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0109-(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8강자유게시판에베소서

20090109-(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8강

이름 : 오용익(IP:211.194.56.75)

에베소서 제 28강 (이 근호목사, 2009년 1월 9일-(2), 서울의존교회)

두 번째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교회를 세워서 그리스도의 몸, 교회만 구원이 됩니다. 교회만 구원이 되니까 교회 아닌 사람이 구원이 될 리는 없고 반드시 교회인 사람만 구원이 되는데 이 교회는 머리가 예수님이 계신 곳이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나 5장에 보면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심같이’ 또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같이’ 이 교회는 …,

여기보세요. 바벨탑은 밑이 넓고 위가 좁은 탑 모양으로 되어 있지요? 바벨탑은 밑에서부터 차츰차츰 지어 올라가서 ‘우리 이름을 하늘에 내자’는 것인데, 여기 이 교회에서는 이미 하늘에 속한 분이 자기 사람을 데려가는 방식으로,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은 예수님이고, 예수님 지금 하늘에 계셔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교회를 만듭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만들 때 그 용서가 누구 용서냐 하면, 여기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자기백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한 그 용서가 나와야 되고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이 나와야 돼요. 그런데 여기 바벨탑에서 나오는 것은, 제가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것을 죽 적어보니까, ‘방탕과 우상숭배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과 누추함과 어리석음과 희롱과 도적질과 분을 품는 것과 어두움의 일’ 이것은 전부 다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것은 전부 다 사람에게서 나왔지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 안에서 어디에 가 있습니까? 이 안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자비하심 또는 용서, 또는 불쌍히 여겨주심, 불쌍히 여겨주시니까 이런 인간이 이렇게 되니까 여기서 뭐가 나와야 돼요? 나, 이런 죄인데 예수님한테 이런 용서 받았으니까, 바깥으로 뭐가 나옵니까?

용서가 나오고, ‘나는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았’으니까 뭐가 나와요? 사랑이 나오죠. 용서와 사랑이 나오면 ‘그리스도 안’ 이고, 이런 것이 나오면 그 안에 아무것도 없지요. 예수님이 안계시잖아요. 예수님이 안계시고 자기 자신만 있지요. 자기 자신만 있는 상태에서는 이런 것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어요.

왜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품성이 있으니까 이런 것들이 나온다 이 말이죠. 자, 물어보겠습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용서를 행하려고 사랑을 행하려고 애를 쓸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살다보면 방탕도 나오고 누추함도 나오고 화도 내고…, 이게 편합니까?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나오는 것이 편합니까? 어느 것이 좋습니까?

참, 제일 중요한 질문을 했네. 여러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가지고 나로부터 사랑이 나오고 용서가 나오는 이것이 맞는 줄은 아는데 그 맞다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렇게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이것이, 이렇게 되는 것이 즐겁습니까? 아니면 성질낼 것 성질 다 내고 화낼 것 다 내고 술 잡숫고 싶은 대로 다 잡숫고 … 여기에 술 취하는 것이 빠졌네요.

술 취하는 것, 내 배후에 아무도 없고 내 안에도 아무도 없고 나 만 있는 것, 나 만 있으니까 누구 이름으로 나입니까? 나는요, 나만 위해서 살아요. 나는 내 이름을 위해서 살아요. 여러분, 모든 인간은 자기이름을 위해서 삽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다보니 이런 것이 나온다 이 말이죠. 화내고 마음대로 안 되니까 짜증나고 시기 나니까 술 처먹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 한다 이 말이죠.

자기 이름을 높이는 이것, 여러분, 이게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시는데 제가 지금 묻는 것은 이게 편합니까?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나오는 것, 이것이 편합니까? 어느 것이 옳으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것이 평소에 자연스럽고 어느 것이 편안하게 내 성질에 딱 맞다, 하는 느낌이 오느냐 이 말입니다. 이쪽이냐, 이쪽이냐? 교회쪽이냐, 바벨탑쪽이냐? 말이죠.

이것을 설명해 드릴게요. 제가 수련회 때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은 죄성이 있어요. 죄성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 오늘 배웠으니까 좀 써먹으세요. 인간에게 죄성이 있다는 말은 내 이름을 어디까지 높인다? ‘역시 나는 위대해. 역시 나는 좀 더 살아야 돼.’ 자기 가치를 어디까지? 일층? 5층? 6층? 아니에요.

사람은 5층 올라가면 10층까지 또 올라가야 돼요. 어디까지 올라가야 마음이 편하냐 하면 하늘끝까지, 대통령도 안돼요. UN 사무총장, UN 사무총장보다 더 높은 신까지, UN사무총장보다 더 높은게 목사고 목사보다 더 높은게 신 아닙니까? 차곡차곡 높아지는데 이것이 마음대로 안될 때에는 이런 것들이 나온다는 말이죠.

이게 성도한테도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똑같지요. 불신자나 신자나 똑같은데, 정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특이한 점은 잠깐 짧은 시간에 바로 이 구조가 틈새를 비집고 불쑥 예상도 못하게 튀어나온다는 사실이에요. 우리의 대부분 생활은 어느게 편하냐, 입니다. 사람은 편한대로 살거든요. 이것이 옳은줄 알아요. 옳은줄 알지만 대부분 이겁니다.

애 학교 성적 나쁘면 화나고,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분을 품고, 그러잖아요. 이게 우리한테 편해요. 왜 편하냐 하면 우리 부모로부터 받은 죄, DNA가 여기에 딱 들어맞게 되어 있어요. 우리 부모로부터 뭘 받았습니까? ‘내 이름을 낮추는 것은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이거 참, 어느 교회도 말썽 일어나는 것은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이 교회 충성 봉사했는데 왜 자꾸 내 신경을 건드리나. 나 교회 안나온다.’ 이게 목사님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거예요. 예수님의 손에는 못이 박혔지만 목사님의 손에 못을 박는 것은 뭐냐하면 삐지는 것. ‘집사님, 그런 뜻이 아니고요. 목사님의 설교내용은 집사님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다를 향해서 한 겁니.’ ‘아니다. 나를 표적삼아서 했다. 나를 노리고 했다.’

그게 아니고 ‘최집사님 이야기를 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고 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아닙니다. 어, 다르고 아, 다른데 이것은 나를 밟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죄인이면 밟아 죽여도 괜찮잖아요. 밟혀죽으면 천당 갈 수 있잖아요. 밟아죽인 것이 뭐 그리 화가 납니까? 그런데 사람은 평소에 ‘나는 신앙좋다. 나는 겸손하다.’ 이렇게 해놓고, 다른 사람 건드릴 때는 같이 호응해놓고 막상 나 하나 건드릴 때 ….

‘머리 어느 미장원에서 했어? 머리 잘못 나왔네.’ 이것 하나 말했다고 그 다음부터 2주동안 교회 안 나옵니다. 실컷 좋아한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컷 사랑한다, 좋아한다, 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것, ‘나는 장서희 TV에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더 나왔으면 좋겠는데.’ TV 보다가 싸워서 그 다음날부터 삐져서 일주일동안 밥도 안 해주고 쌈하고.

이게 다 뭡니까? ‘우리 이름을 하늘에까지 닿게 하겠다’고 하니까 상당히 어렵게 들리는데 쉽게 말하면 뭐에요? 자존심 아닙니까? 자존심, 자존심이거든요. ‘내가 나를 건드리면 괜찮은데 왜 나 말고 타인이 나를 건드리냔 말야. 내가 이만한 자존심 지키는 것만 해도 얼마나 애쓴건데, 내가 이만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용을 썼는데 이걸 건드려버리면 너는 나의 원수다.’

이것이 폭탄입니다. 우리 모두가 폭탄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뭐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방어에 나서고 때로는 공격에 나서는 것, 이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고 이 본성이 그대로 어디에 들어가 있습니까? 예수 믿는 인간들 안에도 그대로 들어 있어요.

있는데 이상스럽게도 여기서 예수님의 용서가 그 성질내는 틈 사이에서 한 2초? 5초?, 갑자기 ‘나도 참 주님한테 용서받은 인간인데 아니 용서받은 죄인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내가 그 사람에게 큰 소리를 쳤지? 아, 바보, 바보!’ 이것이 한 2초 지나면 사라집니다. 2초 지나서 사라지든 말든 그런 십자가의 용서가 떠오르거든 그 사람은 새사람입니다.

주께서 그 안에서 작업하고 있어요. 천사 만들기 위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생각 안하고 내 자존심 상한 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큰 소리를 쳤고 다음부터 교회 안 나온다고 큰 소리를 쳤고, 야,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부끄러워서 교회를 못나갈 지경이죠. 그래서 다음에 교회 못가는 이유가 부끄러워서 못가요.

그래서 교회 갈 때는 ‘김 집사는 나한테 그런 뜻으로 말 한 것도 아닌데 내가 괜히 내 자존심 건드렸다고 나 혼자 생각해서 그렇게 화를 냈구나. 참 미한하다. 교회가서 만나면 사과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해야지.’ 라고 교회 가서 김집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2초가 끝났어요. ‘한번만 더 나한테 그러기만 해봐라.’

사람은 누가 관리한다고 했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이 관리해요. 성도는 하나님이 관리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절제? 절제 안 됩니다. 절제하면 절제한 만큼 자기 자존심이 더 높아져요. 나는 두 번이나 절제했다. 그것이 자기 이름을 더 높인다니까요. 하나님이 사람을 관리해서, 다른말로 하면 성령께서 사람을 인도해서 천국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런데 분을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어디서 봤어요? 에베소서 4장에서 봤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늘 성경을 보고 있으면 성령께서…성경을 보고 있으면 자기딴에는 지킨다, 지킨다 하지만 바쁘다 보면 못 지키거든요 … 그런데 성령께서는 빠지지 않고 이 성경말씀으로 우리한테 지적해서 ‘너, 너만 생각하지. 네 행동만 정당하지. 네 속에서 용서가 나왔나?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나? 주님이 너를 사랑한 것처럼 상대방을 무한히 사랑했나?’ 라는 생각이 번쩍 번쩍 들면 그 짧은 순간이 바로 빛이 나오는 순간이에요.

그게 바로 조명기구에 뭘 붙였다? 아까 딱지 같은 것, 그림을 붙여 놓으면 그냥 나는 붙어 있을 뿐인데, 빛이 나를 투과해서 상대방에게 뭐가 전달됩니까? 나의 용서가 아니고 누구의 용서? 예수님의 용서와 예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것, 그것이 바로 5장 1절입니다. 다같이 5장 1절을 읽어봅시다.

에베소서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게 드리셨느니라.”

주께서 성도 안에서 그 짧은 순간 순간마다 이것을 주께서 행하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만약에 이것을 인위적으로 계속 유지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또 하나의 뭐가 돼요? 또 하나의 자존심이 더 채워지는 거지요. 이것을 보고 ‘야, 나는 전에 사랑했다.’ 이러면 안 되고, 이 말씀을 보고 ‘야, 나는 도저히 이 에베소서 5장 1절의 말씀을 (한번이라도 할 수 있다, 없다?) 절대로 못합니다. 주여, 주의 뜻대로 날 통하여 이 사랑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러면 주님께서 ‘너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보면 되요. 죄인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요런 더러운 것들을 내 뱉는 누가 살아 있습니까? 자기가 살아있죠.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을 성경대로 하면 자기이름이죠. 자기이름을 높이는 거죠. 자기가 살아 있다. 자기 이름이 있다. 자기가 살아 있으면 이런 것이 나와요.

그런데 만약에 주의 이름이 이 사람에게 가면 주의 이름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 이름을 무의미하게 ‘너는 있으나 마나 한 인간이야.’ 하고 죄를 지적하게 되면 내 이름은 없어지고 짧은 순간이지만 누구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겠지요. 이것을 보고 성경에서 하는 말이 ‘네가 누구를 용서할 때도 누구의 힘으로 하라?’ ‘주의 이름으로 하라.’ 이 말이 그 말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한다는게.

너는 빠지고 주의 사랑이 전달되고 주님의 용서가 전달될 때 그 매체가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왜? 우리는 쓸모없는 인간이니까. 우리는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여러분, 우유마실 때 쓰는 빨대 있지요. 빨대는 우유가 아닙니다. 빨대는 우유가 아니지만 빨대를 꽂으면 안에 있는 우유가 그 빨대를 통해서 오지요. 우리는 빨대에요. 문제는 빨대가 막혀 버리면 뭐가 튀어나오느냐 하면 유유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빨대가 튀어나와요.

나는 예쁜 빨대, 나는 잘난 빨대 된다니까요. 주님의 사랑, 주님의 용서가 통과하는 파이프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빛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 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되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할게요. 이게 잔소리입니까? 아니면 지시입니까? 묻습니다. 이제는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계시가 잔소리입니까, 지시입니까? 지시, 누구를 지시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거지요. 어떤 행동을 할 때 잔소리를 하면 모든게 자기행동을 하는 자기한테 와버려요. 그런데 진짜 성령받은 성도에게 해 버리면 누구를 이야기한다?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하고 그것이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이 다 한거예요. 몇초동안? 2초동안.

사람이 교회에서 고아원 방문한다고 해보세요. 처음에 할 때는 감격스러워요. ‘주여, 이 미천한 인간, 죄밖에 모르는 인간이 남을 도울 수 있다니…’ 하면서 라면하고 떡하고 싸가지요. 갈 때 그 때 뿐입니다. 가서 나눠줘 보세요. 나눠줘 보면 은근히 화가 나요.

‘주여, 이 어려운 일 꼭 우리가 해야 됩니까? 다른 사람이 하면 안됩니까? 전능하신 주께서 축복 주시고 이 아이들을 다 부자되게 해주시면 그만 우리가 다시는 여기에 안 찾아와도 되는데 왜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찾아오게 만듭니까?’ 이런 불평불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몇초, 몇분 가지고 않아요. 얼마 가지도 않아서 또 ‘나같이 고상한 인간이 이런 더러운 일을 해야만 되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갑자기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며, 십자가 은혜가…’ 말은 그렇게 번지르하게 해 놓고 곧장 돌아서면 ‘나같이 괜찮은 인간이 꼭 이런 일을 해야 됩니까?’ 주님께서 ‘네가 뭔데? 도대체 네가 뭔데?’ ‘주여, 내 이름 괜찮아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바벨탑, 바벨탑 노선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실제로 매일 일어나요. 부부사이에서도 ‘아이고, 저것도 남편이라고 밥을 해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매일 같이 드는데 그래도 은혜 받으면 ‘맞아, 살게 해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나같이 죄 많은 여자에게 저런 남편을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그게 한 3 초갑니다. 금방 성질나서 설거지 합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들이 말 안들을 때 ‘하나님, 기도해서 낳은 자식이고 기도해서 키우는데 왜 저렇게 말을 안 듣습니까?’ 하다가 ‘아이고, 자식 없는 사람도 많고 병든 자식도 있는데 이렇게 건강하게 해주니 그저 감사합니다. 나 같은 여자에게 애 키우는 기쁨을 주시다니 ….’ 그것이 5초갑니다. 금방 또 성질나서 말 안들으면 ‘공부해!’라고 고함지르죠.

우리는 이 타고난 죄성을 평생 못버립니다. 못버리는데 흙에 속한 형상이 어떻게 천사의 형상으로 변한다? 그것은 누가 작용하느냐? 그것은 성령께서 작용하는데 오늘 배웠던 말씀을 가지고 기억나게 해서 책망하는 식으로, ‘너는 용서받은 자가 그래서 되겠느냐?’ 성령께서 책망하는 식으로, 그래서 우리는 회개하는 순간, 회개했다 싶으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주의 빛이 나오고 회개 안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잘난 내가 나와버려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라고 해서 완전한자라고 생각하면 여러분의 큰 오해입니다. 성도는 완전한자가 아니고 이미 완전한자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하늘로부터 만들어져요. 바벨탑은 누가 만든다? 땅에서부터 인간들이 만들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만들어서 자기 사람을 포섭하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데리고 붙잡아서 관리하는 그런 거꾸로 된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벨탑에 속한 사람에게서 나올수 없는 두가지가 나와요. 뭐가 나옵니까? 용서가 나옵니다. 4장 32절을 제가 읽어봅니다.

에베소서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앞에 보면 도둑질 하지 말라고 했지요. 도둑질 하는 도둑놈이 도둑질하면서, 그 집의 물건을 훔치면서 그 집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용서를 합니까? ‘아이고, 이 집 주인 아저씨요, 미안합니다. 나도 급해서 들고 나갑니다.’ 이렇게 하지 ‘세상에, 이집 아저씨가 이 금목걸이를 하려고 얼마나 고생해서 벌었는데 ….’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합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자기만 생각한다고요.

도적질하는 것이 자기만 생각한다면 보통 일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자기만 생각하는 것은 도적놈 아닙니까?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만 생각해서 도적질 하는 것이나. 꼭 물건 훔쳐야 도둑놈입니까? 자기만 생각하는 것도 도둑놈 심보다 이 말이죠. 거기서 무슨 용서가 나오고 사랑이 나옵니까?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용서하지 말고 사랑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왜? 내용서 내 사랑이 누구를 가립니까?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가려버리니까 ‘나는 용서할 줄도 몰라요. 나는 나 밖에 몰라.’ 그런 순간에 성령이 계시면 뭐가 튀어 나와요. 그런 죄인을, ‘내가 너를 용서하는 사람되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 되게 할 테니까 네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네 상황을 굉장히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OK!’

‘오케이’가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좋습니다. ‘내 몸에서 용서가 나오고 내 입에서 사랑이 나오다니 좋습니다.’ 이것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좋아져야 되고 이것이 편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제 이야기는. 그리고 여기 바벨탑, 이것은 불편해져야 되고 이것은 이렇지 않을 수는 없는데요, 이럴 때 마다 우리는 괴로워해야 된다고요, 괴로워해야.

이것을 보시고 ‘참, 내가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가 이게 무슨 짓이냐.’ 이것은 괴로워하고 싫어져야 하고 이 용서와 사랑은 마음이 편해져야 한다, 이 말입니다. 실제로 성도는 용서와 사랑이 나오면 한마디로 뭐합니까? 실제로 감격해요, 감격. 여러분이 성도 아닙니까? 성도 맞지요.

실제로 짧은 순간이지만 ‘ 가 죄인이며 내가 남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지’ 이런 생각이 들면 ‘야, 이런 생각이 들다니…’ 오히려 본인이 감격해요. 짧은 순간이지만! 그게 바로 성도로서의 사는 재미고 기쁨입니다. 돈을 십억 벌어보세요. 감사가 나오는가? 안 나옵니다. 진정한 감사는 ‘내가 십억 받을 자격도 못되는 인간인데 십억을 구했으니까 얼마나 나쁜놈이냐’ 라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에 터져 나오는 그 기쁨, ‘이런 인간도 구원하시다니’ 라는 그 기쁨, 그 기쁨은 돈 십억 주고도 못삽니다.

18절을 봅시다. 다같이 시작!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기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했으니까 이것은 어린이들은 술을 안마시니까 상관없지만 술을 마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술을 먹을 때 누구 좋으라고 먹습니까? 이게 술잔이라고 하면 이 술을 이렇게 마십니다. 술은 내가 마셔놓고 ‘어이, 친구야! 기분좋지? 너 얼굴 벌겋잖아. 봐라.’ 이런 사람 봤습니까? 술은 왜 마십니까? 누구 좋으라고 마십니까? 자기 취하려고 마시지요.

어린이들은 술 마셔본적 없겠지만 술은 자기 취하려고 마시지요. 그죠? 그러니까 술취하지 말라, 는 말씀이 뭔가 하면 너 자신을 위한 행위는 꼭 뭐와 같다? 나만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성령의 뜻과는 배치되지요. 그런데 인간은 평소에 24시간 누구만 생각합니까? 24시간 아침부터 일어나서 이명박 생각합니까? 아니지요. 내 생각하지요.

그럴 때 누가 개입해요. 성령이 개입하게 되면 ‘아하, 나 좋으라고 하는 일이 결코 나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들어계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나는 어떠한 존재이든 관계없이 하늘나라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무슨 순간입니까? 술취하는 것이 술의 충만이라면 그 반대말이 뭐예요? 성령충만, 그러니까 나의 충만이 아니고 누구의 충만? 하나님의 충만.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무엇을 전제로 한다? 누구 충만은 안된다? 나를 위한 내 인생은 잘못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지요. 아시겠습니까? 제가 강의 할 때마다 ‘목사님, 그것 지켜야 됩니까?’ 이렇게 바라주는것처럼 느껴질까봐 제가 염려되는데 지금 그런 말이 아니고 그런 잔소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누굴 지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지시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여러분속에 그렇게 작용한다. 뭐? 나를 위한 그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아시겠습니까? 교회가 되었든 전도가 되었든 헌금이 되었든 나를 위한 그것은 무조건 성령의 충만은 아니고 성령충만 같으면 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서 사용한다, 그런 쪽으로 가는 것이 성령충만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알면 5장 이것 다 했어요. 다 끝난 거라니까 그거. 사람이 방탕이나 음행이나 이거 다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사람이 욕심내는 것이 다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남 좋으라고 욕심 안내요.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말이야. 너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야.’

사람은 누구를 만나면 그래요. ‘이미아는 나를 위해서 존재해.’ 만나면 그런 생각부터 든단 말이에요. 안상태 기자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난 나 혼자 늘 있을뿐이고! 난 추웠을 뿐이고!’ 맨 앞글자가 무슨 자입니까? 난! 하고 내놓잖아요. 이게 바로 불신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바벨에 속한 모든 인간이, 바벨탑 앞에 붙는 것이 뭡니까?

‘난! 오늘도 하늘나라까 이름이 높아져야 했을 뿐이고, 나는 위대할 뿐이고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될 뿐이고, 남의 자식 꼴등 하든 말든 나의 아이는 일등 했을 뿐이고 ….’ 아, 참, 이거. 그래서 이 말씀이 이런 뜻이기 때문에 이대로, 이 본문 말씀대로 될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흙이다. 흙인데 그래서 아무도 천사될 수 없는 인간을 누가 오면? 생령,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인간속에 뭐가 들어온다?

성령의 이런 뜻이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죽어도 천당가는 하늘에 속한 천사같은 형상을 입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그런데 그 계획을 우리가 왜 자꾸 안들으려고 합니까? 그것은 ‘난!’ 하듯이 버릇이 만 날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을 안 들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진도 나가봅시다. 5장 6절.

에베소서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헛된 말이 뭡니까? 헛된 말이 뭐냐 하면,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뭐가 임하지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요. 진노. 여러분이 답변해보세요. 자, 에베소서 5장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반대말이 뭡니까? 두자로. 용서 아닙니까? 용서 받았으니까 그렇다면 뭐는 안받는다? 진노 안받는다. 진노 받는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뭐가 없다? 용서가 없는 거예요.

여호수아 11장 20절을 봅시다. 유명한 구절인데 다시 한번 봅시다.

여호수아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지금 제가 뭘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헛된 말로 속이는 사람이 어떤 경우냐 하면 ‘불순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안온다’는 겁니다. 저주가 없다는 말인데 그게 헛된 말이죠. 헛된 말인지 한번 봅시다. 여호수아 11장 20절 다 같이 시작!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뭐 받은자? “그들로 저주 받은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라고 되어 있지요.

저주 받는 것이 남보다 더 죄져서 저주받습니까? 뭐를 입지 못해서 저주받았습니까? 은혜를 입지 못했지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저주를 안받는 것은 남보다 죄를 적게 지어서가 아니라 뭘 받았기 때문에, 용서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안받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용서는 어디에서 옵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해버리니까 그 사람에게 남는 것은 누구만 남아요? 난, 자기만 남지요.

자기만 남는 이상 하나님의 저주가 옵니다.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은게 뭐냐하면 저주, 진노, 지옥, 『지옥의 하나님』은 책 거의 안 가져갔어요. 왜? 듣기 싫거든.『피』도 그럴수 있어요. 피도 싫어요. 사람들이 뭐 좋아하느냐? 희망, 고난을 이기다, 이런 것, 축복의 비결, 이런 것, 축복, 희망 되게 좋아하죠.

그러나 정말 기쁨이 있는 경우는 내가 진노 받아 마땅함을 느낄 때만 무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내가 진노 받아 마땅한 것을 느낄 때 그때 주님이 주신 그 용서는 돈 10억 천억이라도 그 용서를 빼앗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진노 받아 마땅할 때. 그러면 우리가 착하게 살자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착하게 살자는 말이 아니고요,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어떻게 일하냐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성령은 안 받았지만 착하게 살면 어떻습니까?’ 그런 사람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반드시 뭘 알게 된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용서를 알지요. 용서란 말은 나는 뭐였다? 죄인이었는데 주님의 용서 아니면 나는 인간도 아니다, 그 말 아닙니까? 주님의 용서 없으면 사람도 아니에요. 주님의 용서 없으면 나는 새사람도 아니에요. 빛의 자녀도 아닙니다.

성령이 올 때 용서를 알고, 용서가 뭡니까? 죄용서 아닙니까? 죄용서. 죄가 없어지니까 뭐가 없다? 진노도 사라져 버린다. 이런 사람에게는 뭐가 나온다? 늘, 이 아닙니다. 가끔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고 용서가 나옵니다. 늘 나오는 것은 난, 이게 나오죠. 그럴 때 마다 성령께서 ‘그것은 잘못, 그것은 죄, 또 봐라, 너의 이기주의’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복음 전한 후에, 내가 복음 전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복음 전한 후에 내가 복음과 맞지 아니하면 나도 저주받을까봐서 염려된다.’ 이 말입니다. 그만큼 복음 전했다는 그 행함, 그것은 전혀 도움 안되고, 복음을 전하든 뭘 하든 그 용서는 예수님의 피는 남녀노소, 십년 믿었든 20년 믿었든 관계없어요, 당장 믿어도 관계없고 그 예수님의 피는 여러분들을 용서해줍니다.

이 기쁨은 여러분들이 새사람되었다는 그 기쁨과 같은 기쁨이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9절 봅시다.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함과 빛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언제 나온다? 이것이 인간이 자기부인될 때, 내 이름이 성령한테 책망받을 때 그 때 그 순간 틈을 타서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탁 튀어나오죠. 내가 주님의 용서를 가로막으면 절대 이게 안나와요. 나 잘났다, 가 되니까. 그런데 거꾸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나쁜 놈입니다’ 할 때 남들보기에 거기에 뭐가 나와요?

‘야, 착하구나. 정말 의롭구나. 정말 진실하구나. 남들 같으면 욕심 낼 만한데 욕심도 안내고 야, 당신 참 대단하네’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표를 낼 수 있다 이말입니다. 이것도 한번 그랬으니까 계속 오래 가보자, 하면 갑자기 또 어떻게 됩니까? ‘역시 난, 위대하고….’ 또 그것을 자기가 만들지요. 그럴때마다 성령께서 오셔서 또 책망하고, 또 용서를 잊었다고 또 책망하고.

그러면 목사님 24시간 한시도 쉬지않고 용서 용서 용서, 그런 방법은 없습니까? 그런 방법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면 됩니다. 그러면 되지요. 그런데 그러고 싶겠어요? 어느 것이 편합니까? 24시간 죄인이라는 것이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것이 굉장히 기분 편합니까? 역시 사회에 나가서는 어떻게 돼요?

‘난 위대하고 … 한번 붙어보자.’ 이것이 사회잖아요. 너 나 예수 믿는다고 깔봤지? 나 이만큼 잘 할수 있어. 이것이 우리 속에서 계속 튀어나오죠. 내 이름을 한 단계, 두 단계 더 높이는 것,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해서 나의 가치도 세 단계 네 단계 막 높아지는 것. 김연아 엄마 보세요. 얼마나 신나는가. 김연아 엄마 되려고 김연아 같이 애 키우는 엄마들 많아요.

자기가 김연아 엄마 되려고. 이름을 어디까지 냈어요? 이름을 세계만방에 냈어요. 만인의 부러움을 샀잖아요. 사람들에게 그것이 뭐가 돼요? 희망이 되는 거예요. 진리가 아니고, 진리느 흙에서 천사되는 것이 진리고, 진리가 아니고 희망이 돼요. 그 희망이 자기가 사는 보람이 되어서 자기 이름을 높이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2002년 월드컵처럼 너나 할 것없이, 신자 불신자 할 것이 없이 다 같이 한마음 되어 버려요. 그것이 넓은 길이고 그것이 멸망의 길 아닙니까? 그런데 신자는 ‘어이, 너 나와’ 라고 딱 성령이 와서 ‘너는 그 길을 가면 안돼. 너는 죄인이야’ 라고 꽂아주는 그런 놀라운 십자가역사가 자기로 하여금 다시 한번 어떻게 하느냐? 19절 되게 합니다. 19절, 다같이 시작!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이게 노래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수련회 할 때 그런 노래를 불렀습니다만 찬송가 가사 문제에 대해서 은혜롭게 기도해서 썼다고 하지만 사람은 어떤 가사든지 마음먹기 따라서 은혜롭게 되는 거예요. 이런 가사가 있어요. 영어로 된 가사인데 써보겠습니다. 'Nobody Nobody but you' 이게 뭐에요?

이것을 해석하면 ‘저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오직 나 밖에.’ 오직 내사랑은 당신밖에 없다는 소리인데 이것을 은혜로 바꾸면 나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오직 주님, 노바디 노바디 오직 주님! 이렇게 됩니다.

시와 찬미, 그것은 가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현재 내 마음이 ‘주님, 나같은 인간을 이렇게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어떤 노래를 불러도 거기에 실리겠지요. 노바디 노바디 밧 유, 하면 거기에 실린다 이 말이죠. 어떤 노래 가사에는 이런 게 있어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 이라고 하는. 그것을 주님으로 바꾸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더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 그 노래를 부르면 되겠지요. 그 노래 이름이 뭡니까? 잊어버렸습니다만 그런 노래 있어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는 것은 가사를 외우는 것이 아니고 내 실존을 내 존재 전부를 내가 죄인이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의 노래뿐만 아니고 행동조차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데 영광이 안될 리가 있습니까? 자기를 낮추는데. 쉽지요. 다시 묻습니다. 이게 편합니까? 쉬운 것은 이해하는데 이게 편합니까? 이렇게 하고 싶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나는 평생에 이런 죄 안졌다.’ 그것 힘들어요. 속이 아주 엉망입니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이런 죄 지은 적이 없어요.’ 이것 불편합니다. 왜? 자기 자신이 살아 있으니까. 난! 이게 살아 있어요. 그게 깨어질 때 시와 찬미가 저절로 되는 겁니다. 굉장히 쉽지요. 그 다음에 20절에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5:20,21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방금 그 이야기가 나오네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뭡니까? 누구 이름으로? 내 이름은 아니지요? 나는 아니지요? 누구 이름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차 복종하라’ 이 말입니다. 자, 여기서 이름이 무어냐? 이름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수련회 때 했는데 상당히 어려워서 다시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 이런 거예요. 어떤 사람이 하숙방에 쑥 들어갔어요. 들어갔는데 주인이 가만 있다가 ‘저 총각 이름이 뭐지?’ 이름을 모르니까 ‘어이 거시기’ 이럴 수가 없다 이말이죠. 그래서 ‘어이, 총각 이리 나와 봐. 이름 적어.’ ‘이름을 왜 적는데요?’ ‘이름을 적으라니까.’ 그래서 이름을 적었다 이 말이죠. ‘김영철’ 이라고 적었습니다. ‘자, 되었으니 방에 가봐.’

어떤 사람이 와서 ‘혹시 여기 김영철이 있습니까?’ ‘예, 여기 김영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름을 부릅니다. ‘어이 김영철! 김영철!’ 이름을 불러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에 해당되는 사람이 방안에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주님! 주님!’ 하고 부를 때 부르는 그 사람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으니까 부르는 것 아닙니까? 그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을 부름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받는다?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 이름을 부를 때 자기 이름 생각 안하지요? 주님 저 어때요? 이렇게 하는 게 아니지요? 그 이름을 부를 때만은 누구 이름을 기억지 않습니까? ‘내 이름이 얼마나 잘났으며 내 이름이 얼마나 …’ 그런 생각 안하지요?

그거 생각하면 주의 이름 부르겠습니까? 내 이름 부르지. ‘이근호!’ 내 이름 부르지요. 그러나 내 이름 안 부르고 범사에 누구 이름 부른다? 내 이름 안 부르고 주님, 하고 부른다는 것은 ‘거기 계신 것 다 알아요. 주님 계신 것 다 안다고요. 다른 사람은 다 주님 모독하지만 나는 주님 이름 덕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라는 고백을 쏟아놓는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고 성령의 삶입니다.

그리고 서로서로가 자기 이름 내세우지 말고, 주님 이름을 이야기할 때는 서로가 다 낮아지겠지요. 왜? 주님을 생각하니까. 그럴 때는 복종 안 할래야 복종 안할 수가 없지요. ‘집사님, 이것 좀 도와주렵니까? 제가 청소당번인데 바쁜 일이 있어서요.’ '내가 도와줄게요.’ 이게 전부 주님 이름 안에 살아버리면 서로 서로 도와주고 서로 서로 복종하고 그게 바로 성령안에서의 한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그 관건이 어디에 있어요. 자기 이름을 앞장세우지 않고 누구 이름을 앞장세운다? 주의 이름을 앞장세우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매일같이 부르세요. 주님! 그러면 주님이 뭐라 하는지 알아요? ‘나 불렀나?’ ‘예,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오늘 네 하루의 삶도 내 이름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내가 너, 라는 빨대를 통해서 내려 보내겠다. 각오해라.’ ‘각오합니다.’

기도하는데 끝에 주 예수 이름으로 한다고 주문처럼 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 기도내용이 주님께서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 빨대 같은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해달라, 고 해놓고 그 뒤에 뭘 붙입니까? 그것은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내 이름도 부르고 주의 이름도 부르고 양쪽 다 부르면 안됩니다.

그러면 서로 피차 복종이 안 되지요. ‘어이, 너는 뭐야? 너만 잘났나? 나는 이렇다.’ 그러면 복종이 안 되고 서로 싸우잖아요. 주의 이름을 부르면 서로 복종이 된다 이 말입니다. 자,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13절을 봅시다.

에베소서 5:13,14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주님께서 우리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죽은자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일은 죽은자를 살리는 거예요. 죽은 우리를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주님의 성령을 통해서 죽은 우리 몸도 그 성령으로 인하여 다시 살릴 것이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다 같이 바라기는 24시간 내 생각 안나고 주여! 주님 생각만 나는 하루하루가, 그런 상태가 나한테도 편안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상태가 억지가 아니고, 교인이니까 주님 불러야지, 그게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죄인인채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행복으로 편안해지는 그런 남은 여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있기에 이제는 우리 속에서 나오는 모든 죄가 죄인줄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제는 나를 내세우지 말고 주의 감사와 용서와 사랑만 남들에게 드러나는 그런 빨대같은 역할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5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7,267 자유게시판 20090221b 울산목양교회 특강-구원, 그 이후 - 최고관리자 09-03-03
7,266 자유게시판 20090221a 울산목양교회 특강-구원, 그 이후 - 최고관리자 09-03-03
7,265 강의 대구 3월 3일 죽은 신을 위하여2 [신학] 최고관리자 09-03-03
7,264 자유게시판 절대 불치성 중독자의 행복 - 최고관리자 09-03-03
7,263 자유게시판 여자란 무엇인가? 잉여 증폭기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02
7,262 자유게시판 살아온 만큼의 체증 - 최고관리자 09-03-02
7,261 자유게시판 십자가마을 홈페이지 개편작업 - 최고관리자 09-03-02
7,260 우리교회 [주보] 성전과 강도의 굴혈 - 3월 8일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01
7,259 우리교회 삼상 15:32-35 (사무엘의 조치)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09-03-01
7,258 설교 마가복음 11장12-14절 제목 :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01
7,257 우리교회 막 11:12-14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01
7,256 묻고답하기 설교의 어폐성? 이랫다 저랫다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09-02-28
7,255 강의 광주 2월 27일 강의 디모데후서 2장 2절, 8절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09-02-28
7,254 자유게시판 09대구강의01-인간구원을위한신학6-2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9-02-27
7,253 자유게시판 09대구강의01-인간구원을위한신학6-1 [신학] 최고관리자 09-02-27
7,252 자유게시판 08대구강의18-복음으로본"사주팔자"2 - 최고관리자 09-02-27
7,251 자유게시판 08대구강의18-복음으로본"사주팔자"1 로마서 최고관리자 09-02-27
열람 ➜ 자유게시판 20090109-(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8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9-02-26
7,249 자유게시판 20090109-(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7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9-02-26
7,248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09. 1. 23) 2강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9-02-26
7,247 묻고답하기 주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 누구든지 답해 주세요.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9-02-26
7,246 성경신학 구원, 그 이후 미가 최고관리자 09-02-25
7,245 우리교회 사 66:15-17 (여호와의 심판) 이사야 최고관리자 09-02-25
7,244 묻고답하기 천국에 누가 넣어준대? - 최고관리자 09-02-25
7,243 우리교회 [일반] 쳔국에 누가 넣어준대? [일반] 최고관리자 09-02-25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