보다는 “왜 주께서 나를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는가?” 라고 하는 원망이 더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은혜를 받아서 잠시 동안은 “이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2초가 지나고 나서 다시 정상인과 자기를 비교하게 되면서, 잠시 잊었던 분노가 또 솟구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처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맞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눈에 먼 것도 하나님이 주신 영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면서, 교회에서 좀 배웠다고 그런 소리를 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가겠느냐는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당장에 “주님, 이렇게 착한 저를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 창세기 3장의 저주는, 원래 악마에게 !!
하지만 창세기 3장에 보면 이러한 저주는 인간을 위한 저주가 아니라, 사실 악마를 위한 저주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지독함을 보고 지독한 벌을 내렸는데, 그런데 인간은 악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악마에게 그만 붙어 버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은 악마를 조지기 위한 징벌이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미 악마가 악을 저지르고 난 다음에 선과 악의 원리가 적용되어버리면, 그렇게 악을 이미 저지른 악마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악마가 머리가 좋아서(?) 순진 무구한 인간에게 그만 붙어버렸다는 것이다.
혹시 무구(無垢)의 의미를 알아요? 선도 악도 없는 것인데, 즉 의인도 죄인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인간에게 빌어 붙어서 그만 자기편으로 삼아버리니, 악마가 당해야 할 징벌을 인간도 그만 같이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인간에게는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는 말이다. 거기에다가 마지막에는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가고 말이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저들은 마귀가 당하는 형벌에 참여하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지옥이라는 것은 원래 악마를 위해서 만들었는데,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뒤늦게 참여하는 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나님은 지옥에 가는 인간을 만드셨는가? 그것은 새삼스럽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즉 악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천국에 가는 사람은, 천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처벌의 저주스러움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쾌락 너머의 것을 계속 집착하는데 있다. 현 쾌락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즉 얻어진 행복이 곧 저주스러운 상태가 된다.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그만 딜레마에 빠지는데, 인간은 쾌락으로 행복을 얻는데, 그런데 그 쾌락으로는 만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만족함이 없는 행복이 되니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의 행복을 자꾸만 누리면 참으로 좋겠는데, 그런데 새로운 것을 맛을 보아서, 즉 그만 수준이 높아져서 옛날의 행복은 이제 행복도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경제파탄이 났다고 난리인데, 하지만 만약에 우리나라가 30년 전에 이 정도가 되었다면 경제호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잘사는 맛을 보았으니, 다시 70년대로 돌아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요즘 젊은 아이들을 소위 7080시대의 노래조차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케케묵은 구닥다리처럼 여기는데, 그러니 지금 40대나 50대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지금 미얀마에서는 !!
어제 TV를 보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요즘 미얀마 사람들의 즐거움이 바로 겨울연가를 보는 재미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당이나 가게마다 그것을 틀어놓지 않는 데가 없다는 말이다. 장사를 하려고 하면 말이다. 주몽도 인기가 있고 말이다. 그야말로 한류인데, 한국 드라마를 틀어주지 않으면 손님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 아이들이든 나이가 들었던 간에 말이다.
한국의 화장품 값이 만원인데, 그 아가씨는 한 달 월급이 5만원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 아가씨는 ‘드봉’ 이라는 한국 화장품을 사서 발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는 보람이라는 말이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20년 전으로 되돌아가라고 하면 불가능한데,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최지우와 배용준을 도저히 잊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한국 드라마의 탓이 아니라, 그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욕망을 찾다가보니, 한국 드라마에까지 그 욕망이 들어와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가 아닌 자기 나라의 드라마는 시시해서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얀마 방송국에서는 할 수 없이 어떤 드라마를 만드는고 하니, 자기 나라의 젊은이가 돈을 벌어서 소원을 풀기 위해서 한국으로 관광을 떠난다고 하는, 그런 주제의 자기 나라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이다.
◈ 인간자체를 감추는 한국교회 !!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이 교재는 기독교와 불교를 떠나서, 인간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제일 큰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자체에 대해서 목사가 가르치지 않고, 자꾸만 교회에 대해서, 또한 목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와 목회를 이야기하면 무엇을 감추기 되는고 하니, 인간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것을 위선적으로 감추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죄가 무엇인가요?” 라고 하면, “그것은 몰라. 하지만 무조건 죄야” 라고 하면서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다. 즉 인간자체에 대해서 그냥 넘어간다는 말이다.
어제 제가 설교를 하면서, 저주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즉 저주와 축복은 설교를 하고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사의 설교는 인간자체를 까발리는 것인데, 그것이 교회의 교육이라면 교육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자체를 까발리는 것인데, 바로 그렇게 인간을 까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또한 그러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 하지만, 인간은 말씀을 거세하기에 바빠 !!
그런데 목사들은 교육을 시키려고 하는데, 즉 자꾸만 뭔가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모두가 다 위선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말씀이 들어오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거세하기에 바쁜데, 그런데 그런 제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이 일종의 처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율법은 430년 이후에 !!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것은 ‘430년 이후’ 라는 것이다. 즉 율법은 430년 이후에 주입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율법이 430년 이후라고 하면, 그 이전에 뭔가가 먼저 있었다는 말인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복을 받는 사건인데, 하지만 그것은 아까도 설명했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호출을 하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호출을 하기 이전까지는 창세기 3장의 약속을 아브라함은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무엇이지 말이다. 그런데 호출을 해서 알려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호출하신 것은,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삭의 자손이, 그리고 야곱의 자손이, 그들이 도대체 어떤 법칙에 의해서 진행이 되는가를 아브라함에게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알려준 약속을 니가 믿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인간이 결정하지 못하는데, 즉 자기가 믿을 만한 것을 믿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께서 믿을 만한 것을 주시고, 그것을 믿는 것을 호출을 하지 않으면, 즉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호출된 사람에게만 믿어지는 약속,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의 명령은 곧 호출 !!
그러므로 예수님의 명령이라는 것은, 예수님 그 자체를 믿기 위해서 명령한 것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을 예수님의 호출로 보지 않고, 자기가 지키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그냥 두고 자꾸만 예수님의 말씀만 자기에게 잡아당겨서 “내가 이만큼 지켰습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 실력을 믿는 엉터리 신앙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서 지젝이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을 호출로 보지 않고, 인간이 자기에게로 마구 잡아당겨서,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는 기존의 신학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말이다. 그래서 지젝(지적?)인가?
◈ 그러면, 왜 약속이 주어진지 430년 이후인가?
아무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율법은 430년 이후니까, 그 이전에 바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약속에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바로 율법을 주면 되는데, 왜 약속이 주어진지 430년 이후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은 그렇게 처벌을 받아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물론 갈라디아서에서는 그것을 ‘처벌’ 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저주 아래 있나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그런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어도 너무나 마땅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저주 아래에 말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이 율법에 의해서 저주가 마구 쏟아지는데, 그 저주가 바로 인간들이 제 아무리 도를 닦고 애를 써도 자기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위선과 교만함과 자기 의를 그때 그때마다 제거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제거가 되지 않고 계속해서 올라온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까지 강의를 그래도 20년을 넘게 했는데, 겁 없이 강도사 시절부터 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복음과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짜 이 복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20년 동안 생 했다는 것이다. 특히 목회자들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말이다.
◈ 아하, 이것이었구나 !!
그런데 제가 얼마 전에 어느 분의 설교를 듣다가, “아하, 이것이었구나” 라고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분이 하나님의 형상을 설교하는데, 이 사람은 복음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말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을 기존의 신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즉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비공유적 속성에는, 자존성, 불변성, 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혹은 편재성, 단순성 등이 있는데,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다든지, 또 죽은 자를 살린다든지 하는, 바로 그런 것이 여기에 속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유적 속성은 인간과 하나님의 공통적으로 있는 것으로, 시편이나 에베소서 3장 등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지식, 지혜, 선, 사랑 등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공유적 속성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와 선과 사랑을 더욱 더 잘 개발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그렇게 기존신학에서 주장한다는 말이다.
◈ 문제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기에 !!
그런데 만약 복음을 모른다고 하면 이런 주장을 해도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복음을 알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설교를 하는지를 비교해보는 가운데, 그런데 그만 기존신학의 이런 공유적 속성이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십자가로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신학의 하나님 형상론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인간의 존재론에서 나오는데, 즉 인간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은 또 여기에 있다고 하면 인간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그렇게 되면 존재에서 존재로 바로 이어지는데, 그러니 전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저는 바로 이러한 점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물론 말은 십자가를 믿는다고, 또한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데 막상 적용시킬 때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그냥 곧바로 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즉 존재에서 존재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여기에 존재하고, 하나님은 저기에 존재하는데, 그렇게 바로 연결을 시키면 바로 그것은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신학을 전개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존재는 십자가 안에서 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인간존재는 십자가 안에서 깨어져야 !!
누가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을 보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라고 말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눅 20: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눅 20: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 ‘내’가 이렇게 있고, ‘하나님’이 이렇게 있는데 !!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조금 쉽게 해보면, 제가 ‘존재’ 라는 말을 어렵게 사용했는데, 이 존재를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보는고 하니, ‘내’가 이렇게 있고 하나님이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하면, 이것을 우리가 공부하면서 어려운 말로 타자, 혹은 타인이라고 했는데, 또는 주체와 객체라고 하고 말이다.
보통 신학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어렵다고 하면서 하지 않으니 빼버리고, 아무튼 ‘내’가 여기에 있고 또한 하나님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형상에 여기에 있고, 율법도 여기에 있고, 또 천국도 여기에 있고, 고난도 있고, 교회도 있고, 성전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약속의 땅도 좋고, 약속도 좋고, 말씀도 좋고, 아무튼 다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 ‘내’가 알고 있는 율법, ‘내’가 알고 있는 천국, ‘내’가 알고 있는 교회, ‘내’가 알고 있는 성전, ‘내’가 알고 있는 약속의 땅 등등으로 되는데, 물론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 이제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내’가 !!
하지만 이것이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그 십자가 안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이 되어버리는데, 즉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렇게 주체와 객체가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예로 들어서, 그런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내’가 포함이 되어있고, 바로 이것을 쳐다보는 눈은 누구의 눈만이 허용이 되는고 하니,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눈만이 쳐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역시 뱀의 후손 !!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눈은 무슨 눈인고 하니, 아담의 속성을 물려받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했는가? 밉다고 배척을 했는데, 그래서 결국은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약속에 의해서 뱀의 후손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하고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여기에 있고, 또 우리는 여기에 있고,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에 있다고 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말이다.
◈ 기존신학은 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고 하면 여기는 우리는 무엇을 인정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지, 즉 그것이 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단적이고 악마적인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금 재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본다” 라고 하지를 말고, 그렇게 보는 ‘내’가, 즉 기존의 목사들이 무엇을 가르치는고 하니,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도 다같이 바라보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 성도는 항상 십자가에 당해야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즉 예수님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형상 속에 ‘내’가 전체적으로 포함이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침을 당할 때, ‘나’도 함께 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렇게 십자가에서 침을 당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원리가 반복되는 것이 성도의 일생인데, 즉 반복되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한번 자기가 알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데, 성도라고 한다면 계속해서 그것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십자가에서 말이다.
◈ 예수님의 ‘피’로 복과 저주가 !!
아무튼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 안에 들어있다고 여긴다면, 그러면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보는가? 그것이 바로 ‘피’ 인데, 즉 피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고, 피를 믿는 자는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그 옆에 강도가 좌우도 두 명이 같이 달려있었는데, 지젝이 이 책에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강도가 두 명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두 명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데, 이 양반이 착각을 한 것 같은데 말이다.
십자가의 강도들 중에서 분명하게 한 쪽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러나 다른 쪽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둘 다 예수님을 비난했지만, 복음서가 ‘강도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다고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 한 쪽은 회개를 했다는 말이다.
◈ 성도란, 일생을 통해서 예수님의 피를 !!
그렇게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이 구분이 되는 것처럼, 또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항상 예수님이 언약의 중심이 될 때는, 방주 안에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가 흘러 나왔을 때, 바로 그 예수님의 피가 저주가 되고, 또한 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피가 어떻게 저주가 되고 복이 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인간은 마음껏 자기의 속성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속성을 말이다.
◈ 성도의 일대기는 자기 잘남이 아니라 !!
그것이 바로 성도의 일생인데,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아닌 아브람의 일대기 보여주고, 또 이삭의 일대기 보여주는데, 허물투성이인 그의 일생을 말이다. 그래서 이삭은 자기가 좋아하는 별미를 먹고 자식을 축복을 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썽 많은 야곱의 일대기를 보여주고, 또한 모세의 일대기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모세는 성질이 나서, 하나님께서 바위를 가리키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만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상황이 화가 날만 한데, 목사도 목회를 하다가 보면 교인들이 얼마나 말을 듣지 않는지, 그야말로 성질이 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용서하라고 했는데 용서도 되지 않고, 봉사를 하라고 해도 전혀 봉사도 되지 않고 말이다.
◈ 돈이 없으면 교회는 무너진다 ??
그래서 저는 그 목사님을 보면서, 복음을 아는 목사님이 왜 그런 설교를 했는지, 즉 하나님 형상론을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말이다. 제가 알기로는 그 목사님이 있는 교회가 건축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희생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설교를 준비하면서 말이다. 지금 교회를 건축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 분위기가 목사만 앞에서 깃대를 흔들고, 교인들은 뒤에서 손가락만 입에 넣고 있다는 것이다. 눈치만 서로 살피면서 말이다.
물론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제 생각인데, 그래서 목사님이 약이 많이 오르지 않았나 싶다는 것이다. 아무튼 희생을 강조하고 싶은데, 그런데 “희생을 하라” 라는 것을 세 글자로 줄이면 “돈 내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설교내용이 당연히 “돈이 없으면 교회는 무너진다” 라고 될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복음 6장 39절에 정면으로 배치가 되는데, 어디 예수님이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하시는 분인가요? 돈이 없어서 자기 택한 백성을 구원하지 못하는가요? 도대체 교회의 당회장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감에 있어서, “야, 이제 돈이 다 떨어져서 너희들은 데리고 가지 못하겠다” 라는 분이냐는 것이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지금 여기 사모님도(?) 계시는데, 과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그런 예수님인가? 복음을 알면서도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고 하니, 자꾸만 교회만 생각하다보니 자기 자신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 라는 존재가 말이다. 교회를 앞장세우는 자기가 그 얼마나 음흉한지, 그것을 감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는 희생이 필요하다” 라고 하면 당연히 맞는 말인데, 주님의 형상으로서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이 맞는데, 그리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되는데, 어둠에 속하지 말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 라는 존재가 저주를 받아야 될 형상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거기서 따로 나가서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로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 내가 보는 것을 내가 믿는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서, 오히려 자기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에는 “내가 보는 것을 내가 믿는다” 라고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가 보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누구의 글을 보든지 간에 다음과 같은 점을 살피게 되는데, 과연 십자가를 통과해서 그러한 개념들이 나왔는지 말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어떤 개념에 대해서 인간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마는데, 그렇게 되면, 신학을 하는 그 자체로서 바로 자기는 의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존재는, 십자가 안에서 부서져야만 !!
그러므로 제가 주장하는 것이 “존재는 십자가 안에서 부서져야 한다” 라는 것인데, 즉 십자가에 부딪쳐서 박살이 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제가 그야말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까 살펴본바 대로 율법으로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깨어져야 한다고 하니, 정낙원 목사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요즘 교인들은 하도 단련이 되어서 잘 깨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게 단련이 되어서 깨어지지 않는다면, 그러면 저주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저주는 단련이 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예수님을 말하는 것인데, 그리고 그 형상의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이 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십자가를 질 수가 없는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계속해서 오해와 곡해를 남발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오해와 곡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예수님의 뜻을 밀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반대로 “니가 생각하는 하나님 형상론은 깨어져야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가 하나님 형상인데, 즉 이것은 복음적이지 결코 존재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세상은 말씀의 세계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이 세상은 말씀으로 되어있고, 그것을 내가 본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말씀의 세계 속에 들어가 버리면 우리는 깨어져버리는데, 그런데 그렇게 깨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으려고 하면, 말씀을 본드로 사용해서 다시 조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십자가 은혜로 붙이고, 또 말씀으로 깨어지고 !!
그렇게 되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말씀으로 된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 자체가, 단단한 자기는 따로 있고, 거기에다 말씀을 실천해서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의해서 자기는 깨어지고 붙이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붙이고, 또 말씀으로 깨어지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말씀은 예리한 검과 같으니 우리 자신을 쪼개는데, 우리 몸 속에 숨어있는 모든 뼈와 신경조직까지도 낱낱이 난도질을 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아, 잔인해” 라고 하는데,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잔인한데, 그 사무라이가 사용하는 검보다 더 날이 선 검으로 계속해서 우리들을 찔러서 쪼개고 또 쪼개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안심, 이것은 등심, 이것은 사태살, 그렇게 일일이 다 난도질을 해버리는데, 그런데 그렇게 된 상태에서 주님의 은혜로서 하나로 모아지는데, 그렇게 모아진 접선부분에서 튀어나온 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라는 것이다. 즉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도 은혜입니다. 저것도 은혜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지젝의 문제점도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말이다.
일단 교재 2페이지를 보자.
** 법이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으로 쾌락을 얻게 되지만, 그것이 저주스러운 처벌이요 대가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제공한 타인을 속이려든다. 이것이 바로 희생이다. 예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뭔가 얻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속이기 위함이다. 이로서 예수는 인간과 멀찍이 떨어지게 된다.
◈ 법을 지키려고 하는 그 자체가 곧 처벌 !!
무슨 말인고 하니까, 법을 지키려고 하는 그 자체가 처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제공한 타인, 즉 예수님을 속이려고 하는데, 그 속이는 것이 바로 자기가 희생을 하겠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참 재미있는 표현인데, 하지만 자기가 희생을 하면 그 법이 만족하게 이루어지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식당에서 라면을 먹는데 국물에서 사람 손가락이 나왔다고 하면 기가 찰 노릇인데, 예를 들어서 말이다. 그 식당에서 라면을 새로 끓여준다고 해서 그것이 보상이 되는가? 그 불쾌하고 엽기적인 찜찜한 마음이 말이다. 그것은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여기 식당에 살인사건이 벌어진 것 같다고 말이다. 그것도 토막살인사건이 말이다.
◈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신고해야 !!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준 것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신고해야 될 문제인데, 그런데 신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실수를 했지만, 다음에 잘 할게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다음 번 모임은 17일이 아니라 16일에 하겠는데, 이의가 없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주님, 제가 다음 번에 잘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가 신고정신이 투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신고하고 고자질함에 있어서는 말이다. 물론 주님 앞에서 말이다. 즉 우리 자신이 그 얼마나 위선자인지, 그것을 주님께 낱낱이 고발하고 일러바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뭔가를 얻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속이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즉 “내 안에는 들어오지 마시고, 내 앞에서 나의 경배나 받으소서” 라고 말이다. 자기 속에는 결코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 속으로 뭔가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해 !!
지금 여기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가는데 힘이 든다고 케이블카를 만들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갓바위가 자기 몸 속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담석이 되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냥 갓바위로 저렇게 산 위에다 남아있는 것이 좋지, 굳이 자기 속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무엇이 좋겠느냐는 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속에는 전적으로 자기 것만 허용이 되고, 남의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자기 속에 남의 것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제일로 싫어하는 ‘간섭’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간섭이 말이다.
시골에 사는 시어머니에게 한 달이 용돈을 십만 원을 드리고 한 달에 한번 전화를 하는 것은 좋은데, 그런데 그 시어머니가 와서 같이 한 아파트에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환장하는 노릇이라는 말이다. 얼마 가지를 못해서 우울증에 걸리고 만다는 것이다. 차라리 자기가 창문을 열고 곱게 나가고 말지 말이다.
◈ 왜 내 안에 남이 산다는 말인가?
그러니 “왜 내 안에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