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9. 1. 23) 2강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광주 강의(09. 1. 23) 2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9. 1. 23) 45-2

디모데후서 1장 13절에 보면 믿음과 사랑이 나오죠? 이게 사라진다는 거예요. 지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맞습니다. 사랑입니다. 믿음입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지속되지 않고 몇 초 후에 사라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분석해 봐야 돼요. 뭔가 사라진다는 말은 내 소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내 소유가 아니에요. 결코 내 소유가 될 수 없어요. 그러면 내 소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소망이 잠시잠깐이라도 생겼다가 없어진다는 말은 나의 소유주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라는 말은 어렵기 때문에 쉽게 은혜라고 합시다. 은혜라는 말도 어렵습니까? 그러면 선물로 합시다. 자, 믿음, 소망, 사랑이 선물인데, 선물을 받았으면 내 소유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 선물은 얼마나 특이한지 왔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는데 또 나타나고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선물이 아니라 믿음, 소망, 사랑이 주체가 되고 나는 믿음, 소망, 사랑을 담는 그릇이 되고 선물이 되지요.

여러분, 욕망이 대상입니까, 주체입니까? 우리가 보통 욕심이 있다. 욕망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이에요. “나는 욕심이 있어.” “그렇게 이야기하는 너는 뭔데?”

조사를 해보면 욕망과 욕심이 로마서 7장에 의하면 욕망이 하나의 대상이 아니고, “이건 욕심이야. 이건 욕심이 아니야.” 라고 구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욕망이 내 주체를 형성했어요. 그러니까 욕망으로서 욕망을 파악하니까 그 욕망이 제대로 파악이 안 되지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어요. 모든 신학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그 신학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아닌지를 바라볼 수 있는 제 3의 시선이 신학에 안 들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이런 신학을 갖고 있다.’ 라는 것이 문제지”라고 하려면 나를 떠나서 제 3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된단 말이지요.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나는 지금 십자가를 잘 지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십자가를 진 것이 제대로 진 것인지 아닌지, 제 3의 시선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는 거예요. 이게 문제에요. 그러니까 자기 딴에는 십자가를 진다고 졌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금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아가겠나이다.” 라고 했어요. 이것이 정말 철없는 소리이고, 또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욕망은 대상입니까, 주체입니까? 주체지요. 주체가 되면 “나에게 욕심이 있다.”는 말이 옳은 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거짓말이죠. 욕심쟁이가 “나는 욕심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나는 욕심이 많아.” 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욕심이 뭔지 몰라요. 그런 소리 한다는 것은 마치 ‘자기는 건전한데 욕심이 있어서 욕심 때문에 내가 괴롭다.’는 이야기잖아요. 글쎄 그것이 불교입니다.

욕심을 줄이고, 욕심을 버리고 스스로 도를 닦는데 ‘그런 짓을 하는 자체가 바로 죄야. 욕망이야.’ 라고 알려줄 타이밍이 어떤 타이밍이냐? 바로 왔다가 사라지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죠.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내 소유가 될 수 없지요. 내 소유가 되면 안 되지요. 나는 욕망이기 때문에. 욕망의 소유는 같은 욕심이에요. “목사님, 저는 믿음 좋아요.” 이건 말이 안 돼요. 나라는 욕망이 내 것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 믿음도 욕망이 되는 겁니다.

제 논리가 뭐냐 하면, 왔다가 사라진 것은 내 소유가 될 수 없다. 내 소유가 되면 마치 욕망이 혹은 죄인이 “이건 죄야.”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이 어디 있냔 말이지요.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 죄라고 하면 만날 거짓말 한 것, 남을 속인 것 등등을 회개하잖아요. 그게 말이 됩니까? 죄인이 죄를 회개하니까 그 죄는 죄가 아니지요.

빌라도가 대아에 손 씻는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오늘날 교인들이 빌라도가 손 씻는 것과 같은 짓을 하면서 교회 다니고 있어요. “주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다고 자기 죄가 없어집니까?

그래서 왔다가 사라진다는 말은 “나는 믿음, 소망, 사랑을 붙잡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정신 차려야 돼요. 어떤 사람은 “주여, 나는 늘 사랑과 소망이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 하면 안 돼요. 믿음, 소망, 사랑 속에는 내가 죄인으로 허구적으로 만든 주체 말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비로소 나라고 하는 주체가 여기에 담겨서 나에게 와요. 이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1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여기서 ‘나’가 있지요? 이 ‘나’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나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는 기존의 ‘나’ 같으면 내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고 내가 장악하는 반면에, 새롭게 주어지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그것을 주시는 그 주체 앞에 나라는 인간이 종속된 한 덩어리가 되어서 나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기존에는 ‘나’가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욕망, 죄라는 것을 나 바깥에 하나의 대상으로서 “저건 죄야, 저건 욕심이야.”라고 내가 평가했다면, 이런 상태에서 만약에 믿음과 소망을 줘버리면 믿음, 소망, 사랑이 내 소유가 되고, 그렇게 되면 1장 9절의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에 위배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오게 되면 반드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넌 아니야.”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하나님, 이번에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네가 죄 지은 것하고 구원은 아무 상관이 없어.” “왜요?” “넌 원래부터 죄인이야.”

모든 좋다는 것은 다 갖고 싶고, 하늘에서 왔다는 것은 다 소유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그것을 갖고 있는 나는 욕망 덩어리입니다. 죄인이 좋은 것을 가져봤자 그것은 소용없다는 것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이유입니다. 추방된 이유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뭡니까?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었으면 그것은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은 아니지요.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닌 것이 죄가 되는데, 이 죄인인 상태에서 아무리 고치고 변형을 시켜도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란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영원한 뜻이 주체가 되고, 인간은 하나의 대상이 되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나의 대상이 되지요. 내가 있고 저쪽에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은 나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자리바꿈이 있어야 돼요.

[피]라는 책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흠 없이 다 지켰지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 말씀 다 지켰다.’는 그 덩어리 자체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육’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로 하여금 착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켰다.’고 하는 그 사람을 예수님께서 구원했다는 말은, 그 사람 전체가 육이고 그 육의 생각을 현재 우리가 그대로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육의 생각을 갖고 있어야 ‘네 행함이 아니요’가 의미가 있잖아요. 그러면 육의 생각을 먼저 알아야겠지요. 육의 생각은 뭐냐? 내가 주체가 되고 모든 좋은 것을 이 주체에 끌어 담는 거지요. 하나님의 영생도 내 것, 천국도 내 것,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내 것.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지요. 이 짓이 바로 선악과 따먹은 채로 생명나무도 따 먹겠다는 짓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옥 갈 인간들이 그 짓을 계속 하지요.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그 짓을 하고 있잖아요. “하나님, 괴롭습니다. 뭐 즐거운 것 없습니까?” 자기 자리를 바꾸지를 않아요. 자기 자리는 고수하면서 각양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으려 해요.

이러한 상태를 사도바울은 ‘육’이라고 했고, 저는 이것을 바로 ‘욕망 덩어리’라고 했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죄를 대상으로 봤지 자기 자신을 바로 욕망덩어리로 보지는 않는단 말이지요. 욕망을 자기 주체 속에 집어넣지는 않았단 말이지요. 내 안에 욕망이 끓는다는 말을 안 한단 말이지요.

내가 얼마나 똑똑해서 신학을 하고, 하나님을 알 것인가? 이것만 생각했지 내 자체가 멀미가 나서 어지러운 상태에 있는데 거기다가 하나님을 집어넣고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예수님도 같이 멀미하실 겁니다. 하나님, 예수님, 믿음, 소망을 집어넣어도 지금 내 몸이 망가진 이상은 뭘 집어넣어도 다 토해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13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네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라고 했는데, 우리는 믿음 따먹고, 사랑 따먹고 하잖아요. 이러지 말고 믿음, 사랑이 어디 안에 들어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들어 있죠. 그러면 믿음이 들어온다는 것은 뭐가 들어오는 것입니까? 우리는 내가 주인인 채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예수님이 주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주께 의뢰, 의탁한 것이 되지요.

주님께서 들어오시게 되면, 나는 독자적인 입장이 못 되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긴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종이 자기를 위해 염려할 필요가 없지요. 주인이 계시는데 왜 걱정 합니까?

만약 이 집에 파출부가 왔다면, 그냥 청소 끝났으면 가면 되는데 “아주머니, 자식 그렇게 교육시키면 안 됩니다. 살림을 그렇게 살면 안 돼요.” 이러면 안 되지요. 파출부로 왔으면 자기 할 일 하면 되지 왜 시어머니 노릇까지 하려 합니까.

교회 장로, 목사들 다 주의해야 돼요. 예수님 피로 용서 받았으면 종속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시어머니 노릇하면 다른 사람들이 착각을 해요. 예수님 외에 어른이 또 있는 것으로. 착각 하는 사람도 나쁘지요. 어른이 안 보이니까 어른을 대체해 버린 거예요. 목사가 어른이 되고 장로가 어른이 되 버렸어요.

이것을 자리바꿈이라고 하는데, 자리가 바뀌면 안목도 바뀝니다.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뀌어야 합니다. 복이 뭐냐? 소유하는 것. 이런 안목 바뀌어야 되지요. 왜냐하면, 복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뭘 복이라고 했습니까?

기존의 신학은 뭐냐 하면,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짐승은 본능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 형상을 본받게 한다.’ 이게 기존 신학입니다. 그런데 이성 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욕망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짐승보다 못해요.

신학은 ‘인간은 이성적이다.’ 라는 것부터 시작하면 안 되고,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다.’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나오지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사41:14).” 짐승보다 더 못해요. 지렁이는 죄는 안 짓잖아요.

짐승보다 더 못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마귀의 지배가 있는 곳입니다. 귀신의 대장은 누구입니까? 악마지요. 악마가 집 주인이고 인간은 그 집에 갇혀 있는 가구들입니다. 이 가구를 빼날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이성적인 존재 같으면 “가구야, 나와. 왜 거기 있어.” 이렇게 하면 될 것인데, 인간은 이성적이 아니고 악마에 묶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굴 상대하십니까?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예수님을 상대하십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그럴 필요까지 있습니까? 우리들이 지키겠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는 아무리 자기 자신을 봐도 자신이 사단에게 사로잡힌 것이 안 보여요. 그래서 평소의 예절대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어요. “선생님이 고생을 하다니요. 고생은 우리가 해야지요.” 아주 윤리적이고 양심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주님은 베드로가 보지 못하는 뭘 봤어요? 자리바꿈이 뭐라고요? 안목 바꿈.

베드로가 하는 소리가 바로 마귀가 하는 소리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밑에 지하층에 가면 악마가 주인공이고 인간은 여기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상태에 있는 자에게 복이 뭡니까? 이곳까지 예수님이 찾아와 주신 것이 복이잖아요.

주여, 마귀에게 사로잡힌 인간 그냥 버려두셔도 되는데 이 지하층까지 찾아오십니까? 이게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마귀를 이기지 못합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베드로를 청구하고, 주님은 베드로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십니다(눅22:31).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니까 마귀는 그 청구서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 베드로를 구원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좋은 것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자리 바뀜이 일어나고, 안목도 바뀌어야 합니다. 안목이 바뀌면 내 자리 안에 예전에는 마귀가 들어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서 그 십자가에서 용서가 쏟아지고 사랑이 쏟아집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 보겠습니다. 사랑은 함께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오히려 다 보여주고 싶은 게 사랑이에요. 얼마 전에 부부사이에 강간이 성립된다고 판결이 났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아니겠지요. 살다보니까 정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남자는 그것도 모르고 “예전에는 좋아하더니 이제는 왜 그러지?” 아내의 말이 “그 때는 사랑이 있었고 지금은 사랑이 없거든”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하는데, 사랑은 노출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은 받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랑 200g. 나는 300g. 이런 양적인 문제가 아니고, ‘나는 주님 앞에서 부끄러워 아니한다. 주께서는 내가 엉터리인 것을 다 아신다.’ 이게 사랑이에요.

자리가 바뀌어야 됩니다. 나는 주님의 대상이 되고, 나는 꽃이 되고 주님은 꽃을 아름답게 보는 하나의 시인이 되고. 김춘수의 시 [꽃]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꽃이 있어도 아무도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아름답다고 보면 그 때부터 의미가 생기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꽃을 보고, 꽃은 자기를 봐주는 사람을 느끼고 그렇게 될 때 사랑가운데 서로를 아는 거예요. 이럴 경우에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12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짐승보다 못한 것이 인간입니다.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기에 짐승보다 더 못해요. 참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시편 19편에 해와 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요. 그런데 유독 인간만큼은 악마에게 사로잡혀 하나님께 욕을 돌리지요.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롬1:21) 모든 영광을 나에게 쏟아 붓고 자신이 신인 것처럼 착각하는 인간.

이런 인간 속에 누가 파견됩니까? 디모데야 네가 가라. 가면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고난 받는다는 것 -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집안에서 설움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들이 하루 3끼 먹는데 우리는 굶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같이 밥을 먹고 해도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요.

지금 사도바울한테는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자기는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대상이죠. 예수님은 나를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지요. 더러운 죄인이 어떻게 구원 받는가? 영원하신 뜻에 의해서 용서와 사랑으로 구원 받는다. 이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한 통속이지만 그러나 저쪽에 있는 인간들은 악마에게 붙잡혀있으면서도 자립적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요.

이렇게 마귀에게 속한 자와 예수님께 속한 자가 있는데 여기에서 고난이 옵니다. 2장 3절에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게 디모데가 자리바꿈이 안 일어나고 안목 바뀜이 없으면 이런 고난을 감당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디모데야, 너도 나처럼 은혜 받았지. 그러면 고난도 감당할 수 있어”

이렇게 은혜 받은 것은 자리가 바뀌어야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우리의 고난 때문에 구원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의해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내 자체를 용서와 자비로, 믿음과 소망으로 우리 속에 주님이 계시니, 앞으로 고난이란 것이 닥쳐와도 도리어 우리 속에 계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확신, 하나님이 나를 지킨다는 것. 이런 것을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9-10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그러니까 항상 자기는 하나의 도화지, 대상이 되고 주체는 예수님이에요. 그 주체가 어떤 분이냐 하면 1장 19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상은 구원이 안 된다든지, 못 된다든지 실패한다든지 중도에 포기한다든지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결정했다면 중도에 포기도 할 수 있는데,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거울보고 뭘 하란 말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그리스도가 걸어가면 그 모습을 비춰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죄만 짓고 주님은 용서하시는데, 죄인이 용서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오해를 하는가 하면, 고생한다고 여겨요. 고생과 고난은 달라요.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 예수님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고난이고, 고생은 내가 내 기대와 소망과 포부가 안 이뤄지니까 마음적으로 고생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 내 뜻대로 안 되나? 하면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안목 바뀌기와 자리 바뀜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주인공이 아니다. 주님이 주인공이고 나는 주님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렇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원래 축복이라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축복을 받았지요? 좋았겠습니까, 무서웠겠습니까? 무섭지요. 사람이 언제 안 무서운가 하면, 내 예상대로 될 때는 안 무서워요.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면 무서워요. 오랜만에 절벽위에 선 사람은 무섭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절벽위에 오른 사람은 절벽이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왜? 익숙해 졌으니까.

우리가 진짜 복을 받으면 당황스럽습니다. 복이라는 것은 항상 내가 기대하지 않는 방법으로 와요. 내가 예상한 것은 복으로 안 와요. 예상한 대로 오면 허무해져요. 그런데 내가 예상치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고난을 주실 때는 다른 창문을 열어서 피할 길을 따로 마련하시지요. 그 창문을 우리는 사전에 몰라야 됩니다. 왜? 내가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것이 복이기 때문에 ‘네가 주인공이 아니야.’라는 복을 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기대한 10가지가 있다면 그 10가지를 다 피해서 예상 밖의 길로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만들고 당황스럽게 만들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해요. ‘내가 또 주인공 노릇 했구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겁니다.

고생을 이기는 방법은 독하면 돼요. 독한 감기를 이기는 방법이 뭘까요? 독한 소주에다 고춧가루 타서 먹으면 되지요. 고생은 독하면 이길 수 있지만, 고난은 낯설면 돼요. 그래서 디모데와 사도바울이 가는 길은 항상 자기들이 예상 못한 사태가 벌어져요. 그렇게 해야 내 인생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예수님이란 것을 사건과 사태를 통해서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며칠 전에 [적벽대전 2]를 봤습니다. 병사들이 화살이 없다고 하니까 제갈공명이 사흘 만에 화살 10만개를 만들어내겠대요. 그래서 주유란 사람이 “당신이 화살 10만개 못 만들면 목을 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기한 날짜가 가까워 오는데 아무 것도 안 하는 거예요. 사흘이 다 되었는데 제갈공명이 날씨가 안개가 낀 것을 알고 짚으로 배를 만들어 물에 띄우니까 적들(조조 군사들)은 진짜 무장한 군사인지 허수아비인지 분간을 못했어요. 안개 때문에. 그래서 그 배를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10만 200개의 화살을 쏘았어요. 그래서 그 화살을 다 수거했어요.

그럴 때 주유라는 사람은 제갈공명이 하는 일을 예상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예상을 못했기 때문에 그 순간 복을 복으로 느끼는 거예요. ‘이것은 내 행함이 아니요,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바로 1장 9절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뭘 주시는가? 고난을 주시는 거예요. 고생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은 독하면 이길 수 있어요. 그러나 고난은 아무리 대비를 해도 준비 할 것도 없고, 준비해도 소용없고, 그냥 살기만 해도 주께서 복으로 주시는 것이 고난입니다. 계속 예상 못한 사태가 일어나고 그 사태를 통해서 주께서 다시 한 번, 모든 인간은 주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구원 받지 내가 어떤 일을 행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디모데후서 1장 끝에 보면 ‘긍휼’이라고 했습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거지요. 18절을 봅시다.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은 사도바울이 이미 평소에 주님의 긍휼을 입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사도바울이 하는 모든 이야기가 뭐냐 하면, 지금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공급하는 하나의 상자, 그릇처럼 우리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에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이것이 자신이 기대한 것입니까? 만약 자기가 걸을만해서 걸었다면 이것은 고난이 아니고 고생이죠. 그런데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이잖아요. 불가능한데, 죄인이 구원 받는다는 것도 불가능해요. 불가능한데 저쪽에서 되게 하지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주님 바라보니까 바다가 땅인지 바다인지 구분도 못하고 가다보니까 “어, 물이네.” 하다가 물에 빠졌단 말이지요.

물을 느낄 때 물에 빠졌어요. 주님 바라볼 때는 안 빠졌고. 이런 긍휼과 사랑이 항상 우리에게 왔다가 사라져 버리고, 사라지고 난 뒤에는 사건과 사태가 오면 다시 회개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긍휼을 깨닫게 되지요.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으니까 이웃 나라들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백성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니까 여호와께서 구원자(사사)를 보내서 적들을 물리치고,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다시 하나님을 잊고 적들이 침입해 오고.

오늘날 우리도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니까 즐거워하다가 5초도 안 지나서 다시 내 힘으로 살려고 하다가 넘어지고, 또 새로운 사태가 발생하고, 그 사태 때문에 걱정하다가 다시 그 사태를 보니까 그 사태 자체가 복이었다. 나로 하여금 내 행함이 아니요 주의 은혜인데 그것을 또 잊어버리고 ---

사라짐을 잊지 마세요. 소망과 사랑과 믿음이 누구 소유다? 내 소유가 아니다. 왜? 나라는 것은 없으니까. 오히려 주님의 소유가 나지요. 그러니까 ‘나’라고 쓰고, 내 소유로서 예수님을 쓰지 말고 자리를 바꿔야 됩니다. 나를 여기다 쓰지 말고 예수님을 여기다 쓰고 그 다음에 나를 쓰되 나를 작게 쓰면 예수님은 크게 보이고 나는 작게 보이는 거예요.

내가 작게 보이면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 옆에 있는 장로도 목사도 작게 보이고, 오 목사님도 작게 보이고 김 집사님도 작게 보이고. 김 집사님이 딱딱거려도 소리만 딱딱딱 납니다.

예수님의 말씀 “네 행함이 아니요 영원한 뜻대로 된다.” 이 말씀은 크게 들리고, 김 집사님 딱딱 거리는 소리는 작게 들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기분이 사라지지요. 사라지면 딱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그래서 싸우다가 주님 은혜 주시면 다시 주님 말씀이 크게 들리고.

이렇게 되는 자체가 이미 예수님께서 자리를 바꾸신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로써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 험한 세상에서 안목이 다르고 자리가 다르다는 사실, 우리는 고생하지 말고 고난 속에서 주님이 주신 그 사명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행함을 보지 않으시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이미 구원 받았기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셨사오니 이것들을 통해서 이제는 내가 내 소유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주인이 되심을,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었음을 복인 줄 알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2. 26. 12:35 녹취 마침)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5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7,267 자유게시판 20090221b 울산목양교회 특강-구원, 그 이후 - 최고관리자 09-03-03
7,266 자유게시판 20090221a 울산목양교회 특강-구원, 그 이후 - 최고관리자 09-03-03
7,265 강의 대구 3월 3일 죽은 신을 위하여2 [신학] 최고관리자 09-03-03
7,264 자유게시판 절대 불치성 중독자의 행복 - 최고관리자 09-03-03
7,263 자유게시판 여자란 무엇인가? 잉여 증폭기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02
7,262 자유게시판 살아온 만큼의 체증 - 최고관리자 09-03-02
7,261 자유게시판 십자가마을 홈페이지 개편작업 - 최고관리자 09-03-02
7,260 우리교회 [주보] 성전과 강도의 굴혈 - 3월 8일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01
7,259 우리교회 삼상 15:32-35 (사무엘의 조치)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09-03-01
7,258 설교 마가복음 11장12-14절 제목 :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01
7,257 우리교회 막 11:12-14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3-01
7,256 묻고답하기 설교의 어폐성? 이랫다 저랫다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09-02-28
7,255 강의 광주 2월 27일 강의 디모데후서 2장 2절, 8절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09-02-28
7,254 자유게시판 09대구강의01-인간구원을위한신학6-2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9-02-27
7,253 자유게시판 09대구강의01-인간구원을위한신학6-1 [신학] 최고관리자 09-02-27
7,252 자유게시판 08대구강의18-복음으로본"사주팔자"2 - 최고관리자 09-02-27
7,251 자유게시판 08대구강의18-복음으로본"사주팔자"1 로마서 최고관리자 09-02-27
7,250 자유게시판 20090109-(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8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9-02-26
7,249 자유게시판 20090109-(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7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9-02-26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09. 1. 23) 2강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9-02-26
7,247 묻고답하기 주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 누구든지 답해 주세요.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9-02-26
7,246 성경신학 구원, 그 이후 미가 최고관리자 09-02-25
7,245 우리교회 사 66:15-17 (여호와의 심판) 이사야 최고관리자 09-02-25
7,244 묻고답하기 천국에 누가 넣어준대? - 최고관리자 09-02-25
7,243 우리교회 [일반] 쳔국에 누가 넣어준대? [일반] 최고관리자 09-02-25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