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10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종말론
20090210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종말론
이름 : 한윤범(IP:119.192.174.43)
20090210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종말론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종말론. 종말론에 두 가지가 있거든요. 예수님이 보시는 종말론과 인간이 말하는 종말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래드가 이야기한 종말론은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종말론은 이야기 안 해놓고 사도 바울의 글들은 통해서 ‘내가 어떻게 되느냐, 내가 어떻게 끝장나느냐’ 하는 자신의 종말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래드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종말을 맞이해야 된다. 일 번은 실패죠. 인간은 실패한다. 두 번째, 종말론 끝에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구원에 성공할 것인가? 이것을 래드의 종말론에 다루어놨어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깨지고 죽고 하느냐’라는 그 점에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한테는 어떻게 부활의 혜택을 주시고 마지막에는 새 하늘, 새 땅을 주셔서 나중에 휴거되어서 다시 천국에 사느냐? 관심사가 인간의 종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 이 말이죠.
이 글을 쭉 읽어보면 ‘별 문제 없네’ 이런 생각이 들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이런 관점 자체가 예수님의 종말과 배치되는 밀쳐버리는 그것을 희석해서 예수님의 종말론이 전파되지 않도록 강력하게 방어선을 치는 인간적인 종교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래드의 종말론 자체가. 안 읽어봤지요? 하도 래드를 이야기하니까 읽어보지도 않잖아요.
예수님의 종말론의 특징을 왜 여기서 이야기해야 되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종말론이 인간의 종말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개인의 종말론에서 나온 게 아니고 예수님의 종말론을 받아서 한 거예요. 사도 바울이 자기 이야기한 것 아닙니다. 주님께 받은 계시를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알았던 예수님께 받았던 종말론을 알려면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시간이 흘러간다면 여기에 구약이 있고, 여기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있고 사도 바울이 있잖아요. 사도 바울의 종말론을 하려면 앞에 있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종말론을 이야기했는지를 알아야 된다. 이걸 알려면 구약에서 어떤 종말론인지 알아야 된다. 서로 다 연관돼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복음에서 인간의 종말론을 가지고 예수님의 복음을 해석한다든지 인간의 종말론 가지고 구약을 해석해버리면, 이것은 사도 바울의 종말론 이야기할 때도 똑같이 오류가 됩니다. 잘못된 해석이 돼버려요.
제가 지난 오후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니까 제 아내가 ‘당신 오후설교에서 내가 상당히 찝찝하게 그냥 넘어간 게 있더라. 아말렉이 왜 다 죽어야 되느냐를 설명 안 하느냐?’ 그래서 ‘당신은 내 말을 오해하였도다.’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아말렉이 한 명이라도 살아야 될 이유가 있느냐’라고 질문을 반대로 해야 돼요. ‘왜 아말렉은 젖먹이까지 소와 양과 낙타, 어린애까지 다 죽어야 되느냐’라고 질문을 던질 때는 그 기준점이 뭡니까? 아말렉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너무 심하다. ‘왜 아말렉을 젖먹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학살해버리느냐’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왜 사울 왕은 아말렉을 다 안 죽이느냐? 당연히 죽어야 될 건데 왜 다 안 죽이지. 이 나쁜 사울 왕. 이런 관점에서 질문을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소위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공감대를 느끼죠. 아말렉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둘 다 별 볼일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려주시고 그리고 아말렉을 조지는구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모르겠다. 왜 아말렉을 젖먹이까지 젖먹이도 인격체인데 왜 죽이느냐?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데 바로 그 동질감을 사울 왕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사울 왕이 아말렉을 안 죽이고 제물에 필요한 양들, 그러니까 실용성으로 아말렉을 다뤘던 겁니다.
다시 설명할게요. 종말론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종말론이 있고, 예수님의 종말론이 있는데 래드가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의 종말론은 전혀 모르고 인간의 종말론을 여기에 써 놨다 이 말입니다. 인간의 종말론을 뜯어보니까 인간은 이렇게, 이렇게 실패해야 되는데 예수님의 은혜로 부활에 성공했다. 그리고 안 믿는 사람은 마지막에 전부다 멸망당하고 믿는 사람은 부활과 영생에 들어간다. 라는 인간 위주의 종말론을 여기에 다뤘다 이 말이죠. 그 자체는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종말하곤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란 말이죠. 제 말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 종말론을 이야기했지 인간 편에 서서 종말론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인간은 실존적으로 태어나서 건강할 때 노력하다가 병들어 죽잖아요. 이 종말론은 누구 종말론입니까? 이걸 부추기는 게 불교지요. 석가모니가 그렇게 했잖아요.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말이죠.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이런 인간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줄 것이고 예수님은 어떤 보탬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그 바탕 자체가 예수님의 종말이 아니고 자신이 느끼는 자기 종말을 어떻게 해결해 보겠다는, 예수님을 이용해보겠다는 그러한 일방적인 종교성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전부다 그래요. 종말론 읽어보면 다 그래요.
그러면 예수님의 종말론은 어디서 나오느냐?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종말론을 받았지 인간 종말론 안 받았거든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지금 전쟁 중이잖아요. 누구하고? 공중 권세 잡은 악령과 전쟁 중 아닙니까? 악령이 이걸 이야기해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지금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은 반드시 악령과 싸우게 돼있고, 악령이 왜 인간들의 실존적인 종말을 주장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한 종말론을 전파되지 않기 위해서 그걸 대체물로 ‘너희들은 예수 믿으면 부활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면 아마 기존의 신학자, 목사들은 화 많이 낼 거예요.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예수님 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은 그렇게 해놓고, 신학은 그래 나오더라 해놓고 항상 느낌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 편이라는 게 느낌으로 오잖아요. 그래서 이번 시간이 이 둘 차이가 어떻게 나며, 차이를 통해서 사도 바울의 종말론이 뭐냐? 규명해 보자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종말론은 예수님의 종말론에서 나왔고, 예수님의 종말론은 구약과 복음서, 바울과 제자들의 편지들로 돼있다면, 구약의 종말론이 복음서의 종말론으로 들어왔고, 복음서의 갖고 있는 종말론이 사도 바울에게 줬다 이 말이죠.
그러면 구약의 종말론은 끄집어서 이야기한 게 제가 아까 주일오후에 설명했던 아말렉 완전히 작살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 아내가 물었던 거예요. ‘왜 아말렉은 젖먹이도 다 죽어야 되느냐?’ 이 질문 자체가 뭐가 포함 되어 있느냐 하면, 젖 먹는 젖먹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이느냐, 이 말 아닙니까?
그게 관점이 같은 아말렉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으니까, 가재는 게 편이라고, 가재와 게는 분명히 다르지만 같은 옆으로 기는 종류니까 같은 편이라고 뭔가 옹호 쪽으로 나오더라 말이죠. 그런 인식이 뭘 거부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심판과 종말 자체에 대한 반발의식이 인간내부에 악령에 의해서 스며든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복음서에 들어가면 유명한 비유가 나오지요. [피]라는 책에 보면 나오지요. ‘무화과나무 저주’ 여기서 제자들이 기겁을 하는 거예요. 열매 맺을 때가 안됐기 때문에 열매가 안 맺었을 뿐이다 말이죠. 입이 있다고 말하죠. 무화과나무가 입이 없어서 그렇지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실험해 보세요. 가을에 맺히는 사과나무한테 가서 봄에 와서 ‘나무야, 사과 먹고 싶다. 어! 사과가 없어’라고 할 때 그 당하는 사과나무가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이것은 아말렉의 젖먹이를 칼로써 이스라엘 군사가 쳐 죽여 버릴 때 ‘앵앵’ 울면서 산후조리원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가 난데없이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서 단칼에 모가지 날릴 때 말을 못해서 그렇게 그게 얼마나 처참한 심경이겠느냐 말이죠.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종말론을 누가 접근 못하느냐 하면, 인간이 접근을, 해석을 못해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 자기 종말론이 따로 구축돼있기 때문에. 그 종말론은 뭐냐 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 항상 나 위주.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를 다시 풀이하면, ‘나는 어떻게 하면 나중에 잘 될 수 있는데요’라는 질문이거든요.
‘잘 된다’는 의식이 인간내부에 남아있는 이상은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하나님의 취지에 대해서 반발하고 있다는 거예요. 강력하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추방시킨 것은 잘못된 처사라는 것은 자신도 이해 못하는 가운데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거예요. 우리가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 부당한 조치를 받고 있다는 것, 그게 항상 응어리져있어요.
적어보겠습니다. 마음속에 응어리가 이것이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종말론에 기대를 걸게 하는 겁니다. 강 씨 집안에 살인자가 자신 속에 뭔가 응어리가 있어요. 화양산에 불 질렀던 모인 이만 명의 그 사람들 응어리가 있다고. 뭔가 가슴 속에 모든 인간은 응어리가 있는 거예요. 그 응어리가 악마가 심어준 하나의 위암 조직이고 암 조직이란 사실을 본인들은 알 길이 없어요. 알았다고 해도 할 수 없죠. 자기 운명이니까. 평생 내가 담고 있으니까.
알 수 없는 응어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이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말론에 대해서 이걸 자꾸 뭔가 억제하고 반발하고 그걸 공격하는 그런 성향을 지닌 종말론을 사람들이 포기를 안 합니다. 성경을 볼 때 이미 응어리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내가 성경 보고 난 뒤에 내 응어리와 스트레스가 어떻게 풀리느냐? 아, 이래서 풀리는구나’ 하는 것을 이것이 만약에 그런 관점을 가지고 본다면, 그 신학은 전부다 오류가 돼요.
그 오류 중에 하나가 래드가 쓴 종말론 쭉 읽어보면 그런 오류가 되는 겁니다. 여기 제목을 읽어볼게요. [중간상태] 이거는 성경에서 말하지도 안 했어요. 그런데 중간상태 집어냈어요. 자기가 뭔가 하나 걸쳐야 자기 구원받는데 이해되기 쉽게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라. [죽은 자의 수면], [그리스도의 재림],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 그 다음에 [불법의 비밀], [이스라엘의 완악성과 최종적인 구원], [부활의 증거], 유대인들의 아직까지의 관심사 [심판], [최후 성취]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은 이런 종말론을 했다고 사도 바울의 서신서 구절들 쫙 끌어다 도배를 해놨어요. 얼른 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다 틀렸어요. 하나도 맞는 게 없고 다 틀렸어요.
자기 속에 있는 기본적인 종말론이 지적당해야 되는데 지적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구절을 잡아당기다보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 위에 말씀으로 도배를 해서 그렇게 되면 이 도배된 것으로 자기가 구원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겁니다.
오후예배 설교도 그렇게 했습니다만 아말렉 전쟁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의 진격이에요. 간단한 겁니다. 하나님의 종말론, 예수 종말론 간단한 거예요. 인간은 에덴동산 밑에 쫓겨났고, 하나님은 위에 하늘나라에 있잖아요. 하늘나라 하나님 사시고 인간은 여기 살 때는 문제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여기 들어올 때는 이름으로 들어오시거든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일하는 거니까. 하나님께서 이름을 앞장세워서 일 해버리면 이 자체가 종말입니다.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왜 죽입니까’ 하지 말고, ‘왜 죽일 자를 만들어내십니까’ 질문해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왜 죽일 자를 만들어내십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되지 ‘왜 나를 죽이십니까’ 이러면 안 돼요. 하나님게서는 만들어내고 죽이고, 만들어내고 죽여요.
주일날 오전에 평소에 잘 안 하던 이야기가 튀어나와 버렸어요. 뭐냐 하면, ‘사람이 죄 짓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윤덕여 집사님 한 분이 ‘아멘’ 했어요. 그게 뭔 뜻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이렇게 살기 힘든데 죽어서 좋은 데는 가야 되겠는데 어떻게 좋은데 갈 수 있습니까? ‘ 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안중에 아예 없는 선입감이에요. 없는 이야기라니까요. 그거는 우리 태생이고, 우리 본성입니다. 그걸 감추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사람이 본성과 태생을 어떻게 감춥니까? 아닌 척 해도 다 드러나는데.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는 내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습니다’라는 것을 본성이고 태생이니까 고백해야 돼요. 고백을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인정해주는 게 아니다. 이건 내 성깔대로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제가 성깔대로 살라고 하니까 ‘예수 믿겠다’ 하는 것도 포함되는 걸 몰라요. 자기가 술 먹는 것만 성깔로 보지 내가 겸손하게 낮춰서 예수 믿는 것도 성깔인 줄 몰라요.
주의 이름이 하늘에 계시지 않고 지상에 내려왔다는 자체가 이미 지상은 뭐가 시작됐습니까? 주의 이름에 발밑에 뭉개야 되고 그때 오야봉이 누구냐 하면, 주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주의 원수는 누구의 원수는 아니다? 나의 원수는 아니고 우리 인간들의 원수는 아니에요. 아말렉의 원수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도 아니에요. 그거는 몰라요. 사람들은 자기 원수를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은 실존적이기 때문에 자기 원수만 신경 쓰지, 자기 돈 떼어먹은 인간만 신경 쓰지. 인류 전체가 주님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몰라요.
이렇게 생각해요. 인류 중에서 주의 원수 따로 있고, 주님께서 옹호하는 사람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 중에서 그런 인간 없어요. 모두 다 원수 된 자에요. 로마서 5장에. 모두 다 원수 됐는데 문제는 본인이, 사람들이 그걸 못 느끼고 있다는 거예요. 왜? 바리새인 보세요.
바리새인 보고 주께서 좋게 이야기해서 계몽해서 하면 돼요. 한데 바리새인 보고 ‘너의 아비는 마귀고 너는 화 있을진저 저주 받을 것이라’란 말을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안 되지요. 전도가 안 되잖아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미운 이유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식으로 개뿔도 모르는 게 자기가 여호와 말씀 지킨다고 앞에 쫄랑대니 ‘너의 아비는 마귀’란 말이 맞아요.
그 사회에서 간통하는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서 강력한 법을 제정해서 간음한 현장에서 돌로 죽인다? 이게 뭐가 나쁩니까? 일종의 경찰이었는데. 예수님한테 질질 끌고 와서 ‘예수여, 당신이 자꾸 우리 일에 방해하는데 말세에 보니까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할 거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다 갔다 이 말이죠. 감히 죄 있는 자가 왜 율법을 쫄랑대고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죄가 뭐냐’를 몰라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를 죄인이라고 할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의(롬1:16)와 안 맞아 떨어질 때 이유 없이 무조건 한 쪽이 의면, 이게 충돌되면 이유 없이 죄가 되고, 죄가 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의에 의해서 젖먹이까지 진멸되어서 이것이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자기 업무에요. 죄를 진멸하는데 그 진멸 중에 아말렉의 아무것도 모르는 젖먹이가 들어있는 거예요.
어려운 것 쉽게 해봅시다. 무화과나무가 그게 죄악 된 나무입니까? 아니지요. 그리고 그 무화과나무가 지난해에 제 때에 열매 맺었지요. 그리고 재작년도 열매 맺었지요. 문제없지요. 그리고 예수님 만났던 무화과나무도 그 현장에 문제없지요.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때가 되면 과실 맺을 뿐인데 예수님께서 과실을 내라 했는데 과실 없잖아요.
그러면 아무리 봐도 문제없고, 자기가 봐도 문제없고, 사람들이 봐도 문제없는데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저주를 하니까 비로소 무화과나무는 멸망당해도 싸다가 등장했잖아요. 예수님의 이 논리를 수용을 못하는 거예요.
윌리암 오캄이라는 사람 알지요. 그 사람은 감을 잡았어요. ‘주님의 지시에 따라 간통한 것은 죄가 아니라’ 했습니다. 그 깊은 뜻을 알아야 돼요. 주님이 지시하면 간통이 아니고, 주님이 지시한 간통을 했다고 그걸 간통이라 한 것이 마귀 새끼들이에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성경을 볼 때 기본적으로 예수님 안목으로 보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죄로 충돌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성경을 볼 때 문자로 보지 말고 영으로 봐라 했단 말이죠. 고린도후서 마지막 대목에 그 영을 뭐로 인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거든요. 그냥 ‘영’이라 하면 또 예수님 빼고 성령이 따로 온 줄 알지만, 예수님이 하신 공로와 예수님의 안목으로 보라 이런 뜻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 받았잖아요. 성령 받고 난 뒤에 설교를 하니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가 죽기 직전에 한 설교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 절대로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사람이 행한 것 중에도 하나님께 영광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그러니까 죄에서 의가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을 성령 받은 스데반 집사는 이걸 거부해버린 거죠.
죄에서는 죄가 나오고, 의에서만 의가 나오지 죄에서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듯이. 우리나라 속담에 있잖아요. ‘콩 심은 데서 콩 나오고 팥 심은 데서 팥 나듯이’ 죄에서 어떻게 의가 나오느냐? 이런 논리는 잘못됐다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하는 말이 바르게 하면 바른 의가 나올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 말이 아니고 바른 게 나올 게 없다는 거예요. 인간에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람에게 율법을 준 거예요.
로마서 4장 15절 누가 읽어보세요.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죠. 진노를 이루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다 이 말이죠. 인간이 새삼스럽게 의가 아니라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 속에 진노 받을만한 하나님께 화딱지 받을만한 것들이 막 쏟아져 나온다 이 말이죠.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이 없지요. 그러면 율법이 없는 곳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모든 것은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시편에 나오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었잖아요. 법이 다 있잖아요. 그 법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진노도 같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약속을 먼저 주고 난 후에 430년 뒤에 하나님이 율법을 준 것은, 아브라함의 그 의가 결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로마서 4장 그 뒤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일한 것도 없이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경건치 않은 아브라함, 일한 것도 없이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용서받았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아브라함은 의를 행할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뭐로 남아있어야 돼요? 죄인으로 남아있어야 되고, 용서가 돼야 구원될 사람으로 남아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죄가 없다 하면 안 돼요. 아브라함은 일했다 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일한 것도 없고, 아브라함은 죄만 지었는데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뭐냐 하면, 그가 지은 죄가 있고, 일한 것도 없지만 그것을 용서를 받은 점에서 무엇의 조상이다? ‘믿음의 조상’이다 이 말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취지를 아브라함에게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 후손들, 온 인류에게 똑같은 원칙을 적용시키겠다는 겁니다.
그 적용시킨 것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과 아말렉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의 대표자, 산 밑에 가서 칼싸움한 사람 누굽니까? 여호수아죠. 여호수아 장군이 열심히 칼싸움했잖아요. 그게 오늘날 우리 모습이죠. 또 우리가 그래야 되고.
‘가만있으라 내가 구원한다’ 해서 사람들은 가만있는 걸 생각하는데 가만있는 게 아니고, 여호수아는 칼질하면서 가만있는 거예요. 가만있는 모습이 역대기에 보니까 다윗은 군대를 모으면서 그게 무슨 원리다? 가만히 있는 원리에요. 왜냐하면 열심히 여호수아 장군이 칼질을 했는데 구원은 어디에 되나? 모세의 지팡이로 되잖아요.
그걸 통해서 이스라엘은 뭘 느끼느냐 하면, 특수성.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안 최초의 민족으로 등장한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이란 뭐냐? 마땅히 죽어야 될 하나님 이름이 오면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우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있어도 안 죽게 된 것이 바로 ‘브니엘’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서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야곱의 얍복 강에서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있어도 우리가 안 죽게 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죄 짓고 우리는 반드시 경건치 않은데 그런데 문제는 ‘저 젖먹이도 죽이는 아말렉처럼 왜 우리는 우리 젖먹이는 안 죽는가’ 질문이 반대로 돼야지. ‘아말렉을 왜 죽입니까’ 하지 말고 우리는 왜 안 죽습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된다니까. 평소에 생활방식이.
사람들이 종말론을 생각할 때는 자꾸 이렇게 생각해요. ‘현재 내가 있다. 어떻게 구원받는가? 있는 내가 어떻게 좀더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가?’ 이걸 염두에 둬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뭘 하느냐 하면, 있을 필요도 없는 내가 왜 아직도 사느냐?
이번에 화양산에서 불났잖아요. 정월대보름. 거기 왜 올라갔습니까? 불구경 하려고 올라간 게 아니고 한 해 실수해서 빌려고 왔잖아요. 정월초하루나 정월대보름에 비는 이유가 뭡니까? 현재 내가 여기 있는데 있는 나를 더 괜찮은 나로 만들기 위해서 빌기 위해서 갔잖아요. 정동진에 해뜰 때 비는 것. 이렇게 보면 안 된다 말이에요. 이것이 나의 종말론이고.
예수님의 종말론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왜 올해로 그만 살고 인생 종쳐야 되는데 아직도 나를 살게 하십니까? 이래 돼야 돼요. 질문을. 그래서 정월초하루 되거든 달보고 비세요. ‘하나님이여, 왜 아직도 저는 안 죽고 있습니까?’ 마땅히 죄 지어서 죽어서 천당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겠지만 하여튼 이 세상에 없어도 될 인간인데 왜 자꾸 아직도 존재합니까? 무엇 때문에 내가 존재합니까? ‘복음을 담기 위해서’라는 응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 해야 돼요. 이렇게 질문이 나와야지요.
그렇게 마음가짐을 ‘아직도 살려주십니까’라고 했을 때 만약 김 집사가 고백하고 있다면, 그때 만약에 같은 교회 최 집사가 뭐라 하느냐, ‘너 같은 인간, 나가 죽어라’ 한다면, ‘아이고, 오랜만에 저한테 합당한 말을 하네’ 평소에 자기 생각이거든.
평소에 나가 죽어야 될 인간, 뭣 때문에 살았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아닙니까. 평소의 생각이 최 집사가 그래 이야기 안 해도 항상 나가 죽어야 될 인간인데 뭔가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아니고 ‘나는 살아야 된다’ 이렇게 한다면, 만약에 최 집사가 ‘나가 죽어라’ 하면, ‘오늘 교회 안 다닌다 죽었다 이게 어디서 내 자존심을 긁어’ 그래서 교회문제가 복음문제가 아니고 교회 모든 문제가 가만 따져보면 자존심에 관한 문제. 그러니까 목사는 골치 아파서 찬송 부르면서 ‘사랑하는 형제~’ 찬송가 백날 불러보세요. 되는가. 자존심이 남아있는데. 안 된다니까.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주는 50명 나왔는데 이번 주는 설인지 20명밖에 안 왔다’라고 하지 말고, 지난주는 50명 되도록 하나님이 하시고, 당회장 되시는 우리 주님이 이번 주는 20명하는 거예요. 다음 주 20명 다 올지 안 올지, 한 명도 안 올지 그거는 목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닌 겁니다. 왜? 목사 자신도 그런 생각하는 그 순간에 목숨이 다 돼서 죽으면 나머지 교회문제는 주님한테 인수인계 되지 자기가 죽은 시체가 돼서 당회장 서겠습니까? 안 된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고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있고, 내가 사는 것은 나는 죽고 죽음에 넘겨짐은 내 안에 날마다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난다.
아말렉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아말렉 짝을 낳아야 될 당사자가 바로 누구냐 하면, 우리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똑같은 그 짝이 되어야 될 텐데 어째서 우리는 왜 아말렉처럼 진멸되지 않는가? ‘아하, 하나님이 우리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그렇구나’라고 모든 공로와 모든 의로움과 존재의 근거를 나에게 두지 않고 주님한테 존재의 근거를 돌릴 때 그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말렉 전쟁의 취지였습니다. 그걸 네가 아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사울 왕은 이스라엘을 누구 소유로 만들었습니까? 자기가 당회장이에요. 자기 소유로 만들었지요. 자기의 왕이란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근거로써 이스라엘 나라를 그렇게 본 겁니다. 자기 자존심을 위한 교회가 됐어요. 나라가 됐고. 목사 자기 자존심을 위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죄라는 것은 의가 안 나옵니다. 그 가운데 뭐가 받았기 때문에? 아까 로마서 4장에 뭘 받았습니까?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자기 딴에 의롭다 하는 것도 율법을 통과해보니까 세상에 의로운 건 하나도 없고 율법이, 죄가 왕 노릇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걸 잠식시키고 그런 줄 알면서도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자체가 하나님 주신 의가 되는 거예요.
용서받아서 의인되는 게 아니고, 이거는 개혁주의신학에서 칼빈이 이야기한 거고, 용서해준 하나님 행위자체가 의란 말이죠. 그걸 칼빈은 몰라요. 루터는 좀 아는데. 칼빈은 인간 챙기는 것만 생각해요. 옛날에 한 때 죄 지었지. 십자가 믿고 난 의인이야. 만날 의를 소유개념으로 봐요. 지금도 계속해서 용서해주고, 용서해주고, 용서해주는 액션, 행동자체가 주님의 실제로 나와 함께 있어서 해주는 주님의 의로운 행동인데. 그게 이름 아닙니까. 이름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요.
그걸 모르니까 이젠 의인되었으니까 의로운 행동을 해야지. 사도 바울의 모든 신학과 편지를 그따위 식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 되었지요. 이젠 성도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지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지요.’ 세상에 이런 거짓말. 성령의 열매가 무슨 열매입니까? 성령의 열매지, 왜 지 열매에요. 그거는 초등학교 애들도. 이명박의 손수건은 이명박의 손수건이고, 내 손수건은 내 손수건이에요.
성령의 열매는 성령님의 열매지 왜 지 열매가 돼요. 지 열매 따로 있어요. 그 앞에 나와요. 육의 열매. 파당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 만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거 아닙니까. 시기와 질투, 미움. 상대방 기도 두 시간 하면 지 세 시간 하고. 그게 시기 아닙니까. 헌금했는데 칭찬 안 해주니까 삐지고, 꽃꽂이 했는데 목사님 잊어버려서 그냥 지나가서 두 번 다시 꽃꽂이 안 하고. 이게 뭐예요? 전부다 시기와 질투 아닙니까. 이게 육의 열매지.
제가 말하는 건 그걸 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안 해도 인간의 본성과 타성은 터져 나오게 돼있는 걸 그게 죄인 줄 알라 이 말입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을 건 털어놓고 ‘아하 이게 바로 죄구나’라고 알면 되는 거예요. 우리 보고 뭐 하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죄인이 뭘 해요. 죄인은 할 것 없어요. 그냥 살려줄 때는 살다가 ‘올해 그만 살아라’ 하면 ‘아이고 주와 함께 거하는 이 행복을 얼마나 기다렸던가요’ 하는 사도 바울처럼 주와 거하고 싶어 환장해 죽으면 그만입니다. 죽으면 천사가 강호순인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종말론이 어디서 나온다? 주의 이름으로 나온다. 주의 이름은 어디 계신다? 하늘에 계신다. 하늘에 계신 분이 곱게 하늘에 계시지 않고 어디에 뛰어내려왔다? 지상에 내려왔다. 이 자체가 종말이다. 거룩한 주의 이름과 지상에는 누구 이름이 있다? 나의 이름이 있다. 나의 이름 또는 아담의 이름 또는 사람의 이름, 인간의 이름이 있다. 따라서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에서 일어나는데 인간의 이름과 마찰할 때 인간은 주의 이름을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적어볼게요. 어려워서.
[나를 위한 구원, 나를 위한 종말이어야 합니다]라는 이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벌이는 종말론과 드디어 충돌을 일으키지요. 대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 충돌 일으키는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왜 나는 구원받았는데 우리 엄마는 구원 못 받았느냐? 나는 교회생활이 재미있는데 왜 우리 엄마는 절에 가고 점치러 다니고.’ 자기 엄마 지옥 가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이것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석가모니 제자가 이야기했거든요. 석가모니 이야기에 나오지요. 어떤 제자가 자기 혼자 낙원 가니까 미안해서 못 가겠으니까 엄마 좀 해 달라 하니까 특별히 봐줘서 엄마를 올리다가 파 쥐고 올라가는데 다른 사람 올라가는 것 발로 차서 자비심을 발휘 못해서 떨어져서 에라, 너도 떨어져라. 둘 다 떨어졌다는.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도 없고, 행함으로 나올 게 죄밖에 안 나오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확실하게 알았어요. 인간은 행함으로 복도 받고 행함으로 저주받는 걸 확실히 알았고, 그 다음에 우리는 행함으로 복 받을 인간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도 확실히 안 거예요. 따라서 저주받아 지옥 가는 것도 아주 마땅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이런 사실을 알고는 자기 관심사가 자기 속에 자기 것만 자기에게 퍼져나가는 짧은 거리에 있는 것만 관심하다가 성령을 받게 되면, 인간은 그대로 있어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아도 마찬가지고 자기밖에 모르는데 관심사가 주의 이름이라는 동그라미, 주의 일어나는 풍선, 그 안에 들어있는 창세기, 요한계시록까지 그 종말론 내용에 드디어 눈치 채는 복을 받게 되죠.
이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고, 통회하는 심령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는 걸 알 때 다윗이 하나도 안 변했어요. 다만 뭘 알았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벌이는 일을 내막을 알고 보니까 자기는 날 때부터 죄인이었고 구원받는 건 주님의 성신으로 주는 주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렇다면 다윗에게 엠비씨, 케이비에스에서 기자가 마이크 쥐고 ‘그럼 다윗, 당신이 말하는 종말론은 뭐요’라고 나온다면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기본적으로 나는 저주받을 죄인이며 내가 지옥 가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구원받는 모든 종말의 일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겠다가 아니라 주께서 어떻게 하시냐에 따라서 이것이 구원되고, 안 되고 결정됩니다’라는 고백을 다윗이 하게 될 거란 말이죠.
그런 고백을 한다는 자체는 여전히 나는 상한 심령이 되어 있어야 되고, 나는 통회한 심령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 번 통회해서 헤헤거리고 쫄랑거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게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어야 주의 이름으로 벌이는 그 일이 부각이 되거든요. 그때 그 사람은 자기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겁니다.
아직 종말론 근처도 안 갔습니다. 지금 기초만 닦고 있는 거예요. 왜 제가 종말론에 바로 못 들어가느냐 하면, 이게 어떻게 어려우냐 하면, 지금 인간이 잘못 되었으면, 예를 들어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었으면 인간만 조져야 되는데 왜 산천초목이 왜 같이 전부다 불살라야 되느냐 결합이 안 되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조선시대 때 삼대를 멸하고 가산을 탕진하고 마찬가지입니다만 다시 아말렉 봅시다. 아말렉 민족이 이스라엘을 겁 없이 덤벼들었다. 어디 감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걸 모독해. 당해봐라. 좋아요. 왜 아말렉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낙타와 양과 그걸 왜 태워야 되느냐 말이에요. 왜 아주 점잖은 짹짹거리는 새 소리, 미련하지만 진실해 보이는 코끼리, 그게 왜 인간의 죄로 인하여 그들이 불태워버리고 같이 멸망해야 되는 겁니까? 생태신학, 환경신학 백날 해도 몰라요. 결합이 안 된다고.
그래서 자유주의신학에서 어떻게 합니까? 자연을 살리고 인간을 포기하는 쪽으로 선회하죠. 완전히 불교, 그렇게. ‘자연은 멸망하지 않는다.’ 이런 쪽으로. 왜냐하면 자연은 성경대로 그때 지구가 불타버리고 모든 게 불타버린다 하니까 문제는 불타는 게 아니고 왜 불타야 하느냐?
그리고 노아방주에 들어갈 때 지구상에 있는 모든 동물 다 집어넣었습니까? 아니에요. 암수 일곱 쌍 선별해서 집어넣었지요. 나머지 코끼리, 여우, 살쾡이는 어떻게 하라고? 집에 강아지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집나간 강아지를 찾습니다’ 해서 애정을 보이는데 그건 어떻게 할 건데?
그게 사람이 자기 종말론만 생각하면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하고 전혀 연결이 안 돼요. 모든 피조물이 다 망하고 다시 창조했다는 이 의미를 해결한 점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종말론에 바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전에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던 인간 속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되는 겁니다.
율법에 의해서 인간이 죄인 되었지요. 어떤 사람은 죄를 지적하면 겸손하다 하는데 어떤 인간치고 죄를 지적할 때 겸손하고 통회할 수 있는 인간은 애초에 그런 능력이 없어요. 다윗이 상한 심령이 와서 회개한 것은 성신이 임해서 그렇지 어떤 인간이든 죄를 지적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게 돼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죠.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지혜가 뭐냐 하면, 십자가라 했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없다. 그것도 참 기분 나쁘잖아요.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을 믿으라 하니까 말이 됩니까? 사람 환장하잖아요. 젖먹이 애보고 ‘너 백 미터 오 초에 뛰면 구원해 줄게’ 이 말하고 똑같은 거예요.
되지도 않는 방법을 가지고 사람 구원하려 하니까 사람들이 가짜가 약자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된다 하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결국 구원하겠는 말입니까, 안 하겠다는 말입니까? 구원 안 된다는 말이에요.
십자가라 할 때 사람들은 십자가를 믿고자 하는 게 아니고, 사람들은 본성이 뭐냐? 십자가를 어리석게 보게 돼있어요. 어리석게 하지 않는 십자가는 가짜 십자가입니다.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그런 쪽으로 십자가가 이야기 돼야 됩니다. 어리석은 정도가 아닙니다. 십자가 이야기하면 여기서 반발이 일어나죠. 반발이 뭐냐 하면, 살해사건,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는 누가 죽였느냐를 봐야 돼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죽였단 말이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 인간이 하고자 하는 최고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이죠.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아마 바리새인 보고 신약성경 지키라 하면 다 지킵니다. 악착같이 다 지킵니다. 최고 의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굽니까? 사도 바울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거고, 자기의 죽음을 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담겨있던 것에 대해서 주께서 알아서 자기를 처단시키는 거란 말이죠. 그러면 그 동안에 자기 속에 있었던 것이 결국 예수님을 또다시 죽이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그냥 죽이는 게 아닙니다. 미워서 죽이는 거예요.
말을 정리해 봅시다. 사람들 속에 뭐가 들어있다? 예수님을 미워 죽겠다는 사실을 본인이 느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십자가나 예수 이야기하면 곧장 ‘미워 죽겠어. 왜 자꾸 나를 건드리는지 몰라. 왜 하나님은 날 편하게 만들지 않고 자꾸 힘들게 하는지 몰라. 내가 예수 안 믿고, 하나님 안 믿으면 되지 나는 나 건드리는 것은 용납 못해’라고 그런 순간이 나올 때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인간과 플러스 자연이 한 운명으로 결합됐다는 사실을 우리가 여기서 짐작할 수 있어요.
10분 쉬다 합시다.