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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0210b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종말론자유게시판마태복음

20090210b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종말론

이름 : 한윤범(IP:119.192.174.43)

20090210b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종말론

(강의:이근호 목사)

성경 마태복음 27장 50절, 51절 누가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또 딴 구절 보면, 그 날이 갑자기 캄캄해졌지요.

지금 풀이를 어디서 풀어나가느냐 하면, 인간이 죄 짓는데 왜 자연이 변동사항이 일어나는가를 예수님의 몸에서부터 풀어나가야 돼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잖아요. 우리 보기에는 물은 인간과 상관없는 걸로 돼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걸어오실 때 물은 안 빠뜨렸지요. 그리고 제자들이 배 타고 올 때 갑자기 풍랑일 때 예수님이 ‘야, 조용히 해’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세상에 H2O 보고 이야기했다고요.

지금 여기서 두 가지의 견해가 냉철하게 됩니다. 인간이 있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다. 인간론에 입장한 인간을 얼마나 유리하게 입장한 자연론. 이렇게 되면 모든 철학과 신학도 여기에 포함되죠.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은 어떻게 순응할 것인가, 자연의 어떤 점을 이용할 것인가? 물은 떨어지더라. ‘아하, 중력의 법칙이구나.’ 그것으로 밤중에도 전구를 밝히자. 전기 에너지 생산, 이게 전부다 인간이 자연을 파트너 생각해서 하잖아요.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아까 이야기한 이 인간이 자연론을 할 때 뭐라 하지요? 죄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만 수력발전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하나님이다.’ 인간이 기대하는 것은 죄가 아닌 줄 알고 있어요. 어느 인간이 ‘주여, 나를 죽게 하소서’ 이런 기도는 없습니다. ‘더 나를 살게 해주세요.’ 이렇게 하지.

인간에 나오는 것은 인간 자신을 긍정하고 ‘나는 죄인 아니야.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어. 남들은 다 죽더라도 나는 죽으면 안 돼. 외국에 나가있는 다 공부 못하고 돌아오더라도 우리 애는 계속 공부해야 돼.’ 이것이 인간의 타성으로 본성으로 그대로 존속합니다. 그 사람의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 보면 다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에게 나오는 것은 자기 위주로 자기 사랑으로 나오게 돼있어요.

인간은 자연을 볼 때 속성은 뭐냐 하면, 다스리고 정복하는데, 다스리고 정복하면서 죄로써 다스리고, 죄로써 정복하지요. 인간에게 이런 고난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첫 날부터 여섯 째 날까지 자꾸 뭘 만들지요. 빛이 있으라, 해와 달과 별, 땅과 바다 만들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앞에 만들어진 모든 것은 지배하게 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이름 짓기.

아담이 지나가는 동물들, 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지어준 자에 의해서 이름을 지음 받은 자가 종속되는 그런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름을 통해서 어떻게 돼요? 이름을 지어준 자의 운명 속에 누구도 거기에 합류되느냐 하면, 이름을 지음 받은 자가 같은 운명이 되는 겁니다.

쉽게 합시다. 마지막 때 인간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앞에 만들어진 모든 것은 어디에 의미를 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인간으로써’라는 말이 되는데 죄 지었으니까 죄는 빼버리고 뭐? 하나님을 형상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은 있다. 이것 골로새서 1장 16절 이야기 아닙니까? 모든 피조물들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서 만들었고, 그분에 의해서 만들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들었고, 그분을 위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잖아요. 만약에 인간이 필요 없다면 앞에 뭐도 필요 없다? 일부터 여기까지도 필요치 않는 겁니다.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같은 한 통속이 되어서 같은 운명체가 되어서 인간 잘못 되면 이것이 교체가 되어서 된다 말이에요.

무슨 인간? 새로운 인간이 등장을 하면, 새로운 인간을 위하여 앞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도 새로운 인간을 반영하는 새로운 환경으로써 조성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요. 있는 것 대충 수선합시다. 수리하고 땜질하고 안 됩니다. 그게 되질 않아요.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만들어진 모든 것들 중에서도 누가 포함 안 되느냐 하면, 여기는 천사가 포함 안 돼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형상의 인간 속에 예수님이 와버리면 하나님이 인간 자리에 왔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천사도 누굴 섬겨야 됩니까? 전부다 예수님을 섬겨야 될 그러한 구조로 재편성 되겠지요.

그러면 천사 중에 나쁜 천사를 뭐라고 합니까? 사탄이잖아요. 악마잖아요. 현재 하늘의 전쟁이 있어서 사탄이 마카엘하고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쫓겨났죠. 천사가 쫓겨나서 인간을 지배했죠. 공중권세 잡은 자가 지배했잖아요. 천사가 하나님을 섬기게 돼있는데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반발해서 하나님께 대들기 위해서 지상에 터 잡고 있다가 지상에 인간들만 있으면 왕 노릇하는데 여기에 주의 이름, 하나님이 지상에 오니까 악마가 얼굴이 파래버렸어요.

그래서 귀신들린 자, 마태복음 7장에 무덤에 있는 청년이 왔을 때 먼저 귀신이 와서 ‘예수여 아직 우리가 멸망할 때가 안 됐는데 미리 오십니까?’ 이런 이야기하죠.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들어요. 왜 못 알아듣느냐 하면, 인간은 창세기 1장부터 있는 눈에 보이는 피조세계, 인간은 죽으나 사나 피조세계와 같이 어울려서 평생을 지내게 될 운명입니다.

죄 짓고 난 뒤에서 ‘새, 나한테 짹짹거려봐. 코끼리, 짐 부려봐. 어이 토끼야, 나한테 맛있는 고기 대. 소, 너는 일이나 시키고 잡아서 맛있는 한우 등심이나 줘.’ 모든 인간은 타고난 인간 자체 속성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을 위하여, 인간에 의해서 지배받게 돼있는 이런 구조, 시스템밖에 몰라요. 이게 육이에요.

지금도 천사, 악마 하면 웃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믿으란 말이냐? 눈에 보이는 것도 다 처리 못하는데. 인간이 로켓 타고 어디 가요? 달에 가고 금성, 화성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금성, 화성, 별은 사흘 째 만들었지요. 사흘 째 만든 것은 인간의 지배대상이 돼서 꼭 가고 싶어. 화성에. 가고 싶어 미치겠어요. 화성 가고 난 뒤에 목성 가고, 목성 가고 난 뒤에 태양 가고, 은하계 밖에까지 튀어나갈 거예요. 인간이란 자체가 지도 지 마음 지도 몰라. 나도 내 마음 몰라.

하나님께서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에게 주신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자손 번식’과 ‘죽음’입니다. 죽음은 원래 없는 건데 인간이 죄 짓기 때문에 왔고, 남는 것은 자손 번식이에요. 네가 복을 주어 번성케 하라. 하나님께서 첫째 날 만드시고 복을 주어, 둘째 날 만드시고 복을 주어했잖아요. 마지막 때에 복을 주어서 번창하라. 그러면 죽음은 죄 지었을 때 나오는 거니까 없애버리면, 처음에 남는 건 자손 번식. 이건 뭐냐? 자식새끼 챙기는 것, 자기 가족 중심. 본성입니다.

이야기 다시 정리해 봅시다.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을 위하여, 너무 넓다. 그러면 모든 피조물들은 내 식구를 위해서. 그것도 넓다. 그러면 모든 피조물은 나를 위하여. 그게 정답이에요. 같은 부부라도 짜증나면 갈라서고 싶어요. 여자 나이 한 오십 넘으면 남자가 귀잖아요. ‘뚝 떨어져. 저쪽으로 가 자. 귀잖아.’ ‘여보, 일찍 들어올까?’ ‘일찍 들어오든지 네 마음대로 해.’ 오직 내 새끼 말고 다 귀잖아. 새끼는 나이 사십이 되도 예쁘고, 남편은 꼴보기 싫어, 다 귀잖아. 평소에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인간의 본성, 방금 한 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걸 왜 이야기하느냐 하면 제가 종말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이야기해볼게요.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종말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간 종말론이 있다. 또 하나는 예수님 종말론이 있다. 그런데 인간 종말론에서 예수님 종말론을 알 길은 막혔다. 왜? 영이 아니면 성령이 아니면 알 수가 없고 막혀 있는 거예요. 이거는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남는 건 뭐밖에 없습니까? 인간 종말론밖에 없습니다. 근데 방금 앞에 인간은 모든 자연과 더불어 있다 했지요. 인간은 가족 위주고 나 위주죠. 그러면 누구 종말론입니까? 결국은 ‘나’ 종말론. 약간 더 확대해보면 내 가족 중심, 좀더 확대하면 내 교회, 내 국가, 내 민족, 내 나라. 그래도 다급하면 역시 나밖에 없는. 자식도 소용없고, 진짜 남편도 소용없고, 나밖에 모르는.

나밖에 모르는 이런 인간이 신약성경, 바울 서신, 성경책을 아무리 백 독, 천 독을 해도 남는 건 예수님 종말론 아는 것이 아니고, ‘아, 나는 이래도 죽어서 좋은데 가는구나’ 자기 종말론밖에 남는 게 없다 이 말이죠. 그런 이야기할 때 비로소 교인들이 납득을 하니까 그게 문제가 있다 이 말이에요. 제 말은.

예수님의 종말론 할 때 납득을 해야 되는데 인간 종말론 할 때 이거는 부처하고 불교하고 똑같이 취급하는 거예요. ‘여러분, 고생 많이 했지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보내셔서 여러분 지금 고생했지만 나중 죽어서 좋은 나라 갑니다.’ 이런 이야기는 일반 종교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슬람교하고 똑같은 거예요. ‘조금만 참으면 되는구나.’ 이건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그런 사람한테 묻지요. 사람은 건지면 되는데 지구는 왜 불내버립니까? 그 이야기나 이스라엘을 사랑하면 되는데 아말렉 족속의 젖먹이는 왜 죽입니까? 왜 무화과나무는 저주합니까? 때가 안 되서 과실을 못 맺었는데. 이런 문제가 하나도 풀리지 않아요.

그리고 제일 결정적 문제가 뭐냐? 이런 종말론에 뭐가 빠지느냐 하면, 악마에게 주도권이 있다는 것이 이 종말론에는 여기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종말론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기 나름에서 내가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이지 여기 제 삼자인 악마가 내 운명에 개입한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요.

‘하나님도 우습게 보고, 예수님도 우습게 보는데 악마, 이게 어디 내 인생 개입해? 부적하나 붙이면 끝나는 건데. 볏짚 태워서 빌면 끝나는 건데. 악마가 왜? 내가 왜 악마와 한 통속이야. 말도 안 돼.’ 악마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종말론에서는 뭐가 있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 자리에 오게 되니까 그동안 없었던 누가 누구를 섬긴다? 천사도 누굴 섬겨야 돼요? 천사도 예수를 섬겨야 된다는 게 히브리서 1장에 나오죠. 천사가 예수님 받들어 모시죠. 마지막 때는 아들로 모든 걸 다 폭로하기 때문에. 천사가 갑자기 등장해요.

이 천사 중에 나쁜 천사가 있었단 말이죠. 악마죠. 악마가 예수님을 알게 돼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나밖에 모르는, ‘나는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가지’ 하다가 갑자기 예수님의 성령 받아서 예수님의 종말론을 알게 되니까 ‘나’라는 인간이 누구한테 복속돼있다는 걸 압니까? 나라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악마의 지배를 받았기에 나는 그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몰랐고 나밖에 몰랐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악마를 몰랐기에 악마가 있는 줄도 몰랐고, 그리고 내 중심의 종말론에 있어서 악마는 누굽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악마지, 절대로 예수님을 힘들게 하는 건 악마라고 안 느껴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면 우린 분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귀가 내 손톱에 가시 주면 분개합니다. 제 말 틀렸어요? 맞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신앙이 있는가’ 시험할 때 제일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 했지요. 그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내 가족 중심을 벗어나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는지 안 그러면 지가 믿는다, 믿는다 해도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나밖에 모르는 믿음인가 시험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시대로 자기 아들을 바쳤잖아요.

아버지가 아들을 바치는 경우는 장차오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독생자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믿음 아니면 있을 수 없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한 겁니다. 네가 받은 것은 선물이란 말이죠. 재주가 아니고. 장차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받은 거예요.

그렇다면 그전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밖에 모르는 종말론은 어디서 나왔는가? 사실은 나도 몰랐는데 악마가 항상 나에게 뭔가 세뇌주고 심어놓은 그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점점 굳혀져 가는 겁니다. 나는 나와 내 가족, 이게 마귀에 의해서 굳혀져 가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받아서 마귀를 알고 보니까 내 아픔 위주보다 먼저 예수님의 아픔이 우선이고, 내 고난보다도 예수님의 고생으로 구원받고, 내 노력보다도 예수님의 노력이고, 나의 의보다 주님의 의로 구원받는 사실을 비로소 알면서 나의 종말론에서 떠나서 주님의 종말론 속에 내가 하나의 그릇으로 창세전부터 포함되었구나 하는 걸 알죠.

그렇다면 뭘 아느냐 하면, 이런 질문 할 수 있어요. 진작 죽어야 될 내가 왜 아직도 살아있습니까? 예수님의 종말론에 의하면, 예수님의 종말론을 증거하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네가 택했다. 그러면 왜 이제야 알게 됐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종말론에서는 너하고 나하고 타협하고 협상하는 것이 아니고 의논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대로 때가 되매 말씀에 의해서 네가 지금 이제야 너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인 것을 이제야 알아야 했기 때문에 이제 아는 것이다. 어느 집사를 통해서, 누구 목사를 통해서 이제 아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모든 인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말씀으로 했으면 앞으로 뭐가 되겠습니까? 말씀대로만 된다. 요즘 이장우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하잖아요. 요한계시록 본문들을 보게 되면 이래요. 뭔가 하라는 명령처럼 돼있지요. 근데 사실은 하라는 명령은 뭐냐 하면, 우리를 명령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보고 하는 약속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반드시 갈라질 것은 갈라지고, 망할 놈들은 망해진다는 이야기에요.

‘아, 그 말씀이 나한테 덮쳤구나’ 이래야지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의 말씀이 그대로 지켜진다는 것이 즐겁죠. 즐거워야 돼요. 요한계시록 본문 들고 벌벌 떨면 안 되고, 신바람 불고 신나야 됩니다. ‘아, 즐겁다. 세상을 이래 보는 게 정답이구나. 세상이 달리 보이네. 이걸 알게 되다니 감사할 뿐이다.’ 그렇게 나와야 돼요. 벌벌 떨게 아니고 기쁘고 즐거워야 된다니까요.

제가 어디서 그런 강의했죠. 요한복음 6장 39절 보면, 내가 온 것은 아버지 뜻대로 온 건대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는 자는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라. 반드시 예수님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가 돼서 예수님이 그렇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즐거워지면 목회에 아무런 걱정, 근심이 하나도 없습니다. 목회 하나 안 하나 주께서 하실 거기 때문에. 내가 목회자가 게으름 피운다고 실패로 끝날 일 없기 때문에. 그게 목회자의 믿음 아닙니까. 지가 교인 없다고 근심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방주 만들 때는 수용인원이 몇 천 명 짜리 만들지 몰랐을 거예요. 하도 크니까. 달랑 여덟 명. 자리가 텅텅 비었어요.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괜찮아요. 아마 노아가 자기 아이디어로 방주 만들었으면 자기 가족만 들어왔으면 나머진 전세를 놓든지 테니스코트 만들었을 거예요. 노아는 이걸 만드는 것도 주의 뜻이고, 여덟 명도 주의 뜻이니 자기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귀를 벗어나면 주님한테 종속됐기 때문에 주님의 약속만 즐거워할 뿐이지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든지 내가 어떻게 애써보겠다는 것이 거기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립니다. 이게 안 벗어난 사람은, 마귀가 처음에 아담에게 다가와서 선악과 따먹으라 할 때 인간은 선악은 모르고 나머진 다 알잖아요. 동물, 식물에 대해서 다 알잖아요. 인간이 모르는 게 있었어요. 선악의 지식은 몰랐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섬겼던 천사는 선악을 알잖아요. 선악을 아는 것은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았어요. 인간을 창조할 때는 선악 아는 자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누구만 알아요? 우리들끼리, 천사와 하나님만 알지요. 받을 수 없는 인간에게 마귀가 꼬신 것은 결국 선악을 통해서 인간을 자기 종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대성공했지요. 그때부터 악마는 모르는 선과 악의 갈등만 느끼는 거예요. ‘이상하다. 이만큼 착했으면 뭔가 의로워야 되는데.’ 그래도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 선이 있고. 도대체 마음이 힘들어 미쳐. 돈을 못 벌어 미치는 게 아니고 내가 나쁜 짓 했다는 게 미치는 거예요. 왜? 사람이 선을 모르게 되면 착해질 필요 없잖아요.

여러분 정박아가 섭섭한 일 합니까? 안 하잖아요. 정박아는 살뿐이죠. 사람이 정박아가 돼야 되는데 되도 않은 선을 알아서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그냥 본성만 발휘하면 되는데, 천사들만 아는 선악을 알아서 선하지 않은 것 때문에 미치는 거라. 밤잠을 못 자요.

‘내가 그 교인한테 말을 그래 하는 게 아닌데. 분명히 삐져서 다음주 안 나오지 싶다.’ 다음주 또 안 나왔구나. 사실 그 사람 감기 걸려 안 나왔는데. 목사는 혼자 생각하는 거예요. 분명히 삐져서 안 나왔다고. ‘요새 교인 하나 어딘데. 내가 와서 목회하면서 주님의 일을 완전히 훼방하는구먼. 훼방꾼이네. 이 나쁜 놈.’ 이러고 있다고. 그러다 회개하고 며칠 굶어야 돼. 마귀 시켜서 금식한다고 ‘주여,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것 가지고 안 되지. 더 고생해야지 가난한 사람 생각해서.’ ‘맞아. 이제 구제 해야지.’ 깨초를 쳐요. 웃기지도 않아.

그때는 그냥 그럴수록 존슨이라는 피자 있잖아요. 한판 시켜 먹어버리소. 하여튼 그 순간이 주님께서 개입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예요. 주님께서 창세전부터 개입했다는 사실을 놓쳐버린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잘해서 자기가 건전해서 건전한 내 구원은 내 손에 달렸다는 것, 내 이름으로 날 구원하려는 것, 그러니 자기 이름을 부르지 주의 이름을 안 부르게 돼있죠.

그리고 더 나가서 하나님께 따집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신앙생활 잘 하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안 받쳐 줍니까? 도와줘야지 신앙도 맛이 나지. 열심히 하겠다는데 왜 자꾸 내 일을 방해합니까? 나 이제 삐졌습니다.’ 주께서 우리가 삐져도 아무 상관없고 안 삐져도 상관없고. ‘놀까요’ 해도 ‘놀아라’ 하고, ‘일 할까요’ 해도 아무 상관없이 창세전부터 예정된 코스대로 우리는 그냥 실려 갈 뿐입니다.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한낱 지나간 꿈이에요. 꿈에서 자기 혼자 발광을 해요. 회개했다, 금식했다 안개 속이라. 아무 쓸데없는 전혀 구원에 도움 안 되고, 지 성질 지가 못 이겨서 선이냐 악이냐, 악이냐 선이냐 지 혼자 싸우고, 사탄아 물러가라. 자기 혼자. 그렇다고 물러갈 사탄도 아니고. 이게 괴테의 고민이었습니다. [파우스트]란 책에 보세요. 지가 마귀 불러내서 마귀하고 한바탕 싸우고. 웃기지도 않아.

여러분 마귀를 불러내지 마세요. 가만있으면 마귀가 벌써 지배하고 있으니까. 마귀는 불러내서 오는 게 아니고 가만있어도 마귀에요. 전두환, 노태우 가만있어도 마귀 아닙니까. 마귀가 딴 게 아니고 다른 사람 죽어도 나는 살아야 된다는 ‘자기 의’ 아닙니까. 남의 이야기할 것 없지요. 오늘 우리 이야기 아닙니까. 울산도 망했고, 창원도 망했고 다 망했다. 그런데 우리 집은 30% 벌었지.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나라는 망해도 자기만 30% 벌면 좋은 나라에요. 좋은 세상이라니까.

남 성적 떨어져도 지 아들 성적 올라가면 좋은 학교에요. 전학 안 갑니다. 성적 올라가는데 왜 전학가요. 못 되면 전부다 조상 탓이고, 잘 되면 지 탓이고. 그래서 철학에서는 타인과 나, 그 외에는 철학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백날해도 십자가 안 보입니다.

마귀는 뭐까지 아느냐 하면, 선악만 아는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완전한 거룩이 아니면 유황불에 들어간다. 이거 누가 알고 있습니까? 마귀가 알고 있어요. 완전한 의입니다. 마귀에 천국에 살아서 알아요. 천국에는 요만큼의 죄만 있어도 못 삽니다. 완벽한 의에요. 그래서 악마가 쫓겨 나온 거예요. 그래서 개떡 같은 악마의 나라를 만든 거예요.

돌이 떡 되게 하는 사상, 유명인사가 되는 사상, 모든 권세를 소유가 된다는 사상,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자기 자랑 그런 것만 지배하는 그런 세상을 이미 꽉 잡고 있어요. 여기에서 탈출한다? 거짓말입니다. 이 선과 악의 마지막 결말은 결국은 악하지 아니하면 무조건 유황불 가기로 돼있다는 사실을 마지막 때까지 종말론을 천사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간은 몰라요. 선과 악 중에서 완전한 선이 아니면 죽는다는 사실을 인간은 몰라요. 이걸 몰랐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부자 청년이었어요. 부자 청년은 자기 내부하고 선한 하나님하고 연결돼있다 이래 본 겁니다. 그 중에 자기보다 더 선한 분이 계신데 그분을 예수님으로 본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회하고 똑같지요. 나는 조금 선하고 예수님은 많이 선하고 최고 선한 분은 하나님이고. 그래서 자기 같은 노선에 있다고 봐서 조금 걸어가면 예수님만큼 되고 천당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누가 선하냐? 네가 아는 선은 하나님이 아는 선과 다르다. 어릴 때부터 다 지켰나이다. 자기 딴엔 완벽을 주장했지요. 100% 주장했지요. ‘그래 100%인가 보자. 네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너하고 비교해 봐라. 누가 더 완전한가? 결국은 예수님처럼 완전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근심해서 예수님을 떠났지요. ‘떠났다’는 말은 뭡니까? 회개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노선 말고 인정하지 않고, 자기 기존 노선을 계속 유지하려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한국교회에서 제일 속 터지는 대목이에요. 많은 목사들에게 많은 교인들에게 이야기했어요. 출발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쪽에서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출발점이 여러 개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질문했어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나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 하는 그것은 잘못이겠네요? 그거는 사도 바울이 철이 없어서 인생을 못 살아서 자기만 옳은 줄 알았지. 사도 바울이 하는 것은 하나의 객소리죠. 자기 분에 바쳐서 한 소리 한 건데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 가는 길 따로 있고, 베드로 가는 길 따로 있고, 요한 가는 길 따로 있는데 사도 바울 지가 뭔데 왜 그런 건방진 소리했느냐 이 말이죠. 이 말은 내 노선을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걸 간추려서 이야기했습니다. ‘성령을 안 받아서 그렇다’라고 십 년 전부터 이야기하니까 양무리마을한테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은 그게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내가 칼빈주의 신학자인데 왜 성령을 안 받았어.’ 성령을 받았으면 ‘내가 죄인이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죄에서 나오는 것은 무조건 죄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줘야 성령 받은 거예요.

정말 지난 과거 광야생활 한 것,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들어요. 자기는 성령에 대해서 안다는 거예요. 삼위일체 신학 배웠다는 거예요. 옛날에 필로꾸베 하면서 조직신학 배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글을 썼잖아요. 이발사가 가위를 버리면,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버리고, 목사가 신학을 버리고, 철학자가 철학을 버리면 남는 게 뭐냐? 죄인밖에 남지 않잖아요. 거기서부터 출발을 해봐라. 거기서부터 진짜 제대로 출발하면 예수님만 자랑하지 어디 신학을 자랑하냐 말이죠. 신학교 세워도 좋아요. 예수님 복음만 전하겠다고 세우란 말이죠. 그게 아니고 개혁주의를 전하겠다고 세우겠다면 안 돼요. 그렇지 않습니까? 개혁주의는 개혁주의를 버려야 돼요. 자기 자식 같은데 버릴 수 있습니까.

이야기 좀더 해봅시다. 선과 악에서 진짜 선은, 선과 악이 있는 곳은 하늘나라 질서지요. 그래서 악의 대표자가 나왔습니다. 악마지요. 선의 대표자가 나왔어요. 완전한 선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이 두 개를 합쳐서 창세기 3장 15절을 만들었어요. 뭡니까?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만들었다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만들었다는 말은, 이제는 이 지상은 지상의 마당이 아니고 하늘이 주저앉은 마당, 하늘이 연장된 마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뭐가 배제돼요? 인간은 완전히 배제되는 겁니다. 그냥 배제되는 것이 아니고 뱀의 후손에 속해서 배제되는 거고, 여자의 후손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성령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 뱀에 속한 자를 끄집어낼 때 그때는 개인적으로 어디 속하느냐 할 수 없고, 예수님의 몸이라는 한 덩어리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역시 이 세상에는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왜? 성도는 예수님의 몸에 지체기 때문에. 그래서 부활이란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이제 이 대목의 본론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 책에 나오는 중간상태, 죽는 자의 수면, 그리스도의 재림, 하나님 나라, 불법의 비밀, 부활이란 모든 것은 우리 개인 종말론과 관련돼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종말론과 관련된 용어들이란 말이죠. [불법의 비밀]이란 것도. 우리의 안목과 우리의 지혜로 불법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몰라요. 모른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성령께서 그렇게 조종한다.

그러면 [부활]에 들어가 봅시다. 선과 악이 하늘에만 있다가 지상에 내려오는 그것을 가지고 종말이라 했어요. 그래서 종말을 눈치 챌 사람은 인간 속에는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종말을 버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종말에 들어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나의 종말론은 내가 죽어 좋은데 가려는 인간적인 불멸의 속성, 천사고 뭐고 지구 불타든 모르고 나만 살면 된다는 나 위주의 사고방식이고.

이 사람이 어떻게 됐다? 예수님의 종말론에 가버리면 더 이상 뭐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될까, 죽을까, 살까 그 문제, 근심, 걱정이 어떻게 됩니까? 없죠 이젠. 지금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지금도 은혜인데 계속 은혜로울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약속에 의하면. 내가 더 이상 내 문제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

만약에 내가 근심할 게 있다면 뭡니까? 주님께서 주신 이 진리를 사람들이 모르는 것 때문에 근심하겠지요.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하는 근심은 주님 안에서 하는 근심이다. ‘이 쬬다야. 왜 그래 모르노. 아이고, 인간들아. 그래 모르노.’ 이해는 하지요. 자기도 그랬었으니까. 제일 좀 복음을 알라고 하는 그 근심,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한 걱정, 근심은 있지만 남에 대한 근심은 있지만 자기한테는 근심은 없지요. 주께서 어떻게 조지든 부수든 깨든 이제 사용하는 것만 남아있으니까 느긋하지요.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노 아니고 예스가 되니까 이름을 자이언트 이런 것 하지 말고, YES, 예스해서 이거 괜찮을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런 것 하지 말고 그냥 한 마디로 ‘예스’. ‘노’는 없다. 앞에는 예스. 노는 뒤로 보내고 예스만 앞장세워서 모든 것이 예가 되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긍정적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누가 나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래요. 진짜 최고의 긍정 아닙니까. 자기가 결정하는 게 예수 안에 있으니까.

그러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해요. 아까 자연과 인간이 연결돼있지요. 그렇다면 지구가 어떻게 되고, 피조물이 어떻게 되느냐는 누구 손에 넘어가 버립니까? 이미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잖아요. 내 손에게 이쪽에 넘어가버렸죠.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굴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모든 피조물과 모든 천사, 모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 돌리기 위해서 재편성 되죠.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어렵게 정리해 봅시다. 나의 종말론에서 예수님의 종말론으로 넘어갈 때 여기 주께서 부활하죠. 나와 예수님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 있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죽으실 때 누가 죽었다? 율법과 마귀와 죄와 이런 것도 해방됐죠. 부활에 들어가잖아요.

부활에 들어가면서 ‘나는 부활됐다’하면 안 되지요. 이젠 나는 없어지고 나는 누구의 몸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나, 안 그러면 주님의 지체로서의 부활 이래야 맞다 이 말입니다. 더 이상 독자적으로 떼어내어 ‘나’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로서 주님 안에서 산 자가 되지요.

‘주님 안에서’라는 말은 더 이상 나는 나 홀로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어디 붙어있는 몸이지 나라고 내세울만한 특정한 자리 위에 내가 있는 건 아니란 말이죠. 이 긴 문장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나의 이름으로 기도할 자격이 없고 모든 기도는 주의 이름으로 한다. 내 이름은 사라지고 주의 이름이 내 이름을 대신하기 때문에 기도해도 누구 이름으로 해야 한다? 주의 이름으로 해야 되고, 입학해도 주의 이름으로, 졸업해도 주의 이름으로, 설교해도 주의 이름으로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완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설교하면서 나는 이렇게 죽은 자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고백해야 된다 말이죠.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부활을 할 때 ‘나의 부활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이미 주도권 누구한테 넘어갔어요? 넘어갔으면 나의 부활이 아니다 이 말이죠. 정몽구 씨가 현대자동차 최대주주 아닙니까. 그럼 내가 현대자동차 입사했습니다. 입사할 때 예를 들어서 ‘이번에 현대자동차를 독일의 중국에 있는 자동차회사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할 때 자기가 데모하면 안 되잖아요. 왜? 입사를 했으면 회사가 자기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는 현대자동차에 소속돼있는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지요. 그렇다면 현대자동차가 중국자동차에 넘어간다면 같이 넘어가면 되는 기라. 새로운 주인 만나면 되지요.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 이 부활이 누구의 부활이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면 여기서 뭘 아느냐 하면, 적이 있잖아요. 이게 누구 원수입니까? 내 원수 아니에요. 주님의 원수지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요 공중권세 잡은 주님의 원수와 싸우잖아요.

그런데 말하기를 ‘목사님, 나 예수 믿었으니까 안 싸울래요?’ 왜 그런데? ‘나는 원수가 없어요.’ 물론 당신 원수는 없는 거예요. 지는 챙길 건 챙겼으니까. 예수 믿고 천당 가니까 난 원수도 없다. 문제는 예수 믿는 순간부터 싸워야 되는 겁니다. 누구와 싸우는 거예요? 혈과 육이 아니고 같은 육이 아니고 마귀와 복음 가지고 싸워야 된다니까. 선한 싸움을 싸워라. 뭘 가지고? 복음을 방패로 무기로 삼고.

교인 없는데 목회 안 해도 좋은데 목회 안 하는 것도 하나님 뜻인데 그런다고 해서 목회 안하는 목사라 해서 그 싸움에서 면제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평신도도 글 올리면서 복음 전하는데. 왜 자꾸 자기만 생각하는지 몰라요. 목사냐, 집사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주께서 보시는 것은, 아직도 너는 내 사람으로써 네가 살든지 죽든지 복음을 전하느냐 그걸 본다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뭐로 보느냐? 자기 구원용으로 보는 거예요. 자기만 살면 된다고.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개인 종말론을 대비한 개인 구원론,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 아닙니까. 보통 문제 아니죠.

좀더 이야기해봅시다. 이 부활은 나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죠. 예수님의 부활이라면, 피조물이 어떻게 되느냐는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겠지요. 예수님이 부활의 관점에서 피조물들은 어떤 관점에서 필요한 겁니까? 부활의 영광과 부활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피조물들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건 우리가 모르지요. 왜냐하면 기존에 있는 개와 소와 말이나 이건 누구를 위해서 있다 했습니까? 인간이 말 타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어떤 피조물? 우리는 모르지요. 이미 중심은 내가 중심이 아니고 누구한테 넘어갔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넘어갔지요.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영광스럽다는 거예요. 누구처럼? 우리의 부활처럼.

여기서 뭐가 깨지는가? 환경신학 다 깨지고, 찬양신학 다 깨지고, 자연신학 다 깨지고, 생태신학 다 깨집니다.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이건 인류 중심의 종말론이에요. 판넨베르그 다 깨집니다. 몰트만도 깨져버려요. 정치적 신학도 깨져버려요.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도배를 해봐요 다 거짓말이에요. 래드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도배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근본이 그걸 뭐로 보기 때문에? 나의, 인류의 종말론밖에 모르지요. 예수님의 종말론을 모르기 때문에 전부다 오류에요. 뜻도 모르고 그냥 배치만 했을 뿐이에요.

박아론 교수가 이런 소리 했답니다. 변증법자고 보수주의 거두라 하는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헨델의 메시아, 할렐루야는 정말 하늘나라라고 하거든요. 헨델의 메시아가 죄입니다. 감동을 받고 안 받고는 그건 주님의 소관이고. 사람이 감동받는 것은 반드시 내가 죄인이고, 그 죄를 지적하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만 정해지죠.

내가 부족하다가 죄가 아닙니다. ‘내가 바로 예수를 못 살게 굴었고, 내가 얼마나 예수를 얼마나 평소에 싫어했구나’를 깨닫는 게 죄를 아는 것, 통회하는 것이지, ‘나는 남한테 나쁜 짓 했습니다’ 그건 죄도 아니에요. 사람 죽인 것도 죄도 아닙니다. 진짜 죄는 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을 예수님의 구원론을 몰랐다는 거예요. 왜? 마귀 때문에.

타고난 태생이 우리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나는 나 같은 인간들만 있는 줄 알았지 하늘나라에 마귀가 있고 선악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지요. 말씀에 대해서 말씀의 내막을 모르는 게 죄지 자기 행동, 실수하고 어릴 때 오줌 싸고 그건 죄도 아닙니다.

그리고 영광은 하나님 계실만한 보좌되지 않으면 영광 축에도 들어가지 않아요. 예수님 계실만한 거룩이 아니면 거룩이 아니고, 주님이 계실만한 의가 아니면 의가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못 만들어내요. 스데반 집사가 했지요.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의 손에 지어진 것에 있지 않다.

그러면 성전은 어디 있어요? 성전은 바로 스데반 집사 본인이 바로 성령이 계시는 전이 그게 성전입니다. 자기가 성전이기 때문에 저쪽이 가짜인 걸 알아요. ‘쪼다야, 그건 가짜야’ 하고 돌아 맞아 죽지요. 맞아 죽지만 성전은 사람 돌에 맞아도 안 깨져요. 왜?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주의 영이 함께 있으면 주의 말씀이 실제화 되어서 현실화 되어 다가오게 돼있습니다. 뿅하고 가요. 온 구석이 말씀이 별자리처럼 움직입니다. 갑자기 내가 수입이 얼마며, 애가 성적이 어떠냐 생각 안 납니다. 우리 교회 교인 몇 명이냐 안 중에도 없어요. 주의 말씀이 이렇게 현실인 줄 몰랐다. 주의 말씀이 실제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왜 몰랐을까? 그게 회개고, 그게 영의 세계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온 게 부활의 능력이고, 모든 영광은 십자가에 하나님의 의가 있을만한 그러한 새로운 세계, 그게 뭐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러니까 다 바꿔야 돼요. 그리고 다 바꾼 동시에 어중간한 게 없고, 바꾸지 않은 나머지는 유황불로 들어가는 바꿈이 일어나야 돼요. 하나는 지옥에 불이 가야 되고, 한쪽은 영광스럽게 주의해야 되고.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전에는 선악과였지만 지금은 십자가에요.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도 선악과나무 없어요. 그게 십자가로 바뀌었어요. 십자가가 중심이 돼서 십자가 안 믿는 사람은 지옥 불에, 십자가 믿는 사람은 천국으로 이렇게 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약속된 예수님의 종말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우리가 보기에도 추잡한데 무슨 영광 돌릴 게 있습니까? 다만 주께서 오셔서 재림하시면 모든 세상은 불타버려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주님에게만 영광을 돌리며 주님에게만 찬양하는 그러한 새로운 세계가 된다는 것을 우린 즐거이 기다릴 수 있는 그런 마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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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5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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